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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inko Šakić1945년 4월 1일, 자그레브의 집 앞에서[1] | 1999년 3월 4일, 자그레브의 법원에서 |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단원, 전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지휘관을 역임하며 수많은 수감자들을 살상했고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반 세기 이상을 멀쩡히 살아가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을 자랑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2. 생애
2.1. 유년기
1921년 9월 8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있는 스투덴치(Studenci)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2] 2살 때 그의 가족이 보산스키 브로드(Bosanski Brod)로 이사하면서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3살이던 1934년 우스타샤 사상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는데 당시 그는 법적으로 미성년자라 형을 선고받을 수 없었던 대신 18세가 되면 형을 선고받아야 한다는 공소장을 보고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1938년 4월 20일 16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우스타샤 당원이 되었다.2.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만행
1941년 4월 10일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해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는데 이 괴뢰국의 실권자는 우스타샤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였다.우스타샤 민병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있는 세르비아인, 집시, 유대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로 악명이 높았는데 그는 1941년 4월 중순 빈에서 우스타사 민병대에 입대했고 같은 해에는 도합 10만여명이 죽어나가 '발칸의 아우슈비츠'로 불리게 될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후 1942년 말 수용소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3년 중순에는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장교'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1944년 4월부터 동년 12월 1일까지 강제수용소의 사령관으로 근무하며 다음과 같은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했다. 참고로 그는 1943년 베코슬라프 루부리치[3]의 이복동생인 나다 루부리치(Nada Luburić, 1926~2011)와 결혼했다.[4]
1942년 여름에는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산하에 있었고 세르비아/유대인/보스니아인 여성과 어린이 수감자들, 정권에 반대하던 야당 의원들을 수감하며 확인된 수치로만 도합 12,790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타라 그라디슈카(Stara Gradiška) 강제수용소[5][6]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 찬 밴에 배기관으로 독가스를 살포할 것을 개인적으로 지시하였고 1944년 6월에는 이반 월너(Ivan Wollner)라는 수용자가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우스타샤에게 맞아 죽은 것이 알려지자 수감자들에 대한 보복을 명령해 월너와 같은 막사에 살던 수감자 100명의 수감자 중 25명의 유대인을 손수 골라 독방에 가둔 후 굶기고 고문하도록 했다.
그는 봉기를 조직하고 옥수수를 훔친 20명의 수감자 그룹을 이끌던 렘지야 레바츠(Remzija Rebac)에게 손수 화염방사기를 난사했고 이 봉기의 다른 주도자인 밀로 보스코비치(Milo Bošković)는 1944년 9월 21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으나 보스코비치가 그에게 '교수형보다는 머리에 총을 쏴 죽여달라'고 하자 그는 이에 동의하며 "남자이자 전문가로서 캠프의 사령관이 개인적으로 너를 죽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보스코비치에게 총을 쏴 죽였다.
덤으로 그는 수용소에 대한 정보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밀수하는 것을 도운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의무실 관리자 마린 유르체프(Marin Jurcev)와 그의 아내, 다른 수감자 3명에 대한 교수형을 명령했는데 이들의 시신을 보면서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안드리야 아르투코비치[7]와 함께 태연하게 비트와 슈니첼을 먹고 있었다.
수용소 수감자였던 목격자 드라구틴 롤러는 딘코 사키치가 경비원들에게 여성과 어린이를 밴에 태우라고 지시하고, 배기구에서 내부로 고무 호스를 연결한 다음, 승객이 죽을 때까지 수용소 주변을 돌며 운전하게 하면서 차가 도착하자마자 이런 식으로 적어도 그룹의 절반을 죽였다는 것을 폭로했다. #
그는 수감자들을 살해하고 고문하는 데 개인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8] 실제로 '전염병 확산 방지'를 명목으로 병에 걸린 수감자들을 '병원'에 구금한 후 살해하도록 지시했으며 심지어 '사냥'이라는 '게임'을 위해 수감자들을 광장에서 줄을 서서 원을 그리며 달리게 한 후 동료 3명과 함께 지휘관 사무실의 열린 창문 뒤에서 수감자들을 카빈총과 권총으로 저격해 죽이기까지 했다. 이런 만행들에 11시간의 강제노동, 영양실조[9], 비위생적인 환경, 질병까지 겹치면서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는 신곡의 지옥을 연상시킨다고 평가받을 정도였으며[10] 심지어 이곳을 방문한 나치 관리, SS 병사들조차 그 잔인함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11] 이렇게 그가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동안 최소 2,401명이 살해되었다.
2.2.1. 아내 나다 사키치의 만행
딘코 사키치의 아내인 나다 사키치도 스타라 그라디슈카 수용소에서 근무한 여성 경비원[12]들 중에서도 특히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보다 더 잔혹했다고까지 진술했을 정도였다.그녀는 수용소에서 일할 때 항상 벨트, 총, 단검이 달린 녹색 우스타샤 유니폼을 입고 있었으며, 수감자들에게 조악한 음식을 주도록 명령하여 수감자들의 아사를 조장하거나 병자와 임산부를 짓밟기도 했고 수용소 인근 교회에서 기도한 후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20m 앞에서 한 죄수가 빗자루로 낙엽을 쓰는 것을 보고 총으로 쏴 죽이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 앉아 있거나 무관심하게 한 여성 수감자를 따라간 후 갑자기 그녀의 목을 칼로 베고 태연하게 손으로 머리를 빗는 등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했으며 수감자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것을 '병적으로' 즐겼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본인이 저지른 범죄를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13] 증언으로 남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였으니 어떻게 보면 증언이 별로 남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악행의 수위만 봐도 매우 충격적인데, 더 충격적인 것은 만행 당시 그녀의 나이가 많아봤자 만 18세, 즉 미성년자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수용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기는 1942년 10월 중순으로, 당시 그녀는 만 16세였다.[14]
2.3. 전후
이후 사키치 부부는 한동안 자그레브에서 살다가 1945년 4월 패전의 기미가 보이자 그는 전직 야세노바츠 수용소 사령관들과 함께 수용소 폐쇄와 범죄에 대한 증거 파괴를 지시한 후 수용소로 돌아갔고 이 과정에서 수감자들의 암매장된 시체들과 수용소의 문서들이 모두 불살라진 것은 물론이고 수용소는 폭파되었으며 아직 살아 있던 수감자들도 4월 말까지 모두 처형되었다.[15][16] 처벌은커녕 파벨리치를 위시한 다른 우스타샤 지도자들과 함께 크로아티아를 떠나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국에서 머무른 후[17][18] 1947년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19] 류보미르 빌라노비치(Ljubomir Bilanovic)라는 가명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해안 마을인 산타 테레시타의 정원이 딸린 방 4개짜리 벽돌집에 정착했는데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은둔 생활을 하기는커녕 작은 섬유 공장을 운영하며 재력을 쌓았고 아르헨티나에 살던 1만 명 정도의 크로아티아 커뮤니티의 활동적인 구성원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사키치 부부는 자식 3명을 낳고[20] 파벨리치가 그들의 대부가 되도록 주선했다.[21] 후안 페론이 군사 쿠데타로 퇴진한 지 1년 후인 1956년 사키치 가족은 아르헨티나를 떠나 스페인국으로 갔다가 3년 뒤인 1959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그는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후에는 본명을 그대로 쓰면서 조용한 삶을 살았으며[22] 모사드의 암살 시도는커녕 나치 전범 추적자들의 이렇다할 추적, 심지어 궐석재판까지 피해 가면서 반 세기 이상을 편안하게 살아 왔다. 덤으로 1954년부터 1989년까지 집권하며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들을 위한 '휴식 캠프'를 운영한 파라과이의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23]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딱히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1974년에는 루부리치가 1955년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재건국을 위해 창단한 '크로아티아 국민 저항군'의 지도자를 지내면서 유고슬라비아 대사와 대사관에 대한 여러 테러 공격 준비에 참여하기도 했고 1990년대에는 아르헨티나에서 크로아티아로 무기를 밀수출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1990년 크로아티아의 정치 주간지인 페럴 트리뷴(Feral Tribune)은 그의 최근 사진과 함께 출판된 잡지 기사를 위해 그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이 인터뷰에서 세르비아인들을 비난하면서 우스타샤를 칭찬했다. 그해 후반에 그는 오스트리아로 가 시카고 트리뷴이 '이전 나치의 재회'라고 명명한 행사에도 참석했으며 1994년에는 아르헨티나를 방문 중이던 프라뇨 투지만[24]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과 리셉션에서 만나 거의 45분 동안 이야기를 하고 함께 사진까지 찍은 후 마가진(Magazin)이라는 크로아티아 간행물과의 인터뷰에서 "더 많은 세르비아인이 죽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을 다시 할 것이다.", "나는 아기처럼 잔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98년 3월 그는 아르헨티나 국영 텔레비전과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에서 자신이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은 인정했으나 "내가 그곳에 있었을 때에는 경비원이나 관리자가 죄수를 만지는 것만큼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도 모자라 수용소에 있던 모든 죽음은 '자연적인 원인의 결과', 즉 자연사라고 주장했으며 덤으로 깨끗한 양심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매우 명확합니다. 매우 명확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하고 도왔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라고까지 했다. 1998년 4월 6일 이 인터뷰가 송출되자 아르헨티나인들은 당연히 격분했고 아르헨티나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도 방송 다음날 그의 체포를 요구했다.
송환 소식을 들은 그는 매우 놀라면서도 크로아티아에서 영웅으로 환영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하며 그로부터 얼마 후에 곧바로 사라졌는데 이 무렵에 나다 사키치는 남편이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며 "정말 엄청난 거짓말입니다. 전 미칠 것 같아요. 50년 후, 그들은 이런 끔찍한 일을 생각해 냈습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그는 1998년 5월 1일 아르헨티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동년 6월 18일 인터폴 요원과 함께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탄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크로아티아 항공 항공기로 갈아타면서 자그레브로 이송되었다. 체포 당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 수용소의 사령관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이었다. 1998년 12월 야세노바츠 수용소 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저지른 민간인에 대한 범죄 혐의로 기소된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유고슬라비아로 인도되는 나다 사키치의 모습.
참고로 나다 사키치는 1998년 7월 중순에 유고슬라비아로 인도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다음 해에 석방된 후[25] "기분이 좋아요, 정의가 이겼습니다. 가장 큰 소원이었던 조국에 오게 돼 기쁩니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송환 전부터 파킨슨병에 시달렸다는 것과 경제적 어려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그레브의 1급 요양원에 보내진 후 국가적 영웅이자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2.4. 재판
1999년 3월 4일 그는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재판 개시일이라는 이유로 법정에 출두했지만 전날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사유를 들며 재판을 3월 15일로 미루기도 했다. 미뤄진 재판 첫 날에 그는 40명 이상의 증인이 참석한 재판 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기소장을 읽어나갈 때 어색하게 웃어나갔고 야세노바츠에서 3년을 보냈던 증인이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에 억류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말했을 때에도 아무런 감정적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며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크로아티아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르비아-공산주의 신화다', '야세노바츠 수용소에 구금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적들은 친절하고 자비로운 방식으로 대우받았다', '신 앞에서 내 양심은 깨끗하다'는 망언들을 남긴 것을 넘어 심지어 하술할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을 남겼다.나는 (야세노바츠에서) 내가 한 일이 자랑스럽고 (다시 한 번 위협을 받는다면 내가 했던 일을) 다시 할 것입니다. 야세노바츠는 법에 근거한 법률 기관으로, 크로아티아 국가의 파괴를 위해 일했으며 공공 질서와 안전을 위협했던 모든 사람들이 억류되었습니다. 수용소의 기간과 인구를 고려할 때 사망률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쏜 것은 법에 따라 한 것입니다. 감옥과 수용소가 없는 나라는 세상에 없으며, 누군가는 이 고마운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전가된 모든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때 우리가 그렇게 했다면 오늘날 크로아티아는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거짓말을 쓸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덤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설립과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으며 크로아티아가 파시스트 전시의 행적을 인정하라는 국제적 압력을 받고 있다는 주장도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송환에 정치적인 동기가 있다고 주장하며 마지막 변론에서 '나는 고국을 지키고자 하는 크로아티아의 애국자다'라는 주장까지 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법원에서도 그에게 나치식 경례를 하거나 증인이 거짓말을 했다고 우기다가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의 변호인은 그가 수용소에 복무하는 동안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라며 그가 무죄를 선고받을 것을 요청했으나 결국 1999년 10월 4일 그는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그는 재판 과정에서 한 증언을 듣고 웃은 것이 발각되어 웃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으며 유죄 평결이 읽히자 판결을 비웃듯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손뼉을 치거나 법정에 참석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V 사인까지 보내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보였다.
참고로 그의 재판은 크로아티아에서 전직 우스타샤에 대한 최초의 전범 재판이자 공산주의 몰락 후 동유럽의 나치 부역자에 대한 재판 중 유죄 판결과 처벌을 내린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2.5. 말년 및 사후
판결 후 그는 크로아티아 최대 수용소인 레포글라바 교도소에서 복역했는데 복역하는 동안 양로원에 맡겨진 아내를 한 달에 여러 번이나 면회를 갈 수 있게 하는 특혜가 주어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형량에 대한 항소를 했으나 2000년 9월 크로아티아 대법원은 이를 거부했다.이후 그는 회고록 집필을 명분으로 교도소 행정부에게 자신의 감방에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교도소 행정부가 감옥에서 그를 만날 수 없어서 2001년 3월 1일 자그레브의 죄수들을 위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TV와 컴퓨터를 받은 그는 '1946년 알프스에서 포글라브니크[26]와 함께 'S Poglavnik u Alpa 1946'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써나갔고 2001년과 2002년 감옥에서 한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범죄를 부인했다. 그는 말년의 몇 년 동안은 심장질환을 앓다가[27] 2008년 7월 20일 자그레브에 위치한 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08년 7월 25일 열린 그의 장례식은 유언에 따라 우스타샤 정복을 착용하고 화장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는데 크로아티아의 우익 정치인들을 포함한 300여명이 참여했으며 그의 미사를 주관한 신부 베코슬라프 라시치(Vjekoslav Lasić, 1938~)[28]는 '딘코 사키치를 유죄 판결한 법원이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 국가를 유죄 판결했다', '모든 명예로운 크로아티아인은 (사키치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현대 크로아티아 국가 설립의 토대를 형성했다' '신께서는 사키치가 신의 법에 어긋나는 짓을 했어도 그가 저지른 모든 일을 용서해 주셨다' 등의 망언들을 남겼다.[29]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무덤 인근에는 우스타샤 정권의 희생자들과 우스타샤 정권에 저항하던 사람들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30]
2011년 7월 15일 세르비아의 요청에 따라 인터폴은 우스타샤 수용소에서 범죄 혐의를 받던 나다 사키치에게 영장을 발부했으나 같은 날에 크로아티아 언론은 나다 사키치가 이미 2011년 2월 5일 사망한 뒤 화장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1]
왼쪽의 여성은 딘코 사키치의 부인인 나다 사키치다. 참고로 촬영 당시 그녀의 나이는
만 18세. 참고로 사진 촬영으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이들은 수용소로 돌아가 남아 있는 수감자들을 몰살했다.
원본
[2]
참고로 스투덴치는 오늘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지역이다.
[3]
Vjekoslav Luburić(
1914년
3월 6일 ~
1969년
4월 20일). 우스타샤 보안청 제3부를 이끌며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있는 강제 수용소들을 총괄했으며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초대 소장이었다. 사키치는 그를 '인도주의자', '유대인의 보호자'로 묘사했으나 지극히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루부리치를 2차 대전 시기 최악의 전범 중 한 명으로 꼽고 있다. 이후
스페인국으로 도피하여 우스타샤 복원 운동을 벌였으나 1969년 4월 20일에 집에서 일리야 스타니치(Ilija Stanić, 1945~. 루부리치가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 직원으로 고용한 인물이지만 정체는 유고슬라비아의 비밀경찰이었다.)에게 머리를 망치로 여러 번 가격당해 처참하게 살해당하면서 죗값을 제대로 치렀다. 향년 55세.
[4]
딘코 사키치가 출세할 수 있던 것도 나다 사키치의 혈통 덕택(?)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5]
이 곳도 '모든 것이 야세노바츠와 동일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으며 심지어 1942년 8월 29일 밤에는
교도관들이 누가 가장 많은 수감자를 '청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기를 걸기까지 했다. '우승자'인 페타르 브르지차(Petar Brzica, 1917~?) 중위는 단 하루 만에 단도로 1,360명(670~1,100명이라는 설도 있다)의 수감자의 목을 자르고 금시계,
실버 서비스, 구운 젖먹이 돼지 및 포도주를 보상으로 받았다.
[6]
참고로 2차 대전뿐만 아니라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어린이를 위한 강제수용소를 운용한 곳은 오직 크로아티아 독립국 하나밖에 없었다고 하며 당시 우스타샤들은
특히 어린이들을 유난히 잔인하게 죽였다고 한다.
스타라 그라디슈카의 실상을 다룬 글. 열람 주의
[7]
Andrija Artuković(
1899년
11월 19일 ~
1988년
1월 16일). 크로아티아 독립국 시절에 법무부 장관도 역임하며 인종법에 서명하고 강제수용소를 책임진 인물로, 마을에 사는 모든 인구를 몰살하거나 어린이들까지 봐주지 않고 처형할 것을 명령한 것은 기본에 심지어 '짐승의 씨앗을 없애야 한다'며 어린이 살해를 우선 순위로 간주하며 수용소의 어린이들의 식사에
수산화나트륨, 쉽게 말해 양잿물을 넣기까지 하는 등의 극악무도한 행적으로 인해 '발칸반도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였다. 종전 후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가 잠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48년에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 실비치로 도주해 가명으로 동생이 소유한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했지만 1년 뒤에 실명으로 비자 발급을 요청하면서 모든 것이 발각되었고 1951년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미국 정부에 아르투코비치의 송환을 요구하여 법원에 회부되기도 했으나 이 송환 요청은 크로아티아계 미국인들과 가톨릭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의 항의로 지연되다가 1959년 무산되었다. 이후 회계사로 일하면서 조용하고 편안하게 살다가 1984년 체포된 후 1986년 유고슬라비아로 송환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선고 당시 87세의 고령이었던 것은 물론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비행기에서 내릴 때 들것에 실려가야 했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하였기 때문에 정작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1988년 1월 16일에 자그레브에 소재한 구치소 내부의 병원에서 향년 88세로 옥사했다.
실제 재판 당시 영상,
영어 자막 첨부본. 다만 이쪽은 생략된 부분이 많다.
[8]
실제로 사키치는 후에 재판에서 '재미와 가학성'을 이유로 22명의 수감자를 교수형에 처하도록 지시한 혐의와 최소 4명을 개인적으로 총살한 혐의가 적용되었으며 심지어 총살된 이들 중 2명은 단지 웃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수치이며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후술할 에피소드들도 그렇고 6살 때에 야세노바츠에 수감된 릴리아나 이바니체비치(Liliana Ivanicevic)는 '사키치가 목을 자르는 것을 즐겼다.'고 증언했다.
[9]
수감자들에게는 지방도 염분도 없는 음식이 제공되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수감자들은 풀과 잎사귀, 개의 시체, 심지어
인육까지 먹어야 했다. 게다가
수용소 측에서 수감자들의 식인을 조장했다는 말도 있다.
[10]
실제로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는 '총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른 독일의 강제수용소들과 달리 대부분의 처형이 밀 이삭을 베기 위해 쓰이던 단검(우스타샤가 붙인 이름은 스르보스예크(Srbosjek)로 '세르비아인 절단기'라는 뜻이다.)과 톱, 도끼, 망치를 이용한 방식과 수감자를 산 채로 화장터에 넣어 태워 죽이는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엽기적인 방식이 동원되었다. 사실 야세노바츠에서 수감자들을 저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한 이유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같은 '산업적 규모'의 대량 학살을 위한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1]
실제로 야세노바츠를 신곡의 지옥에 빗댄 사람이 독일 노동부의 수송 장교였던 아르투르 헤프너(Arthur Hefner)였다.
[12]
대다수가 남성 경비원의 자매 또는 아내들이었으며 이들도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13]
참고로 수용소에서 일했을 때부터 자신의 악행을 자랑스러워했다.
[14]
하다못해 그 젊다는
이르마 그레제조차
아우슈비츠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당시 만 19세의
성인으로 나다 사키치가 악행을 끝마친 시기보다 근소하게 연상이었다. 덤으로 그레제가 만행을 끝낸 나이는 만 21세. 다만
독일,
크로아티아 기준으로는 만 18세부터 성인인데, 이를 감안하더라도 나다 사키치가
대부분의 악행을 미성년자 시기에 저질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15]
참고로 폐허가 된 수용소는 1945년 5월 2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군인들에게 발견되었다.
[16]
물론 나다 사키치도 1945년 4월 21일 스타라 그라디슈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모든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처형을 지시했으며 나다 사키치 본인도 이 처형 과정에 손수 참여했다. 얼마나 철저하게 수감자들을 몰살했는지 1945년 4월 25일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당시 스타라 그라디스카의 생존자는 우물에 숨어 있던 단 6명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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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사키치는 이때 에스페란차(Esperanza)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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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다와 함께 수용소에서 '검은 3인조'로 불릴 정도로 잔인했던 마리자 부즈돈(Marija 'Maja' Buzdon-Slomic, 1923~1945)는 나치의 패망 후 자그레브를 점령한 빨치산들에게 처형되며 악행의 죗값을 제대로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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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르헨티나로 피신한 우스타샤만 무려 2만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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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생 아들 안토니오, 1949년생 아들 토마스 루이스, 1966년생 딸 마리아나. 그 중 안토니오는 아버지가 체포될 무렵 스포츠 의료 사업을 했고, 토마스 루이스는 교사로 일했다고 한다. 안토니오는 아버지의 재판이 '사기'이자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기에 세르비아에서 재판을 받는 것으로 우겼고, 아버지는 명예가 훼손당한 피해자라고 주장했는데, 아마
어머니 쪽에서 부모님의 악행을 미화한 내용만 전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걸 반 세기 넘게 당해왔으니 어찌 보면 사키치 부부의 또 다른 피해자인 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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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파벨리치는 1959년 죽었기에 1966년에 태어난 마리아나의 대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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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르헨티나에 살던 사키치의 이웃들은 사키치가 특별히 수다스럽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때때로 그가 잔디를 깎거나 그의 아내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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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스트로에스네르는 대놓고
페도필리아 성향을 보여주며 수많은 소녀들을
성노예로 삼은 희대의 악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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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투지만은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인물이었으며 이 사람이 집권하던 시기이자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이던 1991년 9월 크로아티아군은 추모 공원이 된 이 수용소를 점령하고 희생자들의 무덤을 폭파한 후 박물관의 유물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상식 이하의 만행을 벌였다. 참고로 크로아티아의 독립 후에 반파시스트 저항군과 파시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 약 3천 개가 국가의 개입 하에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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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본인도 자신이 2차 대전 때 행한 고문들을 전면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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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lavnik. 원래 크로아티아어로 '수장'을 의미했으나 우스타샤의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던
안테 파벨리치의 호칭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원래 의미대로 쓰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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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병원에 이송될 때 사키치의 진단서에는 질병이라는 표현이 없어서 사키치가 꾀병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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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파벨리치 장례 미사를 집전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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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크로아티아에서는 '우스타샤의 학살의 규모는 과장되었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학살은 없었으며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는 학살 수용소가 아닌 노동 수용소에 불과하다'는 의견과 아예 '우스타샤는 영웅이자 순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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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