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7:31:40

어뢰 스캔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스캔들의 주인공- Mark.14 어뢰3. 발생한 문제점들
3.1. 적정수심보다 더 깊게 항주하는 어뢰3.2. 자기기폭장치의 오작동3.3. 기폭장치의 격침의 불량3.4. 어뢰발사관에서 제대로 사출되지 않음3.5. 항주 불안정
4. 왜 이 지경이 되었나?5. 해결을 위한 노력
5.1. 평가
6. 미 해군 항공대의 사정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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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orpedo Scandal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군에서 운용하던 Mk.14 어뢰의 결함으로 인해 벌어진 각종 논란을 일컫는다.

2. 스캔들의 주인공- Mark.14 어뢰

태평양 전쟁 초창기 가토급 잠수함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 대부분이 사용한 Mk.14 어뢰는 중량 1,490kg에 토펙스(Torpex) 작약 292kg이 충전되었고 길이 6.2m, 최대사거리는 31노트로 항주시 8,100m에 최고속도 46노트인 에탄올 추진식 어뢰였다. 이 어뢰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미 해군이 잔뜩 기대하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2]가 발견되어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기나긴 시간이 지나 끝끝내 문제점을 모두 개량한 뒤에야 일본 제국의 선박에 큰 손실을 입힌 무기가 되었다.

3. 발생한 문제점들

3.1. 적정수심보다 더 깊게 항주하는 어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Torpedo_Exploder_Mark_6_NH-88457.jpg
연습 표적함을 명중하지 못하고 배 밑을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Mark.14 어뢰 - 1926년 촬영

원인은 개발 비용 절감이라는 이유로, 황당하게도 테스트에서 제대로 된 탄두를 사용하거나 실 탄두와 무게가 흡사한 무게추 등을 넣고 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탄두에 물에다가 회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공기까지 넣어 테스트한 후 그 결과 그대로 양산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 해군이 어뢰에 쓰던 Torpex 폭약은 물보다 1.6배 정도 무거웠으므로 탄두에 물만 채우면 폭약을 채웠을 때보다 훨씬 가볍다.

그렇게 가벼운 탄두로 '적절한 항주수심'을 맞추어 어뢰를 양산하자 실제 전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폭약을 채운 무거운 탄두로 발사해 보니 적절한 항주수심보다 깊이 들어가서 배 밑바닥을 지나쳐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항주수심 조종 계통도 문제가 있어 어뢰의 항주수심이 너무 얕다고 인식해 더 깊은 수심으로 항주할 수 있도록 반응하는 문제로 Mark.14 어뢰가 고속항주를 할 때 이 현상이 더 심화되었다.

3.2. 자기기폭장치의 오작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k6-mag-exploder.gif
문제의 Mark.6 자기기폭장치(Mark.6 Magnetic Exploder).

Mark.6 자기기폭장치는 군함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에 반응하여 전파량이 증가했다가 감소되는 순간을 노려 기폭하는 기술이 들어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장비였다. 이론상으로는 용골을 지나치는 순간 터져 단 한 방에 적함을 두 동강 내버리리라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터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터지지 않거나, 미리 터지거나, 뒤늦게 터지는 상황이 다발하였다. 함선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장이 발생하며 이것을 알아낸 독일이 자기감응 기폭신관을 제작해 유보트에 장착해 큰 성과를 내면서 미국도 이걸 도입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지구자기장 위도에 따라 달라지고 위도가 낮아질수록 자기장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몰랐다. 특히 적도 부근에서는 함선의 항진 방향으로 자기장이 쏠린다. 유보트가 기승을 부리던 북대서양은 유럽과 미국의 위도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자기장이 더 강한 저위도, 적도 근처까지 내려와 전투를 하자 발사된 어뢰가 미처 함에 닿기도 전에 터지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기폭장치를 사용하려면 당연히 이 점을 반영해야 했지만 이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몰랐기 때문에 어뢰 설계 시 반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자기장의 흐름은 남반구 북반구가 정반대다. 해류도 적도를 기준으로 맞물리니 반대 방향이 된다.

3.3. 기폭장치의 격침의 불량

Mark.14 어뢰의 기폭장치에 쓴 격침(擊針)[3]이 Mark.10 어뢰의 충돌 기준이라 기폭장치의 격침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심해 충돌해도 잘 격발되지 않았다.

3.4. 어뢰발사관에서 제대로 사출되지 않음

추진력이 부족하여 발사해도 어뢰발사관에서 나오다가 마는 사례도 있었다. 어뢰발사관이 어뢰를 사출할 만한 기압을 뿜어내어 어뢰를 밀어내고 항주해야 했지만 어뢰가 불량이라 발사 도중 어뢰발사관 입구에서 멈춰 걸려 버리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래는 그로 인해 발생한 해프닝 중 가장 유명한 사례다.
로렌스 다스핏(Laurence Randall Daspit)[4] 소령이 지휘하는 가토급 72번함 SS-283 티노사(Tinosa)는 자신의 4번째 순찰 임무 중이었던 1943년 10월 26일 일본군 13선단을 포착해 4, 5, 6번 어뢰발사관에서 어뢰를 발사했지만 곧이어 일본 구축함에게 발각되어 긴급잠함하던 도중 전방 어뢰실에서 5번 어뢰 발사관이 폐쇄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결국 티노사는 고생 끝에 일본 대잠망을 피해 겨우겨우 부상할 수 있었다. 장교 2명이 수면으로 다이빙하여 직접 눈으로 검사한 결과 해당 어뢰발사관에서 발사된 어뢰가 발사되다 만 채 걸려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티노사의 승조원들은 일본군이 우글거리는 해상에서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수중으로 들어가 기폭장치를 무력화한 후 어뢰를 밖으로 사출하여 겨우 겨우 모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고 추정된다. 당시 잠수함 어뢰발사관은 압축공기를 이용해 수압으로 어뢰를 밀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와중에 펌프 고장이나 압축밸브 조작미스 등 이유로 수압이 부족해 어뢰를 차마 다 못 사출해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수압이 가해지면 엄빌리컬 케이블이 끊어지고 어뢰의 스크류 모터가 움직여 항주하는데 역시 모종의 이유로 끊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모터의 고장이나 결함 등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수압이 낮아도 어뢰발사관 내에서 어뢰가 절반만이라도 추친되면 엄빌리컬 케이블(Umbilical Cable)이 끊어지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어뢰를 다시 사출할 당시에도 펌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어뢰를 밀어냈으나 엄빌리컬 케이블이 확실히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어뢰는 모터가 작동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해저로 가라앉았다. 이런 문제는 다른 잠수함에서도 일어났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왔다. 단순히 어뢰의 관리 문제였는지, 진짜로 Mark.14 어뢰 모터 결함이었는지는 애매하고 다른 어뢰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Mark.14 어뢰의 악명만 더 높였다. 잠수함 승조원들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기 때문에 더 임팩트가 컸다.

3.5. 항주 불안정

자이로스코프 및 러더의 결함 때문에 어뢰가 예정된 경로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항주하거나 설령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하더라도 항주가 불안정했고 심지어 발사하자마자 원을 그리면서 돌아오는 원주 운동 현상이 발생했다. 이 원주 운동 현상은 실제 사격 동안 29건이나 발생하여 보고서에 기록된 문제였고 일부 잠수함은 2, 3회 연속으로 원주 운동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Mark.14이 22건, Mark.23이 3건, Mark.18이 3건, 구형 Mark.9이 1건으로 원주 운동 발생 횟수로는 Mark.14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Circular Running Torpedoes Reported by U. S. Submarines During World War II 심지어 원주 운동 때문에 어뢰를 쏜 잠수함이 자기 어뢰에 맞는(!) 초대형 사고가 두 번씩이나 터졌는데 가토급 잠수함 74번함 SS-284 툴리비와 사르고급 잠수함의 네임쉽인 SS-188 사르고(Sargo)[5]가 이 황당한 사고의 주인공이었다. Mark.14 어뢰를 수정개량한 Mark.18 어뢰조차도 이 문제로 똑같은 사고를 내 미 해군 잠수함들 중 격침 총톤 11만 톤이 넘는 태평양 전쟁 최고의 수훈잠수함이었던 발라오급 잠수함 SS-306 탱(Tang)이 침몰하는 사고도 있었다.

파일:external/www.navsource.org/0828402.jpg
가토급 잠수함 73번함 SS-284 툴리비(Tullibee), 메어아일랜드 해군 조선소에서 취역식을 치렀다. 이때까지는 이 잠수함이 어뢰 결함으로 인해 침몰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 1943년 2월 15일 촬영

툴리비는 1944년 3월 26일 4번째 초계항해 중 팔라우 섬 인근 해역에서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고 끈질긴 추격 끝에 3천 7백미터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 Mark.14 어뢰를 발사했지만 약 2분 뒤 어뢰는 원을 그리면서 자신을 발사한 잠수함 툴리비에게 되돌아와 맞았고 결국 툴리비는 자기가 쏜 어뢰에 자기가 피격되어 침몰했다. 생존자는 단 1명.[6]

4. 왜 이 지경이 되었나?

국방TV에서 제작한 역전다방의 내용에 따르면, 원인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느닷없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7] 당시 사용하던 Mark.8 어뢰 6000발의 생산을 블리스 컴퍼니라는 민간 업체에 위탁했지만 종전이 거의 임박한 1918년 7월까지도 해군에 인도된 물량은 겨우 400발밖에 되지 않았다. 매우 화가 난 해군은 앞으로 어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직접 어뢰를 생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종전 후 뉴포트 해군기지 조선소 산하에 해군 어뢰국(Naval Torpedo Station)을 설립하여 생산 공장을 직접 지어 버렸다. 문제는 이렇게 돈을 많이 썼는데 1929년에 대공황이 터지면서 예산에 쪼들리게 됐다는 것이다.

돈에 쪼들리게 됐는데도 미 해군은 1930년대에 들어 새로운 잠수함을 개발하면서 어뢰도 같이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개발국에 뇌격기용 Mark.13, 잠수함용 Mark.14, 구축함용 Mark.15 이렇게 세가지 어뢰를 개발하라는 임무를 하달했다. 그런데 여기에 배정된 개발비가 고작 연간 5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이게 뭐가 문제냐면 당시 어뢰 한 발의 가격이 1만 달러였기 때문에 세가지 어뢰를 동시에 개발하는데도 불구하고 발사 시험 5번만 하면 1년치 개발비가 홀랑 날아간다.[8] 이렇다보니 발당 1만 달러나 하는 비싼 어뢰[9]를 테스트 한다고 폭약을 넣고 실제로 폭파시켜 버릴 수는 없으니 대강 무게를 맞춘 후 나중에 떠오르면 회수하기 위해 공기까지 넣은 더미탄을 발사하는 식으로 테스트하여 엉망진창으로 개발해 버렸다.

참고로 B-29 폭격기의 개발비가 30억 달러, 맨해튼 프로젝트의 개발비가 20억 달러, VT신관의 개발비가 10억 달러, 노든 폭격조준기의 개발비가 5억 달러인데 신형 어뢰 개발에 배정된 개발비는 연간 5만 달러로 개발비가 수십만 달러 단위를 넘지 못했다. 이런 푼돈으로 제대로 개발되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역시 전쟁은 돈과 피로 수행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증명해 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5. 해결을 위한 노력

Mark.14 어뢰의 한심한 성능은 진주만 공습으로 수상함대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후 태평양에 제대로 남은 전력이 잠수함대밖에 없었던 미 해군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심지어 어떤 잠수함은 적 함대에 겨우겨우 파고들어 어뢰 6발을 발사했지만 모두 불발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미 해군 잠수함들은 구형인 Mark.10 어뢰를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10]

사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이런 문제들이 알려지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당시 어뢰의 생산을 책임졌던 국영기업과 연결된 병기국에서 부정하고 개개인의 관리 문제로 치부해 버린 것도 있었으며 가뜩이나 당시 해군에서 천대받는 3D 직렬이었던 잠수함 직렬일 만큼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미 해군 잠수함장들은 "무능한 패배자의 변명거리나 될 것 같다"며 참았지만 상대 일본군이 개전 초에 산소어뢰로 미군 수송함들을 격침시키던 반면 본인들은 그 반격 기회를 형편없는 어뢰 때문에 눈앞에서 여러 번 날려 버리자 불만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잠수함장과 일선 잠수함 전대장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일부 잠수함장들은 병기국까지 찾아가 쌍욕을 퍼부으면서 연구원들과 몸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이 무렵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해군 소장 찰스 록우드 제독[11]이 취임하면서 어뢰의 성능 문제가 정식으로 공론화되었다.

록우드 제독은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일선 잠수함 승조원들이 어뢰 때문에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잠수함들의 항해일지를 전부 뒤져 어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했는데 앞에 서술된 대로 충격이었다. 심지어 일부 잠수함 승조원들은 이 어뢰의 추진연료인 에탄올을 빼내 밀주로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12] 물론 당대 타국의 해군들도 비슷하게 신호용 램프 같은 곳에서 에탄올을 빼다 마셨고 이런 문제 때문에 배에 유폭이 나기도 했지만 최소한 어뢰같이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병기는 손대지 않았는데 미군은 이걸 한 셈이다. 즉 한참 적과 싸우는 군인들에게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병기를 고작해야 술 만드는 재료로 취급할 정도로 어뢰의 성능과 인식이 최악이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미군은 군인에 대한 대우가 굉장히 좋은 편이고 그 중에서도 잠수함은 환경이 제일 열악해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해군에서 보급을 매우 잘 챙겨 주는데 그럼에도 이런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건 어뢰의 성능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에 대한 훌륭한 방증이다.

록우드 제독은 참지 못하고 어뢰의 오작동을 두고 미 해군 병기개발국에 항의하면서 정식 테스트를 요구했고 1942년 6월 20일부터 약 한 달간 직접 실탄 사격 테스트까지 하면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성능 재검증을 요구했지만 개발국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서 그걸 개발했는데, 불발일 리가 없다. 너희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면서 거부했다. 어뢰 성능의 재검증에 대해서 개발국은 "정확한 수심대로 항주한다는 뻔한 결과를 보자고 발당 1만 달러나 되는 어뢰를 낭비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반응은 상술했듯이 개발국에서도 돈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인 데다 실탄 어뢰의 발당 가격이 괴악하게 비쌌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만 개발 기간 근 15년 동안 실탄두 장착 사격 테스트를 단 1회도 안 하고 결함을 발견하지 않은 채 실전에 배치한 것은 반박의 여지 없이 까일 거리가 맞다.

바로 이때 미 해군 함대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해군 대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갑자기 개입하자 상황이 급변해 버렸다. 킹 제독은 록우드 제독의 편지 사본을 읽어 본 후 "실탄두를 장착하고 테스트를 진행하라"고 병기국에 명령을 내렸다. 권력 수준으로만 따지면 해군의 왕이나 다름없었던 해군참모총장 겸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으니 결국 병기국은 실탄두를 장착한 뒤 사격 실험을 진행했고 록우드 제독의 실험결과와 유사하게 어뢰가 기존 수심보다 깊이 내려간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1943년 6월 10일,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 트리거는 일본 항공모함 히요를 발견하고 어뢰 6발을 발사했고 그 중 4발이 명중했지만 폭발한 건 1발 뿐이었다. 덕분에 히요는 살아서 돌아갔고 록우드 제독은 격노했다. 어뢰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히요는 끝장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폭발한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전폭적 지원과 동의 아래 워싱턴 D.C의 해군본부에서 병기국 인원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만일 병기국에서 명중시키면 제대로 터지는 어뢰조차 제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잠수함대는 함선국에 요청해서 어뢰 대신 연장질로 적 함선 장갑에 구멍을 낼때 붙어있도록 와이어 달린 갈고리나 내놓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If the Bureau of Ordnance can't provide us with torpedoes that will hit and explode… then get the Bureau of Ships to design a boat hook with which we can rip the plates off a target's sides.”)
라는 돌직구를 날리면서 어뢰 성능을 개선하라고 촉구하고 병기국 인원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어뢰 결함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어뢰 개발에 관련된 인사들이 물갈이되고 어뢰 개선과 개발이 진행되었지만 당장 그 상황의 공백을 메꿀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항주수심 오작동 문제는 록우드 제독이 테스트하여 수심조절 다이얼에 나오는 것보다 약 3.3-3.4m 이상 깊게 항주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항주수심을 약 3m 이상 얕게 임의로 설정해 어뢰를 발사하도록 조치가 시행되었고 고치기 위한 키트가 배포되었다. 문제가 된 항주수심 조종 계통도 이후 개량되었다.

Mark.6 자기기폭장치는 록우드 제독이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동의하에 사용을 금지하고 접촉신관만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Mark.6 자기기폭장치 개발 총책임자였던 랄프 왈도 크리스티(Ralph Waldo Christie) 제독은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을 듣고 병기국과 함께 니미츠 제독에게 "자기기폭장치 사용 금지명령을 내린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항의했다. 이에 니미츠 제독은
"그것은 아무래도 적이 대응책을 준비했거나, 특이조건 하에 기폭장치가 작동을 하지 않거나, 요구되는 발사 조건이 비현실적인 것 때문으로 추정됨."
이라고 답변했다. 신사적이고 정중한 언행으로 잘 알려진 니미츠 제독답게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약간 의역하면, " 열도 놈들이 뭔짓 한 거 아닌 이상 어뢰가 이상한 건 니들이 쓰레기같이 만들어서임."이라는 뜻이었다. 그 신사적인 니미츠마저도 어뢰가 쓰레기라고 대차게 까버린 것. 니미츠 제독은 당시 록우드 제독을 상당히 신뢰한 데다 자신도 잠수함에서 근무해 본 짬밥이 있었던 만큼 잠수함에 관심이 많았고[13] 당시에는 자기기폭장치 결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힐 방도는 없었으나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크리스티 제독은 병기국과 함께 호주의 프레멘틀(Fremantle)에서 토론회를 열어 자기기폭장치를 꼭 사용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결과를 록우드 제독에게 서신으로 보냈다.
"일단 Mark.6 자기기폭장치는 최소한 가끔씩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흘수선 깊이가 낮은 소형 선박에 대한 공격방법은 자기기폭장치 활성화가 해답인 데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물건을 포기하면 앞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영영 상실할 것임. 자기기폭장치가 문제가 있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태평양 잠수함대, 제7함대와 해군 병기국이 공동으로 조사해야 하며 최소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바임."

사실 크리스티 제독의 말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다. 자기기폭장치 결함의 원인이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흘수선이 낮은 소형선박을 공격할 방법으로 상당히 주목받은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문제는 꼭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사격 시험을 해야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병기국과 자기기폭장치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었고 장치를 사용하여 생기는 결과와 피해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 서신은 무시되었다.

하지만 이후 제7함대 잠수함대사령관으로 임명된 크리스티 제독은 Mark.6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휘하 잠수함장들에게 강요했으며 자신의 계급과 짬을 이용해서 Mark.6 자기기폭장치에 불만을 표시하는 잠수함장들이나 지휘관들에게 인사적 불이익을 주거나 본토나 지상근무 등의 한직으로 내쫒는 보복성 인사 조치까지 자행하였다. 자기기폭장치 사용을 금지한 록우드 제독의 태평양 함대 잠수함대와 사용을 강요하는 크리스티 제독의 제7함대 잠수함대 사이에서 잠수함장들은 심하게 곤욕을 치렀다.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 이전에도 각 함선마다 알아서 자기기폭장치를 해제했지만 크리스티 제독 휘하 제7함대 잠수함대 소속 함장들은 항구 입항 때나 기폭장치를 활성화하고 출항하자마자 해상에서 해제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이것에 열받은 크리스티 제독은 직접 잠수함에 동승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오히려 잠수함 함장들이 제독이 타고 있는 자신의 잠수함이 공격당하는 것을 우려하게 만들어 임무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전과를 제대로 못 올리는 부작용을 유발했다.

결국 Mark.6 자기기폭장치는 1943년 11월에 카펜더 제독에 이어 제7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14]의 명령으로 완전히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뢰가 충돌해도 격발되지 않는 문제가 터졌다. 이에 해군 병기국은 "결국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미숙하게 사용한 것이다."라고 반응하면서 반격에 나서자 록우드 제독은 하와이의 해안 절벽에 대고 어뢰 3발을 쏘아 불발 어뢰 1발을 회수해 조사했다. 그 결과 기폭장치의 격침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심해 불발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해결책은 간단했는데 격침을 훨씬 가벼운 것으로 개량하자 불발률이 확 떨어진 것이다. 추가로 기폭장치가 너무 무거워서 충격에 약하다 보니 오히려 선체를 정통으로 맞추면 그것 때문에 격침이 꺾여 불발된다는 사실도 확인하고 조준도 일부러 선체를 직격하게 조준하기보단 비스듬하게 맞아 신관에 충격이 과도하게 걸리지 않도록 조준각도도 조정하는 교전규범 개정도 했다. 이런 식으로 Mark.14 어뢰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수정하고 나서야 잠수함대는 이 어뢰를 두고 '이제야 좀 쓸 만하다'는 평을 내렸다.

5.1. 평가

이 속칭 어뢰 스캔들은 미 해군 병기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되었고 HVAR 항공 로켓탄 등의 명작 무기체계를 만들어낸 병기국의 성과에 심각한 흑역사로 남았다. Mark.6 자기기폭장치 개발 총책임자 크리스티 제독은 1944년 11월 제7함대 잠수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당하고 본토로 전출되고 말았다. 그래도 어뢰 스캔이 일단락된 후 한동안 유임되었는데 그럭저럭 지내다 지휘체계를 위반한 월권행위를 몇 번 일으켰다가 상관 킨케이드 제독에게 들켜 해임되었다고 한다.[15] 이후 미 본토 워싱턴주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장으로 지내다가 종전을 맞았다. 전후엔 그 악평에도 불구하고 중장까지 진급하고 1949년 8월 1일에 필리핀 주둔 해군사령관을 마지막으로 퇴역했으며 1987년 12월 19일에 94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관과 항주장치를 두고 지휘부끼리 옥신각신하던 것과는 별개로 어뢰는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다. 작약은 함선용 어뢰인 21"(53.3cm) Mark 15 Mod 3부터는 탄두에 HBX 373kg이 들어가 파괴력에서 93식1형과 비슷해졌다. 과산화수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잠수함용 어뢰인 21"(53.3cm) Mark 16은 Mod 0은 TPX 572kg이 들어간 탄두를 장착하고 46노트로 6,400m를 항주 가능했으며 Mod 1는 HBX 435kg이 들어간 탄두를 장착하고 46노트로 10,500m를 항주 가능했다.[16]

사정거리는 여전히 산소어뢰에 밀리긴 했지만 산소어뢰는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좌우 항주오차가 심하게 나서 명중률이 심하게 떨어져서 일본 해군도 좀처럼 최대 사거리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카달로그 스펙의 차이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17] 미국 수상함대의 주력 어뢰인 Mk.15에는 HBX가 373kg이 들어가므로 위력계수 1.3을 곱하면 TNT 484.9kg에 해당하며 93식1형이 작약 490kg이 들어가므로 비슷하지만 3형에서는 780kg으로 늘어나서 위력에서는 93식이 여전히 우위였다. Mk.17은 배치시점도 너무 늦었고(1945년) 실전투입이 되지 않았다.

전기추진방식의 Mark.18 어뢰 배치와 기존 어뢰의 개량 이후에도 어뢰에 대한 불신은 있었다. 이 불신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아서 위에서 언급된 툴리비의 자침과 같은 어이없는 사고가 Mark.18에서도 일어났다. 피해자는 발라오급, 아니 미 해군 잠수함 최고의 에이스이자 격침 톤수 1위였던 SS-306 탱. 기술적으로는 1943년 9월 즈음에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일선에서 툴리비나 탱의 경우처럼 어뢰로 인한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일반 공산품도 마찬가지지만 무기체계는 사용자의 목숨과 직결된 터라 한 번 불신이 쌓인 무기체계는 일선에서 사용을 기피하게 되고 해당 체계의 개선이 이뤄져도 일선에서 사용을 기피해대니 개선 성과 입증에 긴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입증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나마 어뢰의 경우 잠수함의 주력 대함 무기체계였기 때문에 개선 성과를 입증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전과를 올렸다. 그 예 중 하나로 1944년 6월에 있었던 필리핀해 해전에서 다이호[18] 쇼카쿠가 미 해군 잠수함의 어뢰에 피격되었고 그로 인해 침몰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2차 대전 초기 미군만이 아니라 당시 호밍어뢰 등 다양한 방식을 시험하던 독일 해군도 미 해군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다.

6. 미 해군 항공대의 사정

미 잠수함대의 중어뢰가 신뢰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때 미 해군 항공대의 Mark.13 항공어뢰[19]도 낮은 신뢰성과 까다로운 사용 조건 때문에 일선에서 외면받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뇌격기 부대가 전과는 하나도 거두지 못하고 거의 전멸해버린 데엔 이 항공어뢰가 한 몫 단단히 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항공어뢰 투하조건은 고도 15m에 200km/h였는데[20] 이미 대공포대, 함재기까지 방공태세를 갖춘 적 앞에서 이런 저공저속비행은 '내가 네 밥이야'라고 하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실제로 어뢰 투하를 준비하던 뇌격기들은 뇌격기 위에 자리잡은 빠른 기동력을 지닌 제로센을 위시한 일본군 전투기들에게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그렇다고 구형인 TBD 데버스테이터만 이러면 모르겠는데 신형 뇌격기인 TBF 어벤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사일생으로 적의 요격을 피해서 어뢰를 투하해도 어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뢰가 공중에서 투하된 후 입수 시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항주장치나 격발장치가 먹통이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위의 가혹한 투하 조건도 이러한 신뢰성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21] 당연히 살아돌아온 뇌격기 전대는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호위를 하지 않은 호위전대에 강력한 불만을 표출했지만 그때는 아직 어뢰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이 가라앉지 않았다.[22]

이후 뇌격기 조종사들은 역시 "효과도 없는 어뢰 쓰느니 그냥 철갑탄 쓰겠다."고 해서 한동안 함선을 상대로 어뢰 대신 항공폭탄을 달고 폭격을 해댔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당연히 전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부의 월권 행위라는 외부 사정에 휘둘렸던 잠수함대의 중어뢰와 달리 항공어뢰의 개량에는 이런 방해가 없었고[23]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와의 협조 하에 입수시의 충격으로부터 어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였다는 점이다.

덕분에 항공어뢰는 어뢰 스캔들의 심각성을 입증하고 개선에 나서면서 눈부신 성능 향상을 보여주었다. 1943년 초에는 투하 고도가 60m로 완화되었다. 1943년 말에는 어뢰에 핀 스태빌라이저(fin stabilizer)[24]가 추가되었고 1944년에 이르면 nose drag rings과 둥근 팔찌 모양처럼 생긴 tail shroud ring이 장착되어 뇌격기에서 어뢰가 투하되어 물속으로 입수하기 전에 낙하 속도를 늦추어 적정 속도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1944년에는 고도 약 240m에 약 550km/h로 투하 조건이 완화되었다.

1945년 초엔 고도 1,500 ~ 2,100m에서 떨어뜨린 어뢰도 6발 중 5발이 정상 작동함을 확인했으며 종전 즈음엔 고도 730m에 759km/h로 투하조건이 완화되었다.[25] 실제로 전쟁 후반 미군 뇌격기들의 어뢰 투하고도는 높았고 그 속도도 빨랐다. 1944~45년 당시 미군의 항공뇌격을 당했던 일본 해군 승조원들은 처음에는 미군 뇌격기들이 어뢰를 너무 급하게 투하하고 달아난다며 의아해하거나 비웃었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어뢰가 정상적으로 작동해 돌진해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인 미군 각군의 항공대가 갖고 있던 기존의 뇌격기 허당 이미지를 깨부수기는 너무 힘들었다. 어뢰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던 잠수함대와 달리 뇌격기들은 폭탄을 이용한 수평폭격이나 활강폭격, 해군항공대 전체로 보면 급강하폭격이라는 추가 선택지가 있었다.[26] 항공기를 이용한 뇌격의 효과와 생존성에 대해 불신이 잔뜩 쌓인 전쟁 초중반 미 해군 항공대에게 다른 선택지를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육군 항공대는 급할 때는 영국에서 배워 온 물수제비 폭격[27]까지 동원해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스마르크해 해전.

이 때문에 전쟁 중반까지는 전투력이 살아 있는 목표물에 대한 항공뇌격은 사실상 없었고 선행 공격에 의해 절름발이가 된 표적을 상대로 한 것이 전과의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항공어뢰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씻어낸 것은 필리핀 해 해전 이후였다.

기묘하게도 일본군 항공모함 히요도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 항모전단의 공습으로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1943년 6월 10일에 트리거의 어뢰에 맞았는데도 어뢰 결함으로 살아남았고 그것 때문에 록우드 제독이 폭발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자기기폭장치의 사용금지명령이 나오게 되었음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7. 외부 링크



[1] 루스벨트는 해군 차관보 출신이었고 평생 해군에 많은 애착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이 일로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2] 특히나 병기국에서 밀어붙였던 Mark.6 자기기폭장치. [3] 탄환의 뇌관을 쳐 폭발하게 하는 송곳 모양의 총포(銃砲)의 한 부분. 군필자에게 익숙한 단어인 '공이'가 격침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4] 1905-1979. 최종 계급은 해군 소장. 태평양 전쟁 종전 후 6.25 전쟁에도 참전하여 훈공장(Legion of Merit)을 수여받았다. 1979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출처 [5] 사르고는 침몰은 면했다. [6] 이 유일한 생존자는 함교 위에 있었던 병기 담당 인원이었다. 잠수함이 침몰한 뒤 정신을 잃고 표류하다가 일본 구축함 와카타케에 구조되어 전후에 미국으로 귀환했다. [7] 미국은 원래 남의 동네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으나 독일이 멕시코에게 혹시나 미국이 참전하면 뒷치기 좀 들어가 달라고 문서를 보냈다가 들통난 것이 문제가 됐다. 이걸 알게 된 미국은 원래 끼어들 생각이 없었던 전쟁에 갑자기 참전하게 된다. [8] 물론 생산비보다 개발비가 더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하므로 실제로는 2~3발 이나 쏴볼 수 있었을지 의문. 게다가 3가지 어뢰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3발을 쏴볼 수 있다 하더라도 종류별로 1발씩 밖에 못 쓴다. [9] 한두발만으로도 주력함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어뢰의 성공시 이득에 집중되어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어뢰는 결코 싼 무기가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시기 어뢰의 가격은 집 한 채 수준이었으며, 현대에도 어지간한 대함미사일보다 어뢰가 더 비싸다. [10] 한 가지 웃기는 것은 구식 S급 잠수함은 어뢰발사관의 길이가 짧아 Mark.14 어뢰를 사용할 수 없어 본의 아니게 Mark.10 어뢰만 사용하게 되어 피해를 덜 봤다는 사실이다. [11] Charles Andrews Lockwood, 1890년 5월 6일 버지니아 주 미들랜드 출생. 1912년 애나폴리스 졸업 후 미시시피, 애커슨 등의 수상함 근무를 시작으로 1914년 잠수함에서 근무하면서 잠수함 전문 장교로서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되어 잠수함부대 참모장 역임. 당시 미 해군 잠수함계의 권위자이자 잠수함 오타쿠로 1942년 5월 소장으로 진급한 후 남서태평양 잠수함부대 사령관으로 부임. 이후 중장으로 진급했고 태평양함대 잠수함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해 잠수함 전력 강화를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다. 그 공로와 잠수함대의 활약을 인정받아 전후 수훈장 3회 등 훈장을 수여받고 1947년 퇴역, 1967년 6월 7일 사망. [12] 이렇게 만든 밀주는 잠수함 승조원들의 은어로 '어뢰 주스(Torpedo Juic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미 해군은 당연히 이걸 못 마시게 하려고 빨간색 염료나 구토제 같은 걸 타기도 했지만 수병들은 보급 식빵을 잘 말려 겹겹이 쌓은 후 에탄올만 걸러낸다든가, 어디선가 부품들을 삥땅쳐 염료를 걸러내는 장치를 만든다든가 하여 어떻게든 마셨다. [13] 심지어 잠수함용 디젤 엔진에 관해서는 니미츠 제독만큼 상세히 아는 해군 관계자가 없었을 정도라서 기업에서 거액(당시 금액으로 자그마치 2만 5천 달러.)의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올 정도였다. [14] 전임자와는 다르게 더글러스 맥아더의 신임을 얻었고 이전엔 과달카날 전역에서 치열했던 전역 중반에 한동안 항모부대를 지휘해서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했고 북태평양군 사령관으로 타 군 장성들과 별 마찰 없이 전구를 지휘하는 등 개인적 역량도 나쁘진 않았고 '미 해군의 마당발'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지지 인맥도 상당했다. [15] 월권행위에는 규정을 무시하고 훈장을 남발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술한 잠수함에 동승한다는 기행으로 잠수함 함장들 사이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자신의 평판을 어떻게 만회해려는 시도였다고. [16] 실전 투입되지 않았지만 함선용 어뢰인 21"(53.3cm) Mark 17은 HBX 399kg으로 탄두중량을 약간 줄이는 대신 46노트로 16,500m를 항주 가능했다. 링크 [17]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은 사정거리를 줄이고 탄두를 대형화하는 개량을 한 93식 산소어뢰 3형을 개발했다. [18] 다이호는 어뢰 단 한 발 맞고 승조원들의 대미지 컨트롤 미숙으로 털렸다. 부실공사도 원인이지만. [19] 이 어뢰는 미 육군항공대에서도 사용하였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B-26이 뇌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전과는 거두지 못했다. [20] 고도가 15m면 조종사 입장에서는 바닥에 달라붙어서 날라는 것과 같은 소리이며 속도 200km/h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착륙할때나 볼법한 초저속이었다. [21] 하지만 제로센들이 뇌격기를 요격하러 내려간 덕분에 상공의 빈 틈을 노린 SBD 돈틀리스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항모를 덮칠 수 있었고 당시 일본 최강의 항모들을 인공어초로 만들 수 있었다. [22] 또 여기에는 당시 부족한 항공전대의 집단전 경험 문제도 있었다. 특히 항모 호넷의 항공대가 항공대장의 오판으로 뇌격기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23] 왜 방해가 없었냐면 저 어뢰 투하 조건 자체에 원인이 있다. 이 항공어뢰를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태평양 전쟁 개전 6개월 후인 미드웨이에서 이미 수많은 뇌격기 조종사들의 목숨값으로 입증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쌍으로! 실제로도 육군항공대에서 B-26을 동원해서 뇌격을 한 적이 있는데 역시 실패했다. 어뢰 스캔들이 공론화될 수 있던 이유와 시점도 사실 잠수함 전대뿐 아니라 뇌격기 조종사들까지 동조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문서 위에도 나오지만 당시 해군에서도 가장 3D에 인식도 나빴던 서열 하위의 잠수함대와 달리 해군 항공대는 해군 내에서도 승리의 주역으로 해군의 핵심 전력 취급받았고 같은 항공직렬인 육군 항공대의 동조까지 받았기 때문에 손쉽게 군 수뇌부를 설득할 수 있었다. [24] 선박이 좌우로 요동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정 장치. [25] 사실 이 조건은 이미 1944년에 확인되었다. 760km/h면 당시 전투기들의 속도보다 빠르다. F4U-4의 최대속력은 746km/h까지 나왔으며 스핏파이어 후기형도 최대속력이 710~730km/h이다. 미 해군의 폭격기나 뇌격기는 500km/h도 안 나오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고 속력은 기준 기상 상황, 지정 고도에서 수평 비행할 때의 이야기다. 적함선을 향해 강하할 때는 에어브레이크를 펴더라도 더 빠른 속력이 나온다. 아무튼 저 조건으로 문자 그대로 600m까지 내려오기만 했다면 그냥 조준점 맞춰 냅다 떨궈도 작동할 정도로 신뢰도가 매우 높아졌다고 보면 된다. [26] 전함을 상대로는 급강하 폭격기만으로는 격침하기 어려워서 좋든 싫든 뇌격기를 써야 하지만 다행히 일본 전함들은 호텔 노릇이나 하고 있었으니. 전쟁 후반에 이르면 HVAR 같은 공대지 로켓이 등장하여 대함공격에 사용되었다. 다만 이때는 로켓의 탄두가 작아서 구축함 이하의 소형 함정은 몰라도 대형함을 상대로는 대공포 같은 외부 구조물들을 파괴하거나 갑판의 승조원들을 날려버리는 정도에 그쳤다. 대형함의 선체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의 대형 로켓(ex. 타이니 팀)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등장했다. [27] 제식 용어로는 skip bombing. 일본군 측에서는 반도폭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