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20:13:20

장태완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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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9E33><colcolor=#fff>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장태완
張泰玩 | Jang Tae-wan
파일:장태완의원.jpg
출생 1931년 9월 13일[1]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신동[2]
(現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65길 78-41[지번])
사망 2010년 7월 26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132호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4][5]
자 / 호 광서(光瑞) / 산남(山南)
재임기간 제7대 수도경비사령관
1979년 11월 19일 ~ 1979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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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9E33><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장석현[6], 어머니 성주 이씨
형제자매 3남 3녀 중 둘째
배우자 이병호[7]
자녀 아들 장성호[8], 딸 장현리[9]
학력 대구공립상업중학교 (졸업 / 24회)
조선대학교 법정대학 ( 법학 58 / 학사)[10]
종교 가톨릭 ( 세례명: 다미아노)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6
최종 당적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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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한국증권전산 회장
제27·28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르메이에르 회장
제16대 국회의원 ( 전국구 3번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0년 ~ 1980년
임관 육군종합학교 (11기)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수도경비사령관
주요 보직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
제26보병사단장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제5군단 참모장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차장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상훈 충무무공훈장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및 초임장교 시절2.2. 고위급 장교 시절2.3. 12.12 군사반란 진압 시도2.4. 전두환 정부 시절2.5. 민주화 이후2.6. 정계 활동2.7. 사망
3. 여담4. 대중매체5. 소속 정당6. 선거 이력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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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군인이자 새천년민주당 소속 전직 국회의원.

2. 생애

2.1. 유년기 및 초임장교 시절

파일:ba00fc2b0405dcd68c1addb837cfded8.jpg
1931년 9월 13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신동(현 구미시 신동) 세월마을 520번지에서 아버지 장석현(張錫鉉, 1904. 9. 23 ~ 1980. 4. 18)[11]과 어머니 성주 이씨(? ~ 1970. 2. 17)[12]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24회)를 졸업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했다.[13]

그는 전쟁 당시 거의 총알받이 취급이었던 육군종합학교 출신 소위 가운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장교였다.[14] 6.25 전쟁 당시 1951년 8월 향로봉 전투에 소대장으로서 참전하여 926고지를 탈환하는 데 기여한 전공을 세웠다.

2.2. 고위급 장교 시절

중령 시절에는 맹호부대 1진으로 파월되었으며, 대령 시절엔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차장 보직에서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하여[15]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과 제5군단 참모장을 역임하던 중, 1973년 4월 윤필용 사건 이후의 근위부대 내 물갈이 덕에 비육사 출신임에도 핵심 보직인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에 발탁되어 2년 3개월간 근무하였다. 출처 이 때 갑종장교 출신인 자신을 깔보고 항명하던 육군사관학교 15기 출신 김상구[16] 방공포대대장을 영창에 보냈다.
1973년 6월 어느 날,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지 2달이 채 안 된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 진지 공사 현장에 순시를 나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별판을 보고 놀란 위병은 뒤늦게야 신호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였는지 장 참모장이 한참 공사판을 걸어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거의 막사 앞에 이르렀을 때야 방공포 대대장 김상구 중령이 나와 경례를 했다.

김 중령은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더욱이 그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나회의 보스 전두환 당시 1공수여단장과 동서 사이로 중견장교 중 실세였다.

김 중령을 앞세워 벌컨포 설치 공사 현장에 가본 장 준장은 울화가 치밀었다. 전방 부대 장병들이 순전히 손발로 하는 일을 중장비로 편하게 하면서 진지의 은폐·엄폐를 위한 잔손질은 적당히 얼버무린 태만한 공사로 보였다. 괄괄한 장 준장은 김 중령의 면전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자존심이 확 상했다.

"저도 4년제 육사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씀을 취소해 주십시오."

김상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었다. 장태완은 어이가 없었다. 애송이 중령이 감히 상급부대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려니 생각이 들자 더욱 괘씸했다. 더 거친 언사가 장 장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놈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17]

그러나, 김상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개 영관 직위가 별을 단 장군에게 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하극상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18][19]

화를 풀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사령관 진종채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고 '겁 없는 하나회 장교'를 징계위에 회부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진종채는 영남 군맥의 후배인 김상구를 징계할 생각이 없었고, 김상구를 보호하기 위해 장태완을 달랬다.

"장 장군. 내일 내가 불러서 기합을 줄 테니, 그만 참아 주시오."

하지만 장태완은 강경했다. 화를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사령관님, 이런 군기 문란한 장교들을 그대로 두고선 함께 못 있습니다. 저를 내보내든지 김상구를 구속시키든지, 양자택일 하십시오."

결국, 김상구는 이 일로 영창에 들어갔다가 전역하고 만다.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출처 관련 블로그 글 파생 커뮤니티 글

11기 이후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4년제 정규 과정을 모두 밟고 학사 학위를 취득한 자신들이 진짜배기 육사 1기라는, 자존심만 센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하나회가 이런 흐름이 강했다. 정작 육사 1~10기는 6.25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반면 11기는 전쟁 와중에도 후방인 부산에서 편히 교육받다 종전 후 임관했는데 말이다. 이들은 육군종합학교, 학군단, 육군사관학교 1~10기를 깔봤다고 한다. 실제로, 하나회 기준에서 껄끄럽던 육군종합학교 출신 장군들은 1985년을 끝으로 모두 예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상구의 손윗동서인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그후 육본 교육참모차장으로 근무하다가 1979년 11월 16일부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에게 수도경비사령관 직위로의 보직 이동을 명받았다.

2.3. 12.12 군사반란 진압 시도

파일:attachment/10120703115115.jpg
10.26 사태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맨 오른쪽 하얀 컵을 들고 있는 사람)이 부임 나흘만인 79년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제33경비단을 초도순시,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현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이 촬영되고 3주 후, 브리핑을 하던 김 대령이 브리핑을 받던 장 소장을 배신한다.
월간조선 1995년 9월호 부록으로 실린 육성테이프 녹음본. 10분 8초부터 장태완의 육성이 나온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비록 국방부 명으로 회군한 윤흥기 9공수여단장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다.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 기울이던 중,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신군부 쿠데타에 불법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수도경비사령부로 급히 달려간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반란군에 의해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전황은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던 중이었다. 기선을 잡고 득의양양하여 자신마저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 측에[20]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고 일갈하고 반란군인 신군부를 제압하기 위해 전황을 어떻게든 뒤집으려 한다. 실제로 반란군에게 전화통화로 한 말이며 절대 후대의 윤색이 아니다.[21]

본인 수기에 따르면, 이때 차를 타고 가는 와중 곰곰이 생각해보니 '국가적 혼란기에 박정희 사조직들이 최규하 대통령이 아직 군을 전혀 장악하지 못한 차제에 전군의 총 군령권자이고 계엄총사령관인 총장님을 제거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쿠데타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 자기와 차에 동승한 조홍 헌병단장에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떠봤더니,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북괴 간첩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딴청을 부렸는데 항목에도 있지만 조홍은 이미 반란군 세력에 가담한 상태였다. 당일 장태완을 만취케 하여 지휘 체계를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는데 일단은 실패한 셈. 또 연희동을 나서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대뜸 "여보, 정 선배!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래요?" 하니 "이게 무슨 소리야? 생명을 같이하자!" 하고 장태완 손을 꽉 잡아 쥐는데 순간적으로 육감을 통해 크게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forcejang.jpg }}} ||
물론 말만 저렇게 늘어놓지 않았고 실제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 당시 수방사의 핵심 전력이자 전차중대가 존재한 30경비단은 이미 반란군 수뇌부의 베이스이자 손발이 된 상태였고 원래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 30경비단으로 가 있었기에 지휘권자 부재로 최고사령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지시로 운용이 가능한 33경비단의 전차 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22] 장태완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시간이 촉박하니 9공수라도 빨리 반란군 수뇌부들을 공격해야 된다"라고 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진압군의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던 9공수에게 "반란군 본거지인 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신군부는 당황했는데 1공수, 3공수 등 반란 공수부대보다 9공수가 교통요건이 더 좋고 서울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어서 이를 가만히 두면 반란에 참여한 공수부대가 오기 전에 30경비단과 보안사 본거지에 들이닥쳐 자신들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태완은 포병대와 연락해서 30경비단과 보안사에 포를 겨누고 명령이 오면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진압군 수뇌부는 너무 순진했는지 최대 실책을 저지른다. 전두환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들은 '반란군부가 1, 3공수 회군시킬 테니 진압군도 9공수를 회군시키자'라는 일명 '신사 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어버린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23]을 내쉬면서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로 하여금 국방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 3공수로 하여금 특전사령부를 공격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게 체포당했다.[24]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고 처절하게 응사했지만 반란군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 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진압군 거점은 수경사만 남게 된다.

이때 신군부에 붙은 박종규 중령측은 김오랑 소령과 가족끼리 모임도 가질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데, 결국 자신의 명령으로 김오랑 소령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 하나회가 숙청되면서 본인도 군복이 벗겨지고 반란군이 되면서 예비역 소장에게 주어지는 예우와 군인연금도 박탈당하고 가난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는데, 김오랑을 사살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있었는지 말년에는 김오랑기업사념회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몰락과 병고는 천벌'이라며 자책하고 죽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 명과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 하나회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국방장관 노재현의 사실상 백기투항하라는 지시, 최후로는 하나회 출신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이 헌병단을 접수하고 수경사 수뇌부에 들이닥치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여 자기 사령관실로 들어간 뒤 자신의 부하이자 배신자인 신윤희에 의해 곧 체포된다.

12·12 당시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

일각에선 이걸 가지고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을 패장이라 폄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안다면 이보다 무식한 소리가 없다. 증언 일단 당시 수경사 내부 통화는 보안사에 의해 감청되고 있었으며 수경사 헌병단과 핵심 전투 병력인 30, 33경비단을 맡은 장세동과 김진영이 쿠데타의 주축이었다. 사실 30, 33경비단은 수경사 배속이었으나 청와대 인근을 방위하였기에 대통령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이 오랜 기간 자신의 직속 라인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12.12 군사반란 시기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 주력 부대들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였다.

수경사 내에서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비전투 부대인 포병단과 방공포병단 뿐이었다. 황동환 수경사 방공포병단장과 구명회 수경사 야포단장은 모두 비 육사출신이다. 역시 쿠데타군에 맞선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이나 33경비단 작전주임 김달연 소령도 마찬가지. 실제 포병단에서는 하나회 장성들이 모여있던 수경사 30경비단으로 포를 조준한채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발사할 준비 태세를 갖췄다고 한다. 다만 30경비단이 경복궁에 위치해 있어 문화재 훼손 우려가 있었으며 청와대, 총리공관 및 효자동 등 주택 밀집 지역 인근이라 실제 명령을 실행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0경비단 내의 초급 장교, 부사관, 사병 등 죄없는 직속 부하들의 피해도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나회는 자신들의 세력인 30, 33경비단을 통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잡고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모르고 그 위에 국방장관은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국군 통수권 대행자가 있는 곳에 포격을 시행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 인근에 유사시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휘하로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가장 먼저 찾았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 준비 명령은 받았으나 국방장관 노재현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공작에 넘어가 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포병연대장 김도수는 쿠데타에 적극 가담해 경춘국도 다리목에 바리케이트를 세워놓고 있었기에 출동했으면 같은 사단 병력들끼리 싸울 판이었으며 사단장 손길남이 출동 명령을 내리면 바로 사살하기 위해 사단장실 앞에 장교들이 권총에 장전하고 대기했다고 한다.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배정도가 제26기계화보병사단 담당 보안부대장 김현과 술 마시다 퍼질러 자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6기계화보병사단이 수경사에 배속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장에 반란군을 진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수여단은 시가전 특화 부대들로 이들을 상대로 보병사단이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고 서울 도심에서 싸울 수는 없다. 이 부대들을 방어용으로 사용하고 반란군에 통제를 받지 않는 9공수를 통하여서 보안사나 30경비단을 터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로도 반란군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오직 9공수의 서울 이동이었다.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로 출동하여 부천IC까지 다다랐던 제9공수특전여단은 전두환 측의 신사 협정 제안에 속은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의 회군 명령에 의해 주둔지로 원대복귀 당했다.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은 갑종(35기) 출신으로 1980년 5월 전투교육사령관 겸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으로 전두환의 광주광역시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진압 요구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밀려난 윤흥정 장군의 동생이다.

당시 상황에서 진압군의 거의 유일한 정예 병력으로 이들을 통하여서 보안사를 타격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반전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었기에 반드시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를 듣지 않는다면 무조건 반란군으로 즉결 처분 대상이다. 그 외 1, 3, 5공수여단은 쿠데타군의 주축이었고 제9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도 사단장이 노태우와 박준병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는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에 발맞춰 제9보병사단 29, 30연대에게 서울로 진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나회 소속인 참모장 구창회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는데 30연대를 맡고 있던 非 하나회 김봉규 대령은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29연대장 이필섭은 군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결국 29연대와 30연대 1개 대대 병력이 휴전선을 버리고 쿠데타에 동원된다.

제2기갑여단은 여단장 이상규[25]가 이건영 3군사령관의 병력 출동 금지 지시를 무시하고 예하 16대대를 출동시켜 쿠데타에 합류했다. 제11기계화보병사단은 국방장관 명령이 없어 출동하지 못했으며 제30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非 하나회 박희모가 보안사에 협력하여 행주대교를 차단하고 구파발 검문소의 병력을 증강하여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라는 육군본부 정식 명령을 무시하고 길을 열어줬을 뿐 아니라 90연대를 쿠데타에 합류시키는 등 한마디로 사면초가였다. 서울을 방위하는 수경사 인근에 수도권 중 서북부( 고양~ 파주 일대)의 방위를 담당하고 상비 사단만 3~4개(1, 9, 25, 30사단)를 가지고 있는 1군단의 군단장이 12.12 군사반란 때 경복궁에 있던 황영시였고 서남부( 인천 및 일대 도서 지역 포함)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장이 함께 있던 차규헌이였다.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지 겨우 24일째였던 장태완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던 야포단을 도강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제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장악하여 여의치 않게 되자[26] 사령부 행정병과 취사병들까지 긁어모아 맞서보려 했다. 그러나 취사병과 행정병을 합쳐도 100여 명이었고 김진영이 수경사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이 보낸 33경비단의 전차 1개 중대를 도로 회군시켜버려 사령부 내에 있던 전차 4대가 기갑 전력의 전부였다. 즉, 현실적인 진압 방법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만약 거기서 싸우기로 했다면 보안사에 의해 수경사 통화가 모두 감청당하는 상태에서 9사단 29연대, 30연대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1, 3, 5 공수여단, 2기갑여단 16대대, 수경사 30, 33경비단을 비전투 병력 100여 명으로 상대하는 그림이 나오는데 이건 개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경기도 서남부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 내에 부대들은 따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군단장이 경복궁에 가서 하나회 후배들 옆에 앉아 있었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수도군단을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였다.

물론 야포단을 동원하면 반란군 수뇌부가 몰려있던 30 경비단을 타격하는 일은 가능했으나, 문제는 그 30단이 있는 곳이 민간인들도 많은 경복궁 일대였다. 이때나 그 후에나 국민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쿠데타 세력과 달리 장태완은 서울 시민들의 안전도 신경써야 해서 몇 안 되는 중화기 사용까지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태완 장군이 동원할 수 있던 화력이 전차 4대, 토우 중대, 3.5인치 로켓포, 106미리 무반동총인데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장애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사용할 경우 유도선이 끊어져 엉뚱한 곳에 떨어질 수 있다며 토우 중대 투입을 반대했다. 박동원 대령은 대신 야포단을 동원해 쿠데타 수뇌부가 모인 경복궁을 타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야포병단장 구명회 대령은 "타격을 위해선 관측 사격을 실시해야 하는데 그럼 시가지가 쑥대밭이 된다"며 반대하고 조명탄만 꺼내두었다. 그나마도 조명탄 추진체가 민가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꺼내놓기만 하고 장전을 못 했다.

이쯤되면 설사 9공수 병력이 중도에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어도 반란군 진압이 가능했을까 싶은 상황이다. 물론 9공수가 먼저 서울에 도착해 30단에 모여있던 반란군 수뇌부를 진압하거나 부대 감청 중인 보안사를 접수하고 납치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만 했다면 진압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잡고 있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하나회 편을 들어도 일단 계엄 상황에서 모든 부대는 계엄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 이를 방해할 보안사 본부가 타격을 받고 계엄사령관이 하나회가 아닌 부대들에 명령을 내린다면 사실상 겜은 끝나는 것으로, 반란군들 입장에선 진압군이 도착하기 전 시간 싸움만 남을 뿐인데 그러면 9공수와 서울 한복판 도심에서 유혈 사태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수준까지 가면 누가 뭐라고 해도 계엄사령관이 명분을 쥐고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당연하지만 군인의 의무를 저버리고 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장교들, 그리고 국방장관 노재현이다. 특히 이 양반은 한남동 공관 근처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인근의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27] 빤쓰런 쳐버리던 걸 겨우 잡아서 육본 벙커로 끌고 왔더니만 부대 출동 명령을 내리기는커녕 어떻게든 진압해 보려던 장태완 소장에게 말로 하라며 적반하장 격으로 윽박질렀던 양반이다. 노재현이 도망가는 대신 신속하게 수기사단, 26사단, 9공수, 11사단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으면 이 사달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란에 성공한 신군부에게 체포된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간의 조사를 받았다. 장태완은 서빙고 분실에 들어서자 마자 이곳이 그 악명높은 빙고 호텔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보안사 수사관이 입고 있던 육군 전투복을 벗고 수감자들에게 지급된 부착물 없는 육군 사병용 민무늬 전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해서 갈아입은 뒤 수사를 받았는데, 수사관이 옆방에 김재규 정승화가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나마 장태완은 감금 및 조사를 받았어도 옆방의 둘과는 달리 고문을 당하거나 반말을 듣진 않았다. 그래도 고된 심문 때문인지 조사가 끝날무렵 장태완의 체중은 70kg에서 58kg로 줄었다고 한다. #

해가 바뀐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장태완은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예편서를 쓰기 직전 전두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전두환이 직접 찾아와서 만났다고 한다. 이때 전두환은 장 선배라는 호칭을 통해 겉으로는 깍듯이 예우하는 척하면서도 장태완이 12.12 관련 경위를 묻자 자기들은 책임이 없고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식으로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장 선배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군단장에 영전시켰을 거라면서 이 모든 일은 장태완이 스스로 자초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고 한다.

장태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올바르고 소신있는 일을 하다가 패하여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와 통탄을 하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가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태완은 자신의 불효를 탓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한 부친에게 "아버님,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이놈을 용서해주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신 어머님과 영생복락을 누리십시오."라며 통곡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1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중경고등학교[28] 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29]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1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30]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31] 아들의 묘비명은 장태완이 직접 썼는데 내용은 이렇다.
故 장성호의 묘.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2.4. 전두환 정부 시절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 산천을 유랑했고 산꼭대기에선 분노를 고함으로 풀고 평화와 민주 발전을 염원했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의 심경에 대해 장태완은 스스로를 "12·12 반란을 막지 못한 국민의 죄인이자 가족 3대를 망친 가문의 죄인"이라고 표현했다. # 참고로 장태완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무남독녀 외동딸인지라 되도록이면 많이 낳고 싶어했지만 당시엔 산아제한 정책이 펼쳐지던 시대라 장태완은 굳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허나 훗날 와서 보면 좀 후회도 된다고.

다만 신군부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장태완을 회유하려 했는지 어쨌는지 공기업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자 이를 수락하기도 했다. 신군부 입장에선 자기들이 보기에도 하극상을 한 거기 때문에 자신들의 뒷날을 위해서라도 다시 포섭할 수 있는 인물들은 최대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또 여담으로 상기한 김상구 건으로 그전부터 사이가 서먹했던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12.12 이전까진 장태완과 큰 원한 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장태완이 해임되고 후임 수경사령관이 되자 장태완 휘하 참모진들을 굳이 대놓고 탄압하진 않았다는 말이 있다. 다만 이후 장태완이 회고하길 자신이 체포되고 조사받다 군복을 벗게 된 1980년 2월쯤 보안사를 떠나기 전 만난 전두환이 장 선배 덕분에 서울이 뒤집어질 뻔했니 어쩌니 나라 걱정을 하는데, 이 소리를 들으면서 순간 이 사람들은 군권 장악 정도가 목표가 아니라 청와대까지 넘보는구나 싶어 아차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같이 반란군에 저항한 김진기 헌병감 같은 경우 반란군들이 설치는 세상이 꼴보기 싫어 군복을 벗고 섬에서 양식업을 하며 두문불출했는데, 훗날 노태우 정부로부터 이런저런 보직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속세와 연을 끊고 조용히 지냈고, 윤성민 육참차장같은 경우 회유에 넘어가 국방장관까지 지내긴 하는데, 정작 96년 전두환 재판 때는 증인으로 나서 군사반란 맞다고 증언해 뒤통수를 날린다. 참고로 한국증권전산(現 코스콤) 대표이사 사장 자리는 주식거래가 활성화된 지금이야 꽤 영향력 있는 자리지만 당시에는 증권시장이 막 태동하던 시기라서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크진 않았다.

아들이 죽은 1982년 이후 어느 날 당시 이한동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연락해 집안에만 있으면 더 속이 상한다며 직장에서 근무를 통해 슬픔을 잊고 집안도 수습하라고 조언을 했고, 장태완도 거부감이 심했지만 가족 회의 끝에 남은 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수락했다고 한다. 때문에 일각에선 장태완이 훗날 조국을 지킨 의리의 참군인 식으로만 묘사되는 것에 약간의 불편함을 보이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도 우린 역사의 증인이니 서로 몸조심하잔 말을 듣던 장태완 입장을 고려하면 부친도 돌아가신 마당에 외아들마저 의문사를 당했는데 전두환이 기세등등할 무렵 어그로 끌려봐야 좋을 건 없기에 일단은 과하지욕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쿠데타의 부당성을 언론을 통해 주장하던 정병주 전 사령관은 1988년 행방불명되어 1989년 변사체로 발견되는 의문사를 당한다. 심지어 정병주를 지키다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마저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법무법인 부산 소속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하나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가 1991년 의문사를 당한다.

장태완은 90년대 인터뷰에서 "12·12 쿠데타의 진상을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할 마지막 임무 하나만 마치고 이승을 하직하겠다는 일념으로 '구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확실한 건 장태완이 죽을 때까지 전두환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후 198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추대됐다가, 1995년부터는 훗날 직원 학대와 사기 분양 사건으로 유명해진 건설 기업 르메이에르로 영전돼 한동안 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32] 물론 르메이에르 관련 비리와 장태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2.5. 민주화 이후


1993년 국회에 나와 직접 심정을 밝히는 장태완.


1995년 방송 출연 영상.

1993년에 < 12.12 쿠데타와 나>라는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영화 <서울의 봄>을 본 관객들의 재출간 요청으로 30년 만에 재출간 되어 판매 중이다.

1994년에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으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어 1994년 4월 26일부터 2000년 3월 15일까지 제27·28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을 지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우며 5·6공화국 정권 비리 및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를 잡아들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이 일어나자 재판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재판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때 증언을 마친 후 두 사람을 향해서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1995년에는 부인 이병호 여사와 함께 아들 장성호의 묘를 방문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아들을 그리며 통곡하는 이병호 여사를 서툴게나마 위로하면서도, 본인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묘를 매만지며 통곡하였다.

2.6. 정계 활동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때 장태완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386세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라고 하기도 했다. 민주당 활동 당시엔 장성 경력을 내세워 국방 분야에서 주로 일했는데, 성향은 민주당 내에선 안보 보수파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도 현실 여건상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신중한 편이었고 #[33],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의 선제 작전으로 북한 해군 경비정 NLL을 침범하자 "북한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았다가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이후 노무현 후보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결정되자 승복하였고 대선 당일 새천년민주당 당사에서 개표방송을 당직자들과 공개 시청하였다. 이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의 분당사태가 일어나자 새천년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에 동참했으나 정작 표결은 미국 방문으로 불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불출마,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2010년 별세할 때까지 민주당 고문직을 맡았다. 2005년 드라마 제5공화국이 유행하자 드라마 내용이 본인 기준 전두환을 미화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회를 비호한 것에 대해서는 12.12 군사반란의 원인이 되었다며 박 대통령을 비판하기도 했다.

2.7. 사망

2008년 폐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를 3분의 1이나 잘라냈지만 수술은 잘 되었고, 이후 <12.12 군사 반란>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2010년 7월 26일 향년 79세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

그런데 장례식장에 12.12 당시 장태완을 배신한 전두환 최측근 장세동이 방문했다.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장세동은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서, 장태완 장군의 직속 부하였다. 장태완 장군이 비록 수경사령관에 취임한지 한 달여밖에 안 되었다고는 하나, 직속 상관과 부하 사이에는 대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는 것이[34] 한국군이다.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직속 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체포를 그토록 망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를 두고 신군부 인사, 장태완 前의원에 '화해의 손길'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다른 신군부 인사들은 대부분 안 간 걸 생각하면[35] 그나마 염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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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1년만인 2011년 또 신군부 관련 구설수가 생겼는데, 6월에 숨진 안현태 前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기 때문이다. 묻힌 것도 웃긴데 하필이면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의 묘가 장태완 장군의 묘와 가까이 있었던 것. 안현태는 육군사관학교 제17기로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허삼수, 허화평, 김진영도 안현태와 육군사관학교 동기다. 또한 안현태는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라서 현충원 안장이 거론될 때부터 말이 많았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으로 먼저 구속된 전두환을 지칭하며 "이제 각하를 옆에서 모시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런 인물이 현충원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란 자체도 벌어졌고 5.18 구속부상자회가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36] 앞에서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다만 먼저 세상을 떠난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 묘 옆에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유학성 중앙정보부장의 묘가 있다.(...) 물론 유학성이 1997년에 사망했고 정승화 장군이 2002년에 작고했으니 국립현충원 측에서 정승화 장군의 묘 자리를 잘못 쓴 쪽에 가깝다. 그나마 장태완 장군처럼 신군부에게 맞섰던 강창성[37] 전 보안사령관은 아예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했으니 장태완 장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는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 때문이다. 사면은 받았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으려는 취지에서 비롯된 법안이었는데 19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도 여기에 해당되었던 것. 그런데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법안 적용 방식이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3. 여담

  • 12.12 이후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어진다. 장태완의 아버지는 12.12사태 후 TV 등을 통해 보안사로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곡기를 끊었고, 매일 막걸리만 마시다가 1980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1982년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던 장태완의 아들은 장태완이 강제 예편 당한 직후인 그 해 4월 인동 장씨 재실 근처인 경북 칠곡군 낙동강변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장태완의 부인은 2010년 장태완 사망 이후 우울증을 앓다가 2012년 1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 현재 장태완의 후손은 그의 외동딸 장현리(張玄利), 사위 박용찬(朴墉燦)[38], 외손녀 2명이 남아 있다.
  •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의 휘하 부대장이자 그를 배신하고 하나회의 명으로 전세가 기운 수경사를 접수하여 군사반란을 종결시켰던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전 육군헌병감은 장태완 사망 2년 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불쏘시개에 가까운 을 출판하였다. # 여기서 그는 장태완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사병(私兵) 역할을 충실히 한 바람에 박대통령 시해범을 잡으려고 했던게 장태완의 무모한 명령으로 커진 사건이라며[39], 장태완 소장이 당시 술에 취한 상태라서 무모한 사살 명령만 내려서 장교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 시종일관 자신이 가담한 반란군 세력의 입장을 옹호하며 상관 장태완 탓을 했다. 물론 일방적 주장으로 취했을 확률은 거의 없고 특히 만취했을 확률은 아예 없다. 왜냐하면 김진기 헌병감의 증언에 따르면 술잔이 막 돌려는 무렵 총장의 피랍사실을 들어 술자리가 파했을 뿐더러, 공개된 통화 녹취록을 봐도 알듯 장태완 소장의 군사적 판단은 전부 옳았기 때문이다. 장태완은 정병주 특수전 사령관에게 연락해 반란에 붙은 1,3,5 공수 중 가장 가까운 1공수가 반란군에 합류하기 전에 서울 인근에 있는 9공수로 반란군 수뇌부가 집결한 30경비단을 공격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고 이에 정병주 사령관이 9공수에게 명령을 내려 30경비단 공격을 지시했다는 내용을 감청한 군부 반란세력들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 9공수가 더 빨리 올 수 있는 상황이었고 전차가 있던 30경비단이라 해도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9공수를 막기 힘드니까 전두환측은 국방부와 신사협정을 맺자며 철군시킬 정도였다. 만약 신윤희의 말대로 장태완이 술에 취해있었다면 이러한 판단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신윤희가 낸 책의 시기도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는데 12.12 반란사건 녹취록이나 증거들도 있는데다가 가장 생생한 증인인 장태완 소장이 2010년에 사망하고 2년 뒤인 2012년에 출간,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 반박할 당사자가 없으니 허위사실로 점철되어있고 장태완 소장이 살아있었다면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적시로 고소해도 정당방위에 가까울 정도다. 즉, 고인이 살아있을때는 고소당할까봐 조용히 있다가 죽고 잠잠해지니까 역사왜곡을 저지르려 한 것이다. 신윤희가 하나회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선 언론 기사마다도 좀 내용이 다른데, 일단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제3자 운운하기도 했으나, 애초에 상관 배신하고 반란에 가담했다는거부터가 하나회와 적극 협력 관계였다는 소리라 별 의미없는 말이긴 하다. 참고로 신윤희는 1996년 1월 구속 기소되었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열린 12·12 사태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모의 참여 주요 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최종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이후 사면되었다. 징역이라는 실형을 받은만큼 군인연금 수령이 박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5.18 관련 왜곡, 망언을 일삼아온 유사역사학자 김대령도 이 책을 근거로 '장태완 장군은 김재규의 부하이며 12.12 군사반란은 오히려 장태완 장군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식의 황당한 발언을 했다. 물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걍 개소리다. 더욱 기가 막히고 안타까운 사실은 책이 나온 다음 날(2012년 1월 17일[40]) 장태완의 부인 이병호 여사가 유서를 남기고 투신해 서울 대치동 아파트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인데도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라갔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지만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정권을 잡아버린 바람에 장태완의 승진 기회는 영원히 올 수 없었다.
  • 평소 장태완은 부하들의 체력 단련에 매우 신경을 썼으며 힘들고 빡센 훈련을 많이 시켰으나 훈련 성적이 좋고 체력이 우수한 병사에게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둑한 포상들을 주었다. 반대로 체력이 부족한 병사들을 엄하게 질책하여 어떻게든 체력을 끌어올렸다. 칼바람 부는 한 겨울철에도 부대원 전부 웃통을 벗고 연병장에서 구보를 했지만 장병들이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태완 본인도 병사들과 함께 직접 웃통을 벗고 뛰었기 때문이다. 인간 장태완은 반대로 자상했는데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장태완이 육군 소장인데도 일개 병장의 풀어진 전투화 끈을 몸소 묶어주며 격려하는 모습이 나왔다. # 다만 군필자들은 그 장면을 보고 저 병사는 군생활 꼬였다면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도 그럴것이 저 장면은 일견 훈훈해 보일수 있지만 역으로 말하면 복장이 불량한 걸 장성급 지휘관에게 걸렸다는 뜻도 되기 때문. 거기다 그 지휘관이 몸소 신발끈을 묶어주기까지 했으니 직속 부대 영위관급 장교들이나 하다못해 부사관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여도 할 말이 없다... 저 병사 계급이 병장이라 다행이지 일병급이었다면 선임 병사들의 갈굼도 추가된다. 특히 80년대는 부대 내 구타나 부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던 때이니...
  • 장태완의 휘하에서 군 생활을 했던 사람의 회고록이 있다. 장태완이 26사단의 사단장으로 취임한 후의 변화에 대해 당시 26사단에서 복무한 사병의 시점으로 쓰여 있다.[41] 회고록의 내용이 조금 길기 때문에 내용 몇 가지만 요약해서 기재한다.
    • 1970년대 많은 짬밥은 그저 똥국에 오래 묵은 정부미로 지은 푸석푸석한 밥, 고춧가루도 제대로 넣지 않은 허여멀건한 김치, 고기는 흔적도 안 보이는 고깃국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장태완이 부임한 후 26사단 사병 식당에 나오는 식단이 엄청나게 개선되었고, 건더기 푸짐한 소고기국에 제대로 튀긴 생선 튀김, 계란찜, 깻잎무침[42] 등을 비롯한 당시로서는 중산층 이상이나 먹을 반찬이 심심치 않게 나오면서 병사들은 만족스럽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만큼 장태완이 휘하 병력에게 돌아가는 식단을 눈여겨봤다는 얘기다. 심지어 종종 불시에 본인이 직접 대대를 방문해서 대대 식당에 들어가 병사들과 같이 식사를 했기 때문에 급양관 가라 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 장태완은 조금이라도 사병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높이려고 매우 노력했다. 회고록에는 체력 검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병사를 그 자리에서 바로 포상 휴가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26사단에서 매주 수요일은 체력 단련의 날로 부대간 체육 경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경기의 치열함이 장태완의 부임 후 달라졌다고 한다. 좋은 성적을 낸 부대는 그 날은 막걸리 돼지고기로 포식하고 여유로운 저녁 점호를 했지만, 반대로 처참한 성적을 받은 부대는 초주검이 될 정도로 얼차려를 받았다고 한다.[43] 장태완은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요구했지만 별 2개 달았던 본인도 같이 굴렀기 때문에 병사들은 힘들어하면서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 부하들에게 엄격한 만큼 본인에게도 엄격한 인물로 유명했다. 70이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현역 군인 못지않은 탄탄한 몸매를 유지할 정도의 노익장을 지닌 사람이었다.[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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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당시의 모습.

4. 대중매체

4.1. 다큐멘터리극장

파일:장태완_정운용.jpg
1993년 12월 5일, 12일에 KBS1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극장> '12.12(총 2부작)'에선 배우 정운용[46]이 장태완 역을 맡았다.

사실상 장태완 역할을 최초로 맡은 배우이지만, 프로그램의 형태가 단막극 형식을 취한 다큐멘터리인데다[47] 재연배우보다 MC를 맡은 고원정 작가가 더 유명해서인지 묻혀버린 듯하다. 해당 프로의 드라마 파트는 1995년 12월 9일자 <역사추리>에서도 재활용됐다.

극중에서 30경비단에 모여있던 반란군과의 통화 장면에서는 "좋아! 이놈들 꼼짝말고 거기 있어! 내가 다 짓밟아 버리겠어! 포를 끌고가서 다 쓸어버리고 말거야!!" 라며 일갈을 날렸다.

4.2. 제4공화국

1995년 MBC 특별기획 <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이영후가 연기했다. 이영후는 실제 군인 시절의 장태완 얼굴과 가장 흡사하며 특히 장태완 장군 특유의 가래 끓는 목소리와 동남 방언을 잘 재현했다는 평. 다만 김동현, 김기현보다는 위압감이 다소 떨어진다.
얘기?! 얘기는 무슨 놈의 얘기를 하란 말이고! 역적 놈들캉! 오야, 좋다! 거 딱 기다리고 있거래이! 내 땡끄를 몰고 가가 마 쌱 쓸어 뭉개뿌고 말끼라!

(표준어 버전) 이야기?! 이야기는 무슨 놈의 이야기를 하란 말이냐! 역적 놈들하고! 오냐, 좋다!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탱크를 몰고 가서 싹 쓸어 뭉개버리고 말겠다!
하지만 출격 직전 부대원들을 앞에 두고 훈시하는 장면은 누구보다도 호소력이 일품이다. 이영후는 김기현이나 김동현처럼 '위압스러운 연기'가 아니라서, 오히려 효과를 발휘한 장면.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장면은 동지들을 잃고[48]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부분인데, 특히 가장 마지막으로 전두환 일당에게 포섭된 헌병부단장 신윤희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지르고 자신을 쏘라고 하는 장면이 백미이다.
장태완: 자... 여기 별이 모두 몇개입니까? 똥별입니다! 똥별!

4.3. 코리아게이트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 코리아게이트>[49]에서는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다. 장태완의 불 같은 성격과 경상도 사투리도 잘 재현했고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는 <제5공화국>의 김기현마저 압도한다. 특히 마지막에 50명 남짓 남은 자신의 부하 장교들을 모아놓고 훈시하는 장면, 국방장관 노재현의 "상황 종료하라."는 명령을 받고 복명복창하는 장면이 백미. 12.12 군사반란을 다루는 회차의 마지막 컷은 항상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리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전화로 외친 대사는 흔히 알려진 대사(<제5공화국> 기준)와 거의 유사하지만 비슷한 대사를 2번 연타로 날린다.
(1분 14초 부터)
유학성: 어 장 장군이오? 나 유학성이오!
장태완: 아 선배님! 남의 부대 와가지고 여러명 모아놓고 무신 작당하는 거요? 네?! 그런 총장님한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 총장님 납치해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냔 말이요? 그 여러말 하지 말고! 빨리 저 총장님 원 위치로 돌려보내 주시요!
유학성: 어이 장 장군,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일로 와. 일로 와서 우리랑 얘기 좀 하자고.
장태완: 야 이 반란군놈의 새끼야! 니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내 말야 전차 끌고 가가지고 니들 싹 쓸어 버릴끼야 이노무 시끼!
유학성: ...잉?!
황영시: 놔봐! 장태완이, 거 왜 그래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 아니야? 아 그러지 말고 30경비단으로 와. 와서 우리하고 같이 일하자고.
장태완: 아 형님, 정 총장을 잘 모시라고 충언해준 사람이 누굽니까? 정 총장이랑 제일 친한 사람이 형님 아이요! 그런 사람이 납치극 연출할 수 있어요?! 거 아무소리 하지 말고 정 총장 저저 빨리 저 원 위치로 복귀시켜 주시요! 그러면은 내 이번 일 아무 일도 없는 걸로 처리하겠십니더.
황영시: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야.
장태완: 그래 좋아, 이놈들아! 니들 말이야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내 포 끌고 가가지고 느그들 다 그냥 싹 쓸어 버릴끼야 이노무 시끼야!

참고로 장태완 장군이 유학성, 황영시와 통화하는 장면은 이 버전이 실제 장태완 장군의 증언과 가장 가깝다고 한다. 또한 통화하는 순서의 고증도 잘 맞는다. 제5공화국에서는 먼저 황영시 → 유학성 순서로 나오지만, 장태완 장군의 전화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실제 순서와 대사 내용은 그 반대.[50]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실제 순서대로 잘 지켰다. 황영시는 차규헌에게도 전화를 바꿔주려 했지만 장태완 장군은 듣지 않고 끊어서 차규헌은 현장에 있던 중장들 중 유일하게 장태완과 대화를 못한 중장이 되었다.

이때 김동현 버전의 연기 덕에 장태완이라는 이름이 일반인에게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방영 후 '장태완의 인기는 서태지와 맞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화제가 되었으며 언론사의 인터뷰가 쇄도했고 당시 현직 대통령이였던 김영삼이 이원종 정무수석을 보내 격려하기도 할 정도였다. #

4.4.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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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당시 장태완의 행적을 자세히 묘사한 데다가 담당 배우의 호연까지 더해지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작품이다.

4.5. 서울의 봄

장태완이 주연으로 나오는 첫 영화. 한국사에서 제일 유명한 장군인 이순신의 이름에서 성과 마지막 글자를, 장태완의 가운데 글자를 가져온 이태신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며[51] 배우는 정우성이다.

덕장 & 용장 스타일의 괄괄한 모습으로 주로 묘사되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이 영화에서는 FM 스타일로 등장하며 사투리도 분노할 때 빼고 쓰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사투리 연기는 그 지역 출신이 아닌 이상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하기로 유명한 이병헌조차 완벽히 해내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어렵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는 현대 한국어에서 소멸되다시피한 성조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방언이므로 고치기 어려운 만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조차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강원도 사람이나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지, 다른 지역은 매우, 매우 힘든 사투리) 평소 사투리 연기를 하지 않은 데다 경상도 출신도 아닌데다 가족 중 경상도 출신도 없는 정우성이 괜히 어설프게 건드리는 것보다는 분노를 표출할 때 억양을 살짝 변경하는 것 외에는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판단한 듯. 더군다나 이 영화에서는 이태신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하고 내용도 어느 정도 각색되었으니 더 그렇다.

하지만 특유의 포스는 그대로 살려내서 반란군 측의 장성들에게 " 야, 이 뇌가 썩어빠져 문드러진 인간아. 니들이 나라 걱정을 해서 군사반란질을 하고 처자빠졌어? 니들 거기서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내가 탱크 몰고 밀고 들어가서 니들 대가리를 뭉개버릴 테니까.'라며 일갈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김기현의 장포스가 불과 같은, 고함에 가까운 사이다 장면에 가까웠다면 정우성의 장포스는 물과 같은, 차분하게 깔아 뱉은 분노와 쌍욕에 더 가깝다. 특히 안내상이 분한 한영구가 전화를 받을 때는 "형님은 거기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라고 나름 차분하게 따지다가, 염동헌이 분한 배송학이 전화를 받자 "넌 또 누구야!"라고 사자후를 내지르는 장면은 그야말로 분노의 끝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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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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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2005 정계 입문
정계 은퇴


[[민주당(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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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 2007 당명 변경


2007 합당[52]


[[민주당(2007년)|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당명 변경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합당[53]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0 당명 변경
작고

6.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19E33><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019E33>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0,625 (35.9%) 당선 (3번) 초선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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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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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2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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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희 조웅규 윤여준 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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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연합
5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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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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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숙자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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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8월 2일. [2] 인근의 오태동, 구평동, 황상동, 인의동, 양호동, 구포동, 임수동과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장건상, 장세용 전 구미시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당장 본관인 인동 장씨의 인동이 바로 여기다. # 장태완 장군이 직접 쓴 아들 장성호의 비문에 의하면, 장성호의 본적이 구미시 신동 520번지라고 한다. # [지번] 신동 520. [4] 의흥파(義興派) 33세 태(泰) 성(性) 항렬.() [5] 인동장씨대동보 권12 621쪽 참조. 여담으로 정 반대의 위치에 있던 장세동과 본관과 항렬이 같다. 장세동은 남산파(南山派) 33세 세(世) 항렬이다. [6] 아들이 군대에서 퇴출된 것을 보고 술만 마시며 살다 1980년 별세했다. [7] 李炳浩. 1934년 1월 16일 ~ 2012년 1월 17일. 증언에 따르면 남편이 죽고 우울증 증세를 보이더니 몇 번의 시도 끝에 자살했다고 한다. 성주 이씨 이호우(李浩愚, 족보명 이영상(李榮相), 1907. 10. 25 ~ ?. 12. 22)의 딸이다. [8] 1960년 10월 1일 ~ 1982년 1월 17일. 주민등록상 1962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81학번으로 수석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9] 張玄利.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어학과 81학번 출신으로 주민등록 상으로는 1961년생이지만 장성호의 누나이므로 실제로는 1959년 출생이다. [10] 고졸 후 바로 전쟁이 터지면서 임관하여 군인이 되었으나, 1952년 광주에 군사교육 총감부가 설치되고 당시 조선대가 위관·영관 장교 위탁 교육을 하자 58학번으로 입학해 학위를 받았다. [11] 자는 백환(白環). [12] 이원은(李元銀)의 딸이다. [13] 당시 장태완은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갑종으로 분류되어 장교로 임관하였으나 같이 입대하러 갔던 인원 중 중학교 중퇴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을종으로 분류되어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다만 임관 시에는 고졸이 맞았지만 이후 장교 생활을 하면서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서 졸업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대졸이 맞다. [14] 장태완의 몇 기수 후배인 조창호는 그 와중에 전투 도중 조선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매우 오랜 기간동안 수용소에서 생활하다 극적으로 탈북했다. [15] 갑종 출신 중 진급이 가장 빠른 축에 들었다. 소장 진급도 1등이었다. [16] 하나회 소속이며 하나회를 만든 전두환의 손아랫동서로 친인척 관계이고 이순자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17] 장태완 장군이 김상구에게 호통치는 것은 개인적인 악감정이나 똥군기가 아니라 진지구축 공사를 태만하게 하면 적이 쳐들어올 때 방어진이 무너지는 것 때문에 군 기강을 잡기 위해서 호통을 치는 것이다. 건축공사나 군무 훈련이나 감독이나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엄하게 호통치는 것도 생명과 안전을 담보해야 하는 중책이기 때문에 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뜩이나 방공포 그중에서도 벌컨같은 저고도 방공포는 진지의 은엄폐가 목숨줄이나 다름없는데 이걸 엉성하게 했으니 욕을 안먹는게 더 이상한 것이다. [18] 장태완 장군은 초급장교일때는 6.25 전쟁, 영관급 장교일때는 베트남 전쟁의 참전용사였고 전쟁영웅이었으니 김상구가 하극상을 저질러도 아주 단단히 저지른 미친 짓을 한 것이다. 당장에 미군에서 이런 미친 짓거리가 벌어졌다간 군적 박탈은 기본이고 어디를 가도 사회생활 절대 못할 망신스런 일이라 외국으로 도망쳐야 할 대사건이다. [19] 사관학교 출신들이 군사학을 전문적으로 받긴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확실히 다르다. [20] 물론 장태완도 정승화 총장만 원위치로 보내주면 없었던 일로 처리하고 언론에도 퍼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신군부를 상대로 회유 시도를 하기도 했다. [21] 밑에 보면 알겠지만 신군부 측을 가리켜 "반란군 놈의 새끼"라고 말하며 "전차 몰고 날려버리겠다"는 것도 수기에 있는 내용인 "이 반란군놈의 새끼야! 너희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 죽일 테니!"에서 조금 자극적으로 바꾼 것 뿐이다. [22] 하필이면 주력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30, 33경비단장이 장세동, 김진영으로 당시 모두 반란에 가담해 있었고, 33경비단은 김진영이 30경비단에 있는 만큼 부재중이었던지라 33경비단은 사령관 명에 따라 경복궁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부대장인 김진영이 오해가 있을 것이라면서 필사적으로 입을 놀린 끝에 이에 낚인 전차부대가 회군하면서 9공수 회군과 함께 진압군에게 가장 안타까운 순간으로 꼽히게 된다. [23] 노태우는 이 당시 9공수가 신사협정을 믿지 않고 보안사와 30경비단에 들이닥칠때를 대비해 권총에 실탄을 장전해두고 유사시에 자결하려 했다고 한다. [24] 정병주 사령관은 전두환이 1공수 여단장할 때에도 특전사령관이었으며 1공수 여단장 박희도는 1978년 1공수 위수 지역에 무장공비가 돌아다니다가 귀환한 사건으로 보직해임 될뻔 한 것을 육군참모총장에게 정병주 사령관이 빌어서 자리를 보전했음에도 이때 무참하게 체포하였다. [25] 육사 12기 하나회 [26] 먼저 제1한강교로 향했으나 막혀서 행주대교로 갔지만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 열어준 길로 들어온 제1공수여단에게 장악된 뒤였다. [27] 2007년 용인시 죽전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한남더힐이 자리잡고 있다. [28] 중경고는 김재규가 설립한 사립고교로 군인 자녀들이 많이 재학했다. 학교가 당시에 서빙고 분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제4공화국(드라마)에서는 장성호가 중경고에 등교하는 모습을 아버지 장태완이 서빙고 분실 창 밖으로 내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중경고는 이후에 공립학교로 전환됐으며 한강중학교와 교사 위치를 맞바꾸어 2023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29] 장태완 왈 집이 그렇게 넓지도 않은데 요원들이 있는데다 술까지 마셔서 취하면 깽판을 부리는 등 그 분탕질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30] 공교롭게도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 근처였다. [31] 시신은 꽁꽁 얼어 눈, 코, 입 외의 모든 구멍에 얼음이 들어차 있었다고 하며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서울로 가는 동안 장태완 장군은 아들의 코와 입에 있던 얼음을 혀로 녹였다고 한다. 차마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끊는 부정(父情)이 느껴지는 부분. # [32] 르메이에르의 역사 등을 볼 때 직접적으로 경영했다기보다는 잠시 얼굴마담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33] 다만 당인으로서 국보법 개정이 당론으로 정해진다면 소신과 다르더라도 따를 것이라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했다. [34] 영관급 위로 올라갔을 경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 계급에서는 무한한 쪼인트와 싸닥션이 있었다. [35] 하나회의 황태자 이종구 전 국방장관이 조문을 하긴 했었다. [36] 현재는 세종특별자치시로 이전하였다. [37]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약한 예로 신군부로부터 탄압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도 동일. 민주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지역구 선거에도 출마했었다. 그런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통합민주당(꼬마 민주당 2기)이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삼김 정치로의 회귀에 반대하면서 이회창 신한국당과 합당을 선언해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공천되며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38] 밀양 박씨로, 박삼원(朴三元)의 아들이다. [39] 이렇게 일이 커진 덕분에 신군부 세력의 내란죄, 반란죄 관련 빼박 증거들도 쌓이게 된다. [40] 장태완 아들 장성호가 실종된 지 딱 30년이 되는 날이였다. [41]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장태완의 전임자들 중에 다름아닌 유학성이 있었으며 1970년대 초에 사단장을 했었다. 심지어 장태완의 후임자는 박희도인데 12.12 군사반란에서 공을 세운 후 임명된 것이라고 한다. [42] 장태완 장군이 평소 좋아했던 음식이기 때문에 지휘관 재량으로 추가시킨 음식이었다. 물론 그 당시 병사들은 언제나 배고팠기 때문에 독특한 냄새가 나는 깻잎무침도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한다. 다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깻잎의 영양학적 가치를 생각해보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후로 군에 깻잎무침은 자주 나오는 반찬 중 하나가 되었다. [43] 다만 이 당시라서 가능했던 일이지 현대라면 명백한 인권 침해이자 가혹행위로 불명예 전역을 당할 수도 있다. 특히 체력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어서 혹독하게 시키고 기합을 준다해서 무조건 나아지는게 아니며, 오히려 몸이 더 망가질 수 있고 용사들의 반발심만 더 커진다. 장태완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정도로 보면 된다. [44] 한편, 군부독재를 미화하는 밀덕 사이트인 유용원의 군사세계 회원들이 이 사진을 보고 얼굴을 전두환으로 오해해서 역시 늙어서도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한다며 찬양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45] 전두환도 암 투병 이전까지 자기관리를 꽤 하였다. [46] 1948년생. 1974년 동양방송 14기 탤런트로 데뷔하여 주로 1980년대 여러 드라마의 주조연급으로 활약했다. 가수 흑태의 아버지이다. [47] 1994~95년 <역사의 라이벌>까진 해당 포맷을 따랐는데, 재연극이긴 하지만 퀄리티가 꽤 높아 그냥 미니 드라마로 봐도 될 정도이며, 캐스팅된 배우들의 클라스도 상당하다. 이는 역사의 라이벌도 마찬가지다. [48]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수경사 헌병단에 피격당한 장면으로 장태완이 체포된 직후 후송되었다 예편했다. 2013년 타계. [49] 인지도가 낮다는 오해가 있지만 실제로는 방영 당시 10.26 사태에서 전두환 집권까지의 전반부는 MBC의 <제4공화국> 못지 않은 화제성을 불러오며 두 프로그램이 시청률 경쟁을 벌였다. 자신을 회유하는 전두환 세력과 답답한 군 수뇌부에 시원하게 일갈하는 김동현의 연기는 큰 화제가 되었으며 실제 장태완 장군이 12.12 군사반란 방영 후 김동현에게 "양아들 삼고 싶다"고 연락할 정도였는데 김동현 또한 이를 감사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50] 대사 내용과 순서는 동일한데 전화받는 순서만 정확히 반대로 바뀌었다. 정리하면, 유학성이 맨 처음 전화를 받아서 장태완에게 "왜 남의 부대에 들어와 있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황영시가 받았을 때 장태완에게 "총장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 형님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51] 사실 해당 영화가 모든 인물들이 다 실명이 아닌 가명을 쓰긴 하지만, 성은 대부분 진짜랑 같거나 이름 글자를 재조합했는데(박희도->도희철, 최세창->김창세), 이태신은 성이 바뀌고 겹치는 글자가 하나뿐인 데서 알 수 있듯 인물상도 감독 스스로 밝혔듯 주요 배역 중 실제와 상대적으로 많이 바뀐 편이며 실제 인물 이상의 참군인의 표상을 극중 묘사하려고 의도해서 영화에서도 광화문으로 진격할 때 이순신 동상이 나온다. [52] 중도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 [53]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