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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 서울 영등포구 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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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ffffff>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김석원 金錫源 | Kim Suk-w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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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년 9월 29일 |
한성부
계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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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8년 8월 6일 (향년 84세) |
서울특별시 관악구 대방동 150 자택 | |
본관 | 경주 김씨 |
배우자 | 서달순(徐達順) |
자녀 | 장남 영철(泳哲), 차남 영수(泳秀), 3남 영국(泳國) |
학력 |
관립재동소학교 (졸업) 관립교동 고등소학교 (졸업) 육군무관학교 (수료)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 27기) |
종교 | 불교 #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5(민)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육군사관학교 (특임 8기)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1915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49년 1950년 ~ 19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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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계급 |
대좌 (
일본제국 육군) 소장 ( 대한민국 육군) |
주요 보직 |
제1보병사단장 수도사단장 제3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전시특명검열단장 |
병과 | 보병 |
참전 |
만주사변 제2차 세계 대전 ( 중일전쟁)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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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육군유년학교 생도,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성남고등학교의 설립자인 교육인으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창씨개명 때 쓰던 이름은 가네야마 사쿠겐(金山錫源)으로 가네야마(金山)는 김씨들이 일본에서 통명으로 가네다(金田)와 더불어 많이 썼던 성씨이고, 사쿠겐은 본명인 석원을 일본식 한자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일제시대 고위 장교를 지낸 경력으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전사한 차남 김영수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다만, 독립운동에 투신한 동료들의 가족을 돌보면서, 조선인 민족주의 운동가들을 대놓고 후원했고, 해방 후 일제 부역 전력에 공개적으로 반성하였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식민지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자서전 중
2. 생애
2.1. 해방 이전
1893년 9월 29일 한성부 계동에서 탁지부 재무회계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재동으로 이사하여 6살 때부터 부친의 동료인 탁지부 대신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함께 한학을 수학했으며, 1902년 관립재동소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졸업하고, 교동 고등소학교에 입학해 1908년 졸업했다. 1909년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으나 7월 대한제국 군 해산으로 육군무관학교 재학생들을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위탁교육 보낸다는 방침에 따라 1909년 9월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5월 본과를 마치고 1913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15년 5월에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병과는 보병으로, 제4사단 보병 제61연대( 와카야마 연대)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1915년 12월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연대장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서 중기관총 교관으로[1] 2년간 복무했다. 1918년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서달순(徐達順, 1900~1970, 참조)과 인천에서 결혼했고, 1919년 중위로 진급한 뒤 1920년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郎) 조선군(일본제국)사령관(1918~1920)이 제4사단장 재임 시절(1916~1918) 예하 보병 제61연대를 시찰하며 알게 된 김석원을 조선군으로 끌어주어 제20사단 예하 보병 제78연대( 용산 연대)로 전보되었다. 1925년 8월 대위로 진급하고 1927년 1대대 3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28년 1월 훈5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20사단 78연대 중기관총대 대장으로 만주에 출전하여 헤이룽장성 방면에서 마점산의 군대와 싸우면서 심양/ 장춘/ 치치하얼 일대 전투에서 세운 공적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700원의 상금을 받았다. 1932년 조선으로 개선한 김석원은 출퇴근길에 보이는 아이들이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고, 이태원의 유일한 사설학원 '조양학원'의 이홍순을 찾아가 만주사변에서 희사받은 상금 700원 중 500원을 기부하면서 육영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어 김석원의 맹렬한 운동으로 조선군(일본제국)에서 용산의 일본육군 용지 600여 평을 조양학원에 무료로 영구임대하도록 하여( #1 #2) 1936년 6월 조양학원이 총독부로부터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받아 이태원보통학교(現 서울이태원초등학교)로 승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 이어 1937년 7월 31일에는 이태원보통학교 교장을 맡은 광산 재벌 원윤수와 함께 원석학원과 사립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신청하여( #), 1938년 1월 10일 재단법인 원석학원 인가를 받고 #, 동년 2월 25일 오늘날 성남중학교(서울)와 성남고등학교(서울)의 전신인 성남중학교(성남고등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4월 개교하였다( #).
1934년 3월에 소좌로 승진했으며 1936년 8월 보병 제78연대 3대대장으로 보임된 상태에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파병된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여단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선봉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북경 부근 남원 전투에서 자신의 대대 병력을 이끌고 국부군 1개 사단[다만]을 격퇴하고 남원행궁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려 전쟁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김석원 대대장도 총상을 입고 텐진의 병원으로 후송될 정도였는데, 그의 곁에 있던 아이가와(相川) 군조가 그를 살리고 대신 총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는 아사히 신문의 종군기자의 원고를 통해 조선은 물론 일본제국 전역과 중국에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이어 1938년 2월에는 산서성 동원고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하진/직산 등 산서성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며 한중일 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기사. 이종찬[3]과 더불어 금치훈장 공3급[4]을 수여받은 단 두 명의 조선인 중 한 명이다.
1938년 9월 중좌로 진급했고 1939년 3월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조선인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대환영을 받았다. 1939년 10월 훈3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1940년 1월 히로시마의 보병 제42연대( 후쿠야마 연대)로 전속되었다가 1940년 12월 다시 지나전선으로 파견되어 산동성에 주둔한 독립혼성 제6여단을 거쳐 제남군사령부에서 간부교육대장을 역임했다. 1942년 2월에는 중일전쟁에서 세운 무공으로 수훈갑, 공3급 욱일중수장을 받았으며 1944년 8월 대좌로 승진하여 조선군사령부 평양병사부 제1과장으로 발령받았다.
일본제국 패망 당시에 최종 계급이 대좌로 당시 생존한 조선인 일본군으로 군 서열로 따지면 영친왕(중장), 홍사익(중장)에 이어 다음이었다. 이응준과 유승렬( 유재흥의 부친) 역시 대좌 계급이었는데, 이들은 일본육사 26기로 김석원의 한 기수 선임이었다. 홍사익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되었고 영친왕이 귀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본군 출신 군경력자 가운데 이응준과 더불어 최고 계급자이며 중국군이나 광복군 출신까지 포함해도 이 정도 경력자는 드물었다.[5]
"용약! 군문에 진입하라. 홍대무변(鴻大無邊)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은 성스런 싸움터에 나가 죽을 각오로 영, 미 귀축의 적을 때려잡는 데 있다"
'이런 취지의 강도 높은 열변이 히틀러식으로 한두 마디 웅장하게 발성될 때마다 박수가 연발 터져 나왔다. 진짜 순도 높은 황군의 최선두답다. 반 시간 남짓의 열변이 토해지는 동안 청중들의 박수가 10여 차례나 장내를 진동시켰다.'
- 부민관 학병권유 강연회에 관한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기사.
태평양 전쟁 때는
이응준과 함께 학병참전 권유 강연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화신'이란 비난을 받은 이유다.'이런 취지의 강도 높은 열변이 히틀러식으로 한두 마디 웅장하게 발성될 때마다 박수가 연발 터져 나왔다. 진짜 순도 높은 황군의 최선두답다. 반 시간 남짓의 열변이 토해지는 동안 청중들의 박수가 10여 차례나 장내를 진동시켰다.'
- 부민관 학병권유 강연회에 관한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기사.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자사전 <망향>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학도병 징집에 불응하다가 마지못해 지원하니 ""내 구두 심문관은 한국인 출신 金山錫源 중좌였다. 심문중 내가 입대를 피하려다 나중에야 지원했다는 것을 나무랐던 것을 후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나는 이종혁과의 오랜 해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회를 맛보았다. 우선 이종혁을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심한 늑막염으로 병색이 말이 아닌 이종혁이었지만 도리어 그가 당당한 인간처럼 보였고 나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였다.
김석원은 일본군에 투신한 조선군인들에게서 엿보이는 복잡한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잘 보여준 인물이다. 일본군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 기수 선배
김경천과
지청천의 가족[6]을 보살펴주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반송장이 되어 돌아온 육사동기 이종혁을 보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도왔다. 1944년 평양에서 강제 징집된 학생들이 무기를 탈취해 무장투쟁을 벌이려다 체포된 평양 학병의거 재판 때는 맨 마지막까지 재판정에 남아 지켜보다 형이 확정되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7] 훗날 회고록에서 일본군 복무 경험을 "무엇이 옳은지 분간 못하고 철없던 시절의 불명예로 여긴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친일경력 및 의혹에 대해 자기합리화나 일언반구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양반이었다.일제 당시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전의회(全宜會)의 등사판 인쇄회보 기관지인 전의회보(全宜會報) 발행인은 1917년까지는 홍사익, 18년이 이응준, 20년에 다시 홍사익으로 돌아가 22년까지 계속되고 다음이 김석원으로 되어있는데 항일운동 중인 지청천, 김광서의 가족에 대한 지원 및 간접 응원이 서술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본인에 대해서는 "김석원은 여러분이 이미 다 아시다시피 다만 빵을 구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상태"라 기술하여 당시 그의 복잡한 심정을 보여준다.
2.2. 해방 이후
1945년 8월 광복 후 고향인 경성부로 돌아와 이응준이 이끈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정부수립이 되어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변화하던 무렵까지 본인의 일제 부역을 자숙하며 군외에 남아있었다.[8] 하지만 국내외의 추천, 특히 중일전쟁 당시 김석원을 알게 된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한국에는 김석원이라는 용맹한 장수가 있다'며 천거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이 "그 김석원이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아직도 군에 복귀를 안했단 말인가?"라며 복귀를 지시, 1948년 12월 육사 특임 8기를 거쳐 대령으로 특별임관해 1여단장에 보임되었고, 각 여단의 사단 승격때 그대로 자리를 지켜 초대 1사단장이 되었다.1949년에 제1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재직 중 남북간 밀무역에 문제가 있다 판단하고는 북한에서 토성으로 넘어오던 명태를 트럭째 죄다 압수해서 임의로 처분한 뒤 그 돈으로 병사들에게 부식, 과일, 과자, 음료수를 지급한 일이 있는데 일명 '명태사건'이라 한다. 하지만 이 밀무역에는 한국 군/관 고위층이 다수 얽혀있었고, 김석원은 이승만 앞에서 채병덕 당시 육군총참모장을 거론했다가 둘 다 예편됐다(1949년 10월).
2.3. 6.25 전쟁
이름 | 출신경력 | 직책 | 주장 |
채병덕 | 일본 육군 | 총참모장 | 결전 |
신성모 | 영국 해군 | 국방부장관 | 결전 |
김홍일 | 국민혁명군 | 육군사관학교장 | 지연전 |
유동열 | 한국광복군 | (전) 통위부장 [9] | 결전 |
지청천 | 한국광복군 | 국회의원 (전)무임소장관 | 지연전 |
이범석 | 한국광복군 | 국무총리 | 지연전 |
김석원 | 일본 육군 | 1보병사단장 | 지연전 |
이종찬 | 일본 육군 | 수도경비사령관 | 결전 |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시영 부통령을 찾아가 의용군이라도 모집해서 공산군을 막겠다고 했고 이 부통령은 찬성하며 중앙청까지 동행하여 최순주 재무부장관을 만났으나 최순주 장관은 대통령 각하의 지시가 없으면 안된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수원, 대전을 거쳐 피난을 가서 대전에서 신성모의 위촉으로 수도사단의 사단장(준장)으로 복귀했다.
6.25 개전 당시 예비역이었던 김석원 준장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김홍일 소장에게 도와줄 일 없냐며 찾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 그가 수도사단장(준장)으로 복귀하자 1사단 시절 그의 예하에 있던 수많은 장교들이 김 장군 밑으로 가겠다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백선엽 회고록에 나온다.
직후 벌어진 진천 전투에서 사단 CP를 격전지 중 하나인 문안산으로 옮겨 일본도를 들고 "사단장이 여기 있는데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저버릴 텐가?" 라며 18연대 장병들을 독려했다고 한다.[10] 하여간 이 위험을 무릅쓴 지휘 덕분인지 북한군 2사단의 남진을 7일간 저지해 냈으며, 이는 서부전선에서 국군 사단급 부대의 첫 승리(목적 달성)이기도 했다. 육군본부는 한미 연합군의 전선 조정을 위해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을 3일간만 진천에서 저지해 줄 것을 희망했고, 김석원과 부하 장병들은 진천을 7일간 사수해 필요 이상의 시간을 벌었다. 그러고서야 국군 제1군단의 좌우측 전선이 모두 남하하면서, 수도사단도 전선 균형 유지를 위해 철수 명령을 받아 청주로 후퇴하게 되었다.
또한 이후 그가 지휘한 포항 철수작전도 군관민이 합동으로 단 1명의 잔류자 없이 철수한 사례로 유명하다.[11]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모두 진이 빠져버렸는데, 그의 회고록에서도 작전 종료 후 참모장 공국진 대령, 통신부장 동홍욱 대위 등이 모두 병상에 누웠고, 그 또한 지병인 위경련으로 병상 위에서 링겔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나타나 이 모습을 보더니 노장군 안위가 염려스럽다며 얘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군단장은 김백일로 변경되고 사단장은 백인엽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인사조치는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그를 곱게 보지 않았던 미군 지휘부와의 마찰이 주 원인이이라는 견해도 있다.
8월31일. 상오10시부터 정오까지 국무회의가 열렸다. 징병법이 확정 발표됐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대구에서 왔다. 그는 대통령에게 김석원·김홍일 두 지휘관을 갈 것을 권했다. 이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콜터」 장군이 고집한다는 얘기였다. -
정일권 회고록
이후 1950년 9월부터 1951년 9월까지 전시특명검열단장으로 부관 및 휘하 장병 일부를 운용하며 전후방 부대를 검열하였으나 1951년 9월부 육군본부로 명령받으면서 1956년 소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할 때까지 부관 1명, 운전병 1명만 배치된 사실상 무보직 장군으로 있었다. 당시 그는 수 차례 예편원을 제출하였으나, 예편하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까 두려워한 이승만 정권에서 예편을 안 시켜줬다는 설이 있다.
헌병사령관 최경록, 사찰주임 유봉순과 함께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조사하기도 한 대표적인 반이승만 정치인 서민호 의원은 최경록의 장모에게 언질을 받고 김석원의 집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거창에서 자행된 학살에 대한 자료와 사진을 전달받았다. 독립운동가 출신 최덕신이 저지른 학살을 일본군 대좌 출신이 파헤치려 노력한 것이다.
1956년 64세의 나이로 예편하자 성남고등학교 교장, 제5대 국회의원( 무소속.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으로 활동했고, 1961년부터 원석학원 이사장을 지냈으며 1978년 8월 6일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회고록인 노병의 한(1977)이 있다. 옛날 책이라 어지간한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려우니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하자. 또 그가 세운 학교인 성남고등학교의 도서관에는 이 책이 여러 권 비치되어 있다. 소제목을 제외한 한자는 모두 국문을 병기하고 있어 세로읽기에만 적응하면 읽기 어렵지 않다.
2.4.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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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젤 콧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차고 다니며 최전선까지 나가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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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회고록에 소개된 일화로, 개성 송악산 전투 당시 1사단장 김석원 대령이 전선시찰을 나왔는데 당시 중대장인 채명신 대위가 무전기로 통화하는 것을 호기심있게 쳐다보더니 '전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일본도를 빼들고 "대대포[13]는 토치카를 쳐라" 라고 일본어로 외쳤다는 등의 일화 등이 남아있다. 채명신은 그러한 김석원의 쇼맨십이 장병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자신도 뒷날 지휘력에 있어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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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수도사단장에 임명돼 수도사단이 있는 충북 진천으로 가던 무렵 피난민 대열에 섞인 군경 장병들을 만났다. 이에 그는 군도를 뽑아들고 "군경들아! 나는 수도사단장이 될 김석원이다. 그대들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거늘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대들의 후퇴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늙으신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가! 돌아서라! 김석원이 앞장설 테니 북으로 가자!"라고 연설해 900여명을 규합해 진천으로 향했다.
- 그리고 수도사단장에 부임 후 진천 전투에 참전하여 잣고개 일대의 고지 쟁탈전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김석원은 격전지 중 하나인 문안산으로 사단 지휘소를 옮긴 뒤 일본도를 들고 일선으로 나가 "사단장이 여기 있는데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저버릴 텐가?" 라며 18연대 장병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반면 미군 군사고문관은 위험하다며 2km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저들은) 나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 못했소.[14] 병사들이 쓰러지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순 없소."라며 고문관의 건의를 거절했다.[15] 하여간 위험을 무릅쓴 덕분에 문안산은 다음날에도 함락되지 않았으며 당시 18연대장이었던 장춘권 역시 김 사단장의 진두지휘와 독전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어 진천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다고 인정했다.
- 진천 전투때 일화로 정찰용으로 배치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들로 하여금 T-34를 공격하게 한 일화가 있다. 김석원이 장갑차와 전차의 차이나 그레이하운드의 무장 상태를 몰라서 그런건 절대 아니었고 전차 때문에 보병들이 겁을 먹으니 병사들이 전차와 구분하기 쉽지 않은 장갑차들이 달려가 위협사격이라도 좀 해주면 사기가 많이 올라갈 것이란 이유였다. 중대장 박용실 대위는 김석원과 지휘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장갑차 2대와 지프를 끌고 진천으로 갔는데 정말 효과가 있어서 장갑차를 본 병사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어둠을 이용해 접근하는 T-34와 밤새 사격을 주고받았는데 아침에 가보니 37mm 기관포탄이 T-34 한대의 궤도를 끊었고 견인하려던 병력들이 죽어있었다. 비록 이어진 적의 포격으로 장갑차 2대 모두 바퀴가 터져서 도랑에 굴러떨어지는 손실이 있었으나 수색용 장갑차로 기대 이상의 효과를 냈다.[16]
- 《전투》(1985)에 수록된 제9연대 소대장 차규헌의 회고에 의하면 청주 방면에서 지연전을 벌이던 당시 전선에서 후퇴하는 병사들을 보고는 불러 모아 모두 무릎꿇게 하였다. 누군지 몰라도 전쟁통에 정신머리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며 지나치려던 증언자에게도 "명령없이 후퇴한 너희 놈들도 이리와서 무릎을 꿇어!"하고 외치자 별 수 없이 꿇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은 김석원 장군. 김석원은 "너희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후퇴했단 말이냐? 상부의 명령 없이 후퇴한 너희 놈들은 모두 군법에 회부하여 엄단함이 마땅하다. 헌병!"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대장 최석용 중령(만주군 출신)이 "연대장인 제가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책임은 저에게 있으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라며 호소했고, 그제야 사단장은 "연대장이 철수명령을 내렸다면 좋소"라며 용서하였다. 당시에 김석원은 군법에 처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기는 했지만 실제로 군법에 처하거나 엄단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즉흥 연설 이라던가 부상병 하나하나 손을 잡고 위문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단박에 끌어올렸다는 증언들이 다수 존재한다.
- 4.19 혁명 당시 성남고등학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당시 시국 때문에 경찰에게 학생들 관리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듣자 오히려 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 애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는데 무슨 지도를 하란 말인가며 따지기도 했다. 교장으로 있던 당시에 예비역 소장으로 진급되었는데 훈시 시간에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이 별은 부패하고 정신이 썩어빠진 놈들이 주는 것이라 받을 수 없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받은 별을 분질러 내던졌다고 한다.
3. 능력
일본군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공격, 아니면 무조건 사수를 고집했다고 평가하는 오류[17]가 있다. 49년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의하면, 작전을 짤 때 예비대를 두지 않았고 경계순찰도 없으며 제대로 된 저항선조차 구축하지 않아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하면 사단이 붕괴할 위험이 크다고 강도높게 비판하며 초급장교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예비대도 하나도 없고 경계 순찰도 없으며 김석원의 후임으로 온 유승렬, 백선엽은 반대로 예비대를 확보해놨다고 적혀 있다.물론 이는 김석원과 미군의 사이가 썩 원만하지는 않았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당시는 한국군 사단장이 위관급 미군 고문관을 상석에 모시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일본군 군사고문을 겪어봐서 미군 군사고문의 지도에 익숙한 만주군 출신 젊은 장교들과 달리 김석원은 연배와 계급이 높아 미 고문단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저 고문관으로 대했으며, 잘못되었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불호령을 내리던 사람이라 미군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다. 부패나 공금횡령은 명태사건 뒷처리 방식만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당시 김석원을 싫어했던 고문관 제임스 하우스만이 김석원에 대한 비방과 중상모략을 주도했는데, 이승만이 김석원 장군을 참모총장에 임명하려는 것도 제임스 하우스만이 강력히 반대했으며, 김석원을 임명한다면 미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황해도부터 동해까지 260km가 넘는 거리를 겨우 4개 사단이 담당했고, 이를 보조할 경찰도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김석원의 1사단이 1948년 11월부터 책임진 구역은 황해남도 청단~경기도 고랑포까지, 전체 전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4km에 달했다. 게다가 개성 인근이었기 때문에 송악산 전투 등 더 많은 교전을 치러야 했다. 미군들이 지적한 예비대 배치 미비건은 사실 예비대를 만들 여건이 안 되었던 것이며, 당장 38선의 소규모 교전들에 대응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후임자들이 예비대와 방어선을 갖춘 것도 작전계획을 새로 수립하면서 전시에는 개성을 포기하고 임진강선으로 철수, 사단 방어정면을 1/3로 줄이기로 결정했기에 가능했다.[18]
김석원의 능력을 낮게 보는 국내 증언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가 몸 담았던 일본군 자체가 전간기식 군대였던 데다,[19] 식민지인으로서 대좌까지 진급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만큼 소신이 매우 강했고 나이가 많아 미군이 요구하는 입체적 현대 전술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등 일본군 출신 노장의 단점과 한계가 없진 않았다. 특히 대륙전선 일본군은 연대급 제대별로 각종 기만과 응급대책, 기동을 통해 중국군을 제압 후 지역을 장악하는 식의 전술을 구사하며 심지어 화공과 허허실실과 공성지계 등 현대 군사작전이라기보단 근대 이전 삼국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김석원을 논할 때 꼭 나오는 "중국군을 허세로 물리쳤다"던가, "패잔병들을 수습해 돌아서게 했다"던가, "포항 철수작전에서 빈 트럭을 왕복시켜 적을 기만했다" 같은 이야기가 딱 이 스타일이다. 정일권의 회고록에도 김석원에 대해 일본군 출신의 고루한 전술을 사용한다는 고문관의 의견과 이승만 대통령의 염려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진천 전투에서도 사단장 김석원이 전선에 나가 연락이 되지 않아 군단장( 김홍일 장군)이 직접 수차례 방문을 해야 했다고 한다. 부하였던 문형태도 김석원이 구시대적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진천 전투, 포항 철수작전 등에서 보여지듯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재주가 탁월했고 작전계획도 세심하게 짰다고 한다. 창군기부터 3사단 고문관을 역임한 애미리크 중령이 1951년 김 장군을 찾아와 3사단 수석고문관 재직 2년 몇개월간 모신 13명의 사단장 중 김 장군만큼 애국심 강하고 멋있는 작전계획에 따라 훌륭한 지휘 통솔을 하는 사단장도 드물었다며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김 장군은 이것으로 미군과의 불화설도 조금은 해명되지 않겠느냐며 회고록에서 자평했다. 실제 그의 포항철수작전은 미군 지휘부의 극찬과 함께 한국군에 대한 신뢰를 얻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천 전투는 당시 수도 18연대장 장춘권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대규모 부대가 북한군과 제대로 교전하여 승리한 전투인데 김석원 장군의 진두지휘와 적절한 작전으로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군 보고서가 아닌 국내 자료들, 즉 채명신 장군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p.71-74)와 이재전 장군의 국방일보 기고문 등 당시의 여러 초급 장교들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김석원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솔선수범, 과감한 지휘로 지연전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으며 젊은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백선엽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김석원이 수도사단장으로 복귀했다고 하니 자기 아래에서 그에게로 가는 부하들이 많았다고 적었다. 본인은 전시에 자신이 믿는 상관 밑에서 싸우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어서 그냥 가게 했다고.[20] #
김석원의 명성은 장교만이 아니라 당시 병사들의 참전수기 등에서도 공통으로 증언되는 이야기이다. 일례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71명 학도병들은 원래 김석원 휘하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는데, 김석원이 3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떠나게 되자 그는 "학도병들이 무장해제하고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고 집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이들 71명은 자신들을 받아준 김석원 밑에서 계속 싸우기 위해 포항까지 찾아갔다. 김석원은 이들을 반기며 후방 사령부가 있는 포항여중으로 보냈다.[21]
김석원 장군이 제3사단장으로 전임되자 우리 학도병들은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을 하고 8월 8일에 포항에 도착했습니다. 포항여중에 있는 3사단 사령부로 찾아갔는데, 거기에는 김대의 대위가 연락장교로 사병 몇 명을 데리고 와있었고, 그밖에 20여명의 군악대원 밖에 없었어요. 이날로 M1을 지급받고 이튿날 대원을 데리고 시내를 구보로 달리다가 안강전방 CP로 가는 김석원 사단장을 만났어요. 반가와하시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합디다. - 한국전쟁사 CD(2003/육군 본부, 육군교육사령부)에 수록된 학도의용군 중대장 김용섭 학도병의 증언.
요약하자면, 김석원은 작전계획능력은 전간기에 머물렀으나, 작전시행능력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계획을 정밀하게 짠다고 해도, 그 계획을 시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김석원은 6.25전쟁 이전부터 지속된 38선 인근 분쟁으로 소모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병사들의 능력을 120% 이상 끌어내 무훈을 세웠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교리에 머물러있던 일본군의 풍모를 간직한 구시대의 노장이라는 한계도 분명했다. 다행히도 그 구시대적인 교리가 아직 유용하던 시점에 조국에 공헌할 수 있었고 시대와 더 어긋나기 전에 일선에서 물러났다.
4. 가족
장남 김영철(金泳哲)은 1921년 2월생으로 # 1939년 용산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문과갑류)[22] 제16회로 입학하여 1942년 법문학부로 진학한 뒤[23] 학부 재학 중이던 1944년 학병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으며, 1945년 9월 대학 졸업[24] 이후 성남중 교장(1977~1983), 성남고 교장(1983~1988)을 지내고 부친 사후 원석학원 재단이사장으로 있다가 2006년 1월 9일 별세했다. #
차남 김영수(金泳秀)는 1923년 5월생으로 1941년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입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본과)를 제57기로 졸업하고 일본육군 소위 임관하였으며, 태평양 전쟁에 참전, 미군의 필리핀 탈환전 와중인 1945년 4월 16일 레이테 섬에서 전사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삼남 김영국(金泳國)은 6.25 전쟁 와중인 1951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55년 졸업(제11기)하였는데, 성적우수자로 교수요원 선발되어 육사 교수부에 재직하며 청죽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 하나회의 견제를 받아 소령으로 예편한 뒤 #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여동생 김문경(金文卿)은 1927년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설립, 한국 방송사의 시발점이 된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이 1932년 조선어 제2방송을 앞두고 최초로 공개모집한 여자 아나운서 1기 출신이다. 즉 한국인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였다. 말년에는 오빠 김석원과 함께 살다 김석원이 사망한 이후 1981년 딸이 살고있는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서 2007년에 사망했다. #
5. 여담
-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말년에 일본 육군 장교 출신들의 친목회에 초청받자 전사한 아들을 두고 "전장에서 죽는 것은 군인의 숙원이므로 아들은 만족했을 것이다"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 "노병의 한"에서는 아들의 인간 됨됨이가 너무 안타깝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가 국군에 입대하여 6.25전쟁에 임했다면 일제에 부역한 과오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을 거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않았다.
- 북한에서는 김석원의 국지전 경력을 남한의 북침 사례로 악용하곤 했으며, 간혹 일제시절 김일성이 함흥에서 김석원을 패퇴시켰고, 그가 적전 도주까지 했다고 선전한 적이 있지만 일단 김석원은 그 시기 함흥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일성이 일제 앞잡이인 그를 물리쳤다는 주장을 계속하는 이유는, 1. 김석원이 당시 전공으로 제일 유명한 일본 육사 출신 한국인이었으며, 2. 친일이라는 악명으로 약점을 공격-선전하기에 매우 유리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과거 행적에) 약점이 있는 유명 적장을 물리친 전적을 선전하려는 의도이나, 실제로 적전도주했던 사람은 9사단장 최석이며,[25] 김일성 부대와의 교전 기록은 북한측 주장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에는 해당 자료가 없다.
- 유원식의 저서 <혁명은 어디로 갔나>에서 '김석원 적전 도주설'을 줄기차게 인용하는 사람들(ex: 친일파 99인 - 민족문제연구소)도 있는데, 이 또한 모함이다. 원 저서의 신뢰성 자체가 의심된다는게 정설이었으며 진천 전투 이후 북한군 2사단장 최현[26]은 "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 이 둘은 6.25 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각자 사단장으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육탄10용사 참조.
5.1. 백범과의 일화
해방 이후인 1945년 11월 23일 백범이 귀국하자 그는 일본육사 26기 동기들과 경교장으로 찾아갔다 한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군정청의 급한 일이 생겨서 집을 막 나서던 백범과 마주쳐서 한 사람씩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김석원이 자기를 소개하자 백범이 "김석원? 아 그렇지. 내 김 동지 얘기는 많이 들었소. 반갑소.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우리 힘을 합쳐서 한번 잘해봐야지. 하하하." 그러면서 손을 굳게 잡고 흔들었다 한다. 회고록에서 김석원은 백범과는 초면이었는데 내 이름을 아는지 고마웠고 그때 같이 갔던 동기들이 매우 의아해 했다고 한다.[27]그는 이승만보다는 배포가 큰 것 같은 백범에게 심리적으로 더 쏠려있는 형편이었고 백범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백범 김구가 일본군 장교 출신을 환대했겠는가 싶겠지만, 광복 후 혼란기에는 어느 정파건 <새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명분 아래 진영 꾸리기 바빠서 포섭대상의 출신이 친일파건 독립운동가건 크게 안 따졌다. 이는 마찬가지로 국부군/독립군 출신의 김홍일 장군의 시선에서도 드러나기도 하고. 김구도 결국엔 친일파 출신들의 협력을 받기도 했다. 당장 김구가 귀국 후에 지냈던 경교장부터가 친일파 기업인 최창학이 헌납한 곳이다.
백범이 이후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떠나기 전 찾아가서 "선생님, 이번 남북협상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며 만류했으나, 다행히 아무 일 없었고, 그 뒤 김석원을 불러 얘기하기를, "평양의 을밀대에서 그들의 군사훈련하는 광경을 봤는데 문득 김 동지 생각이 생각이 나더군. 내가 군대에 대해 뭘 알아야지. 아마 김 동지하고 같이 가서 봤더라면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되었을거야."라고 했다 한다.
자서전 <노병의 한>에서 백범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나라 일이 좀 더 잘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고 술회하며 이 박사 집권 후 백범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백범 생전에는 위로를 겸해서 가끔씩 찾아가는 것과 백범 사후 한식과 추석에 성남중고교 학생들을 대동하고 묘소를 청소하고 참배한다는 사실뿐이었다고 회고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
- 1985년작 KBS1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윤덕용이 연기했다.
- 호이4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 한국이 친일파를 사면하는 중점을 완료하면 한국군 장군으로 등장한다.
-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 주인공이 맥아더에게 요청해 유재흥을 대체해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 자리에 임명되며 주인공의 기대대로 축석령과 한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켜낸다. 그 공으로 제1군단장으로 승진하며 이후 중공군의 기습을 허용해 7사단을 사실상 괴멸수준까지 몰고 간 유재흥을 즉결처형한다. 전후 벌어진 친일 잔재 청산 과정에서 자청해서 반민특위에 나서는 등 상남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 야인시대 85,86회 영천 전투에서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7. 선거 이력
<rowcolor=#CFA547>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6구 - 영등포구 을(민의원)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4,898(46.30%) | 당선 | 초선 |
역대 선거 벽보(공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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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서울16구 - 영등포구 을) | }}}}}}}}} |
8. 관련 문서
- 국민방위군 사건 - 19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검열관으로 참석했다. 당시 그 참혹한 참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치를 떨며 김윤근의 계급을 박탈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 일본군도 - 김석원은 메누키를 육군삼련앵에서 태극무늬로 바꿨다고 한다.
- 일본육군사관학교
- 조선인 일본군
- 중일 전쟁
- 친일반민족행위자
- 6.25 전쟁
- 성남고등학교(서울)
9. 둘러보기
서울특별시 제5대 민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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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 |||||
* 종로 갑
윤보선 사퇴 (1960.8.12.) * 마포 김상돈 사퇴 (1960.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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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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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 류광렬 | 백두진 | 김갑수 | 박상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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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 서정원 | 김봉재 | 김기용 | 윤종수 |
}}} }}}}}} |
[1]
당시 일본 육군의
3식 중기관총,
38식 기관총은 일본군 보병연대/대대의 핵심 화력이었기 때문에 지바현의 보병학교 교육을 이수한 중위가 맡는 보직이었는데 신임 소위를 앉힌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다고 한다. 출처:
돈키호테 김석원.
[다만]
국부군은 중앙군 내에서도 일부 개편사(8,000~10,000명)를 제외하곤 사단 대부분이 약간의 박격포와 알보병만 갖춘 3,000명~5,000명은 물론 2,000여 명에 불과한 부대들이 대부분이었다.
[3]
이 사람 역시 김석원처럼 참군인에 자신의 친일을 평생 반성했다.
[4]
공로가 있는 좌관(영관), 위관에게 수여되는 최상위 공급.
[5]
당시 중국군의 김홍일 소장,
박시창 대령, 최용덕 공군상교 (육군 중장 대우), 일본군의 영친왕 (중장), 홍사익 중장이 육군대학을 졸업한 군사경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야전으로는 중일전쟁에서 사단급제대를 지휘하여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는 김홍일 소장과 반대 진영(일본제국 육군)에서 1개 대대(2개 중대)로 사단병력을 물리쳐 용명을 떨친 김석원이 전투 경력으로는 제일이었다.
[6]
이건 칭송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김경천과 지청천이 누구인지는 문서를 참조해 볼 것. 만약 김석원이 마음을 바꿨으면 일제로부터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음과 동시에 뼛속까지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7]
이 사건을 주도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상엽 씨의 증언이다. 함께 재판받은 태권도 원로
최홍희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8]
이건
이종찬도 마찬가지였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꽤 많은 일본 육사 출신 장교들이 자숙의 의미로 정부 수립 직후에 군문과 떨어져 있었다.
[9]
군정기 국방장관
[10]
하지만 미 고문단은 최고 지휘관이 사망하면 어쩔 거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11]
그 전의 안동 철수 작전은 미 8군과 국군 1군단의 무리한 명령 때문에 실패했다. 미 8군이 명령 내리고 군단에서 4시간 회의하다 보니 남은 시간은 고작 1시간이었다고 한다.
[12]
여러모로 열악한 창군초기라서 장교들에게 따로 권총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일본군도를 패용하거나 망토를 착용하고 유사시 일본도를 휘둘러 지휘하는 경우가 상당했다. 허나 미군 고문관들은 일본군을 연상시키는 이런 행동을 질색했다.
[13]
일본군에서 대대지원화기였던
92식 70mm 보병포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에서 쓰였을 '대대포'란 것은 아마
M1 57mm 대전차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국지전에서 북한군 화집점과 토치카 제압용으로 M9 바주카포와 함께 일선에서 유용하게 운용되었기 때문.
[14]
나폴레옹 과
맥아더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15]
사실 이 방법은 최고 지휘관이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려하는 것만으로 일대 병사들은 큰 힘을 받으나, 문제는 전사하는 순간 이를 대신 통솔할 부사단장조차 없으면 해당 사단은 통제 불능의 오합지졸로 전락하기 쉬운 치명적인 위험 역시 있었다. 이러한 위험성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최전선에서 독려하는 러시아군 장성들이 정밀 타격 무기에 당해 수명이 전사하고 지휘 체계가 와해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이런 정밀 타격 무기가 없는 시절에 전쟁을 치른 것이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
육군독립 기갑연대사, 1997, 한남전우회, pp152~155에 수록된 당시 중대장 박용실 대위의 수기였으며 씁쓸한 뒷이야기도 있는데 전차 1대에 10만원이란 상금이 걸려있어 연대장이 박대위에게 지급했으나 중간에 누군가 착복해서 박대위는 그 돈을 구경도 못해봤다.
[17]
심지어 전선에서 병사들이 피흘리는 동안 혼자서 후방에서 맥주 마시며 노가리 깠다 카더라는 소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18]
이게 정상적인 부대 배치 상황이다. 이렇게 1사단 배치 상태를 바꾸지 않고 전쟁을 맞았으면, 개성-문산 방어선은 당일에 뚫렸을 확률이 매우 높다.
[19]
김석원의 청장년기가
러일전쟁을 막 마치고
1차대전 당시 청도에서 독일군과의 전쟁을 치렀던 시기이긴 하다. 다만 미군과 소련군들이면 모를까 중국과 조선에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스펙이었다.
[20]
'군과 나'에서 해당 대목을 보면 연대장 이하의 부하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게 여간 섭섭했었는지 남겠다는 부하에게 너도 따라가지 그랬냐며 삐진 티를 팍팍 낸다.
[21]
그러나 이들은 기존 인민군 5사단에 12사단과 766유격부대의 공세로 동해안 전선 40km나 후퇴하고 3사단이 포위섬멸 위기에 처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22]
동기 중
유민상(정치인)과
김증한 등이 있었다.
명단 참조.
[23]
법학과 2류(정치공법학 전공)
[24]
법문학부 제18회 졸업으로 경성대학으로 바뀌기 전 경성제국대학으로서 최후 졸업식.
[25]
이 적전도주 행적은 최석의 직속상관인
유재흥이 독박을 써, 2010년대까지도 유재흥을 적전도주한 사람이라 비난하는 기사들이 올라왔다.
[26]
1907~1982.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인물.
최룡해의 아버지다.
[27]
지청천이 백범 김구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