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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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 판 · 팽 · 편 · 평 · 포 · 표 · 풍 · 피 · 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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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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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식 표기 | Song |
MR식 표기 | |
통용 표기 |
1. 개요
통계청에서 실시한 2015년 인구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송씨는 宋(송나라 송)[1], 松(소나무 송), 送(보낼 송)으로 나뉜다.이 중 宋(송나라 송)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松(소나무 송), 送(보낼 송)은 극소수다.
2. 한자별
2.1. 송나라 송(宋)
송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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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 송씨(子姓 宋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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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군 미자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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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국군 미중 연 |
3대 국군 송공 계 |
4대 국군 정공 |
5대 국군 민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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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국군 양공 |
7대 국군 여공 |
8대 국군 희공 |
9대 국군 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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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국군 애공 |
11대 국군 대공 |
12대 국군 무공 |
13대 국군 선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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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국군 목공 |
15대 국군 상공 |
16대 국군 장공 |
17대 국군 민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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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국군 송공 유 |
19대 국군 환공 |
20대 국군 양공 |
21대 국군 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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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국군 송공 어 |
23대 국군 소공 |
24대 국군 문공 |
25대 국군 공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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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국군 평공 |
27대 국군 원공 |
28대 국군 경공 |
29대 국군 송공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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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국군 후소공 |
31대 국군 도공 |
32대 국군 휴공 |
33대 국군 후환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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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 대씨(子姓 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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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국군
척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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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왕
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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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98ba> 송나라 송씨 (宋氏) |
|
|
|
건목귀천(建木晷天)[2] | |
창시자 | 미자계(微子啓) |
발원지 | 중국 허난성 상구시(商丘市) |
계승 민족 | 상족(商族) |
탄생 배경 |
씨(氏):
송(宋)의 건국 • 국호를 씨(氏)로 삼으면서 탄생 성씨(姓氏): 송(宋)의 멸망 • 상(商), 송(宋)의 국성인 자(子)에서 분기 |
탄생 연도 |
씨(氏): 기원전 11세기 성씨(姓氏): 기원전 3세기 |
주요 본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여산 송씨 • 은진 송씨 • 진천 송씨 • 연안 송씨 • 야성 송씨 • 신평 송씨 • 남양 송씨 • 홍주 송씨 • 청주 송씨 • 용성 송씨 |
인구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683,494명(2015년)|18위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1,120만명(2015년)| 22위 |
2.1.1. 송씨(宋氏)의 탄생
〈기원전 11세기,
주나라의
무왕(武王)은
상나라 29대 왕인〉
주(紂)를 치고자
목야(牧野)에 이르렀다.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을 도와 목서(牧誓)를 짓고,
은(殷)을 깨뜨렸다.
상나라의 궁궐에 들어가 주(紂)를 죽인 뒤, 주공(周公)은 큰 도끼를 들고, 소공(召公)은 작은 도끼를 들고 무왕(武王)의 옆자리에 서서 토지신 제사(釁社)를 지내며 주(紂)의 죄를 하늘에 고하였다. 그리고 은(殷)의 백성에 다가가 기자(箕子)를 풀어주었다.
관숙과 채숙과 무강 등이 과연 회이(淮夷)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가 이들을 치며 대고(大誥)를 짓고 관숙을 베고, 무강을 죽이고 채숙을 쫓아내어 은(殷)의 남은 백성을 거두어들였다.
〈 상나라 28대 왕인 제을의 장자이자 주(紂)의 이복형〉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하여 은(殷)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 사기(史記)》 #
한국과 중국을 통틀어 모든 송씨(宋氏)의 공통 시조는
상나라[3] 28대 왕
제을(帝乙)의 장자이자
송나라 초대 국군인
미자계(微子啓)다. 상나라의 궁궐에 들어가 주(紂)를 죽인 뒤, 주공(周公)은 큰 도끼를 들고, 소공(召公)은 작은 도끼를 들고 무왕(武王)의 옆자리에 서서 토지신 제사(釁社)를 지내며 주(紂)의 죄를 하늘에 고하였다. 그리고 은(殷)의 백성에 다가가 기자(箕子)를 풀어주었다.
관숙과 채숙과 무강 등이 과연 회이(淮夷)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가 이들을 치며 대고(大誥)를 짓고 관숙을 베고, 무강을 죽이고 채숙을 쫓아내어 은(殷)의 남은 백성을 거두어들였다.
〈 상나라 28대 왕인 제을의 장자이자 주(紂)의 이복형〉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하여 은(殷)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 사기(史記)》 #
송나라(춘추전국시대)는 상나라 멸망 이후 상나라 왕족과 상족(商族) 유민들이 상나라를 그대로 계승해 만든 나라며 700여년간 존속하다가 기원전 286년경에 멸망했다.
해당 성씨의 발원지는 상나라의 첫 수도이자 상나라를 계승한 송나라(춘추전국시대)의 수도인 중국 허난성 상구시(商丘市)다.
이렇게 씨(氏)로써 송(宋)은 기원전 11세기 송나라(춘추전국시대) 건국과 함께 탄생했지만 현재와 같이 송(宋)을 성씨(姓氏)로 사용하는 집단이 탄생한 건 기원전 286년 송나라가 제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자 나라를 잃은 송나라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모국을 기리고자 국호를 성씨(姓氏)로 사용한 게 그 시작이다. 《송(宋)씨 성의 연원》, 《송(宋)씨 성의 연원》요약본
현재 한국의 성씨(姓氏) 시스템은 중국에서 따온 것이지만, 본래 성(姓)과 씨(氏)는 다른 개념이었다. 고대 중국 사회에서 성(姓)은 혈연으로 정해지는 개념이었고 씨(氏)는 지연으로 정해지는 개념이었다.
그러던 것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성과 씨의 구분이 희미해져 결국에는 진한시대 이후로는 성(姓)과 씨(氏)의 개념이 합쳐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姓氏)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장 송씨(宋氏)의 시조 미자계와 그의 자손들인 송나라(춘추전국시대) 군주들만 하더라도 씨(氏)는 자신들이 건국하고 속한 집단인 송(宋)을 쓰긴 했지만 상나라 왕족으로서 혈통적 승계 의미로 가지는 성(姓)은 자(子)였다.
미자계의 숙부이자 고조선과 연관되어 기자동래설로 유명한 기자(箕子)도 지연으로 정해지는 씨(氏)는 자신이 관리하는 기(箕)라는 지역[4]에서 따온 것이고 성(姓)은 상나라 왕족 혈통으로 물려받은 자(子)였다.
즉, 송(宋)이라는 성씨(姓氏)의 첫 시작점은 혈통에 기반한 성(姓)이 아닌 자신들 속해 있던 송나라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씨(氏)로 볼 수 있으며 이런 송나라를 건국하고 송씨(宋氏)를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한 미자계는 모든 송씨(宋氏)들의 정신적 시조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래도 춘추전국시대는 아직 평민들한테까지 성씨(姓氏)가 퍼지기 전이라 송나라 지배층들이 먼저 사용하면서 해당 성씨가 퍼졌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 기록에서도 송나라 멸망 직후 상나라와 송나라의 국성(國姓)인 자(子)에서 분기해서 송씨(宋氏)가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서(史書)나 공신력 있는 족보상 기록에 흔적들이 남아있다면 송나라(춘추전국시대)의 왕족 및 귀족 집단과의 혈연적 관계까지는 추정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래 「 족보상 기록」 문단에서 더 자세하게 후술하겠지만 한국 내 모든 송씨(宋氏) 집안들은 송나라(춘추전국시대) 왕족의 후손이자 당나라 호부상서[5] 송주은(宋柱殷/柱恩)[6]을 도시조[7]로 모시고는 있는 상황인데 모화사상으로 후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따라서 한국 송씨(宋氏) 후손들이 송나라(춘추전국시대) 왕족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고 싶다면 먼저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의 실체가 명확한지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서 밝히는 게 우선일 것이다.[8] 그래도 아래 「 문헌 자료상 기록」 문단을 보면 옛 송나라(춘추전국시대) 구성원들이 남긴 흔적들 중 일부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경로까지는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송씨(宋氏)자체는 중원에서 만들어진 중원계 성씨(姓氏)며 현재 중국인들도 어느 정도 사용하는 성씨(姓氏)이긴 하나 그 태생을 보면 한족(漢族)계 성씨(姓氏)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애매한 면이 있다. [9] 기원전 3세기면 아직 한족(漢族)이라는 민족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이고 오늘날의 주류 학설에 의하면, 현재 중국 주류 민족인 한족(漢族)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화하족(華夏族)이며 이들이 세운 최초의 나라는 주나라다. 일단 상나라 건국에 영향을 준 상족(商族)과 당시 화하족(華夏族)은 별개의 집단으로 구분하고 있다. 중국사-중국 민족의 기원과 중국인, 중국사-상족(商族)의 기원과 건국
즉, 요약하자면, 화하족(華夏族)이 세운 주나라가 기원전 1040년경 상족(商族)이 세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들 입장에서 다른 민족이었던 상족(商族)들을 통제하기 위해 [10] 상나라 왕족 미자계를 제후로 봉하고 땅을 주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니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앞서 계속 언급된 송나라(춘추전국시대)다.
이 시점에서 송씨(宋氏)의 기원(起源)이 시작되며 이렇게 상나라 왕족과 상족(商族) 유민들이 세운 나라인 송나라(춘추전국시대)는 화하족(華夏族)이 세운 또 다른 나라인 제나라(춘추전국시대)에게 기원전 286년에 멸망 당하고 송나라(춘추전국시대)의 마지막 왕이자 상나라 왕족 후손인 송강왕은 제나라 병사들에게 잡혀 살해당하니 상나라 왕조의 역사는 여기서 완전히 끊기며 송나라(춘추전국시대)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지막 나라 이름을 따 송(宋)을 성씨(姓氏)로 삼고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여기서 송(宋)을 성씨(姓氏)로 삼는 집단이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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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e5b6 기원전 5세기 송(宋)의 청동 과에 금으로 세겨진 {{{#FFCD28 건목귀천(建木晷天)}}} 문양}}} # |
여담으로 현재 중국에서는 송씨(宋氏)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https://baike.baidu.com/item/%E5%AE%8B%E6%B0%8F%E6%97%8F%E5%BE%BD/4255114|건목귀천(建木晷天)]]이라는 문양을 사용하고 있는데 건목귀천(建木晷天)은 송씨(宋氏)가 사용하는 기존 宋(송나라 송)에 상나라를 건국한 고대 민족인 상족(商族)의 탄생 신화에 나오는 신비의 새 흑조(黑鳥)를 양쪽에 더한 모양이다.
이 건목귀천(建木晷天)은 상나라를 계승한 송(춘추전국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되며 상나라 멸망 후에도 상족(商族)의 정체성이 송(춘추전국시대)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걸 보여준다. 송(춘추전국시대) 멸망 후에는 송씨(宋氏) 집단을 대표하는 문양으로 자리잡고 현재에 이르게 된다.
또한 현재 중국 내에서 송씨(宋氏) 집단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산둥성 쪽인데 상족(商族) 후손들이 송나라(춘추전국시대) 멸망 후 산둥성으로 북상한 흔적으로 보고있다. #
2.1.2. 한국에서의 송씨(宋氏)
2.1.2.1. 족보상 기록
한국 송씨(宋氏)의 선계도(先系圖) |
일단 국내 각 송씨(宋氏) 종친회에서는 송나라(춘추전국시대) 왕족 혈통이자 당나라에서 호부상서[11]를 지낸 송주은(宋柱殷/柱恩)[12]이라는 인물을 모든 한국 송씨(宋氏)의 도시조[13]로 모시고 있는 상황이다.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대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 중인 문헌에 포함된 <송씨상계세보(宋氏上系世譜)>를 인용하여 간략하게 다루고 있으며 이외 정확한 기록은 없는 상황이다. 후손들에 의해 현대에 쓰인 《송씨통사》에 의하면 정황상 안사의 난을 피해 경덕왕 시절 신라에 귀화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송주은(宋柱殷/柱恩)의 7세손 송순공(宋舜恭)은 신라 말 헌강왕 때 대아찬(大阿飡)을 역임했다고 한다. 진천 송씨(鎭川 宋氏)가 현재 송순공(宋舜恭)을 시조로 모시고는 있지만 그 후 16세(世) 340년간 세계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만 할 뿐이며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송인(宋仁)을 1세조로 모시고 있다.
송주은(宋柱殷/柱恩)의 10세손 송자영(宋自英)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송유익(惟翊)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가, 둘째 아들 송천익(天翊)의 후손 중 은진군 송대원(大原)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시조가, 셋째 송문익(文翊)은 서산 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외 신평(新平), 야성(冶城), 연안(延安) 등 13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 은진, 진천 송씨(宋氏)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한국의 모든 송씨(宋氏)는 도시조인 송주은(宋柱殷/柱恩)의 후손이며, 오늘날에 와서도 송씨끼리는 다른 본관이라도 통혼하지 않는 것이 관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송주은(宋柱殷/柱恩)을 도시조로 하는 위와 같은 족보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즉, 송주은(宋柱殷/柱恩)은 후손들의 모화사상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 당나라에서 현대의 재무부 장관 직급이었으면 상당히 거물급 인물인데 신라 역사 다룬 《 삼국사기》와 당나라 역사를 다룬 《 구당서》, 《 신당서》를 포함한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흔적조차 찾기 어려우며 심지어 중국의 대형 포털 사이트 바이두[14]등에서도 한국 송씨 종친회발 소스를 인용하여 설명하거나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도 언급이 거의 없으니 이 인물의 실체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상황이다.
일단 송씨 족보 중 1653년에 제일 처음으로 발행된 《 여산 송씨 족보》, 1666년에 두 번째로 발행된 《 은진 송씨 족보》, 1673년에 세 번째로 발행된 《진천 송씨 족보》에서는 이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계 인물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이 현대 와서 알려진 건 70년대 국내 모든 송씨(宋氏) 본관 족보를 총 정리한《송씨통사》라는 책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송씨통사》 역시 18세기에 만들어진 송씨(宋氏) 족보 중 하나를 참고해서 가장 오래된 인물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근거가 없고 신빙성이 부족하다 보니 조선 말기 즘 모화사상이나 숭조사상으로 만들어진 인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각 종친회에서 도시조로 모시고 있고 일단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 중인 옛 문헌에 등장하는 건 사실인 걸로 보아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그리고 진천 송씨(鎭川 宋氏)가 시조로 모시고 있는 신라 때 대아찬을 지낸 송순공(宋舜恭)이라는 인물 역시 실체가 불분명하다. 일단 신라 대아찬은 골품제로 인해 신라 귀족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진골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으며 성씨로 따지면 일반적으로 신라 국성인 박(朴), 석(昔), 김(金)만 가능했던 자리다. 또한《 삼국사기》같은 국내 정사(正史)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신라 말기에 골품제가 조금씩 무너지고 지방 호족 세력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았어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만약 신라 대아찬 송순공(宋舜恭)이 실존 인물이라면 한국 역사에서 송씨(宋氏)의 시작점은 족보상으로는 신라 말기까지 내려가며 신라 귀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진천 송씨(鎭川 宋氏) 본관에서 조차 340년간 세계가 실현되어 이를 증명할 전혀 방법이 없다고 하니 그 실체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송씨(宋氏) 족보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되어 어느 정도 공신력을 인정받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 여산 송씨 족보》[15]에 나오는 시조 송유익(宋惟翊, 12세기 인물로 추정) 이전 한반도에서의 송씨(宋氏) 기원과 뿌리에 대해서 족보상으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2.1.2.2. 문헌 자료상 기록
이렇게 족보상 기록으로는 송씨(宋氏)의 뿌리에 대해서 고려 시대 11~12세기까지 추적해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옛 사서(史書)에 송씨(宋氏)에 대한 기록들이 소수 남아있어 문헌학적 관점에서 보면 좀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데918년 3월 정명(貞明)...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그것을 풀게 하였다. 송함홍 등이 말하기를 ...세 사람은 서로 이르기를, “임금께서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일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만날 것이고 우리도 또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꾸며댄 말로 보고하였다.
《 고려사》 #
현재 공식 기록상에 보이는
한민족 최초의 송씨(宋氏)는
정사(正史)로 여겨지는 《
고려사》에서 등장하는데
태봉(후고구려)의
책사였다가
궁예의 폭정에
왕건이 죽을까봐 비문의 내용을 거짓으로 고한
송함홍(宋含弘)이라는
문인 출신이다.
고려 건국 이후
개국공신[16]으로 인정 받아
대상(大相) 자리에 올랐다. 《 고려사》 #
1013년 9월 21일(음) 경술(庚戌),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송능(宋能),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유손(庾孫)은
태조(太祖)를 모셨고 군무에 종사하여 공로가 있었는데, 지금 여전히 병 없이 100세가 되었으므로 각각 대광(大匡)을 더하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
송함홍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17]보이는
송능(宋能)이라는 인물도
고려사에 나오는데 왕건의
후삼국 통일 전쟁에 참여한
무인 출신으로 이도 역시 고려
삼한공신으로
보국대장군 칭호를 받았고, 100세가 되었을 때
현종으로 부터
대광(大匡)이라는
벼슬을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송씨(宋氏) 자체는 늦어도
고려가 건국 된 직후인 900년대 초부터 존재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사》 #
989년 4월 12일(음)〈
성종께서 이르길〉오직 태학조교(太學助敎) 송승연(宋承演)과 나주목(羅州牧)의 경학박사(經學博士) 전보인(全輔仁)이〈학생들을〉 이끌어 잘 도와서 학문을 널리 닦으라는 공자(孔子)의 뜻에 합치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아서 내가 학문을 권장하는 뜻에 들어맞으니 마땅히 그들을 발탁하여 칭찬하는 은혜를 더하여 특별하고 두터운 총애를 보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
또한 989년
태학조교(太學助敎)로 일하던 송승연(宋承演)이라는 인물이
성종의 총애를 받아
국자박사(國子博士)라는 관직을 받은 기록도 나오는데 한 세대 정도 지난 시점에서도 송씨(宋氏) 성을 가진 인물이
고려 중앙 정부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나오는
태학(太學)은
고려
국자감에 설치되어 있던 교육기관으로 5품 이상의 자손만이 입학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 #
이 세 인물 모두 본관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해당 내용들을 종합해 봤을 때 한국 사서(史書)에서 송씨(宋氏) 성을 가진 한민족 인물은 후삼국시대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고려 건국 직후 개국공신 이름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해 그 후손들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고려 중앙 정부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파악할 수 있다. 이후 무신정권 전후로 본관이 등장하고 이 때 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각종 문헌과 사서에서 해당 성씨(姓氏)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에 특정 지방 호족 내지 귀족 세력이 왕건을 필두로한 패서 호족[18]이 주도하는 고구려 부흥 운동[19]과 후삼국 통일 과업에 적극 참여해 고려 건국에 기여하면서 중앙 정부로 진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송씨(宋氏) 집단이 탄생하지 않았나 추정해볼 수 있다.
한반도 중부, 남부에서 성씨(姓氏)는 고려 때 봉미제도(封彌制度)를 시행하면서[20] 본격적으로 퍼졌고 이때 중원에서 만들어진 성씨(姓氏)를 빌린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송씨(宋氏)도 이 시기쯤 지방 호족이나 귀족 세력에 의해 들여오면서 한반도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도 있지만 현재 국내 송씨(宋氏) 종친회가 도시조로 모시고있는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은 아무리 빨라도 조선 시대 후기 들어와서 만들어진 인물로 추정되고 그 이전 송씨(宋氏) 족보에서는 중국계 인물들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한국 역사에서 송씨(宋氏)의 첫 시작이 고려 때 봉미제도(封彌制度) 시행하면서 단순히 중국계 유명 인물 성씨(姓氏)를 따와서 빌려 쓴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렇게 한반도 중부, 남부에서 단성이 본격적으로 퍼진 시기는 고려 때지만 만주 일대는 진한시대 전후로 이미 단성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사서(史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비록 송나라 송( 宋)이 아니라 소나무 송( 松)을 쓰긴 했지만 고구려에 병합된 비류국 군주인 송양(松讓)과 이 송양(松讓)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재상 송옥구(松屋句)라는 인물를 통해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에 이미 만주 지역에서는 단성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이전의 한국 송씨(宋氏)의 뿌리를 추적해 보고 싶다면 옛 문헌을 통해 좀 더 과거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는데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 [收] 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 爲 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 진(秦)나라의 통일 이후〉 20여 년 후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 제(齊) ·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점점 〈 고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여 갔는데 준왕은 그들을 거두어 서쪽에 두었다.
《 위략(魏略)》 #
이전 항목에서 송씨(宋氏)는 기원전 286년
제나라에 의해[21]
송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성씨(姓氏)로 삼은 게 기원이라고 서술해놨는데 그
제나라(전국칠웅)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기원전 221년
진나라(전국칠웅)에게 멸망 당하고 중국은 최초의 통일 왕조 시기를 맞이한다. 〈 진(秦)나라의 통일 이후〉 20여 년 후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 제(齊) ·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점점 〈 고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여 갔는데 준왕은 그들을 거두어 서쪽에 두었다.
《 위략(魏略)》 #
따라서 송씨(宋氏) 성을 가진 송나라 유민들은 65년간은 제나라 백성이 되었다가 진나라 백성이 된 셈인데 중국 최조 통일 왕조인 이 진(秦)은 또 약 20년은 짧은 기간 유지하다가 얼마 못가 찢어지고 그 유명한 초한전쟁이 일어나 중원이 다시 혼란해진다.
중국의 오래된 정사(正史) 중 하나인 《 위략(魏略)》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경 혼란을 피해 옛 연(燕) · 제(齊) · 조(趙)의 집단들이 고조선으로 대거 망명했고 준왕이 이를 받아줬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나와있다. 당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봤을 때 제나라 유민들 중 송씨(宋氏) 성을 가진 집단들도 포함되었을 수 있고 따라서 진한시대 전후로 송씨(宋氏) 집단이 만주 일대 요서, 요동지역에 들어왔을 확률을 배제하긴 어렵다.
이러한 가능성을 좀 더 높여주는 대목이 또 다른 중국 정사(正史)인 《 후한서(後漢書)》에 나와있는데
송의(宋意)의 자(子)는 백지(伯志)이다. 부친인 송경(宋京)은 『대하후상서(大夏侯尙書)』의 교수로서 〈관위가〉 요동태수까지 이르렀다. 송의(宋意)는 어려서 부친의 학업을 전수받아
현종 때 효렴으로 추천되어 황제의 뜻에 부합하게 질문에 답하여...
《 후한서(後漢書)》 #
위 기록을 통해 송경(宋京)이라는 인물이 대략 기원후 50~70년 사이에
한나라의
요동군
태수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당 기록은
진한시대인 1세기에 송씨(宋氏) 집단이 요동 지역에 자리잡고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후한서(後漢書)》 #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요동 지역에 먼저 터를 잡았던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한사군 설치와 동시에 요동군이 확장되면서 고조선 영역이었던 요동이 한나라의 요동군 관할로 편입된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에 요동으로 들어왔던 중원계 유민들도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로 남하한 세력들을 제외하면 요동군으로 그대로 흡수된 상황이었다.
요동 지역에 송씨(宋氏)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 정사(正史) 뿐만 아니라 한국 측 정사(正史)인 《 삼국사기》에도 나와있다.
349년에 〈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연(前燕)의
동이호군(東夷護軍)이었던
송황(宋晃)을
전연(前燕)에 압송하였다.
전연(前燕)의 왕
모용준(慕容雋)은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바꾸어 활(活)이라 하고, 벼슬을 내려 중위(中尉)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위에 나오는
송황(宋晃)이라는 인물은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의 동이호군(東夷護軍) 장수였는데
후조(後趙)가
전연(前燕)을 공격하자
후조(後趙)의 황제
석륵과 내통했다가
전연(前燕)의 황제
모용황이 이를 격퇴하자 338년도에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비록
송황(宋晃)이 고구려로 망명했다 349년에 다시 송환된 인물이라
한반도에 완전히 뿌리내린 것은 아니지만 송씨(宋氏) 인물이
삼국시대부터
한민족의 영역으로 들어왔던 사실은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동이호군(東夷護軍)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한나라 멸망 후 위나라가 동이족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동시에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요동성에 동이교위(東夷校尉)라는 직책을 만들었는데 동이호군(東夷護軍)은 이 동이교위(東夷校尉) 휘하에 동쪽의 이민족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군대다. 이런 동이교위(東夷校尉)의 통제를 받았어야 할 동이족[22] 중 하나인 모용선비족은 모용외 집권 이후 강성해 저 전연을 건국하고 역으로 동이교위(東夷校尉)의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고 모용황 들어서는 모용선비족 외에도 현지인들을 적극 채용하는데 송황(宋晃) 역시 동이교위(東夷校尉)가 있는 요동에 연고를 두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즉, 해당 기록을 통해 앞서 언급된 요동태수 송경(宋京) 이후 세월이 좀 흐른 뒤에도 송씨(宋氏) 집단이 여전히 요동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송황(宋晃)이라는 인물이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에서 관직을 받았다가 갈족이 세운 후조의 석륵과 내통하기도 하고 예맥인들이 세운 고구려로 망명해서 10년 넘게 거주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 당시 요동 지역에 있던 송씨 집단(宋氏)은 중원인과 예맥인 사이에서 큰 경계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요동 지역은 고조선 멸망 후 몇 차례 중원 왕조 지배에 있다 광개토대왕 때 와서 고구려가 후연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다시 한민족 영역으로 들어오고 발해로 이어지게 된다.[23]
《 고려사》에서는 앞서 언급된 송함홍(宋含弘)에 대한 기록 중 발해와 관련한 유의미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928년 9월 25일(음) 정유
발해인(渤海人) 은계종(隱繼宗) 등이 귀부(歸附)해왔는데, 천덕전(天德殿)에서 왕을 알현하며 세 번 절을 하자 사람들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대상(大相) 송함홍(含弘)이 말하기를, “나라를 잃은 사람이 세 번 절하는 것은 옛날의 예법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
928년에
발해 지배층
은계종(隱繼宗)이
고려에 귀부한다는 의미로
왕건에게 세 번 절을 올리는데
왕건을 포함한 그 측근들 역시 이런 행위가 항복하는 의식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예법에 어긋난다고 다그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928년이면 당시
후삼국 통일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라 한반도 내 크고 작은 여러 세력들을 규합하고 복속 시키는 과정에서 항복 내지 귀부를 여러 번 받아봤을
왕건과 그 측근들이 항복 예법 자체를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 고려사》 #
이러한 세 번 절하는 귀부 내지 항복 의식은 8~900년대 당시 한반도에서는 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며 반대로 발해에서는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오직 송함홍(宋含弘)만이 해당 의식을 항복 의식으로 인지해 바로잡았다.
이 송함홍(宋含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 고려사》에 처음 등장할 때 궁예의 신하로 나오지만 당시는 고려 태조였던 왕건 역시 궁예 휘하의 장수였다. 또한 궁예가 송함홍(宋含弘)에게 비문을 해독하게 시켰을 때 비문에 적혀있는 장차 왕건(王建)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내용을 사실대로 알리면 왕건과 자신이 살해될까 두려워 거짓으로 꾸며서 말했다는 내용을 보면 궁예보다는 왕건에 충성하고 따랐던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송함홍(宋含弘)과 패서 호족과의 강한 연결성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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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정황 | 패서 지역 위치 |
당시 고구려 유민 계열 호족들이 자리 잡고 있던 이 패서(浿西) 지역은 발해와 인접한 국경이었다. 800년대 중후반 즘 발해의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하면서 한반도 북쪽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하는데 이때 말갈-여진 세력들이 득세하는 등 혼란이 발생해 이를 피해 한반도 북쪽에 거주하던 예맥계 유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게다가 908년에는 발해와 요나라 전쟁이 일어나자 만주에 거주하던 발해 유민들까지 한반도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들어 송함홍(宋含弘) 또는 그 선대들이 발해에서 망명해 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어서 《 고려사》에는 발해 지역에 송씨(宋氏) 집단이 존재했다는 좀 더 명확한 기록도 나오는데
제3차 여요전쟁 직전인 1018년 송광습(宋匡襲)이라는 인물을 포함해 10명의 장성이 고려로 망명해 오는데 거란식 복성이 아닌 단성을 쓰는 것을 보아 거란족이 아니라 926년에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게 복속된 옛 발해인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요나라는 제국에 가까운 영토를 확보하자 동화주의보다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을 구분하고 다민족 사회를 유지했고 발해 멸망 이후 발해의 영토는 대부분 거란족이 차지하게 되니 " 거란 땅에서 온 옛 발해인들이 고려에 귀부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송씨(宋氏) 집단이 발해 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송씨(宋氏)가 발해 유민들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을 가능성을 매우 높여주고 있다.
이렇게 발해의 피난민 또는 유민들을 통해 송씨(宋氏) 집단이 한반도 중부, 남부로 들어왔다고 추정해볼 만한 기록들은 존재하지만 이게 한반도에서 송씨(宋氏) 집단의 첫 시작이라고 보는 부분에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멸망 직후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을 따라 당시 고구려 유민이었던 송씨(宋氏) 집단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왔다는 견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669년 1차 고구려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고구려부흥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고구려 왕족 안승은 고구려 유민 4천여 가구를 이끌고 신라에 귀부한다. 이때 내려온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배려로 당시는 금마저로 불렸으며 현재 금마면으로 불리는 익산과 논산 사이 지역을 중점으로 보덕국을 세우고 존속 기간이 아주 짧고 형식적이긴 했지만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가 만들어지는데 한국 송씨(宋氏) 최대 본관인 여산 송씨, 은진 송씨 모두 당시 보덕국의 영향권에 있던 지역을 관향으로 하고 있다.
해당 견해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 유민 계열이었던 송씨(宋氏) 집단은 신라에서 기반 자체가 전무했을 것이고 따라서 신라 중앙 정부에 진입하지 못하고 보덕국 멸망 후 분산 배치되어 인근 소규모 호족 세력으로 남아있다가 후삼국시대에 진입하면서 정체성을 완전히 잃지 않은 송씨(宋氏) 집단이[24] 같은 고구려 유민 계열인 패서 호족이 주도하는 2차 고구려부흥운동에 가담해 고려 중앙 정부 진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오고 난 뒤 약 250년 정도 지난 시점에 패서 호족을 필두로 한 2차 고구려부흥운동 대목에서 송씨(宋氏) 인물이 한국 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송씨(宋氏) 본관 중 규모가 제일 큰 여산 송씨, 은진 송씨 관향이 익산과 논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과 통일신라 때 문헌에서는 송씨(宋氏) 집단이 등장하지 않다가 2차 고구려부흥운동에서 해당 성씨가 등장하는 점 역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위의 내용들을 총 종합해 역사적 사실들을 덧붙여 연도별로 나열해 보면
{{{#!wiki style="padding: 15px; border-radius: 9px; border: 1px solid #666; background-color: #EEE,#222"
* 기원전 11세기: 상나라 멸망 후 상족(商族)들이 상나라를 계승한 송나라를 건국
* 기원전 11세기: 상나라 멸망 후 상족(商族)들이 상나라를 계승한 송나라를 건국
- 기원전 286년: 송나라도 제나라에게 멸망하고 상족(商族) 유민들은 제나라 백성으로 편입
- 상족(商族)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나라 국호를 성씨(姓氏)로 삼으면서 송씨(宋氏) 집단 탄생
이렇게 정리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문헌학적 관점에서 보면 송씨(宋氏) 성을 가진 만주 또는 요동 지역의 유민들이 삼국시대- 후삼국시대 어느 시점에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송씨(宋氏)가 뿌리내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따라서 현재 족보상 도시조로 모시고 있는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宋柱殷/柱恩) 혹은 신라 대아찬 송순공(宋舜恭)이 설령 가공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송씨(宋氏) 집단이 고려 이전에도 한민족 영역권에서 활동 했던 사실을 배제하긴 어렵다고 볼 수 있겠다.
* 참조: 성씨 전문기자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 - 여산 송씨편 은진 송씨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0〉 송씨(宋, 松氏), 여산송씨십이세계(礪山宋氏十二世系)-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여산송씨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삼국사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2.1.3. 송씨(宋氏) 본관 목록
2.1.3.1. 여산 송씨
고려 시대에 문과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진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한다. 증손 송송례(宋松禮)는 추성익대보리(推誠翼戴輔理) 동덕좌명공신(同德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랐으며, 찬성사(贊成事) 중찬(中贊),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장남 송염(宋琰)은 충렬왕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고 차남 송분(宋玢)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추성찬화안사공신(推誠贊化安社功臣)에 책록되고 낙랑공(樂浪公)에 봉해졌으며 정승(政丞)을 지냈다.조선 중종 때 송질(宋軼)은 영의정을, 송세형(宋世珩)은 대사헌을 거쳐 호조·이조판서를 지냈다. 선조 때 송상현은 문과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내고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 분전했으나 끝내 전사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송희립은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시종일관 활약한 군관으로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세충사(世忠祠)에 배향되었다. 송시철(宋時喆)은 좌승지를 거쳐 형조·공조참의등을 현종 때 송광연(宋光淵)은 문과급제후 예조참의 황해도관찰사 이조참판등을 지냈고, 숙종 때 송진명(宋眞明)은 호조·이조·예조판서를, 영조 때 송인명(宋寅明)은 좌의정등을 지냈다.
2015년 기준 인구 298,231명으로 송씨 본관 중 1위.
2.1.3.2. 은진 송씨
고려시대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源)을 시조로 한다. 증손 송명의(宋明誼)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집단(司憲府執端)으로서 공명정대함에 포은 정몽주(鄭夢周) 등 제현(諸賢)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송유(宋愉)는 불과 열두살에 과거급제하여 종7품 부사정(副司正)에 오르고 회덕 배달촌에 자리 잡으면서 송촌(宋村) 지명이 생겼는데 이곳은 지금의 송촌동이다.학문이 뛰어나 송시열, 송준길과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진 송규렴(宋奎濂)은 문과급제로 승지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성 예조판서등을 지내고 동춘당 송준길은 병조판서 우참찬 영의정등에 올랐다. 우암 송시열은 장원급제로 대군 사부에 임명받고 좌참찬 우찬성 우의정 좌의정등을 지냈다.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송자(宋子)로 존숭되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종사(宗師)되었다. 송상기(宋相琦)는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대제학 공조 호조 예조 병조 이조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성리학의 대가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은 송인수(宋麟壽)는 대사헌 이조참판등을 지냈고 대사성때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송환기(宋煥箕)는 과거급제후 정조의 신임을 받아 승지에 특채되고 대사헌 공조, 이조판서 우찬성등을 지냈다. 송근수(宋近洙)는 이조참판 대사성을 거쳐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송시열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게 된다.
2015년 기준 226,050명으로 송씨 본관 중 인구 순위 2위.
2.1.3.3. 진천 송씨
신라 헌강왕때 대아찬(大阿湌)을 지낸 송순공(宋舜恭)을 시조로 한다. 고려시대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낸 송인(宋仁)은 진천 송씨의 중시조다.송인은 찬화공신(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손자 송국첨(宋國瞻)은 고려 강종(康宗)때 과거급제 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금나라가 침입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공을 세웠다. 정언(正言)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형부상서(刑部尙書)등을 지냈다.
송순(宋恂)은 고려 고종(高宗)때 진강부전첨(晉康府典籤) 참지정사(參知政事) 지공거(知貢擧)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올랐다가 수태위(守太尉)를 더하였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致仕) 하였다. 송언기(宋彦琦)는 고려 고종때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지냈다. 송광보(宋匡補)는 고려 공양왕때 예부상서를 송찬(宋贊)은 도승지 우참찬을 거쳐 판중추부사 형조참판 호조참판 우참찬등을 지냈으며 조선 4대조를 섬긴 중신으로 중종실록과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송창(宋昌)은 병조좌랑 도승지 공조판서 좌참찬등을 역임했으며 사관이 평하길 훌륭한 인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한다. 송영구(宋英耉)는 병조참판을 지내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사윤(宋思胤)은 열여덟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과 목사등을 지냈으며 진천 송씨는 조선시대에 18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진천 송씨 유명인으로는 가나다라, 고래사냥등으로 유명한 가수 송창식, 야구선수 송진우, 개발자 보르시 송성욱 등이 있다.
2015년 기준 인구 32,690명이다. 3위에 해당하나 송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산 송씨와 은진 송씨에 비해 찾기 어렵다.
2.1.3.4. 연안 송씨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첨의부(僉議府)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해진 송경(宋卿)을 시조로 한다. 송경은 반란(叛亂)을 평정(評定) 하고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킨 공(功) 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으며 벽상에 도형 되었다. 이어 지밀직사사, 서북면 체찰사를 지내고 추성익대보국동덕좌명공신(推誠翼戴輔國同德佐命功臣)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해졌다.송경의 아들 송훈(宋勛)은 과거 급제해서 중의대부와 상서성 이조판서등을 역임하고, 손자 송광언(宋光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이후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추증되었다. 송운룡(宋雲龍)은 고려 말기에 문과 급제해서 신호위 보승중랑장 사천감등을 역임했고 송복륭(宋復隆)은 정당문학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호부상서등을 지냈다.
송운렴(宋雲濂)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빈시 주부 제용 감주부 상원군수 성천진관병마절제도위등을 역임했다. 송광언(宋光彦)은 학문이 뛰어났으며 문과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송승연(宋承衍)은 과거급제해서 집의 병조참판(兵曹參判)등을 지냈고 송유량(宋有良)은 참의 예조판서 도총관(都摠管)등을 지냈다.
2015년 기준 인구 13,098명이다.
2.1.3.5. 야성 송씨[25]
고려 목종(穆宗)때 간의대부(諫議大夫) 총부의랑(摠部議郞) 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야성군(冶城君)에 봉해진 송맹영(宋孟英)을 시조로 하고 있다. 야성(冶城)은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冶爐)의 별칭인데 이때부터 후손들이 본관을 야성으로 하여 경상도 야로현에 정착해 살았다.시조 송맹영의 아들 송창(宋昌)은 고려조에서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냈고, 손자 송우(宋瑀)는 문림랑(文林郞)으로 소부소감(小府少監)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송인서는 상서호부(尙書戶部)에 올랐으며 송구(宋構)가 경기감사와 어사(御使)등을 역임하였고 송길창(宋吉昌)이 또다시 공민왕 때에 세운 공로에 힘입어 다시한번 야성군에 재차 봉해진다. 경상북도 성주군 송천으로 이거하여 14세에 이르러 직장공파·상호군공파·대호군공파·현령공파·선전공파 등으로 갈라졌다.
송광심(宋光心)은 문과급제하여 병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성리강요를 저술했다. 숙종대에 송원기(宋遠器)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송희규(宋希奎)는 흥해군수와 장령, 상주목사 등을 지냈고 송광정(宋光井)은 장원급제하여 권지학유에 취임하고 동학교수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군수로 부임하고 사헌부장령 형조낭관등을 지냈다. 송천흠(宋天欽)은 용양위부호군과 상주목사를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어 관민의 칭송을 받았다. 송준필을 비롯한 후손 11명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여, 독립 유공 가문으로 이름이 높다. 송규(宋奎)는 원불교(圓佛敎) 제2대 종법사(宗法師)다.
2015년 기준 인구 20,201명이다.
2.1.3.6. 신평 송씨
고려시대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서운관정(書雲觀正) 겸 습사도감판관(習射都監判官)을 지낸 송구진(宋丘進)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신평송씨는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12세손 송말선(宋末善)이 홍주(洪州)의 신평(新平)에 정착하였고 후손들이 홍주(洪州)와 신평(新平)으로 본관이 갈라져 잇게 되었다. 그의 6세손 송희경(宋希璟)이 조선 세종(世宗)때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이르러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고 조선 성종때 문과급제한 송흠(宋欽)은 수찬(修撰) 병조좌랑(兵曹佐郞) 지평(持平) 등을 거쳐 담양(潭陽)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과 이조(吏曹) 병조판서(兵曹判書) 우참찬(右參贊)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송순(宋純)은 중종(中宗)때 문과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명종(明宗)때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선조(宣祖)때 대사헌(大司l憲)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서 시조문학(時調文學)의 정수를 계승하여 명작을 남겼다. 송해용(宋海容)이 현감을, 송흠의 아들 송익침은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송지원(宋之遠)은 공조참의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송해령(宋海寧)은 겸교리(兼校理)와 감찰(監察)을 송덕미(宋德美)는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과 참의(參議)를 지냈다.2015년 기준 인구 13,916명이다.
2.1.3.7. 남양 송씨
시조 송규(宋奎)는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난신(亂臣)의 참소를 입고 후당명종(後唐明宗) (926년~ 933년) 때 동료 7학사와 함께 신라에 동래하여 경순왕의 후대(厚待)를 받으시다 고려가 건국하자 세상(世上) 을 등지고 청운야학(靑雲野鶴)으로 벗을 삼다가 947년 타계하시니 우리나라 남양송씨는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그 후, 후손 충(忠)이 고려 예종(睿宗) 무자년(1108년)에 길주에 침입한 여진과 싸우다 전사하니 왕으로 부터 상장군(上將軍) 과 병부상서(兵部尚書)에 증직(贈職) 되었다는 내용이 고려사 와 고려사 절요에 나타나며 그 다음 진(進), 아들 함진(含進), 손자 신준(臣俊), 증손 득청(得淸) 등 4대가 흥양이씨족보 (興陽李氏族譜) 와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실려 있으나 그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알 수 없어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감찰대부(監察大夫)을 지낸 남양군(南陽君) 송세보(宋世輔)를 기세조(起世祖)하여 중시조(中始祖) 일세(一世) 로 하는 도촌파(道村派) 와 고려 말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낸 송공절(宋公節)을 기세조(起世祖)하여 중시조(中始祖) 일세(一世) 로 하는 [안서파](안동파, 서호파)[雁洞派,西湖派]로 각 종파를 이루었다.
2015년 인구는 11,041명이다.
2.1.3.8. 홍주 송씨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송계(宋桂)를 시조로 하고 있다. 홍주 송씨의 선계(先係)는 여산 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有翊)의 12세손 송말선(宋末善)이 홍주 신평(新平)에 살면서 여산 송씨에서 분적하였다. 송계의 아들 송기손(宋麒孫)은 성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남평(南平)과 구례(求禮) 등지의 수령을 역임한 후 내직으로 들어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등을 지내고 그의 아들 대에서 이요당공파(二樂堂公派). 우유당공파(優遊堂公派). 청심헌공파(淸心軒公派) 등 크게 세갈래로 분파했다.아요당공파의 송준기(宋駿)가 참봉 별좌(別坐) 주부(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단성현감(丹城縣監)등을 지냈으며 중시조 송평(宋枰)은 조선시대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와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 등을 지내고 송평 세대부터 홍주에서 담양(潭陽)으로 이거하여 살게되었다. 송문중(宋文中)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고 그의 아들은 송개신(宋介臣)은 조선 태조때 조선시대 첫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송정순(宋廷筍)은 형조좌랑 예조정랑 구례현감(求禮縣監) 등을 지냈다. 송정황(宋庭篁)은 조선 명종 때 장원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교서(校書)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지냈고 문인들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이윤(伊尹)과 안자(顔子)에 비유하였으며 저서에 주자문록(朱子文錄) 정자송공유고(正字宋公遺稿)등이 있다. 송타(宋柁)는 유려한 문장과 학식으로 유명하였는데 화암수록 매농곡 화암구곡 등의 문집을 남겼으며 정유재란때 공을 세워 운암서원(雲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들 송수(宋燧)는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 송계은(宋繼殷)이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송두문(宋斗文)은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를 송동식(宋東植)은 군수(郡守)를 송익중(宋益中)은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송인하(宋寅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등을 지냈다.
2015년 인구는 9,679명이다.
2.1.3.9. 청주 송씨
청주 송씨의 시조 송유충(宋有忠)은 여산 송씨 밀직공(密直公) 송방영(宋邦英)의 아들 표(標)의 장남으로 조선 개국 초에 나라에 공을 세워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지며 송유충(宋有忠)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송훤(宋暄)은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였으며 이때부터 본관을 청주로 하여 후손들이 세계를 이어왔고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26]. 송훤(宋暄)의 아들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낸 송승은(宋承殷)으로 경상도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나갔다가 경상남도 김해 하계면 이거하면서 김해가 청주 송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송숙형(宋淑亨)은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주부(主簿)등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송경(宋經)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송경(宋經)의 아들 송창(宋昌)은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송창(宋昌)의 아들 송빈(宋賓)은 임진왜란 당시 김해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자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다. 영남의 요충지를 사수하며 혈투를 벌였다. 송빈(宋賓)은 공조참의와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으며 이순신(李舜臣)의 현손인 부사 이봉상(李鳳祥)이 주지(州誌)를 보다가 송빈(宋賓)의 공적을 발견하고 감격한 나머지 충렬사(忠烈祠)를 건의해서 향사하게 되었고 또한 부사 정현석(鄭顯奭)의 상소로 건립된 사충단(四忠壇)과 더불어 배향되었다. 송빈(宋賓)은 임진왜란 김해성사충신(金海城四忠臣)중에서도 필두에 오르는 인물로 대표적인 의병장이라고 할 수 있다.[27] 송빈(宋賓)의 두 아들 송정백(宋廷伯)은 청암공파(晴庵公派)로 송정남(宋廷男)은 부사공파(府事公派)로 각각 분파되었다. 송빈(宋賓)의 아우 송밀(宋密)은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현감등을 지냈고 선정관(宣傳官)을 지낸 아들 송민영(宋敏英)은 만호공파(萬戶公派)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송정영(宋廷英)은 부사공파(府事公派)로 분파하였다. 송처관(宋處寬)은 세종때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를 거쳐 집현전부제학 이조참의 전라도관찰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역임했다 동생 송처검(宋處儉)은 문과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송제용(宋齊龍)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송재식(宋在軾)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2015년 인구는 8,171명이다.
2.1.3.10. 용성 송씨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성 송씨는 남한에 4,1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1.3.11. 기타
- 문경 송씨
- 서산 송씨
- 덕산 송씨
- 옥구 송씨
- 나주 송씨
- 김해 송씨
- 회덕 송씨
- 양주 송씨
2.2. 소나무 송(松)
대한민국과 중국의 성씨.중국에서도 쓰이는 성씨이며 216위 정도에 머무는 듯 하다. 중국 내에서도 드문 성씨로 취급하는 모양 #
한국에서는 통계청이 시행한 1985년도 인구총조사에서 총 18가구 177명으로 나타났는데, 200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493가구 4,737명으로 대한민국 성씨 중 130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마 전산 오류일 확률이 높다. 상식적으로 특정 성씨를 가진 사람이 15년 만에 4700명 가까이 새로 생겨났다가 15년 만에 다시 사라져버리는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리 없기 때문이다.(...) 2015년도 인구 총조사에서는 아예 18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한국에서 파악된 소나무 송씨(松氏)를 사용하는 본관은 화순 송씨가 유일하지만 2015년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아예 0명으로 잡히는 걸 보아 없어진 듯 하다. 남아 있는 나머지 18명은 본관 조차 파악 불가능한 상태다.
2.2.1. 송씨(松氏)의 탄생
소나무 송씨(松氏)의 기원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은 여러개로 갈리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 된 일화는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과 소나무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사기·진본기》와 《명현씨족 언행류고》에 따르면,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조정의 관리들을 데리고 태산에 올라가 제사(봉선의식)를 지내고,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는데, 산에는 바람을 막을 곳이 없었다.
마침 산에는 다섯 그루의 큰 소나무를 발견했는데, 가지와 잎이 무성해 마치 큰 정자처럼 둘러 싸여 있어 진시황제는그 소나무 아래로 달려가 비바람를 피할 수 있었다.곧 비바람이 그치자 진시황은 기뻐하며 이 큰 나무가 보호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오대부송(五大夫松)'으로 상봉하였다.
이 때 진시황제를 따라 산에 오른 관리들 중 일부는 황제의 봉호를 받지 못하여 성씨가 없었는데 진시황제가 아직 봉호를 받지 못한 관리들에게 소나무의 덕을 보았다 하여 소나무 송(松)을 성으로 하사해 대대로 전해 내려해 진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이 전설에 따르면 소나무 송(松)을 성씨로 쓴 시기는 대략 진한시대인 기원전 200년대 즘 탄생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2.2.2. 한국에서의 송씨(松氏)
(
주몽이)
비류국(沸流國)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의 왕
송양(松讓)이 나와서 보고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다. 땅이 작아 두 주인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빌붙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왕(
주몽)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그(
송양)와 더불어 말다툼을 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기예를 겨루었는데,
송양이 당해낼 수 없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한국 역사에서 소나무 송씨(松氏)를 쓰는 인물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고구려에게 기원전 36년에 합병당한
비류국의 군주인
송양(松讓)이
정사(正史)로 인정받은 기록상 소나무 송씨(松氏)를 쓰는 첫 인물이다. 다만 이를 시조로 삼는 후손들은 현재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현재 한국에서 유일하게 소나무 송씨(松氏) 본관이 확인되는 화순 송씨와는 관련이 없다.
2.2.3. 송씨(松氏) 본관 목록
2.2.3.1. 화순 송씨
화순 송씨(和順 松氏)는 다른 국내 송씨와는 다르게 소나무 송(松) 자를[28] 쓰며 현존하는 본관은 화순 단본이다.해당 기록에 따르면 화순 송씨의 시조는 어려서 일본에서 고아가 된 송길만이라는 현대 인물인데 막연히 어머니를 찾아 1946년(18세때)에 귀환선을 타고 부산에 왔다. 부모의 성을 몰라 1959년 무효적자 자진신고 때에 일본에서 마쓰모토(松本)라으로 불리웠으므로 松本에서 소나무 송(松)자를 따 성을 송씨(松氏)로 신고하여 송씨(松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즉, 현대 들어와서 새로 생긴 성씨이다.
화순 송(松)씨는 통계청이 시행한 1985년도 인구총조사에서 1가구 2명[29]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미상 또는 기타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200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486가구 4,643명으로 나타났는데 이것 역시 전산 오류로 보인다. 화순 송씨는 남아있는 족보 기록에 의하면 현대 와서 생겨난 성씨인데 불과 60년 만에 4000명 넘는 후손들이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2015년 조사에서는 불과 0명으로 본관 자체가 없어진 듯 하다.
2.3. 보낼 송(送)
통계청에서 실시한 2015년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보낼 송(送)을 성씨로 쓰는 인구가 9명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보낼 송(送)을 사용하는 해당 성씨는 중국 쪽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희귀 성씨다.3. 그 외
3.1. Song
비 한자문화권에도 있는 성씨이다. 리고베르 송이 대표적인 인물이다.4. 실존 인물 혹은 가상인물
자세한 내용은 송(성씨)/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성씨 송이라고도 한다.
[2]
송(춘추전국시대) 때 부터 사용 된 문양이며 현재 중국 내에서는 송씨(宋氏) 집단을 대표하는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
[3]
은(殷)나라로 불리기도 했다.
[4]
현재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한국 학계에서는 산시성(산서성) 진중시로 추정하고 있다.
[5]
현재
재무부 장관에 준하는 직급
[6]
도시조 송주은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한자로 柱殷과 柱恩은 둘 다 나오기 때문에 일단 둘 다 표기
[7]
본관이 모시는 직계
시조는 아니지만 옛
문헌이나 다른
본관의
족보를 통해 성씨(姓氏)의 최고
조상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도시조라고 부른다.
[8]
사실 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9]
중원계=
한족계가 아니다
중원은 그냥 지리적인 명칭이며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 전 또는 멸망 후에
중원에서는
한족을 포함 여러 민족들이 뒤섞였거나 대립했다. 고대부터 중국 땅에 존재했던 여러 민족들이
한족으로 많이 동화된 현시점에서도
중국에는 여전히 56개 소수민족이 존재하며
중국공산당은 이들을 한대 묶기 위해서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10]
처음에는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아들 무경을 제후로 봉했는데 무경이
상나라 부흥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무경을 처형했다. 하지만 무경 밑에 있던
상족(商族)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이들을 다스리고자
상나라 왕족 중
주나라에게 협력적이었던
주왕의 이복형
미자계를 그 자리에 앉혔다.
[11]
현재
재무부 장관에 준하는 직급
[12]
도시조 송주은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한자로 柱殷과 柱恩은 둘 다 나오기 때문에 일단 둘 다 표기
[13]
본관이 모시는 직계
시조는 아니지만 옛
문헌이나 다른
본관의
족보를 통해 성씨(姓氏)의 최고
조상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도시조라고 부른다.
[14]
쉽게 말하면 중국의 네이버 정도로 볼 수 있다.
[15]
이 족보는 1606년에 처음 편찬되었고 현재 문화재로 보존 중인 책은 1653년에 나온 간행본이다. 이 족보 이전에도 여산 송씨 보첩이 존재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손들이 남아있는 자료들을 모아 취합해 다시 발간한 것이다.
#
[16]
3등 공신으로 추정
[17]
송능(宋能)은 문헌을 통해 914년생으로 정확한 나이가 확인 가능하고 송함홍(宋含弘)은 918년에 이미
태봉에서 문사(文事)를 관장하는
문인이었다는 대목을 보면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나 송함홍(宋含弘)이 최소 아버지 뻘일 확률이 높다.
[18]
고구려 유민 출신 호족
[19]
고려는
고구려
유민 출신
호족들 주도로 고구려를 직접 계승해 건국한 국가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고구려 멸망 직후에 일어난 부흥 운동 뿐만 아니라
후삼국시대에 일어난
후고구려 및
고려 건국 역시
고구려 부흥 운동으로 본다. 애초에
고구려 5세기 부터 국호를
고려로 바꿨기 때문에
고구려=
고려로 볼 수 있다.
[20]
고려 초 때만 해도
귀족들 조차
성씨(姓氏)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정부에서는
성씨(姓氏) 사용을 추진하기 위해
성씨(姓氏)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되었다. 이 봉미제도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성씨(姓氏)가 없는
귀족층들은
중국의 성씨를 빌려다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족보가 오래될수록 권위가 높아지는 시대였고 그 권위가 과거 합격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사서 등 옛 서적에 존재하는
중국의 성씨와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중국 인물들을 가져다
족보를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성씨(姓氏)는 가문의 권위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실제로 자신들 조상과 혈연이나 관련이 없는 중국의 성씨를 빌려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족보에 존재하는 중국 인물들이 중국 측 기록에는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경우가 다수이다.
[21]
세부적으로 따지면 제, 초, 위 연합군이었는데 제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혼자 땅을 다 차지했다.
[22]
동이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민족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동이(東夷)는 사용자 입장에서 동쪽의 이민족을 뜻하는 용어다.
[23]
정확히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영향권에 잠깐 들어가긴한다.
[24]
보덕국 멸망 이후 당시 한반도 남부로 내려왔던 고구려 유민들은 중심점을 잃고 대부분 신라인으로 편입됐지만 보덕국 멸망에서 후삼국시대 진입까지 기간이 약 200년이라 선대들을 통해서 고구려에서 이주해 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25]
야로 송씨라고도 한다.
[26]
현재
청주시
서원구라는 이름의 어원이기도 하다.
[27]
송빈(宋賓)을 추모하는 충단(忠壇)은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 있고 추원재(追遠齋)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도강동에 있다. 증이조참판청주송공순절기념비(贈吏曹參判淸州宋公殉節記念碑)가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있다.
[28]
강릉 성씨(江陵 成氏)의 시조로 알려진 송씨가 원래는 訟 자를 썼었지만 현재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워 사실상 사라진 성씨다. 강릉 성씨의 시조인 송흔적(訟昕迪)은 고려시대에 예빈경을 지냈으며 6대손이 고려 목종(穆宗)의 휘와 비슷한 송(訟)자를 피휘하기 위해 외가쪽 성(姓)인 성(成)씨로 바꿨다고 한다.
[29]
서울특별시 0가구 1명, 전라남도 1가구 1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