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가체프-즐로빈 공세 영어: Rogachev-Zhlobin offensive 러시아어: Рогачёвско-Жлобинская операция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지도 중앙, 로가체프와 즐로빈 방면으로 진격하는 벨로루시 전선군[1] | ||
시기 | ||
1944년 2월 21일 ~ 2월 26일 | ||
장소 | ||
로가체프와 즐로빈 일대의 드네프르 강 중류 유역 | ||
원인 | ||
소련군이 드네프르 강 서안에 교두보 확보 시도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제3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세르게이 루덴코| ]] (제16항공군 사령관) |
]][[틀:깃발| ]][[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 ]]
[[틀:깃발| (제9군 사령관) |
]][[틀:깃발| ]][[틀:깃발| ]] 요제프 하르페
결과 | ||
소련군의 승리 | ||
영향 | ||
소련군이 드네프르강 서안에 교두보 확보 독일 9군의 성공적인 방어로 소련군의 공세 중단 |
||
전력 |
[[틀:깃발| 병력 232,000명 |
]][[틀:깃발| ]][[틀:깃발| ]] 3군, 48군, 50군[[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9군
피해 규모 |
전사/실종 7,164명 부상 24,113명 |
전사 691명 실종/포로 494명 부상 3,054명 |
[clearfix]
1. 개요
로가체프-즐로빈 공세는 벨로루릿 전선군이 독일 9군을 상대로 진행한 공세로 목적은 드네프르 강 서언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가능하면 2군을 고립시키고 보브루이스크-민스크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교두보 자체는 확보하기는 했으나 독일 9군은 성공적인 방어로 2군과의 연결을 유지했고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공세는 금방 중단된다. 이 공세는 벨로루시 전선군의 44년 동계 공세 중 마지막이었으며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보브루이스크 방면 공세를 시작하기까지 이 근방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다.2. 1944년 2월의 중부 전선
2월에도 북부와 남부 전선에서는 소련군이 대규모 공세를 진행중이었고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부 전선에서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943년 10월에 소즈 강의 판터 방어선에 도착한 이후로 4개월동안 제1 발트 전선군은 3기갑군을 상대로 10배에 달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드빈스크나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경계를 돌파하기는 커녕 비텝스크 탈환조차도 실패했으며 서부 전선군은 4군을 상대로 정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2] 그나마 9군과 2군을 상대로 벨로루시 전선군이 정말 조금이나마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건 남부 전선의 소련군의 엄청난 진격 덕분에 조금이나마 진격할 수 있던 것이었다.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에서 벨로루시 전선군의 좌익이 2군을 몰아내기는 했으나3. 전투 서열[3]
3.1. 소련군[4]
-
제1 벨로루시 전선군[5] ( 사령관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전선군 직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근위전차군단
- 제732대전차사단
- 제15근위전차여단
- 제16근위전차여단
- 제17근위전차여단
- 제1근위차량화소총여단
- 제1001자주포연대
- 제1296자주포연대
- 제6돌파포병사단
- 제5근위박격포사단
- 제2근위대공포사단
- 제3근위대공포사단
- 제24대공포사단
- 제68포병여단
- 제4근위대전차포병여단
- 제1대전차포병여단
- 제20대전차포병여단
- 제1근위특수공병여단
- 제2돌격공병여단
- 제8돌격공병여단
- 제57공병여단
- 제7교량여단
-
제1444자주포연대
}}} - 제10군
-
제50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28대공포사단
- 제41대전차포병여단
- 제44대전차포병여단
- 제8자주포여단
- 제233전차연대
- 제19소총군단
- 제238소총사단
- 제362소총사단
- 제46소총군단
- 제108소총사단
- 제369소총사단
- 제413소총사단
- 제80소총군단
- 제5소총사단
- 제186소총사단
- 제283소총사단
- 제121소총군단
- 제110소총사단
- 제324소총사단
- 제380소총사단
-
제3군 ( 사령관 :
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 중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12대공포사단
- 제13대공포사단
- 제40대전차포병여단
- 제36전차연대
- 제193전차연대
- 제1901자주포연대
- 제35소총군단
- 제169소총사단
- 제40소총군단
- 제129소총사단
- 제323소총사단
- 제41소총군단
- 제120근위소총사단
- 제250소총사단
- 제269소총사단
- 제348소총사단
-
제48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102소총사단
- 제197소총사단
- 제22포병사단
- 제31대공포사단
- 제44포병여단
- 제3근위대전차포병여단
- 제35근위박격포여단
- 제42전차연대
- 제231전차연대
- 제1897자주포연대
- 제25소총군단
- 제4소총사단
- 제194소총사단
- 제307소총사단
- 제29소총군단
- 제73소총사단
- 제217소총사단
- 제42소총군단
- 제137소총사단
- 제170소총사단
- 제399소총사단
- 제53소총군단
- 제17소총사단
- 제41소총사단
- 제96소총사단
- 제273소총사단
- 제65군
-
제16항공군 ( 사령관 :
세르게이 루덴코 항공중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2근위돌격항공사단
- 제299돌격항공사단
- 제234전투항공사단
- 제283전투항공사단
- 제286전투항공사단
- 제271야간폭격항공사단
- 제3폭격항공군단
- 제241폭격항공사단
- 제301폭격항공사단
- 제6혼성항공군단
- 제221야간폭격항공사단
- 제282전투항공사단
}}}
}}}
}}}
}}}
}}}
3.2. 독일군[6]
-
중부 집단군 ( 사령관 :
에른스트 부슈 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3기갑군
- 제4군
-
제9군[7] ( 사령관 : 요제프 하르페 상급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55군단
- 제20기갑사단
- 제5기갑사단
- 제35군단
- 제296보병사단
- 제707보병사단
- 제6보병사단
- 제383보병사단
- 제45보병사단
- 제41기갑군단
- 제253보병사단
- 제4기갑사단
- 제36보병사단
- 제56기갑군단
- 제134보병사단
- 제110보병사단
- 제35보병사단
- 제129보병사단
-
제2군
}}}
}}}
4. 전개
▲ 2월 20일부터 26일까지 소련군의 진격 |
소련군은 벨로루시 전선군의 중앙에 있던 3군이 공세의 주력이 되었으며 우익의 50군과 좌익의 48군, 공중에서는 16항공군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맞선 독일 9군은 2군이 남부집단군과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담당 구역이 길어진 상태였으며 북쪽부터 55군단, 35군단, 41기갑군단, 56기갑군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공세는 2월 21일에 시작됐다. 소련군은 보통 사전 포격 이후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는데 이 때는 포격과 함께 공세를 바로 시작해 강 건너 교두보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기에는 부족한 규모였다. 22일에는 3군 우익에 있던 50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23일이 되자 3군의 40소총군단과 41소총군단은 로가체프의 북동쪽과 남동쪽에서 도시에 접근했고 5군의 80소총군단은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부시는 도시 방어를 위해 예비대에서 4,5 기갑사단을, 비텝스크에서 20기갑사단과 221보안사단을 투입했으나 소련군은 24일에 로가체프(Рогачёв)[8]를 탈환했다. 25일 하루 종일 조그만 교두보들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결정적인 돌파를 이루지는 못했고 3군 사령관 고르바토프는 공세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로코솝스키는 보브루이스크를 향한 공세를 이어나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공세는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피해만 늘고 있었고 26일에 공세 중단을 승인하면서 공세가 끝났다.
5. 결과
그래도 6일간의 공세 덕분에 소련군은 만족할 만한 규모의 교두보를 드네프르 강 서안에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교두보들은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유용하게 쓰이게 된다. 이 정도 가지고는 공세 규모나 전력 격차 대비 보잘 것 없는 성과였으나 이 정도로도 어느정도의 성과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43-44 동계 전역 동안 중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공세 결과가 처참했다. 공세 도중에 벨로루시 전선군의 중앙과 우익은 전선군에 남아 제1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개칭됐고 전선군 좌익은 분리되어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우익의 일부 지원을 받아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이 되어 폴란드 남부에서 4기갑군을 향한 공세를 이어나가게 된다.독일 9군은 교두보 확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으나 북쪽의 3기갑군이나 4군과 달리 이동한 2군의 담당 구역을 인수하면서도 적은 전력으로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프리피야트 습지대 때문에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연결이 끊기기는 했으나 오히려 습지대 덕분에 2군이 전력 대비 방대한 구역을 담당할 수 있었으며 남부집단군은 포위와 괴멸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중부집단군의 선전 덕분에 독일군은 기적적으로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아냈고 이 이후로 봄동안 9군을 향한 대규모 공세는 없었다. 북쪽에서 4군이나 3기갑군을 향한 공세가 있기는 했으나 독일군이 완벽하게 방어해냈으므로 중부집단군은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때까지 전선을 유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