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20:32:13

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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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흥.jpg
일본식 성명 닛센 슌케이(日仙俊炯)
족보명 한준형(韓俊炯)
본관 청주 한씨[1]
생몰 1888년 12월 11일[2] ~ 1960년 12월 5일
출생지 함경도 함흥부 가평면 중상리[3]
(현 함경남도 영광군 중상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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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흥은 1888년 12월 11일 함경도 함흥부 가평면 중상리(현 함경남도 영광군 중상리)에서 아버지 한섭용(韓燮容)과 어머니 강릉 유씨 유영신(劉永臣)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 권업신문사(勸業新聞社) 통신원을 역임했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이동녕, 신규식, 여준, 이범윤, 이상룡, 박은식, 허혁(許爀)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20년에는 왕청, 혼춘, 동녕, 영안, 목릉 일대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서기로서 김병하(金炳河)·김헌(金憲)·조봉(趙封) 등과 함께 활약했다. 또한 군자금 모집 차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6월 베이징으로 망명한 그는 선두자사(先頭者社)의 동인(同人)으로 조남승(趙南升)· 원세훈· 서왈보· 박건병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중국국민과 함께 구국구족(救國救族)을 위하여 협력하자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9년 귀국한 그는 그해 8월 함흥중앙학원(咸興中央學院) 및 유치원을 설립, 경영하였고, 1931년 2월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를 설립, 부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전념했다. 1938년 4월에는 함흥대흥상업학원(咸興大興商業學院)을 창립하여 경영하였고, 1942년 6월에는 함흥대동학원(咸興大東學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숙명여자실업학원(淑明女子實業學院)의 원장에 취임했다. 8.15 광복 후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월남했고, 한민당 중앙감찰위원, 동양외국어전문학관(현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관장, 선거법규기초의원을 지내고 1952년에는 장택상 총리 후임으로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 1960년 12월 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예빈윤공파 24세. [2] 청주 한씨 제7교 대동족보에는 10월 1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인근의 능리·장풍리·풍상리와 함께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