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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아몬 괴트 Amon Göth|Amon Go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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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처형 직전의 아몬 괴트 | |
본명 |
아몬 레오폴트 괴트 Amon Leopold Göth |
출생 | 1908년 12월 11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사망 | 1946년 9월 13일 (향년 37세) |
폴란드 공화국 크라쿠프 몬텔루비치 교도소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93cm, 120kg |
소속 | 나치 친위대 해골부대[1] (1930 ~ 1945년)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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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계급 | 대위[2][3] |
배우자 |
올가 야나우체크 (이혼) 아나 가이거 (이혼) |
가족 |
아버지 아몬 프란츠 괴트 어머니 베르타 괴트 딸 모니카 헤르트비히 외손녀 예니퍼 티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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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친위대 소위(하급돌격지도자) 시절의 아몬 괴트 |
2. 생애
1908년 빈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고 괴트의 부모는 도서들을 판매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괴트의 부모는 주로 종교 서적이나 군사 서적들을 판매했는데 그 군사 서적들이 괴트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준 듯하다.괴트는 어렸을 때부터 불성실한 학생이었다. 사립초등학교에서 괴트는 학업성취도가 바닥을 기었고, 교칙이 엄격한 가톨릭 기숙학교로 전학했는데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괴트는 통제되고 규칙적인 생활을 싫어했으며 가학적인 농담도 즐겨했다고 한다. 즉,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것이다. 결국 괴트는 학업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서점에서 조수로 일하였다.
17세에 괴트는 나치즘에 심취했고 반유대주의를 진지하게 신봉했다고 한다. 그는 1931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을 한 뒤 오스트리아 슈츠슈타펠[4]에도 자원해 입대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주로 밀수업에 종사했지만 오스트리아 사법 당국의 추적을 받았다. 결국 그는 1933년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무죄 혐의로 풀려나왔다. 괴트는 부모의 권유로 한동안 슈츠슈타펠에서 활동하기를 그만두고 부모의 서점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1936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결혼마저 무산되면서 괴트는 서점 생활에 신물을 내었다. 괴트는 다시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고 끝내 1937년, 도서 판매를 중단하고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했다.
1938년, 안슐루스가 발생하자 괴트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 슈츠슈타펠에 재배치되었고 같은 해 결혼하였다.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가 독일에 의해 점령되자, 1940년에 그는 폴란드의 도시 치에신(독일명 테셴)에서 비전투 행정업무를 했다. 당시만 해도 그의 일은 농장의 말과 가축들을 돌보기 정도였다. 얼마 안 가 그는 카토비체의 사무실[5]로 재배치되어 재무관리를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괴트는 성실하고 유능한 행정관료였다. 1941년에는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친위대 상사(상급반지도자)로 승진했고 같은 해에는 친위대 소위(하급돌격지도자)로 쾌속 진급하였다.
1942년에는 루블린 총독부의 수장 오딜로 글로보츠닉의 부관이 되었다. 괴트는 주로 강제 노동 수용소의 건설 감독을 맡거나 유대인의 이송 업무에 종사했다. 괴트는 이때부터 부정부패에 물이 들어 수많은 뇌물 수수를 하였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괴트는 직접적인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1943년부터 크라쿠프의 도살자로 각성했다.
2.1. 크라쿠프의 도살자
1943년 2월 11일에 괴트는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았다. 그의 임무는 80제곱미터의 크라쿠프 - 프와슈프 집단수용소 건설을 감독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했다. 괴트는 한 달만에 완공된 이 수용소의 소장으로 배정받았다. 크라쿠프 - 프와슈프 집단수용소의 목적은 인근의 게토에서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수용하는 것이었고, 괴트는 게토 청산 임무를 맡고 본격적인 잔악행위에 가담했다.유대인 소녀 두 명이 탈출하자 괴트는 자신의 권총으로 카포 두 명을 총살했고, 탈출했다가 붙잡힌 유대인 소녀들은 괴트가 보는 앞에서 교수형을 당했다.[6] 크라쿠프 게토 청산과정에서 단 이틀 만에 유대인 1천 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괴트의 부하들은 유대인 여성들을 강간하면서 그들을 모독했다.
크라쿠프 강제수용소의 소장이 된 괴트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너희들의 신이다."라며 헛소리를 지껄어댔으나, 강제수용소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던 괴트에게 반발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다른 지역의 게토를 청산할 때는 30 ~ 90명에 달하는 어린이와 여성을 개인적으로 총살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유대인들도 기차에 태워져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대부분이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후 셰브니(Szebnie) 강제 수용소의 청산을 명령받은 괴트는 요제프 그르지멕에게 이 명령을 위임했으며, 자신은 한스 캘러만을 도와 유대인 대량학살에 협조했다. 1943년 9월 21일부터 1944년 2월 3일 사이에 청산은 거의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1천 명이 인근 숲으로 끌려가 총살당했으고, 나머지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지자마자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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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와슈프 수용소장 당시 아몬 괴트의 모습 |
1944년 5월 초, 1만 명이 넘는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프와슈프 강제수용소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괴트는 새로 들어올 유대인들을 위해 5월 14일, 수용소에 존재하는 모든 어린이들을 유치원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5월 15일 괴트는 극소수의 유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그의 인간 도살이 시작되는 시점도 이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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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a survivor I can tell you that we are all traumatized people. Never would I, never, believe that any human being would be capable of such horror, of such atrocities. When we saw him from a distance, everybody was hiding, in latrines, wherever they could hide. I can't tell you how people feared him.
생존자로서 저는 우리 모두가 외상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인간이라도 그러한 공포와 잔학 행위를 할 수 있을거라고 결코,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숨을 곳이라면 어디든지 숨었습니다. 그게 심지어 변소라고 해도 말이죠.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두려워했는지는 감히 말할 수조차 없을겁니다.
헬렌 조나스 로렌츠바이그 (Helen Jonas Rosenzweig)
크라쿠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몬 괴트는 살인에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괴트는 매일같이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는데, 자신의 군견인 롤프와 랄프에게 사람을 찢어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고, 유대인들이 조금만 느리게 움직이거나 앉아있는 모습을 본 순간 저격총으로 쏴 죽였다고 한다.[7] 심지어는 스프가 짜다는 이유로 유대인 요리사를 총살했으며, 자신의 두 하녀에게도 심각한 폭행을 저질렀다. 이 외에도 단순히 자신보다 키가 커서 앞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쏴 죽인 다음 시체에 소변을 누는 짓은 일상이었고, 설사에 걸린 유대인 소년에게 배설물을 모두 먹어치울 것을 명령한 뒤 재미가 없어지자 죽여버렸다고 한다.생존자로서 저는 우리 모두가 외상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인간이라도 그러한 공포와 잔학 행위를 할 수 있을거라고 결코,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숨을 곳이라면 어디든지 숨었습니다. 그게 심지어 변소라고 해도 말이죠.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두려워했는지는 감히 말할 수조차 없을겁니다.
헬렌 조나스 로렌츠바이그 (Helen Jonas Rosenzweig)
이뿐만 아니라 한 구성원이 탈주하거나 위반을 저지를 경우에는 팀 전체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작업반의 모든 두 번째 구성원을 총살했다. 거기다가 탈주한 유대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작업반을 불러다가 줄을 세운 뒤 랜덤으로 쏴 죽였다. 한번은 이런 방식으로 25명을 총살했는데,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총합 8천~1만 2천 명을 죽였다고 한다.
괴트의 가혹한 행위를 그의 부하들도 감당해야만 했다. 괴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들을 상대로 폭언을 퍼붓거다 구타했고,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 SS 군사재판에 회부시켰다. 이 때문에 괴트의 부하들도 겉으론 괴트에게 아부와 아첨을 떨면서도 속으론 그를 혐오했을 지경이었다.
2.2. 체포 및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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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 괴트의 처형 영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에 보면 처음 두 번은 밧줄이 끊어져서 실패했고 세번째에서야 제대로 집행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인 Bloody Tales에 나온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영상은 괴트가 아니고 루트비히 피셔(Ludwig Fischer)라는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라고 한다. 이쪽 또한 괴트처럼 나치 전범이였고 전후에 폴란드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보니 혼동된 모양이다.
그런데 2015년, 아몬 괴트의 외손녀인 예니퍼 티에게(Jennifer Teege, 1970년생)가 쓴 책이 출판되었다. 제목은 <My Grandfather would have shot me>(내 할아버지는 날 총으로 쐈을 것이다). 왜 제목이 이런고 하지 티에게가 흑백혼혈로, 아버지가 나이지리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나치당 기준에서 열등인종으로 분류되어 절멸수용소에 끌려갔을 것이라는 의미. 이 외손녀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 연유가 드라마틱하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여기서 자신이 쉰들러 리스트에도 나온 그 나치 장교의 외손녀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티에게는 이전에 이런 집안의 연유를 모르고 이스라엘에서 살면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텔아비브에서 살면서 바로 쉰들러 리스트를 TV를 통해 재미있게 보았는데, 그 악랄한 수용소장이 내 할아버지일지 꿈에도 몰랐다고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와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여하튼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이 책은 뉴욕 타임즈 선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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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와 술, 돈을 매우 좋아했으며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 120kg에 달하는 비만 환자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찍힌 사진들을 보면 뱃살이 많다. 머그샷을 찍을 시점에서는 살이 조금 빠진 상태로, 턱살이 사라지고 얼굴도 반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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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자신의 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아몬 괴트 |
-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개인사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 두 번 결혼해서 자녀가 있었으며 현재도 자손들이 남아있다. 1939년에 첫 아들이 불분명한 병으로 죽는 비극을 겪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더는 쉰들러의 비서로 일하다가 1942년 괴트와 처음 만나 1943년부터 2년 간 동거했고, 정실부인인 아나 괴트[8]가 남편과 이레네 칼더와의 관계를 알게 된 후에 아몬 괴트는 이혼 당했다. 아몬과 칼더 사이에서 낳은 마지막 아이인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 1945년생)는 아직도 생존 중이며, 2002년 <Ich muß doch meinen Vater lieben, oder?>(그럼에도 아버지를 사랑해야겠죠?)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9] 위에 소개된 예니퍼 티에게가 모니카의 딸이다. 티에게는 어린 시절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생모인 헤르트비히와 떨어져 지냈기에 가족사를 늦게 알았다고 한다.
- 괴트의 정부인 루트 이레네 칼더는 '괴트가 전쟁영웅이며 연합국에게 희생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고 자신이 사람들을 도와야 했었다고 "쉰들러"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와 인터뷰를 가진 직후인 1983년 자살했다고 한다. 다만 칼더는 생전에 자신은 수용소에 가본 적도 없고 괴트의 범죄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택도 없는 개소리일 것이다. 괴트와 칼더가 데이트를 하는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데, 주위에 경비부대원이 있는 감시탑 등의 시설물이 대놓고 보인다.
[1]
SS-Totenkopfverbände. 강제수용소의 경비와 운영을 담당하는 친위대 산하 부대이다. 해골부대 출신 인원들을 차출해서 창설한
무장친위대 부대가 바로
제3SS기갑사단이었다.
[2]
독일 국방군의 대위에 대응. 미군에서는
중위의 계급이다.
[3]
생전에 찍힌 그의 계급장은 명백히 대위의 것으로,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아예 2계급 특진 전인 소위의 계급장을 달고 있다. 다만 유대인 처리에 뛰어난 두각을 보여서 소령 후보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4]
명목상으론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사병조직이었지만 이미
하인리히 힘러가 통제권을 행사하던, 사실상 독일 슈츠슈타펠의 2중대나 다름없었다. 이후
안슐루스가 발생하자 당연히 독일 슈츠슈타펠로 편입되었다.
[5]
독일인의 재정착에 관한 업무를 보는 사무실이었다고 한다.
[6]
괴트는 유대인을 처형할 때마다 독일의 가수 루디 슈리케(Rudi Schurike)의 음악을 들었는데, 수감자들은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7]
그는 아침마다 발코니에 나와서 유대인들을 저격총으로 쏴죽였는데, 본인은 유대인을 죽이지 않고는 아침 식사가 넘어가지 않는다고 지껄였다.
[8]
Anna Göth, 결혼 이전의 성은 Geiger이며, 1938년에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영문위키에서는 아나 괴트를 두 번째 아내라고 서술해놨지만, 아닐 가능성이 높다. 독문위키에는 그녀가 이미 1938년 아몬 괴트와 결혼해 세 자녀(1939년생, 1940년생, 1941년생)를 낳았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이레네 칼더는 아몬 괴트와 1942년에 처음 만났다.
[9]
유튜브에는 헤르트비히가 영어로 인터뷰하는 영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