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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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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建國, ruby=けんこく)][ruby(大學, ruby=だいがく)]
건국대학
Kenkoku University
파일:National_Foundation_University.jpg
국가
[[만주국|]][[틀:국기|]][[틀:국기|]]
분류 국립대학
개교 1938년 5월 2일
폐교 1945년 8월 23일
소재 신경특별시 대동대가(大同大街) 남단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창춘시 차오양구 창춘대학 웨이싱루 캠퍼스[1])

1. 개요2. 연혁3. 설립
3.1. '아시아대학' 구상3.2. '건국대학'으로3.3. 개학:건국대학령
4. 학사제도
4.1. 입학4.2. 기숙사4.3. 전기과정4.4. 후기과정: 학부
5. 연구원6. 폐교7. 관련 인물
7.1. 총장/부총장7.2. 조선인 동문
8. 기타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만주국에서 건국이념인 오족협화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실현할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에서 설립, 1938년 5월 개교하여 1945년 8월 폐교될 때까지 만주국의 최고학부로 존재했던 국무원 직할의 국립대학이다. 만주국 수도 신경특별시(新京特別市) 대동대가(大同大街)[2] 남단에[3] 위치해있었다. 약칭은 建大(건대).
파일:満州地図.jpg
「五色の虹-満州建国大学・卒業生たちの戦後」( 출처) 참조

2. 연혁

  • 1937년 7월 15일: 신경특별시의 건국대학창설위원회(위원장 도조 히데키)[4]에서 '건국대학창설요강' 및 '건국대학령案'을 의결
  • 1937년 8월 5일: 강덕 4년 칙령 제234호에 의거 '건국대학령(建國大學令)' 공포, 국무총리대신 장징후이를 총장으로 임명
  • 1938년 1월 28일: 명예교수 사쿠타 쇼이치(作田莊一)를 건국대학 부총장 사무취체역으로 위촉
  • 1938년 3월 14일: 제1기 입학생 150명을 결정
  • 1938년 5월 2일: 宣詔記念日을 맞아 개학하고 입학식을 거행, 만주제국 황제의 개학 칙서 하사
  • 1938년 9월 1일: 강덕 5년 칙령 제223호에 의거 '건국대학연구원령(建國大學研究院令)' 공포, 칙령 제234호에 의거해 '건국대학령' 일부 개정
  • 1939년 1월 20일: 부총장 사무취체역으로 있던 명예교수 사쿠타 쇼이치를 부총장(연구원장 겸임)으로 정식 임명
  • 1939년 4월 11일: 제2기 입학식(입학생 146명) 거행
  • 1939년 4월 27일: 일본 제국 육군성/문부성 고시 제2호에 의거 재학생 징집연기 대상학교로 인정
  • 1939년 5월 8일: 영친왕의 건국대학 시찰
  • 1939년 7월 1일: 교직원 및 학생 전원이 만주건설 근로봉사대 특수반으로 편성되어 흑하 방면에 3주간 파견 근로봉사
  • 1939년 8월 1일: 창립 및 개학기념축일을 9월 2일로 지정
  • 1939년 9월 2일: 창립 및 개학 제1회 기념식 거행
  • 1939년 9월 15일: 건국대학연구원 월보간행
  • 1939년 10월 12일: 강덕 6년 칙령 제267호에 의거 '건국대학참의회관제(建國大學參議會官制)' 공포
  • 1940년 2월 28일: 제1회 참의회가 총리대신관저에서 개최되어 학칙, 학생정원, 기타 사항을 심의 결정
  • 1940년 4월 12일: 제3기 입학식(입학생 149명) 거행
  • 1940년 5월 10일: 원령 제20호로 건국대학 학칙 제정
  • 1940년 11월 2일: 도서관 개관
  • 1940년 11월 16일: 제1회 전기( 대학예과) 수료식 거행(수료자 122명)
  • 1941년 2월 1일: 제1회 전기 수료생들의 후기( 구제대학 학부) 과정 진학 및 후기 입학식(입학생 4명) 거행
  • 1941년 4월 10일: 개정 학칙에 의거 제4기 입학식(1학년 입학생 77명[5], 2학년 입학생 91명[6] 거행
  • 1941년 5월 2일: 연구원 연구학보 창간
  • 1941년 6월 23일: 강덕 8년 칙령 제158호에 의거 '건국대학령'을 일부 개정
  • 1941년 11월 14일: 중국인 학생 대량검거 사건
  • 1942년 3월 3일: 중국인 학생 대량검거 사건
  • 1942년 6월 6일: 사쿠타 쇼이치 부총장 사임
  • 1942년 6월 16일: 스에타카 카메조(尾高亀藏) 제2대 부총장 착임
  • 1943년 6월 11일: 제1기생 졸업식 거행(만주제국 황제 강덕제와 국무총리대신(건국대학 총장) 장징후이 출석)
  • 1943년 10월 2일: 재학생의 징병 유예 정지
  • 1943년 12월 14일: 중국인 학생 7명 체포
  • 1944년 6월 19일: 제2기생 졸업식 거행
  • 1945년 8월 10일: 대학 기능 전면정지
  • 1945년 8월 18일: 협화봉공대 해산, 스에카다 카메조 부총장 결별식
  • 1945년 8월 20일: 건국대학 무장 해제
  • 1945년 8월 23일: 건국대학 해산식
  • 1946년 10월: 신경의과대학(新京醫科大學)·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중앙사도학원(中央師道學院)· 대동학원·신경여자사도대학(新京女子師道大學)·신경축산수의대학(新京畜山獸醫大學) 등 만주국 시기 창춘시내에 있던 13개의 단과대학과 합병되어 '장춘대학' 설립[7]

3. 설립

파일:e384dec8-ml.jpg
정준영, ‘만주 건국대학’이라는 실험과 육당 최남선, 《사회와역사》, no.110, 2016 전성곤, 만주 「건국대학」 창설과 최남선의 <건국신화론>, 《일어일문학연구》 vol.56, no.2, 2006 참조.

3.1. '아시아대학' 구상

관동군 참모부에서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며 직속상관인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국 건국을 계획하던 1931~1932년부터 (1) 만주국의 건국 정신인 민족협화를 중심으로, (2) 일본에 설립된 기성 대학 시스템을 모방하지 않고, (3) 각민족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식사하고 자신들의 민족어로 싸울 수 있게 가르치며, (4) 학생을 만주국 국내뿐만 아니라 넓게 중국 본토, 인도, 동남아시아에서도 모집하여, (5) 다양한 지역의 선각자와 민족혁명가들을 교원으로 초빙해 대학을 설립한다는 이른바 "아시아대학 구상"을 고안했다.

이시와라의 '아시아대학' 구상은 만주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각 민족의 엘리트 청년들을 모아 장래 아시아 전역에 걸쳐 결성할 동아연맹을 담당할 지도자로 키워낼 수 있는 공존공영의 동아연맹을 구축하는 토대로서 오늘날의 싱크 탱크와 같은 것을 만들겠다는 것으로, '아시아대학'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실제로는 대학(University)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공학공숙(共學共塾)’의 이상속에서 이시와라는 '아시아대학'이 비록 신생 만주국에 설립되는 기관이지만, 만주국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학이 동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청년지도자들을 끌어 모아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를 바랐고, 이것이 동아연맹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장치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그의 아시아대학 구상에서는 동아연맹의 확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민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각국의 민족주의 혁명가의 사상도 '배우고, 비판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시와라 간지는 아시아대학의 교수로 러시아의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Leon Trotsky),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 후스(胡適), 루쉰의 동생 저우쭤런(周作人), 인도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미국인 소설가 펄 벅(Pearl Buck) 등을 아시아대학 교수로 초빙할 것을 구상했다. 공산주의자나 반일인사라 할지라도 오히려 좋다는 그의 독특한 발상에서 실제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수진이 구성되었으며, 육당 최남선 역시 교수로 취임하는 데 이러한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1932년 8월 이시와라 간지가 일본 육군 참모본부 근무를 명받고 도쿄로 귀국함에 따라 그의 아시아대학 구상은 카타쿠라 타다시(片倉衷), 츠지 마사노부를 비롯한 여타 관동군 참모들에 의해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하반기 무렵부터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휘하에서 만주국이나 일본제국의 기존 고등교육기관과는 다른, 독창적인 대학을 만드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츠지 마사노부는 1936년말 "아시아대학 창설 구상안"을 실질적으로 작성한 후 도쿄제국대학 교수 히라이즈미 키요시(平泉澄)에게 대학 설립 작업을 의뢰했고 히라이즈미는 일본 내지에서 설립위원으로 가케이 카츠히코(筧克彦)[8], 사쿠다 쇼이치(作田莊一)[9], 니시베 이치로(西普一朗)[10] 등 세 명의 원로 학자를 추천했고, 여기에 본인까지 포함한 4명이 설립위원으로 위촉되어 건국대학 창설 활동의 중심으로 그 구상을 현실화해나갔다.

3.2. '건국대학'으로

그런데 만주사변를 주모한 인물이자 이시와라 간지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참모장이 1937년 3월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1935년부터 관동군 헌병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가 앉게 되면서, 독립된 만주국에서 오족협화를 실현하고 강화해나갈 제민족 지도자를 육성한다는 "아시아대학" 구상은 "건국대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만주국에 설립할 대학에서 이시와라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작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도조의 리더십하에서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츠지 마사노부 그리고 네 명의 교수들에 의한 건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가 진행되었다. 만주국 현지에서는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를 위원장으로 하고 호시노 나오키, 미나가와 토요하루(皆川豊治) 등을 위원으로 하는 설립준비위가 내지와 연계해 설립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1937년 4월 17일 만주국 국무원 회의에서 설립이 정식 결정되었는데, 이 때 명칭이 당초의 "아시아대학"에서 "건국대학"으로 변경 확정되었다. 7월 15일부터 신경특별시에서 국무총리 장징후이와 도쿄의 설립위원들 및 현지의 설립위원들이 모여 최종회의를 열고 건국대학설립요강(建國大學設立要鋼)과 건국대학령안(建國大學令案)을 심의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초 제민족의 청년 지도자들을 모아 '공존공영'의 동아연맹을 구축하는 토대로서 싱크 탱크를 만들겠다는 이시와라 간지의 "아시아대학" 구상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도조 히데키의 건국대학 설립안이 현실화되었다.

이 때 도쿄의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 있던 이시와라 간지는 자신의 '아시아대학' 구상이 변질되는 것을 보고 협화회 도쿄출장소를 찾아가 대학창설 준비위원들에게 당시 만주국의 대학 창설 작업이 일본 제국의 기존 제국대학 교수들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기존의 일본 대학들과 닮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첫째 원칙"이라고 강조했고, 아시아대학은 만주국 고유의 건국정신과 민족협화를 체현하는 기관이 되어야 하며 대학 교수는 건국대학에 걸맞은 선생이 아니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1937년 9월말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좌천되어 도쿄에서 만주로 부임하자 건국대학창설준비위원회 신경사무소에 찾아가 학생 모집 반대, 개학 중지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3.3. 개학:건국대학령

결국은 강덕 4년(1937년) 8월 5일 칙령 제234호에 의거 "건국대학령(建國大學令)"이 공포됨에 따라 건국대학이 설립되었다. 1938년 5월 2일 만주국 황제가 임석하고 부총장 사무취체역의 사쿠다 쇼이치, 그리고 관동군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푸이의 칙서 반포를 시작으로 건국대학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 건국대학령(1941년 개정) [ 펼쳐 보기 / 접기 ]
>제1조: 건국대학은 건국정신의 신수를 체득하고 학문의 온오를 구하여 몸소 이를 실천해 도의세계 건설의 선각적 지도자로서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건국대학은 국무총리대신의 관할에 속한다.
제3조: (1) 건국대학에 관한 중요사항을 자문하고 의논하기 위하여 건국대학참의회를 둔다. (2) 건국대학참의회에 관한 사항은 별도로 정한다.
제4조: (1) 건국대학에 다음의 직원을 둔다.
- 총장 (특임)
- 부총장 (특임 또는 간임)
- 교수 (간임 또는 천임)
- 이사관 (천임)
- 조교수 (천임)
- 사무관 (천임)
- 의관 (천임)
- 조수 (위임)
- 조교 (위임)
- 속관 (위임)
- 기사 (위임)
(2) 교수는 그를 특임으로 할 수 있다. (3) 건국대학에 고문, 명예교수, 강사를 둘 수 있다.
제5조: 총장은 학무를 총감독하고, 소속직원을 통할하며, 고등관의 진퇴에 관해서 국무총리대신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며, 위임관에 관해서는 그것을 전행한다.
제6조: 부총장은 총장을 보좌하고, 총장 사고시 그 직무를 대리한다.
제7조: 교수는 학생을 교수훈육하고, 그 연구를 지도한다.
제8조: 조교수는 교수를 도와 수업과 훈육에 종사한다.
제9조: 교수와 조교수 중에서 사도(師導)와 부사도를 뽑아 보해 특히 학생의 훈육지도를 맡게 한다.
제10조: 이사관과 사무관은 상사의 명을 받아 서무와 회계를 처리한다.
제11조: 의관은 상사의 명을 받아 의무를 처리한다.
제12조: 조수는 교수와 조교수의 지휘를 받아 교무와 연구에 종사하며, 조교는 조수와 조교수의 지휘를 받아 훈육에 종사한다.
제13조: (1) 속관은 상사의 명을 받아 서무와 회계에 종사한다. (2) 기사는 상사의 명을 받아 기술에 종사한다.
제14조: 건국대학내에 평의회를 두고 총장의 자문에 응해 학무를 심의한다. 평의원은 교수 중에서 총장이 지명한다.
제15조: 건국대학은 그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수업연한은 각 3년씩으로 한다.
제16조: 건국대학 전기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국민고등학교 졸업자와 총장이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 자 중에서 선발시험에 합격한 자로 한다.
제17조: (1) 건국대학 후기에 진학할 수 있는 자는 전기를 수료한 자이며, 다만 총장이 부적당하다고 인정한 자는 이를 제한한다. (2) 학제에 따라 대학을 졸업한 자 또는 총장이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 자 중에서 전형시험에 합격한 자는 후기에 입학할 수 있다.
제18조: 건국대학에 대학원을 둔다.
제19조: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후기를 졸업한 자 또는 그와 동등 이상의 실력을 가진 자로서 총장이 적당하다고 인정한 자이다.
제20조: (1) 건국대학에 연구원을 둔다. (2) 연구원에 관한 사항은 별도로 정한다.
제21조: 건국대학 학생의 재학 중 비용은 관비로 한다.
제22조: 건국대학 졸업생은 관리 또는 기타의 직무에 복무할 의무를 진다.
제23조: 건국대학 편제와 기타 본령 시행에 관해 필요한 사항은 명령으로 정한다.
부칙: 본령은 공포일에 시행한다.
강덕 8년 6월 23일 칙령 제158호 개정 건국대학령

4. 학사제도

이정희, '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 《만주연구》 vol.22, 2016 참조.

4.1. 입학

파일:Students_at_Chien_kuo_University.jpeg.jpg
다양한 민족의 건국대학 학생들[11]
오족협화의 실현을 위하여 일본인(和)( 일본계(日系), 조선계(鮮系), 대만계(臺系) 등) 외에도 만주인(滿), 몽골인(蒙), 중국인(漢), 그리고 러시아인(露) 등 5개 민족 분류에 한해 학생을 선발하여 입학시켰다.
파일:nBnaugTY3MWYmlDMjVGMhZGOzkDO5MGMwAzY0cjMzYzMxEGOjVWOhZGZwEzLtVGdp9yYpB3LltWahJ2Lt92YuUHZpFmYuMmczdWbp9yL6MHc0RHa.jpg
건국대학의 백계 러시아인 학생들
문과 계열의 3개 학과(정치학과, 경제학과, 문교학과)로만 구성되었으며[12] 만주국 황제 칙령에 의해 만주국의 최고학부로 규정되어 있었고 졸업식에는 만주국 황제 푸이가 참석해 은시계를 하사했다.

4.2. 기숙사

4.3. 전기과정

건국대학의 학사과정 6년은 각각 3년의 전기와 후기 과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기는 일본 제국 대학예과에 해당하는 과정이었고 후기는 구제대학 학부 과정에 해당했다. 전기 과정에는 학과를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이 공통으로 만주국의 건국정신인 오족협화의 이론과 근로실습, 군사훈련 그리고 중국어 일본어를 배워야만 했다.

4.4. 후기과정: 학부

일본의 구제대학 학부에 해당하는 후기 과정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는데 정치학과, 경제학과, 문교학과의 3개과가 있었고, 만주국의 지도자 육성이 목적인 만큼 법학, 정치학, 경제, 윤리, 철학, 역사가 주요과목으로 교육되었다.

학생들의 모든 학비와 생활비는 관비를 지급하여 무상 보장 하였으며, 건국대학을 졸업한 자는 6년간의 교육비를 변제한다는 취지에서 만주국 관리나 관제단체인 만주국 협화회에 복무할 의무를 갖도록 하였다. 학비가 전액 면제된다는 것과 더불어 메이지 유신초기의 도쿄제국대학이 그랬듯, 건국대학은 졸업과 동시에 대동학원을 거쳐 오늘날의 서기관급의 고위 관료인 과장급 직위로 취업이 보장된다는 매력 때문에 입시에서 30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동경제대 경성제대가 제일로 꼽혔고, 바로 그 다음 순서가 건국대학이었다고 한다( 출처)

그러나 이렇게 혜택이 큰 만큼 학사 과정은 매우 혹독했다. 학과교육 만큼이나 훈련이 중요시되어 학생들은 군사훈련, 무도훈련, 농사훈련에 힘써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군사훈련은 하급장교 정도의 전투지휘 능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빡셌고(...) 무도훈련으로서는 유도 검도, 합기무도( 아이키도)를 필수로 하여 3년 중 270시간을 이수하도록 하고, 선택으로 궁도, 스모, 총검술을 선택해야 했다.[13]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할 수 있는 농사훈련은 당시 만주국 인구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한 것도 있고, 만주국의 설립 목적이 일본 제국의 군량미 중공업제품을 납품하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만주국의 지도층이 될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농업에 대해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붓 잡는 것 외에는 잘 하지도 못하는 문과생들에게 농사훈련은 실효성이 의심되는 것이 당연했고 실제로 만주국 내에서도 이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국대학이 배출하려는 인재는 학문연구를 하는 학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대중을 이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주국 최고의 국립대학이자 학생 전원이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교련, 농업 훈련에 힘쓰고 건국정신인 오족협화를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 건국대학은 만주국 그 자체이자, 건국 이념인 오족협화의 현현이라 할 수 있었다.[14]

5. 연구원

건국대학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더불어 만주국의 싱크 탱크 쌍두마차로 활약했던 연구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로 경제정책의 연구에 치우친 남만주철도회사와는 달리 연구원의 연구 범위는 "국가정책의 근본을 연구하고 국가 발전을 이룩한다."며 매우 광범위하게 정의되었다. 즉, 건국대학의 연구원은 만주국 통치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국가정책의 방향성을 지도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싱크 탱크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만주사변으로 수립된 괴뢰국인 만주국의 체제를 신속히 정립하고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제 안정화를 위한 선전과 인력동원을 담당한 것이 관제단체인 만주국 협화회였다면,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건국대학의 연구원이었다. 건국대학은 최고 엘리트 양성기관일 뿐만 아니라 만주국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싱크 탱크였던 것이다.

6. 폐교

1945년 8월 소련군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건국대학도 같이 붕괴되었다. 다수가 일본인이었던 건국대학 교직원, 그리고 대동학원을 거쳐 만주국 고등관으로 복무하던 일본인이나 조선인들은 소련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강제 노역에 처해진 경우도 있고, 이외에 중국인들은 훗날 문화대혁명에 휘말려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경우도 많다.

건국대학 당시의 건축물은 현재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만주국과 그 부가 시설들은 완전히 일종의 식민지 잔재 취급을 받았다.

총 90여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은 50명 정도가 한반도로 내려왔다. 이들 중 일부는 경성대학 등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활동했고,[15] 그 외의 건국대학 출신 조선인 지식인들은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여 학계와 정재계에 스며들었다. 군사 훈련이 강조되었던 때문인지 그 수가 많지 않음에도 대한민국 국군에 투신한 인물이 많은 편이다.

1946년 10월 신경의과대학(新京醫科大學)·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중앙사도학원(中央師道學院)[16]· 대동학원·신경여자사도대학(新京女子師道大學)·신경법정대학(新京法政大學)·신경축산수의대학(新京畜山獸醫大學) 등 만주국 시기 창춘시내에 있던 13개의 단과대학과 합병되어 '장춘대학(長春大學)'이 설립되었다.

다만, 이 때 설립된 장춘대학이 현재 창춘시에 소재한 창춘대학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1946년 설립된 장춘대학은 만주국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합하여 문학부, 이학부, 법학부, 의학부, 농학부, 공학부를 갖춘 대규모의 종합대학을 이뤘는데, 캠퍼스와 기숙사가 창춘 시내 곳곳에 분산돼 있었다. 하지만 이 대학은 당시 중국 내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시설과 수준이 '제대로된 대학'이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에선 1948년 북경에 통합 캠퍼스를 조성해 완전히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그러한 계획은 무산되었고, 공산당 정부가 접수해 흩여져 있는 캠퍼스 권역 별로 대학 구조가 재조정돼 찢어지게 된다.

우선, 문학부, 이학부, 법학부를 통폐합하여 동북대학을 설립했으며, 이는 현재의 동북사범대학이다. 의학부는 지린대학 의학부로 흡수되었는데, 만주국의 사법성 청사를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공학부는 선양시로 이전되어 둥베이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농학부는 두 동강이 났는데 일부가 선양시로 이전되어 여러 대학들과 통합과 분리를 거쳐 현재 선양농업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창춘에 남은 농학부는 구 신경축산수의대학의 기자재를 흡수하고, 구 건국대학의 자리에 창춘농업대학으로 재설립되었고 1987년 창춘시에 산재한 전문학교와 대학들을 흡수하면서 현재의 창춘대학으로 확대되었다.

즉, 건국대학을 구성했던 정치학과, 경제학과, 문교학과는 현재의 창춘대학과는 소재지만 동일하지, 학맥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국민당 정부에 의해 장춘대학으로 통합되었다가 공산당 정부에 의해 여러 대학으로 이합집산되면서, 학맥이 끊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7. 관련 인물

7.1. 총장/부총장

7.2. 조선인 동문

교원으로는 육당 최남선이 조선사/조선학 담당 교수로, 황도연[20]이 통계학 교수로 가르쳤으며, 학생은 매년 10명 가량의 조선인이 건국대학에 입학했다.

8. 기타

건국대학과 관련된 문헌을 찾다보면, 정보가 굉장이 단편적이고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건국대학은 당시 만주국의 최고학부였기 때문에 그나마 많은 정보가 알려져 있는 편이다. 실제로, 만주국에는 만주국 성립 이전부터 여러 공, 사립 대학들이 있었고 만주국 성립 이후에도 활발히 운영되었다고는 하나, 현재 주요 대학을 제외하곤 기초적인 정보도 잘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만주국 성립을 전후로 조선에서도 만주 지역의 대학에 많은 이들이 진학했다고 하지만 관련 연구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소련군이 만주국에 들어오면서, 만주국의 국가기관과 그 종사자들을 포로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많은 공적 자료의 손실이 있었다. 또한, 국민당이나 공산당 할 것 없이 만주국은 역사에서 지워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관련된 사료는 그 가치를 따지지도 않고 파기해버렸다. 일본 내에는 만주국 관련 사료가 풍부할 것으로 보이긴 하나, 일본 사학계에서도 만주국은 '금기' 사항이나 다름 없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9. 관련 문서



[1] 인민대가(人民大街)와 위성로(衛星路) 교차로 부근. [2] 창춘시 차오양구(朝陽區) 인민대가(人民大街) [3] 구 신경역 기준 정남방 10km 정도. [4] 기타 부위원장 호시노 나오키 외 위원 15명 [5] 중국 학제 중학교(4년제) 졸업생. [6] 일본 학제 중학교(5년제 구제중학교) 졸업생. [7] 하술되겠지만, 이 장춘대학과 오늘날의 창춘대학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8] 메이지 연간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활약한 공법학자로, 1872년 11월 28일 나가노현 스와(諏訪)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부터 5년간 독일에서 유학하며 행정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의 행정법 교수로 취임해 법리학, 헌법학 등의 강좌를 겸임했다. 천황기관설 사건 후에 문부성 교학국 참여직위를 역임하고, 도쿄제국대학 교수 정년 퇴임 후에는 고쿠가쿠인대학, 도쿄고등사범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국가의 본질 자체에 대한 탐구가 진전되어 감에 따라 그 관심이 점차 황학(皇学), 신도로 발전하였으며, 보다 더 독자적인 신도 신학과 헌법론을 제창했다. 1961년 2월 17일 가나가와현 하야마쵸(葉山町)의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9] 일본의 경제학자로 1878년 12월 1일 야마구치현에서 후지모토 가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지만 가정 형편으로 인해 사쿠다 가문에 입양되었다. 야마구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대청제국 무창호북법정학당(武昌湖北法政学堂)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체신사무관으로 임용되었다. 1912년에는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現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옮겨 가르치다 1923년 교토제국대학 부교수가 되었다. 1930년 교토제국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토제대 부교수에서 교수로 승진했으며, 1931년에는 경제학부장을 역임했다. 정년을 앞두고 건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다 1938년 교토제국대학에서 퇴임한 후 건국대학 부총장 사무취체역을 거쳐 1939년 정식으로 취임하여 1942년 발생한 중국인 학생 대량검거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할 때까지 건국대학 부총장 겸 연구원장으로 재직했고,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강의했다. 종전 후에는 류코쿠대학 등에서 강의했다고 한다. [10] 일본의 윤리철학자로 1873년 3월 29일 돗토리현 돗토리시에서 태어나 야마구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89년 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설립시 교수로 취임하여 히로시마문리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11] 건국대학의 교복은 협화복이라 하여 현재의 중국 인민복과 유사한 옷차림이었고, 학생모 관동군 군모에서 따온 디자인이었다고 한다. [12] 제국대학 출신으로도 이공계 수급이 충분한 것도 이유였으며, 관동주 뤼순에 소재한 관립 공과대학 여순공과대학이 이공계 인재를 배출하고 있었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재단의 만주의과대학 의학 교육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로 갈수록 대학생 징병연기 대상이 축소됨에 따라 공학계열의 인기는 계속 치솟았다. 그러나 이공계열 학교를 구축하는 데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야했기 때문에, 일본 제국 관립대학이었던 여순공과대학과 달리 괴뢰국 만주국 국립대학으로서 건국대학에 이공학부를 설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13] 무도를 대학교육의 과목으로 했던 것은 추상적 강의보다 일본 문화에 대한 교육효과를 더 효과적으로 올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4] 심지어 만주국이 사실상 관동군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처럼 건국대학도 사실상 관동군의 지도하에 있었다. [15] 대표적인 예가 김태형 교수다.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에 있다가 1.4 후퇴 때 월남했다. 당시 건국대학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창설 당시 협조했던 교수들 중에 월남한 케이스가 많다. [16] 사도대학(師道大學)이라고도 한다. [17] 실질적인 대학 총장의 사무는 부총장이 수행했다. [18] 1878년 야마구치현 출생으로 야마구치고등학교를 거쳐 1905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청제국 무창 호북법정학당에서 가르쳤다(1908~1911).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체신사무관이 되었으며, 1912년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現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1923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930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 박사가 되면서 교수로 승진했으며, 1931년 경제학부장이 되었다. 1938년 정년 퇴임하면서 건국대학 창설준비위원으로 위촉되어 1939년 정식으로 취임하여 1942년 중국인 학생 대량검거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할 때까지 건국대학 부총장 겸 연구원장으로 재직했고,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강의했다. 종전 후에는 류코쿠대학 등에서 강의했다고 한다. [19] 1884년 사가현 출생으로 190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16기), 1916년 육군대학 졸업(28기), 1936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조선군(일본 제국) 19사단장으로 있을 때 장고봉 사건이 발생해 소련군과 충돌한 바 있다. 이후 북지나방면군 예하에 창설된 제12군 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관동군 제1방면군 예하의 제3군 사령관을 지내고 군사참의관을 역임한 뒤 1941년 예편했다. 이후 건국대학 부총장으로 종전시까지 재임했다. [20] 경북 출신으로 1935년 후쿠오카고등학교( 구제고교)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로 진학하여 1938년 졸업(경제학사). 이후 건국대학 강사와 교수를 거쳐 해방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백남운을 따라 월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