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9:14:06

해군선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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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장되는 근거
2.1. 민간에서의 평가
3. 비판4. 기타5. 독일의 깨끗한 국방군 설6. 관련 문서

1. 개요

[ruby(海軍善玉論, ruby=かいぐんぜんだまろん)]

다른 명칭으로 '육군악옥론([ruby(陸軍悪玉論, ruby=りくぐんあくだまろん)])'이라고도 하며 육군악옥, 해군선옥(陸軍惡玉 海軍善玉)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선옥, 악옥은 각각 선역, 악역을 뜻하는 일본 고전문학에서 나온 말니다.

일본군 육군만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의 군국주의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확대, 국제정치에서 고립 및 미국 중국에 대한 전쟁 유발과 패전,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국제법위반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킨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원래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측이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사실 해군선옥론은 삼국동맹 체결과 대미개전을 반대했던 소위 해군 좌파 삼인방( 요나이 미쓰마사 ,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에 대한 미화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2. 주장되는 근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부터 일본 육군은 2.26 사건을 일으켰고 만주사변 관동군의 폭주에 기인 한 것이며, 쇼와 시절 군부독재 정치는 육군군벌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전개되었다. 이 주장은 오랫동안 일본군을 연구하거나 거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육군 대신 시모무라 사다무 장군은 1945년 11월 28일 일본 하원에서 군부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스스로 그러한 군국주의에 빠져 횡포를 일삼은 육군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물론 식민지에서 범한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고 전사자에 대하여만 거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질문자였던 사이토 타카오는 해군대신이었던 요나이 미쓰마사에게는 답변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당시 요나이는 묵묵히 시모무라 육군대신의 반성 담화를 듣고 있었다. 또한 극동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은 해군 인물은 3명이고 , 육군 인물은 총 7명인데 해군은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고(그 중 한명은 집행 전에 옥사) 육군은 1명을 제외하고 도조 히데키 등 6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또한 삼대오물도 전부 육군 출신이다.

재판 결과에서도 보듯 해군으로서 전범으로 처형된 사례는 다이고 타다시게나 사콘조 나오마사[1]가 유명하지만 이들은 각각 네덜란드나 영국군의 즉결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진 특이한 사례다. 그래서 해군반성회에서는 전범재판 당시 해군측에서 대대적으로 육군에게 자신들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해군들은 사실상 불기소처분으로 방면되었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다. 물론 공직추방령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더라도 195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핸디캡이 존재했지만 이런 핸디캡은 육군도 마찬가지였거니와, 해군 전범의 대다수는 처벌도 받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과거에서 자유로웠으므로 결과적으로 해상자위대에 일본군 해군 출신 인사가 대대적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2.1. 민간에서의 평가

소위 육군악옥론이 항간에 떠도는 배경으로 당시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육군과 해군에 대한 인상의 차이를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대전까지 일본 군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그것은 일본 육군을 지칭한다. 징병제가 기본이였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남자는 만 18세가 되면 징병 검사를 받고 많은 거주지를 관할하는 지방 연대에 입대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병역 이행 방법이었다.[2] 징병 검사에서 징병되면 육군에 입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원제를 기본으로하는 해군의 경우는 병역의무의 이행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일반인과 육군의 거리는 해군에 비교하면 아주 가까웠고, 평시에는 휴가를 얻어 귀가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는 측면이 있었다. 이는 육군의 군인은 일반인과 접할 기회가 해군 군인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군의 경우 함대 근무가 기본이 되는 군대생활 때문에 사관, 병을 관리하는 진수부에서 관할하는 군항 소속 함정 등에 배속되기 때문에 진수부에 설치되어 있던 함대에 입단 때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병역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데다 훈련과 원양 항해 등으로 장기간 귀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체제로 군복무가 육군보다 어렵다는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해군 수병으로 채용된 경우는 일반 국민과의 접점은 육군 병사보다 훨씬 적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병역이행 방법의 차이에서 육군과 해군에 대한 것이 일본인이 서로 다른 감정을 갖게 되었다.

국민의 인상의 차이를 지적하는 논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고한다.
  • 일반인이 자주 보는 군인이라고 하면 압도적으로 육군이었고, 무서운 존재의 대명사였으며 특히 헌병이 전시에 종종 일반인을 대상으로 횡포를 부려서 인상도 나빴다. 이렇게 헌병을 혐오하는 정서는 중일전쟁 이후에 특히 심해졌으며, 식민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식민지 경험을 한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 헌병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걸핏하면 되도 않는 시비를 걸거나 부당한 폭행을 일삼았으니 인상이 좋을 리가 있나. 반면 해군은 일부 해안가 대도시에 위치한 군항에 주둔지가 많이 집중되어 있는 데다가 후술하겠지만 인력풀도 육군보다는 걸러서 받은 편이어서 대민 물의가 적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젊은이가 소집되는 것은 거주지역 인근 육군 연대가 일반적이었다. 육군은 국민과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국민이 가지는 군의 인상은 주로 육군에 대한 것이 표준으로 되어 있었다.
  • 태평양 전쟁 당시 국내 유명연예인이 전후 회고록에서 "전시 중의 위문시에 육군이 위문 방문한 우리들에게 오만하게 대하고 엉성하게 취급했다"고 회상 한 것. 예를 들어 가수인 후지야마 이치로는 전후에 "전쟁 중에 육군은 오만한 태도로 엉성하게 취급했지만, 해군은 정중한 태도로 대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 종전 전까지 일본에서는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경제력을 포함한 엘리트였던 풍조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전형적인 학벌만능주의 사회였고, 이는 군도 다를바가 없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전후 사회의 관료, 경영, 정치, 학계, 문단 등으로 영향력 있는 실력자가 되었다. 육, 해군 모두 대학 재학, 졸업생을 단기간의 교육 사관에 임관하는 제도[3]가 대학 재학 이상으로 군대에 들어가 전쟁에 소집, 돌아온 사람의 대부분은 소위, 예비 소위 이상으로 임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전후사회의 유력자들 대다수가 해군출신이거나 육군에 비판적인 입장이라 해군을 옹호하는 경향이 매우 커지고 곧 일반적인 여론으로 정착되었다.
    • 해군에는 계급 제도와 해군병학교[4]를 정점으로 한 엘리트주의의 학벌 편중주의가 겹치는 독특한 신분서열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고참 수병이나 하사관도 곧바로 자신보다 학벌이 훌륭한 학도사관에 거칠게 대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소위급 대우를 받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사관에서 민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므로 해군을 편애하는 정서가 고착화되었다. 특히 해군은 육군과는 달리 함선을 동작시키는 기술관련사관의 위력과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는 서로 전문가 대접을 하거나 독자적인 서열체계가 만들어지고 타 부서에서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초심자가 적응하기 쉬운 편이었다. 해군 주계(主計. 보급, 경리, 행정을 맡는 해군 병과)사관은 대부분 육상에서 근무하며 해외로 가야하는 육군과 다르게 일본 군항 도시지역에서 생활이 가능한 점도 있었다. 주 전장이 바다였던 해군의 특성상 전사할 가능성이 적었고, 함정에 배치받아도 전투시 함교에서 전투일지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함정을 포기해야 할 경우 일반적으로 장교가 나중에 퇴함하는 것에서 열외되어 전투일지 등 기록물과 히로히토의 사진 등을 챙기고 군의관과 함께 제일 먼저 퇴함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어 함정 근무시에도 생존률이 높았으며, 군대 문화역시 극과극으로 달라서, 육군은 진흙탕과 같다고 표현한 반면, 해군은 자신을을 엘리트로 대우해줬다는 증언과 같은 이유로 우수자원들이 육군보다 해군에 몰렸다.[5]
    • 육군도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사관에서 민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일단 해당인이 '간부후보생'에 채용되더라도 입영에서 몇 개월 동안 반드시 이등병으로 병영 생활을 보내야하며, 여기에서 가혹행위가 유발되었다. 육군도 군 경력이 긴 사람이 판을 치고있던 풍조가 있었고, 간부 후보생이어도 입영시에는 일반 병사와 같은 입장이며, 진급, 임관도 생도 출신의 현역 장교보다 교육 기간은 짧기 때문에 고참 병사와 하사관들에게 외면당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육군 재향 학도 장교들조차 육군을 편애하는 경향이 되긴 커녕 오히려 육군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일반인이 육군이나 해군에 징병될 경우 그 대부분은 간부 후보생·예비 학생이 될 학력과 자격을 갖지 못한 신병으로 입영·입단해서 고참병과 사관의 가혹행위에 계속 견디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는 막장 일본군답게 둘 다 고생길이었지만, 해군 수병보다 육군 병사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살아남아 돌아온 소집병들은 해군에 종군했던 '해군기피'가 된 인원보다 육군에 종군했던 '육군기피'가 된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당연했다.
  • 육군은 나중에 가면 식민지 현지민도 채용 및 강제로 징병하는 등[6] 개나소나 들어가는 데였고 해군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는 당시 일본인의 풍조도 한몫했다.
위의 사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패전 후 일본군이 해체된 뒤, 전쟁 당시의 해군을 호의적으로, 육군을 비판의 표적이 되는 논조가 전개되었다. 특히 전시 중, 앞서 말했듯이 헌병대에 불쾌한 기억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경험을 체험한 일본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육군에 대한 인상이 안좋았으므로 육군에 대해 이런 종류의 논조가 받아들여지게 될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실상의 재군비라고 볼 수 있는 자위대 설립시에는 다음과 같은 사태가 일어났다. 일단 육상자위대는 옛 제국육군 출신자가 다수 입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와 전 군인들의 생각의 변화로 제국 육군의 전통이 대부분 단절되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제국 해군의 전통이 명확하게 해상자위대에 계승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반드시 육군, 해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다분히 사후의 이론으로 호도된 전후의 인간들이 갖는 인상론에 가까운 것도 포함된다.

3. 비판

그러나 재판 결과만 놓고 일본 해군은 육군에 비해 사악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전범으로 기소된 예가 적은 이유는 책임자가 전쟁 중에 전사를 했다거나 전쟁범죄 증거 인멸 등이 있다. 육군의 경우 부대가 패퇴해도 장군이 전사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해군은 배를 잃으면 누가 말리지 않으면 책임자가 같이 죽는 악습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단순히 책임자가 죽은 경우에도 증언이나 기록 등은 남으므로 드러난 전쟁범죄 자체가 적다는 사실은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린다.[7] 마리아나 해전 시기의 일본 해군은 겉으로는 결사항전과 특공을 기조로 싸우고 있었지만 상층부에선 패전후의 책임 추구를 비껴나가기 위해 자신들의 전쟁 범죄 관련에 대한 증거 인멸과 입막음을 해왔다. 물론 육군도 바보는 아닌지라 똑같이 증거 인멸과 입막음을 했지만 그 규모와 시기는 육군보다 훨씬 방대하고 철저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요시다 유타카의 저서 '현대역사학과 전쟁책임(現代歴史学と戦争責任)'에선 '(전쟁 범죄의)공식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공습중에 소실되었거나 육해군이 고의로 기록을 폐기했다는 것이 이유로 꼽힌다' 라고 서술했다. 그에 덧붙여 '증거는 있어도 재판소에 제출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고도 서술했다. [8] 다만, 더 결정적인 변수 역시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해군이 육군에 비해서 전쟁범죄를 저지르기 어려운 환경에 놓였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구 일본제국 하에서 조선은 사실상 육군의 영지였고[9] 만주, 중국, 동남아 등 인구가 밀집한 지역은 거의 다 육군의 관할이었다. 반면 해군은 사람이 별로 없는 태평양 지역이 주 활동지대였고 거기서조차도 육군 병사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10] 한 마디로 전쟁 범죄의 대상이 될만한 민간인들이 별로 없었으므로 범죄가 적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나치독일에서 상대적으로 해공군이 전쟁범죄가 적은 점 역시 이와 유사하다.

또한 전범재판의 주요 증인으로 육군 소장 다나카 료키치(田中隆吉)가 지목된 것도 원인이었다. 다나카 료키치의 증언은 전쟁범죄의 사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언으로 다수 채택되었는데, 당연하지만 다나카 료키치는 육군 장성인 만큼 육군의 내부 사정에는 밝았지만 해군의 내부 사정에는 비교적 어두웠으므로 해군의 전쟁범죄 폭로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 한 편이었다.

전후 해군선옥론에 대하여는 1960년 때부터 학술적으로 검토 논의가 제기되어왔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 국제 정치 학회 태평양전쟁원인연구부가 간행한 '태평양 전쟁에의 길'에는 여러 곳에서 해군이 대미 개전에 소극적이었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방위청에 의한 발간전사로 편찬된 '전사총서'에서 개전경위의 설명이 육군과 해군 별도로 나뉘어있는 원인에 대해 구 해군 관계자가 육군악옥론, 해군선옥론 수정 논의를 저지하려고 한 게 아닌가 지적되었다.

끝으로, 해군 고위급 중에 삼국동맹과 대미 개전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본 해군은 전쟁 중에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전황이 불리한 패전소식을 줄줄이 보도라인만이 아니라 육군과 정부에도 은폐해, 대본영과 육군, 일본정부의 전략적 오판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대만항공전때도 해군은 대승을 거둔 것처럼 언론플레이했고, 육군은 그걸 믿고 움직였지만..

4. 기타

주의해야할 점은, 일본 해군 자체가 어쨌거나 드러난[11] 전쟁범죄는 일본 육군에 비해 적었다는 것이다. 해군선옥론은 개전을 비롯한 모든 잘못은 일본 육군에게만 있고 일본 해군은 군인으로써 명령에 따른 전쟁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착각을 지적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며 단순히 일본 해군이 일본 육군보다 나았다는 주장 자체를 지적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 해군이 굳이 선해서가 아니라, 해군은 애초에 민간인과 엮일 일도, 포로를 대규모로 사로잡을 일도 육군에 비해 현저히 적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범죄도 적을 수 밖에 없다.

어째서인지 일본 내에서는 이런 개념이 널리 퍼져있으며 아사히 신문도 이 이론에 심취해 있다는 설이 퍼져 있는데, 아사히 신문은 결코 일본 해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일본 해군의 숨겨진 진실을 일본 해군 사람들이 토로한 해군반성회의 다큐멘터리가 NHK를 통해 방송된 뒤 상당수 일본인에게 태평양 전쟁 비화가 알려져 해군선옥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윤영식 제독이 번역한 <해상학살-일본 해군의 전쟁범죄(마크 펠튼 저술)>라는 책에서도 2차대전기 일본 해군의 만행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래도 일본 육.해군 대립때문에 일본 해군은 포로들에게 "전쟁범죄나 저지르는 육군보다는 해군이 더 좋죠."따위의 알랑방귀를 들으면 좋아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퍼시픽 소설판에서 포로로 잡힌 해병대원들이 해군 병사들의 비위를 맞춰주기위해 해군선옥론을 들먹였고 그래서 엄청 좋아했다고한다.

5. 독일의 깨끗한 국방군 설

독일이라고 해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은 그렇게 경계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진짜로 국가를 분할해버리자 이를 빌미로 독일인들은 일본 넷우익을 능가하는 수준의 자기합리화 정신승리를 시전하였으며, 국민들이 이 정도였는데 신생 독일연방군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더욱이나 이쪽은 나치 슈츠슈타펠라는 책임소재를 떠넘기기 쉬운 절대악의 존재[12] 때문에 이런 사상이 더더욱 부추겨졌다. 이후 나치와의 연계 혐의가 없거나 옅은 구 독일 국방군 인사들과 서방 군사저술가들의 합작으로 깨끗한 국방군 신화(Legende von der sauberen Wehrmacht)를 유포하는 저작들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비록 히틀러와 나치에게 이용당하기는 했어도, 자신들은 신사적이고 정당한 전쟁을 했다는 것.

실제로 독일인들이 자신들 역시 가해자임을 자각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세대 교체와 68운동을 통해 이뤄져 왔지만,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자성은 그보다 10~20년 뒤에나 있었다.

국방군 무오설 역시 그 특성상 육군이 주로 까임의 대상이며, 해군 공군은 상대적으로 덜 까이는 편으로, 특히 크릭스마리네는 국방군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신사적이기도 했고 루프트바페은 군종의 특정상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기도 하다. 물론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같은 엄연한 전쟁범죄를 저지른건 변함이 없지만.[13]

6. 관련 문서



[1] 1944년 3월 18일,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와 토네의 승조원들이 일으킨 베허호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베허호 사건 문서로. [2] 당시 육군의 복무기간은 2년이었고, 해군은 3년이었다. 일본군은 병장의 개념이 없어서 병 계급이 상, 일, 이 3계급제로 실시되었다. [3] 육군 간부 후보생 제도, 해군의 단기 현역 장교 제도와 예비 학생 제도,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등 [4] 해군사관학교의 패전 전 일본식 명칭 [5] 그 사람들이 종전 후 일본 총리, 은행장, 장/차관등 관료 고위직, 정치인, 기업가 등으로 활약했다 [6] 일부 출세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전체 외지인 징병자 중 5% 미만일 뿐이었다(구 대한제국 황족 출신이나 구 대한제국군에서 소속이 전환된 고위급 지휘관 정도를 제외하면 귀족이 아닌 일반 조선인으로써 장성이 된 사람은 홍사익이 유일했다.). [7] 당연히 육군도 책임자가 전사할 수 있으며, 편견과 달리 배가 격침되었다고 수병들이 모조리 죽는 경우는 그렇게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퇴함해도 기록은 곧잘 손실되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한 항모 4척 중 아카기만이 항해일지를 제출할 수 있었다. [8] 다만 이 말은 해군이 특별히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육해군을 가리지 않았다는 뜻이므로 단순히 해군선옥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9] 물론 사이토 마코토같은 예외도 있다. [10] 대만은 비교적 민간 정부의 입김이 강해 군이 설치기 어려웠다. [11] 증거인멸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그것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당연히 아무런 증거도 없는 범죄의 심증을 가지고 일본군이니 어쨌든 전쟁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 [12] 게다가 일부 독일 국방군의 군인들은 프로이센부터 수백년동안 이어진 독일 국방군과 비교하여 슈츠슈타펠은 나치 독일 수립 이후에나 탄생된 근본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13] 여기서 미국도 민간선박을 공격했다던가 민간인을 폭격했다는 물타기를 시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민간인 폭격이나 민간선박 공격은 나치가 먼저 시작한 행위이다. 그리고 민간인 폭격은 당시 기술과 상황을 감안해야하며 미군은 중립국 선박을 공격한 적은 없다. 크릭스마리네가 문제가 되는건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지 민간선박 공격이 아니므로 민간 선박을 공격했으니 똑같다고 주장하는건 물타기일 뿐이다. 워낙 이런 문제는 1차대전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