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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이중잣대식 비교
2.
일본 해군 항공대3.
항공모함4.
전함5.
중순양함6.
경순양함7.
구축함8.
어뢰정과
해방함8.1. 전과
9.
잠수함9.1. 임무 부여 실패9.2. 잠항능력의 미흡9.3. 정숙성9.4. 어뢰 탑재 수량 부족9.5. 잘못된 목표 지정9.6. 과도한 목적의 잠수함9.7. 승조원 배려의 잘못된 방향성9.8. 에어컨 문제9.9.
함대결전사상
10. 관련 문서1. 개요
일본 제국 해군은 여러가지로 육군보다 활약을 하고 개념은 있었다. 일본 육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주요 교전국 중 최하위 수준이었던 반면, 해군은 이래 봬도 평상시에는 3위, 전성기에는 1위를 했으니 당연하다. 종합적인 성적을 내보면 해군 기준으로는 영국과 미국이 동등하고 그 다음에 일본이 있으며 그 뒤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순서로 보면 된다. 또한 조선공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자였던 히라가 유즈루[1] 중장이 있었다. 이렇게 장점도 있었지만 일본 해군의 최대 문제점은 무기체계쪽에도 매우 심각하지만 그보다는 전략, 행정, 교육, 인사 등 관리 및 운영 시스템에서 두드러진다.무기체계와 기술력 측면에서 본다면 대(對)미국 함대결전용 해군 으로 육성한 일본 해군치고는 여러가지 면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보인다. 일단 산소어뢰를 제외한 기술에 있어서 일본 해군이 자랑한다는 항공모함이나 전함 역시 미국에 비교해 확실한 열세를 보였다. 그나마 산소어뢰는 태평양 전쟁 중반까지는 제법 활약했지만 나중에 가면 제공권이 완전히 미국에게 넘어가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다. 개전 이전엔 전력이 미국 영국에 밀리고 돈도 훨씬 적어서 일반적인 함종 외의 것으로 승부하려는 경향과, 전쟁 말의 상황이 막장이 되어 제대로 개장을 못하는 등의 이유로 타국에 없는 중뇌장순양함, 항공전함, 항공순양함, 잠수항모와 같은 특이한 함종을 많이 개발한 편이다.
물론 추축국 제1위의 해군답게 일본 해군은 그래도 다른 추축국이나 프랑스 등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고 볼 수 있다. 건조기술 노하우나 이런 것은 독일에도 전수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항공기 기술력이나 철강 등 보다 기초적인 영역은 어느 정도 열세다. 특히 미국의 우수한 전함들한테 밀리는 건 물론이고, 프랑스 또한 수십 년동안 전함을 안 만들다가 됭케르크급 전함을 만든 다음 만든 게 리슐리외급 전함인 걸 생각하면 사실 일본의 건조 기술이나 건조 사상도 상위급으로 쳐주기 어렵다.
애초에 독일에게 건조 기술 전수해준 건 일본이 배를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독일 함선 건조의 맥이 끊겨서다. 그 전에는 독일이 일본보다 배를 더 잘 만들었으며 미국과 영국이 아니고서는 독일이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는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시의 독일은 영국에 이은 해양강국이었으나 1차 대전 패전과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모든 함선을 잃어버리고 함선 건조와 보유에 제약이 걸렸으며 전후의 혼란으로 설계 능력을 갖춘 인원들을 잃어버렸다. 독일은 전투력 유지를 위해, 자동차를 통해서 전차 훈련을 시키고, 글라이더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했지만, 전투를 위한 무기들을 만들 설계 능력과 기술력은 대전 막바지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특히 해군의 경우에는 거대 함선을 건조하고 운영할 필요가 있었는데 전차나 항공기는 비밀리에 만들고 운영이 가능하지만 해군 함선들은 그게 불가능해서 말 그대로 기술력 단절이 들어가버렸다. 재무장을 시작한 이후에는 필사적으로 회복을 시작했지만, 전쟁이 너무 빨리 터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괜히 에리히 레더 제독이 이제 크릭스마리네는 장렬히 죽는 일만 남았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있던 전함마저 이런저런 삽질로 잃어버리거나 못 쓰게 되자 남은 건 U보트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추축국 1위의 해군답게 리슐리외급 전함 수준의 전함은 나가토급 전함등으로 제압이 가능하다. 미국과 영국을 대입해보다라도 미국은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4척, 아이오와급 전함 4척이 리슐리외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이며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척도 조약의 영향으로 성능의 제약이 걸려있지만 맞상대와 제압이 가능하다.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매사추세츠는 리슐리외급 전함 2번함 장 바르를 일방적으로 두들겼다. 비록 장 바르가 미완성이었다고는 하나 최소한 장갑 구획은 완성된 상태였고 사우스다코타급의 주포가 유효타를 낼 수 있다는 점은 확인된다. 영국의 경우는 전함간 1대1 대결로는 힘들다. 일단 넬슨급 전함, 킹 조지 5세급 전함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KGV는 주포가 14인치라서, 넬슨은 주포가 16인치지만 실패작이라서 화력에서 밀린다. 하지만 항공모함과 연계하거나 전함들로 다구리를 치면 가능하다.
그리고 파고다형 함교가 흔히들 레이더와 비교해 까이는데, 세계 5위 해군인 이탈리아는 그나마도 못했다. 더 크게 2차대전 당시의 해전사를 볼 때, 프랑스 해군은 빠른 항복으로 제대로 활약을 못 했고, 이탈리아 해군은 제법 활약하기는 했지만 지중해 내부서만 활동이 가능하다는 한계도 분명했다.[2] 반면, 일본은 그래도 1943년까지는 그럭저럭 설쳐댔다. 그 영국도 본토 일이 바쁘고 거리가 멀어서 일본을 크게 제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말레이 해전과 실론 해전에서 일본한테 지는 바람에 일본이 더 기고만장해진 것까지 감안한다면 그나마 일본 해군은 상대가 미국이라 안 좋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이중잣대식 비교는 주의해야 한다. 산소어뢰같이 자랑할만한 것만 미합중국 해군과 비교하고 미국 해군에 비해 불리한 것은 영국 해군, 프랑스 해군, 이탈리아 왕립 해군과 비교하면서 정신승리를 하는 경우가 일본 제국 해군에 많다. 대(對)미국 함대결전용 해군으로 일본 해군이 육성된 만큼 비교대상은 미국 해군으로 통일하는 것이 적합하다.[3]
1.1. 이중잣대식 비교
2차대전에 참전한 군대중 유독 일본 제국 해군만 패전한 지 한참 뒤에나 이중잣대식 비교가 유행하고 있는데 원인은 간단하다. 졌지만 잘 싸웠다를 주장하려고 하면서 패전의 책임자는 아무도 없다는 모순되는 목적을 모조리 달성하려다가 꼬인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노리려다가 다 놓친 것이 문제였다.애초에 일본 제국 해군의 주적인 미합중국 해군도 어뢰 스캔들 같은 중요한 분야에서는 엄청나게 비판을 받으며 미 해군은 이런 비판을 받으면서도 자기신관 어뢰는 나치 독일도 초반에 실패했으니 괜찮음 같은 이중잣대식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인 일본 해군의 산소어뢰를 칭찬하면서 미국 어뢰도 성능개선을 하기 위해 매우 힘썼다.
이건 미 해군만의 사례가 아니다. 영국 해군도 전간기때 해군 유지및 개선에 실패하여 후드(순양전함)가 낡은 고물로 전락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억지로 투입했다가 전함 비스마르크에게 일격에 격침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말레이 해전과 실론 해전에서의 패전이 발생했다. 그리고 영국 해군도 제대로 군함들을 근대화 개량하고 대공화기를 증설하지 못한 점과 폼폼 포의 문제점과 사격통제장치의 개선점 및 영국이 보유한 함재기의 허접함을 언급했지 프랑스 해군보단 상황이 나음 식의 이중잣대식 헛소리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프랑스 해군과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경우에는 장점보다도 단점이 언급되는 사례가 엄청나게 많으며 이런 비판에 대해서도 둘 다 모두 자신들의 약점을 인정했지 소련 해군이나 독일 해군(나치 독일)보다는 상황이 좋다는 식의 이중잣대식 헛소리는 생각도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열강이라는 당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국가들은 이중잣대식 비교 따위는 자신들의 국가 위상을 생각해서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애초에 열강 타이틀을 얻게 되면 자신보다 낮은 순위의 국가나 2류국가, 3류국가와는 비교 자체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치욕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비교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되는 하위국가, 2류국가, 3류국가와 같은 물에서 논다는 자기망신이 되는데다가 그렇게 낮은 위치의 국가들도 뭔가 1개 정도는 열강 국가보다 잘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비교까지 당하게 되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식으로 손해만 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망신을 당하느니 그냥 깔끔하게 부족한 점은 패배를 인정하는 게 더 좋고 다들 그렇게 실천했다.
그런데 해군력으로 세계 3위를 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일시적으로 1위까지 달성한 일본 제국 해군이 이중잣대식 비교를 하는 순간 위의 이론대로 하면 순식간에 순위가 5위로 떨어지며 프랑스 해군이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일본 해군보다 나은 점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까지 감안하면 실제로는 일본 해군이 세계 5위 밖으로 밀려난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 된다. 해군열강국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국가의 군대인 일본 제국 육군도 치하나 94식 37mm 속사포같은 답없는 장비들은 그냥 답이 없었다고 깔끔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거지같은 장비를 가지고 용감하게 싸운 장병들을 유달리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일본 육군이 하는 행동이 전형적인 졌지만 잘 싸웠다식 실천법이며 일본 해군과는 달리 모순점에 빠지지도 않는다. 수뇌부가 개판이고 기술력도 부족하고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못받았지만 일선장병이 용맹하게 싸웠다면 적어도 일선장병은 용맹했다 식의 변명거리는 충분히 가능하며 외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 해군이 이중잣대식 비교를 하면서 모순점에 빠지게 된 이유는 해군선옥론 덕분이다. 해당 이론으로 일본 해군에 속한 사람은 모두 교묘하게 패배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패전의 책임을 벗어나야 하니 일본 해군은 모두 성실하게 전쟁에 임했으며 지휘도 문제없고 훈련도도 높고 무기와 장비의 문제점도 없었는데 패전했다는 모순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이걸 보충하려고 미국에게 중과부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유독 강조하는 동시에 무기나 장비의 문제점도 이중잣대식 비교로 어떻게든 땜질하는 답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수뇌부건 기술자건 실제 운용하는 장병이건 간에 누군가가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터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해군쪽의 이중잣대식 비교는 그냥 일본 내수용 땜빵에 불과하므로 외부자의 입장에서는 굳이 생각해줄 필요가 없다. 굳이 그런 식으로 비교하려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속 편하게 일본 해군은 당시 세계 열강의 해군이 전혀 아니었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일본 육군보다 질이 떨어지는 조직이 국가 예산을 그렇게나 많이 받아먹고도 처참할 지경으로 수준이 낮았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이중잣대식 비교를 하느니 그냥 다른 해군열강국처럼 문제점은 깔끔하게 인정하고 비교대상을 미 해군으로 단일화하는 편이 더 낫다. 그렇게 해야만 일본 해군은 상대가 미국이라 안 좋았다라는 말이 현실감을 가지게 된다.
2. 일본 해군 항공대
- 함재기: 제로센 ( A6M)
- 자폭 전용기: MXY-7 오카, Ki-115 츠루기
3. 항공모함
항공모함은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상당히 빠른 시대에 항공모함을 도입했다는 점, 그 배경이 어떻든 간에 진주만 공습으로 타국은 연구조차 미미하던 항공모함 전술을 연구하고 성공적으로 시행했다는 점이 그러하다. 사실 타란토 공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항공모함 전술은 원래 영국이 선구자였고 진주만 공습은 이를 참고하여 계획된 것이긴 하지만, 일단 다른 나라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적절하게 활용하며 성과도 큰 것도 대단한 능력은 맞다.
일본군의 항공모함의 예시와, 아카기의 측면 단면도 |
3.1. 3단 갑판
사실 일본은 당대 다른 열강들과 비교해서 항공모함에 딱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해군의 수뇌부 역시 타국과 마찬가지로 함대결전사상이 뿌리깊게 박혀있었기 때문. 영국이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를 만들어서 맨땅에 헤딩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거친 데다 아거스급 항공모함 등의 후속작을 만들었고, 공중항공모함 R-33, 잠수 항모인 M급 잠수함 2번함까지 연구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이런 일본이 해군력 증강의 방향을 항공모함으로 선회하게 한 계기는 바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었다. 이 해군조약에서 일본 해군의 88함대 계획이 파토났다. 해당 계획은 8척의 전함과 8척의 순양전함의 함대를 건설해 자신들의 입지를 분명히 하고 영미 해군을 압도하려는 계획이었으므로 수많은 일본의 거함거포주의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여튼 조약을 어길 수는 없었으니 기존의 건조중인 순양전함을 개조해서 아카기를 만들고 전함을 개조해서 카가를 건조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기존에 실험 목적으로 운용중이었던 유일한 항공모함 호쇼는 둘째치더라도 자기네들끼리 컨셉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몰라서 난관에 부딪혔다. 호쇼 자체가 영국의 2번째 항공모함인 아거스급 항공모함을 크게 참고해서 만든 것이니 무리는 아니다. 결국 영국 해군의 퓨리어스 2단 갑판 형태를 업그레이드(?)해서 3층의 항공갑판을 가진 항공모함이 탄생했으나 결론적으로 실패라는 것이 드러나 버렸다.
개장 전 3단갑판의 아카기와 카가 |
동시에 3대를 날릴 수 있다는 것은 좋았으나 착함할 때에는 최상부에 있는 항공갑판 1개만 쓸 수 있었고, 격납고가 없어서 항공기 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항공기용 엘리베이터도 1, 2, 3층이 모두 공용하다 보니 효율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 결국 이렇게 삽질을 저지른 결과 일본도 이건 글러먹었다고 판단하고 3단 갑판을 포기했다. 결국 미국의 렉싱턴급 항공모함의 구조를 차용하여 아카기와 카가를 쓸 만하게 개장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엄청난 삽질로 돈을 낭비했지만 어찌되었든 개선에 성공한 셈이다.
3.2. 폐쇄식 2층 격납고
미군의 항모가 개방식 1층 격납고가 있었던 반면, 일본군의 항모는 폐쇄식 2층 격납고를 가지고 있었다.3.2.1. 채택 이유
일본군이 폐쇄식 격납고를 고집한데는 이유가 있는데, 폐쇄식 격납고는 대양 항해시 안전하다는 점과 격한 파도에도 내부의 함재기들을 잘 보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제로센은 내구성이 약하고 염분에 약한 마그네슘 부품이 곳곳에 사용된 데다가, 기체의 주재료가 부식이 잘 되고 취성이 강해서 잘 깨지는 초초두랄루민(Extra Super Duralumin. 약칭 ESD.)이었다. 무게를 줄이려고 이런 재료를 쓴 것인데, 그것 때문에 내구성이 약화된 탓에 급강하 속도도 제로센 초-중기형 기준 630km/h보다 조금 못 미치는 629km/h 정도였다. 즉, 1km/h 만 더 올라가도 동체와 날개 연결 부위에 금이 간다.파도가 높고 강한 일본 근해에서 사용할 항공모함에 개방형 격납고를 도입한다면, 이런 제로센의 빈약한 내구도가 더욱 깎이게 된다. 염분이 쌓여봤자 얼마나 쌓이는가 궁금할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다. 물론 하얀 거품은 세제. 그야말로 소금에 절여지다시피 하니 내구성이 약한 A6M 같은 전투기가 주를 이루던 일본군은 폐쇄식 격납고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똑같이 폐쇄식 격납고를 항공모함에 채택한 영국 역시 주무대이자 홈그라운드인 북대서양은 파도도 험하고 바람도 많이 부는 곳이기에 폐쇄식 격납고형 항공모함을 운용했었고, 만일 영국이 개방형 격납고를 택했다면 함재기 관리부터 관리요원들의 작업 환경 등의 문제로 한 고생 했을 것이다. 실전에서도 개방형 격납고를 채택한 미군 소속의 주력 항공모함들 대부분은 태평양 위주로 운용되었다. U보트와 독일 수상함들을 잡기 위해 대서양에서 운용되던 레인저급 항공모함 정도가 예외다. 물론 태평양 함대 소속이던 요크타운도 가끔씩 대서양에서 U보트 사냥을 하긴 했다. 진주만 공습 당시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한 척도 없던 이유는 이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진주만 공습 이후 대서양에 배치된 함정들은 태평양으로 차출된다.
2층 격납고의 명확한 장점은 탑재량이 뻥튀기 된다는 것이다. 단층 격납고에 비해 복층 격납고는 당연히 탑재량이 많을 수밖에 없고 실제로 동시기 타국의 주력 항공모함들과 비교했을 때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의 경우는 기준 배수량 23,000t으로 일본군의 쇼카쿠급 항공모함보다 3,000t 정도 적을 뿐이지만 탑재량은 개량을 가한 후기형 기준으로도 55기 대 72기로 훨씬 적고, 쇼카쿠급의 경우 저기에다가 12기의 보충기까지 추가로 운용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는 격납고를 1층으로 만드는 대신 천장에 함재기를 매다는 식으로 2층 격납고와 유사하게 탑재량을 뻥튀기 했으나 이 방식은 복층 격납고보다 함재기의 관리가 까다로워지는 단점이 있으며, 항모가 어뢰에 피격당하는 등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천장에 있던 함재기가 떨어지며 대형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약점이 있었고 실제로 와스프급 항공모함은 피격당할 때의 충격으로 함재기들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피해가 번져 침몰하고 말았다. 게다가 단층 격납고의 약점인 탑재량이 적다는 점은 어쩔 수가 없어서 날개를 전혀 접지 못하는 F4F-3을 운용하던 당시에는 렉싱턴급 항공모함에 함재기가 66기가 들어갔다. 이후 날개를 컴팩트하게 접는 F4F-4가 탑재되면서 그제야 탑재량은 80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미군 항모의 미친듯한 탑재량은 항모 구조보다는 모든 종류의 함재기가 날개가 접힌다는 강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크타운급보다 쇼카쿠급이 기준배수량 6,000t이 더 나갔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3.2.2. 대미지 컨트롤 문제
아카기의 격납고 단면도 |
쇼카쿠의 격납고 단면도 |
A6M이 날개가 안 접혀서 일본 항공모함 설계의 정수인 쇼카쿠급 항공모함에서도 불규칙하면서도 함재기를 꺼내기 힘든 형태로 적재한다. 게다가 정밀하게 적재하지 않으면 진짜로 함재기를 꺼내기가 너무 힘드니 바닥에 페인트로 그려놓은 대로 정확하게 주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백색 페인트로 백색 줄을 그려서 비행기 모양으로 만든게 주기선이다.
호넷(에식스급 CV-12)의 개방식 격납고와 셔터 |
에식스의 단면도 (5번이 개방식 격납고와 셔터) |
미 해군 항공모함 설계의 뛰어난 점은 무기를 장착하는 격납고나 정비고를 개방형으로 만들어 피격시 폭압이나 파편, 발화가스 등의 데미지를 개방된 측면으로 즉시 분산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군함이 피격 시 침몰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얻어맞은 폭탄 그 자체의 피해 때문이라기보다는 재수없게 탄약고에 맞아 다른 포탄이나 어뢰까지 연쇄적으로 터트리거나, 충격으로 유출된 기름의 발화 및 유증기나 발화가스 등에 의한 2차 폭발이 원인이다. 전자는 포격전을 하는 배들이 많고, 후자는 항공유를 많이 사용하는 항공모함이 많은데 폭발력이 즉시 다른 방향으로 분산된다면 항공갑판의 손상도 최소화하면서 함체의 손상도 막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에는 폭발물이나 항공기를 바다에 투척해서 피격당하더라도 연쇄 폭발을 애초부터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장애물과 폭발물을 측면을 통해 바다로 던져버리면서 피해지역으로 신속하게 복구반이 투입될 수 있었고 숙련된 선원들의 데미지 컨트롤까지 겹쳐져서 요크타운 같은 좀비항모(?)나 엔터프라이즈같은 불침항모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일본군은 엄청나게 뒤떨어진 상태였다. 예를 들면 미 해군은 전 함선 승무원들이 피해 응급복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으나 일본해군은 복구반으로 배정된 승무원만 훈련이 된 상태였다. 따라서 함선에 사고가 발생하면 대응 수위에서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데, 소화시설만 보아도 유류화재에 대비한 이산화 탄소나 소화액을 이용한 소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은 미 일 해군이 모두 같았으나 일본 해군에는 이 시스템이 소진되거나 파손될 경우 백업 시스템이 부족했다. 실제 미드웨이 해전에서 아카기의 경우 명중탄은 단 한 발이었지만 이 명중탄이 격납고의 소화시설을 작동 불능으로 만들어 결국 화재 진압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쇼카쿠급이나 다이호급에서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결국 침몰을 막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든 정규 항공모함이자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의 함체를 유용해서 나온 시나노는 실전 투입은커녕 완공도 안된 상태였고, 부실공사 때문에 대미지 컨트롤 능력도 없었다.
일본군 항공모함인 즈이카쿠의 단면도. 그림 11번과 21번의 격납고 바닥에 흰 줄로 주기선이 잘 나와있다. |
설상가상으로 일본군 항공모함은 격납고 벽에 불이 붙어서 파손되면 응급 복구는 물 건너갔다고 보면 된다. 당시 일본군 항공모함은 함재기용 연료탱크를 함체에 붙여놨기 때문에, 함체가 충격을 받을 때 같이 충격을 받아 연료가 유출이 될 확률이 컸고, 이 질질 샌 기름에 불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덤으로 함선 자체를 움직이는 연료도 나중에 가면, 정유시설 부족과 함께 본토의 정유시설과 점령지의 유정을 연결하는 해상 수송로에 대타격을 입으면서, 함선은 저질 중유로도 일단 돌아간다는 점에 착안해서 타라칸[4] 정유같이 원유에 가까운 물건을 썼기 때문에 함선 연료 배관이 파손되더라도 일반적인 중유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함선과는 달리 함선 연료 배관에서도 휘발성 발화 가스가 누출된다. 여기에 폐쇄식 격납고를 채용하면서 환기 장치를 적게 설치하는 바람에 격납고에서 나오는 발화 가스가 제대로 외부로 배출되지 못했고, 여기에 앞서 말한 승무원, 정확히 말해서 승무원을 지휘하는 장교의 실수까지 겹치면 큰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식의 위험성이 실현된 것이 다이호다. 해당 상황의 경우에는 어뢰 명중 충격으로 항공유 탱크가 파손되면서 새어나와서 기화한 항공유가 너무 많았고 이걸 너무 늦게 발견한데다가 환기장치를 전부 가동해도 유증기가 잘 빠져나가지 못해서 결국 항공기 엘레베이터를 내리고 함선의 현창을 깨고 격납고 외벽까지 뜯어내는 대담한 조치를 실시하여 환기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유증기가 너무 많아서 유증기를 마시고 실신하는 승조원이 나올 지경이었고 유폭 우려로 수리도구도 사용하기 어려웠던 위험한 상황에서 항공대 착함을 어떤 멍청이 같은 자가 실시하는 바람에 열어놓았던 항공기 엘레베이터를 다시 올려서 환기구를 막아버리는 등의 삽질을 하다가 항공기가 착함하면서 유폭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첫번째 유폭으로 격납고가 날아가고 항공갑판이 손상되었으며 거대하고 통제 불가능한 화재가 발생하여 다이호의 운명은 불타면서 침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2차 유폭때까지 항공모함을 버리고 피난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거기다 일본 항공모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2층 폐쇄식 격납고는 피격시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다. 갑판에 있으라는 갑판장갑은 없는데다가, 층수가 2층이니 입는 피해는 2배이며, 폭탄이 격납고에서 폭발할 경우 그 폭압과 파편 피해는 폐쇄식 설계 때문에 고스란히 데미지를 100% 받아버리며, 설령 화재 진압을 한다 하더라도 불 붙은 항공기나 기자재, 탄약, 항공유 등을 버릴 수가 없어 화재는 미칠듯이 번져나갔다. 또한 운 더럽게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엘리베이터가 중간에서 멈춘다든지 아니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우 엘리베이터 통로가 굴뚝 역할을 해서 화재 현장의 연기를 배출하면서 산소를 공급, 화재를 키우는 현상이 발생한다. 여기에 더해서 각종 기자재를 못 치워서 일어날 카오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러스트리어스의 단면도 |
하지만 이 두 조합은 서로 안좋은 시너지를 일으켜 데미지 컨트롤 능력을 굉장히 악화시켰는데, 위의 단면도에서 나타나듯이 영국 항공모함은 탑재량을 희생해서까지 최소 3인치의 갑판장갑을 두르고 있었으며 폐쇄식 격납고의 단점을 메꾸기 위해 데미지 컨트롤에도 크게 신경을 썼다. 물론 갑판장갑으로 인해 무게 중심의 상승등이 문제가 되어 함재기 탑재 수가 경항모 수준이었다는 문제가 있긴 했으나 항공모함이 피격시에도 무사한 것이 먼저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데미지 컨트롤이 몇 배나 더 힘든 폐쇄식 항공모함을 운영하려면 함선 자체의 구조와 시설도 충실해야 하며, 함내에 숙달된 정비 인원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일본군은 함선의 정비, 유지에 신경을 안 썼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파도가 거센 일본의 근해에서 운용하기 좋게 디자인해놓고 보니 정작 일본군 해군의 주 무대가 파도가 잔잔한 중부태평양과 남태평양이었다는 것. 최적화된 디자인을 한 지역과 다른 곳에서 사용하다 보니 발생한 추가적인 문제. 즉, 폐쇄식 격납고와 2층 격납고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지만 대미지 컨트롤 능력을 확보하는 걸 등한시한 결과 폐쇄식 2층 격납고의 단점이 극대화되었다고 보면 된다.
일본군도 폐쇄식 격납고가 갖는 약점에 대해선 인지를 전혀 안 한 것은 아닌지, 쇼카쿠급의 격벽은 폭발이 일어났을 때 뚫리라고 일부러 얇게 설계되어 있었고, 이는 효과를 봐서 쇼카쿠는 매 해전마다 얻어맞으면서도 1944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운류급에서는 이전보다 격납고의 환기 기능을 대폭 개선시켰었고 시나노에 이르러선 개방형 격납고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문제라면 이미 미국이 1934년에 완전 개방형 격납고를 채택한 레인저를 취역시켰는데, 일본군은 쇼카쿠가 1941년에야 취역했다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항공모함은 데미지 컨트롤에 능숙하지 못했다. 최신형 항공모함인 다이호와 시나노가 괜히 대미지 컨트롤 실패 사례로 찍힌 게 아니다. 사실 이건 항공모함에 국한된 게 아니고 일본 군함 대부분이 그랬다. 오죽하면 전후 미군이 작성한 일본 함정의 보수체계를 조사한 보고서에서는 "일본의 군함에는 미해군이 알고 있는 의미의 보수체계(damage control)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깠다.[5] 얼마나 쓸 내용이 없었는지 내용도 14페이지에 불과했다고.
3.2.3. 무게중심이 높다
폐쇄식 2층 격납고는 미국의 개방형 1층 격납고에 비해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으며, 이런 걸 배 위에 올려놓은 일본 항공모함들은 자연스럽게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면 격납고의 높이를 낮출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가면 갈수록 대형화되는 함재기를 수용하기 어려워졌다. 미군 함재기가 자꾸만 크고 강력해지는데, 일본군은 그런 함재기를 실을 수 없으니 항공모함의 전투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격납고 높이를 낮춘다고 해도 무게 중심이 높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아서, 항공모함의 밸런스가 개판이 되었고 항해 안정성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일본 해군 항공모함 설계의 완성형이라는 쇼카쿠급 항공모함의 경우, 악천후라도 몰아치면 아카기의 3배, 소류의 1.5배씩 흔들렸다. 해상호텔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조된 준요에 근무했다가 쇼카쿠로 전근한 군의관이 "너무 흔들려서 못 해먹겠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3.2.4. 초소형 함교
앞에서 언급된 무게 중심 문제로 내내 소형 함교(아일랜드)만 설치하거나 아예 함교가 없는 항공모함도 있었다. 항공기 운영과 조타, 데미지 컨트롤 및 각종 명령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함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소형 함교에서는 좋은 대책도, 능동적인 대처도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함교가 없으면 항공모함에 반드시 필요한 작업에 대한 지시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일단 공간부터 좁아서 장교들이 모여서 회의하기에도 불편하며, 간단히 휴식을 할 수 있는 편의시설조차 없어서 제독이나 고급 장교가 비상시에 함교에 장기간 체류하면 쉽게 피로해진다. 물론 비전투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독과 고급장교에게 각자 편히 쉴 수 있는 개인공간과 복지시설이 갖추어진 것은 모든 국가의 함선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항이지만, 당시의 일본의 함선은 야마토급 전함을 위시한 극소수 전함들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독과 고급장교의 개인실이 함교에서 좀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즉 비상시에 피로를 못 이기고 자기 방에 돌아갔다가 큰일이 터지면 함교로 복귀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함교에 편의시설을 만들어놓아서 비상상황에서도 제독과 고급장교가 잠깐 휴식을 취하다가 일이 터지면 1-2초 안에 현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일본 항모에는 이런 배려가 전무했다.
게다가 작전 지시와 조함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전이 없어도 조함이나 항해 관계 보고로 번잡스러운 함교 안에서 작전을 짜고 지시하는 지휘관의 집중도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작전 지시 등을 위해 관련 자료가 필요할 때 이를 준비하는 준비실도 없었고, 심지어 회의 자체를 할 수 있는 공간조차 없는 등 평시의 부작용도 상당했다. 엄연히 말하면 전투 전체를 지휘하는 함대 사령관과, 함 자체를 조함하며 배 내부의 지시를 총괄하는 함장과, 항공기를 관제하고 실전을 담당하는 항공대장은 모두 다른 역할이며, 이 셋이 굳이 같은 공간에 있을 필요조차 없다. 문제는 일본 항모의 경우 좁아터진 함교 한 곳에 저들이 모두 몰려 있었고, 여기에 참모나 통신 담당까지 합세하면 최소 10명 이상이 항상 함교 한 곳에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 함교 위에 폭탄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지휘 체계가 박살나는 거다. 이 상황이 벌어진 항공모함이 당연히 있는데, 바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무려 28기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떨군 50발의 폭탄에 포위당해서 공식적으로만 5발, 비공식 10여발의 폭탄에 얻어맞은 카가.
이렇게 평상시에도 불편을 초래하는데, 비상시는 더 심각한 상황이 펼쳐진다. 심지어 항공모함이 피격을 당했을 때에도 무선으로 어딘가가 피격 당했다, 화재, 침수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고 아예 일부 구획은 시야로 피해 상황을 확인조차 못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격침당한 대표적인 항공모함이 아카기.
게다가 워낙 함교가 작으니 장갑은커녕 파편을 막을 최소한의 방어능력도 매우 부족하므로 함교에 직격탄을 맞는 경우는 물론, 지근탄이나 근처에서 폭발로 인한 파편이 날아와도 함장 이하 주요 고급장교가 한꺼번에 몰살 당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혼란의 도가니탕이 된 함선에서 명령권자가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혼란은 충분히 화재를 진압하고 다시 전투능력을 회복할 수준의 피해만 입은 항공모함도 화재나 침수를 적시에 막아내지 못해서 침몰당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된다. 이런 식의 일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카가에게 일어났는데 카가는 급강하폭격 초반기에 함교에 직격탄을 받아 함장 이하 지휘부가 일시에 전멸해버리면서 더 이상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불가능해졌다.
물론 함교가 작으면 난기류가 덜 생기는 장점은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함교로서의 기능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작게 만들어야지, 기능에 지장을 줄 정도로 작게 만든 것은 문제임에 틀림없다.
소형 함교의 사이즈는 다음 사진과 같다.[6]
아카기의 함교 |
카가의 함교 |
소류의 함교 |
쇼카쿠급 항공모함인 즈이카쿠의 함교 |
쇼카쿠급은 2만톤급 중형 항모이고 소류는 그보다 작은 경항모니까 문제점이 넘치는데도 그냥 넘어간다 치더라도, 아카기와 카가는 각각 배수량 4만톤/3만 8천톤급 대형함인데도 연합군 항공모함에 비해선 함교가 심각하게 작다는 걸 알 수 있다.[7]
그나마 이건 나은 경우로, 일본군의 일부 항모는 함교가 없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항모들은 항공갑판 밑에 함교를 설치했는데, 이렇게 함교를 설치하면 항공기 통제는 물론 항해 지시에도 심각한 지장을 가져오므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호쇼의 함교 |
항공모함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본 호쇼는, 전쟁 중에는 연습 항모로 쓰였기에 실제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그나마 함교가 없다는 핸디캡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류조의 함교 |
류조의 경우 엄연히 항공모함으로 전투에 투입되었음에도 항공갑판 아래에 함교가 있었다. 류조 문서에 있는 사진을 보면 알다시피 배의 상단이 하단보다 훨씬 크다는 치명적인 문제로 인해 일반적인 아일랜드형 함교를 설치할 경우, 항진하는 방향에 폭탄이 떨어지거나 어뢰라도 와서 급히 변침을 한다면 균형을 못 잡아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타이요의 함교 |
쇼호의 함교 |
류조는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타이요와 쇼호는 아예 항공갑판이 함교를 가리고 있다. 애초에 선폭이 고작 20미터 남짓한 이들 경항모들은 함재기가 지나다니기도 벅찬 마당에 갑판 위에 함교를 세워놓을 자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소규모이거나 아예 항공갑판 아래에 설치한 함교로 항공기를 운영하는 바람에, 대응 능력이나 편대 구성시간, 전술 면에서 일본 항모가 미국 항공모함에게 뒤떨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비단 함재기 운영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항해 지시면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이 문제는 전략, 전술적 차질을 빚어서 태평양 전쟁 내내 미 해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하거나 일격을 맞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결국 폐쇄식 2층 격납고는 함교를 작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비능률적인 함재기 운영 능력과 최악의 데미지 컨트롤 능력이라는 결과물로 다가왔다. 당시 미국의 호위항공모함도 작은 크기에 불구하고 함교만큼은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걸 보면 정말 답이 없다.
이와 비교해서 미국 항모들의 아일랜드를 보자
요크타운의 함교 [8] |
일본 항모들에 비해 월등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미군 지휘관들의 작전 환경은 일본군 지휘관들보다 훨씬 쾌적했으며, 나구모 주이치처럼 중요한 순간에 불편한 여건 때문에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전 후기로 넘어가면 미군 제독들은 아예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전투함보다는 통신이 빵빵하고 지휘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경순양함이나 중순양함을 기함으로 삼아 탑승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포틀랜드급 중순양함처럼 아예 기함 임무를 맡도록 설계된 함선들은 함교 인근에 개인실이나 작전실 등 휴식과 지휘를 위한 공간까지 완비했다. 이러한 편의성을 위한 설계는 일본의 함선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항모라고 다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나 더, 항공모함의 함교와 전함의 함교는 사실상 동일하거나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곳인데, 전함의 마스트는 마천루(...)처럼 높이 쌓아올리면서 항공모함의 함교는 축소 지향(...)이거나 아예 없는 걸 보면 일본 해군의 함선 설계 사상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물론 이건 설계 사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기술의 부족이 원인인데, 주포의 3연장화를 야마토급 전함 이전까지 못한 것이다. 당시 연합군측 전함들 중에는 3연장 주포탑뿐 아니라 킹 조지 5세급, 리슐리외급 전함처럼 4연장 주포탑을 달아서 주포 숫자를 유지시키면서도 주포탑 숫자는 줄였는데 일본 해군은 2연장 주포탑을 가진 상태에서 주포 숫자를 늘려야 하니 주포탑을 6기씩 올렸고 그 결과 함교에 이것저것 올리다보니 저런 괴상한 형태가 나온 것이다. 주포탑보다 더 큰 문제는 없느니만 못한 레이더였지만... 물론 이건 회로가 간단하면서 겹겹이 쌓아올리는 다이폴 안테나가 원인이다. 여기에는 자기 나라 사람이 좋은 걸 발명하니 그건 안 써먹고 구식 방식만 외골수로 밀고 나간 일본군의 병맛이 철철 넘치는 사상도 한 몫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의 상위 문서인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에 있는 레이더 항목을 참고하자.
3.3. 하향식 연돌
아카기와 즈이카쿠의 하향식 연돌 |
초창기 일본 항공모함들의 공통적 문제인, 측면에 부착되어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돌 역시 문제가 되었다. 연돌에서 나오는 뜨거운 매연이 난기류를 일으켜 항공기의 착함을 방해했는데, 일본 해군 기술진들은 연돌을 아래로 향해서 뜨거운 공기가 바닷물에 식으면 난기류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뜨거운 공기는 무조건 위로 올라간다라는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아래로 향한 연돌로 인해 연돌 주위의 선실은 미친듯이 온도가 올라갔고 연돌에서 빠져나온 열기는 식기는커녕 여전히 뜨거워서 심지어 항공갑판 바로 위에서 난기류가 형성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착함 도중에 난기류로 수시로 기체들은 전복되거나 착함 방향이 틀어져버려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서 파도가 치는 중에는 연돌 배출구에 물이 들어갈수 있는 문제에다가, 특유의 크기 때문에 안 그래도 좁은 함내 용적을 더 좁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카기를 설계한 설계 기사는 연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날아오는 구역의 격실을 거주구역으로 정했고, 승조원들은 연기 때문에 창문도 못 열고 고생해야 했으며 덤으로 배에는 각종 질병까지 유행했다.[9] 실제로 카가에서 이질이 유행했다는 기록, 아카기에서 결핵까지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아카기의 별명은 살인주택 아카기였고, 카가의 별명은 바다 독수리 꼬치구이 제조기였다. 선실 온도가 최대 40도까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카가의 하향식 연돌은 과거에 비해 개선된 편이다. 처음에 카가를 3단 갑판식 항공모함으로 만들었을 때는 함 오른쪽에 길다란 연돌을 만들고, 오른쪽 벽면을 따뜻하게 데워준 후 아래로 연기를 빼내는 식이었다. 이건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 2단 갑판 형태를 따라한 것인데, 생각없이 베낀 탓에 격납고가 과열되면서 승조원과 함재기 모두에게 영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퓨리어스는 세계 최초니까 맨땅에 헤딩하느라 그랬지만, 후발주자인 카가가 이런 것까지 따라 하면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항공모함 류조를 건조하고서도 개선은커녕 오히려 너무 비대하게 큰 격납고 때문에 최악의 능파성과 수밀성, 데미지 컨트롤이라는 삽질만 저질러버렸다.
다이호의 연돌 [10] | 준요, 히요의 상향 대각선 연돌 |
위에 서술된 문제들은 소류급을 건조하면서 슬슬 개선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궁극적 설계의 완성은 히류급에서 이루어졌다. 일단 소류급 전의 일본 항공모함들은 일반적인 선체 위에 복층식 격납고를 그대로 올려두는 설계를 가지고 있으나 소류 이후의 설계는 함체 내에 하층 격납고를 설치하고 그 위에 상층 격납고를 설치해 무게 중심을 낮춘 설계였다. 연돌도 히요(항공모함)부터는 종래의 하향이 아닌, 상향 대각선으로 수정된다.
3.4. 캐터펄트 부재
일본군 항공모함은 캐터펄트가 없고, 함재기가 자력으로 이함하는 방식을 사용했으므로 함재기의 대형화에 한계가 있었다. 오요도와 센토쿠급에 쓰인 공기식 캐터펄트, 전함이나 순양함 등에 쓰인 화약식 캐터펄트 등이 있었지만 결함투성이인데다가 구조상 소형 함재기만 발진이 가능하거나 출격시마다 레일등의 중요 부품을 교환해야 하는 등의 단점이 있어서 항상 무거운 함재기를 대량으로 날려야 하는 항공모함에는 채용될 수 없었다. 일본도 캐터펄트를 개발하려고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물론 기본적인 속력이 빠른 함대형 항공모함에서는 이게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는데, 대전 당시만 해도 기본적인 함재기의 이함은 자력으로 이함하는 방식이었다. 함대형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경우라면 대전 말에 투입된 미 해군의 대형 함재기들도 캐터펄트 없이 얼마든지 이함이 가능했다. 어지간한 육상 단발 전투기보다 무거운 F4U의 경우 25노트의 바람을 맞을 경우 66m의 이함거리를 가지고 F6F도 같은 조건에서 73m면 충분히 이함이 가능했으며 항공모함들이 30노트 내외의(빠른 놈들은 34노트까지도 찍기도 한다.) 최고 속력을 가지므로 25노트라는 조건을 달성하는데 어려움은 없다.[11] 이런 캐터펄트가 필수적인 장비가 된것은 함재기의 제트기화 이후의 이야기이다. 물론 저 당시 기준으로도 일단 있으면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히요(항공모함)처럼 상선을 개조해서 만든 항공모함들은 속력이 느리다보니 함대형 항공모함처럼 함재기에게 충분한 바람을 맞게 하는 게 불가능했다. 함재기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크고 무거워지는데 일본군의 경우 이런 무거운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그만큼 제한된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미국의 호위항공모함들은 캐터펄트가 있으므로 어떻게든 함재기를 띄울 수 있었다. 그나마 히요는 나은 편으로, 다이요 같은 소형 항공모함은 느린 속도에 짧은 갑판 탓에 제대로 된 항공기를 운용하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의 함대형 항공모함은 쇼카쿠와 즈이카쿠 2척밖에 안 남았다는 거다. 이들을 도와줄 항공모함은 준요처럼 속도는 느려도 덩치가 크거나, 덩치는 작아도 속도가 빠른 류조, 즈이호 정도였지만 이들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히요, 류호는 수리중이라 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캐터펄트가 없어서 비행기를 운용하는 게 불가능한 소형 항공모함들이었다. 일본군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이호 같은 함대형 항공모함들을 필사적으로 건조하고, 치토세 같은 30노트급 경항공모함도 마련한 후 첫 출전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었다.
3.5. 미미한 개선
일본군도 설계 수정을 통해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했지만, 중량 배분 문제와 노천 계지 문제는 늘 일본 항공모함을 괴롭혔다. 또한 설계의 정점은 쇼카쿠급에서 이루어졌지만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이미 위의 뻘짓을 전간기에 레인저급 항공모함 1척으로 실험해본 다음, 렉싱턴급 항공모함에서 항모의 설계 개념을 완성한 후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에서 더욱 개선해서 개방형 격납고를 설치한데다 항공기의 운용 능력도 최고조를 찍어 이후로 기본적으로 동일한 시스템을 유지하게 된다. 이걸 바탕으로 미군은 2차대전기 최강의 항공모함이라 불린 에식스급 항공모함을 24척이나 찍어냈다.대공포의 문제점은 이 문서의 상위 문서인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에 있는 대공포 항목을 참조하자.
그래도 쇼카쿠급에서 진보한 정규 항공모함 결정체인 다이호(항공모함)가 나오긴 했으나, 일본군에서만 결정체였던 터였고 게다가 타국 항모에 비해 문제점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너무 허무하게 날아갔다.
바다 건너 라이벌을 뛰어넘지 못했고 그 라이벌들이 소속된 바다 건너의 미국이 재미없게 나오는 것도 암울한데 데미지 컨트롤 문제는 끝끝내 해결하지 못하였다.
항공모함의 수량에서도 처참하게 밀렸다. 그래도 나름대로 대비한다며 일본 정부에서 전시에 항공모함으로 개조할 것을 전제로 크루즈선을 건조했고, 이것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한 것이 히요급이다. 그러나 히요급은 2척밖에 없었고, 그나마 1번함 히요는 언제나 고장나 있었다(...) 결국 급해진 일본은 상선을 포함한 기타 잡배들을 마구잡이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독일산 고속화물선 샤른호르스트를 구입해서 개조한 신요(항공모함),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려다 전황 악화로 중단된 이부키급 중순양함,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을 개장한 시나노까지. 그러나 미국은 쇼미더머니를 쳐갈기더니 자그마치 50척에 달하는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을 뽑아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함재기 34기에 증기 캐터펄트 2기와 엘리베이터 2기까지 갖춘 커먼스먼트 베이급 호위항공모함까지 찍기 시작했다.
신나게 얻어터지는 일본군 항모 히류, 쇼호, 다이호, 아카기[12] |
1946년, 구레 군항에서 폐함 처리되는 아마기 출처 |
전쟁 중 누적된 데미지와 전후의 영국 경제의 심각한 문제 때문에 수리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일찍 퇴역하였음에도 영국 항공모함은 현대 항공모함의 기본적 특징인 항공갑판의 장갑화와 전쟁 이후에 쓰일 경사갑판, 증기 캐터펄트, 착함 시스템 등 현대 항공모함의 기초를 닦았다. 미국 항공모함은 이를 계승/발전시켜 현대 항공모함 그 자체로 남게 되는 등, 해전사에 큰 의미를 남겼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영국 항공모함은 타란토 공습을 통해 항공모함의 유용성을 보여줬고 미국 항공모함은 항공모함이 전함의 뒤를 잇는 새로운 주력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일본 항공모함은 전장에서 어느 정도 활약은 했지만 미국의 항공모함을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그나마 이들이 전쟁사에 남긴 족적은 영국군의 타란토 공습을 발전시켜 진주만 공습으로 항공모함을 전함의 들러리가 아닌 해군의 당당한 전략병기로 만들어줬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영국의 작전의( 타란토 공습) 영향을 받았지만 항공모함의 집중 운용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실전에서 사용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베꼈다고 폄하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보여준 선진적인 면은 초반 이후 미국이 빠르게 패러다임을 전환하면서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밀리게 된다. 애초에 미국도 개념 자체는 있었고 어니스트 킹 제독이 1938년에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운용하는 훈련을 한 적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미국의 변신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3.6. 항공모함 운용의 문제
일본군의 항공모함은 실전에선 나름대로 활약한 편이다. 진주만 공습을 훌륭하게 성공시켜 미국의 주력 함대를 문자 그대로 개박살 내놓아 미국이 복구에 전념하던 6개월 동안 태평양과 인도양을 마음껏 휘젓고 다녔기에, 일본군은 잠시나마 무적황군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탓에[13][14], 그때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던 미국이 아주 제대로 빡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유명한 치욕의 날 연설과 함께 연합군 측에서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추축국 전체가 미국과 전쟁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이게 추축국 패배 원인 1호다.게다가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함들의 상당수를 이탈시켰지만 전함만 몇 척 격침했을 뿐, 유류저장고라든지 잠수함 기지, 함선 수리용 드라이독 같은 시설을 위시한 전쟁 수행 역량 자체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심지어 전함 바로 옆에 항공유를 만재한 유조선이 있었는데도 그건 그냥 건너뛰었다. 저렇게 격침시킨 전함들은 2척[15]을 제외하면 인양된 후 수리받아서 복귀했다.
그 이후, 산호해 해전에서부터 운용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포트 모르즈비 침공 부대를 호위하기 위해 경항공모함 쇼호를 파견했는데, 쇼카쿠와 즈이카쿠로 구성된 주력 부대가 유조선 한 척을 공습하러 간 사이에 미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침몰해버린 것. 경항공모함은 혼자서 제공권을 장악하기 힘들기에 정규 항모와의 연계를 잘해야 했는데, 손발이 안 맞아서 쇼호를 내다버린 꼴이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건 쇼호를 호위하던 제 6전대(기함 아오바)가 미 항모전단을 발견해서 위치를 보고했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유조선 공격에 바빴다는 점. 결국 제 6전대가 차려준 밥상을 걷어찬 일본군은 안 해도 될 다음 날의 전투를 벌여서 쇼카쿠가 대파되고 포트 모르즈비 공략도 실패했다. 더 나쁜 것은 함재기 다수를 잃기는 했어도 배 자체는 멀쩡했던 즈이카쿠를, 항공대를 보충한다며 일본으로 후퇴시킨 것이다. 이렇게 삽질을 한 이유 역시 일본군의 병맛나는 사상이 원인으로 당시 일본군에서는 항공모함 항공대와 항공모함을 세트로 묶어서 봤기 때문에 항공모함 항공대가 배를 옮겨다니며 작전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삽질은 반복된다. 야마토를 비롯한 세계 최강의 일본 전함 부대는 11척이나 되는 대 부대(!)가 제1, 제2 항공함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막상 최전방에 선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전함은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 정도였다. 물론 주간에 다수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건 항공모함 뿐이니 전함을 탱킹으로 내세우는 것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대공 사격을 해줄 호위함은 충분히 붙여줘야 했다.( 항공모함을 논할 때 왜 항모전단으로 묶어서 논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러나 미국은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되어 3개월은 수리해야 하는 요크타운을 3일만에 작전이 가능한 상태로 수리하고, 다른 데서 항공대를 끌고 와서 보충하고, 미드웨이에 최대한 많은 비행기를 긁어모았다. 결과는 일본 항공모함 4척 전멸.
과달카날 전역에서도 삽질은 반복된다. 사보섬 해전에서 제 8함대 기함 초카이와 제 6전대가 죽어라 애를 써서 제해권을 따왔지만,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쇼카쿠와 즈이카쿠로 이뤄진 주력함대는 류조를 미끼로 내다 버리고 수송 함대까지 내다버리고 도주했다. 수송 함대를 호위하던 제 8함대 기함 초카이와 제 6전대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셈. 당연히 핸더슨 비행장에서 몰려온 비행기들이 벌떼처럼 공습하는 바람에 수송 함대는 후퇴해야 했다. 과달카날을 점령하려고 해전을 벌인 거 아니었나? 그 후 벌어진 산타크루즈 해전으로 함재기를 대거 상실한 즈이카쿠의 항공대를 보충한다며 일본으로 또 돌려보낸다! 결국 과달카날에 남겨진 건 준요 한 척이었고, 그나마도 함재기를 제대로 보충해주지 않아서 제대로 된 활약을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일본군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싸운 엔터프라이즈에게 패배했고, 결국 과달카날에서 철수해야 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경항모를 대놓고 몸빵으로 내세웠다. 당시 일 해군을 지휘했던 오자와 지사부로의 생각은 미 해군이 자신이 지휘하는 본대를 때리고자 한다면 경항모로 구성된 함대의 상공을 통과해야 하므로 상당한 피해를 강요할 수 있고, 미끼를 문다면 역시 본대는 안전하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니까 경항모는 버리더라도(...) 함대형 항공모함은 공격받지 않거나 받더라도 미군에게 큰 타격을 강요하게 된다는 계산이었으며, 그동안 후방에 있는 다이호, 쇼카쿠, 즈이카쿠, 히요, 준요, 류호의 함재기들이 미군을 유린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잠수함으로 선제공격을 걸어왔고, 함대가 분산된 탓에 대잠 능력도 떨어진 일본군은 핵심 전력인 다이호와 쇼카쿠를 잃는다. 이후 미군은 대대적인 칠면조 사냥을 감행, 히요를 침몰시키고 수백 대의 일본기를 떨어뜨렸으며 괌을 초토화시켰다. 이외에도 즈이카쿠와 준요, 전함 하루나가 큰 피해를 입었고, 경항모 치요다와 중순양함 마야도 폭탄을 맞았다. 분대와 본대 모두 미군에게 털렸으니 대실패.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결국 정규 항모까지 미끼로 써버렸다. 물론 항공모함만 버린 게 아니라 야마토급 전함 무사시도 고기방패로 써버렸다. 항공대가 괴멸되어 빈 깡통이 된 항공모함들을 미끼로 사용해서 미국 함대를 꾀어낸 것이다. 미끼 작전 자체는 성공했지만 항공모함 즈이카쿠, 치토세, 치요다, 즈이호는 모조리 격침되었고, 이걸로 일본 항모전단은 사실상 괴멸된다. 항공대의 재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항모를 미끼로 사용한 거지만, 구리다 턴으로 구리다 함대가 철수하면서 미군 상륙부대의 격멸에 실패했고 일본군은 귀중한 항모 4척 + 야마토급 전함 1척을 내다 버린 꼴이 되었다.
이런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을 개장하여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 시나노를 만들었으나, 일본군은 이 귀중한 항공모함이 마무리 공사를 위해 구레로 이동할 때 구축함 3척만 달랑 붙여주는 삽질을 저질렀고, 비행기의 엄호를 받지 못한 시나노는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밤에 이동했지만 보일러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서 속도도 설계의 60%정도밖에 못내다가 울프팩도 아닌 레이더가 고장나서 그냥 떠 있던 단 한 척의 발라오급 잠수함 SS-311 아처피시가 발사한 어뢰 6발 중 4발을 맞았다. 어째서인지 이 어뢰들은 정확하게 시나노의 약점을 강타했고, 아직 미완성인 시나노는 대미지 컨트롤도 못하고 버벅대다가 부실공사로 제 기능도 못하는 격벽이 무너져서 물이 쏟아져 들어와서 침몰했다. 시나노에 실려있던 자폭용 유인 유도 미사일(?!)이 구명도구 역할을 해서 승조원들을 조금이나마 살려줬다는 게 그나마 다행. 오카가 물 위에 뜬 건 연료와 탄두가 채워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나노의 승조원들이 나중에 오카 설계자들을 만나 "덕분에 살았다. 고맙다"고 하자 오카 설계자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고. 이걸로 아처피시는 단일 함선 전과로 배수량 7만톤이라는 잠수함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안 깨지고 있으며, 3차 세계 대전이라도 터져서 미 해군의 초대형 항공모함이라도 격침당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이후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가 오키나와 특공을 감행할 때 항공모함 준요도 같이 내다버리려고 했으나, 배의 수리가 끝나지 않았기에 동반 자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구레 군항 공습에서 운류급 항공모함 아마기가 격침되고 카츠라기가 중파되는 것으로 일본 항공모함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3.6.1.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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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기,
카가
일본에서는 최고 수훈함으로 평가되고 있고, 카가는 중일전쟁때부터 활약한 베테랑이었으며, 아카기와 같이 진주만 공습을 주도했고 전쟁 초기 일본 해군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일본 말로는 '무적의 1항전'. 특히 아카기는 실전에 투입된 일본 항공모함 중에서 가장 크고 비싼 항공모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재수가 없었는지 당시 엔터프라이즈 항공대의 사인미스로 인해 2개 비행대대의 28기나 되는 돈틀리스들이 자그마치 50발이나 되는 폭탄을 카가를 노리고 투하하는 바람에 5분만에 카가가 박살났고, 아카기 역시 리처드 홀시 딕 베스트 대위의 베스트 샷을 맞고 격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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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류,
히류
2항전의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1항전과 함께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고 일본 해군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소류가 5분만에 박살났고, 히류는 겨우 살아남아 요크타운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항공대의 반격으로 4발의 폭탄을 맞고 격침되었다. 일본에서는 1항전과 마찬가지로 높은 평가를 받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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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카쿠급 항공모함 쇼카쿠,
즈이카쿠
미국에서는 일본 최고의 수훈함으로 꼽는 항공모함으로, 엔터프라이즈의 숙적으로 불리는 영광을 차지한 항공모함들이지만 엔터프라이즈에게 언제나 패배한 배들이기도 하다.
일본 항공모함 기술의 정수로서 기대를 모았으나, 아카기보다 성능이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신참 파일럿들을 긁어모아 두 자매가 5항전을 결성,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다. 초창기에는 미숙하다는 이유로 쉬운 임무를 맡았지만 산호해 해전에서 역사상 최초로 항공모함간의 전투를 벌여 렉싱턴을 격침시켰으나 쇼카쿠 정찰기의 삽질 탓에 승기를 놓치고 전략적 패배를 당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1항전과 2항전이 전멸한 후에는 쇼카쿠가 1항전 기함을 맡아 일본 해군의 대들보로 떠오른다.
과달카날 전역부터 필리핀 해 해전까지 일본 항모전단의 중심으로서 미군의 엔터프라이즈와 맞섰으며, 호넷 격침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에서 미숙한 실수를 저지르거나 전력에서 압도당하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엔터프라이즈에게 언제나 전략적 패배를 당했다. 결국 필리핀 해 해전에서 칠면조 사냥을 당하며 쇼카쿠는 격침되고, 즈이카쿠도 폭탄을 먹고 후퇴했으며, 승리는 당연히 엔터프라이즈가 차지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함재기 전력이 바닥났기에 미끼 신세가 되었으나,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항공모함 중 최후의 생존함이라는 메리트를 이용, 홀시의 어그로를 끌어 제 3함대를 끌어냄으로서 미끼 작전을 성공시키고 침몰했다. 그러나 그 유명한 구리다 턴이 터지면서 작전 목표는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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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요급 항공모함
히요,
준요
여객선을 개조해서 만들어낸 개장 항공모함이지만, 미군은 정규 항공모함으로 분류했다. 느리기는 해도 덩치가 커서 정규 항모처럼 쓸 수 있기에 충분한 전력이었지만, 1번함 히요는 언제나 고장났으므로 전과가 없다(...)
반대로 2번함 준요는 일본 항모전단에서 중요한 전력이었다. 알류산 열도 공략전을 시작으로, 미드웨이 이후 괴멸한 1항전과 2항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2항전으로 자리를 옮겨 일본 항모전단의 핵심 중 하나가 된다. 해상 호텔 출신이면서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즈이카쿠와 함께 엔터프라이즈 중파, 호넷 격침등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함재기를 제대로 갖다주지 않은 일본군의 형편없는 보급 능력때문에 과달카날 해전에서는 힘을 못 쓰고 일본군의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이후에도 일본 해군의 주축 중 하나로 활동했으나 필리핀 해 해전에서 자매함 히요가 침몰하고 준요도 폭탄을 맞았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즈이카쿠와 함께 출전해야 했지만, 함재기가 없다는 이유로 출전하지 못했고 즈이카쿠는 침몰. 그 후에는 함재기가 없어서 수송함 신세가 되었다가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대파. 그 후에는 숨어서 함을 수리하다가 일본군의 능력 부족으로 수리에 실패하고 일본이 패망했다. 그래도 일단은 전후 생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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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조
후루타카급 중순양함에 평갑판과 폐쇄식 2층 격납고를 올려 만들어진 정규 항공모함. 함대 컬렉션 때문에 경항모로 오해받지만 엄연히 정규 항공모함이었다.
무게 중심이 너무 높았기에 다양한 문제에 시달렸지만, 남방작전부터 동부 솔로몬 해전까지 참전하면서 많은 수훈을 쌓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나구모 주이치가 엔터프라이즈를 잡는다며 류조를 미끼로 던지는 바람에 격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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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호급 경항공모함
쇼호,
즈이호
1번함 쇼호는 첫 출전인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됨으로서, 미군이 격침시킨 일본 항모 1호가 되었다(...)
2번함 즈이호는 과달카날 전역부터 필리핀 해 해전까지 쇼카쿠, 즈이카쿠, 준요와 함께 작전하면서 일본 해군을 떠받쳤으며,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는 엔터프라이즈의 공격으로 중파되면서도 쇼카쿠를 지켜내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함재기 전력이 점차 고갈되면서 즈이호도 싸움이 불가능해졌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 즈이카쿠와 함께 미끼 임무를 완수하고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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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
잠수모함 타이게이를 고쳐서 만든 개장 항공모함. 실전에서의 전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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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토세,
치요다
수상기 모함을 고쳐서 만들어진 경항공모함 겸 개장 항공모함이지만 개장시기가 너무 늦었기에 활약이 거의 없다. 그래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즈이카쿠, 즈이호와 함께 미끼 역할을 했으므로 전과 제로는 면했다. 당연히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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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
일본이 야심차게 만들어낸 장갑 항공모함으로, 함 내 신사에는 불침 항공모함이라고 써놓았을 정도로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첫 출전인 필리핀 해 해전에서 어뢰 1발을 맞고 침몰했다. 대미지 컨트롤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며, 전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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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노
세계 최대의 삽질로 유명한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한 것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이었다. 그러나 미완성 상태에서 마무리를 위해 구레 군항으로 이동하다가 미군 잠수함 아처피시의 어뢰 4발을 맞았다. 야마토급이니까 당연히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어야 했으나, 어뢰가 절묘하게 약점을 때린 데다가 부실공사된 격벽이 붕괴되고 말았고 시나노의 승조원들은 안간힘을 써봤지만 아직 배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데다가 격실 폐쇄도 불가능했고 동력도 끊어지는 등 총체적 난국이라 버틸 수가 없다! 결국 잠수함에게 한 척에게 격침된 역사상 최대의 항공모함이라는 트로피를 아처피시에게 헌납하고 만다. 전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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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류급 항공모함 운류, 아마기, 카츠라기
생산성을 높인 중형 항공모함으로 기획되었으며, 완성도가 높기에 일본군은 운류급을 17척까지 건조하려고 했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3척밖에 완성시키지 못했다. 전과는 없다.
이 외의 항공모함들은 소형 항공모함들이고, 특별한 전과도 없으므로 생략한다.
3.7. 특수 항공모함
이세급 항공전함 |
일본군은 특이한 항공모함을 여러 척 건조했다. 항공전함, 항공순양함, 그리고 잠수 항모가 그것들이다. 이런 배들이 탑재하는 함재기에 대해서는 위에 있는 'XXX 전용기' 항목을 참조하자.
그러나 성능은 일본군의 무기답게 문제가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항공전함이 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만화니까 가능한 거고,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전함으로서의 능력도 뒤떨어지고 항공모함으로서의 능력도 뒤떨어졌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세급 전함조차도 공간이 모자라서 함재기 운용이 곤란했는데 더 작은 항공순양함들은 어떻겠는가.
3.7.1. 성능
항공전함과 항공순양함, 잠수항모 등은 항공모함과 다른 배의 기능을 합친 것이므로 항공모함으로서의 기능이 심하게 제약을 받는다. 항공전함만 봐도 절반은 전함이고 나머지 절반은 항공모함이니 공간이 그만큼 모자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공모함에 쓰이는 일반적인 함재기를 탑재하면 이함은 가능해도 착함은 불가능했다. 갑판이 좁아서 착함을 위한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수상기를 싣는다면 바다에 착수시켜서 회수할 수 있지만, 역시 회수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리는데다가 그 수상기의 생산이 늦어져서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그리고 수상기는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규 함재기를 감당해내지 못한다.탑재량도 문제가 되었다. 잠수항모의 함재기 탑재량은 3대밖에 안 되며, 가장 거대한 이세급 항공전함도 22대가 한계였다. 치토세급 경항공모함의 함재기가 30대이고, 그쪽은 그나마 정상적인 함재기를 탑재하므로 경항공모함보다도 열세인 셈이다.
문제점을 더 보고 싶으면 항공전함과 잠수 항모 항목 참조.
3.7.2. 개조 원인
이런 어정쩡한 개조 항공모함들이 나온 이유는 전황이 나빠져 항공모함 댓수가 부족해 빵꾸난 전력을 메꾸려는 의도도 있었고, 항모가 아닌 다른 배가 정찰기 운용을 전담하게끔 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공업력이 후달려서 항공모함의 대량 건조가 불가능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그것 때문에 일본 해군은 이상할 정도로 항공모함 급이 많은데... 기본적으로 만들어둔 항공모함들이란 것들이 뭔가가 어정쩡하거나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에(위의 일본 항공모함 항목 참조) 그걸 개량하느라(...) 삽질을 한 것도 있으며 애초에 후달리는 공업력 덕분에 상선이고 순양함이고 온갖 잡배들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한 것. 사실 이 당시 항공모함은 대형 엘리베이터 정도를 제외하면 기술적으로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전투함을 중간에 항공모함으로 개수한 이유도 이대로 만들어 봤자 전투함에 들어갈 포나 장비가 부족해서 제대로 전투에 써먹을 수가 없으니 항공모함 개수해서 써먹으려고 한 것. 상선이나 여객선을 항공모함으로 개수한 것도 당장 배는 없으니 대미지 컨트롤쪽은 포기하고 개조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항공전함이나 항공순양함을 건조한 것은 욕심을 너무 부린 탓이었다. 제대로 된 항공모함을 만들려면 포격전 능력을 포기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이도저도 아닌 쓰레기가 나온 것. 기행의 나라 영국이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취한 형태가 전방 평갑판 + 함교 + 후방 주포탑이었는데, 실제로 이착함 시험을 거치며 사상자가 나오자 재빠르게 포탑을 떼어낸 걸 생각하면 정말로 답이 없는 짓이었다. 이미 제 1차 세계대전 때부터 항공모함에 포탑을 달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는데, 그런 교훈을 무시하고 퓨리어스 제 1형태를 주포탑 위치만 앞으로 바꿔서 따라했으니 꿈도 희망도 없다.
3.7.3.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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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
중순양함 시절에는 남방작전에 참가, 일본 육군의 강습상륙함 신슈마루와 육군 수송선 다수를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자매함 미쿠마와 충돌해서 대파되었고, 항공순양함으로 개장된 후에는 함재기가 없어서 그냥 순양함으로 활동하다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이미 미군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후퇴하다가 묘코급 중순양함 나치와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대파되어 처분되었다. 전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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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요도급 경순양함
오요도
함재기 자체도 문제가 있었거니와 전용 함재기의 생산댓수가 12대뿐이라 항공순양함으로는 별다른 활약상이 없다. 이후 대형 사출기를 제거하고 사령부 시설을 설치해서 연합함대 기함으로 개장되었으나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기함으로 쓰기엔 너무 좁다"는 이유로 예비 기함으로 참가했다. 이후에는 레호 작전에서 활약했으며, 최후에는 구레 군항 공습에서 미군의 공격으로 자빠져서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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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급 전함 이세, 휴가
레이테 만 해전에 미끼 역할로 참전했지만, 함재기가 없어서 그냥 전함으로 출격했다. 이세와 휴가는 살아남았지만 레이테 만 해전은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다. 이후에는 북호작전에 참가, 물자를 일본에 실어오는 데 성공했다. 작전에 참가한 배들이 적재한 물자를 다 합쳐야 중형 화물선 1척 분량 뿐이라는 게 문제였긴 했지만 물자 자체의 운송이 거의 끊어진 상황인지라 일단 의미는 있다고 봐야 한다. 이후에는 구레 군항 공습으로 두 척 모두 격침되었으나, 일본에서는 전후 생존함이라고 우기고 있다. 물론 우겨봤자 종전된지 한참이나 지난데다 어차피 일본의 주장대로 생존했다 쳐도 결국 고철로 스크랩 처리됐을테니 아이고 의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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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네급 중순양함 토네, 치쿠마
일본군 항모전단의 눈 역할을 하는 수상정찰기의 운용 플랫폼으로서 전쟁기간 내내 활약했다. 그러나 포격전 능력은 별로 좋지 않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찰에 실패했으며 토네가 베허호 사건을 일으켜 민간인을 학살했고, 치쿠마가 함대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기함의 머리 위로 포격을 가하는 등 막장 행각을 보여줬다. 이후 치쿠마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호위구축함에게 얻어터지는 등의 추태를 보이며 가라앉았고, 토네는 구축함한테 덤비다가 공습을 당하자마자 꼬리를 감추고 후퇴했다. 그래도 토네는 살아서 일본에 돌아왔지만 구레 군항 공습에서 미군에게 격침되었다. 일본에서는 토네가 전후 생존함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미군에선 격침으로 판정. 솔직히 세토 내해의 얕은 수심을 고려해보면 구레 군항 공습에서 착저라고 적힌 군함들은 모조리 격침되었다고 봐야 한다. 예외는 가라앉은 상황에서도 대전 내내 보여준 회복력으로 미군에게 예의주시당해 선체가 두 동강 날 때까지 공격받은 아오바 정도.
4. 전함
전함의 경우 영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라이온급 순양전함을 개량한 공고급 순양전함을 도입하는 것으로 인해 설계 사상은 일부 분야에서는 상당히 발전된 편이었다.4.1. 마스트의 높이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레이더의 성능이 떨어져서 전투시 적함을 견시 당직자(견시원)의 육안으로 확인해야 했다. 이 견시원들 중에서 초기형 레이더에 필적하는 탐지범위를 보이는 비범한 시력을 지닌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견시원들을 두고 제식 병기마냥 MK1. Eyeballs라 부르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을 정도다.사실 야기-우다 안테나라고 하는 2차대전 이전 일본에서 고성능 안테나가 개발된 적이 있으나, 이를 이용해 레이더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것은 연합군 측이었고, 정작 개발국인 일본은 이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이 문서의 상위 문서인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의 야기 우다 안테나 항목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문서의 상위 문서인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의 레이더 항목에도 보면 나오지만, 태평양 전쟁 초반에 활약한 아카기, 카가 같은 항공모함들에도 레이더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배들은 견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저고도, 중고도에서 기동하는 전투기들은 알 수 있지만 이들보다 고고도에서 기동하는 급강하 폭격기들은 감지할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시력 특성상 어떤 목표를 바라보다가 급격하게 거리와 방향이 다른 목표로 전환하면 완전한 전환에 시간이 걸린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대역전극인 운명의 5분을 알린 "敵機直上、急降下! (적기 바로 위, 급강하!)"도 항공모함 카가의 견시원이 고고도에서 급강하중인 엔터프라이즈 소속 급강하폭격기들을 발견하고 뒤늦게 외친 것이니...
후소급 전함의 파고다 마스트와 2연장 주포탑 6기를 탑재한 모습 |
이러한 일본군 전함 특유의 높디높은 함상 구조물을 파고다 마스트(Pagoda Mast)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탑 같은 함교라는 소리인데, 이게 좋은 소리는 결코 아니다. 특히 후소의 경우 이 파고다 마스트가 수면에서 40미터 넘게 올라가기도 할 정도니 말 다한 셈. 그런데 이런 현상이 항공모함에서는 정반대로 일어났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일본군이 레이더 기술이 뒤처진 것과 함께 함포의 3연장화 기술의 실용화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막 후소급 전함과 공고급 순양전함을 건조하던 영일동맹 기간에 영국은 12인치 3연장 주포탑 제조기술도 넘겨준다고 했지만, 일본제국은 단점이 많으니 필요 없다며 거절하는 실책이 있었다. 물론 저 당시 빅커스 사의 12인치 포가 실제로 별로 좋은 소리를 못 들었으며 3연장 주포탑 제조기술이 장점만큼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초기 3연장 주포탑을 장착한 전함들은 일제 사격할 때 생기는 충격파로 인해 포탄들이 너무 넓게 퍼져서 착탄 하는 문제가 일어나 해결하기 위한 개량이 있었다. 그와 반대로 2연장이기는 하지만 공고급에 채택된 14인치 포가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거절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선택으로 인해 일본의 전함들은 모조리 2연장 주포탑으로 통일되었으며 3연장 및 그 이상의 다연장 주포탑에 대한 연구는 말 그대로 도면에서의 구상 수준으로 끝나버렸다. 3연장 주포탑을 가진 전함이 1척이라도 있다면 유지보수 및 실험, 연구를 통해서 3연장 주포탑의 개량 및 보급을 할 수 있었겠지만 2연장 주포탑만 있으면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 제국은 영국과의 친분을 완전히 끊고 나치독일과 동맹을 맺으며 추축국에 가담했으니 당연히 연합국, 즉 적국인 영국에게 아무리 많은 돈을 쥐여준다고 해도 귀중한 주포탑 다연장화 제조기술을 줄 턱이 없고 일본제국이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게다가 타국에 비해서 주포의 다연장화가 늦었고 그래야 한다는 인식도 늦었다. 미국이 1916년에 네바다급 전함으로 주포의 3연장화를 시작했고 영국이 1927년에 넬슨급 전함으로 3연장포를 탑재한 전함을 배치한 것에 비해서 일본은 1941년에 야마토급 전함으로 와서야 3연장 주포를 탑재한 전함을 배치하였다. 미국과 비교하면 25년이고 영국과 비교해도 14년 이상 늦은 셈이다. 해군 조약으로 1936년 까지 신조 전함이 없었던 시기가 중간에 들어가있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영국은 1922년에 넬슨급을 주문하였고 이때 3연장포를 탑재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 일본이 해군조약으로 1922년에 취소한 전함인 13호급 순양전함[16]의 경우 2연장 주포탑 4기를 탑재하고 있다. 한 마디로 3연장 주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타국에 비해서 늦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야마토급 전함 이전까지 일본군 전함은 2연장 주포탑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같은 화력(주포 수)을 얻기 위해서 3, 4연장 주포탑이면 3기에서 4기로 충분할 것을 2연장 포탑을 쓰다보니 주포탑을 6기까지 탑재해야 했다. 결국 함선 전체에서 주포탑을 설치할 곳과, 주포의 사격 및 회전을 위해 비워놓아야 할 공간을 빼고 나면 다른 시설을 설치할 공간이 없었다. 결국 개량을 위해 뭔가 추가시설을 설치하자니 그나마 장착할 위치가 함교밖에 없어서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이다보니 마스트가 석탑같이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높다란 마스트 때문에 무게 중심이 너무 높아져 악천후시 배가 좌초할 가능성이 커지고, 함교가 포탄이나 폭탄 등에 피격당하면 함교의 시설이 전부 박살나서 손상 범위에 비해 피해 규모가 커지는 등의 문제점이 산적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반영해 건조한 야마토급 전함에서는 드디어 자체적인 3연장 주포탑 제조 기술이 적용되었고, 그로 인해 9문의 주포를 가지면서도 주포탑을 3기만 탑재하게 되어 함체 배수량에 넉넉한 여유가 생겼고, 이로 인해 함교에 꼭 필요한 시설물 이외의 공간은 함체로 분산 배치하고 대공포를 다수 증설하며 기타 시설을 증강하는 등 혁신이 이루어졌다.
다만 고질적인 레이더 문제로 인해 광학조준장치를 최대한 성능을 높여서 대응하려고 했기에 파고다 마스트 문제는 본질적으로는 그대로였으며 애초에 야마토급 전함들은 덩치부터가 이전까지의 일본군 함종을 막론하고 가장 컸기에 마스트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낮아졌지만, 절대적인 높이로는 가장 높았다.
하지만 이런 야마토가 전장에 나섰을 때에는 이미 전함의 시대, 거함거포주의의 시대는 일본군 자신들의 손에 의해 끝이 도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장에 나선 야마토급 자매를 기다렸던 건 미국 해군의 최신형 전함이 아닌, 항공모함 전단의 대규모 함재기 편대였다.
그런데 항공모함의 함교는 너무 작고, 전함의 함교가 너무 크지만 양쪽 모두 욕심을 너무 부렸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 자체는 동일하다. 항공모함은 제로센의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함재기 탑재수를 늘리려고 무리하게 폐쇄식 2층 격납고를 달았다가 함교가 작아졌고, 전함은 대포를 조금이라도 더 달려고 포탑을 많이 달았다가 모든 설비를 함교에 달 수밖에 없어서 함교가 커졌기 때문이다.
4.2. 화력
우선 지나칠 정도로 수중탄의 개념을 중시했다.수중탄이란 것은 적함에 착탄하는 게 아닌 바다에 착탄된 포탄이 어뢰의 효과를 내는 것처럼 물 속을 파고들어 흘수선 밑을 공격한다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포탄이다. 당연히 물 속에 들어가서 흘수선을 타격해야 하니 신관의 민감도를 줄여서 최대한 둔감하게 만들어야 했지만 이와 반대로 지나치게 둔감한 신관은 적함에 직접 명중할 경우 현측장갑 등 제대로 방어장갑을 두른 부위에는 신관이 작동하기도 전에 포탄이 착탄의 충격으로 부서져서 불발되었고, 비장갑구획이나 구축함같이 장갑이 빈약한 목표에는 신관이 작동하기도 전에 포탄이 함선을 완전 관통한 후 밖으로 빠져나가서 바람구멍 두 개만 뚫어놓는 등 엄청난 위력 저하가 일어난다. 실제로 호위항모를 포격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있다. 안 그래도 포탄을 정확하게 함선에 명중시키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명중한 포탄이 터지지도 않는 바람에 적 함선이 멀쩡하다면...
여기서 좀 웃긴 사실을 말한다면 저렇게 수중탄을 중시하면서 정작 포탑의 앙각은 +43도로 영국이나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려놨다.흘수선 타격에 집착했던 크릭스마리네의 전함 포탑의 앙각은 +30 정도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답이 나온다. 앙각이 사거리를 늘릴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앙각이 커지면 낙각이 커지게 되고 당연히 갑판을 타격할 가능성이 올라가게 되므로 최소한 갑판 타격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되면 기껏 만든 수중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도 안 한 건가?
사실 애초에 수중탄이라는 개념에 집착한 것부터가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유틀란트 해전 이후로 전함 간 포격전의 대세는 '갑판 및 상부구조물을 타격하여 상대를 전투 불능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 역시 이 흐름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고 갑판장갑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기존 전함의 갑판장갑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 바가 있었는데, 정작 수중탄 개념에만 집착하여 포탄을 망쳐놓은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는 미완성 전함 도사를 대상으로 한 포격 시험에서, 기존 전함의 갑판장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수중탄이 도사에 침수 피해를 입힌 것이 확인되었고 이것이 수중탄에 집착하는 발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다음으로는 미국의 초중량탄처럼 강력한 포탄을 개발하지 못하고 주간 전투에만 특화한 광학식 사격통제장치만을 주력으로 갖추는 것도 모자라서 연사속도 및 재장전 속도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점이다.
이로 인해 사격시 주포탑의 주포 1기만 발사하고 탄착을 관측한 후 다시 나머지 1기를 발사하는 식의 교호사격을 하면서 맑고 화창한 날씨에서 연습전을 할 때에는 수상기의 탄착관측까지 받아가면서 최소 30km 이상의 거리에서 협차사격이 성공하였으며 이는 미군의 동일 연습시보다 3배 명중률이 높았다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통상탄이나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 정상적으로 조금 더 강화한 탄을 사용해도 명중률이 높으니 전혀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실전을 앞에 두고 좀 더 정상적으로 실전을 고려한 연습을 한 결과 일제사격을 하니까 2연장 주포탑인데도 불구하고 포탄이 비행중에 간섭현상을 일으켜서 명중률이 떨어진다던지, 연사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재장전이 늦어진다던지 하는 각종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동시사격시 지연장치를 도입하고 양탄기를 강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실전에 돌입하자 탄착관측을 해야 하는 수상기는 제공권을 뺏겨서 전투기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도 힘들어서 탄착관측이 불가능했고 개전전 예측에서는 경순양함과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수뢰전대가 산소어뢰를 사용해서 야전을 처리한다는 것과는 달리 전함도 야전에 참가하게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큰 문제점이 발생한 것을 사우스다코다를 집중사격한 키리시마의 사례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사우스다코타가 16인치 대응방어를 갖춘 전함인 반면에 키리시마의 주포가 14인치라서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관통이 안 되는 게 맞다. 문제는 키리시마가 사격한 거리가 5km도 안되는 초근접거리였는데도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우스다코타가 전기고장으로 인해 제대로 된 사격도 회피도 안되는 완전표적 상태인데다가 혼자서 항해할 때 키리시마가 호위함들과 함께 일방적으로 초근접거리에서 타격한다는 식의 작고 약한 전함이 적의 강력한 전함에 맞서서 싸우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못살리다가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에게 레이더 관제사격 맞고 당했다.
거기다가 탐조등에 견시까지 사용하고도 117발중 고작 2발을 맞추는 한심한 명중률은 덤이다. 주간전투에만 맞추어진 광학조준장치와 사격통제장치가 야간에는 광량부족으로 작동이 안되니 견시를 써서 쌍안경과 육안으로만 대강 조준하니 벌어진 비극이었다. 그나마 명중탄도 1발은 일반적인 철갑탄이라 관통력 부족으로 피해를 제대로 못주었다. 오히려 관통력 없는 1발의 3식탄이 상부구조물에 더 많은 피해를 주었다.
반면에 같은 전투에서 워싱턴은 키리시마에게 9km의 거리에서 75발을 발사해서 9발을 명중시켰다. 물론 당시 미 함대를 지휘했던 윌리스 A 리 제독이 미 해군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레이더 전문가이고 워싱턴 승무원들의 포술 숙련도도 대단히 뛰어났던 건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압도적인 차이이다.
4.3. 방어력
방어력 또한 문제인데 일본 해군 군함은 장갑의 재질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신규공업국으로서 강재에 대한 열 처리나 침탄 처리 등에 미숙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때문에 미국의 함선용 장갑보다 최대 13% 정도 약했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200mm 이하면 종류에 따라서 미국 장갑의 97% 까지 방어력이 올라가지만 그 이상의 두꺼운 장갑이 문제였다. 출처16인치 Mark 6으로 쏜 철갑탄에 관통된 야마토급 전함의 660mm 주포탑 전면장갑 |
실제 전후의 실험에서 야마토급 전함의 포탑 전면장갑 660mm를 16인치 Mark 6으로 관통한 사례까지 나왔다. 예시
해당 실험은 시나노가 항공모함으로 개장되면서 유휴품으로 남은 주포탑 정면장갑을 상대로 상당히 근거리에서 0도로 발사한 결과물이므로 뚫리는 게 정상이며 그래서 테스트와는 달리 실전에서는 아이오와급의 주포로 관통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실제로는 야마토급 전함의 주포탑 전면장갑은 관통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야마토급 전함의 장갑 중 두번째로 두꺼운 측면장갑은 주포탑 전면장갑보다 한참 앏은 410mm로, 일본 강판의 기술력 부족으로 인한 재질 저하 및 13,716m에서 미국제 측면장갑 520mm를 관통하는 Mark 6의 위력을 생각하면 경사장갑을 적용하더라도 충분하게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이 야마토급 전함의 측면장갑을 뚫을 수 있다. 전함의 측면 주장갑 경사도는 잘 해봐야 20도 수준이기 때문에 60도 경사장갑을 채용한 T-34처럼 방어력이 크게 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서 경사장갑으로 늘어난 방어도는 스펙과는 달리 실전에서는 많이 깎인다. T-34의 45mm 전면장갑은 60도 경사장갑을 채용해서 스펙상 90mm의 방어력을 자랑해야 하지만 실전의 결과로는 60mm - 70mm 수준의 방어력만 보였다. 전후 미군 조사에 의하면 실제 장갑재의 수준은 345mm이며 경사장갑으로 인해 430mm의 효과를 낸다고 했다.
따라서 충분히 18인치급 철갑탄을 막아야 할 야마토급 전함의 측면 주장갑을 구경이 2인치나 작은 사우스다코타의 16인치 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이 관통해버리므로 자신이 쏜 포탄과 동급의 포탄을 맞으며 버텨야 할 전함의 기본 능력조차 보장하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다만 사우스다코타가 사용하는 16인치 초중량탄은 17인치에 맞먹는 위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탄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영국의 16인치 Mk.I의 경우 15,000야드에서도 고작 366mm를 관통할 뿐이며[17] 이를 개량한 16인치 주포의 경우에도 15,000 야드(13,716m)의 거리에서는 449mm를 관통하지만 20,000야드로 벌어지면 389mm를 관통한다.[18] 그리고 갑판 타격의 경우 35,000야드에서 184mm를 관통하므로 200 ~ 220mm의 장갑을 가지므로 85%라고 단순히 계산하면 실 방호력이 170~187mm라서 가까스로 뚫을 수 있는 수준이다. 이보다 가까워지면 갑판을 뚫지 못하므로 일반적인 16인치를 상대로는 어느 정도 안전한 구역이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6인치 초중량탄을 상대로는 30,000야드에서도 갑판이 얼마든지 관통당할 수 있고 측면의 경우 25,000야드가량 떨어진 거리에서도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우니 방어력이 부족한건 사실이지만 이건 17인치급으로 쳐줘야 하는 물건임을 감안하자.[19]
그나마 야마토급 전함은 신형함으로 장갑의 두께를 엄청나게 강화해서 16인치급 주포탄에 대해서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단 20km ~ 30km 정도의 안전지대는 확보했으므로 별 문제가 없지만 나가토급 전함을 비롯한 나머지 전함들의 장갑이 큰 문제였다. 심지어 약한 장갑재는 불 꺼진 술집의 난타전이라 불릴 정도의 개판에 옆에 보이면 쏘는 초 근접전이라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중순양함의 사격에 측면이 꿰뚫리는 공고급 순양전함 히에이 등의 사례까지 나왔다. 전간기때의 대규모 개장에서도 갑판장갑 강화만 중시하고 측면장갑 강화는 경시한 게 문제였다.
물론 선체 내의 방어력을 위한 방어 구조등은 영국의 라이온급 순양전함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많이 참고를 했으니 상당히 뛰어난 면모를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리벳 접합 방식을 고수한 결과 같은 규모의 선체에 같은 두께의 장갑을 쳐발랐다면 일본쪽의 선체가 더 무겁다라는 등식은 거의 참이 되어 버린다.
다만 종종 거론되는 리벳접합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하다. 일단 당시 대부분의 전함들은 리벳 접합 방식을 사용한 경우가 많은데 킹 조지 5세급 전함이나 아이오와급 전함들도 리벳 접합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즉, 리벳 접합 방식 자체가 뒤떨어진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그 시대에 리벳 접합이 주로 쓰인 이유는 잠수함의 압력 선체에 쓰는 용접이 수상함용 강재와 맞지 않았던 탓도 있다. 그렇다고 용접만 보고 잠수함용 강재를 수상함에 그대로 적용시키려니 단가가 폭등한다. 그럴 바에야 리벳 접합을 그냥 쓰자가 되어버린 것.
또한 일본 전함들은 야마토급 이전의 전함들은 대미지 컨트롤에 대한 정성이 심히 부족했는데, 심지어 준수한 성능이라는 공고급 순양전함과 나가토급 전함에 함선 측면에 케이스메이트 포곽식 함포가 존재했을 정도다. 이런 포곽식 측면함포는 대포의 상하좌우각도에 심각한 제한을 가져오고, 현측장갑에 구멍을 뚫고 만들어지므로 취약점을 늘리는데다가, 전열함처럼 후방을 측면에 배치된 모든 부포가 공유하므로 단 1곳만 전함의 포탄이 관통해서 폭발하면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장갑이 두꺼운 것도 아니라서 부포곽이 있는 부위의 측면장갑은 고작 152mm 수준인데다가 포곽의 포방패는 51mm 수준이다. 그래서 타국에서는 나중에 함선을 개장할 때 포곽식 측면함포는 모두 제거하고 선회포탑식으로 따로 만드는데, 일본만은 함선을 개장하더라도 부포의 포문이 감소해서 전투 능력이 저하된다는 이유로 인해 포곽식 함포를 고수한 것이다. 따라서 일부 구획에선 그야말로 종잇장같은 장갑을 가지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만큼 위험피격구획이 많으니 탄약고가 터져 화재가 발생할 확률은 극도로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토급 전함에서 부포탑을 달았는데도 방어력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 부포 탄약고가 너무 큰 데다가, 부포탑의 장갑이 25mm로, 전설의 치하와 동급이다. 답이 없다. 그나마 포탑만 노출되고 나머지는 측면장갑의 보호를 받는 측면 부포탑은 대공화력 증강을 위해 제거하면서 주포탑 바로 뒤에 있고 주포보다 더 위에 있어서 장갑이 없다시피한 상부구조물에 그대로 바벳까지 길게 노출된 함체 중앙선 부포탑을 남기는 실수까지 했다. 애초에 야마토가 오키나와에서 폭침한 원인이 부포탑 천장에 정확하게 떨어진 항공 폭탄때문이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 일본에서도 할 말은 있긴 했다. 일단 공고급은 1차대전 전에 영국에 주문하여 설계/건조된 배이다. 당시 공고와 같은 시기에 건조된 대부분의 배들도 저런 방식이었다. 다만 공고급 1번함은 영국에서 건조되었고 2번함부터는 일본에서 건조되었다. 나가토 역시 1차대전 중에 설계/건조된 배고 2차대전 전까지 미친듯이 개조해 장갑을 강화하고 화력은 처음부터 410mm 주포를 장비해 강력했고 기동성도 처음부터 매우 뛰어나 미친듯이 장갑을 처발라 배수량이 늘어났는 데도 동시기 건조된 영/미의 동급함보다도 여전히 빨랐다. 데미지 컨트롤에 대한 정성이 부족한 건 맞지만 적어도 2차대전 시기의 신전함과 비교해 설계면에서 떨어지는 부분을 까는 건 이들 전함들이 1차대전형 전함이라는 걸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고급의 개장은 1933 ~ 1936년에 시작했고 이때까지는 각국이 포곽식과 부포탑식을 두고 우왕좌왕하던 시기였다. 당장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넬슨급 전함에서 부포탑식으로 만들었다가 1934년에 개장에 들어간 워스파이트는 포곽식 부포를 유지했지만 1937년에 착공한 QE와 밸리언트는 부포탑식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당시 영국이 돈이 없어서 좋은 거 알면서도 개장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더 큰 문제였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개장기록만 봐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개념이 아예 없는 것과 돈 없어서 못한 것은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거기에 일본 전함의 주포 탄약 보관 방식으로 영국의 코다이트식 장약과 영국식 보관법을 그대로 베껴버리는 삽질을 저질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 순양전함의 폭침에 대해 코다이트식 장약과 보관법이 큰 문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걸 일본이 베껴버린 것. 이렇게 되어버리니 탄약고 유폭은 피할 수가 없었고 데미지 컨트롤 능력은 바닥을 기었다. 또한 함상 구조물을 높게 쌓아놓은 게 많으니 침수등으로 조금만 경사가 일어나도 쉽게 배가 뒤엎어졌다. 평상시에는 주포 탄약고에 소화시설과 냉방장치를 갖추어서 별 일이 없지만 배가 기울기 시작하거나 주변에 화재가 발생하면 타국 전함에 비해 위험해지며 침몰시 탈출할 때 유폭이 빨리 발생하는 바람에 막대한 인원손실이 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침수로 전복되면서 유폭된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와 후방 부포탑에 불이 붙어서 결국 주포 탄약고 온도가 유폭가능지경까지 몰리는 바람에 전투 중단 및 퇴함지시가 내려온 후 배가 전복되면서 유폭한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다. 1942년 5월, 주포사격 훈련 도중에 이세급 전함 휴가의 제5번 주포탑 내부에 배치된 화약이 내부폭발해서 5번 주포탑이 박살난 것도 침몰만 안했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세계 일류 수준의 산소어뢰를 개발했던 국가치고 어뢰 방어력도 한심할 수준으로 낮았다는 것 또한 큰 문제였다. 일본 전함의 최종 지표였던 야마토급 전함도 벌지 설계 결함으로 인해 미국 잠수함이 날린 어뢰 한 발 맞고 벌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 마찬가지로 잘못 설계된 철판 접합 부위를 찢었기 때문에 3천톤의 침수를 당해 긴급 회항했다는 사실과, 야마토급 3번함의 함체를 그대로 유용했던 시나노의 어이없는 최후를 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이쪽은 부실공사인 탓도 있기는 하다만...)
당연하게도 구레항에서 배를 수리하는 동안 5천 톤 이상의 대어뢰 장갑(수밀격벽)을 붙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더 이상 무게 증가가 어렵고, 저러면 당연히 반년 넘는 추가적인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판단, 기각되었다. 한편 이 부분의 경우, 일본군 수뇌부에서 일부러 이 같은 문제를 의식하지 않은 면도 있다.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에 참여했던 마키노 시게루 주인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점을 상부에서는 누수 대책을 세우면 되며, 근본적인 설계 변경은 필요없다며 넘겨버렸다고 한다.
일단 야마토는 손상 부위를 수리하며 구조 보강을 했으나 무사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이 없고 피팅할 때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 보강이 전혀 되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야마토나 무사시에게는 다행이지만 최후 때 탄두 작약양이 잠수함용 어뢰의 90%에 달하는 미국제 항공어뢰를 다수 얻어맞았는데 약점 부위에 피격되지 않아서 다수의 피탄에도 오래 버틸 수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운이었다.
따라서 만일 일본 전함들이 함대결전을 위해 일제히 출항하고, 그것들을 미국 잠수함대가 일제히 기습했다면 잠수함의 역사에 남을 기록적인 대전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이미 실전에서 그렇게 될 뻔한 적이 있다는 게 함정으로 대표적인 게 미드웨이 해전이다. 물론 미드웨이 해전 당시만 해도 Mark. 14 어뢰의 신뢰도 문제가 심각했던 미군이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가토급 잠수함의 문제점 항목에서 어뢰 대목을 참고할 것. 아니면 어뢰 스캔들 문서로 들어가서 보면 훨씬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기네들이 진주만 공습 때처럼 항공모함을 굴리면서 방공의 필요성 자체는 인식했는지 대공포의 숫자도 늘리고 늦게나마 레이더도 달아주기는 했다. 미드웨이 해전이후로 구식 전함들도 1942 ~ 1943년에는 레이더를 장착하기 시작했고 대공포의 숫자도 증가했다. 애초에 전파 탐신이 필요없고 견시로 대응하면 된다고 하다가 크게 데인 것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 급강하 폭격기, SBD 돈틀리스들에게 당한 운명의 5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공포와 레이더의 성능이 상당히 떨어지는지라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없었다.
4.4. 속도
일본군의 구식 전함들은 너무 느려서, 항모전단의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25노트를 기준으로 속도를 맞춰놓았는데, 항공모함은 30노트로 달려가니 그냥 답이 없다. 속도를 30노트로 늘리는데 성공한 공고급 순양전함들이 유용하게 쓰인 이유 중 하나가 이거다. 그나마 공고급도 1차 개장때 동력기관의 완전한 신형 교체를 안하는 바람에 속도가 느려져서 비판을 거하게 먹고 2차 개장에서 동력기관의 완전한 신형 교체를 달성해서 30노트를 확보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삽질을 하고 메꾼 셈이 된다.물론 후소급이나 이세급은 낡은 군함들이라 느릴 수밖에 없고, 일본군도 그건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속도를 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화력을 포기 못한다고 중앙부 주포탑을 모두 남긴채 개장해서 비효율적으로 동력기관 교체와 개량, 증설을 했기 때문이었다. 미군과 영국군의 구식 전함들도 항공모함을 따라가지 못해서 홀대를 받는 경우가 많았으니 일단 여기까지는 삽질은 있었으나 큰 문제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속도를 늘릴 수 있었던 나가토급을 25노트로 끌어내린 점. 29노트를 내도록 개조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일본군은 고물 전함들과 속도를 맞춘다며 억지로 25노트를 내게 했고 결과는 대실패였다.
4.5. 전술교리 문제
일본군의 전함에 대한 전술 교리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하나는 함대결전사상에 끝까지 집착해 전함을 써먹질 않은 것. 2차대전은 전함의 황혼기로, 훨씬 먼 거리에서 피해를 줄 수 있는 항공모함이 실전적인 걸 넘어 항공기의 발전에 힘입어 최종적 주력함이 되면서 전함은 최종적 주력함에서는 밀려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를 직접 연 장본인인 일본 해군은 항모기동부대보다 전함간의 함대결전을 마지막까지도 신봉했고, 그래서 노령함인 공고급 순양전함을 제외한 나머지 전함은 제대로 일도 안 하고 놀다가 다들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뭐 항모기동부대를 중심으로 꾸리고 싶어도 항공 기술이 그 꼬라지여서야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전함들을 항구에 처박아놓은 것에 대한 변명은 안 된다. 이는 최초로 항모를 적극적으로 운용한 연합함대 사령관이라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예외가 아니다. 미드웨이 해전이 그 꼴이 나도록 만든 장본인이 야마모토다. 실제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한 나구모에게는 전술적인 실책에 대한 책임을 물을지언정 전략적인 실책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미드웨이 해전의 책임을 묻자면 처음부터 작전 목표의 우선 순위조차 제대로 매기지 않은 야마모토의 실책이 제일 크다. 온 전력을 사방에 뿌려놓은 것은 그렇다 치고, 나구모의 기동부대를 최전방에 배치하면서 제대로 된 호위전력조차 붙여주지 않았다. 그가 전함 건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곧 그가 항모 위주의 전술에 눈떴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전함을 출격시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크다. 당장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는 항공모함이 주축이 된 제1, 제2 항공함대 뒤를 전함들이 따라오고 있긴 했다. 항공함대에 소속된 전함은 방어력 부실로 주력전함함대에서 제외된 공고급 순양전함 2척에 불과했다. 그런데... 간격이 너무 멀었다. 항공모함의 방어력은 건조나 개조시 의도해서 집어넣지 않고는 순양함과 구축함 같은 다른 수상함들에 비해 거의 0에 수렴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 역시 멍청한 짓이다. 그래서 일본군 연합함대 진로에 깔아둔 잠수함대로부터 이걸 보고받은 미군은 일본군의 항공모함만 골라서 탈탈 털어먹고는, 전함끼리의 포격전이 될 미드웨이 해전 2차전을 회피해버렸다. 이걸로 인해 미드웨이 해전을 프랭크 플레처 제독에 이어 지휘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까임권을 얻었으나, 훗날 밝혀진 기록으로는 이 판단이 정확했다. 이때 미군은 전함이 없었다. 만약 2차전이 일어났다면 다 이겨 놓은 해전을 말아먹는 꼴이다.
문제는 이때 Mark.14 어뢰의 문제가 해결됐으면, 잠수함대가 항공모함이 주축인 제1, 2 항공함대와 전함이 주축인 본대를 기습해서 잠수함 역사에 남을 기록적인 대전과를 만들 뻔했다는 거. 그래서 잠수함대 사령관이 병기국에 "만일 병기국에서 어뢰를 똑바로 안 만들어줄 것 같으면 우리 잠수함대는 함선국에 요청해서 어뢰 대신에 함선을 잡아 끌어당겨 구멍을 낼 갈고리 장대를 내놓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라고 돌직구를 날린 거다. 이때 미국이 노스캐롤라이나급을 조금 더 빨리 취역시키거나 살아남은 전함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아마 역사에 길이 남을 전함 무쌍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적의 전함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상대라곤 한 방만 스쳐도 바로 골로 가는 순양함 이하 함급과 항공모함밖에 없으니...
둘째로는 대지상포격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허리가 나가도록 구르는 공고급을 제외한 모든 일본전함은 대지상포격에 신경도 안 썼다. 일제가 그렇게 혐오하던 귀축영미의 전함들은 수상전투가 없을 때 지상 화력지원에 집중했음을 고려하면 일본 해군의 전술적인 안목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함대결전사상에 집착하느라 전함을 그런 사소해보이는 임무에 보내지 않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육해군이 아예 견원지간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반해 미군은 전함의 대지상포격을 점점 늘렸다. 물론 연안 화력지원에는 주로 구형 표준전함들을 투입했고 신형 고속전함들은 그보다는 드물게 투입했다. 표준전함들이 지상 화력지원에 대한 경험이 더 풍부했기 때문에 명중률이나 실질적인 목표 달성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신형 전함들은 주로 함대 방공 임무를 맡는 경우가 많았고, 이동 간 대함사격에 익숙하다보니 연안 화력지원을 맡을 때면 엉뚱한 곳만 헤집어놓기 일쑤였다고 한다. 따라서 구식 전함을 제대로 유용하게 사용한 사례에 들어간다.
4.6. 실전에서의 전과
그래도 전장에서 고군분투했다면, 94식 산포처럼 성능에 비해 적절히 활약했다는 평가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사실상 제대로 싸운 건 공고급 순양전함 정도다. 그럼 나머지 전함들은 뭐하고 있었냐고? 미 해군과의 결전을 대비한답시고 항구에 정박해서 놀고 있었다! 야마토 같은 경우엔 '야마토 호텔'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이고,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이 전멸한 이후에는 미군의 밥이 되어 전과다운 전과도 세우지 못한 채 침몰해갔다.-
공고급 순양전함
태생 자체가 순양전함이라 제대로 된 전함과 맞짱 뜰 스펙도 아니거니와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이미 함령이 30년이 넘은 노령이었기에 제대로 된 함대결전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주력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느려터진 다른 전함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30노트의 빠른 속력 덕분에 고속 성능을 자랑하는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과 함께 작전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수많은 임무에 이리저리 굴러다녔고 공고를 포함한 4척 모두 태평양을 바쁘게 내달리며 미군과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미군을 상대로 무쌍을 펼친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임무를 수행한 덕에 일본군 전함 중에서는 가장 많은 전공을 세운 최고의 수훈함이 되었다. 특히 자매함 중에서는 1번함 공고가 가장 높게 평가받는다.공고가 영국제라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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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소급 전함 후소, 야마시로
레이테 만 해전에서 두 척 모두 침몰했다. 다만 이쪽은 태평양 전쟁 시점에선 이미 공고급 이상의 노후함이라서 전투함으로 쓰기엔 무리가 상당했던 관계로 화력지원 임무에 투입되어 운용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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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급 전함
두 척 모두 항공전함으로 개장되었다. '특수 항공모함' 문단 참조. 전함 시절의 전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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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무츠
나가토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쫓겨 야마토와 함께 달아났고, 무츠는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순양함들을 쫓아가지 못하고 낙오되었다. 둘의 최후는 더더욱 비참해서 전후 생존함으로서 미국이 접수한 나가토는 비키니섬 핵실험의 희생양이 되었고 무츠는 항구에 계류중인 상태에서 원인 불명의 이유로 발생한 주포탑 탄약고의 화재에 의한 유폭 때문에 폭침당했다. 특히 핵실험의 희생양이 된 나가토는 비키니섬 핵실험 당시 핵을 한 번 맞은 게 아니라 두 번 맞았다. 전과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나가토와 무츠는 일본의 자랑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최소한 얼굴마담 역할은 했다는 점에서 본토의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몰랐던 야마토보다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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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무사시,
시나노
야마토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함재기들을 팀킬했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쫓겨 달아나는 바람에 작전을 말아먹었으며,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던 16전대가 미 항모전단의 공습으로 박살나면서 미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킨 덕에 더 많이 맞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오키나와에서 일본 수뇌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마지막 출격에 나서 개죽음을 당했다.
무사시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자기 주포로 자기 대공포대를 박살내는 막장 행각을 보였지만 일단 탱커 역할 자체는 어떻게든 수행했다.
시나노는 항공모함 항목의 전과 문단 참조.
세계 최대의 전함이니 전과를 많이 세웠을 것 같지만 거의 없다.
5. 중순양함
경순양함에서 변신한 토네급 중순양함 | 아오바급 중순양함 |
일본군의 중순양함은 일본 해군이 만든 함선중에서 가장 전투력이 높고 성능이 뛰어난 함선들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리고 실제로도 일본군의 중순양함은 일본군의 다른 함선에 비해서는 훌륭한 점이 많다. 하지만 아래에 언급되는 각종 이유로 인해 잘해봐야 뛰어난 구식으로 전락해버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5.1. 역할 설계 실패
원래 중순양함은 전함의 대역인 성격이 짙다. 그래서 함대결전에서 전함을 보조하는 것은 기본이고, 순양함답게 장거리 항속성능을 살려서 구축함과 같이 통상파괴전을 하거나, 대공 방어를 전담하는 등 다방면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그러나 일본 해군은 점감요격작전과 함대결전에 맞추어서 해군의 함정들을 특화시켰는데 전함이나 항공모함같은 주력함 계열들은 배수량도 많고 덩치도 있어서 어느 정도 범용성을 가지게 만들었으나 중순양함 이하의 보조함들은 배수량도 적고 덩치도 작아서 어떤 목적에 특화되면 다른 용도로 돌려쓸 수 있는 범용성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일본군은 중순양함을 함대결전시 산소어뢰를 가지고 야간에 미국의 전함전대를 습격하는 용도로만 쓸 생각으로 건조했으며, 해당 컨셉에 맞게 특화시켰다. 이런 점은 구축함 등 일본의 다른 함선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중순양함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5.2. 화력
기본적으로는 8인치급 주포를 최소 6문, 보통은 10문까지 탑재하고 산소어뢰까지 장비하였으니 스펙상 보이는 공격력은 좋았다. 문제는 화력 그 자체만 생각해서 다른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일단 주포의 구경에 대해서는 일본 해군은 타국보다 가장 먼저 8인치급의 주포를 순양함에 장착하려고 노력했으며,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은 슬픈 전설에 가깝다. 최초의 중순양함인 후루타카급 중순양함의 경우, 8인치급 주포를 장착하는데 성공했지만, 포신이 포탑당 1개인 단장 주포탑인데다가 제대로 된 바벳 시설도 없이 110kg의 중량을 자랑하는 8인치급 포탄을 인력으로 운반, 장전하는 엽기적인 구조를 가졌다. 덕분에 장전 속도는 느려터졌고 전투원의 피로가 극심했으며, 전투 효율도 크게 떨어지는 개뻘짓이 돼버렸다. 결국 아오바급 중순양함에서 기계장치의 도움을 받아 장전하는 2연장 주포탑을 채용했고, 후루타카급도 나중에 2연장 주포탑을 탑재한다.
그 다음에 등장한 3년식 8인치 50구경 2연장 주포탑의 경우, 앞서 말한 종이장갑 문제뿐 아니라, 전함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접한 포신에서 발사된 포탄이 간섭현상을 일으켜서 영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증상이 발생해버렸다. 이는 포신 중 하나를 0.3초 정도 지연 발사하는 능력 추가로 해결했지만, 이미 러일전쟁에서 전함의 2연장 주포탑을 운용해본 일본 해군이 더 큰 대포도 아니고 보조함의 소형 주포에서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경험했다는 것 자체가 더 신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미 미국은 전간기에 8인치 주포의 3연장화에 성공했으며 다연장 포탑의 문제점인 일제사격시 포탄이 비행하면서 서로에게 간섭현상을 보이는 문제도 시간을 좀 많이 투자해서 해결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패전할 때까지 8인치 주포탑의 3연장화를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3연장화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이 8인치 3연장 주포탑을 개발할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18.1인치 포탑의 3연장화에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나가토급 전함과 카가급 전함을 설계할 때 네바다급 전함처럼 2연장과 3연장 포탑을 2기씩 혼용하자는 제안이 나온 사실로 보아 이 시점에서 이미 전함용 3연장 포탑의 개발이 가능하리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함의 주포탑도 3연장화할 기술력이 있다면 중순양함의 8인치 주포도 3연장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2연장 주포탑의 포 한문만 사격하고 조준을 수정해서 다른 1문을 사격한다는 교호(交互)사격을 하므로 다연장 포탑이 필요없다는 자기합리화까지 시전한다. 전함쪽에서도 언급한 문제지만 교호사격은 원래 절반의 일제사격 (half salvo)이며 해당 사격방식 영국에서 일제사격을 하면서 광학 기술의 발전과, 그것을 이용한 광학식 레인지 파인더의 발전으로 거리 측정은 수월해졌지만, 적의 함속을 측정하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던 방법으로 일제사격의 포탑별 제원 수정을 하지 않고 좌우로 흩어지게 쏘는 방식도 연구하였는데, 이것 역시 적의 상대 함속을 알아내서 차탄 수정을 더 원활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든 방법이다.
그리고 착탄 관측으로 함속을 측정하는 것은 기존처럼 한곳으로 모아서 일제사격할 때와 큰 차이가 없다 여겨지는 반면, 공격력 약화와 적에게 일제사격으로 협차사격 당하기 딱 좋다는 식의 여러가지 귀찮음과 위험성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절반의 일제사격은 교범상에만 적함의 사격제원을 딸 때나 잠깐 쓰고 빠르게 일제사격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실전에서는 적함이 먼저 아군 함선에 협차를 맞출 가능성이 높아서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일제사격으로 진행하였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에서 함대결전 경험을 얻은 이후 일제사격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1908년도에 발행된 함포사격술 교본에서는 아예 이 일제사격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사격(斉射)이라고 이름만 붙이고 실제로는 교호사격을 주력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전간기의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절에서 연습성적을 목표로 비현실적으로 하는 훈련에서나 적합한 교호사격은 전쟁이 터질 것 같자 연습을 좀 더 실전적인 것으로 변경하자마자 앞서 언급한 2연장 포탑에서의 포탄 비행 간섭현상이나 주포의 발사 후폭풍과 반동 증가, 양탄기의 포탄공급능력 부족, 재장전 속도 저하등 이면에 가려진 각종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나마 전함에서는 야마토급 전함에서 3연장 주포탑을 도입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중순양함에서는 끝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미국이 8인치 주포를 9문 탑재할 경우에는 주포탑이 3기만 필요하지만, 일본군은 2연장 주포탑밖에 없어서 10문을 탑재하기 위해 주포탑을 5기나 배치해야 했으며, 덕분에 특유의 구조인 3번 포탑의 역행 배치가 나오게 된다. 이런 식으로 공간을 낭비하면서 동시에 일부 주포의 사계를 제한하게 되는 비효율성은 다른 것에도 큰 영향을 준다. 물론 8인치 주포의 3연장화를 성공한 건 미국이 유일하기는 했고 다른 나라들도 전부 2연장에서 만족하기는 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2연장 포탑 4기로 8기의 주포를 올리는데 만족했지만 일본은 다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10문을 확보하려고 했으면서도 끝까지 3연장 포탑을 개발하지 않았다.
이건 결국 실전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자바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승리하긴 했으나 1942년 3월 22일에 연함함대 사령부가 조사한 결과 제1차 자바 해전에서는 8인치 주포탄 1621발을 발사해서 5발을 명중시켰는데 그나마 엑세터에 맞춘 1발을 제외하면 불발탄이었다. 제2차 자바 해전에서는 8인치 주포탄 1459발을 쏴서 3발을 맞추었으며 그나마 의미 있는 것은 엑서터에 처음 명중한 1발이었고 나머지는 확인사살 수준이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실전에서는 교호사격을 할 정도로 상황이 한가롭지가 않아서 일제사격을 하면서 포탄을 다량으로 쏘는 바람에 포탄을 공급하는 수병들이 탈진하고 일부는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성과가 영 아니게 나온 것이다.
세번째로는 2연장 주포탑만 운용가능한 결과 주포탑 배치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8인치급 주포 10문을 운용하게 된 묘코급 중순양함, 타카오급 중순양함이다. 묘코급과 타카오급의 경우, 3번 주포탑이 선수쪽에 있으면서도 함수와 역행으로 배치되면서 사실상 전함의 중앙부 주포탑처럼 측면으로만 쏘는 포탑이 되어 버린 것이다. 2연장 주포탑만으로 포문 숫자 늘리려고 주포탑을 5기나 배치하면서 발생한 뻘짓이다.
미국의 볼티모어급 중순양함과 비교했을 때, 선수에 위치한 포신 갯수는 같지만, 정면에서 봤을 때 사용 가능한 포신 갯수는 볼티모어가 6문인데 반해 타카오와 묘코는 4문으로 포격전에서 밀린다. 3번 포탑을 쓰려면 선체 옆을 노출시켜야 하는데, 옆은 산소어뢰로 무장돼 있음으로 잘못하다간 어뢰 유폭으로 굉침(...)을 먼저 당할 가능성이 크다. 한 술 더 떠서, 토네급 중순양함은 선수에 주포탑 4기가 모두 집중 배치돼 있고, 3번,4번이 역행 배치로 전체 주포탑의 절반이 중앙부 주포탑으로 변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수 부분에 주포탑을 집중시키면 리슐리외급 전함처럼 적을 만났을 때부터 초반에 전체 화력을 집중가능하며 적이 배를 측면으로 돌릴 때까지 일방적인 화력 우위가 달성되므로 후방에 주포탑이 없어서 후방을 털리면 망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부 함선에 채택하는 방식인데 함수에 주포탑을 밀집할 때의 장점은 전혀 못 살리면서 단점만 가져가는 꼴이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되었듯 8인치 주포를 최대 10문이나 장착해야 했고, 주포탑이 2연장밖에 없으므로 부포나 대공포를 설치할 공간과 배수량이 매우 부족해졌다. 안 그래도 전함이나 항공모함에 비해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는 상황에서 이런 문제까지 겹치니 부포와 대공포는 그냥 약방의 감초식으로 조금 달아주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덕분에 적군의 경순양함이나 구축함처럼 빠르게 접근하는 물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항공기만 만나면 그냥 표적으로 전락해버린다. 물론 다른 함선들에 비해서는 속도가 빠르지만, 구축함처럼 민첩한 것도 아니니 적의 폭격에 매우 취약했다.
5.3. 방어력
그래도 화력은 무리를 해가면서 충족시켰지만 반대급부로 방어력이 개판이 되었다. 당장 과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속도가 빨라야 하므로, 배수량이 제한된 상태에서는 어딘가 희생해야 할 항목이 발생했다. 여기서 일본군은 장갑을 크게 줄이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래서 타국의 중순양함에 비해 현측장갑등 모든 면에서 장갑이 부족하며, 이는 조약 탈퇴 후에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특히 이런 문제가 심한 곳은 주포탑과 바벳이었다. 미국의 중순양함이 포탑에는 적어도 5인치(=약 127mm)의 장갑을 설치한 데 반해, 일본군의 중순양함의 포탑은 고작 파편 방어 수준인 25mm의 경장갑을 달며, 바벳도 평균 33mm라는 엽기적인 두께를 자랑한다. 구축함의 함포도 못막을 수준의 장갑을 중순양함의 주포탑에다가 달았다는 이야기다.
일단 이 문제는 일본 해군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약형 중순양함 자체의 한계에 가깝긴 하다. 영국의 카운티급 중순양함이나 요크급 중순양함도 포탑 장갑이 1인치(이정도면 25mm보다 조금 두꺼운 수준밖에 안된다.) 수준이며 미국의 중순양함들은 그래도 사정이 양호했지만 뉴올리언스급에 가서야 제대로 된 대응방어를 갖추었다.펜사콜라급, 노샘프턴급의 포탑 장갑이 19 ~ 64mm, 포틀랜드급은 34 ~ 64mm이다. 그 이후의 순양함들은 일본 해군보다 사정이 좀 낫기는 하지만 포탑 장갑이 부실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디의 조약 위반함처럼 하지 않는 이상 조약형 중순양함으로 대응방어를 충실하 갖추기는 애초에 무리가 있다. 미국이야 3연장포를 달았기에 뉴올리언스급에서는 어찌저찌 달성했지만 다른 나라들은 애초에 3연장포도 없는 상태였고 일본은 주포탑을 5개씩 올려서 이런 문제가 타국에 비해서 더 심각했던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조약형 중순양함중 이런 조건을 달성한 것은 미 해군 순양함중 일부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이건 조약 탈퇴를 한 후에는 반드시 방어력을 크게 보강해야 하는 문제인데 최후의 중순양함인 토네급 중순양함을 건조할 때도 군축조약 탈퇴 후에도 주포탑 장갑은 치하와 같은 25mm 였다. 방어력 증강에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던 것이다. 중순양함들도 전간기 말기에 대규모로 대개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이 이러는 동안 영국은 중순양함은 애초부터 포기하고 경순양함을 강화시키고 있었으며 미국은 중순양함의 배수량을 늘리면서 결국 8인치급 대응방어가 가능할 수준으로 장갑을 강화하였고 결국에는 디모인급 중순양함에서 8인치급 주포의 속사포화를 성공하여 Mk.16 8인치 55구경장 함포를 써서 3연장 주포탑에서 분당 10발이나 쏘는 기록을 달성하면서 화력의 대규모 증대까지 성공한다.
결국 일본 해군의 장갑 경시는 레이테 만 해전/경과의 사마르 해전에서 미국의 호위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DE-413)가 보유한 양용포, 그것도 대공성능을 살리기 위해 1발당 대수상 위력을 저하시킨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 같은 화기에게 토네급 중순양함 2번함 치쿠마의 3번 주포탑이 박살나는 등의 추태를 보이게 된다.
이렇게 기본적인 방어능력이 모자란 것도 문제지만 양날의 검인 산소어뢰를 탑재한 것도 문제였다. 원래 일본군의 중순양함은 산소어뢰를 탑재하기 때문에 뇌격 능력을 크게 평가받았으며, 실제 성과도 있었다. 그래서 산소어뢰를 탑재한 것 자체가 함선의 평가를 상승시키기도 했다. 문제는 산소어뢰는 그야말로 순산소 + 가연물질 + 화약인 물건이고, 어뢰 발사관이 그렇게 중장갑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초기의 중순양함은 제대로 된 장갑도 안 붙이고 함체 중앙에 어뢰 발사관을 위치시켰으며, 나중의 함선들도 함체 후부에 놓긴 했으나 주포탑에도 장갑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뢰 발사관 따위에 장갑을 충실하게 붙일 이유가 없으므로 별로 장갑을 추가한 것도 아니라서 어뢰의 앞부분이 어뢰 발사관 밖에 노출될 지경이었으므로 비행기가 기총 소사를 제대로 갈기면 어뢰 발사관이 대폭발하면서 중순양함이 굉침한다. 게다가 이건 항공기뿐 아니라 구축함이나 어뢰정의 소형 함포로도 가능한 일이라서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 이걸 피하려면 산소어뢰를 재빨리 버려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끝장난다.
실전에서도 이 문제로 격침된 중순양함이 존재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모가미와 충돌사고를 일으킨 미쿠마는 미군의 공습으로 산소어뢰가 유폭해서 침몰했고, 레이테 만 해전의 사미르 해전에서 타카오급 중순 4번함 초카이는 호위항모에서 날린 5인치 포에 산소어뢰가 유폭하는 바람에 엔진과 방향타가 맛이 가서 기동 불능이 되었고, 함재기의 500파운드 폭탄을 맞고 대화재가 발생해서 후지나미에게 처분당했다.
예외적인 케이스가 바로 아오바다. 아오바는 사보섬 해전에서 미군의 공격으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뢰 발사관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재빨리 불을 꺼버렸고,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는 미군의 기습으로 수십 발의 포탄을 얻어맞았는데도 산소어뢰 유폭으로 침몰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카비엥에서는 미군의 폭격으로 산소어뢰가 유폭했는데도 해안가에 전력으로 돌진해서 좌초함으로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오바만 이랬다는 게 문제.
5.4. 속력
위에 언급한대로 특화를 했기 때문에 속력 자체는 매우 괜찮았다. 문제는 순양함의 업무를 보기에는 짧은 항속거리다.순양함은 그 이름처럼 장거리 순찰을 위해서라도 항속거리가 길어야 한다. 하지만 타국의 중순양함이 8,000해리 이상의 항속거리를 가진 데 비해 일본군의 중순양함은 항속거리가 6,000 ~ 8,000해리의 범위를 가지는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저 8,000 해리도 영국의 이야기고 미국은 10,000해리를 넘기는 경우도 제법 있다. 이렇게 항속거리가 짧아진 이유는 앞서 말한 컨셉의 실수로 인해 굳이 원거리까지 항해할 필요가 적다는 것도 있지만, 연료를 많이 잡아먹는다고 연료탱크를 줄이라는 뻘짓 지시가 더 큰 원인이었다. 심지어 묘코급 중순양함이나 타카오급 중순양함은 대개장시 연료 탑재량을 일부러 축소하는 짓거리까지 했다. 애초에 연료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면 큰 연료탱크에 작은 양의 연료만 넣으면 될 것이지 굳이 연료탱크를 줄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삽질은 전함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는데, 전함은 그 특성상 항공모함 같은 다른 주력함이나 보조함들의 연료탱크 역할도 할 수 있는데 이걸 무시한 것. 게다가 중구난방으로 적용된 흔적도 보이는데 나가토급 전함은 개장하면서 항속거리도 늘렸다.
더 큰 문제는 제로센으로 잘 알려진 A6M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 해군에서 항속거리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무리할 수준으로 항속거리를 늘린 사례도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항공기의 항속거리를 늘린 이유는 엔진 출력의 부족으로 인해 순항 속도 자체가 느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존재했다. 하지만 정작 늘려야 할 것은 안늘리고 엉뚱한 곳은 늘리는 삽질이란 평가는 변하기 어렵다.
과무장과 무게 중심 상승쪽도 만만치 않았다. 이 문제는 경순양함을 제외한 순양함 이하 급의 함선이 모두 가진 약점이다. 이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보조 함선의 수량과 배수량이 제한을 받자, 개별 함선의 전투력을 너무 심하게 강화시키려는 조치에서 온 것이다. 그 결과 일본군의 중순양함도 배수량에 비해서 과무장을 하고, 함선의 출력을 크게 늘려서 고속을 내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무게 중심이 크게 상승했으며, 이런 문제는 우학 사건과 제4함대 사건을 겪고 나서야 함체를 강화하고 무게 중심을 조절하는 후속 조치가 진행되면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배수량에 비해서는 과무장이었고, 무게 중심도 높은 편이었다.
결국 배수량에 비해 무리를 한 결과 거지같은 주거 및 복지시설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일본군의 함선이 승무원에게 거지같은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군의 중순양함은 특히 이런 증상이 심해서 묘코급 중순양함 3번함 아시가라가 관함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영국 기자에게서 "나는 오늘 처음으로 진정한 군함을 보았다. 지금까지 본 것은 전부 여객선이었다"는 찬사(?)를 들을 지경이었다. #[20] 영국 해군의 군함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거주성이 썩 좋다고는 못하는데 그 영국이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뭐... 문제는 순양함은 다른 함선과는 달리 긴 항해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승무원들이 느끼는 고충이 상당했으며, 전투 효율에도 매우 안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타국이 순양함의 주거 및 복지시설에 괜히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본군은 끝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5.5. 기타
중순양함 숫자를 늘리기 위해 꼼수를 썼다가 피해를 봤다. 모가미급 중순양함처럼 경순양함을 제조하는 척 하다가 주포만 빼면 중순양함을 만드는 등 조약의 헛점을 이용한 꼼수를 부리다가 이걸 적발해낸 미국과 영국이 맞불 작전에 들어가면서 숫자면에서도 크게 밀리게 되는 악수를 두었다. 게다가 모가미급은 경순양함을 제조하는 척 하느라 본격적인 중순양함보다 배수량이 약간 적었기에, 위의 문제가 증폭되는 결과를 초래했다.5.6. 실전에서의 전과
위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중순양함은 나름대로 활약했다. 공고급을 제외한 전함들은 놀고 있으니 중순양함이 개고생을 할 수밖에 없어서였으나, 혹사의 대가로 일본군 군함 중에서도 최대의 손실을 기록했다. 모가미급과 토네급은 일본군의 공식적인 분류에 따르면 경순양함이지만, 중순양함을 건조하기 위해 일본이 꼼수를 쓴 것이므로 연합군에서는 중순양함으로 간주하며, 전후 일본에서도 중순양함으로 보고 있다.-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후루타카,
카코
제 6전대의 일원으로 괌 전투부터 과달카날 전투까지 많은 활약을 했으나, 2번함 카코는 사보섬 해전 이후 귀환하다가 미군 잠수함에게 격침되었고 1번함 후루타카는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기함 아오바를 보호하는 임무를 완수한 후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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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
키누가사
후루타카급 중순양함들과 제6전대에 소속되어 많은 활약을 했으며, 특히 1번함 아오바는 제6전대 기함으로서 과달카날에서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라는 사보섬 해전의 주역이 되는 등 대활약했고, 3번이나 침몰 수준의 대파를 당하고도 살아남았으며,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중순양함으로 기록된 군함 중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에 귀환했다. 미군이 아무리 때려도 격침되지 않아서 솔로몬의 늑대, 불침중순이라고 불렸을 정도.
심지어 일본 해군이 궤멸되는 구레 군항 공습에서는 미군의 공격으로 대파 착저했는데도 미군과 일본군 모두 아오바가 격침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배들이 대파 착저하고도 생존을 주장하면 정신승리라고 무시하던 미군이지만 아오바한테는 그런 거 없었다. 오히려 미군은 전함 이세, 하루나와 더불어 아오바를 중요 목표물로 찍고 대대적으로 공격해왔다. 이세와 하루나를 비롯한 구레 군항의 일본 군함 대부분이 대공포가 철거된 상태였고, 그나마 대공포가 있는 키타카미와 카츠라기는 도움이 안 되니 당연히 모든 공격이 아오바에게 집중되었다. 결국 아오바는 미 해군과 육군 항공대의 연속공격으로 선체가 절단되며 격침되었지만, 일본 최고의 중순양함으로 이름을 남겼다.
2번함 키누가사도 전쟁 초기부터 제6전대에 소속되어 수훈을 쌓았으며, 과달카날 전투에서 핸더슨 비행장을 불바다로 만드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과달카날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에게 격침되었다.
아오바는 이 항목에서 자주 거론되는데, 일본군의 무기체계가 가진 결점들을 승조원들의 노력과 행운으로 극복한 케이스라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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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코급 중순양함
묘코,
나치,
아시가라,
하구로
전쟁기간 내내 많은 활약을 했지만, 자바 해전을 비롯한 많은 해전에서 포격전 능력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얼마나 부족한지는 항목 참조. 전후 생존함은 싱가포르에서 대공포대가 되었던 묘코밖에 없으며, 이후 영국에 배상함으로 넘겨진 후 표적함이 되어 타카오와 함께 침몰 처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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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
아타고,
마야,
초카이
과달카날에서 제8함대 기함으로 제6전대와 함께 많은 수훈을 세우고 미국 최악의 해전이라는 사보 섬 해전에서 기함이었던 초카이를 제외하면 전공 면에서는 평범한 편으로,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아타고와 마야가 미군 잠수함에게 격침되었고, 초카이가 아군 전함 공고의 오인 포격으로 대파(...)된 후 공습을 당해 침몰했고 승조원 전원이 전멸했다. 미군의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화이트 플레인즈의 포탄에 맞아 대파되었다는 조롱을 받던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타카오는 싱가포르로 돌아가서 대공포대로 개장된 후 전후 생존함이 되었으나, 묘코와 함께 영국군에 넘겨진 후 표적함이 되어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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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 미쿠마,
스즈야,
쿠마노
모가미는 일본군 강습상륙함과 수송선 다수를 격침시켜 팀킬 순양함으로 명성을 날렸고, 미쿠마는 모가미와 충돌 사고를 일으킨 후 공습으로 침몰했으며, 스즈야는 미군 구축함에게 얻어터져 속도가 느려진 쿠마노를 피하다가 공습을 당해 침몰했고, 쿠마노는 지휘를 개판으로 해서 모가미와 미쿠마의 충돌 사고를 야기한 후 사마르 해전에서 미군 구축함 존스턴에게 얻어터져 대파되고 이후 미군의 잠수함과 함재기들에게 얻어터져 침몰했다. 전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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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네급 중순양함 토네, 치쿠마
'특수 항공모함' 항목 참조.
6. 경순양함
아가노급 경순양함 |
6.1. 어둠의 자식들
그나마 일본군의 중순양함은 전간기의 주요 개발 품목으로 큰 관심을 받았으며, 경순양함의 배수량 배정 분량까지 뽑아내서 경순양함인 척 하는 중순양함을 만들 정도로 세심한 주의와 손길이 닿았다.문제는 이 과정에서 진짜 경순양함은 버려졌다는 것이다. 원래 다이쇼시대에 만들어진 5,500톤급의 경순양함은 그 시기에는 훌륭한 군함이었지만, 그 이후 후계자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태평양 전쟁이 벌어진 뒤인 1942년까지 경순양함이 건조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조약의 헛점을 이용해서 경순양함에 배정된 배수톤으로 중순양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가미급 중순양함 같은 물건은 서류상에서는 경순양함이었지만, 외국의 평가는 물론이고 자국 내에서도 중순양함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기존의 폐물을 제외하고 실제로 건조된 경순양함은 아가노급 4척에 오요도급 1척밖에 안 된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경순양함을 개조해서 뇌격 능력을 높인 중뇌장순양함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산소어뢰 40발을 일제사격할 수 있는 쿠마改급 키타카미다. 하지만 하늘에는 미국의 함재기가 제공권을 잡았고, 야간에도 레이더로 정확하게 적함의 위치를 파악하는 미국 앞에서 전쟁 후반기에 등장한 이런 물건은 전장에 도달하는 것부터가 큰 문제였다. 결국 제대로 사용도 못 하고 고속 수송함으로 개장되었으며, 나중에는 카미카제용 가이텐을 발사하는 모함으로 개장되었지만 가이텐 자체가 무용지물인데다 그나마 빨랐던 속도까지 느려지면서 완벽한 고철덩어리로 전락했다. 후대의 평가는 전쟁 내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군함.
6.2. 컨셉 대실패
그나마 새로 만들어진 경순양함도 컨셉을 잘못 잡았다. 모가미급 경(?)순양함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고 대형 경순양함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면 얌전히 따라갔어야 하는데, 일본은 기존의 개념에 안주했다.오히려 새로운 길을 따라간 건 미국과 영국이었다. 일본이 모가미급을 경순양함이라며 내놓자마자,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대형 경순양함에 대응하기 위해 자국 경순양함의 배수량을 늘렸다. 일본이 모가미급 경(?) 순양함을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조약의 헛점을 이용해서 중순양함을 더 건조하려는 꼼수였지만, 미국과 영국은 그걸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영국은 기존의 경순양함의 약점들을 제거한, 강력한 경순양함을 손에 넣게 되었다. 6인치 주포를 12문에서 15문까지 탑재하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부포로 5인치 양용포도 12문 정도를 탑재하고 다수의 대공포도 추가되는 등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데다가 방어력도 높고 속도도 더 빠르거나 최소한 동등할 지경이었다.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타운급 경순양함 등은 일본의 경순양함 따위를 압도하는 성능을 가진 데다 숫자까지 우월했으므로 모든 면에서 일본군의 경순양함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다.
사실 미국과 일본의 경순양함들의 역할은 좀 달랐다. 센다이급을 비롯한 일본의 경순양함들은 구축함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자신이 주 화력을 퍼붓는 미국의 경순양함과는 달리 구축함들이 뇌격을 하는 동안 자신이 대신 공격을 받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탱커 역할을 하려면 그걸 할 수 있을 정도로 맷집이 뛰어나야 한다. 덩치도 작은 주제에 장갑이 특별히 두껍지도 않은 일본 경순양함들이 탱킹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일본 스스로도 개함 성능의 향상에 매우 힘썼다는 점에서 분명히 경순양함의 성능이 불충분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순양함을 만들기 위해서 경순양함을 경시했던 일본의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주력 경순양함들은 모가미 이전에 나온 물건들이 대부분이고 배수량도 브루클린급의 절반 수준밖에 안되니 성능이 딸리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센다이급을 포함한 일본의 구식 경순양함은 브루클린급과 같은 대형화된 경순양함과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으며 비교할 가치도 없다. 거기다 시기, 목적, 배수량의 차이가 너무 커서 같은 경순양함으로 분류된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놓고 비교할 수 없다. 셔먼은 4호 전차와 비교해서 평가해야지 티거나 판터랑 놓고 비방하면 그게 정당한 비교는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건 탁상공론일 뿐이다.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일본의 경순양함들은 미군 경순양함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당장 눈앞에 적의 거대한 경순양함이 나타났다면, 싫어도 성능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된 셔먼이 티거나 판터랑 자꾸만 비교되는 것도, 전장에서 티거와 마주친 연합군 전차가 셔먼이었기 때문이다. 중전차인 티거가 중형전차 셔먼과 싸우는 건 정당하지 않다고 연합군 전차병들이 아무리 외쳐봤자, 독일군 전차병들은 그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저 닥치고 8,8cm 포로 셔먼을 날려버릴 뿐이다. 바로 이런 일이 일본 경순양함들에게 벌어졌다.
여기에 구축함보다 비싼 경순양함을 소모품이나 미끼로 적에게 던진다는 발상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낭비인데, 안 그래도 전력이 열세가 된 일본에게는 더 큰 타격으로 돌아오는 뻘짓이었다. 또한, 경순양함의 특성상 위에 언급된 작전 외에도 할 업무가 많은데, 그 과정에서 맞닥뜨릴 적 경순양함에 대해서 대응이 불가능하므로 업무 수행이 어렵거나 불가능해진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그냥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신형 경순양함은 아가노급 4척과 오요도급 1척 뿐이고, 그들 역시 기존의 경순양함의 설계 흐름을 답습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모가미급 중순양함과 토네급 중순양함의 155mm 3연장 주포탑 탑재형을 그대로 경순양함으로 생산하면 건조 경험이 쌓여서 빠르게 건조하면서도 중요 부품의 재고도 있었고 기본능력도 좋은데다가 개량도 용이했을텐데 과거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7500톤급 신형함을 건조하면서 다 틀어져버린 것이다.
미군 입장에서는 작은 놈들을 신나게 패고 있는데, 구원투수라고 나온 놈들도 작고 연약하니 샌드백이 늘어났을 뿐이다. 그런 탓에 아가노급 경순양함의 전과도 역시 처참해서, 2번함 노시로가 미군의 호위항공모함 갬비어 베이를 공동 격침했고, 3번함 야하기가 레이테 만 해전에서 구축함 1척을 공동 격침한 게 끝.
오요도급도 마찬가지로 오요도 1척만 만들어진데다가, 트러블이 속출했고 앞서 항공전함에서 설명했듯이 함재기도 거의 없어서 사실상 전투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리고 일본군이 개발한 가장 강력한 경순양함용 무장인 3년식 60구경장 3연장 155mm 주포탑은 오로지 요요도급 1척만 탑재가 가능했다. 애초에 이 물건은 성능은 뛰어났으나 2연장 8인치 주포탑과 환장이 가능할 정도로 크기가 크기 때문에 기존의 경순양함에는 장착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모가미급 중순양함이 주포탑을 환장하면서 남은 주포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요도급 1척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야마토급 전함의 부포탑용으로 사용된 것이다.
결국 일본의 경순양함들은 미국과 영국의 대형 경순양함들에게 압도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체급과 성능에서 비교할 필요도차 없을 정도로 모두. 그래서 일본의 중순양함이 업무 과부하로 고생을 많이 했다.
6.3. 전과
개별적인 전과를 기재하지 않는 것은, 일본군 경순양함이 태평양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능과 수량에서 미군에게 크게 밀리니 샌드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해군의 교리상 해전에서 제일 앞서서 소모된 것도 한몫했다.그나마 미끼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경순양함은 센다이급 2번함 진츠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위에 기술한 대로 불리한 싸움을 강요당하다가 침몰해갔다. 전후까지 살아남은 경순양함은 카토리급 연습순양함 2번함 카시마, 전쟁에 나갈 기회도 없었던 아가노급 경순양함 사카와,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키타카미 정도다.
7. 구축함
츠바메급 어뢰정과 무츠키급 구축함 | 유기리급 구축함 | 카게로급 구축함 8번함 유키카제 |
일본군 구축함 손실원인 1941-1945 | |||||
함급(척) | 수상함 | 잠수함 | 항공기 | 기타[21] | 생존 |
미네카제급(13)[22] | 0 | 7 | 1 | 0 | 5 |
카미카제급(9) | 0 | 4 | 2 | 1 | 2 |
무츠키급(12) | 1 | 1 | 10 | 0 | 0 |
후부키급(23)[23] | 4 | 8 | 7 | 2 | 2 |
하츠하루급(6) | 0 | 1 | 4 | 1 | 0 |
시라츠유급(10) | 3 | 5 | 1 | 1 | 0 |
아사시오급(10) | 4 | 2 | 4 | 0 | 0 |
가게로급(19) | 5 | 4 | 6 | 3 | 1 |
유구모급(19) | 4 | 4 | 9 | 2 | 0 |
시마카제급(1) | 0 | 0 | 1 | 0 | 0 |
아키즈키급(12) | 3 | 1 | 1 | 0 | 7 |
마츠급(18) | 2 | 2 | 1 | 2 | 11 |
타치바나급(14) | 0 | 0 | 2 | 1 | 11 |
합계 | 26 | 39 | 49 | 13 | 39 |
일본군은 함대결전에 대비하여 구축함을 보조전력으로 육성했고, 덕분에 적함에 대한 어뢰공격 능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전쟁 초중반기 연합군 해군을 상대로 위협적인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대잠 능력과 대공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즉, 이름은 구축함이지만 대형 어뢰정에 가까웠던 것.
7.1. 대공능력 부족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은 항공모함에서 함재기를 출격시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의 구축함은 여기에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원래 구축함처럼 작은 함선은 주포도 대공용으로 사용하도록 양용포를 탑재하는 것이 좋은데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얼핏 생각하기에는 양용포로 하면 대함 공격력이 약화될 것 같지만 구축함 이하의 함선들은 목적과 기술력, 자금의 한계상 대응방어를 포기했으므로 5인치급 함포면 평사포건 양용포건 간에 철갑탄만 쓴다면 모든 구축함의 장갑을 뚫을 수 있었다. 그리고 관통력이 높은 5인치 장포신 평사포라도 대형 경순양함 이상의 함선에게는 이빨이 박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고, 설령 천운으로 장갑을 관통해도 탄약고 같은 최중요구획이 아닌 이상 상대방에게 피해를 제대로 주지 못한다. 게다가 구축함 이하의 함선들이 서로 전투를 벌일 경우에는 서로 고속으로 근접하면서 동시에 회피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포탄과 어뢰를 난사하게 되는데, 이런 전투에서는 발사 속도가 빠르고 화기 관제가 우세한 쪽이 전투에서 유리하다. 그러므로 구축함의 5인치급 함포에 한해서는 양용포가 평사포보다 더 유용하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점을 무시했다. 특히 도쿄제국대학 총장이기도 했던 히라가 유즈루 중장이 1930년대 초에 구축함의 주포를 대공-대수상 양용포로 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낸 것이 결정타였다. 일본의 함대형 구축함들이 사용한 3식 12.7cm 50 구경장 함포 같은 5인치 포들은 앙각이 75도로 높긴 했지만 대함(大艦)공격만 생각하고 주퇴기의 거리가 긴 평사포(캐논)를 채택하고 장전 방식도 인력 위주라서 장전시마다 포신을 다시 수평에 가깝게 내려야 하고 재장전 후 다시 조준을 해야 하는 등 방공전에 필요한 대량의 포탄을 고속으로 사격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리고 75도가 높기는 하지만 대공용으로 쓰기에는 여러 모로 아쉬운 각도기도 하다.
게다가 이 보고서가 나온 얼마 후에 89식 12.7cm 40 구경장 함포같은 5인치 대공포를 전함과 항공모함의 대공포로 장비하기 시작했는데 해당 대공포를 약간 개수해서 구축함에 달아주면 위에 언급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함 공격력이 약화된다고 계속 튕기다가 전쟁 말엽에 가서야 마츠급 구축함에 5인치 대공포를 주포로 달아주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의 대공포도 심각하게 수준 미달이었고, 구축함 같은 보조함선에는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일본군 기준에서도 엿같은 구식 대공포를 수량도 부족하게 배치하는 바람에 대공 능력은 국제적인 기준에서는 사실상 없다시피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아키즈키급 구축함(1942)를 만들었으나 일반적인 일본의 구축함보다 큰 녀석을 전시에 양산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주포겸 대공포인 98식 10cm 65구경장 함포의 2연장 고각 포탑은 예시 비싸고 제조하기 어려운데다가 포신 수명도 짧고 대공전용이라 철갑탄이 없어서 대함 공격에 큰 지장이 온다. 대공 사격의 경우 다른 일본군의 함선보다는 양호했으나 레이더 성능도 낮고 레이더 연동 사격관제도 불가능하므로 객관적인 효율성은 떨어졌다.
7.2. 대잠능력 부족
미군 잠수함의 공격에도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대잠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소나같은 잠수중인 잠수함을 찾아내는 물건도 수량이 부족한데다가 성능이 떨어지고, 간신히 잠수함을 찾아내더라도 폭뢰 같은 공격 무기의 성능과 수량이 모두 부족한 상태라서 제대로 잠수함을 공격하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군의 귀중한 배를 호위해야 할 구축함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함대결전을 위한 대형 수상함 확보와 보조함 숫자 불리기에만 집착했던 일본 해군은 기초적인 잠수함 탐지도 못 해내고 미국의 잠수함들에게 불시의 습격을 당해 차례차례 가라앉기 시작했다.위의 문제 때문에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는데 구축함이 잠수함에게 사냥당한다. 이건 사냥꾼이 사냥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상기 서술된 대잠 능력 부족 때문에 이게 현실화된 것이다. 심하면 일본의 항구까지 귀환한 후, 잠수함에게 공격받은 부위를 수리한 다음에 다시 출항한 일본군 구축함이 바로 항구 앞바다에서 매복한 미국 잠수함에게 어뢰 공격을 받고 박살난 후 간신히 살아서 항구로 귀환한 후에 다시 도크에 처박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구축함 때려잡는 역상성 잠수함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가토급 잠수함들 중 그라울러는 가토급 잠수함 4번함으로 첫 초계 항해부터 혼자서 제18 구축대를 조져버린 잠수함 이다. 그 외에도 구축함 시키나미, 해방함 히라도를 격침시키는 공적을 세웠으나, 최후에는 구축함 시구레, 해방함 치부리 및 제19호 해방함으로 구성된 호위함대의 대잠 공격으로 추정되는 공격에 의해 격침되었다. 가드피쉬도 역시 같은 가토급 잠수함으로 일본 구축함이 미국 잠수함을 선제 탐지하여 어뢰를 쏘거나 폭뢰를 투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잠수함이 이를 유유히 피하고 오히려 역으로 구축함을 격침시킨 사례도 발생했다. 하더는 가토급 잠수함 46번함으로 하야나미, 미나즈키, 타니카제, 마츠를 격침시켜 구축함 킬러로 악명을 떨치던 잠수함이었다. 구축함 외에도 자매함 하도(SS-255, Haddo)와의 공동 전과이긴 하지만 대잠 해방함 3척을 동시에 격침시켰고 그로 인해 한때 일본군의 대잠 초계전력에 큰 구멍이 생겼을 정도로 맹활약했다. 다만 이 하더도 최후에는 다른 해방함인 제22호 해방함에 의해 격침당했는데 얄궂게도 그 자리에 제22호 해방함과 함께했던 배가 일본군에 의해 노획된 미국의 평갑판형 구축함인 스튜어트(제102호 초계함)였다. 이런 역상성 잠수함을 잡기 위해 일본 해군에 더 많은 피해가 오기까지 한 것도 큰 문제였다.
7.3. 전과
그래도 부족한 성능을 승조원을 갈아가면서 전쟁 초중반에는 큰 능력을 발휘한 것이 일본 해군 구축함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타사파롱가 해전이고 콜롬방가라 해전처럼 야간전에 산소어뢰를 쏘는 경우에는 상당한 활약을 했다.하지만 도쿄 익스프레스처럼 일본에 쓸만한 고속 수송선이 없고 제해권 확보가 안된 상황에서 구축함을 수송선으로 사용하는 등의 운용상 문제점이 일어나면서 수송작전중에 격침당하는 사례가 슬슬 늘기 시작하더니 야전에서 미군이 레이더를 개량하고 야전 기술도 적에게 근접하지 않으면서 원거리에서 포탄의 비를 뿌리고, 구축함들도 2곳에 매복해서 한 쪽은 어뢰 발사 후 회피하고 어뢰가 목표에 명중할 쯤 다른 쪽이 레이더 관제사격을 가하는 등 미군이 야전에서의 능력을 향상시키자 그 뒤로는 손실이 늘어나면서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함의 특성을 무시하고 야간에 수뢰전에 투입하는 등의 이상한 고집도 큰 문제였다. 아키즈키급 구축함은 원래 대공방어를 전담해야 하므로 함종도 직위함(直衛艦)으로 설정해서 구축함이 아님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만일 구축함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일본의 높으신 분들이 경직적이고 답정너식 사고방식에 맞춰서 궤변을 동원해서라도 수뢰전에 투입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의 높으신 분들은 기어이 아키즈키급을 구축함으로 재설정하고야 말았다. 덕분에 아키즈키급 구축함은 산소어뢰를 강제로 탑재하고 야전에 끌려가서 말 그대로 개박살나서 허무하게 침몰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8. 어뢰정과 해방함
해군에서 구축함보다 작은 함정들도 여러가지 업무를 담당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들은 구축함보다 작기 때문에 적 함대와 싸우는 업무는 거의 담당하지 않으며 지역 경비, 대잠, 소해, 연락등 다양한 보조업무를 담당하면서 주력함대를 돕고 해군의 전체 업무가 잘 돌아가도록 한다.하지만 일본 해군의 경우에는 어뢰정도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에 맞추어서 특화했으며 이에 따라 배수량이 수백톤 이상인 수뢰정과 그 미만인 어뢰정으로 세부항목이 분리되었고 개함우월주의에 따라 배수량에 걸맞지 않게 무장을 증대시키다가 무게중심이 상승해서 토모즈루 사건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타국 해군의 소형함들이 담당하는 주요 업무는 해방함이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해방함은 1898년에 해안선 방어 목적으로 구형 군함들을 모아서 이름만 변경한 것인데 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구축함에도 보유할 수 있는 배수량 쿼터가 정해지면서 구식 구축함들도 함대결전 전력으로 복귀하는 바람에 빈자리를 채울 소형함을 만들어서 해안선 방어 외에도 대잠, 소해등의 잡다한 업무를 담당할 군함을 만들자고 했고 그 이름으로 해방함을 선택한 것이다.
이 때까지 노후함이나 퇴역함을 해안경비로 써먹던 기존의 해방함은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까지도 존재했다. 그러니까 시무슈형이 건조된 이후 기존의 해방함이 모두 제적될 때까지 해방함이 두 종류 존재했던 셈이다. 이런 기존의 해방함들은 1942년 7월 20일 분류가 해방함에서 연습특무함 등으로 바뀌면서 해방함은 해방함이 해안경비와 선단호위를 목적으로 설계된 전용함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1937년 시무슈(占守)형 4척의 건조가 결정되고, 여기에 더해서 일본은 태평양전쟁 개전 이전부터 남방자원지대와 본토를 잇는 해역의 확보와 수송선단의 호위를 위해 전용함을 건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미 해안경비에 쓰이고 있던 시무슈형을 선단호위에 맞게 개량하여 이를 충당하기로 한다. 새로 건조되는 호위함은 1941년 전시응급조함계획에서 30척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에서 어뢰정과 해방함은 모두 전황에 걸맞지 않은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어뢰정의 경우에는 전장이 광활한 태평양 한복판으로 나아가면서 원양항해 능력이 미약하고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사실상 무용지물로 전락해버렸다. 과달카날 전역같이 섬과 섬 사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전장도 있었으나 대공능력이 빈약하여 항공기 공격에 취약한 관계로 대발동정 호위같은 제한적인 임무만 수행가능하였다.
차라리 이쯤가면 후술하겠지만 해방함이 모자라니 어뢰정을 고속성능을 갖춘 해방함으로 용도전환하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지만 끝까지 어뢰정으로 사용하다가 허무하게 공습으로 상실하는 길을 걷고 만다.
해방함의 경우에는 애초 생성 목적부터 일본 해군 기준에서 잡다한 일을 담당하라고 만든 함선이기 때문에 담당한 업무에 걸맞은 성능을 가지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서 부차적인 임무라고 여겨지는 바람에 전쟁 초반까지 생산량도 적었으며 나중에서야 마구 찍어내게 되지만 전황악화로 인한 물자부족등의 원인으로 성능들이 더 안좋아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미국의 잠수함을 잡기에는 숫자도 얼마 안되며 속도도 느리고 대잠용 무기와 음파탐지기도 빈약하다는 엄청난 약점을 보이면서 오히려 미국의 잠수함에게 잡혀버리는 등 희생이 엄청났다.
일단 전쟁 전에 건조한 해방함의 숫자가 크게 부족하고 나중에서야 마구 찍어내기 시작하지만 탑재할 디젤엔진 동력기관이 잠수함도 많이 사용하는 관계로 크게 부족해서 구식 증기터빈 등의 대체품을 조달하는 등 때를 못맞춰서 1942년에 해상호위총사령부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호송선단 1개마다 해방함 2 ~ 3척이면 많은 셈이고 심하면 1척만 호위해서 잠수함에게 중과부적으로 자주 털렸다. 심지어 호위선단에 다이요(항공모함)같은 경항공모함에 대잠초계용 B5N을 탑재한 상태로 넣어서 일본 기준에서는 강력한 호위선단을 구성한 상태에서도 해방함이 미국 잠수함을 못막아서 경항공모함이 미국 잠수함의 뇌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어느 정도 숫자를 확보했더라도 최고속력 17노트 안팎에 불과한 느린 속도부터 매우 큰 문제로 작용했다. 이는 미국 해군 주력잠수함인 가토급 잠수함이나 발라오급 잠수함의 수상최대속력보다 느린 것인데 이렇다보니 미 잠수함이 히트 앤 런을 걸어와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선단을 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여기에 93식 수중탐신의 같은 폐급 음파탐지기만 주력으로 보유했고 3식 수중탐신의 같은 개선된 물건도 별로 성능이 안좋았으며 1944년에나 탐색능력 강화를 위해 레이더를 장비했는데 1호 3형(13형)과 2호 2형(22형)의 두 종류가 있었으며 대공용의 13호 전탐은 후부 마스트에, 대수상 탐색용의 22호 전탐은 전방부 마스트에 장착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수준낮은 레이더 덕분에 잠수함이 수면 위로 부상하던 수중에서 잠수하건 간에 제대로 포착하지 못해서 선제공격을 쉽게 당했다.
대잠용 병기도 폭뢰만이 주력이어서 빈약했고 나중에서야 함수에 8cm 박격포(97식 곡사보병포/3식 81미리 박격포)를 장비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그나마 일본 해군 구축함보다 폭뢰의 탑재량이 많고 한번에 폭뢰를 뿌릴 수 있는 투사량도 많으며 폭뢰발사기도 장비했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잠장비만 보유하기에도 배수량이 모자라서 다른 무장이 빈약하여 공습에 쉽게 당한다는 점도 문제였다. 보통 5인치급 고각포 2문 정도에 96식 25mm 고각기총 10문에서 20문 사이의 무장으로는 적의 공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여기에 다용도성을 살린다고 소해장비까지 갖추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어쩡쩡한 배가 된 것도 상당한 문제점으로 작용했다.
8.1. 전과
일단 어뢰정과 해방함의 종류는 다양했다. 어뢰정은 치도리, 오오토리급 어뢰함, 갑형 어뢰정, 을형 어뢰정 등이 있었고 해방함은 시무슈형 4척, 에토로후형 14척, 미쿠라형 8척, 히부리형 9척, 우쿠루형 20척, 제1호형 해방함 56척, 제2호형 해방함 67척 등이 있었다.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어뢰정은 사실상 전과가 없다시피했고, 해방함은 제대로 대잠작전을 못해서 미국 잠수함을 막지 못한 결과가 매우 끔찍하게 돌아온다.
일본의 전략 물자 수송량은 1942년에 석탄 875만톤, 철광석 488만톤, 정제한 석유 927만 배럴이었으나 1943년에는 석탄 603만톤, 철광석 367만톤, 정제한 석유 1456만 배럴이고 1944년에는 석탄 314만톤, 철광석 167만톤, 정제한 석유 704만 배럴로 점점 감소하기 시작한다. 식량과 기타 전략물자를 합한 수송량도 1943년에 1640만톤에서 1944년 1000만톤으로 감소한다.
일본이 보유한 수송선박도 총톤으로 기준하면 1942년 11월에 594만톤, 1943년 12월 494만톤, 1944년 3월 396만톤, 1944년 10월 291만톤, 1945년 4월 196만톤 식으로 급격하게 감소해서 상선보유량이 대략 33% 수준으로 급감한다.
이렇게 일본의 수송라인이 차단당하는 동안 해방함도 잠수함과 공습에 시달린 결과 결국 173척의 해방함 가운데 71척이 격침당했고 1만명 이상의 승조원이 전사했다. 그나마 일본군의 어그로를 끌던 미국 네임드 잠수함 몇 척을 노력끝에 잡아내긴 했지만 이것도 다른 지역을 포기하고 전력을 집중해서 공격한 결과였고 희생도 발생했다는 점에서 자랑할만한 공적이라고 보기에는 좀 모자란다.
9. 잠수함
일본군 잠수함들은 이 항목에서 예외적으로 굉장히 괜찮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고 일본에서는 자화자찬했다. 일본군이 잠수함은 물론 유보트와 비교할 만큼은 아니지만 일본군의 히든카드 산소어뢰로 무장한데다가 태평양에서 사용하기 적절한 매우 긴 항속거리, 수상 항해시 안정성을 높여주는 덩치, 깊은 물 속에서도 안전하게 작동하는 어뢰 발사관, 매우 훌륭한 승무원 복지 등 성능으로는 결코 타국의 잠수함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으며 자동 현적장치라고 해서 일종의 중량 보상탱크를 통해 잠수함이 항해를 하면서 소모하는 연료 등으로 손실된 중량을 해수로 대신 채워넣어 일정심도를 유지하게 하여 잠항 심도 유지를 가능케 하는 장치도 있는 등 상당한 부분에서 다른 잠수함보다 위에 있었다.
하지만 뒤에 언급하는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그 훌륭한 성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 큰일이었다.
9.1. 임무 부여 실패
일본군이 잠수함을 보는 시선은 러일전쟁 당시의 어뢰정의 연장선이었는데, 당시 어뢰정들이 야음을 틈타 항구에 모여있던 러시아 함대에 기습 어뢰 공격을 가해 상당한 활약을 했던 것에 기인한다. 여기서 재미를 꽤 본 일본군은 이후로도 어뢰정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망망대해인 대양에서 그것도 움직이는 상대를 대상으로는 어뢰정이 썩 효율적이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문제는 잠수함 역시도 이 연장선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 줄로 요약하면 잠수 기능 넣은 어뢰정이 적 전함 박살내는 걸 기대한 거다. 저 거대한 선체는 원양으로 나가서 적 전함을 수색하고 직접 공격하기 위한 충분한 물자 탑재를 목적으로 설계되고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초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유보트가 잠수함은 통상파괴전에 적합하다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 물론 독일이 이후 잠수함들을 통상 파괴에 집중하여 연합군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유보트 때문에 고생했던 영국은 통상 파괴뿐 아니라 잠대잠 임무까지 염두에 두고 잠수함을 설계하여 잠대잠 전투에서도 매우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 결과 유보트 상대로 손실 비가 6:1에 가까우며 V급 잠수함의 벤튜어러는 특이한 기록도 하나 세웠다. 지중해에서는 추축국 수송 선단의 씨를 말려버리는데 한몫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통상 파괴뿐 아니라 물자 수송, 정찰, 조종사 구출, 대잠 임무, 적 주력함 공격, 기뢰 부설등 각종 임무에 투입하였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 잠수함들은 잠수함이 적합한 임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개고생을 하게 된다.
9.2. 잠항능력의 미흡
일본 잠수함은 완전 잠항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순잠형 기준 70~90초, 해대형 기준 70~80여초, 로급 기준 60~65초정도로 매우 길고, 크기와 무게 중심 때문에 급격히 잠항하려 하면 재수 없을 경우 그대로 회복력을 잃고 지옥까지 다이빙해버릴 수도 있었다.현대의 잠수함들에게 큰 중요성을 차지하지는 않으나 2차대전기 잠수함들이 왜 잠수 완료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느냐면, 우선 2차대전기 잠수함들은 현대의 잠수함들마냥 항상 물 속으로 잠수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오히려 꼭 필요할 때만 잠시 잠수했다가 다시 부상하는 가잠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하며 배터리 충전 등을 위해서 상당 시간을 부상한 상태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갑작스레 구축함이나 대잠 초계함 등의 기습 공격을 받으면 거진 신나게 두들겨 맞거나, 심하면 들이받힐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잠수함 입장에서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대잠 초계기라도 날아드는 순간 데꿀멍을 시전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감안해야 했다.
실제로 독일이 전쟁 초반에 700톤급 잠수함을 주로 사용한 이유가 잠항 속도나 수중에서의 균형 회복 등을 따져봤을 때 저 정도 잠수함이 가장 적절했고, 개전 이전에 조약으로 배수량 제한 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들 덕분에 VII형 유보트의 경우 실전에서 급속 잠항시 17초가 걸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잠항능력을 기록했으며 그 위의 체급을 지닌 잠수함은 소수의 원거리 작전용 잠수함 및 대양에 나간 다른 유보트에게 물자 보급을 담당하는 보급선이었다.
미군 잠수함 역시 덩치가 크고 잠항 속도가 다소 둔한 단점이 있지만, 광대한 태평양에서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대형화는 불가피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기술력은 충분했기에 개량을 거치고 승조원의 훈련을 강화하여 가토급 잠수함 기준으로 급속 잠항에 걸리는 최소 시간이 30여초여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프랑스 해군의 르두터블급이 35초, 소련의 S급 잠수함이 20초, K급 잠수함이 65초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미국 잠수함들의 큼직큼직한 덩치에 비해 상당히 빠른 속도인데 애당초 가토급을 위시한 미국 잠수함들은 대공 레이더와 수상 레이더를 탑재해 조기에 일본군 항공기나 군함을 탐지하고 미리 잠수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그나마 있는 단점들도 묻혀버렸다(...).
일본 잠수함의 형편없는 잠수 완료 시간의 원인은 잠수함의 덩치에서 오는 무식하게 큰 용량의 밸러스트 탱크와, 덩치에 비해 형편없을 정도로 작게 뚫어놓은 자유 충수구역 배수구였다. 본디 배수량이 다소 큰 잠수함의 경우에는 덩치에 걸맞게 밸러스트 탱크 역시도 덩치가 커지게 마련이었고, 그에 따라 잠수시에 유입을 시키는 해수가 밸러스트 탱크 안에 차는 시간이 덩치가 다소 작은 잠수함들에 비해 늦기 때문이다.
즉, 덩치에서 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고 일본 잠수함은 타국 잠수함들에 비해 훨씬 더 용적이 넓은 밸러스트 탱크로 인해 그만큼 충수 완료가 늦어지게 되고, 또한 쬐끄만하고 그닥 효율적이지 않은 배수구와 그 위치까지 더해진데다가 타국 잠수함에 비해 상수까지 커져서 잠수 완료 시간은 시궁창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뢰나 기관등의 중량물 배치, 효율적인 밸러스트 탱크 설계가 뒷받침되어야 했고 물론 이 문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라 복층식으로 배수구를 뚫어보는 시도도 해봤지만 잠수하면서 가장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야 할 선수 부력 탱크의 배수구 크기는 제일 쬐끄만하다. 아니, 없는 경우도 있다.
덩치에 의해서 오는 단점들중 다른 하나로는 잠수 완료 후에도 잠항이나 부상각 등에서 제한이 온다는 것인데, 전후 미 해군 보고서에 따르면 안정적인 심도 도달을 위한 잠항각은 좋아봐야 15도 정도가 한계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U보트가 보통 25도는 우습게 내려가고, 실전 기록에 따르면 56도[24]라는 제정신 나간 잠항각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판국.
일본의 적국인 영국, 미국, 소련의 사례를 잠깐 들자면, 윗 사진에 나온 영국 해군 T급 잠수함의 경우에는 극한의 잠수 완료 시간을 얻어내기 위해서 선체 측면의 배수구를 아예 일렬로 큼직큼직하게 뚫어버렸고 이런 배수구의 형태는 현대 서방권 잠수함들은 기본 사양으로 가지고 있는 형태가 될 정도로 유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선수 부분의 필요없는 자유 충수구역에 외부 어뢰 발사관을 추가해버려 자체적인 화력 강화도 꾀함과 동시에 전방 상부갑판을 상당수 절단 해버리고 폭 역시도 좁혀버려 실질적인 자유 충수구역의 용적을 줄여버리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근 20~25초 사이의 신속한 잠수 완료 시간을 얻어냈다. 이에 따른 반대급부로 수상 항해시 갑판 위는 수시로 물바다가 되고 수상 항해시의 안정성이 떨어졌지만 그걸 감수하고도 급속잠항이 필요성이 더 컸기에 넘어갔다. U보트도 이런 것을 감수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외부 어뢰 발사관의 형태가 문제인데, 빨리 잠수할 수는 있어도 수중 저항을 상당히 만들기 때문에 수중 속력에서는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한다.
미국의 가토급 잠수함의 경우 역시도 초창기에는 단일 배수구로 뚫어놓고 있었지만 오버홀 작업을 거치거나 태평양 전쟁 중반기에 건조된 잠수함들의 경우에는 배수구를 아예 선체 상부갑판의 선미까지 대놓고 일렬로 뚫어버렸고 발라오급 잠수함의 경우에는 복층으로 배수구를 많이 뚫어버리기도 했다. 선수 부력 탱크 배수구 역시도 적절한 위치에 큼직큼직하게 잘 뚫어놨으며 함교 내의 여분 공기가 남아 잠수 완료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감안해 함교 양 측면에 승무원 통행로 겸 함교 배수구를 뻥 뚫어버리는 노력을 기울였고 심할 경우 일부는 아예 함교 바로 앞에 이런 출입구를 내버리는 비범함을 선보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선수 방향으로 상당히 몰려있는 밸러스트 탱크 위치로 인해 그 큼직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최단 30초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길수 있었다. 덩치 자체에서 오는 한계를 각종 꼼수로 해결한 셈.
소련의 실질적 주력인 S급의 경우 본래 설계 자체가 독일 U보트의 배다른 자매다. 그래서 U보트에서 흔히 볼수 있는 옆으로 늘려진 형태의 배수구를 가지고 있는데, 선수 부분부터 선미까지 쭈욱 잘 뚫어놓은데다가 간격이 매우 촘촘하다. 거기에 잠수함 자체의 비교적 작은 덩치까지 합해졌고 밸러스트 탱크가 압력선체 쪽으로 많이 파묻혀버린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실질적인 밸러스트 탱크의 용적 자체도 줄은 편이고 상부갑판의 넓이 역시도 좁은 편이기에 S급 역시도 25초 정도의 괜찮은 잠수 완료 시간을 기록해내고 있는 판국.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선수 배수구가 뚫려있지 않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나 애당초 갑판의 넓이가 저렇게 좁으니 개선을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테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는 못 느꼈을 듯 하다.
이렇듯 일본 이외의 나라들이 누가 더 빨리 대가리를 박느냐를 가지고 미친듯이 짱구를 굴리고 있을 동안, 일본은 정말이지 엉뚱한 구석에서 투자를 하고 있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물론 일본군도 눈이 없는 건 아니고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기에 순잠형 잠수함들의 경우에도 영국의 T급 잠수함이나 미국의 가토급과 유사한 일직선의 배수구를 화끈하게 뚫어버리고 배수구 역시도 복층으로 뚫은 과감함은 선보였으나 여전히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야 할 선수 부분의 배수구는 쬐끄만하거나 아예 안 뚫려있다! 센토쿠급의 경우 이런 한심했던 잠수 완료 시간에 대한 반성이 반영되었던지 40초라는 대기록을 세워서 사실상 일본 잠수함들중 제일 빠른 기록을 세우긴 했으나... 센토쿠급이 언제 실전 배치되었는지 잘 생각해보자.
잠항 심도는 유보트보다 크게 떨어져서, 저 덩치에도 불구하고 안전 심도는 100m 정도다. 일본군은 양호한 잠수 심도라고 했지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셈이다. 심지어 몇몇 함선(로급(이(1등)로(2등)하(3등) 잠수함)은 75m 미만이라는 기가 막힌 잠항 심도를 자랑했다.
낮은 심도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는 선체 접합의 상당수가 리벳 접합식이라는 것이 원흉이 되었고 일부 구획에서나 제한적으로 용접 접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 때문에 전후 미 해군이 노획한 일본 잠수함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합판 이탈 및 누수가 수시로 기록되었다고 평가했다.
예시를 들자면 당시에 활약했던 독일군 유보트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7형은 230미터까지 잠수 테스트를 했고, 설계 상으로는 최대 250 ~ 295m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U-boat가 나오는 영화에서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더 잠수한다'라며 최대 잠항 심도 이하로 내려가는 장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며, 실제로 비상 잠수를 통해 적의 폭뢰 공격을 피한 사례가 많다. RO-11역시 유보트와 동급의 700톤급 잠수함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술력의 차이가 엄청난 셈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깊게 잠수할 수 있는 유보트도 대잠 세력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 손실이 많았는데, 그보다 더 느리게 잠수하고, 얕은 심도만 유지 가능한 일본군 잠수함이 문제가 없다는 말은 한 마디로 말해서 모순이다. 그나마 일본군의 2등 잠수함들은 유보트와 비슷한 중~소형 체급에 잠항 속도 하나만큼은 빨라서 이들을 추적하던 영국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잠항 심도가 저 꼴이었기 때문에 폭뢰에 극도로 취약해서 결국 생존률은 거기서 거기였다. 더더욱 끔찍한 것은 수중 항해시의 선회력이 정말 형편없었다는 점이었는데, VII형 유보트 기준으로 7노트 속력으로 항해시 360도 선회하는데에 280초가 소요되어 대전기 잠수함들중 가장 민첩한 편이었으나 그나마 작은 편인 로급의 경우 비슷한 조건에서 '10분이 소요되었고, 순잠형들은 12분을 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적인 미군의 주력 잠수함 새먼급 잠수함의 경우도 75m를 기록했으며 가토급 잠수함도 안전 심도가 90m였다는 점이지만, 실전에서는 새먼급의 경우 폭뢰로 손상을 입고 176m까지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른 기록이 남아있으며 가토급의 경우 120미터까지 내려가서 폭뢰를 피한 사례가 있는데다 복원성이 좋아서 잠수하다가 회복력을 잃고 지옥으로 다이빙한 일은 없었다. 또한 신뢰성과 정비성도 매우 좋다는 장점도 있다.
9.3. 정숙성
커다란 덩치로 인한 정숙성 저하가 이호 잠수함들의 약점이었는데 떨어지는 급속 잠항 능력, 그리고 초기형 이호들의 별로 깊지 않은 잠항 심도와 안 좋은 시너지를 일으켜 조용하고 은밀하게 적을 괴롭혀야 할 잠수함이 타국의 것에 비해 쉽게 위치가 들통나버렸다. 이는 정말 큰 문제였는데 왜냐면 수상 전투력이 형편없는 잠수함은 수상 주행중에 적함이나 적 공군기에 발견되면 최대한 빨리 깊이 잠수해야 한다. 그런데 긴급 잠수 시간도 한세월 걸리고, 기껏 잠수해 봤자 잠항 심도가 뻔한 관계로 폭뢰 공격을 피해 도망치기도 쉽지 않은 일본군 잠수함은 전쟁 말기엔 대부분이 격침당해 주력 잠수함이던 순잠 을형의 경우 단 두 척만 살아남을 정도였다.그럼 미군 잠수함의 정숙성은? 아래로 내려가면 미군의 격침 전과가 나오니 그걸 참고하자.
9.4. 어뢰 탑재 수량 부족
일본군 잠수함은 어뢰 탑재량이 많아봤자 12~20발 정도로 덩치에 비해 굉장히 모자랐단 것도 단점이다. 동시기 미국의 주력 잠수함인 가토급은 일본의 1등 잠수함보다 한 체급 낮은(2,424t) 잠수함이면서도 24발. 이는 구조 자체가 어뢰를 탑재하기 어려웠던 점과 산소어뢰의 비대한 크기가 원인이었다.그나마 품질 면에서는 일본군의 어뢰가 미군 어뢰보다 뛰어났다. 미군의 어뢰가 어뢰 스캔들로 인해 워낙 형편없는 성능을 자랑했기에 탑재량은 부족해도 전투력은 오히려 비슷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군도 어뢰의 문제점을 알고 성능을 개량했고, 전쟁 후반기에는 상당히 우수한 성능의 어뢰를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자랑이었던 산소어뢰의 경우 매우 뛰어난 속도와 성능을 자랑했지만 유폭 가능성이 높다. 화력을 위해 안정성을 갖다 버린 설계라서 실제로 산소어뢰 유폭때문에 가라앉은 네임드 일본해군 함선들이 몇척 있다.
9.5. 잘못된 목표 지정
일본 해군은 잠수함 어뢰에 함급 할당량이 있었다. 10개의 어뢰가 있으면 6개는 전함에, 3개는 순양함이나 구축함에, 남은 1발은 수송선에 사용하도록 규정해둔 것인데... 당시의 어뢰는 직진 어뢰가 대부분이고 유도 어뢰도 개발 단계인지라 현대와 같은 정밀한 유도 어뢰가 아니므로 동일 목표에 2-3발 사격은 기본인데다가 아무리 수송선이라도 단 1발의 어뢰만 맞았다고 격침되는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으므로 사실상 수송선에 대한 공격은 안중에도 없는 셈이다. 이건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대상으로도 적용할 수 있는데, 어뢰 3발로 순양함 한 척을 끝장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일본군의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는 USS 데이스가 쏜 6발의 어뢰를 모두 피했고, 중순양함 아오바는 대파 상태에서 7발의 어뢰를 모두 피했다. 이 사건은 아오바가 세 번째로 대파된 후,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에 벌어진 일이다. 아오바가 7발의 어뢰를 피했다는 것은 일본측 주장이지만, 아오바가 속한 수송선단에 23발의 어뢰가 날아왔고 아오바가 한 방도 안 맞은 건 사실이다. 일본군이 할 수 있다면 미군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므로, 함급 할당량을 정한 건 일본군의 큰 실수였다. 유도 어뢰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상 2차대전기에 유도 어뢰를 실전 배치한 국가라 해봐야 독일과 미국뿐이었고, 그다지 신뢰성도 높다고 볼 수 없었다.반면 미군은 일본 군함보다는 수송함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그 결과 일본의 수송라인은 전쟁 후반에 완전히 끊어졌다. 개전 초반에도 수송함들을 적극적으로 노렸지만 성과가 매우 적었는데 이는 잠수함의 문제가 아니라 어뢰의 문제로 당시 미 해군 잠수함대 수병들과 뇌격기 조종사들 사이에서 악명 높던 어뢰 스캔들의 원흉, Mark-14 어뢰와 Mark-13 항공 어뢰 때문이다. 덕분에 어뢰의 문제점을 해결할 때까지 한동안 잠수함이건, 뇌격기건 일본 해군 군함만 만났다 하면 어뢰는 일단 뒤로 미루고 잠수함은 덱건, 뇌격기는 수평 폭격으로만 일본 해군 군함들을 상대했을 정도다! 당시 미 해군 잠수함대의 "만일 병기국에서 어뢰를 똑바로 안 만들어줄 것 같으면 우리 잠수함대는 함선국에 요청해서 어뢰 대신에 함선을 잡아 끌어당겨 구멍을 낼 갈고리 장대를 내놓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이나, 뇌격기 조종사들의 "효과도 없는 어뢰 쓰느니 차라리 철갑탄이나 쓰련다." 같은 불평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런 꼴을 보다 못한 독일군은 "미군의 수송선을 공격하라"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히 합리적인 충고를 해줬지만 멍청한 일본군은 그 충고를 듣지 않았고 미군 잠수함을 막지도 못했다. 게다가 대본영이나 군령부, 연합함대만 그랬으면 이해를 하겠는데, 일선에서 군함을 이끌고 싸우는 장교들도 이런 개념을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단 널리 알려진 것과 다르게 일본군 잠수함이 수송함을 기피하진 않았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순잠 을형 에이스인 기니시 타카이시 중좌만 해도 12척의 수송선을 격침시켰고 과달카날에서도 급유함들이 격침당해 미군의 해상작전이 중지되는 일도 있는 등 결코 그 잠수함을 다루는 이들이 수송함의 위험성을 모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유보트들과 다르게 전쟁 후기에도 자신들의 장점을 살려 연합군 함선들을 격침시키는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25] | 잠수함 보유수 | 잠수함 상실수 | 손실률 | 잠수함 격침전과척수 | 잠수함 격침전과톤수 |
독일 | 1,210 | 752 | 62.14% | 2,000 | 14,500,000 |
미국 | 298 | 47 | 15.77% | 1,150 | 4,860,000 |
영국 | 228 | 71 | 31.14% | 493 | 1,500,000 |
일본 | 182 | 130 | 71.42% | 170 | 1,000,000 |
일본은 잠수함 손실률이 가장 높은 주제에 전과가 가장 적다. 제대로 된 해군도 없고 공군의 지원도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연합군의 대잠 전력에게 잠수함만으로 부딪치는 계란으로 바위깨기를 한 유보트보다도 손실률이 더 높다는 것은 한마디로 답이 없다는 것. 물론 유보트의 경우에도 대전 중반까지는 항공전력의 위협이 적은 지역을 골라서 작전하기는 했고 격침시킬 표적이 넘쳐나기도 했지만 영국과 미국의 격침 전과와 비교해도 초라한 수준이라 변명의 여지는 없다.
게다가 일본이 잠수함의 주 목적으로 삼았던 군함을 대상으로 하면 더 초라해지는데, 일본군 잠수함이 올린 전과란 것이 항공모함 2척, 호위항공모함 1척, 중순양함 1척, 구축함 1척에 불과하다. 이 전과에 불명확한 군함 격침 전과를 추가해도 구축함 2-3척에 어뢰정이나 기타 보조함 몇 척이 추가되는 것 뿐이다. 그뿐 아니라 항공모함 한 척도 사실상 빼야 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요크타운을 I-168이 어뢰로 잡았다고 해서 저렇게 집어넣은 건데, 사실 요크타운은 이미 미드웨이 해전 도중에 일본의 공격을 레이더로 미리 감지하고 항공대를 엔터프라이즈로 보내버리면서 함생을 사실상 끝냈다. 그리고 어뢰에 맞았어도 침몰될 때까지 엄청나게 오래 버티면서 떠 있었다. 게다가 I-168이 요크타운을 격침시킬 때 요크타운은 함장을 포함해서 승조원이 전원 퇴함한 상태였다. 간단히 말하면 빈집털이.
이에 비해 통상파괴전에 주 목적을 둔 미군 잠수함은 일본 상선을 격침하면서 짬짬히 군함도 때리면서 전함 1척, 항공모함 4척, 경항공모함 4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8척, 구축함 35척, 잠수함 26척 (이중 1척은 유보트)라는 전과를 기록했다. 이 중에서 항공모함만 따져봐도 미군 잠수함이 잡은 네 척의 항공모함 중에는 원래 야마토급 전함이었던 시나노(항공모함)도 있다. 그리고 저 미군 잠수함이 잡은 정규 항공모함 네 척 중 다이호(항공모함)과 쇼카쿠급 항공모함 쇼카쿠는 필리핀 해 해전이라는 한 번의 해전에서 당한 것으로 주업도 잘하면서 부업도 잘한 사례에 들어간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일본군 잠수함은 원래 목적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통상파괴전도 잘 수행하지 못하는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게다가 잠수함은 다른 함선과는 달리 함장의 지휘 하에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가장 많은데도 불구하고 전과가 저 따위인 것을 보면, 윗선 뿐 아니라 아래도 별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나름대로 잠수함 에이스와 통상파괴전 사례를 늘어놓았는데, 딱 자랑할만한 것이 저 정도밖엔 안되는데다가 유보트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촛불처럼 매우 빈약한 전과다. 게다가 일본군이 미국 수송 라인을 괴롭힌 적은 딱 저 시기, 과달카날 전역 초반 빼고는 없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기에 일본 국내에서는 타국에서는 격침 전과로 넣지도 않는 항공모함 1척, 전함 1척의 손상도 당당하게 전과랍시고 자랑하는 경우까지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저런 말도 안되는 대본영의 제약 덕분에 미군은 아무 제약 없이 마음껏 상륙전과 물자 수송을 할 수 있었으며, 일본군 잠수함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어뢰 한 발을 수송선에 날린 이후에는 미군 수송선을 봐도 소 닭보듯 하며(...) 공격할만한 미군 전투함들을 찾아 하릴없이 떠돌다가 구축함 등 대잠 세력에게 걸려서 허무하게 격침되었다. 전쟁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 대본영 수뇌부로부터 주먹구구식 전술을 강요받은 일본 잠수함들은 누워서 떡먹기인 수송선 격침조차도 수행 못하고 함대 총 톤수만 낭비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대본영은 리스크가 큰 잠수함 진영들을 고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산개선이다. 산개선은 적 함대의 손쉬운 포착을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잠수함들이 1열 횡대로 줄을 지어 배치를 시키는 진형인데한번 잠수함의 위치가 발각되면 나머지 잠수함들의 대강의 위치들을 그대로 파악당하게 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 상태에서 암호가 뚫리면서 지옥도가 펼쳐지게 되는데 당장 그 성능 좋다던 유보트들도 암호가 뚫리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암호 뚫린 것을 깨닫고 온갖 트릭을 써서 살아남으려 했는데 대본영은 암호가 뚫린 것도 모르고 그런 진영들을 고집했다. 덕분에 아무리 구축함이 잠수함을 잡기 위한 함이라고 하지만 호위구축함 잉글랜드 (DE-635) 단 1척이 12일만에 6척의 일본군 잠수함을 혼자서 잡는 위업을 세우게 되었다. 출처.
결국 내놓은 해결책이라는 것이 산개선의 개량 진형인 산개면이다. 물론 이 산개면의 효과에 대해서는 "산개선이나 산개면이나 그게 그거..."라는 일본 잠수함장과 승무원들의 증언으로 대신한다.
9.6. 과도한 목적의 잠수함
일본 해군 잠수함은 육군 부대에 대한 수송작전도 담당을 하게 되었는데 육군 소속 군함 항목에도 나와있듯 사실 이는 처음엔 포위된 육군 부대에 대해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보급 물품을 전달하는 잔머리를 굴리다 생긴 것이다. 문제는 이걸 가면 갈수록 정식 작전으로 편입시켜댄 것... 물론 이런 짓이 힘들고미군의 잠수함들도 게릴라에 대한 보급이나 격추된 파일럿을 구출하는 등의 작전에 투입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수함을 투입하기 알맞은 임무에 투입한 것이지 일본처럼 섬에 고립된 연대급, 사단급인 대규모 병력을 가진 부대에 좁은 잠수함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한줌 정도의 작은 물자를 던져주라고 밀어넣은 게 아니다. 훨씬 빠르고 함내 공간도 여유가 있는 구축함으로 물자를 던져주고 도망가는 도쿄 익스프레스로도 제대로 된 보급은 불가능한데, 잠수 기능을 위해 속도도 적재량도 전부 희생한 잠수함으로 깔짝거려봤자...
미국 잠수함대는 좀 더 나아가서 대범한 작전을 다수 시행했는데, 중요 타격점에 로켓탄이나 덱건을 쏴갈기거나 일본의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도 했다. 심지어 USS 바브는 일본군 점령지인 사할린에 로켓탄을 퍼붓고, 수병들을 상륙시켜 철도를 폭파해버리기까지 했다. 이 수병들은 코만도 같은 특수부대원이 아닌 평범한 수병들이었지만, 현대적인 특수부대 작전에서 특수부대를 잠수함으로 투입하는 작전의 시초가 되었다. 일본 수송라인의 대부분을 끊어버린 것이 미국 잠수함이다. 1944년 말에 도달하면 미국 잠수함이 너무 많은 일본 선박을 잡은 덕분에 일본 내에서 선박 공급량이 소모량도 충족하지 못해서 바다 위에 일본 선박이 없어지는 결과가 나오자 정크선 같은 소형 목재 선박까지 어뢰로 격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일본군은 이것도 모자라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로 함재기를 탐재한 잠수항공모함에다가 함재기인 M6A 세이란을 탑재해서 미국 서해안에 투입시켜 미국 본토나 파나마 운하에 대한 함재기 폭격이나 덱건을 이용한 포격을 한다는 둥 가이텐 모함으로 카미카제 작전에 투입한다는 둥 미국 서해안에서 폭탄 단 열기구를 보내겠다는 둥 얼핏 보면 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많이 만들었다. 문제는 시원찮은 성능의 수상기에서 떨어트릴수 있는 수십 Kg 짜리 폭탄 한두 발로 입힐 작은 데미지를 위해 물자도 없는 나라가 아예 전용 항공기와 세계 최대급 잠수함을 제작한다는 난리법석으로 물자 낭비에 더욱 열중한거다. 폭탄 열기구 역시 지구를 반바퀴 돌아 대충 날아가는 물건이니 정밀한 타격을 기대하기는 아주 무리였고.
잠수 항모가 공격 준비를 완료한 시점이 1945년 4월... 독일이 패배한 게 같은 해 5월이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게 4개월 후인 8월이므로 시점에서 파나마 운하의 파괴와는 관계없이 이미 일본은 끝장날 기세였다. 그나마 1942년에 잠수함 I-25에서 출격한 수상기가 오리건 주의 삼림에 소이탄을 투하했으나, 나무 몇 그루를 태우는 업적을 달성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미국 산림청 소속 소방관들이 출동하여 금방 화재를 진압했다.
결국 자기들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얼마 있지도 않은 물자와 에너지를 엉뚱한 삽질하는데 잔뜩 쏟은 거다.
9.7. 승조원 배려의 잘못된 방향성
좋은 편이었다는 승조원 배려에도 구멍은 있었다. 단, 상당수의 지적이 당시 잠수함의 태생적 한계 등을 무시하고 현대의 기준에 맞춰 일본 잠수함 승조원들의 처우를 평한 데다, 쓸데없는 일까 감정이 개입되어 탄생한 억지스런 주장들이 꽤 된다.일단 타국 해군은 잠수함 근무가 워낙 열악한 점을 인정하여 식사라도 풍족하게 해주려고 배식의 양과 질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런데 일본 해군은 질은 챙겼지만, 양은 잠수함 승조원은 운동부족에 햇빛을 제대로 쬐지 못하는 상황에서 식사를 많이 하면 비만 및 피부병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이상한 이유로 도리어 배식량을 줄여 개악했다. 물론 정신력 드립치면서 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승조원들을 배려한다고 한 거지만, 사기에 영 좋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다.
단, 걸러들어야 할 것이, 양을 줄였다고 해서 그 양이 무슨 쫄쫄 굶거나 할 수준이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곤란하다. 양을 줄였다는 건 육군 및 해군 육상 부대보다 월등히 많은 양의 함정 근무자의 부식 기준에서 조금 줄인 정도라, 양 자체는 부족하지 않고 넉넉했다. 특히 당시 타국 대비 소식하는 편이던 일본인의 식습관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당시 잠수함 승조원들도 배고팠다는 회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양은 좀 줄였지만 질은 신경쓴 편이라, 장기 보존에 적합한 식재료 공급과 신선 제품 공급에 신경을 쓰긴 썼다. 그런데 그 가운데 삽질로 끝난, 함내에서 담요를 깔고 그 위에 흙과 비료를 뿌리고 씨를 뿌린 뒤 인공 조명을 쬐어 광합성을 유도해 양파, 상추를 수경재배하는 시도가 있었고, 결과는 영 시원찮았다. 잠수함 내에서 신선한 유기농 야채를 만드는 계획은 현대 미군도 연구중인 과업이라 이걸 시도한 자체는 나름대로 인정해줄만 하다. 문제는 결과가 저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보급 물자에 더해 채소를 보다 신선히 먹어보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지, 이거 믿고 채소류를 하나도 안 실은 건 절대 아니었다. 엄연히 수경재배와 별도로 항해 초기에 먹을 신선한 채소와 이후 귀항시까지 먹을 장기 보존 가능한 채소, 그리고 기타 각종 부식들도 따로 적재했으므로, 함내 농사 망쳤다고 승조원들이 밥만 먹고 사는 일은 없었다.
잠수함 승조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반찬으로 케찹을 꼽았다는 것을 가지고 이를 까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심지어 좋게 생각하는 회고마저 추억 보정으로 매도하는 여론이 한국 밀덕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 당연히 현실을 모르고 현대 기준에 대입하여 생각하니 나오는 발상으로, 당시 일본에서 케챱은 서민들이 매 끼니 먹기 힘든 나름대로 비싼 식재료였으며, 밥 잘 나온다는 일본군 내에서도 해군 육상이나 육군 부대에서는 생각만큼 나오지 않고 함정 근무자들이 많이 접했던 물건이었다. 거기에 더해, 밀덕들이 그렇게 까기 좋아하는 열풍건조시킨 고형 케찹, 일명 토마토 양갱 혹은 케찹 양갱도, 열풍건조 과정에 드는 비용 등이 더해져 일반 케챱보다 훨씬 비싼 물건이다. 승조원들을 푸대하려는 게 아니라, 도리어 비용을 들여서라도 더 오래 가고, 더 많이 실을 수 있으며, 빈병 처리 등의 수고도 더는 등 승조원들을 배려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이걸 밥위에 비벼먹는 것 역시, 열강들 중 서민들의 생활 수준이 낮은 편이던 일본 기준으론 푸짐한 식사의 하나였다. 1960년대 한국에서 우유에 밥 말아먹는 것을 생각하면 되는데, 오늘날에나 괴식 취급받지 당시엔 우유밥을 먹는 건 집안이 여유가 된다는 일종의 자랑거리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 고형 케챱은 열풍건조 기술 개발에 애먹어서 1945년에나 납품됐기에, 실제로 잠수함 승조원들이 이걸 먹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케챱 비빔밥이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자주 먹은 탓도 있고, 대전 말기에 등장한 일종의 신기한 신문물에 대한 충격 정도로 보는 게 맞다.
해군 수상함 승조원들과 비교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일본 수상함대는 전황이 가장 안 좋을 때에도 먹는 것 하나는 아주 풍족하게 먹었다. 민간 여객선의 고급 요리를 하던 조리사들을 징집하여 요리를 맡겼고, 영국 해군의 영향을 받아서 주말마다 카레라이스를 먹는가 하면 과일 통조림과 사과와 마카로니 샐러드 등이 나왔을 정도. 육군 장교들이 회의차 함선에 들어오자 도미 소금 구이와 도미 회, 냉장고에서 갓 꺼낸 차가운 맥주를 대접해줬다는 기록도 나온다. 단, 잠수함의 경우 푸대한 게 아니라 저런 고급 취사 설비를 갖추고 고급 식재료를 장기간 탑재할 공간이 안 나온다는 현실적 문제 때문에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준 것에 가까우니 비교의 대상이 처음부터 잘못됐다. 게다가 야마토급 전함 등 네임드 함정의 식사 특히 사관 식사가 좋은 것은, 기본 보급 외 장교들이 사비를 갹출해 매달 사관 식당 운영비에 보탰던 것도 큰 이유로, 대형함일수록 급여가 높아 보다 고액의 식비를 낼 수 있는 제독, 좌관급 장교들이 잔득 타니 당연히 식사의 질이 훨씬 좋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이런 대형함은 외교나 의전 등으로 국내외의 높으신 분들을 많이 모시다 보니 평소에도 고급 식사 조달을 위한 준비를 해 둬야 했다는 점도 큰 이유다. 함장의 계급이 중~소좌에 불과하고 높으신 분들도 잘 안 오는 잠수함에서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함 여건상 대형함들이 하는 수준의 화려한 식사를 못 할 뿐, 카레라이스 등 다른 수상함에서 먹을 수 있는 여러 메뉴들도 잠수함 내에서 조리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선 잘만 나왔다.
그리고, 잠수함 승조원들의 식사 문제는 미 해군 등 타국 해군도 똑같이 시달렸고, 크릭스마리네의 U보트의 식사 수준은 일본 해군보다 훨씬 처참했다. 전후 보다 대형의 잠수함 및 원자력 잠수함의 배치, 식재료 보존 및 가공 기술 등의 발달로 일부 해결한 정도다.
나름 승조원의 복지를 챙겨준다고 잠수함마다 군의관을 태운 것도 호불호가 갈린다. 이들 군의관이 대부분 피부과나 정신과 전공자였던 점 때문인데, 보통 잠수함은 포격 등에 노출되는 외상보다는 좁고 햇볕이 거의 안 들고 불결한 환경에 노출되며 생기는 각종 피부질환과 폐쇄공포증 치료를 위해 이들이 선발된 것이다. 보통 일선 전투함이나 육상 야전부대의 경우 외상을 입은 승조원을 응급처치 해줄 외과 군의관을 선호하긴 하나, 피부과나 정신과 군의관이라고 해서 응급처치를 못 하는 건 아니고 전공과가 뭐든 간에 일단 의대 졸업한 의사라는 면에서[26] 오히려 의무부사관이나 약식으로 의무 교육을 수료한
사실 일본 잠수함의 가장 큰 문제는 승조원 식사나 군의관의 전공이 아니라 에어컨 문제인데, 많은 밀덕들이 잘못된 지식 혹은 일까 심리로 엉뚱한 걸 까고 있다.
9.8. 에어컨 문제
기자재의 보호를 위해 에어컨을 설치해서 냉각을 하는 미군 잠수함도 열대지방에서는 실내 온도가 40도에 육박해서 고통에 시달려야 했는데, 센토쿠급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아예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에어컨 용량이 약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대부분의 일본 해군 잠수함은 더위로 승조원이 쓰러지기도 했고, 선내의 각종 기기에 이슬이 맺혀서 오동작을 일으킬 확률이 엄청나게 증가하므로 전투 효율이 떨어졌다. 계속 생기는 물기를 수시로 걸레에 묻혀 양동이에 따라내 버려 제거하는 것은 당시 잠수함 승조원들의 주 업무 중 하나였다. 그리고 냉각장치가 있더라도 가동 소음이 워낙 커서 적에게 탐지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있어도 사용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9.9. 함대결전사상
고대 시절부터 해군이 있는 이유가 자국 해역과 수송라인을 지키는 것인데, 일본군의 경우 함대결전사상을 채택한 덕에 시대에 뒤떨어져 잘못된 방식으로 잠수함을 발전시켰으니 전쟁에서 져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일본군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멍청한 수뇌부였고 당연히 그 책임도 매우 크지만, 위에서 멍청한 전략전술을 현장에서 나름대로 상황에 맞춰서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따른 일본군 장교와 사병도 그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잠수함처럼 독자 행동이 가능한 함선의 경우에는 변명의 여지도 없다. 현장을 위한 변명을 굳이 하자면 잠수함 성능이 은근히 안좋은데 뭘 더 할 수 있겠냐마는...
10. 관련 문서
[1]
일본제국해군 기술병과 중장(造船官)이자
도쿄제국대학 총장 역임
[2]
통념과 달리 이탈리하 해군의 활약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탈리아 공군 + 독일 공군 + 이탈리아 해군 vs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 구도라 지중해에 전개된 총 전력에서는 영국이 열세라는 점도 있다.
[3]
소련 전차도 독일 전차와 같이 주적이 된 대상과 주로 비교하지 독일 전차에 비해 밀리는 점을 프랑스 전차나 이탈리아 전차와 비교하면서 우월하다고 하지 않는다.
[4]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 북부에 있는 도시.
[5]
damage-control, as it is understood in the U.S. Navy, did not exist.
[6]
아래의 이미지들 출처는 http://blogs.yahoo.co.jp/kenchick07
[7]
거의 크기가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이나,
보그급 호위항공모함수준이나 조금 더 큰 수준밖에 안되는 함교들이었기에 대형 항모한테는 상당히 안맞는 수준의 크기이다.
[8]
출처: http://hsfeatures.com/yorktownrc_1.htm
[9]
당시에는
인명경시와 안일한 방식 때문에 이런 설계와 방식으로 나오는 거였다.
[10]
비행기가 그냥 해수면을 향해 돌진하는 이상한 광경인데, 필리핀 해 해전에서 다이호를 향해 어뢰가 다가오자 해군 조종사인 고마츠
상등병조가 막 이함한 자신의 함재기로 어뢰를 향해 다이빙, 모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문제는 다이호로 오는 어뢰가 한 발이 아니었으므로 별 의미는 없었다.
[11]
http://www.wwiiaircraftperformance.org/f4u/f4u.htmlF4U,
F6F,
F4F.
[12]
그림 파일에 항공모함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하향식 연돌이 우측에 있고 함교가 좌측에 있으므로 아카기와 히류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히류는 함수 부분에 4발의 폭탄을 맞고 격침되었으므로, 함의 뒤쪽에서 연기가 나오는 그림과 맞지 않는다. 아카기를 침몰시킨 베스트 샷이 명중한 곳은 함교 후방으로, 일러스트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지점과 일치한다. 그리고 아카기와 카가 특유의 대형 함수 비행갑판 지지대가 있으므로 아카기가 맞다.
[13]
엄밀히 말하면
선전포고문 자체는 보냈다. 그러나, 선전포고문에 무수히 많은 문제점이 산적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전쟁 언급을 어떻게든 피해내느라 내용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길어진 소설급 포고문이라서 암호 해독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를 번역하여 쓰는 시간은 그보다 두 배 이상 걸렸으니 얼마나 개고생을 했을 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모든 작업을 끝마치고 미국 하원에 제출했을 때는
이미 진주만 공습이 끝난 후였다.
[14]
거기다가 일본 제국 수뇌부가 집필한 글답게 포고문도 제대로 된 문서가 아니었는데 한 번만 읽으면 내용이 뭐가 뭔지 제대로 알아보지조차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선전포고문이 성립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인 '전쟁 시작 선언'을 언급한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어 선전포고문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고문을 전투 전에 보내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15]
애리조나,
오클라호마
[16]
Number 12 Class Battleship.
[17]
16"/45 (40.6 cm) Mark I
[18]
16"/45 (40.6 cm) Marks II, III and IV
[19]
16"/45 (40.6 cm) Mark 6
[20]
유료 문헌으로 구글에서 "ashigara real warship"으로 검색하면 나온다.
[21]
해안포, 기뢰, 자침, 충돌등
[22]
시마카제, 나다카제 제외
[23]
미유키 제외
[24]
하지만 이러면 배터리의 유산이 흘러 유독가스가 발생하게 된다. 유산이 흐르지 않는 최대 한계는 보통 45도.
[25]
군함의 역사. James L. George. p289와 Evans, David C; Peattie, Mark R (1997).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1887–1941. Annapolis, Maryland: Naval Institute Press. p497.
[26]
전공과는 의과대학 졸업 및 의사면허 취득 후 정하는 거라 전공과가 무엇이든 일단 기본적인 내용은 다 배운 상태다. 실습도 당시 의대 교육과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과 똑같다고 보면 2년간 병원 실습도 했을테니, 전문의가 해야 하는 전문적인 치료는 힘들겠지만 일단 경험도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