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0:03:46

자살 사이트 연쇄 살인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건 상세3. 범인4. 판결

1. 개요

自殺サイト連続殺人事件

한국어 상세 기사

파일:마에우에 히로시.jpg

현장 검증을 하는 마에우에.

2005년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거주하던 파견사원 마에우에 히로시(前上 博, 당시 36세)가 3명의 남녀를 살해한 사건.

자살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피해자들을 "함께 동반 자살하자"는 이유로 만난 후 살해했다. 애초에 자신은 자살할 생각이 없었으며 사람이 질식하는 표정을 보면 흥분하는 성적 취향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

2. 사건 상세

첫번째 피해자인 A씨(여, 당시 25세 / 오사카부 토요나카시 거주)는 1998년경부터 히키코모리 상태가 되어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지만 마음의 병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급기야 자살 충동을 느껴 자살 사이트에까지 드나들게 되었는데 2004년 12월경 자살 사이트를 통해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마에우에 히로시를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20회 정도 메일을 주고받았으며 "연탄으로 동반자살하자"는 마에우에의 제안에 두 사람은 2005년 2월 19일에 만나게 되었다.

마에우에는 A씨를 만나기 전 렌터카를 대여하고 비닐 테이프 등 살해에 사용할 도구를 미리 준비해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A씨와 만난 후에는 차를 타고 인적이 드문 산의 주차장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증거인멸을 위해 그녀에게 서로 주고받은 문자를 지우도록 요구했다. 이후 렌터카 뒷자리에서 A씨의 손발을 묶은 뒤 신나를 적신 거즈나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아 여러 번 실신시키면서 괴롭혔다. 이윽고 A씨를 질식시켜 살해한 마에우에는 오사카부 카와치나가노시 카가타강변에 그녀의 시체를 유기했다. A씨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죽는 모습에 흥분을 느낀 마에우에는 범행 다음날 다시 시체를 유기한 곳을 찾아가 디지털 카메라로 그녀의 시체를 촬영하는 등 엽기적인 행동을 했다.

2005년 2월 23일 시체가 발견되었고 같은 해 8월 5일 A씨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마에우에 히로시가 체포됐는데 체포 후 A씨 살해 혐의를 인정하고 "남자 여자 상관없이 입을 막고 괴로워하는 모습에 흥분을 느낀다. 고통스러워 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난 자살할 생각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마에우에의 집에서는 여성을 묶고 입과 코를 압박해 질식시키는 영상이 나오는 시판 음란 비디오가 발견되었으며 그는 A씨뿐만 아니라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2명을 추가로 살해했다는 것을 자백했다.

두번째 피해자인 B씨(남, 당시 14세 / 효고현 고베시 거주)는 2005년 5월 21일 친구에게는 "자살사이트에서 만난 오사카의 남성과 만나러 간다." 는 문자를 남기고 가출한 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1] 마에우에와 B씨는 2005년 5월 21일 오사카부 오사카시 아베노구에 위치한 JR 한와선 미나미타나베역에서 만났고 마에우에는 A씨와 같은 방법으로 B씨를 살해했는데 살해 후 B씨의 신원이 발각되지 않게 옷을 벗겨 시체를 유기했으며 B씨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IC 레코더에 녹음한 음성으로 몸값 400만엔을 요구했으나 실제로 받지는 못했다. 그 분풀이로 B씨를 살해했다고 B씨의 가족에게 알렸지만 범행이 발각되지는 않았다. 마에우에의 자백 후 2005년 8월 6일 수색을 통해 오사카부 이즈미시의 산중에서 B씨의 시체를 발견했다.

세번째 피해자는 C씨(남, 당시 21세 /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 거주)는 미에현 출신으로 킨키대학교 3학년이였으며 학교 때문에 히가시오사카시에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2005년 6월 10일 자살 사이트를 통해 마에우에를 알게 되었고 그에 의해 다른 피해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됐다. 6월 10일 이후 사라진 C씨의 행방을 찾기 위해 가족들은 실종신고를 해놓은 상태였다. 2005년 8월 7일 수색을 통해 오사카부 카와치나가노시의 카가타의 숲에서 백골화된 C씨의 시체를 발견했다.[2]

3. 범인

마에우에 히로시는 1968년 4인 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전직 경찰관이였다. 이웃 및 주변인들은 그가 온순하고 눈에 띄지 않는 성격으로, 얌전하고 성실하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괴인협회(유튜버)가 밝힌 내용으로는 "이는 사실 그의 아버지가 굉장히 엄격해 아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경찰 연마 무술로 마이우에 히로시를 지나치게 뚜드려 팼기 때문에 이런 아버지의 폭력이 무서워서 조용한 모습을 보였던 거지 속은 누구보다고 썩은 유년기를 보냈다"라고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 '괴인협회 질식왕'이라고 검색하길 바란다.

그의 이상한 성벽은 유치원 때 우체국 직원이 쓰고 있던 하얀 헬멧에 성적 흥분을 느낀 것에서 시작되었다. 중학생 때는 추리 소설[3]을 읽다가 아이의 입이 틀어막아진 그림을 보고 흥분했고 그 그림을 보면서 자위행위까지 하게 되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약품을 적신 거즈로 인근에 사는 아동들을 질식시키는 범행을 수차례 반복했고 2001년 3월부터 6월까지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지나가는 여성 2명을 벤젠을 적신 수건으로 질식시키는 사건을 일으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듬해 4월에도 남자 중학생의 입을 막는 등 상해, 폭행죄로 징역 10개월의 실형 판결을 받았는데 위자료는 전직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충당했다. 참고로 그는 초등학교때 128 iq라는 좋은 IQ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적과는 별개로 발달 장애가 있었기에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왕따를 당했었다고 한다.

그는 질식하는 얼굴뿐만 아니라 흰 양말에도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였다. 중학생 때 교생실습을 온 여대생을 질식시키는 상상을 하면서 수차례 자위행위를 했고 당시 교생이 신고 있던 흰색 스쿨삭스가 흥분의 대상이 되면서 집착이 시작되었다. 그가 우체국에서 일하던 1995년에는 흰색 스쿨삭스를 신고 있던 동료 남성에게 욕정이 생겨 전기충격기를 가지고 그를 덮쳤다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의 아버지가 1000만 엔에 달하는 합의금을 지불하면서 기소유예 처리되었다. 살해당한 3명의 피해자에게도 흰 양말을 신게 하였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에는 흰 양말을 신은 남학생을 교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이 소문이 나 자퇴하기도 하였다. 이런 비정상적인 집착 때문에 마에우에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오사카 구치소에서는 마에우에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는 흰색 스쿨삭스의 착용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2001년경부터는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주인공이 사람을 질식시킨다는 내용의 자작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자신을 블로그에서 "질식왕"이라고 칭했다. 사실 처음 임의조사 때 그는 범행을 부인했으나 이 사이트를 복원하여 보여준 후에는 모든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고 한다. 자백 후 "시신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감상하기 위해 동영상을 보관하고 있다." 고 진술했고 자택 조사를 통해 그의 컴퓨터에서 피해자가 괴로워하는 영상과 음성을 찾아냈다. C씨를 살해한 후에도 PC방에서 새로운 표적을 찾아 자살 사이트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메일을 교환하고 있었다.

체포 후 임상심리학 교수인 하세가와 히로카즈와 접견하여 "나를 분석하여 사회에 도움이 돼 달라"고 말했다. 하세가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이러한 범죄를 막기 위해 분석한 것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2006년 3월부터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받은 정신감정에 의하면 전직 경찰관인 아버지로부터 체포 무술에서 파생된 '질식에 의한 린치 및 학대'를 받았으며 이것이 이상 성벽의 근본이 된 것이라고 한다.

4. 판결

2007년 2월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마에우에 본인도 "이제 다 끝내고 싶다.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멈출 수 없다면 사형으로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2007년 3월 28일 오사카 지방 법원은 구형 그대로 사형 판결했다. 변호인단은 사형 판결 당일 항소를 했지만 "죽음으로써 속죄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반년 이내에 절차를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며 같은 해 7월 5일 항소를 취소하면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2009년 7월 28일을 기해 오사카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1] B씨는 같은 달 4일에도 편지를 남기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2] A씨의 사체를 유기한 곳과 몇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3]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