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2 14:50:48

허화평


12.12 군사반란 가담자(총 34명)
{{{#!wiki style="color:#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1px; color:#181818"
남웅종 김호영 신윤희 최석립
❁❁ ❁❁ ❁❁
심재국 허삼수 김진영 허화평
❁❁❁ ❁❁❁ ❁❁❁ ❁❁❁
이상연 이차군 백운택 김택수
❁❁❁ ❁❁❁ ❁❁
박준병 이필섭 권정달 고명승
✯✯ ❁❁❁ ❁❁❁ ❁❁❁
정도영 장기오 우국일 최예섭
❁❁❁
조홍 송응섭 장세동 이상규
❁❁❁ ❁❁❁ ❁❁❁
최세창 박희도 노태우 전두환
✯✯ ✯✯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김윤호
✯✯✯ ✯✯✯ ✯✯✯ ✯✯
정호용 김기택
✯✯ }}}}}}}}}


1. 개요2. 생애3. 논란4. 매체에서5. 선거 이력6. 트리비아

1. 개요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203_346.jpg

許和平

1937년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前 군인, 관료, 정치인이다. 자는 봉우(鳳宇), 호는 우민(佑民)이다. 종교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필립보.

전두환 대통령이 국군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고, 대통령 취임 후에는 비서실보좌관을 지낸 최측근 중 하나였고, 제5공화국 초기 허삼수, 허문도 등과 함께 '쓰리(3) 허'라 불리며 실세로 잘 나갔으나 도중에 전두환의 눈 밖에 나면서 좌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인사로 빗대어 보면 쿠데타의 공신으로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하다가 김형욱과 비슷한 사례. 하지만 김형욱과 달리 허화평은 전두환에 대한 지지와 충성을 변함없이 보냈다는 점과, 공직에서는 몰라도 사적으로는 전두환과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는 점에는 차이가 있다.

2. 생애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1]에서 태어났다. 포항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7기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진영, 허삼수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특히 허삼수와는 단짝이었다. 1979년 10.26 사태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대령)이었다. 말하자면 개국 공신 중의 공신인 셈이다. 1980년 9월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였다.

파일:external/blog.joins.com/%ED%97%88%ED%99%94%ED%8F%892(1).jpg

1980년 9월 전두환 취임 후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2] 이를 통해 실질적인 청와대 핵심 기획자 역할을 했고 차관급 관료임에도 유일하게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근무했다. 명칭만 비서실 보좌관이었지 실질적으로 부총리급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보안사 시절부터 비서실장이었으니 허삼수,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리며 실세로 활동했다.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실은 구 청와대 본관에 속해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과의 관계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였다. 그러나 허화평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에 1981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제1 수석비서관으로 좌천되었다.[3]

파일:PG-총리+일반%2FPG-1982%2F칼라%2FPG-1982-0139%2F2400dpi%2FPG-1982-0139-021.jpg
파일:PG-총리+일반%2FPG-1982%2F칼라%2FPG-1982-0139%2F2400dpi%2FPG-1982-0139-034.jpg

위의 사진은 좌천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수석비서관 시절 간담회에서의 모습으로,[4] 좌천된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위상이라면 실세로서 잘나가던 시절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너무 큰 권력을 휘두르던 쓰리 허를 탐탁치 않게 보고 비하나회 및 비육사 출신을 요직에 앉혀 견제하던 전두환의 눈밖에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82년 5월 대구시장으로 가있으라는 사실상의 좌천성 인사를 받게 되지만 이를 아예 무시하자 이에 국세청장으로 가있으라는 지시를 받게 되지만 이 역시 거부하고[5]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되는것으로 끝을 낸다.[6]이후 허삼수와 함께 청와대를 나와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 재단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국책연구소인 현대사회연구소 소장에 부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처리 조치로 기소되었다. 이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사면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3. 논란

3.1. 5.18 북한 개입설 주장

군사정권의 인사답게 민주화운동에 시종일관 부정적인 논조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월간조선》은 2012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과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 허 전 수석은 " 5.18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암호지령이 급증한 게 사실이라 해도 북한이 5.18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당연히 북한 간첩을 통해 남한 상황을 체크해 볼 것이 아니겠는가? 만에 하나 북한 개입이 사실이라면 왜 본인이 재판받을 때는 말하지 않다 2012년에서야 말한 것인가라는 점에서 그 회고의 신빙성은 없다.

3.2. 최태민 의혹 은폐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요동치는 판에 허화평은 TV조선의 단독인터뷰에 응했다. 이 자리에서 허화평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의 정신적 포로라고 증언하면서, 이 같은 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적 후진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박정희 대통령과 10월 유신의 결과물인 산업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발언했다. 제5공화국의 첫 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다는 말이다. #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서 청산하지 않고 놔둔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으며, 그 결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서 수습하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

4. 매체에서

파일:HeoHP-5.jpg
(뒤쪽은 차광수가 연기한 허삼수)

2005년 방영된 MBC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진우가 허화평을 연기했는데, 허화평 본인이 실제 자신보다 더 멋지게 나왔다면서 극찬했다고 한다. 단 이것과는 별개로 드라마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완전히 나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이원조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는데, "당신을 잊지 않겠소, 영원히"라고 영어로 전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이원조가 전두환에게 허화평 숙청을 건의했기 때문.

멋지게 그려졌다고는 하나, 제작진이 허화평을 평가하는 관점은 독재자의 하수인인 주제에 몇가지 혁신적인 주장을 했다고 개혁가로 포장되다니 어이가 없다 에 가깝다. 작중에서 허화평이 금융실명제에 반대하자, 이학봉 김재익에게 "우습네요. 그렇게 개혁 개혁 노래 부르더니."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고, 결정적으로 허화평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에 나오는 김영삼과 상도동계 측근들과의 대화씬에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허화평을 평가하는데, 이는 제작진이 사실상 등장인물 입을 빌려 말한 것이나 다름 없다.

5공시절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매우 적은 데 반해 허화평은 방송 등 언론 노출 빈도가 높은 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쾌도난마에 출연해서 박근혜 정부 새누리당을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다.[7] 또한 대한민국은 권력의 문고리만 잡으면 출세할 수 있는 나라라며 문고리 잡아본 사람으로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5공 정치인답지 않게 나름의 정치철학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편이다. 문민정부시절인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구속기소되었을 때도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법정에서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는 와중에도 허화평만은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96년 총선에서 무려 옥중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당선 여부와는 별개로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보수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종편채널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데 말빨이 기가 막혀서 진보성향 PD들이 애를 먹는다는 후문도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된 전두환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했었다는 부분이 반영되어서인지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으로 패러디되었다. #

5.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무소속 69,395 (46.3%) 당선 (1위) 1992년 민주자유당 입당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북) 무소속 48,251 (44.2%) 당선 (1위) 옥중출마 당선
1997년 의원직 상실
(12.12 군사반란 재판)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북) 민주국민당 32,261 (30.5%)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북) 무소속 17,628 (16.1%) 낙선 (3위)

6. 트리비아

  • 위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키가 매우 작다. 160cm 조금 넘는 정도.


[1] 現 경상북도 포항시 [2] 당시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비서실보좌관이라는 직함은 없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비서실보좌관이라는 없던 직제를 일부러 만들어서 허화평을 임명한 셈이다. 그만큼 제5공화국 초기 허화평의 위상과 권력이 얼마만큼 컸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 이후로 청와대 비서실장은 1982년 1월부터 이범석이 새로 도맡기도 하였다. [4] 첫 번째 사진에서 허화평 오른쪽에 위치한 인물이 바로 노태우의 오른팔로 활약한 박철언인데, 5공 시절 청와대 비서관겸 노태우의 소식통으로 재직했다. [5] 이때 공백이 된 국세청장 자리에 하나회 출신 안무혁이 앉게된다. [6] 대구시장과 국세청장은 자리만 놓고 보면 요직이 맞다. 특히 국세청장 자리는 박정희 정권때부터 최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인 이낙선이 초대 청장으로 앉는 등 중앙정보부장 못지 않던 요직이었다. 그러나 허화평은 청와대 밖으로 나간다는것 자체를 좌천으로 인식한것이다. [7] 당시 정무수석이던 조윤선이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내뱉자 "정무수석쯤 되면 대통령이 안 만나 주더라도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된다."고 일갈했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앞장서서 이 정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친박이니 비박이니 싸우기만 하면 안 된다."며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