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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 29일 윤필용 사건 관련 재판 당시 사진. 앞 줄 좌측부터 권익현 대령, 지성한 대령, 김성배 준장, 손영길 준장, 윤필용 소장 |
1. 개요
유신체제 시절인 1973년 4월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윤필용 및 육군 장교 13인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숙청당한 사건. 말실수 하나를 핑계로 정치적 유력자를 묻어버린 전형적인 권력 투쟁임과 동시에 전두환이 하나회 수장에 등극한 사건이다.2. 전개
윤필용은 5.16 군사정변 이래 박정희가 가장 신뢰했던 군부 인사였다. 그러나 1.21 사태 당시 방첩대장이었던 윤필용은 김신조의 "박정희 모가지" 발언 때문에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려 방첩대장에서 짤리고 김재규가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김재규는 방첩대를 보안사령부로 격상시켜 군부의 실력자로 떠올랐지만 1970년 박정희로부터 신임을 다시 얻은 윤필용이 월남 맹호부대장을 거쳐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새롭게 군부의 실력자로 떠올랐다.김재규는 경쟁자가 다시 뜨자 윤필용을 견제하기 위해[1] 1971년 6월부터 그에 대한 24시간 동향 보고를 올리도록 하고 수경사령관실에 대한 통신 감청을 실시했다.[2] 박정희의 재가 없이 벌어진 단독행동이었기 때문에 윤필용이 이를 알아채고 윗선에 보고하자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에서 3군단장으로 좌천되고 강창성이 후임으로 부임했다.[3] 김재규가 실각했으니 사실상의 군부 1인자는 자연스레 윤필용이 되었다. 그 위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중구 필동에 있었던 수경사령부는 '필동의 육군본부'로 불렸고 주요 군부 인사가 윤필용에게 인사를 오는가 하면 윤필용 역시 일반인 유력 인사들과 교류하며 권력을 과시했다.
이런 상태에서 1972년 가을 어느 술자리에서 윤필용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박정희 대통령께서 노쇠했으므로 그만 물러나시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한다"고 발언하는 일이 일어났다.[4] 그리고 1972년 11월 청와대 경내에는 '통일정사'라는 사찰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골프 친구였던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풍수사로부터 청와대 경내에 사찰을 세우면 임기 내에 통일된다는 말을 듣고 짓도록 건의한 것.
얼마 뒤 박정희가 골프장에서 신범식 사장이랑 골프를 치다 "항간에 내 후계자 소문이 돈다던데 자넨 누군지 아나?"라고 추궁하는 일이 일어났다. 신범식은 처음엔 대답하지 않았으나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5]이 신 사장 머리에 총까지 겨누면서 이름을 대라고 협박하자 결국 내용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통일정사는 이후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손영길 수경사 참모장이 짓도록 한 것"이라는 보고가 청와대에 올라갔다. 이에 대노한 박정희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였고 결국 대한민국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이 열렸다.
3. 결과
보안사에서는 수경사 사령관 윤필용을 비롯하여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보좌관 김성배 준장 등 장성 3명과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신재기 대령,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지성한[6] 대령, 제26기계화보병사단 76연대장 권익현 대령 등 관련 장교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하며 조사했다. 쿠데타 모의라는 거창한 혐의로 수사를 시작했지만 보안사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하였고, 횡령, 수뢰, 직권남용, 군무이탈 등 쿠데타 혐의에 비하면 잡스러운 죄목들만을 적용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하였고 결국 윤필용과 손영길은 징역 15년, 김성배는 징역 7년, 기타 장교 7명은 1~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뿐만 아니라 윤필용과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으며 중앙정보부에서도 이후락과 가까운 울산 사단 30여 명이 구속되거나 쫓겨났다. 다만 안교덕 대령 등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예편되었다.강창성은 수사 과정에서 윤필용의 부하인 손영길이 속해있던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존재를 알아냈다. 강창성은 이를 박정희에게 보고하고 수사를 확대하려고 했으나, 박정희는 모르는 척 수사 확대를 제지했고 이후 강창성을 좌천시켜서 하나회 수사를 덮어버렸다. 아무튼 박정희의 아량으로 하나회 수사는 수장 격으로 제일 출세하던 손영길이 날라가는 선에서 종결되었고, 손영길에 비해 진급이 밀리고 있던 2인자 전두환이 하나회의 수장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7]. 그럼에도 강창성은 수사 과정에서 하나회 구성원들의 원한을 샀는지,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자 강창성을 투옥하고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렸고 나중에 강창성이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하나회 출신인 권익현과 설전을 벌이는 등 하나회 구성원들과 악연을 이어갔다.
민간인도 일부 연루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김연준 한양대학교 총장과 이원조 제일은행 차장이 있다. 이원조는 노태우의 고교 동창이자 전두환과도 절친한 친구 사이로 하나회 세력의 비자금 관리자였고[8], 대우그룹의 전신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이쪽은 중정에서 근무하던 경기고등학교 동기생 이종찬 소령의 도움으로 큰 화는 면하였다.
4. 사건 이후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수사 과정에서 하나회의 존재를 파악하고 창설 멤버 손영길을 따라 장교 수십여명을 조사하고 강제예편시켰으나 정작 전두환과 노태우는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의 압력으로 수사를 피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며 진급이 가장 빨랐던 손영길이 실각했고, 전두환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하나회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뭉쳐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후임 수도경비사령관에는 정보사령관이었던 진종채 소장이 임명되었다.
1973년 8월에는 이른바 '보안사 휘발유 유용사건[9]'이 터졌다. 이 비리 사건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보직 해임되고 제3군관구사령부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김귀준 참모장, 이진백 군수참모, 김영환 군수과장, 이동주 소령 등은 구속되었다. 또 하나회 조사담당이었던 김종진 보안처장과 이대호, 박영선 비서실장 등 20여명의 장교 역시 칼같이 예편되었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이 사건의 중심인물 윤필용과 손영길은 1, 2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고 1980년 사면받았다.
윤필용은 사망 직후 아들 윤해관의 재심 청구에서 일부 뇌물 혐의만 인정되었고 손영길은 2015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인정받았다.
강제 전역한 황진기 전 육군 대령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판단한 원심이 파기됐다. 대법원 선고 2019다241455 손해배상(기) 사건에 관한 보도자료
5. 평가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후락(중앙정보부장), 박종규(대통령경호실장),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 강창성(보안사령관)이 서로 견제하면서 2인자 다툼을 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후락과 윤필용이 가까워지자 이를 우려한 박정희[10]와 중앙정보부장이 되고팠던 박종규가 일을 크게 키웠다는 설이 있다.[11]술자리에서 한 얘기가 어떻게 새어나간 건지도 의문이다. 당시 보안사에 근무했던 김충립 기독자유민주당 전 대표[12]는 자신이 수 년간 보안사에서 윤필용에 대한 동향을 파악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사건도 발생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으로 보고되었으나 와전된 것으로 보고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박종규가 판를 짰다는 설이 맞다면 의도적으로 숨겨 히든 카드로 쥐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 서술된 사건 경위 중에도 김충립 씨의 수기에서 따 온 부분이 많이 있다.
강창성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으나 강창성이 여기 낄 급으로 보기는 조금 어려운 것이, 당시 박정희의 신임을 받던 윤필용에 비해 강창성은 그 부분에서 많이 밀렸다. 이 때문에 윤필용을 조사해 보라는 말을 들은 강창성은 이 말을 듣고 육사 동기인 윤필용에게 알리고 청와대에 가서 사죄하라고 권장했다.[13] 이 사실을 안 박정희는 길길이 날뛰면서 제대로 수사하라고 지시했고 윤필용 사건이 본격적으로 커졌다.
사실 윤필용을 제외한 다른 장교들, 특히 윤필용과 똑같이 징역 15년을 받았던 손영길은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소위 '불경한 발언'과 전혀 연관된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안사의 고문 수사를 받고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여기에는 박종규가 손영길이 윤필용과 이후락을 가깝게 만들었다고 오해했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이를 부추겼다는 주장이 있다. # 신범식이 박종규의 허가를 받고 청와대 내에 지은 통일정사라는 작은 기도처를 손영길이 이후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모함하여 박정희의 격노를 유발했고 모함 사실이 들통날까봐 재판 과정에서는 통일정사 관련 내용을 숨기고 뇌물, 횡령 등의 혐의만 적용했고 전두환이 증인을 압박해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들어 손영길을 유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손영길 본인도 사건 이후 강창성을 만나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박종규, 전두환, 노태우, 신범식이 사건을 주모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에게 제대로 찍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저지른 무리수가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기도 하다. 이미 역적으로 찍힌 마당에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도 몰랐으니 저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다. 여튼 1973년 12월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에서 짤리고 신직수로 교체되었다. 이때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부임했고 1976년 12월에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부임하며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유입되었다. 또 사건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박종규는 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인해 경호실장에서 물러났고[14] 그 후임으로 차지철이 부임했다.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 연재 칼럼에서 이 사건이 10.26 사건과도 인과적 고리 안에 있으며 또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는 데서 나아가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시대를 이해하는 데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했다. #
지성한 대령이 이때 옥고를 치른 후 전역하여 기업인이 되었다. 장남 지상욱이 정계에 입문하여 미래통합당 제2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지상욱 의원이 실제로 이때 아버지가 옥고를 치른 일을 많이 언급했을 정도로 지 대령이 고생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1]
파워 게임이기도 했지만 양자 간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기수로는 김재규가 윤필용보다 선배지만 나이 차이는 고작 한 살 차이였으며 윤필용은 김재규의 경력이 자신만 못하다는 점을 들어 선배 대접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2]
대한민국 대통령 친위부대장인 수경사령관에 대한 동향 보고 자체는 별 문제가 안 되었으나 24시간 동향 보고는 특별 주시가 필요한 인사들에 한해 실시하는 것이었고 통신 감청은 범죄 행위가 적발되었을 때 실시하는 것이었다. 즉, 김재규는 건덕지를 잡아 윤필용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3]
김재규가 이때부터 박정희에 원한을 품었다는 설도 있다. 김재규는 3군단장직을 끝으로 군을 떠나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
[4]
당시 박정희의 나이가 만 55세였는데 남성 평균 수명이 60세를 넘긴 시점은 1970년대 후반이었으므로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물론 절대 권력자의 나이를 두고 노쇠 운운했으니 '불경한' 언사였음은 분명하지만. 한편 윤필용은 오히려 후계자 관련된 말은 당시 배석했던
서울신문 사장
신범식이 했으며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따지는 건 몰라도 노쇠 발언은 무리수인 게 당시 정계 기준으로 봐도 50대 중반이 결코 노쇠했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 김영삼을 필두로 40대기수론 주장이 당대에서도 꽤나 파격적이었을정도로 정치지도자가 되기위해선 그래도 50살은 되어야지 40대는 애송이 취급까지했다. 80대까지 권좌에 있었던
이승만은 예외로 치더라도
장면,
신익희,
윤보선,
조병옥,
유진산 같은 당대 혹은 전 세대 정계 거물들을 봐도 건강에 큰 문제만 없으면 60세 전후까지 정치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노쇠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나이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이 오랜 기간 집권한 것을 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5]
이후락이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지도 않았으면서 실세로 거들먹거리던 점을 평상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6]
지상욱
미래통합당
제20대 국회의원의 아버지이자
심은하의 시아버지다.
[7]
손영길 문서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손영길과 전두환은 박정희의 부관 출신인 손영길이 군 요직에 먼저 진급하고 전두환이 손영길의 후임으로 부임하던 관계였다.
[8]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은행감독원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하며 은행장 등 금융계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 등 야당 후보에게 헌금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의 돈줄을 움켜쥐었다고 한다. 대선 중반 김영삼 후보가 우위를 보이자 YS쪽 자금줄을 더욱 죄고 김대중 후보 쪽으로 선거 자금이 흘러들게 해 야권 분열을 부추겼다는 설도 있다. 그는 2007년 사망하였다.
[9]
보안사에서 보급받은 휘발유 300드럼을 민간에 판 것이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에게 적발된 사건.
[10]
박정희는 5.16 쿠데타 직후부터 고만고만한 2인자들끼리 서로 싸우면서 자신에게만 충성하도록 유도하는 소위 2인자 박치기로 절대권력을 유지했다. 따라서 2인자 그룹에서 특정인의 힘이 지나치게 쎄진다거나 그들끼리 손을 잡는 모습이 보이면 다른 측근들을 동원해서 가차없이 숙청했다. 윤필용 사건은 이 공식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유신 독재 말기에 가면 이런 모습이 사라지고
차지철이 독주하는데도 박정희는 이를 계속 방치하였고 결국
10.26 사건이 터졌다. 이때의 박정희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무리수를 계속 남발하는 등 여러모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고 평가된다.
[11]
박종규가
중앙정보부장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다.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에 육영수한테 계속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중정으로 도망치고 싶어했다고. 드라마
제4공화국 제11회,
제5공화국 제22회에 이러한 장면이 나온다. 이와 관련돼 후임 경호실장
차지철도 제 딴에는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랍시고 박정희의 채홍사 역할을 맡지 않아 대신 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12]
김충환 전 국회의원의 친형
[13]
한편 이때 강창성이 윤필용에게 유도심문을 해서 후계자 운운하는 말을 만들어냈고 강창성이 이를 짜깁기해서 윤필용을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다는 주장도 있다. 강창성은 이에 대해 사건이 다소 과장된 바는 있으나 자신은 박정희가 직접 하명한 사건이므로 사심없이 수사를 했다고 말했다.
[14]
육영수의 사망을 못 막은 것은 경찰의 허술한 초기 검문이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는데 진짜 문제는 자칭 사격의 달인이라고 주장하던 '피스톨 박' 박종규가 암살범
문세광을 저지한답시고 쏜 총에 합창단원 장봉화(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가 재수없게 머리를 맞고 숨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