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임용길 任龍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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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명 |
도요카와 류키쓰 豊川龍吉 |
출생 | 1898년 5월 4일 |
평안북도
영변군 읍내면 동부리 (現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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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9년 7월 10일 (향년 81세) |
정부직할 부산시 (現 부산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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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풍천 임씨 |
학력 |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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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한 때는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
1898년 5월 4일 평안북도 영변군 읍내면 동부리(現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3월 31일 부산공립보통학교(現 봉래초등학교) 훈도에 임용되었다. 1920년 10월 18일, 그는 "친일자를 살해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민족부활단결사대 명의의 경고문을 부산경찰서를 비롯한 부산 지역 관공리 유력자에게 발송했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21일 검사국으로 송치된 뒤 부산지방법원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1923년 4월 가출옥한 후 청년 운동을 전개하여 1924년 5월 부산청년회 사회부 간사를 맡았다. 1925년 2월 부산청년회가 보천교를 박멸하자는 운동을 펼칠 때 가담했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1925년 9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6년 7월 가출옥하였다. 1927년 12월 부산청년동맹 창립을 주도하였고, 1929년 부산청년동맹 집행 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경남청년연맹 발기준비회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 제2회 정기 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 12월 6일 제5차 정기 대회에서 집행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1920년대 사회 운동을 하면서 형제들과 함께 양복부·자동차부 등을 거느린 학옥양행(鶴屋洋行)을 경영하기도 했다.
2.2. 친일 행적
신간회가 해산된 후인 1931년 5월부터 1934년 3월까지 동아일보 울산지국장을 역임했고, 일본 나고야로 건너가 동아일보와 '조선신문' 나고야 지국에 관계했다. 1935년 1월부터 1943년 10월 폐간할 때까지 나고야에서 <동아신문>을 발간하고 사장을 역임했다.<동아신문>은 황민화 정책을 아래로부터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특히 친일협화회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상애회의 간부이자 유일한 조선인 출신 일본 중의원 의원이던 박춘금이 당시 동아신문의 상담역이었다. 임용길은 사설을 통해 자신의 뜻을 밝혔다.
협화는 우리들의 염원이고, 시국하 내선일치는 내선협화에 의해 성취된다고 생각하며, 동아신문사를 운영함에 협화 두 글자는 꿈에서도 잊는 일이 없다.
동아신문은 협화사업에 대한 관계자의 의견과 협화회가 시행한 구체적 실천 활동을 보도하는 데 주력했다. 구체적으로는 협화회 지회와 청년단, 부인부 등이 벌이는 헌금 활동, 저축장려운동, 근로봉사, 훈련, 조선복 폐지운동과 관련한 기사가 많았다.
1938년 8월 <내선일체의 재인식>을 발행하였으며, 1939년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일본 수상 등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이해 12월 동아신문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했으며, 동아신문 1940년 2월 17일자 기사에 '봉축지사'를 기고하여 천황의 만수무강과 국민정신의 양양, 국가총력의 충실한 발휘에 힘써서 내선일체의 실질을 굳게 함으로써 신동아 건설의 성업에 힘쓸 것을 주장했다.
1941년 10월 2일에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게재했다.
일시동인의 성지를 받들어 국가의 최대 국책의 하나인 협화사업에 익찬하여 내선의 진정한 일체를 향해 견실한 발걸음을 내딛음과 함게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위해 과감한 정의의 논진을 펼치자!
1942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 아이치 현 제1선거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3년 7월 황군 위문 현지보고서인 <대륙의 적성>을 동아신문사에서 출간했다.
2.3.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재일 동포 귀환과 식량 배급 문제에 대해 일본 당국과의 교섭 대표단에 나고야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1945년 12월 <동아시보>를 창간하고 동아시보사 사장을 지냈다. 195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속간된 <동아신문>의 운영에 관여했다. 1979년 7월 10일 부산에서 사망했다.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부활단결사대 경고문을 발송하는 등의 행적을 고려하여 1982년 임용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1]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