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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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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육군
[ruby(大日本帝國陸軍, ruby=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りくぐん)]
Imperial Japanese Army (I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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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기[1]
창립 1867년 ( 메이지 원년/ 게이오 4년)
해체 1945년 ( 쇼와 20년)
명령 체계 대본영
군종 육군
육군가 육군분열행진곡(陸軍分列行進曲)[2]
열병식행진곡(觀兵式行進曲)
승마부대행진곡(乘馬部隊行進曲)
본부 육군성: 도쿄도 우시고메구
(현 신주쿠구)
기념일 1869년 5월 18일 ~ 1905년 1월 3일
( 보신 전쟁)
주요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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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전쟁
하코다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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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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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전투
남한 대토벌 작전
제1차 세계 대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소련-일본 국경분쟁
만주사변
열하사변
제2차 세계 대전
· 중일전쟁
· 태평양 전쟁
· 소련-일본 전쟁
지휘
대원수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초대)
시모무라 사다무(말대)
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초대)
우메즈 요시지로(말대)
보병 연대기[3]
파일:1280px-大日本帝國陸軍_歩兵聯隊軍旗.svg.png

1. 개요2. 역사3. 일본 육군 항공대
3.1. 육군항공사관학교3.2. 육군소년비행병3.3. 항공기 승무원 양성소3.4. 특별조종견습사관
4. 병과5. 간부후보생
5.1. 1년 지원병 제도5.2. 간부후보생 제도5.3. 갑·을종 간부후보생 제도
5.3.1. 조선인
5.4. 처우
6. 인원 선발
6.1. 병역 기피
7. 일본 육군이 보유했던 장비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867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 제국 육군. 현재 일본에선 '구(舊) 육군' 혹은 '대일본제국 육군'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1871년(메이지 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나 영어권에서는 메이지 유신 당시에 천황을 호위했던 어친병(御親兵)을 시작점으로 본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과장 보태서 육군 직할령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해군보다는 육군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있었던 듯 하다.[4]

2. 역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o-JapaneseInfantryTraining.jpg
1864년 프랑스식 훈련을 받고 있는 쇼군 소속의 막부육군.

막부가 무너지면서 이들은 일본군에 흡수된다.

공식적으로 대일본제국 육군이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1877년(메이지 10년) 이후의 일이다. 1889년 '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군사 권한은 내각이 아닌 천황 통수권에 속하게 되었다. 육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최고 계급인 대원수는 천황이 맡았고 육군은 육군대신(육군성의 수장), 참모총장, 교육총감의 세 장관[5]이 관리했다. 웃긴 것은 이들은 보통은 대장이 아니라 중장이 했다. 최고 보직과 최고 계급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런 일본군의 괴상한 특징은 병과가 계급을 씹어먹는 문제를 나중에 일으키기도 한다. 육군대신은 육군성[6], 참모총장은 참모본부( 육군본부), 교육총감은 교육총감부[7]를 지휘했다. 1938년(쇼와 13년)에는 항공 전력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육군항공총감부가 설치되었다. 육군항공사관학교도 세웠고 이곳 출신들은 종전 이후 항공자위대의 기반이 된다. 나중에 참모본부는 대본영에게 권한을 많이 이임하게 되나 군정권의 상당수는 유지된다.

기원은 1871년 조슈 사쓰마, 도사 등에서 징집된 천황 직속의 어친병(御親兵)이다. 폐번치현이 이뤄지자 이들 어친병은 근위대가 되었다. 처음엔 사무라이 출신들로 군을 유지했지만 곧 국민개병제를 도입할 계획이었다. 이 과정을 계획한 것은 오무라 마스지로[8]였으며 뒤이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본격적인 도입을 주도하였다. 1874년에 징병령이 선포됐다. 그러나 징병제가 '사무라이(사족)를 모독한다'고 생각한 기존의 사족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히 정한론을 주장하다가 권력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하면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이 대량으로 사직했다. 이후 세이난 전쟁이 일어난다. 세이난 전쟁은 하야한 군인들과 남은 군인들이 벌인 것으로 을 들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신식 군대끼리 총들고 싸운 것이다. [9]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ThirdFrenchMissionToJapan.jpg

1875년경의 일본제국 육군 장교들.

1874년 타이완 섬을 침략했다. 일본에선 이를 외정(外征)이라고 한다. 1885년 독일 참모장교 멕켈 소령 교수로 초빙했고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10] 1894년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이자 최강이라 생각됐던 청나라의 군대를 압도적인 교전비로 찍어눌러 패배시켰으며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실상 동아시아에선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된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영일동맹에 따라 연합국으로 참전해 독일 소유인 칭다오 태평양들을 차금차금 점령한다. 전쟁으로 일본은 경기 붐이 일고 경제 규모가 급속도로 성장한다. 또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백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본군을 시베리아로 파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paneseArmy1900.jpg

1900년대의 일본제국 육군 복장.

1920년대에는 다소 군축한다. 그러나 현역만을 줄였을 뿐 교련 제도를 창설하고 예비 장교를 계속 확보했다. 당시 육군의 규모는 평시 편제의 1/3 수준인 10만명을 군축해 15개 사단 20만명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확장된다.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데 그 동안 해군이 미국 전쟁을 일으킨다. 1941년 일본 육군은 51개 사단 규모였다. 숫자는 약 170만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중화민국 정부를 적극 지원했고 소련이 1945년에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일본제국 육군은 완전히 패배한다. 관동군 중 상당수는 소련에 포로로 끌려가 살이 에는 노역장 신세를 져 생을 마감하는 병사도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22Japanese_Army_Uniform%22_-_NARA_-_514675.jpg

1938년에 바뀐 전투복.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옷이다. 1945년 무렵이면 이거마저 만들 아낀답시고, 국민복에 부착물만 바꿔 육군복으로 쓸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신병들에게 군복 조차 지급 안 하는 꼼수까지 부렸다.[11] 군복/일본군 항목 참조.

규모로 볼 때 1870년에는 12,000명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0년대에는 12개 사단으로 38만명이 현역으로 근무했다. 1941년에는 41개 사단에서 46만명이 현역으로 일했는데 2개 사단이 조선반도와 일본에 주둔했고 12개 사단은 만주, 27개 사단은 만주를 제외한 중국 대륙에 주둔했다.

1945년에는 145개 사단에 5백만 명 규모였다. 최대로 컸을 때는 609만 명이었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150만 6,000명이 전사했으며 비전투 상황에서 사망한 인원을 합치면 256만 6,000명 수준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67만 2,000명이며 상당수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81만명이 실종됐으며 7,500명이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 타이완 침공 때는 543명이 사망[12]했고 청일전쟁 때 13,823명, 러일전쟁 때 80,000명[13] 가량이 사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칭다오에서 영국군과 연합을 맺어 독일-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1,455명이 전사했다.

3. 일본 육군 항공대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육·해군 항공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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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야간전투기 ◈S1A 덴코, ▼ J1N-S 겟코, ▼ P1Y1-S 바야코, ▼ P1Y2-S 쿗쿄, ▼ D4Y2-S 스이세이
<colbgcolor=#000000> 노획 항공기 파일:소련 국기.svg LaGG-3-8, I-16, 투폴레프 SB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F2A 버팔로, P-40, B-17(D/E), P-51C, F4U 콜세어, F6F 헬캣, 커티스 BT-32, CW-21, DB-7, 마틴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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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이더, 무동력기, 미사일 Ki-147, † Ki-148, † MXY8 아키구사
◈ 시제, 프로토타입 / † 페이퍼 플랜, 수입 실패 / ⓩ 제트 혹은 로켓 엔진 장착기 / ▼ 타 목적 기체를 유용함
국지전투기: 일본군이 운용했던 본토 방어 및 폭격기 요격 전용 전투기. 요격기 문서 참조.
※ 나무위키에 문서가 없거나 이 틀에 기재되지 않은 일본군의 항공병기 전체 목록은 일본 항공병기 설계안 문서 참조.
연합군(특히 미국)이 대전기의 일본 항공기를 지칭할때 사용했던 코드에 대해서는 연합국 코드명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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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軍飛行戦隊 (りくぐんひこうせんたい)
飛行戦隊 / 飛行戰隊

파일:100px-Roundel_of_Japan_(1943).svg.png

일본제국 육군 항공대 라운델
항공부대를 운용했으며 육군항공사관학교도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망하면서 사라졌지만 일본 해군 항공대 인원과 합쳐 1954년 항공자위대로 인적자원이 유입된다.

공식적인 '일본 육군 항공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육군 항공대가 미 육군 인사 군수와는 따로 놀던 사실상 거의 독립된 군종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 육군 항공대는 육군에 철저히 귀속됐다. 주력이 되는 '육군비행전대(陸軍飛行戰隊)'가 있었지만 육군항공대, 육군비행단, 육공군, 공군 등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단, 공군이란 명칭은 비공식적으로 쓰인 용어였으며, 일본은 건국 이래 현재까지 공군이란 이름의 조직을 보유해 본 적이 없다.

1905년 러일전쟁 때부터 풍선 부대를 편성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편성된 항공부대를 만들었다. 1915년에 임시 항공대는 항공 대대로 확장됐고 1917년엔 6개 대대로 증가했다. 1919년엔 육군항공본부가 생겼고 1925년엔 항공 병과를 독립시켜 육군항공사령부를 개설하였다.

일본은 6개 항공군을 운용했다. 제1항공군은 일본 본토, 제2항공군은 만주, 제3항공군은 동남아시아, 제4항공군은 서태평양과 필리핀, 제5항공군은 중국과 조선이며 마지막으로 1944년 12월에 생긴 제6항공군은 오키나와를 담당하였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은 3대씩 편대를 만들었고, 전투기는 12~15대, 경폭격기는 9대, 중폭격기는 여섯 대를 모아 중대를 편성했다. 예를 들어 제2항공군 66전대는 습격기 3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니 총 27대가 있는 것이다. 전대장은 소좌이며 중대장은 대위, 1편대장이 선임 중위이고, 낙오하지 않게 가장 후미에서 챙겨줘야 할 마지막 편대장은 가장 실력이 뛰어난 조종사가 담당하였다.

육군 항공대의 인원 상당수는 항공전력의 공백이 있던 일본 자위대 1954년 항공자위대가 나타나면서 상당수 흡수됐고, 대한민국 공군의 초기 인원[14]에도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이 상당수 있었다.[15]

일제강점기 조선인 카미카제는 19명이 확인되는데 이 중에서 육항사 출신은 최정근 소좌 1명이고, 소비가 10명, 항양 3명, 특조가 5명이었다. 해군에서는 조선인을 안 뽑았으니 전부 육군항공대 소속이며 이 중에서 인재웅(印在雄)이 레이테 만 해전에서 가장 먼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16] 그의 창씨개명은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로 친일시인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4계급 추서되어 소위가 되었다.[17]

아래는 당시 조종사 교육기관을 창설 순서로 서술하였다. 이외에도 정비/통신학교 등 다양한 교육 시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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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육군항공사관학교

항공 병과가 생긴 다음해인 1926년 육사 40기 졸업생(24명) 부터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마치고 3개월간 견습사관 과정을 마치게 한 다음 토코로자와육군비행학교(所沢陸軍飛行學校)에서 기본 비행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 1937년부터는 육군항공사관학교라는 이름을 획득했다. 별도의 기수는 부여하지 않아 그냥 육사 50기였다.

그리고 육사 51기부터는 육사 예과(2년)-대부근무(반년)를 마치고 육항사로 바로 갔다. 본과를 마치고 입교한 육사 50기와 동시 입교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이 방식이 이어진다. 57기까지는 전투에 투입, 58기는 항사 졸업하여 소위 임관 후 연성 교육 중, 59~60기는 항사 교육 중 패망하였다.[18] 항사 출신자는 4476 명에 달하며, 패망당시 재학생만 4천여 명에 달했다.

또한 최초 졸업생을 1938년에 배출한지라 장성급은 당연히 없고, 카미카제로 2계급 추서된 최정근 소좌(56기) 정도면 가장 높았다. 참고로 조선인 육사 출신 최초 전사자도 항사에서 나왔는데 육사 50기인 지인태 중위(1계급 추서).

조종병과로 분류되면 후쿠시마현 하라마치 비행장에서 초급 지휘관 양성 코스인 을종학생 교육을 받는다. 이후 부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대위에서 소좌 사이의 계급에서 전대장급 고급 지휘관 교육 과정인 갑종학생 교육을 이수 받을 수 있다.(조선인 중에서는 김정렬이 갑종 교육을 받음)

조선인 출신 육항사 졸업생은 11명 + 재학생 3명이며, 이 중에서 5명(지인태 중위, 최명하 중위, 전원상 중위, 최정근 중위, 정상수)은 야스쿠니에 있고 재학생중 1명(홍승화 생도)는 한국군에 입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7명(박범집 소좌[19], 김정렬 대위, 김창규 대위, 한용현 소위, 박원석 소위, 신상철 소위와 장지량 생도, 이연수 생도)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이 중에서 4명이 공군참모총장까지 가는데 초대/3대 김정렬, 5대 김창규, 8대 박원석, 9대 장지량순이다.

3.2. 육군소년비행병

강한 항공 전력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조종사, 통신사, 정비사 등 유능한 항공 요원이었다. 그래서 일본 육군은 1933년 4월 육군소년비행병(陸軍少年飛行兵, 이하 '소비') 제도를 신설했다.

모집 대상은 만 15~17세 사이의 청소년들로 3년 반 동안의 전문 교육을 마친 뒤 조종, 통신, 정비 등 각 분야의 하사관으로 임관할 수 있다. 학력 제한은 초기에는 보통학교 고등과에서, 나중에는 보통학교로 낮아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뽑힌 1기생은 1934년 2월 사이타마현에 있는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에 입교해서 교육받는다. 이후 항공 병력의 중요성이 더 커지자 3년 뒤인 1937년 12월에는 소년 비행병들의 교육을 전담하는 도쿄 육군항공학교가 신설된다.

육군 소년비행학교에 입교하면 1년 동안 군사 교육을 받는다. 이를 수료하면 다시 신체검사를 받게 되며 적성에 따라 조종, 통신, 정비 등의 병과로 나누었다. 적성검사라는 게 동그란 판에 사람을 앉혀 놓고 빙글빙글 돌리는 방식인데 통과하면 조종 분과로 결정되어 육군비행학교로 이동하여 교육받고 불합격자는 통신/정비로 간다. 기초 비행학교 이 끝나면 전투, 정찰, 폭격 등 3개 전문 분야 중 희망하는 분야를 선택한다.

속성 코스인 15기 을은 갑보다 1년 늦은 1943년 10월 입대하였다. 이들은 1년 코스의 육군 소년비행병학교에 가지 않고 바로 일본 각지의 비행학교로 흩어져 6개월 정도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비행훈련에 투입됐다. 이들은 갑 코스와는 달리, 최초 적성테스트를 통해 소년비행병 합격 여부와 분과 결정까지 되게 된다. 워낙 비행사가 많이 필요해 생긴 제도로 15기 을만 2,000명에 달한다. 인원도 많고 태평양전쟁을 겪은 마지막 기수다 보니 공군참모총장 까지 4명이나 올라갔다.

1942년 10월 시가현 오츠시에 '오쓰 교육대'가, 1943년 10월 오이타현에 '오이타 교육대'가 추가로 생긴다. 그리고 1944년 4월 각각 육군소년병학교로 승격하여 편제정원은 도쿄육군소년병학교가 3,000명, 오쓰도 3,000명, 오이타는 2,000명에 달한다. 교육기수는 18기까지는 있은 듯하다.

안창남이 일본에서 2번째로 비행사 면허를 따서 1922년 12월 10일 역사적인 고국 비행길에 올라 조선 팔도를 뒤흔들었는데 이는 수많은 조선 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당시 비행학교에서 연습비가 4,500원 정도 되었는데, 소비 시험에만 합격하면 오히려 월급을 받아 가며 조종술을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소비의 해군판인 비행예과연습생(예과련)은 1930년 5월 부터 모집했으나 조선인들을 모집하지 않아, 조선의 소년들은 소비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확인되는 조선인은 초기만 따지면 2기 이근석(조종), 6기 서한호(정비), 7기 서무갑(정비), 9기 노중신(정비), 10기 박희동(조종), 12기 임장수(통신), 강호륜(조종)등이 있으며 14기와 15기는 수십 명씩에 달한다. 그리고 이 소년이 졸업하며 다시 비행기를 몰고 한국으로 와서 고향 생가와 학교를 도는 기념 비행을 하니 이를 본 수많은 조선 소년들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해방 후 기준으로 소비 조종사 출신은 40명, 정비사도 40명 가량, 통신사가 30명 가량이었다.

3.3. 항공기 승무원 양성소

항공기 승무원 양성소(航空機乗員養成所, 이하 '항양') 주목적은 민간 항공 조종사를 양성하는 것이었지만, 유사시 조종사를 늘릴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38년부터 순차적으로 생겨 전국에 15개 양성소가 있었다. 생활도 군대식이고 교관도 예비역 군인 등 군사학교로의 요소도 강했다. 서민에게 조종 훈련을 무료로 시켜 주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입소 조건은 조종생의 경우 중학교 3학년 1학기 수료 학력의 17~19세로 8개월 교육 후 조종사 졸업증과 함께 오장으로 임관했다.

본과생은 소학교 6년 졸업자를 채용하여 5년간 재학하며 공업학교 과정의 교과, 항공기 제작, 수리, 정비 등을 배운다. 졸업 후 적성 등에 의해 조종이나 육해군, 고등학교, 전문학교, 대학예과등으로 진학했다. 다시 말해 육해군과 민간의 조종사를 전부 공급하였다.

3.4. 특별조종견습사관

태평양전쟁으로 조종사가 크게 부족하자 일제는 1943년 7월 3일 '육군항공관계예비역장교보충복역임시특례'를 공포하여 에 대학 또는 전문학교 출신들에게 1년 반 정도 조종 기술을 가르쳐 전선으로 내보내기로 하였다. 이들이 바로 특별조종견습사관(特別操縦見習士官, 이하 '특조')인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입대와 동시에 조장( 상사) 계급장을 달고 곧바로 장교에 준하는 예비사관 대우를 받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특권으로 갑종간부후보생은 이등병부터, 소년비행병은 기초군사훈련 상등병부터, 심지어 육사 예과 졸업후 대부교육 당시 상등병부터 근무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특조는 소년비행병과 달리 기초군사훈련을 받지 않고 바로 비행훈련을 받았다. 계급장은 조장을 달고 훈련받았는데, 오장 또는 군조인 조교들 보다 계급이 높았다.

그러나 어느 군대나 그렇듯 실제 교육 과정에서는 계급과 상관없이 조교들이 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희전문 출신 김상필의 경우 조선인이다보니 일본어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자주 저질렀고 조교들이 크게 질책할때 마다 속으로 삭이는것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일본인 동기들의 증언도 있다.

1기 1943년 10월 2,500명(조선인 7명)
2기 1944년 2월 1,200명
3기 1944년 6월 2,650명
4기 1944년 8월 1,125명
총합 7,475명

교육은 1년 과정이었지만 전황 악화로 1기생은 반년 후인 1944년 3월에 졸업했다.

조선인으로는 와세다대학 출신의 장성환 중위와 다른 대학을 나온 신유협 중위가 있다. 그리고 특조출신으로 가미카제로 오키나와에서 전사한 호타루의 주인공 탁경현 소위, 연희전문 학생회장출신의 김상필 소위 그리고 Ki-45로 육탄공격으로 B-29를 격추하고 전사한 보성전문출신의 노용우 소위가 있다.

4. 병과

대일본제국 육군에서는 전투병과는 병과, 후방직무를 각부라고 불렀는데 병과로는 보병과, 포병과, 공병과, 헌병과, 치중병과, 기병과, 참모과[20], 항공병과[21] 등 8개의 병과가 있었다.[22] 이후에도 둔전병과가 설치되고 폐지되는 등 크고 작은 변화가 있다가 1940년, 헌병과를 제외한 병과 구분을 폐지했다. 각부로는 회계부(감독부에서 개칭), 위생부(군의부에서 개칭), 수의부(마의부에서 개칭), 군악부, 기술부[23], 법무부 등이 있었다.

5. 간부후보생

구제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자를 단기간의 교육을 받고 장교 또는 하사관이 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1889년부터 존재하던 1년 지원병제가 1927년부터 간부후보생(幹部候補生) 과정이 된다. 주로 전시를 대비한 예비역 장교를 만들기 위한 과정인데 1933년부터는 갑종(장교)과 을종(하사관) 과정으로 분화되었다. 헌병의 경우 타 병과의 병사를 헌병 상등병으로 교육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병종'이라고 부른다.

초간단히 설명하자면 육군 병의 복무 기간은 2년인데 초병 교육 3~4개월 + (간부후보생 시험 합격 후)집체교육 3개월 + 예비사관학교 1년 + 견습사관 4개월 = 2년으로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소위를 달며 전역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런 방식은 시대별로 계속 변화한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장교 선발 과정은 육군사관학교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단기 복무 장교가 근무해야 할 중·소위 급이 크게 부족해서 육사 출신이라도 중·소위를 8년이나 하였고, 그래도 심하게 부족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평시에는 소대- 분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딱히 소대장이 공석이거나 한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36년 6월 졸업한 육사 48기생은 388명으로 그중 보병과는 216명이었다. 여기에 소위 후보자(하사관 중에 선발되어 육사에서 1년간 교육을 받음) 16기생 276명을 더해도 보병과 신입 소위는 연간 5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것으로는 육군의 17개 사단에 필요한 소위를 공급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이었다.

일본군에서 소위는 특별히 선발된 자만 연대기수가 되어 연대부관 밑에서 각종 잡무를 하였다. 대부분의 소위는 중대부(中隊付)로서 주로 신병 교육, 주번 사관, 육대 진학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전술[24], 검술, 마술 등 '장교의 3가지 기술 ' 습득을 위한 단련에 몰두하였다. 임관 2년~8년 차까지 육대 응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위가 돼도 계속 육대 입시 준비생 생활을 한다. 그러다 고참 중위가 되면 중대장 대리를 맡거나, 소위 임관 후 8년 차에 대위로 진급하면서 중대장이 되어 처음으로 부하를 거느리게 된다. 즉 평시에는 소대장이 없기 때문에 중·소위가 크게 부족해도 별문제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전시에 대량으로 장교가 필요할 때 전혀 대응 못하게 된다. 병들의 경우 육군은 2년, 해군은 3년 복무 후 대량으로 예비역· 후비역이 쏟아지기 때문에 전시에는 문제없다. 그러나 육사 출신 중위 예비역은 거의 없었고, 있어도 건강이 불량한 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보통 전시를 대비하여 1년 지원병, 갑종간부후보생 같은 예비역 장교 배출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5.1. 1년 지원병 제도

일본은 원래 을 내고 징병을 면제받는 규정이 있었다. 이런 제도가 징병 면제를 없애는 대신 부·현립 학교( 중학교 수준) 졸업자로 병역에 지원하고, 식비 및 피복비 등의 경비를 자기가 부담하는 사람은 현역 1년만 근무하는 '1년 지원병제'로 바뀐다. 이때만 해도 비교적 학식이 필요한 간호졸(看護手, 衛生兵) 양성 목적이었다.

1889년 1월에는 법이 개정되어 예비역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로 바뀌었다. 즉, 중학교 졸업자로서 17세~26세까지의 자가 경비를 자기가 부담하는 사람에게 1년간 특별 교육을 받게 한 다음, 성적에 따라 예비역 장교 또는 하사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 당시 육군병은 3년 현역에 4년간 예비역이었지만, 1년 지원병은 자비 부담으로 현역 1년에 예비역 2년으로 복무하게 된다. 병과와 위수 지역은 선택할 수 있으며(헌병과 치중병은 선택 불가) 지급되는 피복, 장구, 무기, 탄약 비용으로 60엔, 기병과 마구 비용이 추가되어 80엔을 납입한다. 영외 거주하면서 부대에 출퇴근하지만 거주 비용과 식비는 자비이며, 무엇보다 무급이었다.

1893년에는 조례 개정으로 원칙적 영내 거주에 지급품 비용으로 62엔, 기병은 75엔을 납부하고 여기에 더해 식비 38엔을 납부하도록 변경되었다. 이후 병과와 위수 지역 선택의 자유는 없어진다.

일년 지원병 중 인정받은 자는 입대 6개월째 상등졸이 된 후 해당 부대에서 특별 교육을 받고 학과와 현장 시험을 보아 합격한 자는 이등 군조(후에 오장으로 명칭 변경)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또한 필요에 따라 그 상태에서 최소 3개월간 견습 사관으로 소집 훈련을 하여 합격한 자는 예비역 소위가 되며, 낙제자는 조장 또는 일등 중사(후에 군조로 명칭 변경)가 되었다.

마지막 일년 지원병인 1928년에는 각 병과 예비역 중위 또는 각부[25]의 예비역 소위 임관 자격을 얻은 사람이 병과가 3,818명, 각부가 588명이었다.

일년 현역병의 변형으로 1889년 11월에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원에 한정하여 육주간현역병(六週間現役兵), 1919년 12월부터는 일년현역병(一年現役兵) 제도가 있었다. 일년현역병은 현역 만기시 군조에 임명되어 군민병역에 편입되지만, 예비역 장교가 되기를 희망하는 자는 지원에 의하여 일년 지원병과 마찬가지로 기회를 얻게 된다. 역시 1927년에 폐지된다.

5.2. 간부후보생 제도

1927년 12월 1일부터 일년 지원병은 폐지되고 대신 예비역 장교 보충을 위해 간부 후보생 제도가 생긴다. 자비부담에 무급이 유지되는 것은 물론, 근무 기간이 경우에 따라 오히려 더 짧아졌다.

간부후보생 자격이 자격을 갖춘 17세 이상 28세 미만인 자가 배속장교의 학교 교련 검정에 합격한 경우에 한해 가능하다. 배속 장교는 육군 현역으로 1925년부터 관립 및 공립 중등 이상의 학교에 남학생 교련을 지도하기 위해 배정된 현역 장교이다. [26] 즉 간부후보생 자격은 배속 장교가 재직하는 중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이었다.

입영 기간은 2가지였는데 고등교육기관 졸업자는 10개월(지원 다음 해 2월 1일 입영), 그 외의 사람은 1년(지원 연도의 12월 1일 입영) 이었다. 10개월의 간부 후보생은 다시 학부 졸업한 자와 ' 고등학교 고등과 또는 대학예과 1년 이상을 수료한 자, 중졸 이후 수업 2년 이상의 학교를 졸업한 자'로 2가지 방식으로 나늰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10개월의 간부 후보생 중 학부 졸업한 자는 입영시 일등졸, 2달 후 상등졸, 4개월 후 오장, 6개월 후 군조, 8개월 후 조장이 된다. 그 이하 학력인 10개월 간부 후보생은 입영시 일등졸, 3개월 후 상병, 6개월 후 오장, 8개월 후 군조, 그 이하 학력인 1년 간부 후보생은 입영시 이등졸, 두 달 후 일등졸, 5개월 후 상등졸, 8개월 후 오장, 10개월 후 군조가 된다

정리하자면 학부 졸업생은 10개월 후 조장, 고졸은 10개월 후 군조, 중졸은 1년 근무 후 군조가 된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입대 후 특별한 휘장을 붙이고 장교단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며, 예비역 장교로서 필요한 군사학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등졸로 입대한다는 것은 간부 후보생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리고 각 계급을 거쳐 수업을 마친 간부 후보생을 종말 시험을 치르고 그 성적과 평시의 근무 성적에 따라 합격자는 소위에 임명할 자격을 얻고 예비역에 편입되며, 불합격자도 하사관에 적합하다고 판단된 경우 해당 계급에 편입된다.

5.3. 갑·을종 간부후보생 제도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며 1933년 5월 1일 자로 제도가 대폭 변경된다. 이때서야 1년 지원병스러운 자비부담 및 무급 규정이 삭제되고, 오히려 수당이 지급된다. 또한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는 게 아니라 입대 후 3개월이 지난 사람을 채용하는 방식으로 대폭 변경되었다. 결정적으로 갑을종제가 이때 생긴다. 다만 복무 기간은 이때까지는 1년으로 동일.

일본군은 입대 후 6개월간 초병 교육을 받는데 이중 3개월째 '1기 검열'이라고 하여 연대장 주관하에 평가를 한다. 합격자는 6개월째 일병으로 승진할 자격을 얻으나, 불합격자는 재교육이다. 그리고 합격자는 간부후보생 추천을 받을 수 있었는데, 지원 자격은 구제중학교 졸업자, 고등학교 고등과 졸업자, 대학예과 1학년 수료자로, 배속장교가 재직하는 소속학교 교련 검증 합격자에 한정하였다. 즉 중졸 이상은 돼야 했다. 물론 이때도 기술, 경리부, 군의관 등에 종사할 자는 해당 학교를 졸업하거나 면허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간부후보생에 합격한 자는 즉시 일병 계급을 부여하고 채용 3개월 만에 예비역 장교가 되는 갑종간부 후보생(간후), 예비역 하사관이 되는 을종 간부 후보생(을후)로 구분된다. 이들은 상병이 되어 부대에서 입영 1년째까지 필요한 근무 및 군사학을 습득한다.

갑종이 2개월 후 군조가 되며, 종말 시험 성적과 전체 근무 성적에 따라 합격하면 예비역에 편입된다. 이후 1~2개월간 예비역 견습사관에 복무 후 장교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을종은 상병에서 승진 없이 하사관 교육을 받게 된다. 교육 후 하사관이 될 자격을 얻고 예비역이 된다.

중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소수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로만 소위들을 충당하였고, 평시에는 아예 소대장 제도 자체가 없어 신임장교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T/O 대부분을 비워 두었다. 이 때문에 갑종은 소위 임관 후에 전역한다는 면에서 미군 ROTC가 소위 임관 전역하고 전시에만 동원된다는 점과 비슷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대규모 동원을 하게 되어 장교와 하사관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비역 장교들의 능력이 의문시되었고, 각 부대에 위임된 교육이 문제의 하나로 판단되어 그해 12월부터 부대 자체 교육 후 도요 육군 교도 학교 등에서 통합 교육을 받게 변경되었다. 이후 1938년 조선지원병, 1944년 학병이 겪은 제도가 바로 이것이라 '간부후보생' 하면 보통 이 시기의 제도를 뜻한다.

일단 입대 후 초병 교육을 1개월 늘려 4개월간 하게 하고, 채용 자격을 중등교육기관인 실업학교 이상으로 완화하였다.

1937년 간부후보생 채용 수는 병과 각부 합계 6,160명(갑종은 4,440명)이었는데, 새로운 제도에서는 1938년 9,511명(갑종 5,601명), 1939년 17,666명(갑종 10,995명)으로 크게 늘었다.

통합 교육 기관은 병과에 따라 도요 육군 교도 학교, 육군보병학교, 육군공병학교, 육군 경리 학교에서 하다가 '육군 예비 사관 학교'등을 신설하여 약 11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다만 항공 병과는 항공관계 학교에서, 기술 종사자는 육군 조병창에서 약 1년간 교육을 받는다. 또한 복무 기간도 대폭 늘어 신병 단계에서 채용된 사람은 현역병과 동일하게 2년, 중도에 채용된 자는 채용일로 부터 1년 8개월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4개월간 초병 교육을 받다가 채용 시 일병이 되어 2개월간 부대 집합 교육을 받는다. 그러면 상병이 되며 채용 후 3개월간 집체 교육을 거쳐 우수자는 갑종간부후보생(통상 고졸 이상), 그 이하는 을종간부후보생(통상 중졸)이 되었다.

갑종 간부 후보생이 되면 예비사관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는데 1개월 뒤 오장, 다시 3개월 뒤 군조, 교육 수료 등 11개월간 집체교육을 이수 후 조장 계급의 견습 사관이 된다. 그리고 견습사관 신분으로 부대에서 4개월간 실무를 배우면 장교단의 형식적인 회의를 통해 소위로 임관하며 전역하여 예비역에 편입된다.

을종 간부 후보생이 되면 부대 내 하사관 교육대 등에서 자체 교육한다. 4개월 뒤에는 오장, 다시 8개월이 지나 시험을 봐서 우수한 자는 군조가 되며 전역하여 예비역 하사관에 편입된다.

그런데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고,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며 간부 후보생 T/O를 대폭 늘린다. 또한 일본에서는 1943년 12월 1일, 조선은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을 모집하여 간부후보생 자격을 주었다.[27] 그리하여 간부 후보생 수업 기간은 단축되었으며, 1944년 4월부터는 채용 시 상병[28], 2개월 후 병장[29]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자 당시 한일 학병들이 막 견습사관이 된 단계였는데, 일괄적으로 소위 임관 시켜주며 간부후보생 제도는 종료되었다.

5.3.1. 조선인

조선인 지원병들은 대부분 보통학교 졸업이라 대부분 을종간부후보생으로 가게 된다.[30] 조선인 '을종간부후보생'은 입영 4개월차에 소속부대 하사관 교육대에서 교육 받았고, 입영 1년차부터 육군교도학교에 입교해서 약 1년간 집체 교육후 오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때는 중일전쟁 시기라 예비역으로 전역 못하고 계속 군생활 했는데 오장 6개월, 군조 1년, 조장 2년[31]으로 일제 패망당시 조선인 지원병 1기생은 준위, 2기생은 조장에 달했다.

홍사익 중장의 경우 간부후보생 출신이 아닌 일본 육사/육군대학 출신인데, 극동군사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자 "교수 합격!"이라고 크게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위에 서술된 '갑종'과 '교수(絞首)'가 일본어로 발음이 같기 때문에, 신검 시 "갑종 합격!"이라고 외치는 군관의 말을 비튼 것.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1938년 조선지원병 1기생 현역 300명 중에서 갑종 간부후보생은 2명, 을종 간부후보생은 30여명이었다. 1944년에 조선인 학병들의 경우 4,000여명 중 갑종 403명, 을종 460명에 달한다. 그러나 필리핀(19사단, 30사단)이나 뉴기니(20사단), 버마(49사단)에 끌려가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

해방 이후 군사영어학교에는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 6명이 있었는데 갑종 간부후보생으로는 번개장군 이치업 준장이 일본군 소위 계급 이었고, 최경록 중장, 함병선 중장, 이백우 준장, 이춘경 준장은 을종으로 일본군 준위[32], 송요찬 중장은 일본군 조장(조선지원병 2기임)이었다. 이들은 대졸자인 다른 군사영어학교생들과 달리 보통학교 졸업이라 학력이 심각하게 딸렸고 영어도 못했다. 송요찬 장군의 경우 석두장군이라고 불리며 괄시받았지만, 사단장이 될 때까지 영어사전 3권을 갈아 마시며 공부하여 극복해 냈다.

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로 넘어가면 문형태 대장, 이민우 중장, 임부택 소장, 한웅진 소장, 고백규 소장, 김진위 소장, 서윤택 소장, 공국진 준장, 이상국 준장, 박노규 준장, 김용배 준장[33], 이병우 준장 등 다수의 일본군 을종간부후보생 출신들이 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간부후보생으로 선정되어 부대 내 자체 교육 중 탈출하여 임시정부로 간 케이스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조선인지원병 출신 간부후보생 말고도 1944년 1월 20일에 징집된 조선인 대학생을 뜻하는 '학병'이 있는데 이들은 대졸 또는 대제 학력자들이라 간부후보생 자격이 되었고, 이중 상당수가 갑종간부후보생과정을 밟았다. 다만 이 과정이 2년에 달함으로 8.15 당시에는 막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사관' 신분으로 일선 부대에서 소대장 대리로 뛰고 있었다. 패망 이후 일본군은 각 1계급씩 승진 시켜준 후 군대를 해산하였는데 이때 일본의 학병들과 함께 소위로 승진 후 해산 되었다.

그수가 당시 남자 인문계 대학생 총원과 같은 무려 6천명에 달하지만 조선인지원병들과 달리 지원한 신분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간 케이스라 군생활 보다는 못다한 학업에만 관심이 있어 국군창설에 거의 관여 하지 않았다. 겨우 90명 정도만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조선경비대에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군대 보다는 공직이나 학계로 나갔는데 일제말기 대학생 거의 전부가 학병으로 싹쓰리 되었다 보니 초창기 공직/학계를 구성한 대부분이 학병 출신이었다. 군대는 관심 밖. 군에 들어간 사람중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은 한신 제2군 사령관 정도(육사2기).

대한민국 육군 초기의 갑종간부후보생/ 을종간부후보생은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을 뿐 다른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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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처우

간부후보생은 중도에 부여되는 계급이 뭐든 간에 그냥 ' 후보생'으로 불렸으며 월급은 일병과 같은 9엔을 받았다. 견습사관이 되면 18엔이었으며 관등은 준위와 동일한 '판임관 1등'이다.

견습 사관 기간이 끝나면 예비역 소위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1937년 7월) 이후 예비역 소위가 되는 동시에 임시 소집되어 복무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군은 무조건 현역 우선제라 예비역 상태인 간부후보생 출신들은 사령부 등이 아닌 일선 부대에만 배치되고, 진급도 현역보다 느렸다.

1939년 기준으로 중·소위의 70% 이상이 간부후보생 출신의 예비역이다. 일제 패망 시 갑종간부 후보생 출신 장교는 약 20만 명이며, 주로 전선 부대에 배치되었다.

간부후보생으로 뽑히면 사가네(座金)라고 불리는 둥근 금속을 칼라장에 붙였다. 하지만 고참병들은 자신의 당번병이 간부후보생이 되면 사가네는 정상적인 계급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계속 자신의 수발을 들 것을 강요하였다. 이는 부대 집체 교육을 위해 간부후보생끼리의 내무반으로 이동했을 때야 끝난다. 그래도 고참병들은 이들을 '사가네'라며 야유했으며 ' 공포탄'이라고도 많이 불렀다. 참고로 ' 실탄'은 육사 출신을 뜻한다.

1943년에 사가네는 5개의 벚꽃이 둘러싸는 형태가 되었으며, 갑종 간부후보생은 금색, 견습사관은 은색으로 차별화되었다.

6. 인원 선발

건군기에는 조슈[34] 출신들이 독점했으며 장교를 기존 일본의 사족 개념으로 파악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가 생기면서 육균유년학교를 거친 뒤에 사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하거나 육군교도단(陸軍敎導團)을 거쳐 부사관으로 임관한 뒤에 육군사관학교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1917년에는 준위후보자(후보생), 1920년엔 소위후보자(후보생) 제도를 설치해 준위나 병장, 선임부사관 등에서 우수한 인원을 뽑아 소위로 임관시켰다. 1938년에는 육군항공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1883년부턴 국립과 공립, 1889년부터는 사립을 불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자는 '1년 현역제'란 이름으로 예비 장교에 지원 가능했고 이 제도는 1927년(쇼와 2년)부터는 갑종간부후보생이란 이름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갑종장교가 육사 출신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1941년(쇼와 16년)에는 특별지원장교 제도가 생겼다. 까놓고 말해 인원 딸리니까 제도를 늘린 것이다. 나중엔 조선이랑 타이완에서까지 장교를 뽑았다.

1927년에 재정된 병역법에는 징병검사 결과로 만 20세 이상의 건장한 청년들을
갑종(현역)
제1을종(제1보충역)
제2을종(제2보충역)
병종(제2국민병역)
정종(병역면제)
무종(다음해 재검사)등 6단계로 나눴다.

갑종과 을종은 제1국민병역에 해당하며, 그중 제1을종은 기초군사훈련까지는 받도록 하였다. 현역 복무기간은 1927년까지는 2년 6개월이였지만 우가키 가즈시게의 군축으로 인해 2년으로 줄어 유지되었다. 현역 복무 후에는 예비역 5년 4개월과 후비역 10년이 있으며 이중에서 12년 4개월 까지를 보충역으로 계산하여 을종과 함께 동원 가능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33년까지는 징병제라고 해도 현역 징집률이 겨우 20% 밖에 안되었다. 일본군의 기본 군사 전략이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것도 있지만, 그 소수를 차량화/기계화/중무장화 시킬 장비가 없는 상태여서 더 이상 뽑아도 어차피 소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일전쟁 발발로 엄청난 병력 소모가 있자 과거에는 군대에 안 가던 제1을종, 나중에는 제2을종까지 징집하여 1937년에는 징집률이 25%로 올라가고 1940년에는 무려 50%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병력 부족 사태는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병역제도는 평시에 상비사단 17개 체제로 짜여져 있는데 1938년까지 정확히 두배인 총 34개 사단 115만명으로 늘어 난다. 여기에 일본군은 평시에 비해 전시에는 사단 병력이 2배로 늘어 난다. 결국 평시에 비해 딱 4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역 2년외에 예비역 5년 4개월을 전부 동원해서 복무해도 평시 병력은 3.67배 밖에 안되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을종까지 동원하여 전시 34개 사단 병력을 채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제2을종의 경우 아예 군사교육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 소집’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병력을 보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수 정예제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1939년에는 8개 사단 증설, 1940년에는 7개 사단, 1941년에는 2개 사단이 증설되어 총 51개 사단 210만명이 되었다. 결국 1939년에 대량소집을 위한 법개정이 이루어져 기존의 보충병역 12년 4개월이 17년 4개월로 연장되었다. 최고 38세의 남성까지 소집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에는 도저히 군인으로 써먹을 수 없던 체격과 나이까지 소집되어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게 된다. 거기다 현역들이 예비역들을 사람 취급 안하고 개무시 했다.[35][36]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에는 이래도 부족하여 징병연한을 20세에서 19세로 낮추고 현역 징집률을 77.4%까지 올렸다.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 대만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인과 대만인도 징집했다. 육군 총병력은 99개 사단 420만명에 달했다. 덕분에 이미 심각하게 상태가 안좋았던 1941년과도 비교도 안되게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는 상태가 된 것이다.

장교 부족도 심각하여 1939년의 경우 전체 장교 60,700명에서 소좌 정원 7,366명중 4,231명(57.4%)만 채우고, 대위는 더 심각하여 정원 18,597명중에 7,191명(38.7%) 밖에 안되었다. 게다가 채워진 인원들도 상당수가 예비역 장교로 1939년 기준으로 현역 비율은 36% 밖에 안되어 소좌가 83.1%, 대위가 77.7%, 중소위의 경우 겨우 21.2%였다. 그바람에 본래 소좌가 맡아야 할 대대장을 대위가, 대위가 맡아야 할 중대장을 중소위가 맡는 것이 보통이였다. 덕분에 이전까지처럼 진급시킬때 연공서열따위에 목을 메던 것도 사라지며 중위 임관한 장교가 1년만에 소좌가 되는 경우까지 생겼을 정도였다.[37] 평시, 아니 태평양전쟁 초반, 아니 1944년 전만 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1945년에는 육군 전체 장교가 25만명 까지 늘어났지만, 현역 장교 비율은 무려 19%까지 떨어 졌고, 정원 충족률도 74%까지 떨어진다. 대대장( 소좌), 중대장( 대위)의 경우 현역은 20~40% 정도였으며, 정원 충족률은 겨우 70% 정도였다.

장교 1인당 사병의 수는 39년에는 17.5명이었지만, 1945년에는 24.6명에 달했다. 같은기간 미 육군은 39년에는 12.1명, 1943년엔 11.1명, 1945년엔 8.3명으로 오히려 장교 비율이 점점 올라갔다. 참고로 미군은 39년 총병력 10만명에서 1945년엔 1,000만명까지 늘어났다. 즉 일본이 추구하는 ‘소수정예’는 오히려 미군에게 붙여줘야 할 명칭이였다. [38]이런 상황에서 진급도 속성으로 이뤄지게 되면서 1939년 졸업한 육사 52기 생들이 1944년에 딱 5년 장교생활 하고 소좌를 단 인원들이 있었고, 1933년 졸업한 1912년생 중좌가 있을 정도였다. 20대 소좌와 30대 초반 중좌라는 건 태평양전쟁 초기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사관 선발은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바로 받지 않고, 병사 중 우수한 자원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일등병 중 상등병 진급이 될 만한 대상인 상등병후보자를 뽑은 후 상등병후보자특별교육을 실시, 그 적임자로 상등병 진급자를 뽑고, 그 중 오장이 되기를 원하는 자나 전역한 후 하사관에 지원하는 자들[39] 중에 선발해서 1년동안 육군교도학교나 아니면 각 부대의 하사관 교육 기관에서 1년 교육 후 오장이 되었다. 그리고 4년동안 근무가 가능했고, 그 뒤는 재임용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 경우 근무성적이 좋지 않다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40] 다만 특수한 직렬의 경우는 한국 같은 민간부사관 비슷한 제도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육군 항공비행학교나 정비학교 졸업생의 경우는 상등병 임관 후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수습단계를 거쳐서 오장으로 임용하기도 했고, 헌병 등의 분과에서는 시험을 쳐서 훈련병 중 괜찮은 인원들을 상등병으로 임용시키기도 했다.

뭣보다도 도시의 배운 사람을 현역병으로 받아들이기 무서워했던 일본군 특성상 '예비역오장' 이라는 특이한 제도도 있었는데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 을종간부후보생' 이라는 걸 뽑아서 훈련을 시킨 다음 예비역에 편입, 병역의무를 마치게 만드는 제도였다. 그리고 전쟁이 한참 지속되면서는 하사관 부족해지자, 아예 신병훈련을 받을 때 일정 학력 이상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평가를 봐서 임용 시 계급 자체를 다르게 주기도 했다.

병사 계급은 이등병과 일등병, 상등병으로 구성됐으며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9월 병장이 신설됐다.[41] 일병까진 대체로 그냥 올라갔지만 상등병은 중대 당 1할의 인원 제한이 있었고, 진급은 시험 등 검열로 이뤄졌다. 일본 육해군 병사/ 수병 계급은 무조건 근속년수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이 높다고 꼭 선임인 것은 아니었으며, 후임이라도 먼저 진급하면 상하가 뒤집혀 이전에 자신을 갈구다 후임이 된 선임에게 복수를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또한 상등병으로 선발되어야 헌병이나 통신병 등 고급 기술을 배우거나 권한이 많거나 편한 특기를 재배정받을 수 있었기에 많은 병사들이 진급을 위해 노력했고(밤에 이불 뒤집어쓰고 손전등 켜서 공부했다는 수기도 있다. 애석하게도 수기의 주인공은 진급에 성공한 뒤 미군에게...), 고향에서도 전역시 상등병이나 병장 전역자( 1940년 이전에는 오장 이상 전역자)라면 거의 가문의 영광급으로 우대를 받았다.

특히나 일본군 하사관이라는 건 지금 우리나라 군대와는 다른 점이 있어서, '장교가 아니지만 군에서 근무하는 인원' 이라는 의미보다는 '징집병 입대자들 중에서 무척 우수하다고 평가받은 인원' 이라는 의미가 강했고[42][43], 일본사회 자체가 군국주의화 되기 전부터도 군대나 사회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군대에서 적응 잘 하고 인정받은 인원이라면 사회에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충분히 통했기 때문에 저런 측면이 강했다.

당장 실질적인 이점들이 있어서 하사관 전역자라면 경찰 채용이나 공무원 채용 등에서 직접적인 우대를 받았고, 다른 곳에 취업하기도 굉장히 유리한 편이었다.[44] 또 오래 복무한 하사관들의 경우는[45] 퇴역시 소정의 은사금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게 시골을 좀 마련할 수준은 되었다고 한다.[46] 다만 시골출신들이 많고, 아무래도 배우거나 부유한 의 자제들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6.1. 병역 기피

창군 시절인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패전으로 해체된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기간을 보면 병역기피자도 꽤 있었다.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고 해서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겨버렸다.[47] 이공계 학교의 경우에도 병역을 면제해줬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 이공계로 가서 병역을 피한 사람도 많았다. 오진으로 징병을 피한 경우도 있는데 미시마 유키오가 대표적이다. 징병검사를 통과했지만 군의관이 기관지염을 결핵으로 본 탓에 귀가 조치됐다. 소수이긴 하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기도 했다.[48] 평화주의자나 좌파들도 병역거부를 했으나, 전자는 언론통제로 대부분 보도되지 않고 비국민 취급을 받았고, 후자는 코로 소바를 취식한 후 감옥에 가거나 전향했다.

군국주의 국가였다고 해도 당시 일본은 사실상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1945년 패전 직전에조차도 입영율은 50%가 되지 않았다.[49] 당시의 행정체계의 허술함도 한 몫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다음에 가겠다'고 하다가 군수 공장이나 주요 기간산업 시설에 취직하는 식으로 징병을 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50] 병역기피 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뇌물을 주는 것이었다. 지방의 관리사무소나 구청의 병사관리 창구 담당자에게 뇌물을 줘서 '특수기술자'로 등록하여 병역기피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51]

군속으로 근무해도 병역을 갈음할 수 있었는데, 2차대전 중후반기부턴 병력 부족으로 이들 상당수도 해당 군속과 동렬의 군 계급을 받고 현역 군인으로 전환됐다.

징병은 남자로서 꼭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징병을 피한 사람들은 다소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나약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런 반면에, 사람사는 곳이 다 비슷한 면이 있듯 전쟁 이전에도 징병검사때가 되면 동네 절에 가서 군대 안 가게 해달라고 빌거나 하는 일도 나름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군대를 가게 된다고 쳐도 그냥 건강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니 좋은 일, 안 가게 되면 안 가게 되니 좋은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징집율이 높지 않아서[52] 군대를 안 가게 된다고 해도 크게 병신취급을 받는 건 아니었고, 군대가 좀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곳이기는 해도 사회 분위기가 군인에게 우호적인 면도 있다보니 군대 갔다 오면 유무형의 보상도 있고 해서 가능한 현상. 사회 전체적으로 일반인보다는 육군 병사 대우가 나은 편이라 시골의 가난한 집 출신들 중에는 군대가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병역법에는 엄연히 기피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었고, 전쟁중에는 가중처벌되는 조항도 있었지만 정작 전쟁이 막장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하도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병역기피자들을 감옥이 아니라 공장에 보내버리곤 했다.[53] 최전방이라면 감옥보다 전선이 더 지옥같기는 했겠지만, 또 하나의 코미디는 그렇게 해서 막판까지 도망다니다 잡힌 사람들의 경우는 '본토결전 병력 필요+미군 잠수함으로 인한 병력 수송 불가능+걔네한테 줄 무기나 피복 장구류 등등도 어차피 부족' 등등의 이유로 결국은 국민복 입고 죽창 들고는 자기네 동네를 지키는 병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54] 당장 식민강점기의 조선에만 해도 군대에 끌려갈 것 같아서 몇 달간 도망다니다가 잡히는 바람에 '이제 죽겠구나 했더니' 보낸 곳이 원산이나 함흥의 공장이었다는 사례도 있고, 신성한 병역의 의무랍시고 군복무에 나서게 된 사람들 상당수는 남양군도나 필리핀으로 끌려갔다가 시체조차 돌아오지 못 했는데, 군복무를 피하다가 막판에 잡힌 사람들은 한반도 내에서 뺑이치다 그래도 목숨은 구했다거나 하는 사례들도 허다했다고 한다.

7. 일본 육군이 보유했던 장비

2차대전 당시 일본 육군을 위해 생산된 장비들은 국력에서 근소하게 앞서던 이탈리아 왕국군의 것과 성능과 생산량에서 자주 비교될 만큼 특출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중형전차를 비교하자면 일본 육군의 97식 전차는 약 1,162대가 생산되고 개량형인 97식 신호토 전차는 930대를 보유한 반면 이탈리아 왕국군의 M13/40 전차는 2,000대가 생산되고 개량형인 M15/42는 120대를 보유하는 등 도토리 키재기였다. 육군항공대의 Ki-43은 이탈리아 왕국 공군의 MC.202보다 생산량과 무장에서 앞섰으므로 일본이 전반적으로 이탈리아 왕국보다 우세했다고 할 수는 있다.

항공병기의 경우 일본 해군항공대 장비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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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볼버 26년식 권총
조명탄 권총 90식 신호권총, 97식 신호권총, 해군 4식 더블배럴 산탄권총
지원화기 기관총 경기관총 11년식 경기관총, 96/99식 경기관총, 92식 7.7mm 기총, 시제 1식/3식 경기관총
중기관총 3년식 기관총, 92/1식 중기관총, 93식 중기관총, 89/97식 고정 기관총, 98식 중기관총, 97식 중기관총, 98/1식 선회 기관총, 99식 기총
대전차화기 97식 자동포, 4식 7cm 분진포, 5식 8cm 분진포, 99식 파갑폭뢰, 갈고리 폭탄, 자돌폭뢰
화염방사기 93식 소화염발사기, 100식 화염발사기
척탄통 및 박격포 10식 척탄통, 89식 척탄통, 97식 곡사보병포, 94식 90mm 박격포, 96/97식 150mm 박격포
유탄 91식 파쇄 수류탄, 10식 파쇄 수류탄, 수류탄/일본군, 100식 총류탄발사기, 2식 총류탄발사기
냉병기 군도 일본 군도( 구군도/ 신군도), 30년식 총검, 35년식 총검
취소선 : 실전에 투입되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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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군 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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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포 <colbgcolor=#fefefe,#191919> 91식 10cm 곡사포, 92식 10cm 캐논포, 12cm 캐논포, 96식 150mm 곡사포
야포/ 산포 90식 75mm 야포, 41식 산포, 94식 산포
대전차포/ 전차포 90/97식 57mm 전차포, 94식 37mm 속사포, 1식 기동 47mm 속사포, 시제 57mm 대전차포, 시제 105mm 전차포
보병포 11식 37mm 보병포, 92식 70mm 보병포
대공포 96식 25mm 고각기총, 98식 20mm 기관포, 5식 40mm 중대공포, 88식 75mm 대공포, 99식 88mm 대공포, 89식 12.7cm 40 구경장 함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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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육·해군 항공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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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항공대
단좌 전투기 Ki-27, Ki-43 하야부사, Ki-44 쇼키, Ki-61 히엔, Ki-84 하야테, ◈ Ki-87, ◈ Ki-88, ◈ Ki-94, ◈ Ki-98, Ki-100, †ⓩ Ki-162, ◈ⓩ Ki-200 슈스이, ◈ⓩ Ki-201 카류, †ⓩ Ku-4
복좌 전투기 Ki-45 토류, ◈ Ki-83, Ki-102, ◈Ki-93
폭격기
습격기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BR.20 치코냐, Ki-21, Ki-30, Ki-32,
Ki-48, Ki-49 돈류, Ki-51, Ki-67 히류, † Ki-91
자살 공격기 Ki-115 츠루기
훈련기 Ki-9, Ki-6, Ki-17, Ki-55, Ki-54, Ki-79, Ki-86
정찰기 Ki-16, Ki-36, Ki-46
해군
항공대
<colbgcolor=#2f4f2f> 함재기 <colbgcolor=#2f4f2f> A 함상
전투기
A5M, A6M 제로센, A7M 렛푸, † A8M 리쿠후, † N1K3-A 시덴 카이 二
B 함상
공격기
B5M, B5N, B6N 텐잔, B7A 류세이
C 정찰기 C3N, C5M, C6N 사이운,▼ D4Y1-C
D 함상
폭격기
D1A, D3A, † D3Y 묘조, D4Y 스이세이
E 수상정찰기 E2N, E7K, E9W, E10A, E13A, E14Y, E15K 시운, E16A 즈이운
F 수상관측기 F1M, F1A
G 육상공격기 G3M, G4M, G5N 신잔, G8N 렌잔, † G10N 후가쿠
H 비행정 H6K, H8K, H11K 소우쿠
J 국지전투기 J1N 겟코, J2M 라이덴, †J3K 17시 국지전투기, ◈ J4M 센덴, ◈ J5N 텐라이, ◈ J6K 진푸, ◈ J7W 신덴, †ⓩ J7W2/J7W3 신덴 카이, ◈ⓩ J8M 슈스이, ◈ⓩ J9Y 킷카, ▼ N1K-J 시덴, ▼ N1K2-J 시덴 카이, ▼ N1K3-J 시덴 카이 一, ▼ N1K4-J 시덴 카이 三, ▼† A7M3-J 렛푸 카이
K 훈련기 K5Y, K9W 코우요, K10W, K11W 시라기쿠, ▼ A6M2-K, ▼ M6A1-K 난잔
L 수송기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DC-2,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L2D, L3Y, L4M, ▼ H6K-L, ▼ H8K-L 세이쿠, ▼ H11K-L 소우쿠, ▼ G5N2-L 신잔 카이
M 특수공격기
MX 특수활공기
MXY-7 오카, ◈(제식명 불명)N 토카, M6A 세이란, D4Y4 스이세이
N 수상전투기 N1K 쿄후, ▼ A6M2-N
P 폭격기 P1Y 긴가
Q 초계기 Q1W 토카이, Q2M 타이요, †Q3W 난카이
R 육상정찰기 R2Y(세이운, 케이운), ◈ⓩ R2Y2 케이운 카이, ▼ J1N1-R
S 야간전투기 ◈S1A 덴코, ▼ J1N-S 겟코, ▼ P1Y1-S 바야코, ▼ P1Y2-S 쿗쿄, ▼ D4Y2-S 스이세이
<colbgcolor=#000000> 노획 항공기 파일:소련 국기.svg LaGG-3-8, I-16, 투폴레프 SB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F2A 버팔로, P-40, B-17(D/E), P-51C, F4U 콜세어, F6F 헬캣, 커티스 BT-32, CW-21, DB-7, 마틴 139
파일:영국 국기.svg 호커 허리케인, 브리스톨 블렌헤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독일로부터 수입한 기체 하인켈 72, A7He, AxHe, 하인켈 He 119, 융커스 Ju 87 슈투카, 메서슈미트 Bf 109E-7, 포케불프 Fw 190A-5, 메서슈미트 Me 210 A2, 메서슈미트 Me 410, ⓩ 메서슈미트 Me163, †ⓩ 메서슈미트 Me 262, † 포케불프 Ta 152, † 융커스 Ju 390, † V2 미사일
글라이더, 무동력기, 미사일 Ki-147, † Ki-148, † MXY8 아키구사
◈ 시제, 프로토타입 / † 페이퍼 플랜, 수입 실패 / ⓩ 제트 혹은 로켓 엔진 장착기 / ▼ 타 목적 기체를 유용함
국지전투기: 일본군이 운용했던 본토 방어 및 폭격기 요격 전용 전투기. 요격기 문서 참조.
※ 나무위키에 문서가 없거나 이 틀에 기재되지 않은 일본군의 항공병기 전체 목록은 일본 항공병기 설계안 문서 참조.
연합군(특히 미국)이 대전기의 일본 항공기를 지칭할때 사용했던 코드에 대해서는 연합국 코드명 문서 참조.
템플릿:일본 제국의 항공병기를 참조해 주세요. 전반적인 내용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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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같은 욱일기이지만 중심의 원 모양이 정가운데에 위치한 점이 해군기와 다르다. 더불어 현 해상자위대의 욱일기는 구 해군 시절과 동일한 도안을 색상만 일부 변경하여 사용하지만 육상자위대는 욱일기 도안을 재창작하여 사용하고 있기에(사선 갯수가 16조 → 현재는 8조로 간략화) 현재 이 깃발은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다 할 수 있다. [2] 육상자위대에게 이 곡을 그대로 계승하여 후지종합화력연습, 중앙관열식, 주둔지개방행사와 같은 대민친선이벤트에서 단골로 연주한다. [3] 한켠에 적혀 있는 문구는 '보병 제□연대'이다. (□=숫자) [4] 대륙과 이어진 반도라는 지형적 요소부터 시작해서, 당장 조선총독만 봐도 해군이나 문관 총독이 여럿 있었던 대만총독부와 달리 조선총독에 해군 출신은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유일했다. 그외에는 전부 육군 장군들. 일본 제국 해군의 경우 조선에 있는 규모있는 해군기지는 진해 요항부 정도만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조선인 입대자를 식민지 출신이라 잘 받지도 않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5] 공식 직함이 장관이 아니라 고위관료들을 높여부르는 말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직위가 "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편하다. [6] 양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서양권은 육군과 해군이 발전해 온 역사가 다르기 따문에 육군과 해군을 관장하는 부서가 각각 전쟁성(육군성), 해군성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양차대전을 격고 통합작전의 필요성을 절감, 대부분의 나라들이 국방성으로 통합한다. 영국과 같이 일찍부터 독립된 군종으로써의 공군이 있던 경우는 전쟁성, 해군성처럼 공군만 관리하는 공군성, 민간항공을 관장하던 항공성이라는 부서가 있었다. [7] 육군교육사령부 육군사관학교를 합치고 군사특기와 병과 학교 모두를 합친 조직이라 보면된다. 한국도 육군교육사령부의 전신은 육군교육총감부로 육군교육사령부에 해당한다. 또한 한국은 두 곳 모두 육군본부 직할로 육군교육사령관과 육사 교장은 중장 보직이며 병과 학교의 경우 소장 보직인데 일본제국 육군 교육총감부는 대장, 중장급 한 명인 교육총감이 참모양성 육군대학교(참모본부 관할)을 제외한 군 기본 교육과 전반적인 군 교육과정, 모든 군사특기에 관한 위 모두를 총 관할한다. [8] 大村益次郎(1825 ~ 1869) 보신 전쟁 당시 총 군감으로 전공을 세우고 그 후 병부대보[59]로서 병권에 실권을 잡아 일본 제국 육군에 대한 기획, 기틀을 마련한 인물 [9] 다만 칼을 들고 싸운 전투도 있다. [10] 그 이전에는 군사 의식까지 프랑스식으로 모방하는 등 프랑스의 영향력이 컸다. [11]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국민복이 디자인은 물론 색상까지도 군복과 대동소이 했다. 비슷한 시기 나치 독일도 군복의 사이즈를 줄이다 말년에는 평상복에 휘장이랑 완장만 붙여 국민돌격대에게 지급했다. [12] 전투로 사망한 자는 12명이고 531명은 질병. [13] 전사자는 47,000명, 나머지는 질병. [14] 공군 창설 멤버 7인 중 이근석, 김정렬, 김영환 이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이다. [15] 다만 조종사 훈련이나 장비 공급, 편제 등 전반에서 일본군보다 미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공군 창설 간부 7인이 미군식으로 재훈련을 받으면서까지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덕분이었다. [16] 그가 전사하기 보름 전에 콘도 하쿠에이 라는 조선인이 전사하긴 했으나, 카미카제를 위해 출격 도중 추락사해서 그런지 알려진 바가 없다. [17] 카미카제를 하면 오장과 군조는 3~4계급 특진하여 소위로 추서시켜주는 게 관례였으며 장교는 2계급 특진이였다. [18] 육사 61기는 예과 교육 중이며 항공과로 지정된 생도만 있었음 [19] 좀 특이한 경우인데 육사 52기로 포병으로 근무하다가 나중에 김정렬과 함께 항사 54기로 졸업하였다. 정비 장교 [20] 참모과란 독일제국 육군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독일제국 육군은 참모과가 병과 중 하나였다. 일본제국 육군에서는 참모과 외에도 요새참모과 등의 병과가 있었다. [21] 1925년에 추가됨 [22] 참모과와 요새참모과는 1879~1890년 사이에 폐지. [23] 1919년 8월 6일, 육군 기술장교령이 제정 및 시행되어, 육군장교(보병·기병·포병·공병·치중병·항공병과에 속하는 병과장교) 중에서 기술부문에 있는 사람을 '기술 장교'라고 했다. 기술장교는 주로 일반대학의 공학부 또는 이학부 출신의 학사로 보충했다. 1940년 9월 15일에 기술부로 승격. [24] 소대 병력을 지휘하여 소대 전술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다 [25] 경리부(회계 장교), 보건복지부( 의사), 수의사부 [26] 참고로 이 당시 조선인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갈 수 없었고, 조선인이 다니던 고등보통학교는 배속 장교는 물론 교련도 없었다. [27] 단 일본 학병은 전원 간부후보생 자격을 주어 3개월 집체교육 후 갑을종 구분을 하고, 조선인 학병은 지원자에 한하여 간부후보생 시험을 보게 하고 합격자만 간부후보생이 되었다. [28] 조선인 학도병이 간부 후보생이 되었을 때 딱 이 시기였다. [29] 1941년에 신설 계급 [30] 그러나 높은 지원율을 뚫고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어만 다소 딸릴 뿐이지 신체조건과 두뇌가 압도적으로 우수하였다. [31] 진급이 무지하게 빠른데 일본군은 하사관 월급이 적어 가정을 꾸릴 수 없어 지원자도 없으며, 평시에는 준위까지 달아야 정년이 40세일 정도로 짧았다. 즉 직업군인이 아니라 병생활의 연장이었다. [32] 최경록, 함병선은 갑종 간부후보생으로 준위가 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33] 학병출신 김용배 대장과는 동명이인. 지원병 김용배는 전사함 [34]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35] 대충 따지자면 1등 군인 현역, 2등 군인 예비역, 3등 군인 조센징이다.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오오에 오장( 장항선 분)이 주인공 최대치( 최재성 분)가 조센징이라고 각종 학대를 하는데, 옆에서 덤으로 구박 받으며 개무시당하던 중년 남성이 바로 후비역 구보다( 박인환 분)이다. [36] 다만 이것도 예외는 있어서 이미 현역 복무를 끝낸 이후 사회 생활을 하다가 대전 말기에 보충병 형식으로 소집된 많은 예비역/후비역 상병장 출신들이 아직 사회 경험이 부족한 농촌 출신 징집병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현역 상병장들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이는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영화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과거 헌병이었다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해서 퇴출된 바람에 주인공 부대로 전입 온 현역 상등병이 주인공을 포함한 다수의 예비역과 후비역 출신 소집병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잘 반영되어있다. [37] 해군의 예지만, 나중에 일본 총리까지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그 케이스였다. [38] 정확히 말하면 ‘다수정예’라 볼 수 있다. [39] 이 경우는 일등병 전역자도 지원은 가능했다. [40] 그때도 사람사는 건 비슷하듯, 경기가 좋을 때와 안 좋을 때의 지원자 상황이 천차만별이었다고 한다. [41] 그 이전에는 오장근무상등병이라 해서 내무실 전체를 책임지는 병사가 있었는데, 이 인원들을 병장으로 승진시켜준 것. 여명의 눈동자에서 오오에가 오장계급을 달고 내무반에서 같이 생활하는 모습이 보통 일본군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장부터는 병사들과 다른곳에서 생활했고, 이게 원래부터 장교와 그 아래 간에 간극이 심했던 일본군에서 하사관과 병사의 간극까지 심해져 문제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42] 그러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상사 행보관, 50세가 다 되어가는 주임원사 준위 등을 당시 일본군에 그대로 대입하면 오류가 생긴다. 당시 일본군 하사관이라는건 어디까지나 징집병 생활의 연장선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나이들도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상사에 해당하는 조장이나 일본 육군 준위들의 나이도 저 정도로 젊었다. 애시당초 일본군 하사관의 정년은 40세였다. 그것도 준위를 달아야 그 때까지 일할수 있었다. [43] 엄밀히 말하면 하사인 오장이나 중사 정도에 해당하는 군조의 경우는 현 한국 부사관들보다 승진이 어렵고 나이도 조금 더 많은 편이지만 그 만큼 대접이 확실한 편이었고 조장으로 진급하는 시기는 한국군의 상사 진급보다 조금 빠르긴 해도(보통 20대 후반 정도라고 한다.) 중대 1인 정도로 진급 가능성 자체는 굉장히 적고 한국군의 상사들처럼 오래 근무하지도 않기 때문에 숫자도 무척 적은 편이었다. 애시당초 조장이나 그 위의 준사관인 준위(해군의 경우는 병조장)의 경우는 이등병에서부터 군생활로 올라온 인원들도 있지만 항공이나 의무 같은 특이한 특기가 있거나 아니면 사관생도 과정 중에 임관 전 임시로 임용되거나 한 인원들도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든 계급이다. 전쟁 말기쯤 가면 하사관 계급의 연령 분화가 극과 극으로 더 심해지는데 20대 중반에 초고속으로 군조나 조장을 단 인원들도 있는가 하면, 예비역이나 후비역으로 징집된 나이 많은 오장이나 군조, 조장들도 존재했다. [44] 이를테면, 당시 일본 시골이나 소도시 같은 곳에 있는 마을 일을 돌보는 일종의 마을회관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일정한 댓가를 받으며 일하는 인원들이 있었는데, 상등병이나 오장 전역자들이 도맡아서 하곤 했다. 마을 청년회 회장 같은걸 일정한 수당을 받고 하는 셈인데, 나름 동네 청년이나 청소년들의 지도자 취급을 받는 자리였고, 그래서인지 마을에서의 대접도 꽤 괜찮은 일자리였다고 한다. [45] 그래봐야 요즘 육군 부사관들같은 정도가 아니라 6년차 퇴역,12년차 퇴역 뭐 이런 정도였다. [46] 요시다 유타카의 '일본의 군대'라는 책에 따르면 군생활 6년 한 하사관은 퇴직 일시금으로 120엔을, 10년 한 하사관은 퇴직 일시금 360엔을 받았으며 군생활 12년 하고 군조 전역시는 은사금으로 연 100엔, 조장 전역시는 연 112엔을 매년 받았다고 했다. 저때 당시 공무원들 월급이 20원이네 30원이네 40원이네 하던 시대였다. [47]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는 것은 19세기까지 있던 일이었으며 대표적으로 나쓰메 소세키가 있다. [48] 당시 "등대사 사건"을 비롯해서, 군부가 가장 골치아파 하는 집단으로 평가되었다. [49] 군대를 오라고 영장을 보내면, 둘 중 한명은 안 왔다는 소리다. [50] 일제강점기 말기에 박헌영이 벽돌공장에서 가명으로 일하면서 숨어있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김두한(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을 비롯한 폭력배들도 건설대를 비롯한 활동을 통해서 징병을 피했다. [51] 책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52] 위에도 나왔지만 현역 필한 자가 중일전쟁 전만 해도 다섯 중 하나, 중일전쟁 이후에도 40년대 초반까지는 셋 중 하나 정도였다. [53] 이게 1944년을 전후로 해서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그 전의 일본군은 나름 정예의식이 있었고, 따라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인원은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했었다. 조선인들의 입대를 미루고 미루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마지못해 하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으며 태평양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고등교육 받은 사람을 병사로 징집하면 괜히 배운놈들이 말 많고 분란 일으키고 해서 병영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면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예비역 장교 정도로 얼렁뚱땅 병역을 때우게 했을 정도였다. 조선인, 대학생이 이런데 병역기피자는 더더욱 기피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평시라면 모르나 전시에는 정말 넣어놨다가 탈영을 할 지도 모를 일이다! [54] 대체로 지원병시절에 자원입대한 인원들이나 학병으로 끌려간 인원들은 그나마 재수좋으면 중국으로 가거나 만주로 가서 목숨 부지는 했고 그게 아니면 조선 주둔하던 19, 20사단의 부대가 차출된 뉴기니나 필리핀으로 많이 갔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기 가서는 정말 많이 죽었다. 다만 징집병시절 입대한 인원들은 대체로 조선반도 안에서 죽창들고 대기하는 정도이다 보니 대체로 목숨 부지는 했다. [55] 전부 육군출신. [56]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잠수함이다! [57] 일본 육군의 장비 중에 가장 비밀스러운 떡밥투성이 장비다. 현재 이걸 전시 중인 러시아 측에서도 분해금지가 걸려 있다. [58] 위에 있는 삼식잠항수송정과 더불어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항공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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