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5:59:20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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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관방장관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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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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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야마 세이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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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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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 군마 5구)
선거제도 개편 제41대
오부치 게이조
제42~49대
오부치 유코

}}} ||
일본국 제84대 내각총리대신
오부치 게이조
小渕恵三 | Obuchi Keizō
[1]
파일:오부치 케이조 전 총리.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37년 6월 25일
군마현 아가츠마군 나카노조정
사망 2000년 5월 14일 (향년 62세)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재임기간 제84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1998년 7월 30일 ~ 2000년 4월 5일[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아버지 오부치 미쓰헤이(1904 ~ 1958)
어머니 오부치 치요(1906 ~ 1996)
형제 형 오부치 미쓰헤이[3](1930 ~ 2008)
배우자 오부치 치즈코
자녀 장남 오부치 쓰요시
장녀 오부치 아키코
차녀 오부치 유코
신장 168cm[4]
학력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도쿄도립 키타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학 / 학사)
와세다대학 대학원 (정치학 / 석사)
정당

지역구 군마 5구
의원 선수 12 (중)
의원 대수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약력 중의원 의원
제10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제29대 총리부총무장관
제49대 내각관방장관[5]
제2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13대 자유민주당 부총재
제126대 외무대신
제18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84대 내각총리대신
}}}}}}}}}
1. 개요2. 생애
2.1. 헤이세이 아저씨2.2. 식은 피자에서 근성의 총리로2.3. 재임 중 과로사
3. 한국과의 관계4. 선거 이력5. 기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정치인.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시조로 하는 자민당 보수본류 파벌 헤이세이 연구회 회장으로, 제84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재임했다. 오늘날엔 한일 관계 관련해 김대중 오부치 선언으로 더 잘 알려진 총리이다.

2. 생애


1937년 6월 25일 군마현의 나카노조 마을에서 태어났다. 도쿄도에서 북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카노조는 대략 일본의 주요 섬 혼슈의 중앙에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푸른 환경에 있다고 한다. 게이조의 부친은 비단 공장장이었다. 게이조는 오부치 미쓰헤이와 그의 아내 치요의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당시에 반장을 지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지방 중학교로 진학한 그는 13세때 당시 중의원으로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도쿄의 유명 사립 중학교인 가쿠슈인 중등과로 전학했다. 중학생 때는 산수와 자연 과목을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류층만 다녔던 학교였기에 중산층 출신인 오부치는 촌놈, 서민이라고 왕따(...)를 당하게 되어[6] 가쿠슈인 고등과 진학을 포기하고 다른 공립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후지산 등산을 즐겼다고도 한다.

오부치는 부친인 오부치 미쓰헤이(재선 의원)가 4번씩이나 낙선[7]하는 것을 보고『죽어도 정치는 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의지를 드러내고 고등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국제 무대에서 역할을 맡기 위해 부모님의 뜻과 다르게 문학부 영문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여 1958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8] 입학 후 셰익스피어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두 번째로 하원에 선출된 후 1958년 54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오부치는 정치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아버지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생 시절 국제무대에 서는 꿈을 접고, 정치가의 꿈으로 전향한 오부치는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것을 경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외국에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가기 위해 접시닦이, 카메라 조수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여 돈을 모아 대학 졸업 직후인 1963년 1월에 무려 9개월 동안 남미, 북미, 유럽, 중동, 스리랑카 등 38개국 장기 여행을 시작했다. 지금도 저 정도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과 요즘 젊은 세대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하기에 나름 시대를 앞선 배낭 여행의 선배로 봐도 무방하다. 그는 워싱턴 여행 중, 모았던 돈을 다 써버린지라 남은 돈으로 당시 동서 냉전 중이던 독일 베를린에 가서 자신이 카메라 조수 아르바이트 한 것을 경험 삼아 독일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카메라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지고 일일이 뛰어다녔다고 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어깨와 허리가 나갈 뻔했다고 하며, 다행히 돈을 마련하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런 여행의 경험으로 여러 사회 현상을 지켜봤고, 또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성실했던 정치인의 모습이나 한국 등 세계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실천적으로 노력한 모습도 여행을 하면서 느낀 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즉, 38개국 여행이 자신이 변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이다. 이 세계여행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아래 문단에도 적혀 있지만 당시 같은 지역구의 경쟁자 중 거물들이 많았기에, 이들과 경합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청년이라는 이미지를 줄 필요가 있었고 세계기행이 그를 위한 스펙 메이킹이었다는 것.

이와 같이 대학생 시절 아버지의 급서 이후로부터 정치가로서 소양을 쌓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학원 재학 중 아버지의 지반을 이어 총선거에 출마, 26세의 나이로 처음 당선되어 그의 정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선 동기로 동갑내기이며 역시 26세에 당선된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가 있다. 참고로 당시 그의 지역구인 舊 군마현 제3구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후쿠다 다케오, 일본사회당 소속 야마구치 츠루오 의원 같은 당대의 거물들이 버티고 있던 곳이었고 중선거구제 하에서 오부치는 나카소네, 후쿠다는 물론 야마구치 츠루오에게도 밀려 4위 턱걸이로 당선된 경우가 많았다.[9] 소선거구제로 전환된 현재 군마현에도 이들 가문의 영향력이 건재해, 중의원 의원 5명 중 3명이 총리의 혈족이다. 군마현 제1구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손자 나카소네 야스타카, 군마현 제4구엔 후쿠다 다케오의 손자이자 후쿠다 야스오의 아들인 후쿠다 다쓰오가 있으며 군마현 제5구 오부치 유코가 오부치 게이조의 딸이다.

2.1. 헤이세이 아저씨

그는 다케시타 노보루의 측근이자 그의 파벌인 다케시타파의 유력 차기 주자 그룹인 다케시타파 칠봉행의 일원으로 다케시타 내각[10]에서 요직인 내각관방장관을 맡아 다케시타를 보좌했고, 관방장관 재임중이던 1989년 쇼와 덴노가 붕어한 후 수상관저에서 새로운 연호 헤이세이를 공표했다. 1989년(쇼와 64년) 1월 7일 오후 1시경(이 때는 쇼와 덴노가 사망한 날)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일:헤이세이 아저씨.jpg
新しい元号は「平成」であります。
새로운 연호는 헤이세이입니다.

이 장면은 지금도 쇼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로 전환하는 시대의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고, 연호가 써 있는 액자를 들고 있는 오부치 관방장관은 '헤이세이 아저씨(平成おじさん)'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1][12] 이 별명은 30년 후 레이와라는 새로운 연호(21세기에 처음으로 발표된 연호)를 발표한 ' 레이와 아저씨(令和おじさん)'가 물려받았다.

이후 사가와 규빈 사건에서 분열한 다케시타파를 추슬러 자신의 파벌인 헤이세이 연구회로 발전시켜 당내 최대 파벌 오부치파 회장이 되었으며, 1995년 라이벌 하시모토 류타로가 자민당 총재에 취임해 잠시 당 특별고문으로 물러났다가, 1997년 9월 하시모토 내각 외무대신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총리대신에 취임한다.

참고로, 오부치 장관이 들고있는 헤이세이의 서(書)는, TV 감정평가 프로그램에 출품되어 그 행방이 확인되었다. 출품자는 당시 총리인 다케시타 노보루의 손자 DAIGO.

2.2. 식은 피자에서 근성의 총리로

당시 일본 역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오부치는 관방장관과 외무대신 등 경제와 별 관련없는 부처를 거쳤기에 경제위기 대처능력에 대한 기대감이 낮았고[13], "3일이면 오래 간다", "식은 피자(冷めたピザ)" 등의 별명으로 여론으로부터 전방위로 불신을 샀다.

미국 뉴욕타임즈 98년 7월 13일 기사 Fresh Faces Are Few For Top Job In Japan에 존 뉴퍼[14]의 코멘트가 실렸는데, 그 중 "Obuchi has all the pizzazz of a cold pizza(오부치는 식은 피자 정도의 활력/매력이 있을 뿐이다.)[15]라는 문구가 있었고, 이것이 일본 내 언론에 확대 재생산 되면서 식은 피자라는 별명이 유명해진 것.

이에 오부치는 출마 회견에서 " 식은 피자도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따뜻해진다" 라고 맞받아치고, 98년 7월 18일 저녁 그의 집 앞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에게 따뜻한 피자를 돌리며 자신이 식은 피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방송에서 "레인지로 데운 피자는 맛이 없다."며 물고 늘어져 피자 논쟁이 이어지기도.

파일:attachment/오부치 게이조/obuchi-pizza.jpg

이 일화로 1998년 타임지에 피자를 들고 있는 사진이 표지로 선정되는 위엄(?)을 달성하기도 했다.

오부치는 "인기의 하시모토, 실력의 오자와, 인품의 오부치"라는 말처럼[16] 적을 만들지 않는 온화한 인품과 특유의 근성으로 이런 위기를 돌파했는데, 대표적으로 각계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수렴하는 등 경청하는 자세로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결국 재임기 별 탈없이 원만하게 이끌어 나간다는 평으로 바닥을 치던 지지율은 후반기에 50%를 돌파하게 되면서 총리로서 평판을 높이게 되었다. 관련 영상.

또한 경제통이자 미국통인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에게 대장대신을 맡도록 설득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때 했던 정책이 대량의 감세와 "국채 팔기" 정책. 물론 훗날 이 국채 팔기 정책이 빚더미 일본의 기초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 국채 자체가 자국민들에게 파는 국채가 많아서 재정적으로 아주 심각한 부담은 되지 않았단 의견도 있으며, 어찌 됐든 당시엔 급한 불은 껐다. 그렇게 경제 위기를 돌파하면서 결국 식은 피자라는 비아냥에서 시작했지만 오부치 폰으로 대표되는[17] 근성의 총리라는 평가를 얻는데 성공한다.

1998년 11월엔 23조엔 규모의 긴급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는데, 이때 실제로 국민들에게 현금성 상품권을 배부하기도 했다. 약 3,500만 명에게 '고향쿠폰'이라는 상품권을 배부하는데(대상자 1인당 2만엔 꼴) 여기에 실제로 7천억엔이 소요되었다. 하시모토 류타로 정권 시절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다시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사망 직전인 총리 집권 마지막 해인 2000년 모습.

오키나와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혹자는 오키나와를 생각해준 마지막 리더라는 평까지 할 정도. 강력한 진흥정책과 2000년 제 26차 G8 규슈- 오키나와 정상회의를 개최한 것이 대표적이다. 슈레이몬이 그려져 있는 2천 엔권 지폐도 이 시기에 발행한 것.

2.3. 재임 중 과로사

혼수상태이며 인공호흡기로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아오키 미키오 총리 권한대행 겸 내각관방장관 발언

사실 오부치는 총리 이전부터 심장 이상으로 병원에 자주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총리가 된 이후부턴 쉬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직무를 무리하게 수행한 탓에 몸에 이상 증세가 빠르게 찾아왔다. 2000년 4월 4일자 MBC 뉴스데스크의 해당 기사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오부치 게이조는 오전 8시 7분에 국회에 출석해 오후 9시 18분 관저에 돌아올 때까지 평균 20분에 한번 꼴인 37개의 크고 작은 일정을 소화했으며 총리 시절 언제 비상사태가 생길지 몰라 혹여나 출동할 상황이 생기면 바지만 갈아 입고 곧바로 집무실로 출동하려고 잠을 잘 때 바지만 잠옷으로 입고 웃옷은 양복 와이셔츠 차림 그대로 입고 잠자리에 들 정도이니 과로로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

뇌경색이 찾아온 결정적 계기는 2000년 4월 1일 토요일 오자와 이치로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려 했지만 오자와 당수가 연정 탈퇴를 표명하자 그 영향으로 큰 충격을 받은 걸로 추정된다. 이때 경색된 표정으로 관저로 복귀하던 도중 기자들의 질문에 10초간 말을 하지 못했고, 4월 1일 총리로서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고 4월 1일 밤 관저에서 정치현안과 관련된 녹화된 비디오를 보고 있다가 4월 2일 새벽에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송 직후 검사 결과 뇌사 식물인간 상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FNN, KBS, MBC, SBS 보도문)[18] 사실 4월 1일에 확실한 전조증상이 발견되었을 때 병원에 바로 갔어야 했으며 4월 1일 밤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보좌진의 조언에 아직은 그럴 필요 없다며 집무를 계속 한 것이 본인의 명을 재촉하는 크나큰 패착이 되었다.

그렇게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4월 3일부터 아오키 미키오 내각관방장관을 총리 권한대행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되었다. 다만 이때 언론에선 오부치 총리가 쓰러진 4월 2일 새벽부터 뇌경색 사실이 밝혀진 4월 3일까지 내각에서 총리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극비에 부친 것과 13시간 동안이나 총리 공백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국기위기 관리 체제 부실과 관련해 비판하기도 했다.

4월 5일 신임 총리로 모리 요시로를 정식 내정했다. 모리 요시로 내각이 정식으로 출범한 이후 오부치는 총리로서의 임기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결국 42일 뒤인 5월 14일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부속병원(약칭 준텐도병원)에서 오후 4시 13분경 62세 10개월을 일기로 사망했다. 재임 중 사망한 것은 아니고 재임 중에 쓰러져서 임기 조기종료 후에 사망한지라 정확히는 재임 중 사망한 것은 아니지만 오부치를 포함한다면 하라 다카시, 가토 도모사부로, 가토 다카아키, 이누카이 쓰요시, 오히라 마사요시 이후 6번째가 되며 이들 중 하라와 이누카이는 병사가 아니라 암살당해 죽었다. 하마구치 오사치의 경우 암살미수에서 살아남았으나 3개월 이상 입원 치료를 받느라 시데하라 기주로 당시 외무대신에게 권한대행을 맡겼고, 직무 복귀 후에도 한 달 만에 사임했으며 피격 10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니 하마구치도 포함하면 7번째가 된다.

6월 8일 열린 장례식에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추도사를 낭독했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참여했으며, 김대중 대통령도 장례식에 참석하여(대한민국 대통령 최초의 외국 정상 장례식 참석) 애도의 뜻을 전했다.( MBC 영상1, 영상2, KBS) 또한 클린턴 미 대통령이 오부치 총리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영정에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하여 조문을 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오부치가 타계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6월 19일에 오부치가 관방장관 시절 헤이세이 연호를 발표할 적의 총리이자 와세다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까지 세상을 떠났다. 한 달 간격으로 전/현직 총리를 두 명이나 보내는 비보를 맞은 것이다.[19]

2001년에는 규슈-오키나와 G8 정상회의가 열렸던 오키나와 정상회의장 앞에 오부치 게이조 총리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고, 2002년에는 고향인 군마현에도 동상이 세워졌다.

재임 시기 국민들과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총리인 만큼 재임 중후반기엔 인기도 제법 있었고, 그가 병으로 사망했을 땐 많은 사람들이 조문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재임 시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거나 없는 1990년대 이후 출생자들에게는 '전임 수상'보다는 ' 헤이세이 연호의 발표자'로 더 알려진 편이다.

3.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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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총리대신 시절인 1998년 10월, 도쿄 영빈관에서 일본을 공식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악수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한일 파트너십'이라고도 불리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痛節な反省と心からの謝り)'를 했다.

오부치는 한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외교적 수사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취하기 위해 제법 노력한 총리였다. 한국에도 나름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수상 재임시기 한일관계는 원만했다. 이후의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등과 함께,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 총리들 중에서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대표적 사례.[20] 수상 재임 이전에도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당시엔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이었으며, 하치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의 정체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총리 시절인 1998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당시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방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가해자=일본, 피해자=한국, 그리고 사죄'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표현을 했다. 해당 영상.

이전에도 일본의 사과에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이 있기는 했지만, 둘 다 한국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대중 오부치 선언(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 내의 사과는 한국을 지칭한 사과라는 점[21], 기존의 담화형식이 아닌 공식문서화 했다는 점, 자민당 보수정권의 사과라는 점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사과라고 볼 수 있다.[22] 김대중 대통령도 이 같은 일본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이후 일본 총리들은 딱 이 수준 혹은 더 못한 수준에서 사과 발언들을 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에게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추진할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것이 11개 항목(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의 핵심 내용과 43개 항목( 부속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을 위한 행동계획)의 행동 계획으로 구성된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이다. 한국은 미래를 바라보고, 일본은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취지로 지금도 한일관계에서 대표적인 양국 협력 선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여담으로 오부치 총리는 김 대통령이 써준 '경천애인' 휘호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한일 양국 국민간의 사랑과 협력의 뜻도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나가는 김 대통령을 붙잡고 웃으면서 친근하게 말하기도 했다. 관련 영상.

또한 1999년 방한 당시에는 해인사를 방문해 팔만대장경을 돌아봤고( MBC 뉴스), 동시에 일부 학생들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강연을 하였는데, 어색한 한국말로 "오늘은 고려대학교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 외 오부치 총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여성 다우치 치즈코[23] 여사가 전남 목포시에 설립한 고아원 공생원에 매화나무 묘목 20그루를 보내기도 했고, 2008년 공생원 설립 80주년 행사에는 오부치 총리의 부인인 오부치 치즈코 여사가 초청을 받아 방문했다. 오부치 총리 본인도 생전에 공생원 방문을 희망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군마 3구

47,350 (14.7%) 당선 (3위) 초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1,543 (18.2%) 재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0,185 (13.8%) 당선 (4위) 3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37,258 (9.7%) 4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6,012 (18.5%) 당선 (2위) 5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2,375 (15.4%) 당선 (3위) 6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9,647 (14.6%) 당선 (4위) 7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9,028 (12.5%) 8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5,289 (18.5%) 9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6,932 (17.7%) 10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9,440 (22.7%) 당선 (1위) 11선[24]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군마 5구 127,052 (70.7%) 12선[25]

5. 기타

  • 그의 사후, 차녀 오부치 유코가 아버지와 똑같이 26세의 나이로 지역구인 군마현 제5구를 이어받아 당선되어 중의원에 입성했다.(자세한 내용은 오부치 유코 문서 참조) 이로서 오부치 유코는 3대 세습 정치인이 됐지만 일본 정치계에서 3대째 국회의원을 하는 것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아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 1989년(쇼와 64년) 1월 7일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아키히토가 즉위하던 날 내각관방장관으로서 새 연호인 헤이세이를 발표했다. 해당영상[26]
  • 2000년 1월, 오부치 게이조가 발족한 자문기구 '21세기 일본의 구상'이 낸 보고서 중 ' 영어 제2공용어화 계획'이 수록된 게 밝혀져 일본 열도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27] 그러나 해당 계획은 오부치 사후 사실상 사장(死葬)되었다.
  • 그의 별명 변천사는 헤이세이 아저씨→식은 피자→오부치 폰이다.
  • 평소 유머스런 말을 꽤 잘했다고 한다.
  • 정작 인터뷰를 할땐 쑥스러움을 제법 탔다. 그래서 기자들 질문에 답변할때 약간 부끄러움을 타는 것도 종종 볼 수 있었다.
  • 원래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으나 정치 생활을 하면서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해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허나 안경 쓴 총리로 유명한데 그의 전임들 중 그 이전에 마지막으로 안경을 썼던 총리가 우노 소스케(75대 총리)였고 그 이후에 처음으로 다시 안경을 썼던 총리가 후쿠다 야스오(91대 총리)여서 일본 역대 총리들 중 안경을 쓴 총리가 많지 않은 편이다.
  • 평소 아이들을 좋아해 유치원에 방문하여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 생애 황소 모형을 좋아하여 젊은 시절부터 수집하기 시작해 집에 황소 모형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 오부치가 태어난 1937년은 '쇼와 12년'이며, 그가 과로사로 세상을 떠난 2000년은 '헤이세이 12년'이다.
  • 총리 시절이었던 1999년, 시카고 컵스의 홈 구장인 리글리 필드에서 시구를 한 적이 있다. 해당영상
  • 총리 재임 시절 한 여성에게 "저 아세요?" 라고 물었는데 모른다는 답을 듣고 입을 붕어처럼 내민 채 연호 액자를 들고 있는 시늉을 하자 곧바로 알아 맞혔다고 한다.
  • 총리 재임 시절에 도쿄의 어느 라멘집에서는 그의 지지율 변동에 따라서 라멘값을 다르게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 1999년 자민당 정치극 1년 해당영상
  • 총리 시절 러시아에 방문했을 당시 러시아 털모자를 착용하고 행진한 적이 있다. 오부치 총리의 러시아 방문.
  • 오부치 총리의 독일 방문 #
  • 오부치 총리의 폼페이 방문 #
  • 오부치 총리의 중국 방문 #
  • 오부치 총리의 프랑스 방문 #, #
  • 오부치 총리의 필리핀 방문 #

6. 대중매체에서

파일:小渕継続しんちゃん.jpg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에서
TV판에서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7기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에서 총리(한국판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역으로 특별출연 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방영된 《흉내내기를 잘하는 마사오 군이라구》 편에서는 카자마 토오루(김철수)가 이 인물을 흉내 냈는데, 한국판에서는 김제둥으로 현지화 했다. 실제로 김제동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평을 받았다. 해당 장면 이후에 나오는 짱구의 식은 피자 드립은 상기된 내용에서 기인한 것. 다만 한국에서는 김제동과 식은 피자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좀 붕 뜬 느낌이 되어버렸다.

은혼 4기 2화 (267화) 엔딩이 끝나고 사카타 긴토키가 오부치 게이조의 연호를 공개하는 장면을 패러디 했다.


[1] 일본에서는 (깊을 연)을 인명에서 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淵과 渕의 경우에는 신자체 구자체의 관계가 아니며 이체자이다. [2] 연혁상의 공식적인 임기는 4월 5일까지이나 4월 3일부터 5일까지는 후술하듯 혼수상태에 빠져 아오키 미키오 당시 내각관방장관이 총리 권한대행을 했다. 재임 중에 아예 사망해버린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는 임기 종료일 = 사망일이지만 오부치 총리는 사망하지 않고 혼수상태였던 점을 반영하여 오부치 총리는 임기 종료일 = 모리 요시로 후임 총리 취임일이다. [3] 아버지랑 이름이 똑같다. ([ruby(光平, ruby=みつへい)]) 전직 정장(한국으로 치면 군수나 읍장, 면장 정도) [4] 딸과 키가 같다. [5] 후술할 헤이세이 아저씨 당시의 직책. [6] 군마 촌동네 양잠업자 출신 중의원 의원의 아들이면 당시 화족에서 화족제 폐지 이후 얼마 되지도 않은 진짜 귀족의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천박한 촌놈으로 보일 만했다. 이 때문에, 총리 관저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개인 프로필 겸 일대기에 가쿠슈인 중등과 시절에 대한 언급은 지방 중학교에서 가쿠슈인 중등과로 전학했다는 내용만 있을 정도다. 오부치 게이조의 소년 시절 프로필. [7] 첫 선거에서 낙선, 두번째 선거에서는 당선. 이후에는 3연속 낙선이었다. [8] 오부치는 역대 일본 총리들 중 유일한 어문계열 전공 총리다. 지금까지 문학사 총리는 오부치 본인의 선배이자 와세다대학 철학과 출신의 이시바시 단잔뿐이었고, 그 외에 모든 총리들의 전공은 (정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다나카 가쿠에이 스즈키 젠코를 제외하고) 법학, 정치학, 상학, 그리고 사관학교 출신들이 전부였다. 그나마 나중에 공학부 출신의 하토야마 유키오, 물리학과 출신의 간 나오토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공계 전공 총리도 없었다. [9]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선거구제 시절 (구) 군마 3구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vs 후쿠다 다케오가 1위 대결을 했고, 야마구치 츠루오 vs 오부치 게이조가 3위 대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0]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된 것인지는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둘 다 와세다대학 동문이었으며 다케시타 총리의 다다음 사람과 오부치 총리의 바로 다음 후임자도 동문. 오부치 총리 이전에는 이시바시 단잔 총리가 와세다대학 출신이었다. 일본 사회도 학연이 알게 모르게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오부치 총리의 전임자 다다음 사람은 와세다대학의 영원한 숙적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이다. 대강 나열해보면 다케시타(와세다) - 가이후(와세다) - 하시모토(게이오) - 오부치(와세다) - 모리(와세다) - 고이즈미(게이오) - 후쿠다 야스오(와세다) - 노다 요시히코(와세다) 등 헤이세이 시대는 소케이 출신들이 2:1 비율로 번갈아가면서 총리를 해먹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중간중간에 타 대학 출신들도 없지는 않으며, 노다 이후는 8년간 세이케이대학 출신인 아베 신조가 독점하고 있었다가 스가 요시히데 호세이대학 출신 첫 총리가 되었고 2021년 10월에 다시 와세다대학 출신인 기시다 후미오가 총리를 꿰차 와세다대학은 현재까지 총리를 8명 배출함으로써 도쿄대학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총리를 많이 배출한 대학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11] 한 일화로, 골프장에서 만난 대학생 여성에게 "나를 알고 있나요?"라고 물으면서 액자를 내거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12] 극장판 가면라이더 지오 Over Quartzer에서 가면라이더 발크스가 들고 있는 방패에 헤이세이 라이더 전원이 힘을 합쳐서 '헤이세이' 글씨로 구멍을 내 버리고 발크스가 이 광경을 쳐다보고는 벙찌는 장면으로 패러디되었다. [13] 전임 총리대신인 하시모토 류타로는 경제관계 대신직 중 최고 요직인 통상산업대신과 대장대신(現 재무대신)을 거쳤다. [14] 일본 영사관에서 일하거나 일본의 한 연구소에서 지내면서 정치 관련 뉴스기사를 송고하기도 한 인물. [15] 보면 알겠지만 pizzazz 와 pizza로 말장난을 유도했고, 존 뉴퍼 본인 스스로도 단순히 glib comment였다고 하는 등, 이렇게 일본에서 논란을 불러올 지 몰랐다고 한다. 존 뉴퍼는 이 일로 일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가 일본 정치에 대해 코멘트를 했다는 둥, 존 뉴퍼가 대체 누구냐는 둥 비난에 시달렸다. [16] 원래는 일본프로야구에서 비롯된 말로 인기의 세-리그, 실력의 파-리그(人気のセ、実力のパ)가 원본이다. [17] 짬날 때마다 아무에게나 불쑥불쑥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던 전화광이라 붙은 별명. [18] KBS 측은 이윤배 도쿄특파원(전 해설위원실장), MBC는 박광온 도쿄특파원, SBS는 조윤증 도쿄특파원(전 SBS미디어넷 사장)이 각각 보도했고, 이 중 박광온은 뉴스데스크 앵커이던 김은혜와 20년 후 21대 국회에서 경기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만났다. [19] 비슷한 사례로 한국에서도 2009년 직접적인 전-후임 관계이자 같은 당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5월과 8월에 연이어 타계한 일이 있었다. [20] 다만 하토야마 총리와 간 총리는 민주당 계열 출신의 총리들이었고, 때문에 오부치는 자민당 출신 총리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한국과 가장 잘 맞았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21] 무라야마 담화는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사과였다. [22] 물론 당시 자민당 내부 강경파들은 이런 총리의 행보에 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보면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이 수준까지의 행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외교란 결국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 [23] 한국명 윤학자. 목포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복지 사업에 전념하여 광복 전후 목포시에서 명망을 얻었다. [24]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25] 임기 중 작고. [26]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시절 녹화한 VHS 비디오 영상이며 4:3 비율의 아날로그 감성이 돋보이는 아날로그 시절 일본의 인상깊은 영상자료다. [27] 공교롭게도 오부치는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