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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Kurt Alois Josef Johann (Edler von) Schuschnigg 쿠르트 알로이스 요제프 요한 (에들러 폰) 슈슈니크[1] |
출신 정당 | 조국전선[2] |
출생 |
1897년
12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리프암가르트세(현 이탈리아 리바델가르다) |
사망 |
1977년
11월 18일 (향년 79세) 오스트리아 티롤 주 무터스 |
국적 | 오스트리아 / 미국 |
신장 | 183cm |
재임기간 | 1934년 8월 29일 ~ 1938년 3월 11일 |
배우자 |
베라 푸거 폰 바벤하우젠 Vera Fugger von Babenhausen (1938년~1959년) |
자녀 |
마리아 돌로레스 에들레 폰 슈슈니크 Maria Dolores Edle von Schuschnig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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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파시스트 정치인이자 학자, 독재자이다.2. 생애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접근하여 나치 독일에 대항하다가 암살된 전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연방국 총리로 취임하고 돌푸스의 정책을 계승하여 오스트리아를 노리는 나치에 맞서 연방국을 유지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탈리아가 독일과 가까워지고 외세에 의존한 독립이 파국을 맞이하자 국민투표를 통해 주권국가로서의 위치를 확인하려다가 도리어 독일을 자극하여 안슐루스를 초래하였다. 이후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오스트리아 독립 상실 후 나치에 의해 가택연금 되었다가 이후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투옥되었으나, 안슐루스 과정에서 딱히 유혈사태를 초래하지 않았으며 순순히 굴복한 데다 한때 오스트리아의 지도자였다는 점이 평가되어 최고급 대우를 받았다.[3]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된 이후로는 미국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별일없이 살다가 늘그막에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서 조용히 사망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다른 총리들과 달리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서 동정적이라서 압수당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재산을 일부 환원하고 1935년 7월 반 합스부르크 법을 헌법에서 일반법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자주 연락을 취했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모두 복벽에 반대해서 왕정복고를 위한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