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14:02:19

집성촌

1. 개요2. 역사3. 특성4. 해외5. 기타

1. 개요

집성촌()은 같은 성씨의 씨족이 모여사는 마을을 말한다. 마을 단위로 모여 살지는 않아도 특정한 좁은 범위의 지역에 여러 친척이 모여 살아서 사실상 집성촌이나 다름없는 형태도 있다.

2. 역사

한국의 집성촌은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다. 삼국 시대에도 집성촌은 있었지만 유교가 보급된 조선 시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집성촌이 형성된 것이다. 중국은 일찍이 종법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아 역사가 오래된 집성촌이 많이 있지만, 한민족은 신라를 제외하면 부여 때부터 2000년 이상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 고려 때에도 그랬고 유학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도 중기까지는 그랬다.그래서 하나의 마을에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위가 유입되는 이른바 각성받이 마을이 전국적으로 많았다. 저 아래에 언급된 하회마을 양동마을도 원래부터 풍산 류씨와 월성 손씨, 여강 이씨가 대대로 살았던 게 아니라 17세기 그 마을에 있는 집안에 사위로 들어갔다가 사회 풍조가 변해 대대로 거기 살게 된 것이다.

집성촌이 생기게 된 것은 양반들의 경제적 문제, 특히 재산 상속과 관련이 깊다. 유산 상속을 할 때 본래 남녀 관계 없이 균등하게 물려주는 게 전통이었는데, 부모는 두 명뿐인데 자녀가 여러 명이면 그만큼 재산은 흩어지기 마련이다.

유럽에서 비귀족 시민들이 부르주아로 승급된 것과 같은 현상이 조선 후기에도 일어났는데, (예속민은 언제나 비참하지만) 평민 중 재산을 집적해 사회문제를 생각해 볼 여유가 시민 계급도 등장하고, 그 중에서는 재산이 분할되어가는 양반보다 재력이 우월한 경우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1] 양반의 재산이 평민보다 적으면 당연히 위신이 설 수 없고, 양반들은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연장자 상속제 비슷한 형태가 도입되었고, 아들에게만 균분 상속하는 과도기를 거쳐 장남에게만 몰아서 장자 상속제가 도입된다. 이 과정에서 문중 재산과 집성촌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본래 조선은 양반의 기준을 재산이나 문벌이 아니라 생원진사시 합격자로 정해서 귀족 계급이 전사-지주나 성직-지주로 변질되는 병폐를 막으려 했으나, 여기까지 오면 평민 계급의 성장으로 탄생한 비귀족 지주를 이겨먹기 위해 귀족 지주가 생겨나고 이들이 서로 알력다툼을 벌이게 되면서 체제가 이점을 완전히 상실하고 패악만 나타나게 되었고. 이 시점에 와서는 성리학마저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면세 토지 집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런 지주 간의 알력 문제는 현대까지 남아서 지긋지긋한 암덩이로 존속 중이다.

달리 말하면 돈 주고 족보를 산다는 건 진짜 양반 족보를 사서 거기다 자길 끼워 넣는게 아니라 가짜 족보를 만드는 것이란 소리다. 양반들이 말이 좋아 족보를 팔았지 실상 식자층으로써 적당껏 서류를 조작해준 게 전부다. 집성촌 형성이 족보 판매보다 빨랐으므로 족보를 샀다고 가문에 슬쩍 끼어들어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가짜 족보 여부 판단의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가문원이 어딜 자꾸 싸돌아다니는지 살피는 것. 조선 후기에 오면 유력가는 죄다 집성촌에 뭉처 살았기 때문에 이 동네 저 동네에 가문원이 흩어져 있다면 해당 족보가 가짜거나 가문이 완전 망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2] 그리고 나중에는 평민들도 양반처럼 가문원끼리 모여 집성촌을 만들어 살게 된다.

이렇게 전국에 수많은 집성촌이 우후죽순 생겨나 한때는 인구 대부분이 집성촌에서 거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도시화와 이촌향도, 그리고 댐 건설 등으로 마을이 없어진다거나 결정적으로 남북분단~ 6.25 전쟁 기간 동안 같은 마을 안에서도 이념으로 나뉘고 타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가 정착해버리는 등 전통적 향촌구조가 많이 파괴된 탓에 집성촌도 많이 없어졌다.

지금은 양반문화가 강하거나 노인들이 많은 지방 농촌 지역에 집성촌이 많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인근 도시로 나가 있거나 돌아오지 않아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하며 근근히 유지되는 곳이 많고, 이 때문에 집성촌에서 살거나 일하는 젊은이들의 태반이 중국, 동남아, 몽골,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집성촌이 더 이상 집성촌이 아니고, 오히려 다문화촌이 된 셈이다. 생각 외로, 1980년대 후반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집성촌이 있던 시골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상경한 사람들이 꽤 많다.

다만 서울, 부울경은 비교적 적은 편인데 양쪽 지역 다 개발로 인해 집성촌 폐촌 비중이 높았고, 그나마 부울경 지역은 지리산권에 조금 많은 편이다.

3. 특성

집성촌은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같은 부계 혈통의 친척이기 때문에 조상에게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벌초 같은 일도 같이 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결혼은 웬만하면 다른 지역 출신인 사람과 하는 편이다. 불과 90년대까지만해도 인근의 타 가문 집성촌과 혼사를 논하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지금도 아주 가끔씩 볼 수 있긴 하다. 집성촌이라 해도 마을을 이룰 정도면 팔촌을 넘는 먼 친척도 마을에 많기 때문에[3] 요즘 같으면 동네 안에서 결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8촌을 초과하는 동성동본 결혼이 합법화 된 것도 얼마 안 되었고, 일족이라는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눈 맞기도 힘들다.

그리고 집성촌이라는게 꼭 단일 가문만의 집성촌이 아닌 경우가 많다. 둘 혹은 서너가문이 같은 마을에 모여살면서 주변 다른 마을들까지 포함해서 서로 겹겹히 사돈을 맺는식으로 혈연적으로 연결되어있는 경우도 많다. 집성촌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1600년대 중반 이전에는 사위가 처가마을로 들어와서 눌러사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식으로 기존 특정가문 집성촌에 유입된 사위가문의 후손들이 수백년간 눌러살면서 그 마을들이 근친혼으로 점차 서너개 가문의 집성촌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세인트 헬렌나 섬이 그렇게 집성촌이 되었다.

이러한 집성촌을 기반으로 한 씨족사회 문화가 학벌의식을 조장시킨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씨족사회 문화에서 장원급제자가 나오면 그 동네 사람들이 그 장원급제자를 빽이나 방패막이, 총알받이 등으로 삼아 부정부패 등 나쁜 짓들을 저지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지금도 농어촌 지역에서 그 마을에서 고시 합격자가 나오면 동네잔치를 크게 여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에서라고 주장한다. # 다만 상기한 폐단의 경우는 작은 사회 특성상 벌어지는 탓이 크고, 출세 목적 교육의 경우 집성촌과 거리가 먼 아파트단지로 이루어진 대도시의 부촌 및 신도시에서는 더 과열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도시라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학부모들은 대부분 농경사회를 경험한 데다가 집성촌 출신들이 많기도 할 뿐더러 공부 강요하는 이유가 학생보다는 그 학생이 속한 가문을 위하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학부모들도 많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4]

4. 해외

중국에도 집성촌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푸젠성 토루들. 특징은 각 건물이 하나의 집성촌 역할을 하는 다세대주택이자 마을이며, 동시에 요새라는 점이다. 이 토루를 만든 이들은 객가라는 한족의 일파인데, 이들은 오래 전 북방의 난리를 피해 남방으로 대규모로 이주한 난민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새로 정착한 지역의 원주민들과는 문화, 언어적 차이가 컸고,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했기에 두 집단 사이엔 자주 계투가 벌어졌다. 때문에 방어 구조물 안에 일족 전체가 생활하는 특이한 생활양식이 생긴 것. 객가인들 말고도 푸젠성의 토착 주민들인 민어 사용자들도 토루를 지어 생활했다. 한국의 양동마을, 하회마을처럼 이 토루들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독일에도 집성촌이 존재한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트룸프가 독일 칼슈타트에 있는 트룸프(Trump) 마을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 #

튀르키예는 공화국 건국 초기 가족법을 만들어서 성씨를 가질 수 있게 되자 몇몇 공무원들이 귀찮아서 아예 한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성을 폴라트(Polat)로 정해놓는 만행을 저지른 바가 있다. 무서운 건 폴라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서양 세인트헬레나 섬이 집성촌에 해당된다.

5. 기타

양준혁은 이 단어를 몰라서 집장촌이라고 불렀다. #


[1] 농민들을 착취하는 토호들의 횡포는 유럽에서 시민 계급이 지주화되어 폐단을 일으킨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것으로, 구한말 정도 가서야 등장하는 현상이다. 안 그래도 예속 인구가 바글거리던 나라에서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평민들을 이중으로 착취하니 일제시대 직전에는 인구의 절반이 예속민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예속민은 세금도 징발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므로 국가의 역량은 계속 잠식되어갔다. 사실 이것도 유럽과 똑같았지만, 유럽은 오히려 앙시엥 레짐이 심해도 너무 심했기에 계급을 초월한 분노가 폭발해서 혁명을 겪었고, 또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인력 확보가 시급했기에 예속민들이 해방된 것이다. 물론 해방 운동가들의 노력도 뺄 수 없으나 결정적 계기는 결국 국익 문제였다. [2] 족보 구매는 시카타 히로시(四方博)의 이론이 와전된 것이다. [3] 반면 8촌 이내의 친척들이 적어도 수천 명, 많으면 5자리 수에 달하기 때문에 이들 상당수는 이 집성촌 밖에서 살 가능성이 높다. [4] 더 쉽게 설명하자면 할머니댁 외가댁 동네분들이 살기 좋게 하기 위해 희생해달라는 말. 당장 21세기에도 초중고생들이 명절 청문회 때 집안 어른들한테 성적에 대한 질문을 듣는 식으로 무언의 압박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