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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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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虎聲
1889년 9월 19일 ~ 1959년 3월 24일

1. 개요2. 해방 이전3. 해방 이후4. 여순사건
4.1. 온건파4.2. 학살 오해
5. 정부의 피난 당시 무시와 납북6. 여담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군인

2. 해방 이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했다[1].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2]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기병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42년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제5 지대장을 지냈다.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이었던 만큼, 해방 이후 김구계열로 분류되었다.

3. 해방 이후


1946년에 귀국하여 한국광복군 출신으로는 드물게[3] 유동열이 미군정의 통위부장에 임명된 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년 12월 13일부터 만주군 출신이었던 원용덕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년 6월 15일부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정부수립 후 초대 육군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된 후 보여준 군사적인 능력은 그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 그러나 최근들어 그 평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아래 여순반란 항목을 참조할 것. 무엇보다 중국군/광복군계의 송호성의 등용은 광복군계 중용을 통한 군의 정통성 확립과 광복군/중국군 계를 끌어안기 위함이었다.[4] [5]

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송호성과 함께 복무한 이범석은 반공적이지 못한 인물이라고 여겨 엄청 싫어했다. 사실 이범석과는 광복군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정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송호성의 배경은 유동열이었으며 이범석은 기존 임정 세력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범석은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었고 광복 이후에는 김구 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실례로 송호성이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1947년 12월, 생도 분열식 중 이범석이 연설 직전 사관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송호(송호성의 별칭)는 단을 내리라(연단에서 내려가라)!"고 할 정도였으니... 사관학교 교장을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말 그대로 개쪽을 준 것이다.
덧붙여 미군정에서는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중국군 버릇이 몸애 밴 송호성을 일컬어 매너도 엉망이고 전기전술도 형편없다고 평가했다. 매너 부분은 서양인의 시각이므로 차치하더라도 전기전술 분야의 경우 중국 육대를 졸업하고 사단장, 군단 참모장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에게 조차 군사역량이 낮다고 평가하고 일본군 대좌 출신의 김석원에게도 낮은 평가를 한 미군이기에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또한 당시 학병/만군출신의 소장 장교단에게는 당년 50대 중반의 할아버지 장군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6]

그러나 실력을 차치하더라도 송호성의 인격적 소양이나 철학, 민주적인 부하지휘 등은 훌륭했다는 미군정 고문 하우스만의 증언도 있어서 무조건 폄하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일 수 있는데다 여순 사건 당시의 지휘 부분에서도 재평가를 요하는 측면이 있다.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 채병덕· 김홍일· 손원일과 함께 국군 최초의 준장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만주군파야 장군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쳐도, 독립운동가가 정부수반인만큼 소수인 중국군파를 미군정 시절부터 밀어줘서 준장 진급은 일본군파보다 더 안배를 해줬다. 하지만 2개월 뒤, 송호성을 제외한 저 네명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즉 송호성이 빠지는 바람에 중국군파와 일본군파 모두 2:2로 안배가 된 것.

4.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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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당시 광주로 내려와 작전 회의 중인 모습. 담배를 문 사람이 송호성(당시 준장)이다. 송호성의 옆에 있는 젊은 장교는 바로 박정희 소령이다.

4.1. 온건파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사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진실화해 2010년[7] 상반기 조사보고서, 437쪽
여순사건에 온건적인 진압을 주장한 장군 중 하나였다. 사실 이런 태도는 김익렬 장군의 회고에서도 확인되는데 제주도 내 과격 진압에 비판적인 모습이 묘사된다.

이범석은 송호성이 아닌 지휘체계상 송호성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에 직접 협의하였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 작전참모 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진압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87) 이들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과 직접협의하며 진압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였다.
진실화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00쪽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며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하야시 히데키(林英樹), 內側 見 朝鮮戰爭 民族問題硏究會 編 朝鮮戰爭史 評論社 , 1967, pp.16 ~ 17
이번 사건에서 얻은 것은 오직 눈물밖에 없습니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 1948. 10. 31

송호성은 진격하는 도중 여수 북방 약 8km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매복 중이던 반란의 주역 지창수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반란군의 기습에 고막이 터진다.

4.2. 학살 오해

그리고 이후 행동이라고 알려진 것이 바로 학살 문제다.
주 박사에 따르면 이 '미평전투'는 송호성 준장이 이끌던 육군 부대가 순천을 진압한 뒤 미군 종군기자 2명을 대동하고 들어오다가 협곡에서 기다리던 봉기군(인민위원회와 지방좌익들로 구성)의 급습에 대패해 혼비백산하며 후퇴한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 종군기자 2명이 사망하고 송호성 준장도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입었다. 잔뜩 화가 난 송호성은 재진입한 뒤 미평지서에서 15명 남짓 민간인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진압군들은 가담 여부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조금만 거동이 이상하면 즉결처형을 일삼았다. 특히 학생들은 거리에 함부로 나다니지도 못할 정도 '빨갱이' 취급을 받아 처형당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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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반란사건에서 미평 지역 학살에 대해서 46명이라는 말이 있다.송호성의 책임이라는 말도 있는데, 당시 14연대 반란사건에 대한 즉결처분 권한이 방대했다. 송호성이 진압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에 있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송호성의 지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당시 즉결처분에 관한 계통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단위로 심지어 일반 경찰,의용경찰,우익청년단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부대장의 성향에 따라서 학살자가 적게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순천지역 학살에서 구4연대, 20연대 통칭되는 부대에서 지휘관들이 일본도로 부락민을 참수하고, 농촌일수록 부대단위로 즉결처분한 단위가 높아진다. 당시 4연대 2대대와 5여단 병참사령부의 참모 증언에 의하면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지시에 따라 반군 협조 혐의만으로 조사나 재판없이 즉결처분한게 많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김종원 대위의 참수건 말고도 국군 3연대 2대대 5중대장 김용 중위는 당시 직속상관이던 대대장 조재미 대위마저 빨갱이로 불렀던 막나가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하필 3연대 안에서 가혹한 숙군이 벌어지면서 사실상 2대대의 실력자가 되어버렸다. 김용의 지시로 순천시 낙악면의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일본도로 참수해버린 행동을 당시 대대 특무상사 한모씨의 증언으로 알수 있다.그리고 자동화기인 BAR로 직접 6명의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던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대량의 학살을 지휘한 인물이 계급이 고작 중위였고, 중대장이었다. 제3연대 2대대의 학살은 다 이 중대장이 한 짓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일개 중대장이 즉결 처형이 권한이 있었던게 14연대 반란사건이다.(순천에서만 확인된 3연대의 무차별 살인에 의한 피해자가 439명이 넘는다.)

이처럼 14연대 반란사건에서 송호성이 학살의 가해 주체인지는 불분명하다. 총사령이라해도 송호성은 김종원 대위의 학살을 막을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을지언정 이를 어길시 제재를 가할 수 있던 위치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김종원의 행적이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미군 고문관이 직접 김종원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처형해야 된다고 보고서에 기록했다.한편 송호성은 이범석 국방장관에게 명령을 받은게 아니라,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에게 여수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당시 한국군은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에 의해 미 군사고문단에게 군령권을 통제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진압군의 정식 지휘계통은 송호성(육군총사령)→원용덕(호남지구 전투 사령관)→ 김백일(제5여단장), 송석하(제2연대장) 등→예하부대로 이어지는 체계였지만, 실무적으로 무능하다고 미군 고문단에게 판명된 송호성, 원용덕은 작전 참여에서 배제되었고, 김백일, 송석하 등의 장교들이 12연대, 13연대, 15연대를 통솔하였다. 원용덕이 공문으로 부대 지휘권을 달라고 하였던 사례를 볼때 김백일, 송석하 등이 14연대 반란사건의 진압 책임자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여수 일대에서 벌어진 학살을 볼때 생포와 즉결로 이어지는 과정은 상부에 보고되지 않고 일선 지휘자, 지휘관선에서 결정되었다는 증언이 많다. 운전수와 자동차를 징발했는데 응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즉결하였고, 공무원이나 교사에 대한 즉결처분도 상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고 소부대 단위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그렇다고 중간 제대가 멀쩡했나면 또 그렇지가 않다. 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 중령이 장교들에게 임의 즉결처분권을 허용하여서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왜 부연대장이 재량권을 행사했는가 하면 연대장 백인기 중령은 반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했기 때문에 연대장 대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평에서 반란군 토벌 총사령관인 송호성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국군이 진압했더라도 김백일 중령의 지휘 하에 각 부대들이 과도한 자의적 판단 하에 이루어젔으며 오히려 군경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종합해보면 송호성의 지위와 맞물려서 그것을 송호성 책임으로 여긴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5. 정부의 피난 당시 무시와 납북

1948년 8월 15일부터 11월 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는데, 당시는 육군참모총장이 생기기 전이라 총사령관이 육군에서 최선임 군인이었다. 즉 사실상의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육군 홈페이지 등에선 이를 표시하지 않는다.[8] 왜냐하면 초대 육군 총사령관까지 지낸 사람이 북한 방송에 나와 대남방송을 하고 투항한 국군포로들로 이뤄진 부대의 부대장을 맡기도 했기 때문. 다만 그 경위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6.25 전쟁 발발 당시에는 갓 조직된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이라는 아무 실권도 없는 자리에 있었는데, 국방부가 낸 구판 『한국전쟁사』(1968)에 의하면, 이때 송호성 장군에게는 부관과 자동차 한 대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한직에 있을지언정 명색이 준장이고 전직 총사령관인데 말이죠-_-;;

이런 판국에 전쟁이 터지자 안 그래도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던 송호성 장군은 완전히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가 맡고 있는 청년방위대는 본래 예비군 성격으로 조직되었으나 이제 막 편성된 탓에 실제적인 인원 모집과 훈련 등이 전혀 안 되어 있었고, 따라서 전력은 제로였습니다. 게다가 정보를 얻어오라고 시킬 딸린 부하도 없고 국방부에서 누가 뭘 알려주는 것도 없으니, 26일의 군사원로회의에 출석한 것 이외에는 집에서 놀고 있을 따름이었죠. 역시 청년방위대 고문관으로서 당시 참모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장흥 대령이 27일에 문득 생각이 나 단장인 송호성 준장의 자택으로 찾아가 보았더니, 장군은 혼자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장군님, 정부도 육군본부도 철수했습니다. 저랑 같이 가시지요."
"그놈들이 날 버렸는데 내가 매달리란 말이냐! 이범석도 날 버리고 채병덕도 날 버렸어! 난 어디에도 갈 곳이 없으니 여기 있겠네. 자네나 가게나."

긍지에 상처를 입은 노병의 자존심은 무서웠는지, 장흥 대령은 결국 송호성 준장을 그대로 놓아두고 한강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송호성 장군은 곧 입성한 북괴군에게 잡혔고, 그들의 요구에 의해 국군의 북침설을 KBS에서 방송하기도 합니다. 이후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패주할 때, 송호성 장군 역시 그들과 함께 북한으로 가는 납북자들의 행렬에 끼게 되고 말았죠.
임영대(서강대학교 역사전공 문학석사), 국군 장성은 포로가 된 적이 없다?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라고 평가받고 국군 형성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 미군의 제임스 하우스만에 의해도 송호성은 반역자로 보기 힘들다.

키가 자그만하고 당당한 체구의 초대 경비대사령관 송호성은 그의 오랜 광복군 생활 탓인지 퍽 에티켓이 없어 보이는 그런 몸가짐이 몸이 밴 사람이었다. 영어는 물론 한마디도 못 했다.
...
송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우선 그는 6.25 전쟁 대 북한 쪽에 남아 지금 한국군 역사에는 그가 초대 경비대사령관이었다는 사실 자체도 빠져있다....

송이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는 없다. 그는 6.25 때 월북해 해방사단이라는 국군 포로들로 구성된 부대까지 지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나는 6.25 때 그가 북한에서 방송한 내용을 정보 분석가들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것이 결코 자의에 의한 것이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것은 구금된 상태에서 강제로 말한 것으로 판단됐다.

해방사단을 이끌고 남한군과 싸웠다는 말은 그의 평소 인격으로 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송은 매너가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배짱이 있고 철학이 있었다. 그는 일본군 출신과는 달리 부하를 다루는 데나 업무를 수행하는 데 상당히 민주적 성향이 많았다.

그가 초대 조선경비대사령관에 임명된 것도 그런 이유가 충분히 작용했던 것이다.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美軍대위 : 하우스만 증언저자: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발행처: 한국문원발행연도: 1995, 140-141 페이지>
1953년 인민군해방전사여단장,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을 지내다가, 반혁명분자로 규정되어 1958년 평안남도 양덕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년 뒤인 1959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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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성이 납북당한 탓에 아들인 송무성(宋武城, 1937-, 사진 안의 노인)은 기독교인 화교의 양자로 들어가 생활을 했고 대만에 가서 살았다. 그리고 중화민국 국가안전국 한국어가 유창한 자원으로 들어갔다. 송호성의 아내이자 송무성의 어머니인 양천내(楊千乃)[9] 부산에서 머물렀고 1961년에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송무성은 귀국하려고 당시 주대만 대사였던 김홍일[10]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하였으나 대만의 정보기관에서 일하게 된 터라 방한은 허가되지 않았다. #

김익렬은 송호성에 대해 독립운동가다운 풍모는 있었으니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기초적인 교양이나 군사적 능력은 형편없었다고 평했다. 다만 제주도 내 강경진압은 반대한 것으로 진술한다.. 관련기사

김익렬이나 하우스만의 증언을 토대로 그간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군사지식이 부족하고 에티켓이 없다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었는데 송호성은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학제에서 전문학교까지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중국 북양군벌 군관을 양성하는 보정군관학교 정규과정을 졸업한 것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다만 2차대전을 지나며 바뀐 군사적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일군이나 만군 보다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중국군의 경우 무장의 수준이나 장교단의 전술습득 능력이 중앙군, 지방군 별로 편차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매너나 에티켓 부분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분명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물론 아무곳에서나 손으로 코를 풀더라는 육사 동기생들의 증언이 있기는 하다.

조선경비사관학교 시절, 50대 중반의 노인이었지만 후보생 2기로 들어가서 20대 초반의 아들, 손자뻘들과 함께 굴렀다. 그런데 규정을 따르지 않고 관물대를 정리하지 않는 등 내무생활이 개판이었다. 당시 생도대장이던 이치업 중위의 불시검열에 번번히 걸려, 벌점으로 병기고에 있는 99식 소총[11]의 기름을 닦는 등 여러가지 굴욕을 겪었다. 어느날 같은 중국군 출신의 통위부장 유동열이 불러 통위부에 가더니, 중령 계급장과 함께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전 생도를 소강당에 집합시킨 후 단상에 오르자 첫 마디로 이치업 중위는 제주도 9연대로 발령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치업은 당시 사관생도들에게 매우 악명이 높았다. 일본군 악폐습을 매우 철저히 공부한 탓에 생도들은 모두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군, 만주군 출신인 젊은 생도들은 50대에 함께 구르는 송호성을 딱하게 여겨 관물대를 대신 정리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송호성이 중령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 중위 계급장을 단 이치업을 쳐발라버리니 매우 고소하게 여겼다고 한다...[12]

이치업은 1946년 12월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시절에 통칭 육사2기생들에게 곡괭이 자루로 얻어 맞는다. 당시 생도들은 훈육을 방자한 가혹행위와 쌀이 부족하여 보리와 밀등의 배급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2기생들은 군복이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연행된 생도중에는 당시 2기생 박정희 소위가 있었다.
[1]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국적으론 여권을 얻을 수가 없어 중국 국적을 얻는 일이 많았다. 당시 중국 국적 취득이 매우 수월하기도 했고... [2] 허베이성에 소재한 육군군관학교다. 1902년 위안스카이가 세운 설립한 육군학당을 모태로 1912년부터 1923년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다. 중국 내에서 운남강무당과 함께 가장 큰 규모의 군관학교에 속했으며 황푸군관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관 채용인원 중 20%가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었다. 장제스의 모교이기도 하다. [3] 당시 한국광복군 출신들은 자신들이 중심이 된 군대 창설을 주장하다가 미군정과 틀어지면서 건군기 때 대부분 참여하지 않았다. 김구와 임정세력이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중심이 된 정권수립을 주장하다가 정계에서 고립된 것과 일맥상통하다. [4] 크게 나누어 3개 파벌이 존재했다. 숫자가 가장 많았던 일본군파, 그리고 중국군파(광복군), 마지막으로 나이가 가장 젊던 만주군파. 여기서 일본군파는 일본육사파와 학병파, 하사관파, 지원병파 등으로 나뉘었으며 학병파와 하사관파, 지원병파 등의 세력이 컸다. [5] 물론 중국군 계열은 그 편차가 매우 심하여 같은 계열내에서도 소장파와 중장년파의 시각이 매우 달랐다. 오동기 소령은 송호성을 매우 비판했으며 채원개 사단장의 경우도 중국군에서의 습성관련하여 비판이 있었다 [6] 2차대전을 지나면서 현대전 측면 관점에서 중국군 계열이 평가가 낮았다. 미군과 맞붙은 일본군조차 미군에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에 일본군파와 중국군파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미군에게 좋은 평가를 못받았다. [7] 날짜에서 확인되듯 좌파정권이 아닌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권이다. [8] 육군사관학교 4대 교장을 지냈는데 육사 역대 교장에는 남겨놨다. 중간에 빼기가 애매해서 그런듯. 육사 역대 교장 [9] 화교이다. [10] 중국에서 군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로 중국군에서 2성장군, 한국군에서 3성장군을 역임해 5성장군이라 불렸다. 준장으로 임관한 사람이기도 하다. [11] 미군정이 물자지원을 잘 안해줄 때라, 옛 일본군 소총이 정규군의 사관학교에서도 버젓이 활용된 것. [12] 여기서 언급한 이치업이 바로 관동군 59사단 장교로 있으면서 중국 진안의 독립군을 토벌했던 '번개장군' 이치업이다. 제주 4.3 사건 당시 9연대 부연대장으로 활약한다. 사관학교 시절 악명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치업은 결국 한직인 육군본부 수송감(한직이었으나 수송병과 최초의 선임장교였으니 아주 무시할 보직은 아니였다)을 지내다 27사단 사단장으로 갔는데, 횡령의혹에 연루되어서 1959년에 결국 준장으로 전역했다. 그렇게 잊혀지다가 한참 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에 통역 자원봉사자로 화제가 되었다. 2009년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