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당과의 합당 이후의 내용에 대한 내용은 민진당(일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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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민주당(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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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민주당(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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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일본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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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일본의 자유주의 정당 | ||||
구 민주당 | → | 민주당 | → | 민진당 |
민정당 | ||||
민주개혁연합 | ||||
신당우애 | → |
국민 생활이 제일 ( 오자와 그룹) |
||
자유당 (흡수 합당) |
※ 아래 정보는 당명 변경 당시를 기준으로 함 | ||
민주당 [ruby(民主党, ruby=みんしゅと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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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da2128> 영문 명칭 | Democratic Party of Japan: DPJ | |
약칭 | 民主(민주), DPJ | |
한글 명칭 | 민주당 | |
창당일 | 1998년 4월 27일[1] | |
당명 변경 | 2016년 3월 27일 ( 민진당) | |
2018년 5월 7일 ( 국민민주당) | ||
해산일 | 2020년 9월 11일 ( 입헌민주당으로 신설합당) | |
통합한 정당 |
구 민주당 민정당 민주개혁연합 신당우애(1998년 4월 27일 합당) |
|
자유당 (2003년 9월 26일 합당) | ||
이념 |
자유주의 (
일본) 사회자유주의 빅 텐트 내부 계파 : |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 내부 스펙트럼 : |
|
당 색 | 빨강 (#DA2128) | |
주소 |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초 1초메 11-1 (東京都千代田区永田町 一丁目 11-1) |
|
대표 | 오카다 가쓰야 / 9선 ( 중, 39~47대) | |
대표대행 |
나가츠마 아키라 / 6선 (
중, 42~47대) 무라타 렌호 / 재선 ( 참, 20·22대) |
|
부대표 |
오하타 아키히로 / 9선 (
중, 39~47대) 기타자와 도시미 / 4선 ( 참, 16·18·20·22대) 하라구치 가즈히로 / 7선 ( 중, 41~47대) 카미모토 미에코 / 3선 ( 참, 19·21·23대) |
|
간사장 | 에다노 유키오 / 8선 ( 중, 40~47대) | |
정책조사회장 | 호소노 고시 / 6선 ( 중, 42~47대) | |
국회대책위원장 | 다카키 요시아키 / 9선 ( 중, 39~47대) | |
선거대책위원장 | 겐바 고이치로 / 8선 ( 중, 40~47대) | |
참의원 의원회장 | 군지 아키라 / 3선 ( 참, 18·20·22대) | |
국제조직 | 민주주의자연맹 | |
의 석 수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da2128> 참의원 | 59석 / 242석 (24.4%) |
중의원 | 71석 / 475석 (14.9%) | |
당원 수 | 233,100명 ,(2015년 기준), | |
기관지 | 프레스 민주 | |
공식 사이트 |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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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발표 포스터 - 사람 한명 한명을 소중히 하는 나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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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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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존재했던 정당. 당시 야권이 분열된 상태로는 1998년 제18회 참의원 통상선거를 치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 민주당이, 회파 '민주우애태양국민연합(民主友愛太陽国民連合, 민우연)'을 결성하고 있던 민정당, 신당우애, 민주개혁연합과 창당을 결의하고 1998년 4월 27일 신설합당한 정당이다.[9] 2016년 3월 27일 민진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55년 체제 붕괴 이후 일본 정치사에서 자유민주당 다음으로 세력이 강했던 정당이자 55년 체제 성립 이후 야당들중에선 최초로 단독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던 정당이다.[10] 일본에서 현재 존재하는 입헌민주당이나 국민민주당을 따로 민주당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민주당이라하면 보통 이 정당을 지칭하며, 상술한 두 정당은 민주당(民主党)을 약칭으로 쓸 정도로 민주당의 후신을 주장하고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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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본부(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초 1초메 11-1)[11] |
다만 두 차례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자민당에게 일격을 날린 정도이지 아직 전체 의석은 자민당이 압도했던지라 구 일본사회당과 비슷하게 정권을 차지하기에는 세가 부족한 야당이라는 인상이 지배적이었고, 지지기반도 홋카이도를 제외하면 주로 대도시 지역에 쏠려있는 상태였는데, 모리 요시로가 물러난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인기를 끌면서 자민당이 살아나자 민주당도 상대적 암흑기를 겪게 된다. 그러던 상황에서 2003년 자유당과 전격적인 합당을 이뤄내는데, 오자와 이치로가 과거 신진당 대표를 맡다가 분란으로 신진당이 해산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앙금이 남아있던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어쨌든 합당은 단행되었다.
그리고 직후 치러진 중의원 의원 총선에서 총 의석을 40석이나 불려 55년 체제 이래로 제1야당이 얻은 최다의석수라는 기록을 경신하면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했고 동시에 자민당을 비레대표 득표율에서 앞서는 이변까지 연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민당에 맞먹는 양대 정당이 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을 앞서기는 매한가지였고, 역시 55년 체제하에서 제1야당이 얻은 최다의석수 기록도 연속으로 경신하였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고이즈미가 우정민영화 이슈를 승부수로 건게 통하며 참패했지만 오래지 않아 세력을 수습하고 아베 신조 1차 내각이 연금기록 누락 등으로 지지율이 폭락한 틈을 타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60석을 확보하여 자민당을 앞질러서 참의원 1당이 되더니, 기어이 2009년엔 자민당을 꺾고 308석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두어 역사적인 집권까지 이루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취임한 하토야마 총리가 후톈마 기지 문제를 둘러싼 여권내 갈등으로 8개월만에 퇴진하고, 2010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폭망까진 아니었지만 자민당에게 뒤쳐지는 등의 난맥상이 지속되더니 결정적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여파로 인해 지지율이 폭망하고 2012년 12월 16일 중의원 의원 총선으로 철저히 몰락하고 만다. 전성기였던 2009년 말에는 여론조사 정당 지지율이 40%대를 넘기도 했으나, 2013년 7월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기점으로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다.
이후 다시 지지세를 조금씩 회복하긴 했지만, 리즈 시절엔 한참 모자르다보니 결국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호헌을 기치로 2016년 2월 유신당과의 합당을 결의하고, 당명을 민진당으로 3월에 변경했다. 이후 활동에 대해선 민진당 항목 참조.
3. 성향
- 정책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 중 하나는 지방분권주의로, 지방분권과 지자체의 고도자치화를 목표로 했다.
- ' 독도는 일본 땅' 드립을 치기도 했다. 물론 이 문제는 일본 정부 공통이니 딱히 민주당만 더 나쁘다고 볼 수도 없다만.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는 제2차 세계 대전의 A급 전범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군국주의 과거사 청산에는 비교적 적극적이긴 했다.
- 2009년 ~ 2012년까지 당시 일본의 여당이긴 하였지만 당원 요인들 다수가 자민당이나 비자민 보수정당 출신이라 그런지[13] 하토야마 내각 시절 연립여당이던 사민당에서는 자민당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는 비판이[14] 나오기도 했지만, 이건 관점에 따라 다른 문제로, 보통은 중도 ~ 중도좌파로 평가받았다. 자신들이 말하는 노선은 ' 민주중도(民主中道)'.
- 경제정책에서도 자민당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2009년 엔고로 강한 일본을 만든다는 캐치프라이즈로 집권했으며 실제로 집권 후 급격한 엔고현상이 발생했음에도 특별한 조처나 개입을 하지 않은 채 유도, 방조했으며 엔화가치는 2차대전 이후 사상 최고치인 75엔까지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양적완화를 펼치는 와중에서 일본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수출 경쟁력에서 큰 타격을 입는다는 자국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만 동전의 양면이라 당시 서민 물가는 안정되어 특히 일본인들의 해외 여행이 봇물을 이루던 시기기도 했다.[15] 허나 동일본 대지진 이후 서민 경기 침체와 혐한 우경화 바람 등이 겹치며 2012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몰락하고 만다.
- 2005년 총선에서 정통 좌파인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穗) 사회민주당 당수는 자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카레라이스와 라이스카레의 차이라고 깠다.[16] 덧붙여 후쿠시마 전 당수는 "사민당은 오무라이스"라고 말했는데, 요지는 젊은층이 좋아한다는 소리였나 본데 기자들 사이에서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카레가 더 가깝지 않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 소수파이긴 하나 당내에 무시할 수 없는 보수파 세력들도 존재한다. 일례로 2014년 12월 중의원 선거 당선자 73석 중 10석(13%)이 대놓고 평화헌법 개헌을 원하기도 했다.[17] 대놓고 평화헌법 개헌을 원하는 민주당 중의원 명단.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지역구 당선자 10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아즈미 준(安住淳), 후루카와 모토히사(古川元久), 와타나베 슈(渡辺周), 카미야마 요스케(神山洋介), 타케마사 코이치(武正公一), 곤도 요스케(近藤洋介), 후루모토 신이치로(古本伸一郎), 하라구치 가즈히로(原口一博)
- 마에하라 세이지의[18] 료운카이와 노다 요시히코의 화제회를 더하면, 민주당 중의원 총의석 73석 중 18석. 참의원 총의석 59석 중 8석으로, 민주당 전체의원수 132석 중 26석으로 약 1/5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다. 민주당의 주류는 중도 ~ 중도좌파 계열이지만, 보수 성향 파벌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보수 성향 파벌이 민주당의 진보색채를 어느 정도 희석시켜 주면서 중도표 + 보수표 중 극히 일부분을 받는데 일조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민주당이 이들을 확실히 내치는 것도 말처럼 쉽진 않다.
4. 지지기반
주로 도쿄, 나고야 등의 대도시와 홋카이도에서 세가 강한 편이었는데, 이는 노조가 주요 지지기반인 일본사회당과 민사당의 지지기반을 이어받은 점이 강점으로 작용했고, 또한 자민당에 비판적인 화이트칼라층에서의 지지층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와타나베 고조, 하토야마 유키오 등 상당수 구 자민당 출신 의원들이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55년 체제 당시에 자민당 강세 지역이었던 이와테현과 야마나시현 등의 지방도 민주당의 텃밭이 되며 상당수 자민당 지지층들도 민주당을 찍는 현상이 발생했다. 혁신 성향의 유권자들도 소선거구제로 선거제도가 바뀌면서 일본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민주당을 찍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중선거구제였던 시절의 야당들에 비해 지지층이 훨씬 넓어졌다. 그러나 2012년 중의원 선거과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 기존의 지지기반을 홀라당 날려먹어버렸고, 노조를 기반으로 한 지지기반 자체는 남아있으나 혁신 성향의 유권자들이 공산당을 찍고 있는 판인 데다가 기존 지지층들도 무당파로 전환된지라 2000년대에 비하면 지지기반이 눈물겨울 정도로 붕괴되었다.5. 역사
일본의 자유주의 정당 | |||||||
호소카와 내각 ~
노다 내각 (1993 ~ 2012)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word-break: keep-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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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신회 로 흡수 합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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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탄생 ~ 집권 이전
- 전신인 구 민주당은 1996년 총선에서 52석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수준이었지만 간토와 홋카이도에서 신진당에 제대로 고춧가루를 날리며 구 일본사회당의 지지층을 흡수했고 이후 신진당[19]이 해산된 이후 구 신진당 계열 정당들이 난립하던 상황에서 그나마 세가 있었던 민주당이 중심축을 잡으면서 민정당, 신당우애, 민주개혁연합 등의 여러 군소정당이 민주당에 병합되어 중의원 97석으로 세가 급속히 커졌고, 제1야당으로 자리매김했다.
-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27석을 확보하고 2000년 총선에서 127석으로 의원수를 늘렸으나,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부진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지지율이 높아지자 오자와 이치로의 자유당이 민주당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합당하였고, 합당 이후에 치러진 2003년 총선에서 177석을 확보, 1958년 총선거때 일본사회당이 기록한 166석의 기록을 깨며 선전했다.
- 그 후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역시 1956년에 일본사회당이 기록했던 49석의 기록을 갱신하고 50석을 확보하면서 1989년 이래 야당 최초로 자민당을 앞서는 등의 선전을 거두웠으나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113석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면서 참패하였다. 그러고 2007년 통일지방선거에서도 패배했으나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의 실책에 힘입어 60석을 확보했고 이후 자민당 정권의 실책에 힘입어 선거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자와 이치로의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오자와가 사퇴하고 하토야마가 대표를 역임하게 되었다. 55년 체제 최초의 정권 교대(정권 교체)는 바로 이 때 거둔 것이다.
5.2. 집권기(2009년 8월 ~ 2012년)
-
2009년 7월 들어
시즈오카현 지사,
2009년 도쿄도의회 선거 등 연거푸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민당을 궁지로 몰았고, 이에 지지율 56%를 기록하면서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결국 중의원(하원) 해산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 그리고 이어 열리게 된 2009년 8월 30일의 중의원선거에서 전체 480석 중 308석을 획득. 자민당이 창당된 뒤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자민당을 누르게 된다. 여기에 사민당, 일본공산당 등 다른(기존) 야당계 정당을 합치면 340석으로 개헌도 가능하다. 반면 자민당은 당초 예상치였던 150석도 못 건지는 119석. 멀티격인 공명당을 합쳐봤자 140석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말 그대로 민주당으로서는 폭풍 승리이며, 자민당은 당의 생사를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된 상황. 2009년 당대표 하토야마 유키오는 2009년 총선승리 뒤 총리가 되었다.
5.2.1. 2010년
- 하토야마는 초기 압도적인 지지속에 집권 한 뒤 "우애"를 내세우며 일본의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정치자금 문제로 계속해서 잡음이 일었고, 일본에 산재된 문제해결이 지지부진해 지지율이 떨어져 급기야 70%대 지지율이 8개월 사이에 10%대로 급락.
- 거기다 당초 사민당과 연립이 가능했던건 오키나와의 후텐마 주일미군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하는 것을 전제로 했던 것이고, 그것 하나만 믿고 오키나와에서는 민주당 몰표가 나왔다. 그러나 역시 현실적 문제로 오키나와 현 외로 기지를 이전하는 문제를 없던 걸로 돌리게 되었고, 미국에게도 남는 게 없는 상황에서 2010년 6월을 기점으로 사민당은 오키나와 문제가 이대로 지속되면 사민당은 더 이상 민주당과 연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연정을 나가버렸다(...).
- 결국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오자와 이치로의 정치 자금문제와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2010년 6월 2일, 오자와 간사장과 나란히 사퇴. 그러나 사실은 오자와 이치로를 보내버리기 위한 하토야마 총리의 자폭설이 대두되었었다. 그리고..
-
하토야마 총리의 후임으로는 부총리였던
간 나오토(管直人)가 총리로 선임되었다. 간 내각은 내각 대신들도 젊은 피 중심으로 교체하였고, 결정적으로 ""탈 오자와""를 거론하며 인적 쇄신을 가하기 시작했다. 간 총리부터가 서민 집안 출신의
공돌이자수성가형 총리인데다, 주요 대신들이 40대라는 젊은 이미지를 등에 업고, 국책 사업 예산 조정같은 호평 받은 정책은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 의지를 보여, 민주당의 지지율은 총리 교체후 근 60%까지 상승하였고, 자민당은 답보 상태로 참의원 선거까지 낙관하게 되었다. 만약 여기서만 이긴다면 최소한 2012년까지 간 내각은 안정적이었을 텐데... 소득세 관련 문제로 과반이 위태로워졌다. 선거를 앞두고 금기인 소득세 증세 문제를 총리가 직접 꺼내들면서 민심이 단숨에 돌아선 것.
- 2010년 7월 11일의 결과는 예상보다도 참혹했다. 민주당 44석, 자민당 51석. 과거 자민당 탈당세력인 민나노당(10석), 일어나라 일본(1석), 신당개혁(1석)도 선전했다. 단독과반을 위한 60석은 물론이고 목표였던 54석도 되지 못했다. 연립여당인 국민신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다. 간 총리는 사임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소득세 삽질을 저지른지라 오자와 세력의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 2010년 9월 14일에 민주당 대표 경선이 예정되어 있었고, 오자와 세력과 하토야마 전 총리, 간 나오토 총리간의 암중모색과 합종연횡이 대표 경선 때까지 이어졌다. 간 나오토 총리는 재신임을 받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생각이지만 오자와 세력이 간 나오토 총리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자와 세력도 딱히 간 나오토 총리를 밀어낼만한 인물이 없는지라 결국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이 대표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초에는 대타를 내세울 생각이었던것 같지만 인물도 없고, 또 꿀릴게 없다는 생각인지 정면돌파를 선언한것.
- 하토야먀 전 총리 세력의 지지도 받는 탓에 오자와 전 간사장의 대표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결국 일본 국민들이 오자와 전 간사장을 싫어하는 탓에 여론의 힘을 등에 업고 경선에서 간 나오토는 오자와 이치로를 총 1,212점 중에 721점을 획득해, 일각의 우려를 잠재우며 압도적으로 당 대표로 선출되어 총리에 유임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간 나오토 내각의 지지율은 20%대 최저 수준으로, 자민당의 26%보다 낮아 중의원 선거시 참패가 확정된 상황이었다.
5.2.2. 2011년: 몰락의 시작
- 2011년 예산안이 부결되면서 민주당 정권에도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간 나오토 총리를 사임시키고 후임으로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장관이 유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으나,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장관이 재일교포 한국인에게 받은 25만 엔 후원금이 문제가 돼서 결국 사임했다(…).
- 정국의 난맥상 속에 조기 총선거를 포함한 모든 변수는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묻혀버렸다. 간 나오토는 임기는 늘리는데 성공했고, 총선거의 위험부담도 사라졌지만, 소득세 인상문제로 어그로도 많이 끌었고 초기 대처에 비해 그다지 좋은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2011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해버리고 말았다.
-
간 총리는 조기 자진 사임을 거론하면서 가까스로 야당의 불신임(6월 2일)을 기각시켰지만, 바로 그 직후 연말까지 하겠다며 각종 꼼수를 부려 기어이 열받은 하토야마 + 오자와 + 야당 연합에 끌려내려갈 지경이 되었다. 결국 원하던 목표를 채운 뒤 9월 2일 사퇴(1년 3개월 재임). 법적으로는 한 국회에서 2번 불신임을 못하는지라
간 총리의 꼼수로제법 버틴 편이긴 했다.
- 2011년 8월 29일에 새 대표, 즉 사실상의 새 총리를 선출하게 되었다. 외국인 정치헌금의 악재 속에서도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장관이 경선 도전을 선언했으나, 경선 결과 1차투표에서 3위로 탈락했고, 2차 투표에서 반 오자와계가 모두 연합해서 노다 요시히코 재무장관을 밀면서 결국 노다 장관이 새 대표에 선출되었다. 8월 30일에 국회에서 열리는 국가수반 지명투표에서 중의원을 장악한 민주당에 의해 당선.
-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은 재정난 해결에 기대를 받고 있지만 성향적으로는 친미 보수 성향이고 중국과 한국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인물이었으니, 결국 미국과의 관계는 조금 호전되었으나 한국과는 어마어마한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5.3. 몰락, 반등은 가능할까?
5.3.1. 2012년
- 2012년 7월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오자와 그룹의 중, 참의원 49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 생활이 제일을 창당하면서 의원수의 6분의 1이 빠져나갔다. 당시 민주당에서 큰 영향력을 차지했던 오자와 그룹마저 민주당을 탈당하자 민주당이 얼마나 무능한지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 결국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면서 꿈도 희망도 없어졌다. 노다 총리는 세습 의원들의 공천탈락 등의 강수까지 둬가면서 선거에 임했으나 선거 결과 전망은 민주당이 100석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해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산케이신문의 조사에서는 최대로 확보해야 75석에서 80석 정도였고, 결국 선거결과 57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1996년 중의원 총선에서 52석을 얻은 다음으로 가장 저조한 의석이었다.[20]
-
노다 총리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했으며 민주당은 곧 새 대표를 선출하고 2013년 7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에서 기사회생을 노릴 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참의원에서는 자민당이 공명당, 일본 유신회 등을 박박 긁어모아도 과반이 못 된다는 점뿐이었다.
참 좋은 다행일세새 대표로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호소노 고시 정조회장이 거론되었다.
- 계파적으로 본다면 노다 총리의 계파는 선거패배로 몰락한 상황이고, 하토야마 전 총리 계파는 하토야마 전 총리가 출마를 포기하면서 와해된 상황이며, 오자와 계파는 당밖으로 나가버린 상황이라 사실상 당은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상이 좌지우지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마에하라 전 외상이 직접 대표에 출마할지 호소노를 내세울지에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 2012년 12월 25일 열린 민주당 대표경선에서 당초 예상과는 달리 호소노 고시 정조회장이 가이에다 반리 지지를 선언하며 불출마했고 가이에다 반리 전 경제산업상과 마부치 스미오 전 국토교통상의 2파전이 되었다. 경선결과는 가이에다의 승리. 임기는 3년으로 2015년 9월까지 맡게 되었다.
5.3.2. 2013년
- 가이에다는 다른 야당들과 협력하여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 선전하겠다고 다짐했다. 가이에다가 노다 요시히코와 대표직을 두고 맞붙었을 당시에 하토야마 계열로서 오자와 계와의 연합후보로 내세워졌던 전력이 있어서 당세가 쪼그라든 오자와 이치로의 일본 미래당과 다시 합당하는게 아니냐는 섣부른 전망까지 나왔기 때문. 하지만 결국 미래당의 후신인 생활당과 합당하지 못했고, 오자와 이치로도 민주당에 복당하지 못하고 생활당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간신히 참의원 제2당(44석)만을 유지하며 대거 쪼글아들었다.
- 2013년 4월 무슨 일인지 용감하게도 니코니코 초회의에서 정당으로서는 부스를 냈다. 니코니코동화의 특성상 자민당을 지지하는 넷 우익[21]이 많은 탓인지 젊은이들이 우루루 몰려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한 자민당에 비해 이쪽은 아저씨들이 몰려있어 심각한 온도차를 연출했다고. 다만 넷에 떠도는 텅텅 빈 사진은 오픈 전 민주당 부스를 찍어 올린 악의가 있는 글이었다.
- 2013년 6월 23일 치러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는 겨우 15석을 확보하는데 그쳐 일본공산당에게 제1야당 자리마저 내주고, 이 때문에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가 확실시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참의원 선거에서 17석에 그치면서 역대 제1야당이 기록한 참의원 의석수 최저치인 20석[22]을 밑도는 역사적 대패를 기록했다.
-
결국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호소노 고시 간사장은 사퇴를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가이에다 대표 등은 유임을 하였다.
# 또 세대교체를 목표로
간 나오토 전 총리에게 자발적 탈당을 요구하고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출당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간 나오토 전 총리가 자발적 탈당을 거부하자
2013년
7월 24일 당 내 상임간부회를 열었음에도 당 내의 상당수가 반대를 하여 결국
3개월 당원 정지 처분으로 간신히 당에서 쫓겨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이 무슨 내분인가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자진 탈당했다. 이는 두 거물들의 정치 성향이 당이 원하는 중도화 전략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여하간 민주당은 하토야마의 친중 팀킬 발언들에 남은 쪽박마저 날아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가이에다 반리 대표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중국이 센카쿠 열도를 일본에게 빼앗겨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한 발언에 대해 상임간부회에서 엄중 항의하고 '이후로 하토야마의 발언에 대해서 당 차원에서는 일절 모르는 일이다.'라고 했다.
5.3.3. 2014년
- 수년에 거친 오랜 참패 속에 오랜만에 집단자위권 해석 개헌을 시도한 아베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 2014년 7월 14일, 일본 시가현 지사 선거에서 우위를 달리던 자민-공명 연립여당 후보[23]를 꺾고 미카즈키 다이조 후보가 승리했다. # 가다 유키코 현 지사가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데다가, 무소속 출마를 통한 '민주당적 감추기'(...)으로 자위대 문제나 원전 문제에 부정적인 진보적 유권자를 최대한 끌어들인 것.[24] 10월의 후쿠시마 현(!)과 11월의 오키나와 현(!) 지사 선거에서는 이런 바람이 더 강해질 것이 분명하기에 민주당은 오랜만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 여하간 민주당은 "석유수송이 불가능해진 것이, 영토를 직접 공격당한 것과 동등한 피해인가?" "( 태평양 전쟁 때) 일본- 독일- 이탈리아 3국 동맹이 있었죠. 아베 총리가 말하는 억제력과 같은 논리였습니다!"라면서 아베를 제대로 몰아붙이고 있다.
- 그러다가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추천 후보가 참패하고 이에 아베 신조가 의회해산을 선언한 데다가 2012년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의 득표력이 2009년 총선 때보다 오히려 떨어졌음에도 민주당의 분당 및 정당의 난립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전례 때문에 야권단일화 작업에 상당히 힘을 쏟는지라 중의원 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늘릴 것으로 보인다만... 일단 단일화 작업부터가 만만하지 않은 게 단일화 대상 정당이 한두 개가 아니고 거기에다가 각 정당들 간의 성향 차이가 위낙 큰 데다가 선거 일정도 넉넉치 않기 때문에[25][26] 힘들 것 같다. 그나마 47회 중의원 선거에서 오키나와 지역에서 야권 단일화를 이뤄냈다지만 그건 오키나와에서의 얘기고 본토지역의 단일화는 여전히 아오안이다. 후보자가 46회 총선에 비해서 크게 줄어들었다 해도 여전히 대다수 지역구에서 야당들간의 팀킬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고(...) 위에 적혀있다시피 민주당도 집권시기에 소비세 인상을 내건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의석을 크게 늘린다 해도 정권교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야권단일화 작업 때문에 민주당이 지역구에 내건 후보자 수가 과반에도 못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 민주당 내에서도 정권교체는 힘들다고 결론짓는 듯하다.[27]
- 이 우려는 결국 투표율 저조로 현실이 되어서 민주당, 나아가 일본 야권의 선거정책의 실패로 인해 민주당은 의석을 11석 정도를 늘리는데 그치고 말았다...
5.3.4. 2015년
- 지지율은 10% 내외 정도로 정체되어있다. 최근에는 더 하락해서(...) 2015년 가을 현재 8%정도다.
- 일본 국민들로부터 대안세력으로써 다시 신뢰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아베 총리의 집단자위권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 일본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안보법안 반대를 통해 존재감을 보여주고 어떤 결실을 맺는 다면 반등의 계기로 삼을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유신당을 탈당하고 오사카를 기반으로 한 신당을 창당할 계획을 밝혀 당장 내년 참의원 선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 1야당 민주당과, 제 2야당 유신당이 통합 협의에 나섰다.
- 만약 통합이 성사될 경우 중의원 의석수는 100~110여석, 참의원 의석수는 60~70여석 정도로 거대여당인 자민당[28]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견제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통합이 이루어지더라도 시너지 효과가 내년 참의원 선거까지 미칠지, 일본 야권이 부활의 날갯짓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장 구성원 개인의 성향이 아닌 정당의 성향으로 구분하면 통합당의 성향은 '극우에서 무려 중도좌파'까지 포함한다...현재보다 더 심한 '반자민당 짬뽕'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 그런데 2015년 10월 31일 하시모토 도루가 오사카유신회를 창당하자, 유신당 내에서 원래 하시모토 도루의 계파였던 오사카계 + @가 대량탈당해서 오사카유신회에 입당중이다.(...) 유신당 참의원 9명중 7명이 빠져나갔고, 중의원 31명중에서는 13명이 빠져나갔다. 남은 중의원 18명석도 추가 이탈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5.3.5. 2016년
- 2016년 7월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다. 우선 참의원 59석중에서 41석이 개선지역이고 2019년까지 임기가 보장되는 의석은 18석뿐이다. 당 지지율이 8%로 떨어졌고, 선거구, 선거연령마저 민주당에게 더욱더 불리하게 개편되어서[29] 개선 선거구인 41석중 상당수 의석을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
6. 여담
2ch 혐한초딩들 사이에서 민주당의 평가는 아주 좋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일단 자민당 반대 정당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민주당이 주도하는 재일영주권자의 참정권 추진 때문. 그들 사이에서는 매국노 정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경우 보통 민수당[30]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넷 우익이 민주당을 까는 노래 가사 바꾸기 노래도 유포한 적이 있다.(ex. 도라에몽의 노래를 민수의 노래로 개사) 2ch에서는 이 모양이지만 일본의 블로그 서비스인 아메바 산하 아메브로는 민주당에 우호적이라고 한다.2007년부터 이 당의 마스코트로 민슈쿤(민주군·民主くん, 공식 트위터 계정)이 쓰여왔다.
7. 역대 집행부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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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구 (선거대책위원회) | ||||
선거대책위원장 | <colbgcolor=#ffffff,#1F2023> 겐바 고이치로 | 선거대책위원장 대리 |
<colbgcolor=#ffffff,#1F2023> 오가와 카츠야 다마키 유이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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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대책부위원장 | 야마오 시오리 | ||||
상임의결기관 (양원의원총회) | |||||
양원의원 총회장 | 나오시마 마사유키 | 대의사회 회장 | 나카가와 마사하루 | ||
중앙당 지도부 | |||||
대표 | 오카다 가쓰야 | 대표대행 |
나가츠마 아키라 무라타 렌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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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표 (참) |
기타자와 도시미 카미모토 미에코 |
부대표 (중) |
오하타 아키히로 하라구치 가즈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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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무집행기구 | |||||
간사장 | 에다노 유키오 | 간사장 대리 |
곤도 쇼이치 후쿠야마 데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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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간사장 | 마부치 스미오 | 히로타 하지메 | 스즈키 카츠마사 | 오가와 준야 | 니시무라 지나미 | 테라다 마나부 | 야나기사와 미츠요시 | 시바 히로카즈 | 이시바시 미치히로 | 야스이 미사코 | ||||
정책조사회 | |||||
정책조사회장 | 호소노 고시 | 정책조사회장 대리 |
쓰지모토 기요미 오시마 아쓰시 오쓰카 고헤이 |
||
정책조사부회장 | 곤도 요스케 | 반노 유타카 | 고미야마 야스코 | 오카모토 미쓰노리 | 다지마 잇세이 | 나카네 야스히로 | 와시오 에이이치로 | 오니시 겐스케 | 고토 유이치 | 사사키 다카히로 | 오가타 린타로 | 카미야마 요스케 | 고야마 노부히로 | 나카지마 카츠히토 | 후쿠시마 노부유키 | 가네코 에미 | 카자마 나오키 | 고니시 히로유키 | 사이토 요시타카 | 니시무라 마사미 | 이시가미 도시오 | 이소자키 데쓰지 | 모리모토 신지 | ||||
국회조직 | |||||
국회대책위원장 | 다카키 요시아키 | 국회대책위원장 대리 | 아즈미 준 | ||
국회대책부위원장 | 류 히로후미 | 야마노이 가즈노리 | 이즈미 겐타 | 오구시 히로시 | 유노키 미치요시 | 니시무라 지나미 | 오쿠노 소이치로 | 미야자키 다케시 | 다마키 유이치로 | 모토무라 켄타로 | 후쿠시마 노부유키 | 오가타 린타로 | 야마오 시오리 | 고야마 노부히로 | ||||
참의원 의원회장 | 군지 아키라 | 참의원 간사장 | 하타 유이치로 | ||
참의원 의원 부회장 |
오가와 카츠야 아이하라 쿠미코 야나기사와 미츠요시 |
참의원 간사장 대리 |
후쿠야마 데쓰로 히로타 하지메 |
||
참의원 국회대책위원장 | 신바 가즈야 | 참의원 국회대책부위원장 |
노다 쿠니요시 하마노 요시후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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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단 | |||||
최고고문 |
노다 요시히코 요코미치 다카히로 에다 사쓰키 아카마츠 히로타카 |
상임고문 |
하타 쓰토무 와타나베 고조 나카이 히로시 나카노 칸세이 카노 미치히코 후지이 히로히사 히라타 켄지 가이에다 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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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당대표 |
7.1. 대표
민주당(일본 1998년)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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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간 나오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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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간 나오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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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노다 요시히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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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당 대표 ▶
국민 생활이 제일 대표 ▶ |
7.2. 대표대행
민주당(일본 1998년) 대표대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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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부대표
민주당(일본 1998년) 부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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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사사노 테이코 하토야마 구니오 하타 에이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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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히로나카 와카코 야마오카 겐지 다카키 요시아키 아카마츠 히로타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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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마에하라 세이지 가와바타 다쓰오 이시이 하지메 다카키 요시아키 기타자와 도시미 마도카 요리코 |
제16대 공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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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이시이 하지메 야마오카 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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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기타자와 도시미 나오시마 마사유키 오카자키 도미코 다나카 케이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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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대 기타자와 도시미 마에다 다케시 다나카 나오키 하라구치 가즈히로 카미모토 미에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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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간사장
민주당(일본 1998년) 간사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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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정책조사회장
민주당(일본 1998년) 정책조사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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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토 에이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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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호소노 고시 |
제14대 사쿠라이 미츠루 |
제15대 후쿠야마 데쓰로 |
제16대 호소노 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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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역대 포스터
역대 포스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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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사람 한명 한명을 소중히 하는 나라로 |
2015년 3월 생활기점 | 지역기점 |
2014년 11월 지금이야말로 흐름을 바꿀 때[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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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삶을 지키는 힘이 된다[32] |
2012년 11월 움직인다는 것은 결단[33] |
2011년 10월 하나하나 극복해 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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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앞으로 |
2010년 6월 건강한 일본을 부활시킨다[34] |
2009년 6월 정권교대[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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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국민 생활이 제일 |
2007년 참원선 국민 생활이 제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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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대 선거결과
9.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선거 공시 당일 의석 수와의 비교임.연도(회차) | 후보자 | 당선자 | 정당투표 | |||||
지역구 | 비례 |
합계 (중복 제외) |
지역구 | 비례 | 합계 [증감] | 득표수 | 득표율 | |
2000(42회) | 242 | 259 | 262 | 80 | 47 | 127 [▲32] | 15,067,990 | 25.18% |
2003(43회) | 267 | 274 | 277 | 105 | 72 | 177 [▲40] | 29,393,629 | 37.39% |
2005(44회) | 289 | 295 | 299 | 52 | 61 | 113 [▼64] | 21,036,425 | 31.02% |
2009(45회) | 271 | 327 | 330 | 221 | 87 | 308 [▲193] | 29,844,799 | 42.41% |
2012(46회) | 264 | 267 | 267 | 27 | 30 | 57[36] [▼174] | 9,628,653 | 15.90% |
2014(47회) | 178 | 197 | 198 | 38 | 35 | 73 [▲10] | 9,775,991 | 18.33% |
9.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연도(회차) | 후보자 | 당선자 |
비개선 의석 |
총 의석 [증감] | 정당투표 | |||||
지역구 | 비례 | 합계 | 지역구 | 비례 | 합계 | 득표수 | 득표율 | |||
1998(18회) | ? | ? | 48 | 15 | 12 | 27 | 20 | 47 [▲10] | 12,209,685 | 21.75% |
2001(19회) | ? | ? | 63 | 18 | 8 | 26 | 33 | 59 [▲?] | 8,990,524 | 16.42% |
2004(20회) | ? | ? | 74 | 31 | 19 | 50 | 32 | 82 [▲12] | 21,137,457 | 37.79% |
2007(21회) | ? | ? | 80 | 40 | 20 | 60 | 49 | 109 [▲28] | 23,256,247 | 39.48% |
2010(22회) | 61 | 45 | 106 | 28 | 16 | 44 | 62 | 106 [▼10] | 18,450,139 | 31.56% |
2013(23회) | 35 | 20 | 55 | 10 | 7 | 17 | 42 | 59 [▼27] | 7,134,215 | 13.40% |
10. 당내 계파
민주당(일본 1998년)/계파 항목 참조.11.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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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률상 등록일은
1996년
9월 29일이다.
[A]
Yazawa, Shujiro (July 16, 2015).
"The crisis of democracy in Japan". openDemocracy. Retrieved November 8, 2020. The party was composed of politicians whose political and ideological backgrounds were so diverse, ranging from conservatives to social democrats, that it was difficult to get a consensus even on basic policies.
[3]
출처에서는 자유보수주의가 아니라 그냥
보수주의라고만 적혀 있지만, 일본에서 사용하는 단어 "보수주의"는 자유보수주의와 단순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굳이
중도우파적인 느낌을 강조할 때(ex:
고이즈미 준이치로)에는 "리버럴"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이는 서구적 사회자유주의를 의미하는 용어로 더 많이 쓰이지, 신자유주의를 의미하는 용어로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이지는 않다.
[4]
료운카이(
마에하라 세이지),
화제회(
노다 요시히코) 계열
[A]
[B]
생추어리(
아카마츠 히로타카), 계열, 계파 내 좌파 성향이 강한 인사들은
민주사회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A]
[B]
[9]
표면적으로는 신설합당 내지는 재창당이지만, 법률상으로는
민주당이 민정당, 신당우애, 민주개혁연합을 흡수합당한 형태였다. 그럼에도 신설합당이라고 칭한 이유는
이전의 민주당과
이 시기의 민주당의 법률상 창당일이 같지만, 정치적인 스펙트럼에서 차이점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정치적으로 혁신계의 색채가 돋보였지만,
후자는
기존 색채에 보수성향의 색채가 추가된 형태였다.
[10]
1993년에 야당들이 연립정당이란 형태로 정권교체를 이루어내긴 했지만, 단독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어낸건 민주당이 최초다.
[11]
민진당,
국민민주당을 거쳐 현재는
입헌민주당의 본부로 사용 중이다.
[12]
민주당이 부진했던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결과적으로 의석은 늘어났다.
[13]
크게 보면 1990년대 부패 스캔들에 질린 자민당내
보수본류 세력이 당을 뛰쳐나와
좌익 세력들, 특히
우파사회당과 힘을 합친게 민주당의 시발점이다.
[14]
사실 초기엔 사회당계 의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혁신색이 다소 강한 편이었지만, 2차례(1998년[37], 2003년[38])에 거쳐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보수파 의원들이 민주당에 대거 입당하는 바람에 보수색이 강해졌다.
[15]
실제 일본 1인당 gdp를 구글에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10년 내내 지지부진하던 일본 1인당 gdp는 이시기 급등한다.
[16]
사회민주당이나
일본공산당 입장에서는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게, 민주당은 결국 자민당을 이긴다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성향에 관계없이 죄다 끌어모은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승자독식제 하의 정치에서는 필연적인 숙명이기도 하다. 유럽처럼 다당제가 정착되지 못한 지역에선 승자독식 선거 제도가 유지되는 한 종국엔
빅 텐트 정당이 승자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 이 때문에 결선투표제나 선호투표제를 원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다.
[17]
다만 개헌파라고 다 전쟁 포기를 명시한 평화헌법 9조를 뜯어고치자는건 아니긴 하다.
[18]
1990년대~2000년대에는
아베 신조와 술을 같이 마시는 술친구 사이였고, 2010년대에도 서로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을 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민주당내 범우파로
하시모토 도루의
일본유신회와도 연대를 모색하다 실패하는 등 분위기를 피우더니 종국엔 일본 정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알다시피 2017년
민진당을
고이케 유리코의
희망의 당에 갖다바치고 공천학살을 벌이다 자신과 당대표선거에서 패배했던
에다노 유키오의
입헌민주당이 탄생하며 이들을 싹 쓸어간다.
[19]
1994년 사회당과 자민당,
신당 사키가케가 연립정권을 구성하자 한계를 느낀 나머지 7개 정당들이 뭉쳐만든 정당으로 1995년 참의원 선거에서 선전하기도 했으나 1996년 총선에서 부진하면서 내분이 생겨 1997년 12월에 해산되었다.
[20]
그러나
1996년 당시에는 제1야당이었던
신진당이 156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의석을 획득하였고, 민주당은 그 때 당시에 막 창당된 신흥 정당이였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21]
근년에
유신회,
모두의 당,
태양당 등 일부 극우 계파가 자민당에서 조금씩 갈라진 감이 없지 않지만.
[22]
1986년 중, 참의원 동시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기록했다.
[23]
무소속 고야리 다카시 후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간사장의 지원도 강하게 받았다.
[24]
인근
후쿠이현에 원전이 있다.
#
[25]
민나노당이 선거를 앞두고 해산되어서 남은 당원들이 민주당으로 입당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결속당, 차세대당, 유신회, 생활당, 사회민주당, 녹색바람, 신당 대지 등이 남아있다. 거기에다가 공조대상 야당들의 성향들을 보면 좌로는 사회민주당, 우로는 유신회(...)와 차세대당으로 거의 극과 극을 달리다시피 하고 있다...
[26]
여기서 공산당은 제외. 공산당은 1980년 총선을 앞두고 정권교체를 노리고 있던 사회당과 공조관계가 깨진 뒤부터[39] 일부 지방선거를 제외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이웨이하는 신세다.
[27]
참고로 1972년 중의원 총선에서 사회당이 이런 식으로 후보자를 줄이는 전략을 써서 어느 정도 의석수를 회복한 바 있다.
[28]
중의원 290여석, 참의원 110여석
[29]
우익보수 성향이 강한 18~19세의 선거권 획득과, 민주당이 그나마 유리했던 2인 당선 선거구가 기존 10곳에서 4곳으로 대폭 축소등등
[30]
ミンス党. 민스토. 아무래도 민주의 발음인 민슈를 한국스럽게 비틀어서 까는 것 같다.
[31]
2014년
제2차 소비세 총선에서 사용.
[32]
2013년 참원선에서 사용.
[33]
2012년
가미카제 총선에서 사용.
[34]
2010년 참원선에서 사용.
[35]
2009년
정권 교대 총선에서 사용.
[36]
그나마도 지역구 27석으로 버틴 거지 광역비례 30석은
일본 유신회의 40석에도 10석 뒤진다. 일본 유신회의 의석은 지역구 14석을 더해 54석. 물론 야권이라 볼 수 있는
일본 미래당과
사회민주당, 연정인
국민신당이 12석 있지만 유신회와 흡사한 노선의
모두의 당은 아예 18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