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0:06:55

아베 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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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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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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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도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고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고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기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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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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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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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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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인 히코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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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게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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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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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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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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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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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자와 겐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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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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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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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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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센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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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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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타 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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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가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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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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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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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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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기치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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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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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카 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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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 데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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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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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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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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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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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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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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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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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 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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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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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가쓰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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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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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기무라 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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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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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구라나리 다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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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우노 소스케
105대
미쓰즈카 히로시
106대
나카야마 타로
107·108대
와타나베 미치오
109대
무토 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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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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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가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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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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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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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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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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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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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기시 노부스케
2-3대
미키 다케오
4대
카와시마 쇼지로
5대
후쿠다 다케오
6대
카와시마 쇼지로
7대
마스타니 슈지
8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9-10대
미키 다케오
11대
다나카 가쿠에이
12대
후쿠다 다케오
13대
다나카 가쿠에이
14대
호리 시게루
15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16대
니카이도 스스무
1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8대
우치다 쓰네오
19대
오히라 마사요시
20대
사이토 쿠니키치
21-22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3-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로쿠스케
26대
가네마루 신
27대
타케시타 노보루
28대
아베 신타로
29대
하시모토 류타로
30대
오자와 이치로
31대
오부치 게이조
32대
와타누키 타미스케
33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34대
모리 요시로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36대
가토 고이치
37대
모리 요시로
38대
노나카 히로무
39대
고가 마코토
40대
야마사키 타쿠
41대
아베 신조
42대
타케베 쓰토무
43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44대
아소 다로
45대
이부키 분메이
46대
아소 다로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50대
이시바 시게루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아마리 아키라
55대
모테기 도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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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시이 미츠지로
2대
스나다 시게마사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고노 이치로
5대
마스타니 슈지
6대
이시이 미츠지로
7대
호리 시게루
8대
아카기 무네노리
9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2대
후쿠나가 켄지
13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14대
하시모토 토미사부로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7대
스즈키 젠코
18대
나다오 히로키치
19대
마쓰노 라이조
20대
에사키 마스미
2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2대
쿠라이시 타다오
23대
스즈키 젠코
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타츠오
26대
호소다 키치조
27대
가네마루 신
28대
미야자와 기이치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이토 마사요시
31대
미즈노 키요시
32대
카라사와 슌지로
33대
니시오카 다케오
34대
사토 고코
35대
키베 요시아키
36대
무토 카분
37대
시오카와 마사쥬로
38대
모리 요시로
39대
후카야 다카시
40대
이케다 유키히코
41대
오자토 사다토시
42대
무라오카 카네조
43대
호리우치 미쓰오
44대
규마 후미오
45대
니와 유야
46대
니카이 도시히로
47대
사사가와 다카시
48대
다노세 류타로
49대
고이케 유리코
50대
시오노야 류
51대
호소다 히로유키
52대
노다 세이코
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호소다 히로유키
55대
다케시타 와타루
56대
가토 가쓰노부
57대
스즈키 슌이치
58대
사토 쓰토무
59대
후쿠다 다쓰오
60대
엔도 도시아키
61대
모리야마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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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즈타 미키오
2대
쓰카다 쥬이치로
3대
미키 다케오
4대
후쿠다 다케오
5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6대
후나다 나카
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대
후쿠다 다케오
9대
다나카 가쿠에이
10대
가야 오키노리
11대
미키 다케오
12대
스토 히데오
13대
아카기 무네노리
14대
미즈다 미키오
15대
니시무라 나오미
16대
오히라 마사요시
17대
네모토 류타로
18대
미즈다 미키오
19대
코사카 젠타로
20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1대
쿠라요시 타다오
22대
미즈타 미키오
23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24대
마쓰노 라이조
25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6대
고모토 토시오
27대
에사키 마스미
28대
고모토 토시오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다나카 로쿠스케
31대
후지오 마사유키
32대
이토 마사요시
33대
와타나베 미치오
34대
무라타 게이지로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36대
가토 무쓰키
37대
모리 요시로
38대
미쓰즈카 히로시
39대
하시모토 류타로
40대
가토 고이치
41대
야마사키 타쿠
42대
이케다 유키히코
43대
가메이 시즈카
44대
아소 다로
45대
누카가 후쿠시로
46대
요사노 가오루
47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48대
나카가와 쇼이치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50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1대
호리 고스케
52대
이시바 시게루
53대
모테기 도시미쓰
54대
아마리 아키라
55대
다카이치 사나에
56대
이나다 도모미
57대
모테기 도시미쓰
58대
기시다 후미오
59대
시모무라 하쿠분
60대
다카이치 사나에
61대
하기우다 고이치
62대
도카이 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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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1기 상공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노다 우타로
3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4·6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5대
나카하시 도쿠타로
6대
다와라 마고이치
7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8대
마에다 요네조
9대
나카시마 구마키치
10대
마쓰모토 조지
11대
마치다 추지
12대
가와사키 다쿠키치
13대
오가와 고타로
14·18대
고도 다쿠오
15대
요시노 신지
16대
이케다 시게아키
17대
핫타 요시아키
14·18대
고도 다쿠오
19대
후지와라 긴지로
20대
고바야시 이치조
임시대리
가와다 이사오
21대
도요다 데이지로
22대
사콘지 세이조
23대
기시 노부스케
24대
도조 히데키
2기 상공대신 (1945~1949)
2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6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27대
호시시마 지로
28대
이시이 미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29-30대
미즈타니 조사부로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1대
오야 신조
32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통상산업대신(1949년~2001년)
초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2·6·17대
이케다 하야토
3대
다카세 소타로
4대
요코오 시게루
5대
다카하시 류타로
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8대
오카노 키요히데
9대
아이치 기이치
10·11·12대
이시바시 단잔
13·14대
미즈타 미키오
13·14대
미즈타 미키오
15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2·6·17대
이케다 하야토
18대
이시이 미쓰지로
19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0대
사토 에이사쿠
21·22대
후쿠다 하지메
23·2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5대
미키 다케오
26·27대
칸노 와타로
19·2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9대
오히라 마사요시
30대
미야자와 기이치
31대
다나카 가쿠에이
32·3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34·36대
고모토 도시오
35대
다나카 다쓰오
34·36대
고모토 도시오
37대
에사키 마스미
38대
사사키 요시타케
38대
다나카 로쿠스케
39대
아베 신타로
4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42대
우노 소스케
43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44대
무라타 케이지로
45대
와타나베 미치오
46·47대
타무라 하지메
46·47대
타무라 하지메
48대
미쓰즈카 히로시
49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0대
마츠나가 히카루
51대
무토 가분
52대
나카오 에이치
53대
와타나베 고조
54대
모리 요시로
55대
구마가이 히로시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6대
하타 에이지로
57대
하시모토 류타로
58대
츠카하라 슌페이
59대
사토 신지
60대
호리우치 미쓰오
61대
요사노 가오루
62·63대
후카야 다카시
64대
히라누마 다케오
경제산업대신 (2001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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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히라누마 다케오
3-5대
나카가와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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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니카이 도시히로
7·8대
아마리 아키라
9·10대
니카이 도시히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12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13대
오하타 아키히로
14대
가이에다 반리
15대
하치로 요시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6대
에다노 유키오
17대
모테기 도시미쓰
18대
오부치 유코
19·20대
미야자와 요이치
21대
하야시 모토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2·23대
세코 히로시게
24대
스가와라 잇슈
25·26대
가지야마 히로시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29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30대
사이토 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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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내각관방장관 (1947~)
초대
하야시 조지
2대
니시오 스에히로
3대
도마베치 기조
4대
사토 에이사쿠
5대
마스다 가네시치
6대
마스다 가네시치
7대
오카자키 가쓰오
8대
호리 시게루
9대
오카타 다케도라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3-15대
네모토 류타로
16·17대
이시다 히로히데
18대
아이치 기이치
19대
아카기 무네노리
20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1·22대
오히라 마사요시
23-25대
구로가네 야스미
26대
스즈키 젠코
27·28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29대
아이치 기이치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2대
기무라 도시오
33·34대
호리 시게루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6·37대
니카이도 스스무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9대
이데 이치타로
40대
소노다 스나오
41대
아베 신타로
42대
다나카 로쿠스케
43대
이토 마사요시
44대
미야자와 기이치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6대
후지나미 다카오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9대
오부치 게이조
50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51대
야마시타 도쿠오
52대
모리야마 마유미
53대
사카모토 미소지
54대
가토 고이치
55대
고노 요헤이
56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57대
구마가이 히로시
58대
이가라시 고조
59대
노사카 코켄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2대
무라오카 가네조
63대
노나카 히로무
64·65대
아오키 미키오
66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67-69대
후쿠다 야스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2대
아베 신조
73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74대
요사노 가오루
75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76대
가와무라 다케오
77대
히라노 히로후미
78대
센고쿠 요시토
79대
에다노 유키오
80대
후지무라 오사무
81-83대
스가 요시히데
84대
가토 가쓰노부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7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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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 농림대신 (1925~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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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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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대
야마모토 데이지로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데이지로
8대
고토 후미오
9·11·20대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10·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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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20대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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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우치 유키오
14·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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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도시오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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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20대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전후 농림대신 (1945~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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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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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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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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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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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토 류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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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산쿠로
12·14·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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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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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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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기 무네노리
26대
미우라 쿠니오
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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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이시 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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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이시 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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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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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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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데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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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12·113대 외무대신
아베 신타로
安倍晋太郎 | Abe Shintarō
파일:아베신타로.jpg
<colbgcolor=#003366><colcolor=#fff> 출생 1924년 4월 29일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사망 1991년 5월 15일 (향년 67세)[1]
도쿄도 분쿄구
재임기간 제112·113대 외무대신
1982년 11월 27일 ~ 1986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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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366><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아베 간, 어머니 혼도 시즈코[2]
배우자 아베 요코[3]
자녀 장남 아베 히로노부[4]
차남 아베 신조
삼남 기시 노부오[5]
친인척 이부남동생 니시무라 마사오
이부여동생(요절)
백부 아베 신타로[6]
장인 기시 노부스케
처백부 사토 이치로
처숙부 사토 에이사쿠
처고모 7명[7]
며느리 아베 아키에
손자 아베 히로토, 기시 노부치요, 기시 토모히로
손녀 아베 마리코
학력 야마구치중학교 (졸업)
제6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학 / 학사)
정당

지역구 야마구치 1구[8]
의원 선수 11 (중)
의원 대수 28, 29, 31, 32, 33, 34, 35, 36, 37, 38, 39
약력 마이니치 신문 기자
기시 노부스케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28-29·31-39대 / 舊 야마구치현 제1구)
제46대 농림대신
제41대 내각관방장관
제29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42대 통상산업대신
제112-113대 외무대신
제29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24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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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정치 성향4. 아들 아베 신조와의 관계5.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6. 가족관계7. 선거 이력8. 기타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아베 간의 아들이자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 기시 노부오 방위대신의 부친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1980년대 일본 외무상을 역임하였다.

2. 생애

1924년에 도쿄도 신주쿠구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아베 간(安倍寛)은 중일전쟁 시기부터 전후까지 중의원 의원을 지내며 반전 활동을 했던 정치인이었다.[9]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혼하였는데 당시 주변 상황을 보면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자전거 제조사를 운영하던 아버지 간이 신타로 출생 전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사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결국 신타로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과 이혼, 그리고 결국 간이 야마구치현으로 귀향하면서 아버지의 고향인 시모노세키시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집안은 대지주였으며 시모노세키 인근에 있는 간장 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야마구치 귀향 후 전쟁의 기운이 나라를 뒤덮던 1937년 '엄정 중립'을 기치로 중의원 의원 총선에 당선되었고 당시 국회에서 얼마 안되던 전쟁 반대파로서 열렬히 활동하였다.

신타로는 2차대전 중이던 1944년 제6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고 1948년에 졸업했다.[10]

전쟁 막바지에 가미카제 자살 특공 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훈련을 수료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여 화를 면했다. 당시 아버지 간은 어차피 일본 제국 연합국에 패하니 적당히 하는 척 하고 빠져라는 조언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인도 일부러 늦게 들어가려고 했고 전쟁이 끝나고도 자칫하면 가미카제에 투입될 뻔한 경험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한국 등 주변 국가들에게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11]

대학 졸업 후 마이니치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는데 당시 상사가 전 민주당 대표 가이에다 반리의 아버지였다. 야마구치현 출신의 정치인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동향 출신이자 지역 내 평이 좋은 아베 집안의 아들인 신타로를 사위로 점찍어 1951년 기시 요코와 결혼했다.

파일:아베 가족들.jpg
▲ 결혼 생활 초기. 부인 요코와 함께. 아베 신타로가 안고 있는 아이가 장남 아베 히로노부, 부인이 안고 있는 아이가 차남 아베 신조다.

1956년 기자를 그만두고 당시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장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무성 비서관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1년 후인 1957년부터는 총리가 된 기시를 따라가 총리실 비서관으로 계속 보좌했다. 역시 1년이 지난 1958년에는 처음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현직 총리였던 장인의 후광을 업고 무난히 당선되었다.[12]

다만 이 때문에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냐는 말이 많았는데 본인은 스스로는 아베 간의 아들이지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신타로는 조실부모하였고 친척도 형제도 없었기에 기시 가문에 들어가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 후견인인 장인과 대립할 수도 있는 그의 소신을 지켜나갔다.

비록 기시의 계파[13]에 속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보다는 사토 에이사쿠 보수 본류 내 온건파와 가까웠다. 아버지 간을 따라 평화주의자였으며 친한파 기조를 가졌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자 행세, 일본의 전쟁범죄 등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한국 등 피해국에게 사죄하자는 연설을 한 적도 있으며 재일 외국인 인권 증진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14]

하지만 아들 신조는 외할아버지 기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버지 신타로와 정치 성향이 반대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문단 참조.

이후 1967년 농림성 정무관, 1974년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 농림대신[15], 1977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관방장관, 그리고 1977~81년 집권 자민당의 정조회장 등의 요직을 지냈다.

파일:external/www.unic.or.jp/UN_162140.jpg
▲ 1980년대 외무대신 시절. UN 총회에서의 연설 모습

특히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취임 후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어 4년 동안 재직했다. 이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미국 정부와 동맹 관계 강화를 비롯한 1980년대 일본의 외교정책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다.

외무대신을 물러난 1986년에도 자민당의 총무회장을 역임하는 등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와 더불어 포스트 나카소네로서 뉴리더로 부각하였다. 나카소네가 총리로 3번 역임 후 퇴임하면서 뉴리더 3명은 총리를 노리게 되었는데 다케시타와의 비밀회담에서 다케시타가 최대파벌의 회장이었으니 자민당 총재가 되는 대신 간사장직을 약속받았다. 나카소네의 지지를 받은 다케시타가 자민당 총재에 취임하고 총리가 되면서 자민당의 2인자인 간사장에 올랐다.

이처럼 착실히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차기 총리까지 노릴 수 있는 유력 정치인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인 1988년 발생한 리크루트 사건에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들과 함께 연루된 것이 드러났다. 그로 인해 다케시타 내각은 붕괴했고, 본인도 자민당 간사장을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으로 '부패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정치 경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다케시타의 후임으로 리쿠르트 사건과 무관했던 뜻밖의 인물인 나카소네파의 2인자였던 우노 소스케가 총리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90년 8월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입원했는데 한 달 후 췌장암 선고를 받고 이듬해인 1991년 5월 15일 향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가 회장을 맡았던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미쓰즈카 히로시가 맡게된다.

그의 유해는 후지산과 가까운 '후지 레이엔'(冨士霊園)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곳에는 그의 장인인 기시 전 수상의 묘지도 위치하며, 31년 후 피살당한 차남 신조 역시 이곳에 안장될 예정이다.

3. 정치 성향

친한파로 아들 아베 신조와는 상반되는 정치 성향을 나타냈다. 신조가 자유민주당 강경 우파인 반면 아베 간과 아베 신타로는 자유민주당 내 중도우파에 해당되었다.[16]

신타로의 주요 후원자였던 한 재일교포 기업인은 "아베 신타로는 친척도, 양친도, 형제도 없이 혼자 최선을 다했던 터라 고향 없는 재일 한국인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닮아있었다"고 회상하였다.

신타로는 시모노세키 재일 한국인들과 한국계 일본인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고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 시모노세키 내 재일 한국인들과 한국계 일본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신타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4. 아들 아베 신조와의 관계

부자 관계인 신타로와 신조가 서로 상반된 정치 성향을 드러냈다는 것에 대해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이는 후술할 아베 집안의 내부 사정과 연관이 있다. 과거 신타로의 전담 기자였고 현재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신조의 여러 지인들과 인터뷰하여 신조의 생애를 다룬 인터뷰와 신조에 대해 기록한 노가미 다다오키의 증언에 따르면 신조와 신타로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신타로는 아들 신조가 외조부 기시,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 조부 아베 간, 그리고 아버지 본인과 마찬가지로 도쿄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여 신조에게 학업 압박을 많이 가했다고 한다.

아베 가문과 처가인 기시 가문 모두 일본 최고 학부인 도쿄대학 학벌은 깔고 가는 집안이었고 신타로 본인도 도쿄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들도 도쿄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학벌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따르면 신조가 고등학생일 때 신타로가 "우리 집에서 대학은 도쿄대학 밖에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신조의 머리를 향해 책을 집어 던진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신조는 애당초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아버지의 계속된 압박에 반항심을 품고 입시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평범한 수준의 대학으로 평가받는 세이케이대학에 진학하였다. 신조가 세이케이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학벌에 대해 민감한 모습을 보여서 결국 미국 유학을 언급했다.

그러나 어찌어찌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학업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는지 이탈리아 알파 로메오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면서 동아리 여학생들과 어울리거나 마작을 즐기는 등 공부보다는 노는 데 열중하면서 아버지 신타로와 또다시 갈등을 빚었다.

사실 신타로의 어머니는 그가 아기였을 때 이혼해서 집을 나갔고 아버지인 간 역시 아들에게 큰 관심을 주지 못했으며 빨리 사망한 탓에 신타로는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던 걸로 보이며 자신도 도쿄와 지역구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정치인으로 바쁘게 지내느라 신조에게 차갑게 대하였다.

반대로 외할아버지 기시는 바쁜 사위를 대신해 신조를 키우고 보살펴 주었고 항상 외손자에게 애정을 많이 표현했으며 운동회, 현장체험학습 등에도 부모 대신 같이 동행했다. 그리고 신조는 아버지인 신타로보다 가정부, 외할아버지인 기시와 어머니인 요코와 더 가까웠다. # # #

즉 신타로가 신조를 차갑게 대했고 이에 대해 부자간 갈등이 존재하였고 반대로 외할아버지 기시가 신조와 같이 있으면서 그가 원했던 애정을 주었기 때문에 차가웠던 아버지에 대한 반동 심리로 자신에게 애정을 줬던 기시의 사상으로 기울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아베 신조는 깊이 있는 생각도 없이 외조부의 사상을 추종하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고 신조의 옛 상사인 야노 신지가 '젊은 시절의 그는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는 평을 내린 걸 보면 그의 인생 초기의 정치적 신념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과 외할아버지 기시에 대한 애정에 기초한 감정적인 것에 가까워 보인다. # #

그래서 과거에는 그의 정치적 신념이 공부와 경험,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에 기반하여 좋은 감정이 없고 추억도 없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상을 외면하고 자신을 사랑해준 외할아버지를 따라한 것의 결과물이라 다분히 감정적이고 깊이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대학에서도 교수에게 '보수주의를 따르는 건 좋지만 공부를 하라'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신타로는 공인으로서는 훌륭했지만 부모로서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아들 신조의 사상적 편향에는 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17]

반대로 기시 노부스케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공인으로서는 좋게 보기 어렵지만 외손자에겐 좋은 할아버지였는데 신조는 사실상 자신이 원하는 애정을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에 따라 롤모델을 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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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48
토론 - 합의사항49
토론 - 합의사항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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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 토론 관리 방침의 근거 신뢰성 순위 7순위 이상의 근거자료 위주로 서술하고, 그 외 한국계 도래인 설에 대한 주관적 의견은 최소화하여 서술한다.
*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계 도래인인지 아닌지를 직접 발언한 내용이 없음을 서술한다.
* 사토, 아베 가문이 도래인 후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일본 내 역사학적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을 서술한다.

  • 2006년 주간 아사히는 10월6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아베 신조 연구-가정부가 본 아베.기시 3대'라는 제목으로 아베 총리 가문의 내력을 특집 보도하였고 한국 언론에서도 이를 인용해 보도하였다.
    기시와 아베 가문에서 가정부로 40여년을 지냈던 구보 우메(80)는 슈칸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부친 아베 전 외상이 고백한 집안 내력을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구보는 "파파(아베 전 외상)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내게는 말해줬다"면서 "(아베 전 외상 사망 직후) 입관될 때 이 사람의 골격을 보면서 정말 일본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로 잰 듯이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완전히 한국(인)의 체형이다. (아베 전 외상) 스스로도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조선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정치인으로서 주변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따라서 좀더 건강하게 활동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북한 문제도 해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베 전 외상의 죽음은 나라의 손해였다"면서 애석해했다.


    이 잡지는 아베 전 외상은 생전에 아베가(家)의 기원은 10세기쯤까지 한반도 북쪽에서 중국대륙에 걸쳐 존재했던 발해국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에서의 아베가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고 보도했다.


    아베가의 기원에 대해 구보는 "아베가의 본류는 아오모리현이다. 아베 전 외상이 조선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는 지금의 북한이 아니라 그 북쪽과 길림성 아래쪽에 있었던 발해"라면서 "11세기 헤이안(平安) 시대의 무장이었던 아베가 지금 아베가의 선조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도 아베 총리를 끔찍히 아꼈다고 그는 덧붙였다. 구보는 아베 총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쿄의 기시 전 총리의 자택에서 가정부로 지냈으며, 지금은 따로 나와 도쿄에서 살고 있다. 아베 일본 총리 부친, "나는 조선인이다''
  • 14대 심수관[18]은 아베 신타로의 장인인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둘다 기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감)가 자신에게 본인의 집안이 1600년대 이후에 건너온 조선인 출신이라고 말해줬다.고 주장했다. #
  • 이와 관련해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가 생전에 공개 석상에서 자신이 한국계 도래인 후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 발언한 적은 없다.
  • 2006년 주간 아사히가 구보 우메의 증언에 대해서 보도한 이후 아베 신조가 공식 기자회견 등 공개 석상에서 주간 아사히의 보도 내용에 대해서 긍정을 하거나 부정을 한 적은 없다. 다만 아베 신조가 주간 아사히의 보도 내용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 현존하는 일본 내 사료(史料) 중에서 사토 가문과 아베 가문의 시조가 도래인이라고 기록된 사료가 발견된 적은 없다.

6.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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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야마구치 1구

70,814 (18.6%) 당선 (2위) 초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8,218 (18.8%) 당선 (4위) 재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8,021 (16.0%) 낙선 (5위)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8,771 (26.3%) 당선 (1위) 3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7,671 (24.1%) 4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1,855 (24.2%) 5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8,376 (27%) 6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1,953 (29.8%) 7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7,947 (31.9%) 8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8,448 (28.4%) 9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9,123 (34.7%) 10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2,204 (24.8%) 11선[19]

8. 기타

파일:아베 가족.jpg
▲ 좌측 하단의 아이가 바로 아베 신조 前 총리다. 맨 위쪽의 안경 쓴 남자는 부친인 아베 신타로.
  • 상술했듯이 그의 장인은 기시 노부스케 前 총리고 그의 아들은 아베 신조 前 총리다. 그래서 본인도 외무대신, 내각관방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의 요직을 지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없지 않다.[20]
  • 아베 신타로가 태어난 지 80일 만에 부모님이 이혼했다. 그 후 신타로의 어머니 혼도 시즈코(本堂静子)는 재혼했는데, 훗날 신타로가 이 사실을 알고 도코에 간 후 어머니의 거처를 찾았지만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21]

    • 신타로가 시즈코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시즈코가 죽은 후였기 때문이다. 대신 신타로는 살아 있던 이부남동생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시즈코가 아버지 간과 이혼한 후 은행가인 니시무라 켄조(西村謙三)와 재혼하여, 신타로에게는 이부동생들 두 명이 있었다.
여동생은 일찍 죽었지만 남동생 니시무라 마사오(西村正雄)는 나중에 장성하여 신타로와 만났다고 하는데, 늘 천애고아 신세나 마찬가지라고 자조하던 신타로는 이 동생과 만난 것에 매우 감동하였다고 한다. 마사오는 은행가로서 형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으며, 후일 형이 사망하자 임종을 지켰다. 마사오는 조카인 아베 신조가 총리대신이 되기 1달 전인 2006년 8월에 사망하였다.* 아버지 아베 간과 생일(4월 29일)이 같다. 공교롭게도 아들과 사망 당시 나이가 같다.[22]* 부자관계라 당연하겠지만 아들인 아베 신조와 매우 닮았다.* 일본인 치고 키와 체격이 굉장히 크다. 차남인 아베 신조보다 더 크고, 삼남인 기시 노부오 보다는 살짝 더 큰 정도.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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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 종조부 사토 에이사쿠 · 조부 아베 간 · 아버지 아베 신타로 · 아내 아베 아키에 · 남동생 기시 노부오 · 친조카 기시 노부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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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사토·아베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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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color=#fff><colbgcolor=#D7003A> 1대 <rowcolor=#D7003A> 친가 외가
아베 간 기시 노부스케
동생 사토 에이사쿠
2대 <rowcolor=#D7003A> 장남
아베 신타로
3대 <rowcolor=#D7003A> 차남 (아베가) 삼남 (기시가)
아베 신조 기시 노부오 (입적)
아베 아키에 기시 치카코
4대 <rowcolor=#D7003A> 손자
기시 노부치요
※둘러보기 : 일본의 정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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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히도 차남 아베 신조도 향년 67세로 사망했다. 차이가 있다면 신타로는 67세 생일이 지난 지 한달도 안 되어 병사한 반면 신조는 68세 생일을 두어달 가량 앞두고 암살당했다. [2] 전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인 오시마 요시마사의 손녀. 한국에는 경복궁 점령 사태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3] 1928년 6월 14일~ 2024년 2월 4일. 향년 95세. [4] 미쓰비시 상사 패키지 사장. 거의 집안빨이나 인맥빨로 사장이 된 거나 마찬가지. 그의 아들(=아베의 조카)도 미쓰비시에 입사했다. [5] 어머니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서 성을 바꿨다. 야마구치현 제2구의 전직 중의원으로, 그의 아들인 기시 노부치요(= 아베 총리의 조카)는 후지테레비의 기자를 거쳐 현재는 야마구치현 2구의 중의원이다. [6] 이름은 똑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晋(しん)이 아니라 慎(しん)이다. [7] 타케코, 코마, 오토요, 치요코, 미사오, 토시코, 야스코. [8] 시모노세키시 나가토시를 관할하는 곳이며, 신조의 조부 아베 간의 선거구였다. 아베 신타로가 현역 국회의원인 시절에는 중선거구제를 택했고, 현 야마구치현 제4구가 당시에는 야마구치 1구였다. [9] 아베 간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도조 히데키 등 군부의 전횡에 반대하는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으며 그로 인해 대정익찬회 추천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헌병에 감시당하면서 정치활동을 했지만 그럼에도 지역에서 신망이 커 당선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일본 진보당 소속으로 총선 출마 준비 중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신타로 역시 그의 의지를 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손자인 아베 신조는 친할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노선을 이어받아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이 되었다. [10] 재학 중에 본토 제국대학들의 교명에서 '제국'이 전면 삭제되어 졸업은 '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했다. 대학 동기였던 미시마 유키오도 같은 케이스다. [11] 훗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 총리에게 이를 대화 주제로 쓰기도 했는데 아버지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던 신조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2] 물론 기시 노부스케의 후광 외에도 친부인 아베 간에 대한 지지도 있었다. [13] 기시는 관료 출신이었음에도 관료가 주류인 보수본류가 아닌 보수방류였다. 전후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한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일본의 재무장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14] 다만 외무대신 시절이었던 1984년 한국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 점은 일본 정부 각료로서 그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다. 아들인 신조의 당내 경쟁자인 이시바 시게루 자유민주당 내에서 친한파에 속하지만 독도 관련 논쟁에서는 아베 신타로의 견해와 비슷하다. [15] 미키 당시 총리는 2차 대전 당시 아베의 부친이 참여했던 반전, 반군부 활동을 도운 인연이 있었다. [16] 이 점은 본인의 소신뿐만 아니라 그가 정계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일본에서 '경제 발전에 집중하고 군사적 세력화는 지양한다'는 요시다 시게루 전 수상의 노선이 주류였던 점도 작용했다. 일본이 소위 '보통국가'라는 이름으로 군사대국화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90년대이며 실행은 2000년대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17] 아베 신타로 입장에서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학습하지 못했고 기자, 정치인이 되면서 바쁜 일상을 보냈기 때문에 자식에게 애정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신조에게 공부하라고 압박한 것이 그나마 남은 상호작용이라서 두 사람은 거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18]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납치된 도공 심당길(沈當吉)의 후손이다. [19] 1991.05.15. 임기 중 사망. [20] 만약 아베 신타로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총리까지 지냈다면, 후쿠다 다케오- 후쿠다 야스오 부자(父子)보다 앞선 일본 최초로 아버지-아들의 2대(代) 출신 총리로 기록될 수 있었다. [21] 반면 신타로의 아버지 간은 재혼하지 않고 여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 [22] 다만 아들의 사인은 총격으로 인한 암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