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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3월 23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에무라 히사오(江村久雄) |
출생 | 1917년[1] 3월 6일 |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1정목 25번지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1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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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5년 7월 23일 |
경상북도 대구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14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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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유인수는 1917년 3월 6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1정목(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1가)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으로 이주하였다.그는 1934년 경성부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중 4월 장현진(張鉉進)·유형(柳珩) 등 교우들과 함께 반제동맹(反帝同盟)을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같은 해 5월 행동강령을 만드는 등 체제를 정비하면서 동지규합에 힘을 쏟았다. 또한 사회과학서적을 연구하고 좌익 독서회를 열면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처음에 중앙고등보통학교 반제동맹은 갑·을조로 나누어 운영되다가, 같은 해 9월 유인수의 책임 아래 반제운동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1935년 2월 반제운동 '전교오르그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런데 1935년 2월 동교생 정양원(鄭良元)·김학수(金學秀) 등 2명이 사소한 일로 퇴학처분을 받게 되자, 2월 20일 반제동맹의 회원인 한동정(韓東正)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이에 거세게 항의하다가 이튿날 일본 경찰에 붙잡히는 바람에 조직이 발각되었다. 유인수도 당시 폭력행위를 감행했다고 하여 이에 연루되었고,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검거되어 그해 5월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6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등의 혐의로 징역 2년(미결 구류일수 중 300일 통산)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7월 23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유인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 11월 5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
[1]
1936년 수형인명부에는 1887년생으로 오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