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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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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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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행군하는 쿠데타군
날짜
1936년 2월 26일 ~ 2월 29일
장소
일본 제국 도쿄
원인
통제파 황도파의 갈등
일본 제국 내 부정부패, 경제 악화에 대한 불만
교전세력 [[틀:깃발|
기 명칭
황도파 반란군
]][[틀:깃발|
깃발 명칭
황도파 반란군
]][[황도파|
황도파
황도파 반란군
]]
[[틀:깃발|]][[틀:깃발|]][[일본 제국 육군|]]
[[틀:깃발|]][[틀:깃발|]][[일본 제국 해군|]]
[[틀:깃발|]][[틀:깃발|]][[일본 제국 경찰|]]
지휘관 황도파 청년 장교 16명

고노 히사시(河野壽) 육군항공대 대위
노나카 시로(野中四郎) 육군 보병 대위
고다 기요사다(香田清貞) 육군 보병 대위
안도 테루조(安藤輝三) 육군 보병 대위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육군 보병 대위
무라나카 다카지(村中 孝次) 육군 보병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 예비역 육군 경리 대위[1]

나카하시 모토나키(中橋基明) 육군 보병 중위
다케시마 츠키오(竹嶌継夫) 육군 보병 중위
니우 마사타다(丹生誠忠) 육군 보병 중위
사카이 나오시(坂井 直) 육군 보병 중위
다나카 마사루(田中勝) 육군 포병 중위

야스다 유타카(安田 優) 육군 포병 소위
나카시마 간지(中島莞爾) 육군 공병 소위
다카하시 타로(高橋太郎) 육군 보병 소위
하야시 하치로(林八郎) 육군 보병 소위
이케다 토시히코(池田俊彦) 육군 보병 소위

기타 잇키(北一輝)
니시다 미쓰기(西田税)
시부카와 젠스케(渋川善助)
쇼와 덴노

육군참모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 載仁親王)
해군 군령부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伏見宮 博恭王)
우쓰노미야 보병 제 59연대장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육군 보병 대좌
육군 대신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대장

일본육군사관학교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육군 중장
계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香椎 浩平) 육군 중장
근위 사단장 하시모토 토라노스케(橋本虎之助) 육군 중장
근위 1여단장 오오시마 리쿠타로(大島陸太郎) 육군 소장
도쿄도 경시청 경시총감 오구리 카즈오(小栗一雄)
고등경찰국장 아베 겐키(安倍 源基)
병력 1,483~1,558명 23,841명
피해 장교 2명 자살, 19명 처형
부사관 43명, 병사 3명, 민간인 10명 투옥
병사 4명 전사, 4명 부상
전직 총리 2명 사망
관료 1명 사망, 1명 부상
장교 1명 부상
경찰 5명 순직, 다수 부상
민간인 1명 사망, 1명 부상
목적
황도파 주도 파시즘 군사정권 수립
결과
반란 진압
영향
일본군 황도파 소멸 및 통제파의 일본 정국 장악

1. 개요2. 서론3. 진행
3.1. 배경3.2. 쿠데타로 향하는 길3.3. 쿠데타 발발3.4. 진압3.5. 이후
4. 기타5. 매체에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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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황도파 깃발.svg
황도파의 기. 사면에 적힌 문구는 존황토간(尊皇討奸)으로 천황의 뜻을 받들어 간신들을 토벌한다는 뜻이다.
1936년 ( 쇼와 11년) 2월 26일 일본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2. 서론

2·26 사건에 관한 주요 공적 기록은 완전 비공개로 사건 이후 「암흑재판」이라고 불리던 일본 육군의 군법 회의의 자료가 주된 공식 문서로 여겨져 2·26 사건을 실시간으로 기록한 1차 자료는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2019년에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옛 일본 해군이 몰래 기록, 보관하고 있던 제1급 기밀 문서 6권을 전직 토미오카 사다토시(富岡定俊) 소장[2]이 비밀리에 반출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이 발견되어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반란과 진압에 이르는 4일 간의 상세한 내용이 드러나게 되었다.

기밀 문서의 내용에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현장에 풀어 놓은 해군 「조사 부대」나 몰래 설치된 「감시 초소」로부터 그야말로 분 단위로 긴박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 영상은 새롭게 발견된 6권의 해군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일본 육군 고위 간부가 사건의 이면에 있었던 알려지지 않은 회담과 해군이 반란을 넘어선 대규모 내전[3]까지 상정해 대비했다, 그리고 히로히토의 알려지지 않은 행동도 담겨 있다.

3. 진행

3.1. 배경

황도파(皇道派)는 일본 육군의 청년 장교 파벌들 중 하나였다. 이들이 황도파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천황이 국가 수반으로서 직접적으로 친정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천황의 정치개입을 반대하고 민간인의 문민통제를 존중하는 파벌을 통제파(統制派)라고 한다.[4]

황도파들은 사악한 일본 정부의 중신들이 천황을 등에 업고 권위를 침탈하여 민생의 피를 빨아먹고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데 급급할 뿐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대내적으로는 정재계에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수년간 냉해가 지속되면서 도호쿠 지방을 비롯하여 심각한 흉년이 거듭되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농민들의 삶은 재앙적으로 파탄나고 있었는데 군인들 상당수가 농민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변혁에 대한 갈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첨언하자면 도호쿠 지방은 당시 일본에서도 개발이 더딘 지역으로 에도 막부 말기까지도 보릿고개로 인한 기아로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고 강물에는 굶어 죽은 어린이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는 실정이었다.[5] 그래서 가난한 집안은 부모가 어린 딸을 인신매매해서 창부로 팔려가는 현실이었다. 특히 일본군에서는 도호쿠 출신 청년들은 머리가 좋아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대학에 진학할 돈이 없어서 이시와라 간지처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국가 세금으로 돈도 주는 육사에 입학해서 직업군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6] 그리고 자신들이 자란 도호쿠 지방의 실상과 자신의 가족, 친우, 전우, 이웃의 여동생 같은 어린 여자애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간다는 사실에 대단히 슬퍼하고 분노했다.

계급 적체 또한 갈등을 촉발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7] 당시 일본 군대는 이미 포화상태라 장교층은 윗대가리들이 잔뜩 쌓여 있어서 밑의 청년 장교들은 계급 진급이 안 됐다. 나이 먹고 무능한 고급 장교들은 자기 자리 지키기에 급급하고 아무 일 안 해도 높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고 힘든 일은 아랫계급이 다 알아서 하는 식이었다. 육군과 해군은 서로 갈등하고 국민의 세금으로는 전함이니 항공모함이니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전쟁무기만을 늘리고 군비 확장만을 욕심냈다.[8] 불공평한 부조리에 청년 장교는 '무능하고 멍청한 윗대가리 장교를 싹 다 숙청해 버리고 우리가 천황과 담판을 지어서 권력을 쥐자'고 생각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만주사변 등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한 미국 영국과의 관계 악화 등으로 혼란과 갈등이 초래되었는데 이 혼란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극대화되었다. 국체론자들에 따르면 천황의 대권과 통수권은 각각 내각과 군부에 위임되어 있는데 해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군령부의 반대에도 내각이 런던 조약을 강행하자 과격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멋대로 말아먹던 간신들'이 이제는 아예 '신성한 통수권까지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육해군과 민간 극우파들 모두의 공분을 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 사상가들의 자극을 받은 5·15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군에 의한 정변은 가시화되고 있었고 2·26 사건은 그 절정이었다.

2·26 사건을 주동한 청년 장교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기타 잇키(北一輝) 등이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통수권이 농락 당하는' 현실에 분개하던 청년 장교들에게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비롯한 기타의 저작들은 큰 영향을 끼쳤다.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경험을 통해 혁명의 주요 기반은 군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기타의 전략전술은 '변혁'에 목말라하던 청년 장교들에게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는 간신과 재벌들을 타도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동력은 오로지 순수한 청년장교 자신들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적들을 살해한 뒤 쇼와 덴노에게 권력을 돌려주는[9] "쇼와 유신"(昭和維新)을 일으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통제파들은 '장차 다가올 미국, 소련 등 열강들과의 결전을 위해서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준비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는데 황도파 장교들은 이를 일본의 파쇼화로 보고 경계했다는 것(!).

이들이 몇 년 전부터 이런 낌새를 보였으므로 육군 고위층과 헌병 등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이런 성향인 사람들을 찾아내 체포하기도 하였으며 츠지 마사노부는 당시 이런 인물들을 찾아내 고발하였다. 특히 츠지 마사노부는 2·26 사건 직전 자신을 따르던 사관후보생 사토 가쓰로에게 불온한 움직임에 관하여 보고를 받고 그를 2·26 사건 주동자들에게 침투시켜 쿠데타 음모를 캐내려 하였다. 2·26 사건 주동자들은 처음에 구체적 답변을 회피하였으나 사토 후보생이 "청년 장교들이 미지근하게 나온다면 당신들과 절연하고 후보생들끼리라도 궐기하겠다"고 강수를 두자 마지 못해 일부 계획을 공유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2·26 사건은 이미 1934년 11월 20일 덜미가 잡혔으나 사건 관계자들은 "과격하게 나오는 후보생을 달래지 않았다가는 또 다시 5·15 사건과 같은 불상사가 터질까봐 거짓 계획으로 상황을 무마한 것"이라고 변론하였고 재판정에서 이 변론이 받아들여지면서 가벼운 처분만 받게 되었다.

참고로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이들이 이런 짓거리를 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실제로 해당 사건 가담자들의 이름들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2019년에 발견된 해군이 작성한 2·26 사건 관련된 극비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1주일도 더 전에 도쿄 육군 헌병대측 인사가 해군성을 방문하면서 해당 사건 가담자 및 살인 대상자들의 이름들을 모조리 불어 버린 탓이 컸다.

3.2. 쿠데타로 향하는 길

육군이 입헌민정당 하마구치 내각을 뒤엎고 군사독재를 현실화하기 위해 계획했던 3월 사건 당시 황도파는 육군 중진들의 정권탈취 시도를 비판하며 종국에는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후 1931년 10월 사건[10] 등을 거치면서 입헌민정당 정권이 붕괴되고 입헌정우회 이누카이 내각이 들어서자 황도파의 수장격 인물인 아라키 사다오(荒木 貞夫) 장군이 육군대신에 임명되는 등 육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황도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자파 위주의 인사가 지속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통제파를 구성하면서 아라키 등을 실각시키는 데 성공해 이후 황도파의 거두들이 차례로 거세당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3.3. 쿠데타 발발

1935년이 되자 황도파 숙청이 본 궤도에 올랐다. 황족으로서 무력한 허수아비 역할에 불과했으나 황도파 거두들의 실각 전까지 최대한 숙청을 자제할 것을 주문하던 참모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까지 태도를 바꾸어 황도파 숙청에 가담하였고 황도파의 중심인물로 여겨지던 육군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가 교육총감직에서 해임되면서 황도파 내 청년 장교 세력은 더 이상 통제파의 '전횡'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935년 8월 12일 마사키 대장을 경질했던 통제파의 중심인물 군무국장 나가타 테츠잔이 청년장교들의 큰형님격이었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 의해 참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이자와를 따르던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근위보병 제3연대ㆍ보병 제1연대ㆍ보병 제3연대ㆍ야전중포병 제7연대를 주축병력으로 삼고 살해할 주요 고위관료의 목록을 작성하였으며 결국 1936년 2월 26일에 도쿄의 주요 정부기관을 점거했다.

황도파 장교들은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당시 총리대신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지만 착각하는 바람에 매부 마츠오 덴조를 살해하였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내대신[11](전 조선 총독,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전 총리대신), 와타나베 조타로(渡邊錠太郞) 육군교육총감[12]을 살해했다. 런던 군축조약의 책임자로서 특히 시종장직을 맡으며 임금 측근에서 천황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으로 지목된 스즈키 간타로 당시 시종장 역시 살해 대상으로 지목되어 습격당했다. 스즈키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쿠데타군의 안도 데루조 대위가 병사들을 물리고 홀로 권총을 쏘았고 마지막에는 군도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했으나 그 순간 스즈키 부인이 만류하면서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스즈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스즈키는 3발을 맞았으나 운좋게도 모두 급소를 피해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시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 달리 히로히토가 아무 것도 못하는 허수아비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천황이 드물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자 쿠데타 자체의 향방에 영향이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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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총리와 그의 매부인 마츠오 덴조(松尾傳藏) 육군 대좌.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때 오카다는 수상관저에 있다가 관저에서 일하는 하녀의 방에 숨었다. 경찰 4명이 반란군에 응전해 권총사격을 했으나 곧 사살되었다. 총리의 비서이자 경호담당이기도 했던 마츠오가 총리를 대신하여 자진해서 나갔는데 오카다와 마츠오의 외모가 비슷했으므로 반란군은 마츠오를 총리로 착각하고 살해하였다. 반란군은 오인사살에 대비해 시신의 얼굴을 응접실에 걸린 총리 초상화와 대조해보기까지 했지만 구분하지 못하고 총리가 맞다고 판단했다. 총리 비서관 후쿠다 타카야스와 육군 헌병조장 코우사카 게이스케는 오카다가 생존했음을 눈치채고 관저에 빈소를 차려 사람들이 조문하게 하여 혼잡해진 틈을 타 오카다를 탈출시켰다. 오카다 총리가 탈출한 뒤 차 안에서 처음으로 한 말은 "자네, 담배 가지고 있는가?"였다. 이후 총리 관저에서 오카다의 비서이자 사위였던 사코미즈 히사쓰네[13]가 계속 마츠오의 시신을 노출시킬 경우 들킬 것을 우려해 관을 준비한 다음 시신을 천으로 감싸서 집어넣고 오카다의 자택으로 운송시켜서 오카다의 안전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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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내각총리대신들인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과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반란군은 다카하시의 사저를 기습하여 응전한 경찰을 제압하고 군도로 다카하시를 찔러 살해하였다. 사이토는 사저에 있었는데 반란군이 와서 그의 몸에 47발을 발사하여 살해했다. 사이토의 아내 사이토 하루코도 반란군의 총검에 부상당했으나 목숨은 건졌다. 하루코는 1971년에 97세로 천수를 누리다 갔다.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14] 전 외무대신은 외손녀[15] 요시다 카즈코(吉田和子)와 아타미의 유가와라 온천에서 휴가를 즐기던 도중에 반란군에게 습격당했다. 마키노 노부아키와 요시다 카즈코는 아타미 언덕으로 도주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카즈코가 추격해오는 군인들을 몸으로 가로 막고 추적을 지연시켰다. 카즈코는 훗날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와 결혼하여 아들 아소 다로 총리와 딸 아소 노부코를 낳았다. 노부코는 이후 쇼와 덴노의 막내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 토모히토[16] 친왕과 결혼하여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를 낳았다. 아버지도 본인도 고관대작, 사위도 총리, 증손대까지 총리에 왕자비 등 후대까지 집안 대대로 명문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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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타초를 점령한 병사들이다. 나가타초는 일본 국회가 있는 길 이름이다.

3.4. 진압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과 황도파 장성들이 주동자들과 면담했다. 가와시마 육군대신은 "대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쿠데타군에 즉답을 피했지만 청년 장교들의 취지서를 천황에게 상주하였다.[17] 육군 군사참의관들은 청년 장교들을 방문하여 지지를 표했고 청년 장교들은 마사키 진자부로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 정권을 건의하였다.

기타 잇키는 런던 군축조약 당시 군령부총장으로서 조약에 반대했던 가토 간지 대장에게 연락하여 해군 내에서도 협조를 구하는 등 나름 대책 마련에 힘썼고 가토 대장으로부터 해군 군령부 총감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18]이 천황을 배알하기로 했다는 답[19]을 들었다. 쇼와 천황의 첫째 동생인 야스히토 친왕은 육사동기이며 기타 잇키의 제자인 니시다 미쓰기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20][21] 상기의 고위 장성들과 일부 황족들이 지지하는 와중에 사태는 쿠데타군이나 기타 잇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정작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쇼와 덴노는 쿠데타를 지지하는 종친과 신하가 주청해도 원대복귀하라고 명령하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당황하던 쇼와 덴노였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하여 쇼와 덴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 군에게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쇼와 덴노의 노여움을 초래하였다.

육군대신은 아예 토벌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혼조 시게루 등 궐기에 호의적이었던 신하들은 "그래도 젊은 애들이 폐하께 충성하겠다고 저런 건데 좀 너그럽게 봐 주시지요."라고 권했지만 쇼와 덴노는 "충성이고 나발이고 내 군대가 내 명령도 없이 움직인 것 자체가 이미 반역이고, 그것들은 이미 내 군대가 아니다."라며 역정을 냈다. 청년 장교단으로부터 취지서를 받은 육군대신이 이를 대독하자 "왜 그것을 내 앞에서 읽느냐." 하며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다. 군부가 이들을 진압하기에 미온적이라고 질책하면서 "군부가 안 나서겠다면 내가 몸소 내 근위대를 이끌고라도 저놈들을 진압하러 가겠다." 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사흘 동안 회유와 무력시위가 잇따랐다.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복귀 명령이 결정되었고[22] 28일 5시 8분 시점에서도 일부 부대에는 여전히 전달되지 못했다. 다음날 오전 5시 8분에 이 봉칙명령이 쿠데타군에게 하달되었다. 공식적인 봉칙명령이 나오면서 쿠데타군을 부르는 칭호는 '점거부대'에서 '반항부대', 그리고 종국에는 ' 반란부대'로 바뀌었다.

쇼와 유신을 부르짖으며 궐기하고 천황의 대어심(결정)을 기다렸던 청년장교들에게 천황이 원대복귀를 명하는 봉칙명령을 내렸음은 큰 충격이었다. 자살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버티며 마사키 정권 수립 공작을 계속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28일 오후 1시, 청년 장교들이 하사관 이하는 원대복귀시키고 자신들은 자결할 생각이니 칙사를 보내달라고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을 통해 천황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천황은 "자살을 하려면 마음대로 하든지, 그런 자들에게 칙사라니 말도 안 된다." 하며 냉담히 대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가 토벌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문책하였다.

일본군은 육해군 모두 지위고하 막론하고 말단 병사 한 명까지 모두 최고 통수권자인 천황에게 속한 존재라고 규정되어, 그들이 먹고 입는 것은 물론 '숨쉬는 것' 하나까지도 천황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살고 죽는 문제조차 천황의 명령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상, 이런 무모한 봉기를 일으켜 쇼와 천황의 분노를 샀다고 해도 어쨌든 청년 장교들은 '우리는 천황의 신하이자 황군의 일원'이라고 자처했다. 그래서 본인들의 의지로 자결하더라도 역시 '천황의 자결 명령'을 받아서 행한다고 처리하고자 자결 명령 칙사를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아무리 천황의 뜻을 거스르는 봉기를 해서 관군 손에 죽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천황에게 충성하는 천황의 신하이며 엄연한 황군의 일원이라고 대내외적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한 것이다.

쇼와 천황이 그런 형식적으로나마 칙사를 보내 청년 장교들에게 자결을 명령한다는 절차를 거부한 것은 앞에서 쇼와 천황 본인이 분노해서 한 말 그대로이다. "너희는 내 신하도 황군의 일원도 아니고, 니들의 행동은 나에 대한 충성도 그 무엇도 아니며, 내 병사도 아닌 니들 목숨 같은 건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장교들 입장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쇼와 천황에게 내쳐 진 것이다. 물론 쇼와 덴노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내 군인이라면 내 명령에 따라야 하고,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너희들은 내 군인이 아니다.'라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거절에 분노한 반란군은 자결 및 원대 복귀 결정을 번복해버렸다. 반란군은 멈출 생각이 없고, 천황은 진압명령을 내리고, 참모차장인 스기야마 하지메와 계엄참모인 이시와라 간지는 강경하게 토벌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결국 가사이 계엄사령관은 태도를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군부는 병력 2만 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하였다. 28일 오후 3시 육군 헌병대는 쿠데타군의 정신적 지주인 기타 잇키를 연행하였다. 그 직전까지 기타의 저택에 있었던 니시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내뺐다가 3월에 체포되었다.

8시 30분에는 '계엄작전명령 제14호'를 근거로 '무력'에 의한 '반란부대' 진압이 명령되었다.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인근 주민들에게 긴급 피난 권고[23]가 내려진 가운데 비행기와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육군 병력뿐 아니라 해군 역시 전함 나가토 도쿄도 앞바다에 있던 제1 함대 예하 함정들도 2월 27일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전투배치지시와 함께 함포를 주요 육군 주둔지에 조준[24]하고 해군 육전대를 긴급히 편성하여[25] 쿠데타군에게 점거당한 내무부 및 외무부 청사를 탈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3일차 이후에는 일부 병력들을 해군성 경비에 투입하였다. 살해당한 이들 중 퇴역 해군 대장 출신 원로인 사이토 마코토도 있었으므로 해군은 더욱 반군에게 이를 갈았다.

같은 날 제2함대가 오사카 만에 투입되어 오사카 시내와 육군 제4사단을 상대로 전투배치 지시를 하달했다.

오전 9시, 계엄군은 NHK의 협조를 받아 본격적으로 쿠데타군의 투항과 자대복귀를 지시했다.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투항을 종용하는 방송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계엄군은 에드벌룬을 띄우고 항공기 3대를 동원해 무력 시위 겸 부대 복귀를 지시하는 내용의 삐라를 도쿄 시내에 살포했다.

2·26 사건 주동자들은 척살대상과 점거장소만 정했을 뿐 궐기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어떤 통일된 계획이 없었고[26] 상층의 명확한 협조자를 포섭해 두지도 못했다.[27] 그저 간신들을 소탕하고 천황의 대어심(결정)을 기다린다는 것이 전부였다.[28] 특히 하사관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장교들에게 끌려온 터라 불안해했다.[29]
下士官兵ニ吿グ
하사관·병에게 고함

一、今カラデモ遲クナイカラ原隊ヘ歸レ
\1.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자대로 복귀하라
二、抵抗スル者ハ全部逆賊デアルカラ射殺スル
2. 항거하는 자는 전부 역적이므로 사살한다
三、オ前達ノ父母兄弟ハ國賊トナルノデ皆泣イテオルゾ
3. 너희들의 부모형제는 국가의 적이 되어 모두 울고 있다
二月二十九日   戒嚴司令部
2월 29일 계엄 사령부
반란군 측 하사관과 병의 투항을 독려하는 삐라다. #

  • 반란군을 설득하는 내용이 담긴 라디오 방송. 스크립트는 다음과 같다.
戒嚴司令部發表
계엄사령부 발표

兵に告ぐ
장병들에게 고한다.

敕命が發せられたのである。
칙령은 이미 하달되었다.

旣に天皇陛下の御命令が發せられたのである。
이미 천황 폐하의 어명이 내려졌다.

お前達は上官の命令を正しいものと信じて絶對服從をして、誠心誠意活動して來たのであろうが、お前達の上官のした行爲は間違ってゐたのである。
너희는 상관의 명령을 옳은 것으로 믿고 절대 복종하여 성심성의껏 활동해 왔겠지만 너희 상관이 한 행동들은 잘못되었다.

旣に敕命天皇陛下の御命令によってお前達は皆原隊に復歸せよと仰せられたのである。
이미 천황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에 따라 너희는 모두 자대로 복귀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此上お前達が飽くまでも抵抗したならば、それは敕命に反抗することとなり逆賊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만일 너희가 끝까지 저항한다면 그것은 폐하의 명령에 반항하는 것이고 역적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正しいことをしてゐると信じてゐたのに、それが間違って居ったと知ったならば、徒らに今迄の行がゝりや、義理上からいつまでも反抗的態度をとって天皇陛下にそむき奉り、逆賊としての汚名を永久に受ける樣なことがあってはならない。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동안 저질러온 행동이나 상관과의 의리를 핑계로 계속 반항적 태도를 취하여 천황 폐하께 반기를 들어 역적으로서의 오명을 영원히 뒤집어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今からでも決して遲くはないから直ちに抵抗をやめて軍旗の下に復歸する樣にせよ。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즉각 저항을 그만두고 지휘체계 아래로[30] 복귀하도록 하라.

そうしたら今迄の罪も許されるのである。
그리하면 지금까지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

お前達の父兄は勿論のこと、国民全体もそれを心から祈ってゐるのである。
너희의 부모형제는 물론 모든 국민 전체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速かに現在の位置を棄てゝ歸って來い。
신속하게 현재의 위치를 이탈해 자대로 복귀하라.

戒嚴司令官 香椎中將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ebruary_26_Incident_Balloon_Banner.jpg

일본군 반란군에게 투항을 독려하는 애드벌룬. " 칙명은 하달되었다. 군기에 맞서지 마라."라고 적혀 있다.

간신들을 제거하여 천황을 떠받들고 국가를 개조한다는 대의명분과 애국심으로 궐기했다고 생각하던 청년장교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의 귀순 전단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앞서 스즈키 간타로를 습격한 바 있던 안도 데루조 대위는 전단을 보고 크게 격노하여 계엄군의 전차 앞에 드러누웠다. 그러고 "전차에 저항하지 말라. 모두 여기서 깔려 죽자." 하고 큰 소리로 명령했고 이에 따라 하사관과 병사들 30여 명이 도로에 드러누웠다. 30m 앞까지 다가온 전차는 이 광경에 당황하여 물러났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3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roops_occupying_Nagata-cho_2.jpg

사진사를 겨누는 반란군들.

결국 이들은 투항했다. 2월 29일 오후 2시 무렵 병사들과 하사관들이 먼저 투항하고 오후 5시에는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어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와 고노 히사시 대위는 자결했고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파면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2년에 5.15 사건을 일으킨 해군 장교들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생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으므로 그와 비슷한 처분을 기대했으나, 앞서와 달리 천황의 이름을 팔아먹은 데다 단순 테러 수준을 넘긴 본격적인 쿠데타였기에 중형이 선고됐다. 무엇보다도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사이토 마코토를 살해한 일은 쿠데타이기 이전에 고관대작을 죽인 일이기 때문에 사형 아니면 달리 내릴 형벌이 없었다.

그해 7월 현역 육군 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총살되었다.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을 습격했던 안도 데루조 대위만 유일하게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지 않고 대신 지치부노미야 전하 만세를 외치고 죽었는데, 자신들을 오히려 역적 취급한 천황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표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타 잇키와 니시다 미쓰기는 재판이 조금 더 오래 걸려서 1년 반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이 두 사람의 사형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엄연한 민간인에게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때린 것도 절차적으로 문제였거니와, 두 사람은 쿠데타 주모자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쳤을 뿐 쿠데타 계획과 실행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아서 니시다는 쿠데타 직전, 기타는 쿠데타 당일에야 거사를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재야우익과 육군 황도파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했던 마당발 니시다는 그렇다 쳐도 기타는 중일전쟁을 막아보겠답시고 중국으로 건너갈 준비에 한참이었기 때문에[32] 쿠데타 당일까지 이에 연루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33]

하지만 군부는 쿠데타의 실체적 배경인 군 내부의 파벌 싸움이 이런 대형사고로 만천하에 드러나서 병영국가 수립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외부의 불순분자들이 순진한 위관들에게 빨간 물을 들인 것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래서 기타와 니시다를 희생양으로 삼아 극형을 내린다는 방침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34][35] 결과적으로 기타는 제자 니시다와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淺一) 중위를 비롯한 일부 추종자들과 함께 총살형으로 숨을 거두었다.

3.5. 이후

비록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황도파가 몰락하면서 도조 히데키의 통제파가 군을 완전히 장악한 탓에 결과적으로 군부의 권력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만큼 강해지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총리로 취임한 히로타 고키는 처음에는 군부를 견제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국방 예산을 올리고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부활시켜야 했다. 그 후에 군부는 무려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을 받아들여 히로히토가 총리로 지명한 우가키 가즈시게의 취임을 반발하여 무산시키고, 자신들 입맛에 맞는 하야시 센주로를 총리 자리에 앉히며 정부를 통째로 쥐락펴락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다음 총리인 고노에 후미마로 또한 군부에게 끌려다니기만 했으며, 이윽고 군부의 수장인 도조 히데키가 총리 자리에 오르며 군부는 거의 일본이 패전하는 순간까지 아예 나라를 송두리째 삼키게 된다.[36]

통제파가 군에 이어 정권까지 완전히 장악하면서 결국 일본은 군부독재의 수렁에 빠졌고, 그들이 주도한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의하여 국정은 파탄에 이르러 결국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는 등 대규모 희생 끝에 패전에 이르러서야 군부의 폭주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해당 사건으로 육군에서 황도파는 소멸되었지만, 정작 통제파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지며 군부의 힘이 끝없이 치솟아버리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37]

간혹 이 사건이 천황의 통수권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거나 천황의 권위를 드높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는 오해에 가깝다. 이 사건이 유사시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끼칠 정도의 힘이 천황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천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첫번째로, 천황은 자신이 총애하던 중신들이 살해당한 시점부터 크게 분노하여 즉시 진압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는 즉각 이행되지 않았다. 육군대신과 계엄사령관은 반란군이 자신들과 같은 파벌해 속한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진압명령을 즉각 이행하기는커녕 천황을 역으로 설득하려 하고, 며칠동안 천황의 명령과는 반대로 지리멸렬한 협상전을 벌이며 시간만 낭비했다. 두번째로, 애초에 이 쿠데타는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기에 천황이 동조하지 않는 순간 성공할 수가 없는 구멍투성이 쿠데타였다. 이들은 군을 장악하지도, 황궁을 장악하지도 못한 상태였다.[38] 육군의 통제파와 해군 전체는 언제든지 이들을 쓸어버릴 생각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었고, 천황은 궁에 안전하게 머무르고 있는 데다 본인의 측근들을 잃어 분노까지 폭발한 상황에서 반란군에게는 이미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반란군이 다 이긴 싸움이 천황의 말 한마디로 뒤집힌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반란군이 천황을 끌어내리고 그의 아우인 야스히토를 즉위시키려 했다는 뜬소문까지 퍼진 것은 천황의 권위에 큰 흠집을 내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천황에게 무시 못할 영향력이 남아있음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군부를 통제하기 어려울 수준으로 상황이 위험해졌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청년장교들에 편승해 집권을 꾀했던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 아라키 사다오 대장 등 황도파 지도자들은 궐기군과의 연관성을 부인해 법적 심판을 피했다. 마사키나 아라키 등이 예비역으로 예편되어 군 내 황도파 세력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에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한 사례도 있고 예편된 이들 역시 각료나 정객으로서 잘 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피를 본 것은 청년장교들 뿐이었다. 한편, 유죄를 선고받은 궐기군 관계자들은 일본이 패전한 이후 GHQ에 의해 강요된 정치범 사면 정책에 따라 1946년에 모두 사면, 복권되었다고 한다. #[39]
전쟁 전 발생한 쿠데타인 ' 5·15 사건'에는 경시청이 습격당했고, '2·26 사건'에서는 5명의 경찰관이 순직했습니다. 이에 경찰들은 지금도 '자위대의 쿠데타'를 항상 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전과'가 있는 이상, 가능성이 제로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 戦前に発生したクーデター『五・一五事件』では警視庁が襲撃され、『二・二六事件』では警察官5名の殉職者を出しています。警察は現在でも『自衛隊部隊によるクーデター』を警戒している。馬鹿げた話かもしれませんが、“前科”がある以上、可能性はゼロではないと考えているのです。)
경시청 관계자의 증언 中.
한편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5·15 사건과 이 사건 때문에 일본 경찰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공안경찰에 자위대 감시반(自衛隊監視班)까지 만들어 가면서 자위대의 군사반란을 경계하고 있다.

4. 기타

“우리가 미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고, 마침내 한길로 치솟을 뿐!”
— 노나카 시로 대위
  • 당시 영친왕 일본 육군 대좌로서 도쿄 근처에 있는 우츠노미야 59연대 연대장이었다. 2월 28일엔 반란군 진압을 위해 연대에서 긴급하게 차출한 혼성대대를 이끌고 상경해 29일 0시에 신주쿠역에 도착하여 구단에 있는 호텔에 주둔하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대치했다. 2월 29일에 반란군이 와해되었으니 대치는 그리 길게 끌지는 않았다.
  • 당시 주동자들은 처형당하고 병 등 단순 가담자들은 "국가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으니 국가를 위해 죽어라"는 명목으로 만주로 부대째 배치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인맥으로 만주군으로 복무한 자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건국동맹에 가담했던 박승환은 만주군 내부에 있는 이런 '불순자'들의 협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 주동자 중 종신형 판결을 받은 생존자인 이케다 토시히코(池田俊彦) 소위는 당시 오카다 케이스케 총리 관저 습격사건에 가담한 8명 중 하나로 유일하게 종신형 판결을 받고 치바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때 감방 동기 중 한 사람이 바로 박열이었다고 한다. 이케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박준식이라고도 하는 남자에게 왜 항일운동을 하게 되었느냐 물어보았더니, ' 자신의 고향에서는 풍년이 들 때 돈을 빌려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 찾아가면 선심을 쓰면서 안 갚아도 된다고 돌아가게 했는데,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떻게 알고 바로 찾아가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했다. 그래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을 많이 보고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고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 왜냐하면 내 고향에서도 똑같은 수법으로 땅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열 씨는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1941년에 출소한 그는 평생 일반 직장인으로 생활하면서 먼저 간 동기들의 명복을 빌었고 1980년대에 당시 사건기록을 촬영·복사하려 했다가 그러지 못하자 피고인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도쿄지방재판소 문서고에 찾아가 직접 열람하고 내용을 한 자 한 자 필사하여 세상에 공개했으며 이 기록은 2·26 사건에 대해 가장 신뢰성이 높은 사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케다 토시히코는 이후에도 NHK 2·26 특집 다큐에 출연해 증언하기도 했고 수십년을 살면서 쇼와 덴노의 죽음도 목격하고 2002년에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은 훗날 요미우리 신문과 2·26 사건을 회고하는 인터뷰에서 "만일 형님을 정말 신으로 섬겼더라면, 어떻게 반란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40]
  • 하타 야와라 사이타마현지사가 이등병 시절 반란군 부대에 있어서 상관의 명령으로 경시청을 점거했다고 한다.
  • 당시 아사히 신문사도 반란군들의 표적이 되어 습격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고 반군이 윤전기를 때려부수는 데 그쳤다.
  • 이 사건과 5·15 사건에는 아주 골 때리는 공통점이 있는데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니치렌종이라는 불교 종파가 사상적으로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2·26 사건의 사상적 지도자 취급을 받으며 총살당한 기타 잇키와 5·15 사건의 배경이 되는 혈맹단 사건의 이노우에 닛쇼와 그 스승격인 다나카 지카쿠가 일련종 신도로 시작했고 법화혁명을 주장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 다만 다나카 지카쿠는 니치렌을 강조하면서 불교와 국가의 통합을 주장한 극우파 사상가가 되었고 기타 잇키는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니치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하면서 좌익 법화혁명 드립을 쳤다는 차이가 있다. 덤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시하라 간지 역시 다나카 지카쿠의 열렬한 숭배자로 거의 오컬트 수준인 국가전략을 꺼내들었으니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데에는 일련종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창가학회의 경우 군국주의에 저항하다가 교주가 투옥되고 사망하기까지 했으니 아이러니하다. 참고로 이시하라 간지는 사건 발생 2일차에 육군대장 마사키와 단독 대담을 통해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 이 사건 이후 아베 사다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베 사다를 2·26 사건으로 어두워진 사회 분위기를 밝혀 주는 여신 같은 존재로 떠받들기까지 했다.
  • 김재규 10.26 사건 이후 재판정에서 2.26 사건 당시 주동자들만 사형당했음을 언급하며 "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 부하들을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와 각별한 사이였던 이종찬은 김재규의 변호인단에 2.26 사건 관련 판례 자료를 건네며 '김재규는 어렵더라도 그의 부하들은 구명해보라'는 의향을 전하기도 했다.
  • 이 사건에 사상적 영향을 미친 기타 잇키는 천황 신격화를 싫어했다고 한다.[41] 기타는 "천황의 일본과 그 국민"을 "일본과 그 국민의 천황"으로 뒤집으려 한 인물로서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기타에게 천황은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를 할 연장일 뿐이다. 후세 다쓰지조차 대가 끊어져 천황제가 자연소멸하기를 바란 걸 생각하면 기타가 얼마나 골때리는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기타의 영향을 받은 2·26 청년장교들은 천황을 도구로 삼는다는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진심으로 천황에게 충성했고, 이것이 그들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되었다. 함께 총살되던 청년장교들이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기타는 거부했다. 기타의 사세구는 “ 어린 임금[42]에게 투구 뺏겨 진 싸움([ruby(若殿,ruby=わかとの)]に [ruby(兜,ruby=かぶと)][ruby(取,ruby=と)]られて [ruby(負,ruby=ま)]け [ruby(戰,ruby=いくさ)])”이다.
  • 당시 쿠데타 주역들이 부르던 군가인 쇼와유신의 노래(昭和維新の歌) # 금지곡이 되었다. 참고로 이 노래의 작사자 미카미 다쿠(三上卓)는 5.15 사건과 패전 이후 삼무사건에 참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 위의 2월 29일 살포된 삐라는 2010년대 후반 들어 각종 패러디 소재로 활용되었다.( 트위터 이미지 검색에서 ニ告グ(에게 고함)으로 검색한 결과)
  • 2·26 사건 중 일부 궐기군 병력들이 봉쇄망을 뚫고 당시 참모총장이자 의친(懿親)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의 왕부(王府)에 가서 그가 자기네들 앞에 나타나서 자기네들의 주장을 쇼와 덴노에게 전달해 주기를 원했으나 결국 간인노미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 해군 군령부가 작성한 해군 기밀문서가 2019년에 공개되었는데 해당 문서에서는 해군측 역시 사전에 이런 것이 벌어질지 알았고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했는지 사건 발생 직후에는 당시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거의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43]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신속하게 궐기군들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감시초소 수 개소를 설치하여 실시간으로 궐기군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육군이 설치한 계엄사령부에 해군 장교를 신속하게 파견하여 육군측 동향을 살피고 궐기군이 점거한 주요 국가 시설들에게 사복차림을 한 첩보요원들까지 동원하여 정보수집에 나서며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쇼와 덴노와 당시 해군 군령부 총감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간의 대화나 육군대신이 궐기군들과 대화를 마친 다음에 부른 육군 내 궐기군측에 호의적인 마사키 대장과의 대화, 마사키 대장과 이시하라 간지 당시 대좌간의 단독 대화, 근위사단 대위와 궐기부대 간부가 문부대신 관저에서 가진 대화 등도 상당히 상세하게 파악할 정도의 고퀄리티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해군 첩보요원들이 얼마나 폭넓게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참고로 해당 기밀문서는 일제가 패망할 당시 해군 군령부 사령관으로서 미주리함에서 패전 서명식에 참석했던 토미오카 해군 제독( 소장)이 패전 후에 문서고 깊숙한 곳에 숨겨버린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 쇼와 덴노는 말년까지 이 사건의 PTSD에 시달렸다. 매 해마다 2월 26일이 되면 잠들기 전 시종에게 도쿄 내 특이사항에 대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고 먼 훗날 자신이 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2개의 사건들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당연히 2차대전 패전.
  • 해군측 기밀문서에 의하면 그동안 해군에 동조자가 없었다는 추론과 달리 오가사와라 예비역 중장이 사건발생 이틀째 후시미노미야 친왕 등을 위수로 한 해군 고위층들과 접촉하여 이들에 협조하도록 설득했다는 게 밝혀졌다.
  • 5·15 사건 당시 암살 대상이 되어 암살될 뻔했던 찰리 채플린은 이때도 도쿄에 있었다. 4년만에 일본을 다시 방문해 도쿄에 머물던 차에 2·26 사건이 터졌던 것. 그나마 이때는 5·15 사건과는 달리 채플린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 * 관련 인물들의 실제 사건 당시 전화 녹취록이 남아있다.
  • 5·15 사건과 함께 일본 정치인들에게 총리 공관에 귀신이 나온다 미신이 퍼지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며, 지금도 일본 총리들은 총리 공관에 거주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 이 사건은 중국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는데, 황도파는 반소련 통제파는 반중국을 공개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2·26이 진압된 다음 해인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 사건 당시 소련 스파이인 리하르트 조르게 도쿄에 있었다. 현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조르게의 눈길을 끌었으며 그는 사건에 대한 정보, 심지어 황도파와 통제파의 성향까지 상세히 조사해 소련과 독일에 보고서를 보냈다.

5. 매체에서

  • 쇼치쿠 뉴웨이브 감독인 요시다 요시시게의 쿠데타는 이 사건을 영화화했다.
  • 무라카미 모토카의 만화 에서도 2·26 사건이 비중 있게 나온다.
  • 2006년작 일본 성인게임 마브러브 얼터너티브에 이 사건을 좀 더 과장해서 만든 이벤트인 12.5 사건이 있다.
  • 2016년작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비동맹주의 일본 루트로 진행할 시 해당 사건이 뉴스로 뜬다.
  • THE LAST EMPIRE라는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역전된 Hearts of Iron IV에서도 등장한다. 한일 역전이라 서울에서 일어났으며 동학에 기반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등장한다.
  • 미시마 유키오는 11살의 나이로 2·26 사건을 경험했는데 미시마가 다니던 가쿠슈인 초등과 바로 뒤편이 사이토 마코토의 자택이었다. 이날 미시마는 총리가 죽었다는 친구의 말에 '총리가 뭔데?'라는 식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이후 패전을 겪으면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우국, 십일의 국화, 영령의 소리 3부작을 쓴다. 한국에서는 신경숙 표절한 우국(憂國)이 제일 유명한데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다케야마 중위'는 진압군 측에서 황도파 반란군에 가담한 친구들을 사살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국가와 벗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위는 결국 할복을 택하고 그의 아내 '레이코'도 남편을 따라 자결한다. 묘하게도 미시마는 훗날 중위처럼 군복을 입고 할복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국은 미시마의 2·26 3부작 중에서 주인공이 신혼이라는 이유로 궐기군에서 빠졌다는 점, 주인공이 치중병이었다는 점 등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 때문에 2·26을 단순한 배경으로 차용한 소설로 여겨져서 2·26 3부작 중 제일 비정치적 소설로 평가되었다는 점이다.
  •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으로 꼽히는 마츠모토 세이초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주간문예지 《문예춘추》에 《쇼와사 발굴》(昭和史発掘)이라는 제목으로 쇼와 시대의 은폐되고 잊혀졌던 여러 사건들과 그 정치적 내막을 관계자 취재나 사료에 근거한 논픽션을 연재하였는데 전체 9권의 단행본에서 5권부터 9권까지 사실상 절반 이상의 분량이 이 2·26 사건에 할애되어 있다. 참고로 단행본 1권에는 조선인 박열의 이른바 '박열 대역사건'(朴烈大逆事件)이 실려 있으며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가모우 저택사건'은 2·26 사건 당시로의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표현력으로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상상하기 좋다.
[navertv(29608920)]
[다큐] 전모(全貌) 2·26 사건 완전판[44]
  • NHK 스페셜에서 본 주제를 다룬 내용을 방영했다. 위에 올린 영상이 이를 다루고 있다.
  • 대체역사소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는 작중 등장하는 독일발 파시즘 사상인 로젠바움주의를 프란츠 할더를 동해 공부한 황도파가 이 사상을 민간에도 넓게 퍼트려서 암살과 테러가 아닌 거대한 민중운동인 잇키가 발생하여 천황제 파시즘이 탄생하고 반란도 성공하여 히로히토 역시 받아들인다.
  • 애니메이션 YAWARA!에서 주인공 이노쿠마 야와라의 조부 이노쿠마 지고로가 이 사건을 언급한다. 이 사건이 있을 무렵, 주인공의 조모인 카네코와의 만남과 자신의 연애관에 대해 얘기하려하자 야와라가 "이 이야기가 시작되면 2~3시간이나 걸린다" 며 이야기를 막으려 시도한다.

6. 관련 문서



[1] 쿠데타를 종용하는 문건을 돌려 파면되었다. [2] 해군 군령부 제1부장으로 1945년 9월 2일 미 해군의 미주리 전함에서 행해진 항복문서 조인식에도 참석하였다. [3] 일본 해군은 연합 함대의 전함을 주력으로 하는 제1함대까지 동원(전함 나가토, 후소, 하루나, 키리시마가 소속)되어 반란군인 육군의 궐기 부대가 점령한 치요다구의 국회의사당을 함포 사격으로 날려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4] 이에 반해 공통점도 있다. 양측 모두 군부지배체제를 추구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2·26 쿠데타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의 붕괴와 군부지배가 강화된 이유가 이 두 파벌의 공통점 때문이었다. [5] 실제로 도호쿠는 쇼와 시대 말기까지 시골 깡촌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정도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숨겨진 검, 오니노츠메에 이런 실상이 잘 그려진다. [6] 동서양을 막론하고 머리는 좋지만 가난하고 빽 없는 서러운 청년들에게 있어서 군대는 사실상 유일한 사회 발판이자 동시에 출세의 동앗줄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전두광이 위관-영관급 하나회 장교들에게 느그들 다 서울대 갈 수 있었는데 돈 없고 빽 없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도 주는 육사 온 거 아니냐고 일갈한게 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나온거다. [7]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정변도 알고 보면 진급이 늦어지던 육사 8기생도들이 그 배경에 있다. [8] 만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은 당시의 이런 사정을 신랄하게 까고 있다. [9] 2·26 사건 당시 궐기한 청년장교들의 사상적 토대였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기타 잇키는 천황의 존재를 천황기관설에 입각해서 바라보았다. 즉 천황 절대주의가 아닌 국민의 천황으로서 하나의 '국가기관'으로 기능하여 변혁에 정당성을 제공해 줄 얼굴마담이었다. 따라서 기타의 뜻대로라면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구실로 초헌법적 급진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궐기한 청년장교들은 천황에 대한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 시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바라보았고,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면 천황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오판을 했다. 이는 결국 쿠데타의 패착으로 이어졌다. [10] 1931년 10월에 만주에 전개한 관동군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를 빌미로 육군이 정권을 전복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쿠데타 시도다. [11] 內大臣. 궁중에서 천황을 항상 모시고 보필하며 궁정의 문서사무 등을 맡았다. 일본 율령제 시기부터 설치된 내대신과는 이름만 같다. 내각이 현실 권력을 지녔다면 2·26 당시의 내대신은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권위가 있었다. 내대신이라는 명칭 때문에 내무성의 수장인 내무대신의 준말로 오인되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내대신과 내무대신은 궁정과 내각이라는 다른 조직에 속한 다른 관직이었다. 2·26 사건 당시 오카다 내각의 내무대신은 고토 후미오(後藤文夫)였다. (비록 무사히 탈출했지만) 오카다 총리가 난리통에 잠시 사망한 것으로 착각되자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내무대신으로서 이틀간 잠시 총리 임시 대리를 지냈다. 그런데 오카다가 살아돌아오자 쇼와 덴노는 그를 경질시켰고 이에 반발해 오카다를 탄핵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12] 참모총장, 육군대신과 함께 일본 육군의 3대 수장이었다. [13] 궁성사건 당시 내각 서기관장이었다. [14] 내각제 출범 이전에 사실상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역할을 수행(명목상으로는 태정대신이지만 실권은 내무경이 갖고 있었음)한 오쿠보 도시미치 초대 내무경의 차남이지만 마키노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다. [15] 총리가 되는 요시다 시게루와 결혼한 장녀 요시다 유키코(吉田雪子)의 딸이다. [16] 나루히토 덴노의 당숙이다. [17] 하지만 해군 기밀 문서에 의하면 당시 육군대신은 주저하던 중 쿠데타군의 협박에 일단 구두로 동조한다고 밝혔고 그 결과가 취지서가 천황에게 간 것이라고 한다. [18] 육군 측의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에게는 조카들 중 하나지만, 고토히토의 육군 참모총장 등장에 해군측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히로야스 왕을 군령부 총감에 올린 것이다. 다른 미야케지만 친척인 이유가 있다. 고토히토 친왕은 원래 후시미노미야의 서자였으나, 덴노가를 배출한 직궁가 간인노미야가 단절될 위기에 몰리자 덴노가 직접 그를 간인노미야로 입양시켰다. 그 덕분에 당시 세습친왕가들 중에서 유일한 친왕 작위를 받았고, 고토히토 친왕 이후 간인노미야의 덴노 승계서열이 세습친왕가 중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19] 해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쇼와 덴노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을 보자마자 "해군 장교들은 이들 쿠데타군에 가담하지 않을까."라고 물었고 후시미노미야는 "그런 일 없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쇼와 덴노는 해군 육전대 지휘관에 대해서 조건을 거는 등 해군이 가담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해군이 이번 사건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확인한 이후에는 쇼와 덴노가 대본영 해군에다가 공식 진압명령을 3번이나 내리면서 사실상 해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20] 히로히토가 쿠데타 강경 진압을 명령한 데엔 이런 배경도 있었다. 야스히토가 황도파를 등에 업고 자신을 타도하고 황위를 찬탈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히로히토를 평소 같지 않은 강경 대응으로 나오게 한 것. [21] 또, 당시 오카다 내각에서 입헌민정당 총재로서 입각해있었던 마치다 추지 상공대신이 '단연하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패닉이 일어나서 금융 방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라고 조언해 히로히토의 토벌 방침을 뒷받힘 한 것도 한 몫 했다. # [22] 봉칙명령을 하달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 중장이나 쿠데타군에게 이를 전달하러 간 코후지 육군소좌 등도 쿠데타군에게 동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명령이 전달되는 과정이 다소 지연되었다고 한다. [23] 대피장소는 학교나 극장이였다. [24] 당시를 기록한 해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이들 제1함대의 목표 중에는 당시 쿠데타군게 점거된 제국의회, 즉 국회도 있었다. 해군 기밀문서에서도 포격시 국회 인근에 있는 해군 측 감시초소에 영향이 미칠지 논의하였으니, 여차하면 국회를 점거한 쿠데타군을 대상으로 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25] 당시 해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20만발 이상의 탄약이 이번 사건 제압을 위하여 육전대 병력들에게 불출되었으며 긴급 소집된 이들 병력 규모는 대략 연대급으로 추정되며 사건 발생 3일차 이후에는 이들에게 방독면까지 지급하였다. [26] 가령 군사정부를 수립할지 여부, 기타의 국가개조론을 그대로 적용할지 여부를 두고도 주동자들 간 생각이 달랐다. [27]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고위인사들도 많았고 상술한 바와 같이 실제로 협력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거사에 가담한다는 명확한 협조를 받아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군사행동이나 사후수습에 협조가 절실했던 이들이 포섭되지 않은 것은 패착 중 하나였다. [28] 기타 잇키는 이에 대해 본인이 궐기를 지휘했다면 궁성부터 점령했을 것이라며 순진하게 천황을 맹신한 장교단을 혹평했다. [29] 해당 사건을 다룬 NHK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촬영 당시 103세였던 쿠데타군 중 하나는 자신과 동료들이 있었던 국회의사당으로 오는 전차들의 소리를 듣고서야 그제서야 자기들이 반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30] 원문은 "군기 아래로" [31] 안도 데루조는 결국 자살하려고 했는데 심복 병사가 만류하자 이렇게 울먹였다고 한다. "언젠가 자네가 내게 '농가의 상황을 중대장님은 알고 계시냐'고 따진 적이 있었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하지만 자네가 걱정하는 농촌도 끝내 구원하지 못하고 말았군." 말을 마친 안도는 뒤이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법정에서 선고받은 사형으로 죽게 되었다. [32] 신해혁명 참여자였던 기타는 국민당 인사들과 안면이 있었다. [33] 거사를 전달받은 후에는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정국을 만들기 위해서 거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쿠데타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 부외자에 머물렀다. [34] 혈맹단 사건에서도 테러범들이 사용한 권총이 해군 내 협조자에게서 얻은 것이라는 진술이 나왔지만 민간인 참여자들만 처벌되고 해군 내 참여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혈맹단 잔당들이 5·15 사건을 일으킨 것. 2·26 사건 때도 혈맹단 사건의 사후처리를 그대로 따랐다. [35] 이때 반란 자금에 관련된 전화 통화내용을 지어냈는데 기타 본인은 앞서 청년장교들이 사형되자 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신을 사형시켜 달라고 탄원했다. [36] 심지어 도조가 사이판 전투 패배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에도 그의 꼭두각시인 고이소 구니아키가 후임 총리로 취임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패전이 코 앞까지 다가왔을 때에는 전쟁을 일으킨 도조의 입지가 흔들린 덕에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스즈키 간타로가 총리로 임명될 수 있었으나, 여전히 내각이 도조와 육군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37] 물론 해군은 파벌에 상관없이 여전히 통제파에게 적대적이었지만, 해군의 정치권력은 단 한번도 육군만큼 강했던 적이 없기에 결국 그들의 위세를 누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38] 황도파의 장성급 인물들은 반란군을 옹호했을 뿐, 가담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육군성과 참모본부에는 당연히 통제파 장교들도 다수 섞여있었다. [39] 다만 그 사면복권 사실이 생존했던 당사자나 유족들에게 따로 공지되지 않아 수십년이 지나서야 사면, 복권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40] 이는 반란군 역시 천황을 신으로 숭배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메이지 유신 자체가 권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천황을 팔아 '쇼군이 행사하던 국권을 본래대로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시작했고 이것저것 서양의 절대군주와 같은 환상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다 붙이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한 얼굴마담으로 천황을 내세운 것뿐이었다. [41] 참고로 기타는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당시 박열을 피신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 우익 노선과 사회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짬뽕된 경우라 행적에 모순점이 꽤 생긴 듯하다. [42] 와카도노(わかとの)는 도련님이 아니라 유주(幼主)다. 참고 단성소에서 선왕의 고아 운운하듯이 비꼰 것이다. [43] 기밀문서 기록에 의하면 해군성 당직사관이 해당 사건에 대한 초동 보고를 들은 게 오전 7시였고 그때조차도 간략하게나마 상황 파악을 했고 이후 해군으로 실시간으로 들어온 정보들은 사건 종료 후 수사를 통해서 밝혀진 진실과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44] 2019년 8월 15일 방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