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1:49:21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

파일:Semi_protect2.svg   가입 후 15일이 지나야 편집 가능한 문서입니다.
(~ KST )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156b94> ▲ 11~20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주 기종 비고
21위 쿠르트 브렌틀레 독일 180대
22위 귄터 요스텐 독일 178대
23위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독일 176대
24위 에른스트-빌헬름 라이네르트 독일 174대
귄터 샤크 독일
26위 에밀 랑 독일 173대
하인츠 슈미트 독일
28위 호르스트 아데마이트 독일 166대
29위 볼프 디트리히 빌케 독일 162대
30위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 독일 158대 Bf109 서방 비행기 최다 격추
▼ 31~50위
}}}}}}}}} ||
한스요아힘 마르세이
Hans-Joachim Marseille
파일:한스 요아힘 마르세이.jpg
<colbgcolor=#968178><colcolor=#ddcb6f> 출생 1919년 12월 13일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사망 1942년 9월 30일 (향년 22세)
이집트 왕국
아버지 지크프리트 게오르크 마르틴 마르세이[1]
어머니 샤를로테 로이터[2]
누나 잉게보르크[3]
신체 키 173cm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끈질긴 시도2.3. 화려한 전성기2.4. 사망
3. 평가4. 외모5. 마르세이에 대한 언사6. 기타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2113198639_f243922346.jpg
전용 탑승기 '황색 14번' Bf 109F-4/Trop
하늘에 마르세이가 있고 땅에 롬멜이 있는 한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은 패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활약했던 루프트바페 슈퍼 에이스이다. '아프리카의 별'이라고 불리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천재 파일럿이었다. 공인 격추 수는 158대로 독일 공군 중 서방 전투기를 가장 많이 격추시켰다. 다만 주로 상대한 기종이 P-40 같은 기종이라 성능상으로는 밀리지 않는 기종들을 상대로 성과를 올렸던 아돌프 갈란트 같은 에이스들이 마르세이보다 격추 수가 적기도 했다.[4] 물론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전과인 것은 사실이다.

풀네임은 Hans-Joachim Walter Rudolf Siegfried Marseille(한스 요아힘 발터 루돌프 지크프리트 마르세이). 성을 보면 알겠지만 프랑스계 독일인이다. 그의 조상은 프랑스 위그노였으며, 박해로 인해 독일 지역으로 이주했다. Marseille는 프랑스어에서 마르세유(외래어 표기법), 마르세이유 등으로 표기하지만 마르세이는 독일인이므로 '마르세이'가 올바른 표기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새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친아버지의 성 "마르세이" 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다. 키도 작았고 이것저것 잔병이 있었으며 독감으로 죽을 뻔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안 들었는데 얼마나 자기 멋대로 였으면 담임 교사가 마르세이에게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마르세이의 친아버지는 독일 제국군의 군인이였는데 베르사유 조약로 제대하고 경찰직으로 일했다. 친아버지와는 사이가 안 좋았지만 군 입대를 한 이후로는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해는 안 가지만 아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는지(?) 마르세이를 데리고 소위 업소 여성들과 사교를 가질 수 있는 곳에 많이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2.2. 끈질긴 시도

파일:루프트바페에 입대한 마르세이.jpg
대부분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으레 그렇듯이, 마르세이 역시 하늘에 대한 동경으로 전투기 조종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8기의 격추를 기록한 마르세이는 1940년 12월 제27전투비행단에 전입해오지만 마르세이의 인사 기록을 본 중대장 노이만 중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야했다.

노이만이 받은 신병의 인사 기록은 거의 악평으로 도배가 된 수준이었고, 8기의 격추를 기록하는 동안 6번이나 탑승기를 잃어버려야 했다. 그러고도 잘만 살아서 돌아오는 등 행운 하나는 끝내줬는데, 문제는 전투가 벌어지면 혼자 닥돌하다가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판이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사막 한가운데로 쫓아버렸다는 게 진실이었다. 스물을 넘긴 나이였는데도 소위 후보생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준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면 이미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을 때였다.

하지만 노이만 중위는 마르세이가 탑승기를 잃어버린 것이 격추당해서가 아니라 기름이 다 떨어졌다는 것에 주목하고는, '대책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 수가 모자라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심정으로 마르세이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대책없는 신병은 보는 사람이 간떨어질 정도로 무모한 비행을 거듭했기에 "대체 왜 이리 죽자 살자 싸우는 건가?! 자네가 소질이 있는 건 인정하네만 그래서는 죽기에 딱 좋아! 좀 더 경험을 쌓으라고! 자네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순전히 재수가 좋아서라는 걸 잊지 말게!"라고 호통을 쳤을 정도였다.

아무튼 소위로 임관하게 된 마르세이는 어느 날 7번째로 전투기를 잃어버린다. 이번에도 기름이 모자라서 사막에 불시착해야 했는데,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우군[5]에게 구조된 뒤에 그들의 기지에 가서 내일 자대에 복귀해야 하니 차를 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일정이 맞지 않았고, 결국 마르세이는 기지 사령관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마르세이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저는 독일 공군의 소위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입니다. 오늘 연료가 떨어져서 불시착을 했는데 내일 출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걸려있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까지 복귀하지 못하면 제가 속한 편대는 출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디 차를 한 대 빌려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이 장군 또한 배포가 컸는데, 그 다음 날 아침, 제27전투비행단 조종사들은 갑자기 웬 별 달린 차가 오자 깜짝 놀랐고, 그 안에서 소식이 없던 마르세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걸어나오자 두 배로 놀랐다. 그리고 그 차 안에서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이봐, 마르세이! 내 차를 태워준 값은 받지 않을 테니 적기 50대만 격추시키게! 이건 명령이야, 나중에 나한테 결과를 보고하도록 해!
하지만 동료들은 그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는 마르세이의 배짱에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그러나...

2.3. 화려한 전성기

그러던 어느 날… 출격을 마치고 돌아온 마르세이는 절친했던 전우였던 한스아놀트 슈탈슈미트[6]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 출격부터 신들린 격추 행진이 시작된다. 한 번 출격에 3~4대를 잡고 돌아오는 마르세이의 격추 스코어는 하루가 다르게 갱신되어 갔고,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100기 격추를 돌파했다. 특히 이 100기 격추에서는 48시간 동안 7대를 잡아내면서 이룬 것이라 중대장이 본국으로 휴가를 줘서 요양을 시키기까지 했다.

이후로 마르세이가 세운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42년 9월 1일 하룻동안의 전투에서 17기 격추.
10분 동안의 전투에서 8기를 격추.
1942년 9월 첫주의 1주일간에 38기 격추.
파일:que-13195852033.jpg 파일:9475e7b0bb9ffe914ad89a905adab0b9.jpg 파일:360px-Bundesarchiv_Bild_146-2006-0122,_Hans-Joachim_Marseille.jpg
젊고, 유능한 데다 미남이기까지 한 마르세이는 단박에 독일 국민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세이에게는 '아프리카의 별'이라는 애칭과 함께 매일같이 팬레터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가면 주소지를 적지 않고 그냥 아프리카의 별이라고 써도 바로 편지가 배달될 지경이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해변에서 찍은 누드 사진.
물론 철십자 훈장을 비롯한 각종 훈장이 따라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특별한 권리도 주어졌다. 바로 자신의 기체에 개인 도색을 하는 권한이었는데 마르세이는 자신이 탑승하는 Bf109F/Trop에 자신의 번호를 황색으로 써넣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색 14번으로, 오래지 않아 황색 14번은 영국 사막 공군에게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파일:external/dimenzed.blog.bg/Bf109F-4_Gelbe14_Ma_JG27_kl96.jpg
한스요아힘 마르세이의 Bf 109F-4/Trop, '황색 14번' ― 1942년
마르세이의 활약은 에르빈 롬멜에게도 전해졌는데 항상 공군!을 외치던[7] 롬멜도 마르세이의 전과에는 대단히 흡족해했는지, 마르세이가 대위로 진급하자 마르세이를 초청해서 손수 계급장을 달아주고서는 이런 농담을 건넸다.
"축하하네, 정말 잘 싸워주었다! 우리 병사들이 그러는데, 자네가 나보다 더 인기가 많다더군!"
파일:롬멜과 마르세이.jpg
에르빈 롬멜과 악수하는 마르세이.

파일:히틀러와 마르세이.jpg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하는 마르세이.

당시 아프리카의 독일군 사이에서는 우리한테는 두 개의 별이 있다. 바로 지상의 별 롬멜과 하늘의 별 요헨이다. 그들이 있는 한 우리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마르세이의 사격 솜씨로, 어떤 전투에선 한번에 호커 허리케인 7기를 격추시켰는데 정비병이 마르세이의 기체를 점검해 보니 한 대당 모든 기총을 다 합쳐도 약 60 ~ 70발밖에 쏘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질 정도였다. 사실 마르세이가 적기를 떨어뜨리는 데에 쓴 총알이 한 대당 100발을 넘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건 꼬리를 잡는 그 순간에 방아쇠를 한 번만 당겨도 적기가 떨어진다고 봐도 될 정도. 어떤 전투에서는 혼자서 10대 가까이 되는 적기를 떨어뜨린 적도 있었다. 이쯤 되면 뉴타입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특기가 적 조종석을 노리고 엔진 후부 카울에서 콕핏까지 일직선으로 사격하는 것이었는데, 기체는 멀쩡해도 조종사를 사망시키는 악마적인 기술이었다. 109F 타입의 조준선이 몰려있는 화기 탑재구조가 이런 식의 사격에 도움을 준 것이다.

1941년 마르세이가 많은 업적을 세우고 포상으로 잠시 본가에 갔을때 사이가 좋았던 누나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듣게 되고 굉장히 괴로워했다. 그 이후로부터 힘들고 암울한 상황이 이어지는데 영국군에서 독일군 전투기보다 성능이 우수한 전투기들이 등장하게 되고, 마르세이의 전투기 성능으로는 점점 격추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158번째이자 생애 마지막 격추 대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 전투기가 바로 영국을 구한 전투기로 유명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였고, 마르세이는 그 스핏파이어를 간신히 격추시킬 수 있었다. 동료들이 주변에서 한두명씩 죽게 되고 마르세이 또한 치열한 공중전에 의해 극심한 스트레스 몽유병에 시달리게 된다.

2.4. 사망

파일:마르세이의 사망.jpg
1942년 9월 30일 새로 주어진 Bf109G/Trop[8]을 타고 387회째의 출격에 나선 마르세이는 공중전 없이 귀환하다 그의 기체에 엔진 트러블로 인해 화재가 발생한다. 불이 난 채로 필사적으로 아군 지역까지 기체를 몰고 온 마르세이는 낙하산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의 기체가 급격히 추락하면서 꼬리날개와 부딪히고는 의식을 잃은 채 그대로 땅에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향년 22세. 하넬리자라는 여성과 결혼을 3개월 앞두고 있았다. 마르세이의 죽음에 독일군의 사기는 땅바닥까지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군은 아프리카에서 박살난 채 패주하고 말았다.

파일:external/wilderness-ventures-egypt.com/V-Memorial-to-Marseille.jpg

마르세이가 죽은 자리에는 작은 피라미드 모양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위령비의 위치는 Sidi Abd El-Rahman, Markaz Al Alamein, 이집트. 구글 지도 좌표상으로는 30.8906045, 28.6957117에 위치하고 있다. 마르세이의 묘지는 토브룩의 공동 묘지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3. 평가

초반에 악평이 높고 전과가 시원찮았던 이유는 마르세이가 항공기의 비행성능을 최대한 이끌어내 적기를 격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적보다 높은 고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급강하하면서 공격을 가하는 붐앤줌 전법을 사용했지만, 마르세이의 전법은 이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스스로 자신만의 전법을 터득한 이후로는 그야말로 언터처블.

당시 영국 사막공군의 경우 성능이 딸리는 키티호크 전투기로 독일의 Bf109에 대응하기 위하여 러프베리 원형진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진형은 수평방향 선회전에서는 악마적인 방어력을 자랑하였지만, 역으로 수직방향의 에너지 파이트에는 취약함을 지니고 있었고, 독일 공군은 보통 일격이탈전법을 구사하여 하나씩 떨어뜨리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르세이는 원형진을 따라 선회하면서 강하와 상승을 반복하는 현란한 조종술( 로우요요와 하이요요등 3차원 공격 기동)을 선보이며 카운터를 치는 식으로 작전했다. 마르세이의 1회 출격마다 격추시킨 기체 수가 많은 것도 이런 원형진들을 관광 태우다 보니 발생한 부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반면 마르세이와 파트너로 출격한 조종사들은 마르세이의 공격이 시작되면 엄호는 커녕 아예 따라가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마르세이의 원맨쇼가 시작되면 그냥 하늘 위로 올라가 상공에서 선회하면서 관람했을 정도. 이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르세이의 격추 기록에 의문을 제시하지만 그때마다 동료 조종사들의 적절한 증언들이 튀어나오면서 입을 다물게 만드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사실 마르세이의 격추 수가 뻥튀기 됐다는 주장은 현재도 간간이 나오고 있다. 영국 최고의 에이스였던 제임스 에드가 존슨이 영국 공군의 손실 자료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전투기 파일럿 중에서 가장 걸출한 격추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독일 에이스의 기록을 자세히 조사해보았다.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그가 최대의 전과를 거둔 날은 1942년 9월 1일로 그는 이날 17대를 격파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8대는 단 10분간의 교전에서 격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RAF 보고서에는 이날 모두 합쳐 11대를 잃었을 뿐이고, 그중에서도 2대는 그 조종사가 언급하지도 않은 호커 허리케인이었다. 그나마 우리측 손해의 일부는 그의 전투기가 출격하기도 전에 입은 피해였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다만, 기억할 점은 이 러프베리 원형진은 독일군도 매우 잘 써먹었다는 것이다. 북아프리카 영국군의 경우 성능이 딸리는 P-40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지만, 독일군도 동부 전선이나 대전 후반 서부 전선에서 고성능 미군기들에 대항해 잘 써먹었기에, 제아무리 성능 떨어지는 P-40이었다지만 독일군에게 있어서 공략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마르세이는 여기에 돌진해 이 원형진을 분쇄하고 다녔던으니 동료들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사지에 먼저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 편하게 해주는데 누가 싫어할까.

그리고 마르세이의 전법을 묘사한 사료를 보면 무작정 저고도, 저 에너지 상태로 원형진에 접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단 고도를 높힌 뒤, 원형진보다 높은 고도에서 강하하며 첫 타를 때리는 것으로 쇼가 시작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건 매우 정석적인 움직임이다.[9] 다만, 다른 조종사들은 한번 기총 소사를 하고 상승하여 안전하게 사라져 버리는 길을 택했지만, 이 사람은 하이-요요, 로우-요요를 응용한 턴을 하면서 원형진을 탈탈 털어먹은 후에야 이탈한 것. 즉, 적기를 리드 퍼슛(적기보다 더 작은 원을 그리는 것) 하면서 선회전을 벌인 게 아니고, 에너지를 축적해두고 우월한 속도와 고도를 조종술과 사기적인 사격술로 극대화 시키며 무쌍을 벌였던 것이다.

종합하자면, 노력하는 천재라고 보면 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마르세이가 자신의 전술을 확립할 때까지 겪은 고생은 엄청나다. 보통 사람은 1~2번 격추되면 그걸로 포기하고 정석적인 전술로 돌아가는데, 마르세이는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자신만의 전술을 확립한 것이다.

하지만 마르세이가 구사한 전술은 본질적으로는 창안자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10]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따라할 수 없으므로 마르세이가 창안한 전술이 새로운 교범이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놀라운 천재성과 탁월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법의 시조가 될 수는 없었으므로 이 점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마르세이가 사고로 요절하는 바람에 전술을 보완할 시간도 없었지만.

4. 외모

마르세이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거기에 붙임성이 좋은 마르세이는 동료들에게 장난을 치길 좋아했고 활발한 행동으로 주변을 즐겁게 하는 분위기 메이커에 유능하고 얼굴도 잘생긴 그야말로 엄친아. 나치 독일이 우수하고 우월하다고 선전해 온 아리아인 혈통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좋은 선전거리이기도 했다. 정작 집안은 순수 게르만이 아니고 위로 올라가면 프랑스계 출신

어렸을 때는 키가 작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키는 173cm로 당시 나치 독일 남성의 평균키(173cm)와 같았다. 키가 큰 건 아니지만 작은 것도 아니다. 단지 요아힘 파이퍼(178cm), 헤르만 페겔라인(175cm), 하디 크루거(178cm), 막스 뷘셰(183cm), 오토 귄셰(199cm) 등 다른 독일군 미남들의 키가 더 커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 뿐이다.

5. 마르세이에 대한 언사

"유부녀와 유명인까지 포함한 마르세이의 여성편력 리스트는 당혹 그 자체였지만, 마르세이의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성공은 모든 반대의견을 잠재웠다."
무장친위대 중장 겸 경찰 중장 한스 바우어.[11]
"마르세이는 대단히 잘생겼고, 모든 여자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에게 미쳐버리는 것은 매우 쉬웠다."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
"마르세이는 입을 열기 전까지는 모든 독일 청소년들의 훌륭한 롤모델이었다."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아르투어 악스만.
"그의 죽음은 JG 27의 동료들에게는 씁쓸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우리들에게는 축복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영국 공군 파일럿 론 컨디.
"만약 마르세이가 평균적으로 출격당 3번의 격추수를 올렸다면. 그가 하르트만 이상의 에이스가 될 수 있었을지도.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독일 연방군 공군 중장 하네스 트라우트롭트,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
"내가 배운 것과 아는 것에 기초해 말하자면, 마르세이가 만약 우연히 아우슈비츠에 대해 알았더라면 그게 그의 태도를 바꾼 것일 수도 있다."
무장친위대 대장 카를 볼프.
"비행 중의 마르세이를 보는 것은 위험한 공중 곡예를 보는것 같았다. 그는 12세 소년처럼 보였고, 종종 그렇게 행동하기도 했다."
독일 국방군 공군 소령 베르너 슈뢰어, 제27전투비행단,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
"마르세이는 아마도 독일공군이 가졌던 최고의 파일럿일 것이다. 그의 기록은 오직 그의 미숙하고 프로답지 않은 태도에 의해서만 폄하되었다."
독일 국방군 공군 대령 하요 헤르만,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 수훈.
"마르세이는 아마도 루프트바페에서 제일 편차사격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며, 우리는 모두 그의 성공을 들어 알고 있었다."
독일 연방군 공군 중장 귄터 랄,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 수훈, 275기 격추.
"대단한 격추 경쟁이 있었고, 마르세이는 그가 우리를 모두 발라버릴 수 있음을 자랑했다."
독일 연방군 공군 준장 구스타프 뢰델, 제27전투비행단, 곡엽 기사철십자훈장 수훈, 98기 격추.
"마르세이는 사람을 죽였을 때 종종 울었으나 계속해서 그의 할 일을 해나갔다. 그는 전쟁을 하기엔 너무 예민하고 감성적이었다."
독일 국방군 공군 중사 프란츠 엘레스, 5기 격추.
"마르세이는 당신이 만나길 기대하는, 그러나 내적으로는 두려워할 종류의 파일럿일 것이다. 그는 정말로 대단했다."
미합중국 공군 준장 로빈 올즈, 공군 십자훈장, 은성 훈장 수훈.
"마르세이의 임무 미이행과 불복종에 대한 수많은 벌이 쌓였고, 나는 엄청난 서류 양에 충격을 받았다."
독일 국방군 공군 대령 쿠르트 일레펠트,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우리 모두 그를 사랑했다."
독일 국방군 공군 대위 프란츠 스티글러, 27기 격추.
"나는 제1중대와 황색 14번을 볼 때면, 내 부하들은 괜찮을 것임을 알아차리곤 했다."
독일 연방군 공군 소장 쿠르트 쿠르마이,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

6. 기타

  • 마르세이가 얼마나 자기 멋대로였는지에 대한 일화로, 공중전 도중 갑자기 무리를 이탈하여 농가에 불시착해 배변을 보고 다시 전투기를 타고 날아가버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농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웬 비행기가 갑자기 우리 농장에 왔다. 굉장히 큰 소음이었기에 놀랐다. 그 안에서 군인이 굉장히 똥마려워하는 표정으로 내리더니 정말로 똥싸고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 마르세이의 여성 편력이 얼마나 난잡했으면 거의 아프리카로 쫓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성 편력 리스트로 독일군 장교의 딸, 독일군 대령의 아내, 헝가리 백작의 아내, 영화배우, 가수 등이 있었고, 동료들에게 본인의 입으로 잠자리가 어땠는지에 대해 얘기할 정도였다고 하니 문제가 될 만도 했다.
  • 마르세이가 바람둥이로 유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르세이의 약혼녀 하넬리자(1906 ~ 1987)에 대해 궁금해했다. 하넬리자는 베를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마르세이보다 13살 연상이다. 하넬리자는 마르세이를 잘 돌봐주었고 마르세이 또한 하넬리자를 유독 아꼈다고 한다.
  • 처음으로 적기를 격추했을 때 기뻐하기보다는 죽은 적군의 어머니에게 미안해 하는 마음을 담은 내용으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 자신에게 격추되어 불시착한 전투기에 다가가서 적군의 다친 곳을 메모로 남겨주기도 하였으며, 상관으로부터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며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 마르세이의 활동은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몰랐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고국으로 가길 꺼려 어머니를 뵈러 갈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머물렀다.
  • 마르세이는 독일군으로서 활약은 대단했지만 나치당과는 거리를 두었다.[12]
  • 마르세이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최후가 좋지 않았다. 친누나는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했고, 친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에 참전해서 소장으로 복무하던 중에 빨치산에게 살해당했다.
  • 뛰어난 능력, 외모, 인간성에 비해 마르세이의 죽음이 워낙 허무해서인지 그의 영상이 담긴 유튜브 등의 댓글들을 보면 마르세이를 그리워하는 댓글들이 수두룩하며[13], 요아힘 파이퍼, 헤르만 페겔라인, 요아힘 셰프케, 하디 크루거, 막스 뷘셰, 오토 귄셰 등 다른 독일군의 미남들과 함께 시대를 잘못 태어난 미남이라 평가받는다.
  • 슈타인호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40년 영불해협에서 JG52 슈타펠4의 지휘관을 할 때 LG2에서 헤르베르트 일러펠트가 요하임 마르세이를 전출보낸 걸 받고 처음에 7기 격추에 비행시간 많은 애 보내준다길래 웬일로 신참 안보내냐고 좋다고 받아서 근무기록을 넘겨 받았는데 복무기간이나 기록에 비해 진급이 늦네?라고 생각하고는 훑어봤더니 그 끝에 부록으로 거의 전화번호부 분량의, 상상가능한 모든 종류의 범죄기록들[14]과 거기에 따른 징계기록이 딸려있었다고 한다.
    • 처음 마르세이가 도착했을 떼는 전입일자보다 늦게 술에 취해 도착한 주제에 너무 해맑게 어려보여서 웬 잼민이가 왔나 했었다고도 한다. 기가 막혀서 친구인 일러펠트한테 전화해서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었냐고 물었다고... 부대에 와서도 맨날 복장 불량에 경례도 잘 안하고 취해서 복귀 늦고, 자주 편대장차 훔쳐서 마을로 술 마시러 가고, 취한 놈을 방에 가둬놨더니 창문넘어 도망가서 또 술마시고, 마을에서 술먹고 뻗어 같이 취한 헐벗은 프랑스 아가씨들이 전날 훔쳐갔던 슈타인호프 차에 싣고 운전해서 나타난 일도 있었다고 했다. 웃기는 점은 오만 문제들을 다 일으키고는 절대 거짓말과 변명은 안하고 다 자기가 했다고 인정했었다고. 참 쫓아내고 싶었지만 전쟁중이라 사람이 모자라고 비행기를 워낙 잘 몰아 어쩔수 없이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 다른 에피소드로는 어느 날 굉장히 무섭게 생긴 나이 든 게슈타포 대령이 근처 공군기지들을 돌면서 마르세이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하며 이렇게 생긴 얘 없냐고 묻고 다니는 것이 수상해 살살 달래서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독일서 아빠 만나러 온 자기 대학생딸이 이 놈하고 바람나서 가출했다고 설명을 받았는데 다름아닌 마을에서 술 먹고 뻗은 마르세이를 슈타인호프차에 싣고 운전해서 데려다 줬던 그 헐벗은 아가씨들 중 하나였었다. 그래서 보호하겠다고 바로 아프리카로 보내버린 거라고.

7. 대중매체에서



[1] 1887 ~ 1944,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독일 국방군 육군으로 복무했으며, 1944년 빨치산에게 살해당했다. 최종 계급은 소장이였다. [2] 혼전성은 리머. [3] 1917 ~ 1941, 1941년 전 남자친구의 질투로 인해 살해당했다. [4] 게다가 갈란트는 장군으로 진급하면서 출격 자체가 적었다. [5] 독일군이라는 말도 있고, 이탈리아군이라는 말도 있다. [6] 그도 통산 59기 격추 스코어를 기록한 아프리카 3위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7] 이쪽은 갈구는 의미가 더 컸다. [8] 사막작전형 Bf109G 라는 뜻이다. [9] 심지어 비행 시뮬에서도 Bf109F-4같은 턴파이터 기종으로 MiG-3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그대로 터닝하며 따라가면 F-4는 에너지를 급속도로 잃고 벽돌... 이 아니고 고정 타겟이 돼버리지만, 이런 방식으로 쫓아가면 에너지 상실도 적고, 추력도 높으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10] 마르세이의 교전 방식은 급격히 상황이 변화하는 일이 많은 공중전에서 모든 요소를 철저히 계산해가며 움직여야 가능하다. [11] 히틀러 전용기의 조종사였다. [12] 이 점에서는 그의 상사인 에르빈 롬멜과 비슷한 것 같았지만 동시에 롬멜과 마르세이의 학살 반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마르세이는 인간성 때문이었고, 롬멜은 굳이 그런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냐는 의견이였다. [13] 마르세이는 요아힘 파이퍼 등 다른 독일군이나 친위대처럼 전쟁범죄에 가담한 전적도 없었다. [14] 명령불복종, 차량절도, 공공장소 음주, 상관모독, 비행절차무시, 비행장과 관제탑 플라이바이, 복장불량, 지각, 음주 근무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