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1 23:39:12

비르벨빈트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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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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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바람 작전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Вирбельвинд»[1]
독일어: Unternehmen Wirbelwind[2]
영어: Operation Wirbelwind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파일:회오리바람 작전.jpg
▲ 수히니치 돌출부 제거를 시도하는 제4군과 제2기갑군
날짜
1942년 8월 11일 ~ 24일
장소
소련 수히니치와 지즈드라 강 일대
원인
독일 국방군 중부 집단군이 수히니치 근방의 소련군 돌출부 제거 시도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게오르기 주코프|]]
(서부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이반 바그라먄|]]
(제16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세르게이 후댜코프|
세르게이 후댜코프
]]
(제1항공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귄터 폰 클루게|]]
(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루돌프 슈미트
(제2기갑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요제프 하르페
(제41기갑군단 사령관)
결과
소련의 승리
나치 독일의 공세 실패
전력 [[틀:깃발|]][[틀:깃발|]][[틀:깃발|]] 16군,61군
[[틀:깃발|]][[틀:깃발|]][[틀:깃발|]] 3,10전차군단
[[틀:깃발|]][[틀:깃발|]][[틀:깃발|]] 1근위기병군단
[[틀:깃발|]][[틀:깃발|]][[틀:깃발|]] 2기갑군
병력 50,000명
전차 500대
피해규모 사상자 약 40,000명
포로 12,714명[3]
전사 2,159명
실종/포로 354명
부상 9,550명

1. 개요2. 전투 서열
2.1. 독일군2.2. 소련군
3. 전개4. 결과

[clearfix]

1. 개요

회오리바람 작전은 뱌지마의 4군과 요룔의 2기갑군 사이 수히니치 근방의 소련군의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한 중부 집단군의 공세였다. 계획 단계에서는 남북의 양익에서 공세를 펼치려고 했으나 작전 개시 직전에 시작된 제1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로 인세 4군의 예비 전력이 전부 르제프로 이동하면서 2기갑군의 단일 공세가 되었다. 이 여파로 작전은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고 그나마 2기갑군이 진격하면서 생긴 코젤스크 돌출부는 곧바로 이어진 소련 서부 전선군의 코젤스크 공세로 다시 상실한다.

2. 전투 서열

2.1. 독일군[4]

  • 중부 집단군 ( 사령관 : 귄터 폰 클루게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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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련군[5]

  • 서부 전선군 ( 사령관 :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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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개

1942년 여름에 독일군의 관심은 남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타 전선의 보병사단들을 13개 대대[6]에서 9대대 규모[7]로 개편하면서 남부 집단군의 보병사단[8]들을 보충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계 전략 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따라 나머지 전선에서는 기본적으로는 방어로 일관하면서 전선 단축이 가능하다면 제한적 공세를 진행하기로 했다. 인력과 자원이 남쪽에 집중됐으므로 봄에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이 각각 데미얀스크와 르제프에서 공세를 시작해 토로페츠 돌출부를 제거하기로 한 북극 작전[9]과 가을에 18군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진행할 오로라 작전[10]은 모두 취소됐고 히틀러는 수히니치 근방의 소련군의 작은 돌출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원 계획인 허리케인 작전[11]은 돌출부 전체를 제거하고 칼루가를 거쳐 모스크바로 향하는 것이었으나 당연히 어림도 없는 계획이었고 곧 돌출부 서쪽 절반만 제거해 전선을 단축하는 회오리바람 작전[12]으로 변경됐다.

수히니치의 소련군 돌출부는 독일군의 르제프 돌출부와 오룔 돌출부[13]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소련 측에서는 서부 전선군 좌익의 50군, 10군, 16군, 61군이, 독일 측에서는 4군과 2기갑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돌출부 제거를 위한 공세는 북쪽의 4군은 8월 7일에, 남쪽의 2기갑군은 8월 9일에 시작해 전형적인 포위전을 펼칠 예정이었으며 이를 위해 8개의 기갑사단이 배치되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이 모이게 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7월 30일에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제1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를 시작하면서 중부 집단군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9군은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두 모았으나 소련군을 막을 수 없다고 보고했고 르제프를 뺏기는 것은 중부 집단군 전체에 재앙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급한대로 4군에서 3개의 기갑사단과 2개의 보병사단을 차출해 르제프 돌출부 남쪽에서의 반격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에 따라 4군의 공격그룹은 7개 사단에서 2개 사단으로 줄어 수히니치 돌출부 북쪽에서는 사실상 공세가 불가능해졌으나 히틀러는 여전히 양익에서의 공세를 명했고 결국 클루게는 4군은 16km, 2기갑군은 최대 100km를 진격해 모살스크에서 만나는 계획을 수립했다.

따라서 공세는 사실상 5개 기갑사단[14]을 보유한 2기갑군의 단독 공세가 되었다. 공세 예정일은 8월 9일이었으나 비로 인해 11일에 시작했다. 원 계획보다 2기갑군이 진격해야 할 거리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슈미트는 작전을 2단계로 나눠 진행하기로 했는데 1단계는 울리야노보[15]의 동쪽과 서쪽에서 출발한 부대들이 약 25km를 진격해 수히니치에서 남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지즈드라 강에 모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4개 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이 집결했고 11일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첫 날에는 공세가 성공적이었다. 동쪽에서 출발한 11기갑사단은 공세 시작 당일에 8km나 진격해 울리야노보에 도달했다. 그러나 둘째날이 되자 진격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서쪽에서 출발한 2개 기갑사단은 겨우 2km만 진격했으며 이 지역은 거대한 삼림지대였고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에 빠르게 대응했다. 독일 공군의 적극적인 지원 덕에 14일에는 일부 선도 부대가 지즈드라 강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긴 했으나 3일만에 독일군의 공세는 탄력을 잃고 멈춰버렸다. 같은 날, 2기갑군 사령부에 머물고 있던 클루게는 더 이상의 공세 진행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데 여전히 르제프 전선이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4군으로부터 차출했던 기갑부대들을 소련군의 공세를 막은 뒤 다시 수히니치를 향한 공세에 사용하기를 원했으나 이 부대들이 돌아오기는 커녕 4군은 13일까지 추가로 9군과 3기갑군에 지원부대를 보내야했고 담당구역을 방어할 병력도 모자란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9군에서는 추가 지원군이 없다면 르제프를 지킬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할더는 히틀러가 이 공세를 포기할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세 중단에 반대했으나 의지와 상관없이 독일군은 지즈드라 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공세 중단 대신 할더는 히틀러의 허가를 얻어 2개 사단을 중부 집단군으로 지원했다. 하나는 크림 반도를 막 점령하고 레닌그라드로 향할 예정이던 11군의 72보병사단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청색 상황 1단계를 마무리하고 로스토프에 있던 차량화보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의중과 달리 이 부대들은 당장 급한 르제프로 향했다. 물론 이 부대가 수히니치로 온다 해도 공세에는 큰 도움이 될 전력이 아니었으며 지즈드라 강 교두보에서 1주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히틀러도 22일에 공세 중단을 허가했다. 대신 남은 기갑 전력으로 돌출부 서쪽 끝의 키로프에서 훨씬 작은 규모의 공세를 하기를 원했으나 24일에 지즈드라 강 북쪽 교두보가 다시 소련군에게 넘어가고 흐지부지됐다.

4. 결과

회오리바람 작전은 1942년을 통틀어 중부 집단군이 진행한 주요 공세 중 하나였으며 2기갑군 전선에서는 유일한 공세였다. 42년 12월에 히틀러가 직접 올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회오리바람 작전이라고 할 정도로 투입된 규모 대비 성과가 거의 없었다. 물론 공세 전에 야전 사령관들의 생각처럼 애초에 계획 대비 실제 공세 부대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16] 특히 양익 포위가 아닌 단일 축선을 통한 공세가 된 점과 더불어 이 구역이 삼림 지대이고 소련군의 대응이 빨랐던 점 등이 공세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툴라 전투 이후 오랜만에 공세를 진행했던 2기갑군은 이 이후로 동부 전선에서는 방어로만 일관하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발칸 반도로 이동하게 된다. 또한 작전 마무리 직후 소련 서부 전선군은 동일한 위치에서 반대로 코젤스크 공세를 진행해 독일군을 다시 밀어내게 된다.
[1] 비르벨윈드 작전 [2] 비르벨빈트 작전 [3] 독일측 기록 [4] 8월 5일 기준 [5] 8월 1일 기준 [6] 9개 보병대대와 4개 포병대대 [7] 6개 보병대대와 3개 포병대대 [8] 여전히 13개 대대 편제를 유지했다. [9] Operation Nordpol [10] Operation Nordlicht [11] Operation Orkan [12] Operation Wirbelwind [13] 다만 1942년 8월 시점에서는 독일군이 보로네시까지 진출해 있었으므로 돌출된 전선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14] 9,11,17,19,20 [15] 위 지도에서 2기갑군의 초기 공세지역 [16] 물론 전차 500대라는 규모는 남쪽에서 대규모 전략 공세를 진행 중이던 독일 측에서는 나름 큰 맘 먹고 모은 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