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2:15:11

니시오카 다케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초대 참의원 제2대 참의원 제3대 참의원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마쓰다이라 스네오 사토 나오타케 가와이 야하치
제4대 참의원 제5대 참의원 제6대 참의원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마쓰노 쓰루헤이 시게무네 유조
제7대 참의원 제8대 참의원 제9대 참의원 제10대 참의원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시게무네 유조 고노 겐조
제11대 참의원 제12대 참의원 제13대 참의원 제14대 참의원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야스이 겐 도쿠나가 마사토시 기무라 무쓰오 후지타 마사아키
제14대 참의원 제15대 참의원 제16대 참의원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쓰치야 요시히코 오사다 유지 하라 분베에
제17대 참의원 제18대 참의원 제19대 참의원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사이토 주로 이노우에 유타카
제19대 참의원 제20대 참의원 제21대 참의원 제22대 참의원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구라다 히로유키 오기 치카게 에다 사쓰키 니시오카 다케오
제22대 참의원 제23대 참의원 제24대 참의원 제25대 참의원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히라타 겐지 야마자키 마사아키 다테 추이치 산토 아키코
제26대 참의원
제33대
오쓰지 히데히사
← 귀족원 의장
}}}}}}}}}}}}}}} ||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문부경 (1869~1885)
초대·7대
오키 다카토
2대
기도 다카요시
-
타나카 후지마로
3대
사이고 주도
4대
테라지마 무네노리
5대
고노 도가마
6대
후쿠오카 다카치카
초대·7대
오키 타카토
전전 문부대신 (1885~1947)
초대
모리 아리노리
임시대리
오야마 이와오
2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3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4대
오키 타카토
5대
고노 토가마
6대
이노우에 가오루
임시대리
요시카와 아키마사
7·10대·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
8대
하치스카 모치아키
9대
하마오 아라타
7·10대·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
11대
토야마 마사카즈
12대
오자키 유키오
13·31대
이누카이 쓰요시
14대
카바야마 스케노리
15대
마츠다 마사히사
16대
키쿠치 다이로쿠
17대
고다마 겐타로
18대
쿠보타 유즈루
19대
가쓰라 다로
7·10대·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
20대·임시대리
마키노 노부아키
21대
코마츠바라 에이타로
22대
하세바 스미타카
20대·임시대리
마키노 노부아키
23대
시바타 카몬
24대
오쿠다 요시토
25대
오오카 이쿠조
26대
이치키 키토쿠로
27대
타카다 사나에
28·34대
오카다 료헤이
29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30대
카마타 에이키치
13·31대
이누카이 쓰요시
32대
오카노 케이지로
33대
에기 카즈유키
28·34대
오카다 료헤이
35대
미츠치 추조
36대
미즈노 렌타로
37대
쇼다 카즈에
38대
코바시 이치타
39대
타나카 류조
40대
하토야마 이치로
41대
사이토 마코토
42대
마츠다 겐지
43대
카와사키 타쿠키치
44대
우시오 후사노스케
45대
히라오 하치사부로
46대
하야시 센주로
47대
야스이 에이지
48대
기도 고이치
49대
아라키 사다오
50대
카와라다 카키치
51대
마츠우라 시게지로
52대
하시다 쿠니히코
52대
하시다 쿠니히코
53대
도조 히데키
54대
오카베 나가카게
55대
니노미야 하루시게
56대
코다마 히데오
57대
오타 코조
58대
마츠무라 켄조
59대
마에다 타몬
60대
아베 요시시게
61대
타나카 코타로
전후 문부대신 (1947~2001)
62대
타카하시 세이이치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3-64대
모리토 타츠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65대
시모조 야스마로
66대
타카세 소타로
67대
아마노 테이유
68-69대
오카노 키요히데
70대
오다치 시게오
71대
안도 마사즈미
72대
마츠무라 켄조
73대
키요세 이치로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74-75대
나다오 히로키치
74-75대
나다오 히로키치
76대
마츠나가 도
77대
나다오 히로키치
78대
하시모토 료고
79대
마츠다 타케치요
80-81대
아라키 마스오
82-83대
나다오 히로키치
84-85대
아이치 기이치
86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87대
아리타 기이치
88-89대
겐노키 도시히로
90대
나다오 히로키치
91-92대
사카타 미치타
93대
타카미 사부로
94대
이나바 오사무
95대
오쿠노 세이스케
96대
미하라 아사오
97대
나가이 미치오
98대
가이후 도시키
99대
스나다 시게타미
100대
나이토 타카사부로
임시대리
오히라 마사요시
101대
다니가키 센이치
102대
다나카 타츠오
103대
오가와 헤이지
104대
세토야마 미츠오
105대
모리 요시로
106대
마츠나가 히카루
107대
가이후 도시키
108대
후지오 마사유키
109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110대
나카지마 겐타로
111-112대
니시오카 다케오
111-112대
니시오카 다케오
113대
이시바시 카즈야
114대
호리 고스케
115대
이노우에 유타카
116대
하토야마 구니오
117대
모리야마 마유미
118-119대
아카마츠 료코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118-119대
아카마츠 료코
120대
요사노 가오루
121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122대
오쿠다 미키오
123대
코스기 타카시
12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25대
아리마 아키토
126·127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128대
오시마 다다모리
129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과학기술청장관(1956년~2001년)
초대
쇼리키 마츠타로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2·3대
우다 고이치
4대
쇼리키 마츠타로
5대
미키 다케오
임시대리·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8대
아라키 마스오
9대
이케다 마사노스케
10대
미키 다케오
11대
곤도 츠루요
12·13대
사토 에이사쿠
임시대리
이케다 하야토
14·15대
아이치 기이치
16대
우에하라 쇼키치
17대
아리타 기이치
18·19대
니카이도 스스무
20대
나메지마 나오키
21대
기우치 시로
22대
니시다 신이치
23대
히라이즈미 와타루
21·24대
기우치 시로
25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6대
마에다 카즈오
27대
모리야마 킨지
28대
아다치 도쿠로
29대
사사키 요시타케
30대
마에다 마사오
31대
우노 소스케
32대
쿠마가이 타이사부로
33대
가네코 이와조
34대
오사다 유지
35대
나카가와 이치로
36대
야스다 타카아키
37대
이즈루키 미치유키
38대
타케우치 레이치
39대
고노 요헤이
40대
미쓰바야시 야타로
41대
이토 소이치로
42대
미야자키 기이치
43대
나카무라 기시로
44대
사이토 에이사부로
45대
오시마 토모지
46대
산토 아키코
47대
타니가와 칸조
48대
나카지마 마모루
임시대리
미야자와 기이치
49대
와타나베 쇼이치
50대
에다 사쓰키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1대
오미 미키오
52대
다나카 마키코
53대
우라노 야스오키
54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55대
지카오카 리이치로
56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7대
타케야마 유타카
58대
아리마 아키토
59·60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61대
오시마 다다모리
62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문부과학대신 (2001년~)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2대
도야마 아쓰코
3·4대
가와무라 다케오
5·6대
나카야마 나리아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7대
고사카 겐지
8대
이부키 분메이
9대
도카이 기사부로
10대
스즈키 무네오
11대
시오노야 류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2·13대
가와바타 다쓰오
14대
다카키 요시아키
15대
나카가와 마사하루
16대
히라노 히로후미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7대
다나카 마키코
18·19대
시모무라 하쿠분
20대
하세 히로시
21대
마쓰노 히로카즈
22·23대
하야시 요시마사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4대
시바야마 마사히코
25·26대
하기우다 고이치
27·28대
스에마쓰 신스케
29대
나가오카 게이코
{{{#!wiki style="margin: -16px -11px" }}}
30대
모리야마 마사히토
31대
아베 토시코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이시이 미쓰지로
2대
스나다 시게마사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고노 이치로
5대
마스타니 슈지
6대
이시이 미쓰지로
7대
호리 시게루
8대
아카기 무네노리
9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2대
후쿠나가 켄지
13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14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7대
스즈키 젠코
18대
나다오 히로키치
19대
마쓰노 라이조
20대
에사키 마스미
2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2대
쿠라이시 타다오
23대
스즈키 젠코
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타츠오
26대
호소다 키치조
27대
가네마루 신
28대
미야자와 기이치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이토 마사요시
31대
미즈노 키요시
32대
카라사와 슌지로
33대
니시오카 다케오
34대
사토 고코
35대
키베 요시아키
36대
무토 카분
37대
시오카와 마사쥬로
38대
모리 요시로
39대
후카야 다카시
40대
이케다 유키히코
41대
오자토 사다토시
42대
무라오카 카네조
43대
호리우치 미쓰오
44대
규마 후미오
45대
니와 유야
46대
니카이 도시히로
47대
사사가와 다카시
48대
타노세 료타로
49대
고이케 유리코
50대
시오노야 류
51대
호소다 히로유키
52대
노다 세이코
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호소다 히로유키
55대
다케시타 와타루
56대
가토 가쓰노부
57대
스즈키 슌이치
58대
사토 쓰토무
59대
후쿠다 다쓰오
60대
엔도 도시아키
61대
모리야마 히로시
62대
스즈키 슌이치
}}}}}}}}}

파일:신진당 로고 반전.png 신진당 간사장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오자와 이치로
제2대
요네자와 타카시
제3대
니시오카 다케오
}}}}}}}}}}}}


<colbgcolor=#112fa7>
일본국 제28대 참의원 의장
니시오카 다케오
西岡武夫 | Nishioka Takeo
파일:Nishioka Takeo.jpg
<colcolor=#c3c965>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 1936년 2월 12일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사망 2011년 11월 5일 (향년 75세)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학력 와세다대학 교육학부 (사회학 / 학사)
가족 아버지 니시오카 다케지로
어머니 니시오카 하루
장녀 니시오카 히데코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1]
의원 선수 11 (중), 2 (참)
의원 대수 30, 31 , 32 , 33 , 34 ,35 , 36, 38, 39, 40, 41 (중), 19-20, 21-22 (참)
지역구 구 나가사키 1구 → 나가사키현 제1구 (중)
비례대표 (참)
약력 나가사키 신문 편집 위원
신자유클럽 간사장
중의원 의원 (제30-41대)
문부 정무 차관
제111-112대 문부 대신 ( 다케시타 개조내각, 우노 내각)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신진당 간사장
자유당 부당수
참의원 의원 운영 위원장
제28대 참의원 의장

1. 개요2. 생애3. 소속 정당4. 선거 이력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2. 생애

1936년 2월 12일 일본 제국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서 나가사키 민우신문(1959년 나가사키 신문으로 합병)을 창간한 언론인이자 나가사키현지사와 중의원 의원을 지낸 니시오카 타케지로(西岡竹次郎, 1890-1958)와 여성참정권 운동을 했던 시민운동가 니시오카 하루(西岡ハル, 1905-198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니시오카 하루는 남편이 종전 이후 공직추방을 당하자 대신해 신문사를 경영했고, 이후 남편이 정계에 복귀해 1951년 나가사키현지사에 당선되자 남편 대신 중앙정치에 진출, 1953년 제3대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니시오카는 어릴적부터 정치가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을 장래희망으로 삼았다. 본래 그는 카이세이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으나 선거시 자신을 도와줄 인맥을 쌓기 위해 고향인 나가사키시로 돌아와 나가사키현립 나가사키히가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이후에는 와세다대학 교육학과 사회학부에 입학했다.

1963년 부모가 다져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2] 구 나가사키 1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3] 당시 같은 20대의 나이로 당선된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와 함께 "20대 트리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후 미키 다케오 번촌정책연구소에 가입해 자민당 청년국장, 문교부 회장직을 맡았다.

1976년 록히드 사건을 계기로 고노 요헤이, 야마구치 도시오, 타가와 세이이치 등 자민당 내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보수 정치 쇄신"이란 모토를 내걸고 신자유클럽을 창당한다. 니시오카는 신자유클럽에서 초대 간사장을 맡았고, 동당은 그해 연말 치러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에 불만을 품고있던 중도보수 지지층을 끌어모아 17석의 당선인을 배출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자유클럽의 정책을 놓고 고노와 타가와 등의 인사는 혁신 야당으로서의 선명성을 중요시했으나, 니시오카와 야마구치는 보수야당으로서의 최소한의 정통성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고노를 비롯한 당 내 지도부와 마찰을 빛었고, 1979년 7월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에 신자유클럽을 탈당했다.[4] 이후 1979년 10월 치러진 제35회 중원선과 1980년 7월 치러진 제36회 중원선에서 무소속으로 연거푸 당선된 이후 1980년 12월에 자민당에 복당했지만,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복귀 후엔 미야자와 기이치 굉지회에 소속되어 문교족 의원으로 경력을 쌓았다.[5] 1988년 12월 27일 다케시타 노보루 개조내각 발족당시 문부대신으로 첫 입각에 성공했다. 탈당에다 복당 후 한차례의 낙선을 겪으며 입각이 늦어졌는데, 국회의원으로 첫 임기를 시작한지 무려 25년만에 처음으로 입각한다.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해 다케시타 개조내각이 5개월만에 총사퇴했고, 새로 출범한 우노 소스케 내각에서도 문부대신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우노 내각도 우노 총리의 스캔들에 이어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총사퇴했다. 결국 두 내각에서 내내 문부대신직을 유지했으나 합쳐서 7개월밖에 대신직을 수행하지 못했다. 재직 중 추진하였던 입시 개혁도 중단해야했다. #

대신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자민당 세제조사회장과 총무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면서 다시 당내에서 정치 쇄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 12월 굉지회가 리쿠르트 사건 당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근신중인 가토 고이치의 복귀를 타진하며 당시 총무회장인 니시오카에게 당직에서 물러날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니시오카는 이에 반발해 해당 요청을 거부했고, 그는 자민당 집행부에 의해 총무회장에서 해임된 직후 굉지회에서도 제명 처분을 받았다.

한편 당시 총재였던 미야자와가 가이후 도시키를 회장으로 하는 정치개혁추진협의회를 설치해 당 내 개혁을 도모했으나 소극적인 태도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고,[6] 당내 갈등 속에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단독 과반수 미달이란 결과를 얻으며 55년 체제가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니시오카는 복당 13년만에 정치개혁을 내세워 또다시 자민당을 탈당하나 싶었지만, 일단 1993년 6월에 자민당 의원들이 탈당해 신생당이나 신당 사키가케를 창당하는 데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굉지회에서 제명되었지만 무파벌 신분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다. 당선 이후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당 집행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당 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간사장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결속 모임을 만들자 옥상가게를 세웠다고 비판했다. 결국 6개월만인 1993년 12월 본인도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거쳐 1994년 12월 보수 야당인 신진당이 창당될때 그곳에 합류했다.

니시오카는 신진당에서 국회대책위원장과 간사장직을 맡으며 당 대표인 오자와 이치로를 보좌했고 오자와와 가까워지며 실세로 활약했으나,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본인은 나가사키 1구에서 승리하나 신진당이 참패했다.신진당의 선거 패배로 당내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고, 1997년 12월 신진당은 해산되고 만다.

1998년 1월 오자와 이치로와 가토 무쓰키, 노다 다케시 등의 인사가 자유당을 창당하자 부당수 자리에 취임했다. 같은해 2월 다카다 이사무 나가사키현지사가 3선 도전을 포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야당의 추천( 자유당, 신당평화, 스포츠평화당)을 받아 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다만 정계 입문 후 35년간 중앙에서만 정치를 했는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현지사를 출마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민당과 신당 사키가케의 추천을 받은 가네코 겐지로에게 밀려 낙선했다. 지사선거 낙선 직후 지역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중의원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본인이 사퇴해서 치러지는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하는게 모양세가 나빠보였는지 노다 다케시 간사장이 반대하는 바람에 출마를 포기했다.

2000년 4월, 자유당은 자민당과의 연정 유지를 놓고 분열하고, 결국 연정 유지를 주장한 세력은 자유당을 탈당해 보수당을 창당한다. 니시오카는 보수적 성향이지만, 두번째로 자민당을 탈당하고 또다시 자민당에 기웃거리는것은 모양세가 나빠보이고, 또한 본인의 보궐선거 출마를 막은 노다 간사장과 사이가 나빠서인지 자유당에 잔류한다. 2000년 5월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본 지역구인 나가사키현 제1구에 출마했지만, 민주당 타카키 요시아키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01년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에 입후보한 후 당선, 자유당 참의원 의원회장직을 맡았다. 2003년 자유당과 민주당과의 합당(민유합병)에서는 보수주의라는 소신을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합당에 불참의사를 나타냈으나, 오자와 등의 인사들의 설득으로 합당에 참가하였다. 민주당에서는 와타나베 고조와 함께 보수파 중진의원으로 활동했고, 2007년 참의원 운영위원장에 취임하였다. 2007년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재선에 성공했다.

2010년 7월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후 에다 사쓰키의 뒤를 잇는 참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참의원 의장 재직 시절에는 간 나오토 총리의 국정운영을 비판했다.[7] 그는 참의원 의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거나 민주당 당대표 선거시 오자와 이치로를 견제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2011년 9월 30일 니시오카는 임시국회 본회의 진행 과정에서 숨이 가빠지거나 비틀거리면서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의장석에 앉는 모습을 보이는 등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모습을 보였다. # 또한 같은해 10월 30일에는 입안 대상포진으로 발성에 문제가 있어 본회의에 불참했다. 민주당의 고시이시 아즈마 간사장은 니시오카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발언했고 니시오카 자신도 산케이신문에 지금이야말로 필요한 것은 총리대신의 각오라는 칼럼을 기고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해 11월 자택에서 쓰러져 도쿄 미나토구 토라노몬 병원[8]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 11월 5일 오전 2시 24분 폐렴으로 인해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종2위와 동화대수장이 수여되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3 정계 입문


1963 - 1976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76 - 1979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9 - 198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0 - 1994 복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4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자유개혁연합|
자유개혁연합
]]
1994 창당

1994 - 1997 신설합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7 - 1998 정당해산

1998 - 2003 창당

2003 - 2010 합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0 - 2011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사망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나가사키 1구

[[무소속(정치)|
무소속
]]
50,673 (13.5%) 당선 (4위) 초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4,429 (16.6%) 당선 (1위) 재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4,569 (13.1%) 당선 (3위) 3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7,594 (18.0%) 4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8,242 (20.3%) 당선 (1위) 5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무소속(정치)|
무소속
]]
75,063 (15.9%) 당선 (3위) 6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9,383 (16.7%) 7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6,799 (11.5%) 낙선 (6위)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2,412 (23.7%) 당선 (1위) 8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4,362 (18.3%) 당선 (2위) 9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5,750 (18.1%) 당선 (1위) 10선[9]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나가사키현 제1구
84,464 (41.07%) 당선 (1위) 11선[10]
1998 1998년 나가사키현지사 선거 나가사키현

[[무소속(정치)|
무소속
]]
295,376 (36.7%) 낙선 (2위)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나가사키현 제1구
63,248 (27.85%) 낙선 (3위)
2001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비례대표 8,187,804 (7.72%) 당선 (9위) 초선
2007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23,256,247 (39.48%) 당선 (31위) 재선[11]

5. 여담

  • 카이세이중학교 재학 시절 동급생인 가수 겸 배우 미와 아키히로와 친분이 있었고, 니시오카의 생애 말년 까지 두사람의 인연은 깊었다.[12] 미와는 니시오카의 터프한 성격과 행동, 그리고 그의 순수함이 매력이었다고 회고했다.
  • 예의범절과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 몸가짐에 엄격해 " 일본 국회의사당의 본회의장은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매우 신성한 장소"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는데, 참의원 운영위원장을 맡던 2007년 8월 "교복을 입고 국회 견학을 오는 아이들도 있는데 의원들의 복장이 너무 가벼워서야 되겠는가"라며 "다음 국회에선 쿨 비즈[13] 합의를 폐기하고 본회의장과 위원회실에서 의안 심의를 할 때는 넥타이 착용을 의무화하자"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회에선 2004년부터 3년째 시행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참의원은 1951년 8월에 넥타이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합의가 있었기에 여당뿐 아니라 다른 야당과 민주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니시오카는 자신의 제안을 철회했다.[14][15]
  • 전술한 바와 같이, 한여름에도 슈트와 넥타이를 풀로 착용하고 국회의원 업무에 임했다.

[1]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본 당적은
[2] 자민당의 추가공인을 받았다. [3] 당시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4] 신자유클럽을 탈당한 니시오카와는 달리, 야마구치는 1986년 당의 해산 전까지 당에 남아있다 자민당에 복당했고,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과 신진당 등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으나 1995년 정치 자금 횡령 혐의로 구속된후 1996년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떠났다. [5] 일본 국회 문화, 교육 상임위에서 경력을 쌓은 의원들을 문교족이라고 부른다. 훗날 몇몇 자민당 문교족 의원들은 역사 교과서 문제, 학교 행사에서의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주도한다. [6] 회장인 가이후 역시 총리 시절 적극적인 정치개혁 정책을 세웠다가 당 중진들의 반발로 내각 총 사퇴라는 결과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 [7] 2011년 국토교통대신 마부치 스미오와 내각관방장관 센고쿠 요시토의 불신임의안이 부결되자 "책임은 관방장관이 더 크다" 라며 간 내각의 인사를 비판했다. [8] 일본 정제계 인사들이 자주 치료차 들렀던 병원으로, 오히라 마사요시 전 총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9]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10] 1998.2.7 의원직 사퇴 (나가사키현지사 선거 출마) [11] 2010.7.30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2011.11.5 임기 중 사망
[12] 참고로 니시오카와 미와는 나가사키시 출신으로 같은 동향 사람이기도 했다. [13] 무더운 여름에 정장 대신 반팔 착용을 권장시 하는 정책이다. 영미권에서는 쿨 워크(Cool Work)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14] 한편 니시오카의 반 쿨 비즈 정책이 해당 정책을 도입시킨 현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에 대한 보복 심리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다.(두사람은 신진당-자유당 시절부터 함께 정치를 하다 자유당-보수당 분당 시점에서 가치관 문제로 서로 갈라섰다) [15] 그러나 니시오카는 평소에도 감색 블레이저와 회색 바지를 입고 오는 의원들을 비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쿨 비즈에 대한 비판은 본인의 소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