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 |||||||||||
초대 사와 노부요시 |
2대 이와쿠라 도모미 |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
5대 이노우에 가오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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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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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
6대 이토 히로부미 |
7대 오쿠마 시게노부 |
8대 아오키 슈조 |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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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
13대 니시 토쿠지로 |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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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아오키 슈조 |
16대 가토 다카아키 |
17대 소네 아라스케 |
18대 코무라 주타로 |
19대 가토 다카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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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사이온지 긴모치 |
21대 하야시 타다스 |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
23대 코무라 주타로 |
24대 우치다 고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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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가쓰라 다로 |
26대 가토 다카아키 |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
28대 가토 다카아키 |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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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이시이 키쿠지로 |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
32대 모토노 이치로 |
33대 고토 신페이 |
34대 우치다 고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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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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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
43대 사이토 마코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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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
45대 히로타 고키 |
46대 아리타 하치로 |
47대 하야시 센주로 |
48대 사토 나오타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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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
52대 아리타 하치로 |
53대 아베 노부유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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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
55대 아리타 하치로 |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
58대 도고 시게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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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
60대 타니 마사유키 |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
62대 스즈키 간타로 |
63대 도고 시게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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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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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
65대 요시다 시게루 |
66대 가타야마 데쓰 |
67·68대 아시다 히토시 |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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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
78대 이시바시 단잔 |
79·80대 기시 노부스케 |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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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89·90대 미키 다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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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
92·93대 아이치 기이치 |
94대 후쿠다 다케오 |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
97대 키무라 토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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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
99대 고사카 젠타로 |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
103대 오키타 사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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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
105대 소노다 스나오 |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107·108대 아베 신타로 |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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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대 우노 소스케 |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
112대 나카야마 타로 |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
115대 무토 카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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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
117대 가키자와 고지 |
118대 고노 요헤이 |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
121대 오부치 게이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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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
126대 다나카 마키코 |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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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
132·133대 아소 다로 |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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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
140대 에다노 유키오 |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
142대 겐바 고이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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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
145·146대 고노 다로 |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
150대 기시다 후미오 |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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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
153대 이와야 다케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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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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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12·113대 외무대신 아베 신타로 安倍晋太郎 | Abe Shintar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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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366><colcolor=#fff> 출생 | 1924년 4월 29일 | ||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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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1년 5월 15일 (향년 67세)[1] | ||
도쿄도 분쿄구 | |||
재임기간 | 제112·113대 외무대신 | ||
1982년 11월 27일 ~ 1986년 7월 2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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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366><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아베 간, 어머니 혼도 시즈코[2] | |
배우자 | 아베 요코[3] | ||
자녀 |
장남
아베 히로노부[4] 차남 아베 신조 삼남 기시 노부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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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
이부남동생 니시무라 마사오 이부여동생(요절) 백부 아베 신타로[6] 장인 기시 노부스케 처백부 사토 이치로 처숙부 사토 에이사쿠 처고모 7명[7] 며느리 아베 아키에 손자 아베 히로토, 기시 노부치요, 기시 토모히로 손녀 아베 마리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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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야마구치중학교 (졸업) 제6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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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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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 야마구치 1구[8] | ||
의원 선수 | 11 (중) | ||
의원 대수 | 28, 29, 31, 32, 33, 34, 35, 36, 37, 38, 39 | ||
약력 |
마이니치 신문 기자 기시 노부스케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28-29·31-39대 / 舊 야마구치현 제1구) 제46대 농림대신 제41대 내각관방장관 제29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42대 통상산업대신 제112-113대 외무대신 제29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24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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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아베 간의 아들이자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와 기시 노부오 방위대신의 부친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1980년대에 외무대신을 지냈다.2. 생애
1924년에 도쿄도 신주쿠구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아베 간(安倍寛)은 중일전쟁 시기부터 전후까지 중의원 의원을 지내며 반전 활동을 했던 정치인이었다.[9]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혼하였는데 당시 주변 상황을 보면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자전거 제조사를 운영하던 아버지 간이 신타로 출생 전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사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결국 신타로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과 이혼, 그리고 결국 간이 야마구치현으로 귀향하면서 아버지의 고향인 시모노세키시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집안은 대지주였으며 시모노세키 인근에 있는 간장 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야마구치 귀향 후 전쟁의 기운이 나라를 뒤덮던 1937년 '엄정 중립'을 기치로 중의원 의원 총선에 당선되었고 당시 국회에서 얼마 안되던 전쟁 반대파로서 열렬히 활동하였다.
신타로는 2차대전 중이던 1944년 제6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고 1948년에 졸업했다.[10]
전쟁 막바지에 가미카제 자살 특공 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훈련을 수료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여 화를 면했다. 당시 아버지 간은 어차피 일본 제국은 연합국에 패하니 적당히 하는 척 하고 빠져라는 조언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인도 일부러 늦게 들어가려고 했고 전쟁이 끝나고도 자칫하면 가미카제에 투입될 뻔한 경험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한국 등 주변 국가들에게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11]
대학 졸업 후 마이니치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는데 당시 상사가 전 민주당 대표 가이에다 반리의 아버지였다.[12] 야마구치현 출신의 정치인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동향 출신이자 지역 내 평이 좋은 아베 집안의 아들인 신타로를 사위로 점찍어 1951년 기시 요코와 결혼했다.
▲ 결혼 생활 초기. 부인 요코와 함께. 아베 신타로가 안고 있는 아이가 장남 아베 히로노부, 부인이 안고 있는 아이가 차남 아베 신조다.
1956년 기자를 그만두고 당시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장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무성 비서관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1년 후인 1957년부터는 총리가 된 기시를 따라가 총리실 비서관으로 계속 보좌했다. 역시 1년이 지난 1958년에는 처음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현직 총리였던 장인의 후광을 업고 무난히 당선되었다.[13]
다만 이 때문에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냐는 말이 많았는데 본인은 스스로는 아베 간의 아들이지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신타로는 조실부모하였고 친척도 형제도 없었기에 기시 가문에 들어가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 후견인인 장인과 대립할 수도 있는 그의 소신을 지켜나갔다.
비록 기시의 계파[14]에 속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보다는 사토 에이사쿠 등 보수 본류 내 온건파와 가까웠다. 아버지 간을 따라 평화주의자였으며 친한파 기조를 가졌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자 행세, 일본의 전쟁범죄 등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한국 등 피해국에게 사죄하자는 연설을 한 적도 있으며 재일 외국인 인권 증진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15]
하지만 아들 신조는 외할아버지 기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버지 신타로와 정치 성향이 반대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문단 참조.
이후 1967년 농림정무차관, 1974년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 농림대신[16], 1977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관방장관, 그리고 1977~81년 집권 자민당의 정조회장 등의 요직을 지냈다.
▲ 1980년대 외무대신 시절. UN 총회에서의 연설 모습
특히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취임 후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어 4년 동안 재직했다. 이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미국 정부와 동맹 관계 강화를 비롯한 1980년대 일본의 외교정책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다.
외무대신을 물러난 1986년에도 자민당의 총무회장을 역임하는 등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와 더불어 포스트 나카소네로서 뉴리더로 부각하였다. 나카소네가 총리로 3번 역임 후 퇴임하면서 뉴리더 3명은 총리를 노리게 되었는데 다케시타와의 비밀회담에서 다케시타가 최대파벌의 회장이었으니 자민당 총재가 되는 대신 간사장직을 약속받았다. 나카소네의 지지를 받은 다케시타가 자민당 총재에 취임하고 총리가 되면서 자민당의 2인자인 간사장에 올랐다.
이처럼 착실히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차기 총리까지 노릴 수 있는 유력 정치인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인 1988년 발생한 리크루트 사건에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들과 함께 연루된 것이 드러났다. 그로 인해 다케시타 내각은 붕괴했고, 본인도 자민당 간사장을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으로 '부패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정치 경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다케시타의 후임으로 리쿠르트 사건과 무관했던 뜻밖의 인물인 나카소네파의 2인자였던 우노 소스케가 총리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90년 8월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입원했는데 한 달 후 췌장암 선고를 받고 이듬해인 1991년 5월 15일 향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가 회장을 맡았던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미쓰즈카 히로시가 맡게된다.
그의 유해는 후지산과 가까운 '후지 레이엔'(冨士霊園)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곳에는 그의 장인인 기시 전 수상의 묘지도 위치하며, 31년 후 피살당한 차남 신조 역시 이곳에 안장되었다.
3. 정치 성향
친한파로 아들 아베 신조와는 상반되는 정치 성향을 나타냈다. 신조가 자유민주당 내 강경 우파인 반면 아베 간과 아베 신타로는 자유민주당 내 중도우파에 해당되었다.[17]신타로의 주요 후원자였던 한 재일교포 기업인은 "아베 신타로는 친척도, 양친도, 형제도 없이 혼자 최선을 다했던 터라 고향 없는 재일 한국인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닮아있었다"고 회상하였다.
신타로는 시모노세키 내 재일 한국인들과 한국계 일본인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고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 시모노세키 내 재일 한국인들과 한국계 일본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신타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4. 아들 아베 신조와의 관계
부자 관계인 신타로와 신조가 서로 상반된 정치 성향을 드러냈다는 것에 대해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이는 후술할 아베 집안의 내부 사정과 연관이 있다. 과거 신타로의 전담 기자였고 현재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신조의 여러 지인들과 인터뷰하여 신조의 생애를 다룬 인터뷰와 신조에 대해 기록한 노가미 다다오키의 증언에 따르면 신조와 신타로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신타로는 아들 신조가 외조부 기시,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 조부 아베 간, 그리고 아버지 본인과 마찬가지로 도쿄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여 신조에게 학업 압박을 많이 가했다고 한다.
아베 가문과 처가인 기시 가문 모두 일본 최고 학부인 도쿄대학 학벌은 깔고 가는 집안이었고 신타로 본인도 도쿄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들도 도쿄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학벌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따르면 신조가 고등학생일 때 신타로가 "우리 집에서 대학은 도쿄대학 밖에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신조의 머리를 향해 책을 집어 던진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신조는 애당초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아버지의 계속된 압박에 반항심을 품고 입시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평범한 수준의 대학으로 평가받는 세이케이대학에 진학하였다. 신조가 세이케이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학벌에 대해 민감한 모습을 보여서 결국 미국 유학을 언급했다.
그러나 어찌어찌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학업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는지 이탈리아산 알파 로메오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면서 동아리 여학생들과 어울리거나 마작을 즐기는 등 공부보다는 노는 데 열중하면서 아버지 신타로와 또다시 갈등을 빚었다.
사실 신타로의 어머니는 그가 아기였을 때 이혼해서 집을 나갔고 아버지인 간 역시 아들에게 큰 관심을 주지 못했으며 빨리 사망한 탓에 신타로는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던 걸로 보이며 자신도 도쿄와 지역구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정치인으로 바쁘게 지내느라 신조에게 차갑게 대하였다.
반대로 외할아버지 기시는 바쁜 사위를 대신해 신조를 키우고 보살펴 주었고 항상 외손자에게 애정을 많이 표현했으며 운동회, 현장체험학습 등에도 부모 대신 같이 동행했다. 그리고 신조는 아버지인 신타로보다 가정부, 외할아버지인 기시와 어머니인 요코와 더 가까웠다. # # #
즉 신타로가 신조를 차갑게 대했고 이에 대해 부자간 갈등이 존재하였고 반대로 외할아버지 기시가 신조와 같이 있으면서 그가 원했던 애정을 주었기 때문에 차가웠던 아버지에 대한 반동 심리로 자신에게 애정을 줬던 기시의 사상으로 기울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아베 신조는 깊이 있는 생각도 없이 외조부의 사상을 추종하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고 신조의 옛 상사인 야노 신지가 '젊은 시절의 그는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는 평을 내린 걸 보면 그의 인생 초기[18]의 정치적 신념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과 외할아버지 기시에 대한 애정에 기초한 감정적인 것에 가까워 보인다. # #
그래서 과거에는 그의 정치적 신념이 공부와 경험,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에 기반하여 좋은 감정이 없고 추억도 없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상을 외면하고 자신을 사랑해준 외할아버지를 따라한 것의 결과물이라 다분히 감정적이고 깊이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대학에서도 교수에게 '보수주의를 따르는 건 좋지만 공부를 하라'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신타로는 공인으로서는 훌륭했지만 부모로서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아들 신조의 사상적 편향에는 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19]
반대로 기시 노부스케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공인으로서는 좋게 보기 어렵지만 외손자에겐 좋은 할아버지였는데 신조는 사실상 자신이 원하는 애정을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에 따라 롤모델을 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
이 문단은
<조건>
* 토론 관리 방침의 근거 신뢰성 순위 7순위 이상의 근거자료 위주로 서술하고, 그 외 한국계 도래인 설에 대한 주관적 의견은 최소화하여 서술한다.
*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계 도래인인지 아닌지를 직접 발언한 내용이 없음을 서술한다.
* 사토, 아베 가문이 도래인 후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일본 내 역사학적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을 서술한다.
* 토론 관리 방침의 근거 신뢰성 순위 7순위 이상의 근거자료 위주로 서술하고, 그 외 한국계 도래인 설에 대한 주관적 의견은 최소화하여 서술한다.
*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계 도래인인지 아닌지를 직접 발언한 내용이 없음을 서술한다.
* 사토, 아베 가문이 도래인 후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일본 내 역사학적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을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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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주간 아사히는 10월6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아베 신조 연구-가정부가 본 아베.기시 3대'라는 제목으로 아베 총리 가문의 내력을 특집 보도하였고 한국 언론에서도 이를 인용해 보도하였다.
기시와 아베 가문에서 가정부로 40여년을 지냈던 구보 우메(80)는 슈칸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부친 아베 전 외상이 고백한 집안 내력을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구보는 "파파(아베 전 외상)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내게는 말해줬다"면서 "(아베 전 외상 사망 직후) 입관될 때 이 사람의 골격을 보면서 정말 일본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로 잰 듯이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완전히 한국(인)의 체형이다. (아베 전 외상) 스스로도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조선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정치인으로서 주변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따라서 좀더 건강하게 활동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북한 문제도 해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베 전 외상의 죽음은 나라의 손해였다"면서 애석해했다.
이 잡지는 아베 전 외상은 생전에 아베가(家)의 기원은 10세기쯤까지 한반도 북쪽에서 중국대륙에 걸쳐 존재했던 발해국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에서의 아베가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고 보도했다.
아베가의 기원에 대해 구보는 "아베가의 본류는 아오모리현이다. 아베 전 외상이 조선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는 지금의 북한이 아니라 그 북쪽과 길림성 아래쪽에 있었던 발해"라면서 "11세기 헤이안(平安) 시대의 무장이었던 아베가 지금 아베가의 선조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도 아베 총리를 끔찍히 아꼈다고 그는 덧붙였다. 구보는 아베 총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쿄의 기시 전 총리의 자택에서 가정부로 지냈으며, 지금은 따로 나와 도쿄에서 살고 있다. 아베 일본 총리 부친, "나는 조선인이다'' - 14대 심수관[20]은 아베 신타로의 장인인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둘다 기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감)가 자신에게 본인의 집안이 1600년대 이후에 건너온 조선인 출신이라고 말해줬다.고 주장했다. #
- 이와 관련해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가 생전에 공개 석상에서 자신이 한국계 도래인 후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 발언한 적은 없다.
- 2006년 주간 아사히가 구보 우메의 증언에 대해서 보도한 이후 아베 신조가 공식 기자회견 등 공개 석상에서 주간 아사히의 보도 내용에 대해서 긍정을 하거나 부정을 한 적은 없다. 다만 아베 신조가 주간 아사히의 보도 내용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 현존하는 일본 내 사료(史料) 중에서 사토 가문과 아베 가문의 시조가 도래인이라고 기록된 사료가 발견된 적은 없다.
6.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아베 신조/가족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야마구치 1구 |
|
70,814 (18.6%) | 당선 (2위) | 초선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8,218 (18.8%) | 당선 (4위) | 재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8,021 (16.0%) | 낙선 (5위)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8,771 (26.3%) | 당선 (1위) | 3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7,671 (24.1%) | 4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855 (24.2%) | 5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8,376 (27%) | 6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1,953 (29.8%) | 7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7,947 (31.9%) | 8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8,448 (28.4%) | 9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9,123 (34.7%) | 10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2,204 (24.8%) | 11선[21] |
8. 기타
▲ 좌측 하단의 아이가 바로 아베 신조 前 총리다. 맨 위쪽의 안경 쓴 남자는 부친인 아베 신타로.
- 상술했듯이 그의 장인은 기시 노부스케 前 총리고 그의 아들은 아베 신조 前 총리다. 그래서 본인도 외무대신, 내각관방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의 요직을 지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없지 않다.[22]
- 아베 신타로가 태어난 지 80일 만에 부모님이 이혼했다. 그 후 신타로의 어머니 혼도 시즈코(本堂静子)는 재혼했는데, 훗날 신타로가 이 사실을 알고 도코에 간 후 어머니의 거처를 찾았지만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23]
신타로가 시즈코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시즈코가 죽은 후였기 때문이다. 대신 신타로는 살아 있던 이부남동생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시즈코가 아버지 간과 이혼한 후 은행가인 니시무라 켄조(西村謙三)와 재혼하여, 신타로에게는 이부동생들 두 명이 있었다.
여동생은 일찍 죽었지만 남동생 니시무라 마사오(西村正雄)는 나중에 장성하여 신타로와 만났다고 하는데, 늘 천애고아 신세나 마찬가지라고 자조하던 신타로는 이 동생과 만난 것에 매우 감동하였다고 한다. 마사오는 은행가로서 형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으며, 후일 형이 사망하자 임종을 지켰다. 마사오는 조카인 아베 신조가 총리대신이 되기 1달 전인 2006년 8월에 사망하였다.* 아버지 아베 간과 생일(4월 29일)이 같다. 공교롭게도 아들과 사망 당시 나이가 같다.[24]* 부자관계라 당연하겠지만 아들인 아베 신조와 매우 닮았다.* 일본인 치고 키와 체격이 굉장히 크다. 차남인 아베 신조보다 더 크고, 삼남인 기시 노부오 보다는 살짝 더 큰 정도.*
헤이킨 커플 시호의 외갓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시호가 1998년생인 것을 감안하면 시호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이러한 인사가 방문했을 정도면 시호도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25]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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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간 |
형
기시 노부스케 동생 사토 에이사쿠 |
||
2대 | <rowcolor=#D7003A> 장남 (아베가) | 차남 (사토가) | |
아베 신타로 | 사토 신지 | ||
3대 | <rowcolor=#D7003A> 차남 (아베가) | 삼남 (기시가) | |
아베 신조 | 기시 노부오 (입적) | ||
처 아베 아키에 | 처 기시 치카코 | ||
4대 | <rowcolor=#D7003A> | 손자 | |
기시 노부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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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히도 차남
아베 신조도 향년 67세로 사망했다. 차이가 있다면 신타로는 67세 생일이 지난 지 한달도 안 되어 병사한 반면 신조는 68세 생일을 두어달 가량 앞두고
암살당했다. 바꿔 말하면 자연사가 아닌 암살로 사망한 신조보다도 더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2]
전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인
오시마 요시마사의 손녀. 한국에는
경복궁 점령 사태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3]
1928년
6월 14일~
2024년
2월 4일. 향년 95세.
[4]
미쓰비시 상사 패키지 사장. 거의 집안빨이나 인맥빨로 사장이 된 거나 마찬가지. 그의 아들(=아베의 조카)도 미쓰비시에 입사했다.
[5]
어머니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서 성을 바꿨다.
야마구치현 제2구의 전직 중의원으로, 그의 아들인
기시 노부치요(=
아베 총리의 조카)는
후지테레비의 기자를 거쳐 현재는 야마구치현 2구의 중의원이다.
[6]
이름은 똑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晋(しん)이 아니라 慎(しん)이다.
[7]
타케코, 코마, 오토요, 치요코, 미사오, 토시코, 야스코.
[8]
현
시모노세키시와
나가토시를 관할하는 곳이며,
신조의 조부
아베 간의 선거구였다. 아베 신타로가 현역 국회의원인 시절에는
중선거구제를 택했고, 현
야마구치현 제4구가 당시에는 야마구치 1구였다.
[9]
아베 간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도조 히데키 등 군부의 전횡에 반대하는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으며 그로 인해 대정익찬회 추천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헌병에 감시당하면서 정치활동을 했지만 그럼에도
지역에서 신망이 커 당선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일본 진보당 소속으로 총선 출마 준비 중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신타로 역시 그의 의지를 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손자인
아베 신조는 친할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노선을 이어받아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이 되었다.
[10]
재학 중에 본토
제국대학들의 교명에서 '제국'이 전면 삭제되어 졸업은 '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했다. 대학 동기였던
미시마 유키오도 같은 케이스다.
[11]
훗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 총리에게 이를 대화 주제로 쓰기도 했는데 아버지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던 신조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2]
두 사람의 아들들인
아베 신조와
가이에다 반리는
2014년 중원선에서 여야 당대표로 격돌했으며, 결과는 아베의 압승 및 가이에다의 완전 낙선. 제1야당 대표가 비례부활도 못 받고
나가타초 밖으로 쫓겨난 일은 이 때가 유일하다.
[13]
물론 기시 노부스케의 후광 외에도 친부인 아베 간에 대한 지지도 있었다.
[14]
기시는 관료 출신이었음에도 관료가 주류인
보수본류가 아닌
보수방류였다. 전후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한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일본의 재무장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15]
다만
외무대신 시절이었던
1984년에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 점은
일본 정부의
각료로서 그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다. 아들인 신조의 당내 경쟁자인
이시바 시게루도
자유민주당 내에서
친한파에 속하지만 독도 관련 논쟁에서는 아베 신타로의 견해와 비슷하다.
[16]
미키 당시 총리는 2차 대전 당시 아베의 부친이 참여했던 반전, 반군부 활동을 도운 인연이 있었다.
[17]
이 점은 본인의 소신뿐만 아니라 그가 정계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일본에서 '경제 발전에 집중하고 군사적 세력화는 지양한다'는
요시다 시게루 전 수상의 노선이 주류였던 점도 작용했다.
일본이 소위 '보통국가'라는 이름으로 군사대국화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90년대이며 실행은 2000년대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18]
사실 생애 말년인 총리 2~4기 때의 행보만 봐도 성향 자체는 그때랑 거의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총리 1기 때의 모습이 본심을 숨긴 모습에 가깝다.
[19]
아베 신타로 입장에서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학습하지 못했고 기자, 정치인이 되면서 바쁜 일상을 보냈기 때문에 자식에게 애정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신조에게 공부하라고 압박한 것이 그나마 남은 상호작용이라서 두 사람은 거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20]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납치된 도공 심당길(沈當吉)의 후손이다.
[21]
1991.05.15. 임기 중 사망.
[22]
만약 아베 신타로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총리까지 지냈다면,
후쿠다 다케오-
후쿠다 야스오 부자(父子)보다 앞선 일본 최초로 아버지-아들의 2대(代) 출신 총리로 기록될 수 있었다.
[23]
반면 신타로의 아버지 간은 재혼하지 않고 여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
[24]
다만 아들의 사인은 총격으로 인한 암살이다.
[25]
그녀의 남편인 준석의 아버지도
치과의사이며 여동생도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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