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05:23:12

도조 히데키 자살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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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자살을 준비하는 도조3.2. 체포와 자살 시도3.3. 반응과 결과
4. 음모론5. 참고 문헌

1. 개요

1945년 9월 태평양 전쟁의 핵심 전범 도조 히데키 일본 내각총리대신 권총 자살을 기도한 사건. 하지만 뜻과는 달리 목숨을 건져 전범으로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2. 배경

일본에는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는 할복해 책임을 진다는 개념이 중세부터 정착해 있었다. 따라서 1945년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후 고관대작과 장성 상당수가 자결했다. 그해 8월 15일 하시다 구니히코 문부대신, 시노즈카 요시오 군사참의관,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 등이 목숨을 끊었고 우가키 마토메 제독 카미카제를 감행했다. 일본 국민들은 이런 소식을 듣고 전시수상이었던 도조에게도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고 목숨을 끊으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좌관급 장교가 귀국 후 도조를 예방하여 패전 책임을 지고 자결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도조는 미군의 향후 행보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편이 나으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거부했다. 9월 초에 항공기술자로 일하던 차남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일가족이 다 같이 자살하자고 권했지만 도조는 젊은이들은 향후 조국의 재건을 위해 일해야 하니 죽어선 안 되고 3년 후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 죽으라고 만류한 뒤 자신도 자살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도조는 독일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자신이 전범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8월 30일에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 도착하고 9월 2일 미합중국 해군 전함 USS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시행되었다. 맥아더가 나타난 후 일본 국민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도조를 저주하며 빨리 죽으라고 비난했다. 당시 도조의 집에는 투서가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투서에서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일본인들은 도조의 세 자식 중 누구도 죽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꼬집으며 도조가 권력을 써서 아들들을 살린 것이 틀림없다고 타매했다.

도조는 이러한 주장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도조의 장남 만주국 경찰로 일했고 차남은 항공기 기술자라서 징병 대상이 아니었으며 삼남은 육사 생도였기 때문에 도조가 빽을 써서 아들들을 살렸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연합군이 점령작업을 시작하자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이 도조에게 조만간 연합군이 전범들을 체포할 텐데 도조는 그 명단 첫 머리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도조는 무솔리니의 참혹한 죽음을 떠올리고 만약 연합군이 자신을 일반 범죄자처럼 체포한다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전진훈>에 따라 죽겠다고 결심했다.

3. 전개

3.1. 자살을 준비하는 도조

체포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도조는 저널리스트 도쿠토미 이이치로(德富猪一郞)[1]에게 첨삭을 받으며 9월 10일자로 '내각총리대신 전관예우 육군대장 종2위 훈1등 공2급 도조 히데키'의 명의로 비밀리에 유서를 작성했다. 유서는 <영미인에게 고함>, <일본 동포 국민 제군>, <일본 청년 제군에게 고함> 등 총 3통으로 분량은 각각 4백여 자 남짓했다. 도조의 유서는 5개 항목으로 나뉘는데 1항은 덴노에 대한 사죄, 2항은 개전 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이 때문에 자결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전쟁 책임을 영미에 돌리고 일본은 신국이라 불멸하리라고 적었다. 훗날 법학자 가이노 미치타카(戒能通孝)는 유서의 내용을 두고 '도조식 무책임론의 정수'라고 비판했다.

도조는 이웃집의 의사를 찾아가서 심장의 위치를 물은 후 먹으로 그 위에 동그라미를 그린 뒤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동그라미를 다시 그리며 그 위치를 확인했다. 도조가 자살을 준비한다는 소문은 곧 육군성에도 퍼졌다. 어떤 이들은 도조는 당연히 자살해야 한다고 환영했지만 참모본부와 육군성의 고위장교들은 전쟁의 책임을 모조리 도조에게 씌워 최소한 쇼와 덴노만은 살리려 했으므로 강하게 반대했다. 9월 10일 시모무라 사다무 육군대신이 육군대신 관저 귀빈실로 도조를 불러 자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군사재판에서는 전쟁 책임의 소재를 추궁할 건데 그것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분은 각하밖에 없습니다. 아니, 각하께서 안 계시면 심리도 대단히 불리해질 것입니다.
도조가 대답하지 못하자 시모무라는 재차 독촉했다.
만일 폐하께 누를 끼쳐드리는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도조는 '포로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라.'고 했던 전진훈이 자기 마음 속에서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시모무라가 재차 자살하면 안 된다고 하자 도조는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는 대신관저를 떠났다. 이날 미국인 기자 2명이 집에 돌아온 도조에게 취재를 요청했지만 도조는 패장은 할말이 없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물러나지 않고 도조의 집 마당에 진을 치자 마지못해 인터뷰에 응했다. 당시 도조는 일본의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도조는 기자들의 생각과 달리 유들유들하게 인터뷰에 잘 대처했다. 하지만 도조는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천 년이 지난 후에는 연합군과는 다른 판단이 내려질지도 모른다는 정도로만 답했을 뿐 자신이 유서에 적은 도발적인 귀축영미 책임론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저널리스트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소심하고 쇠약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촌평했다.

한편 맥아더는 도조 히데키를 필두로 도고 시게노리, 히로타 고키, 시마다 시게타로, 고노에 후미마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등 문관, 황족, 군인들을 포함한 A급 전범 용의자 103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미국은 핵심 전범으로 도조를 지목했으므로 체포목록 1호는 당연히 도조였다.

3.2. 체포와 자살 시도

9월 11일 도조는 늘 하던 대로 5시에 일어났다. 그날 前 53군 사령관 아카시바 야에조와 핀란드 공사관 주재무관 오노우치 히로시가 도조를 찾아오자 이들을 대접하면서 궁성사건 중 자살한 사위 고가 히데마사 육군 소좌에 대해 이야기한 후 돌려보냈다. 아카시바와 오노우치를 배웅하다가 미국인 기자들이 집 근처에 또 몰려왔음을 눈치채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도조는 아내 가쓰와 다른 하녀를 친척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호위병 하타케야마 시게토와 함께 집에 남았다. 오후 1시가 되어 지프차들이 도조의 집을 포위하더니 미합중국 육군 군사경찰 30명이 나타나 마당을 배회하면서 집 내부를 감시했다. 이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보고 도조는 극도로 긴장하여 저들이 자신을 사살하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다. 도조는 사살당하느니 먼저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유언장과 권총 두 자루, 단검 하나를 꺼내고 응접실 구석에 육군 대장 견장 훈장 6개가 부착된 군복을 접어 놓고 옆에 군도 세자루를 세워 놓았다. 권총 중 한 자루는 .32 ACP 탄을 쓰는 콜트 M1903이었고 사위 고가 히데마사 소좌의 유품이었다.[2] 나머지 한 자루는 도조 자신의 것으로, .25구경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 4시, 미군 지프 2대가 현관 앞에 서더니 미 육군 군사경찰 수 명이 내려 미리 와 있던 군사경찰들을 지휘하여 현관과 응접실을 포위했다. 당시 군사경찰들의 지휘관이었던 폴 크라우스 육군 군사경찰 중령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를 듣고 도조는 권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반팔 셔츠에 승마바지 차림으로 창문을 열고 체포영장을 가지고 왔냐고 물었다. 군사경찰이 영장을 보여주자 도조는 문을 열겠다고 하고 도로 들어갔다. 원래 도조는 군복 차림으로 죽을 생각이었으나 군사경찰들이 독촉하자 군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 소파에 앉아 오른손에 콜트 M1903 권총[3]을 쥐고 셔츠 사이로 심장에 그려놓은 동그라미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쏜 데다[4] 발사 순간 총이 들리는 바람에 총알이 도조의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늑골을 뚫고 들어가 심장에서 약간 빗겨나갔다.
파일:Tojo_suicide.jpg
자살 시도 후 치료를 받는 도조
한편 바깥의 군사경찰들은 총성이 들리자 도조가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여겨 총탄 수 발을 발사하며 응사했지만 다른 총알이 날아오지 않자 현관문을 뚫고 응접실 문을 부수어 들어갔다. 도조는 총에 맞아 안락의자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헐떡이며 권총을 쥔 채였는데 군사경찰들이 들이닥치자 겨누었으나 크라우스 중령이 쏘지 말라고 하자 권총을 떨어뜨렸다. 이때 아사히 신문 기자 하세가와 유키오가 외국인 기자들을 도조의 집에 안내하려다가 군사경찰들을 따라 도조의 응접실로 따라 들어왔다.[5] 도조가 미군에게 응급처치를 받던 중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미국인 기자가 하세가와에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세가와는 도조의 입에 귀를 대고 잠시 도조의 말을 경청했는데 하세가와는 그 말을 "한방에 죽고 싶었다."고 알아듣고 그렇게 옮겼다. 문예춘추 1956년 8월호에 실린 하세가와의 글에 따르면 도조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한 방에 죽고 싶었다. 시간이 걸린 것이 유감이다. (...) 대동아전쟁은 정당한 싸움이었다. 국민과 대동아 민족에게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법정에 선 전승자 앞에서 재판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정당한 비판을 기다리겠다. 할복을 생각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실수할 수가 있다. 천황폐하 만세! 몸은 비록 죽더라도 호국의 귀신이 되어 최후를 마치고 싶다. 시체는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구경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맥아더에게 전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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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의 말을 듣는 하세가와 기자
미 육군들은 도조를 살리기 위해 가까이 있는 에바라 병원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도조의 자살을 돕고자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응급처치를 거부했다. 맥아더는 도조가 자살하려 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미국인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하게 했다. 도조는 요코하마 혼모쿠의 소학교 강당을 개조해서 만든 미 육군 가설병원에 옮겨졌다. 도조를 살리기 위해 미 육군 병사 피를 수혈하고 9월 11일 심야에 이르러 도조의 용태를 정확히 진단했다. 그 와중에도 도조는 유동식을 거부하며 계속 저항했다.

한편 도조가 자살에 실패한 뒤 연합군 사령부가 유서를 입수했지만 외부에는 '재판을 거부하기 위해 자살한다.'는 내용이라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알리지 않았다. 도조의 유서는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6]의 국립문서관으로 직행했는데 1952년 유나이티드 프레스 기자 호프라이트가 <중앙공론>을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공개했다.
파일:external/www.japanfocus.org/9.tojo%20rescued.jpg
병원으로 이송된 도조 히데키

3.3. 반응과 결과

미수라니. 이 무슨 일인가.
중의원 사무국장 오키 미사오
일본의 체면을 구겼다. 이런 소심한 사람의 지도 아래에 있었다니.
호소카와 모리사다
생각한 바가 있어서 지금까지 자결하지 않았다면서 왜 참기 어려운 것을 참으며 연행되지 못했을까?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당황하여 자살을 하니마니하는 것일까? 그럴 바에야 조칙이 있었던 날에 자결을 했어야 옳다. 살아있는 바에야 재판에 나서서 소신을 밝혀야 했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다. 게다가 당황한 나머지 죽는 데도 실패했다. 거듭되는 치욕이다.
다카미 준, 9월 12일자 <패전일기>
일본인들은 도조의 자살 미수 소식을 듣고도 매우 냉담했다. 특히 스기야마 하지메 원수 부부가 이 사건 직후인 9월 12일에 자살했기 때문에 도조가 자살도 제대로 못 한 것은 대단한 추태로 보였다. 사람들은 무사로서의 마음가짐이 부족하다거나 연극이 틀림없다고 비웃었고 맥아더에게 도조를 사형에 처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한 가득 보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도조 히데키를 미군 군사경찰들이 독단적으로 체포하려 했음에 유감을 표하고 차후 전범의 체포는 일본 정부를 통해서 해 달라고 했다. 연합군도 일본인들을 무리하게 자극하면 자결로 이어질 수 있음을 파악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 정부는 도조에게 외무성 관료 스즈키 다다카쓰(鈴木九萬)를 파견한 것 외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스즈키가 처음 방문했을 때 도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제 8군 사령관 아일케버거 중장이 직접 병원에 와서 세심하게 보살펴주어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도조는 일본 정부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하여 스즈키가 두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죽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법정에서 소신을 말하고 전쟁책임을 지고 싶다. (...) 미군 장교는 훌륭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반면) 우리 육군에서는 병문안을 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
10월 7일 도조는 용태가 회복되어 오모리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오모리 수용소에는 이미 전범 32명이 수용 중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도조를 싸늘하게 대했고 도조도 이들을 무시했다. 그때 참모본부 총무과장 사카키바라 가즈에 대좌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저항한 혐의로 체포되어 오모리 수용소에 있었는데 도조는 사카키바라와만 교류하며 놀라운 발언을 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나를 옆에서 돌봐준 미국의 군사경찰은 참 훌륭했다. 사회의 움직임에도 상당한 견식을 갖추고 있었다.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일 터인데, 국민에게 알려서 자각을 하게 한 다음 이들을 장악하면 힘이 된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 일미 양국은 동아 안정을 확립하기 위해 마음을 열고 직접 교섭하여 화평의 길을 용감하게 모색해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도조의 각성은 너무도 늦은 것이었고 도조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1948년 처형되었다. 도조의 자살 미수는 이후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되는데 리영희도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의 사격술이 졸렬하다고 비웃었으며 심지어 극우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조차 2005년 산케이신문에 당시 미 육군 헌병 부사관이 '대장이 그런 꼬락서니라니! 뭐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손으로 막을 수 있는 콜트 22[7]로 가슴을 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쓴 글을 인용해서 기고했을 정도.

4. 음모론

사실 도조가 자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미군들이 쏜 총에 맞았다는 주장이 있다. 군인인 도조가 확실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인 관자놀이를 노리지 않고 가슴을 쏠 리가 없으므로 미군이 쏴 놓고 도조가 자살하려 했다고 거짓말했다는 주장인데.... 도조빠들의 황당무계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5. 참고 문헌

  • 타케마에 에이지, GHQ :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서울: 평사리, 2011)
  •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서울: 삼인, 2010)
  • 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서울: 페이퍼로드, 2012)
  •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파주: 글항아리, 2016)

[1] 호는 소호(蘇峰) [2] 고가 히데마사 소좌는 궁성사건에 참여했다가 할복한 뒤 이 총으로 자살했다. [3] 총번은 535330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4] 그는 왼손잡이였다. 도조 히데키 문서의 사진들을 봐도 검을 왼손으로 들거나 잡는 걸 볼 수 있다. [5] 자살 시도 직후의 사진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6]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7] .22 LR탄을 쓰는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꽤 널리 퍼져 있다. 해당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22 LR은 다른 탄에 비해 위력이 많이 떨어져서 이래저래 무시를 많이 당한다. 인용된 글도 거기에 빗대 도조에게 비아냥대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