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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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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4대 검찰총장
김종빈
金鍾彬 | Kim Jong-bin
파일:김종빈.jpg
<colbgcolor=#1e4a71><colcolor=#fff> 출생 1947년 9월 16일 ([age(1947-09-16)]세)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
본관 김녕 김씨[1]
현직 법무법인 대건 변호사
학력 여수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 전역 ( 군법무관)
종교 불교[2]
가족 아내 황인선, 슬하 3녀
재임기간 제34대 검찰총장
2005년 4월 4일 ~ 2005년 10월 17일
경력 제15회 사법시험 합격
제5기 사법연수원 수료
대전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인천지방검찰청 차장검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제34대 검찰총장 ( 참여정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초빙교수
GS건설 사외이사
GS칼텍스 문화재단 이사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
CJ오쇼핑 사외이사
조선대학교 석좌교수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고문
법무법인 대건 고문변호사
1. 개요2. 생애
2.1. 법무부장관과의 충돌
3. 검사 경력4.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법조인. 제34대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2. 생애

1947년 전라남도 여수시[3] 화양면 장수리에서 태어났다. 행정구역만 여수였을 뿐 길이 뚫려있지 않아 배를 타고 2시간은 들어가야 하는 바닷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하여 잠시 보육원에 맡겨진 적도 있었다. # 중학생 시절 학생기록부에 “…보육원에 있기 때문에 약간 기가 없는 것 같으나, 교과 면이 탁월하게 좋으며 뛰어남”, “침착하고 착실하며 통솔력이 있으며 매사 좋으나 환경이 좋지 못함”이란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보육원을 나와 여수 시내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3년 내내 가정교사로 일하면서도 여수고등학교 재학 시절 늘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1967년 대학입시에서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려 했다. 그러자 고등학교 은사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렇게 대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등록금 모금에 나섰는데,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신문에 실릴 만큼 화제를 모았고, 결국 김종빈은 지역민들이 모아준 십시일반의 성금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병역은 대한민국 육군 법무관으로 복무하였다.

고대 법대 재학 시절에도 계속 가정교사를 하는 등 스스로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4] 그러다가 1973년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 1976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5기. 이후 1978년부터 27년간 검찰에 몸담아 오면서 기획과 수사 분야의 전문가라는 평을 들었다. 1990년 수원지검 강력부장 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유전자 감식 기법을 국내 최초로 수사에 도입하였다.

대검 중수부장 재직중 공적자금 비리 합동수사반을 무난하게 지휘했다. 대검 중수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인 김홍업 등 을 구속하며 동교동계 비리를 밝혀내는 수사를 지휘해 이름을 알렸다. 그뿐만 아니라, ‘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맡아 검찰 선배인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전 광주고검장을 소환 조사하며 ‘칼날 검사’의 위용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정치권의 온갖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홍업씨를 구속기소하는 등 원칙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호남 출신이라는 데 기대를 걸었던 민주당 동교동계로부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는 원성을 들었다. 급기야 곧 좌천될 것이라는 소문이 검찰 안팎에서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계속해서 검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2003∼2004년 대검 차장 시절에는 ‘ 차떼기 사건’ 수사를 맡았는데,[5] 과로로 인해 왼쪽 눈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고생을 했다. 당시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자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수사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2005년 4월,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검찰수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하였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에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2.1. 법무부장관과의 충돌

2005년 10월,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그동안 조문으로만 존재할 뿐 사실상 사문화됐던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으로 표현한 강정구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불구속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검사장들을 소집해 회의한 끝에 받아들이되, 검찰권 침해라며 유감을 표하고는 이틀 후 사퇴하였다. #

국가보안법 철폐는 노무현 정부의 주요 국정 과제였던 '4대 개혁 입법'[6]의 대상 중 하나였는데 당시 한나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논의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 입장에서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국보법 적용에 있어 최소한의 융통성은 발휘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해당 사건을 놓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을 낙태법처럼 법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적용하지 않는 식으로 사문화시키길 원했고 이러한 청와대의 요구를 전달받은 김종빈은 이 사안에 대해 천정배와 논의를 했으나 검찰총장 입장에서 엄연히 실정법이 살아있고 국회에서 논의도 하지 않아 어떤 결론이 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중요한 사건을 검찰이 임의로 판단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 하지만 구속, 불구속의 여부는 생각의 차이일뿐 그 자체로 위법하거나 부당한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을 회피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받아들이고 대신 사퇴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표출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천정배는 법리상 구속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검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김종빈과 합의하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는데 돌연 김종빈과 검찰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고 회고한다.[7]

15년 뒤,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놓고 충돌하자 자신과 윤석열은 처한 상황이 다른 것 같다며 검찰의 총책임자는 검찰총장인데 그 총장의 지휘권을 박탈하는 것은 위법하다는 측면에서 윤석열 총장이 사퇴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입장을 냈다. #

3. 검사 경력

4. 여담

  • 검찰 내 손꼽히는 바둑 애호가로 꼽혔을 정도로 바둑을 좋아한다고 한다.


[1] 영돈령공파 29대손 '빈' 돌림 [2]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63182 [3] 당시에는 여천군이었다. [4] 그때 제자로 만난 여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5] 이때 대검 중수부장이 안대희였다. [6]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언론개혁법) [7] 하지만 신빙성이 적은 것이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은 법률에 명시된 정당한 권리이지만 '개별 사건'에 대해서 '문서'로 행사된 적은 이번이 첫 번째다. 대부분은 민정수석 또는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과 협의하에 문서 없이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 문서로 지휘한 것 자체가 검찰과의 협의가 잘 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