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9:27:38

대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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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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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 ~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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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전쟁
Cod Wars
Þorskastríðin
(1차): 1958년 9월 1일 ~ 1961년 3월 11일
(2차): 1972년 9월 1일 ~ 1973년 11월 8일
(3차): 1975년 11월 16일 ~ 1976년 6월 1일
파일:attachment/OddinScylla.jpg
3차 대구 전쟁 당시 아이슬란드 경비정 V/s 오딘(Óðinn)과 영국 호위함 HMS 실라(Scylla)
장소
아이슬란드 근해
원인
대구 어획과 관련한 아이슬란드 영국간의 영해권 분쟁
교전국

[[아이슬란드|]][[틀:국기|]][[틀:국기|]]

[[영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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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크리스티아운 엘디아우르든
파일:영국 국기.svg 해럴드 맥밀런
파일:영국 국기.svg 알렉 더글러스 흄
결과
아이슬란드 승리
영향
영국의 대구 어획량 제한
아이슬란드 산업 다각화[1]
배타적 경제수역(EEZ) 정의

1. 개요2. 과정
2.1. 배경2.2. 제1차 대구 전쟁2.3. 제2차 대구 전쟁2.4. 제3차 대구 전쟁2.5. 이후
3. 아이슬란드의 주요 전력
3.1. 경비정3.2. 무장어선
4. 기타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58년부터 1976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발생한 아이슬란드 영국 간의 어업 분쟁.

아이슬란드 근해 지역에서 영국 어선이 대서양대구를 무단으로 잡아갔는데 아이슬란드는 자기네 바다이니 영국 측에 자제해 달라는 요구를 했으나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영해권 논쟁으로 이어지다가 서로 해군 병력까지 동원한 어업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영어로는 Cod War라고 지칭하며 아이슬란드어로는 Þorskastríðin(토르스카스트리딘, 대구 분쟁), 또는 Landhelgisstríðin(란드헬기스트리딘, 영해전쟁)이라고 지칭한다. 다만 이처럼 명칭에 "전쟁"이란 단어를 붙이는 수사와는 달리 실제 전쟁으로 부를 만한 규모의 충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이슬란드 측에서 1명의 사망자가, 영국 측에서 1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전투로 인해 생긴 피해는 아니었다. 아이슬란드 측 사망자는 배를 수리하던 중 용접 장치에 감전되는 사고로 인해 생겼고 영국 측 부상자는 배를 묶은 밧줄을 절단하던 중 어부 1명이 잘못 튕긴 밧줄에 맞아서 생긴 것이었다.

2. 과정

2.1. 배경

현대엔 지열발전소와 값싼 전기를 사용한 정련 공장 등이 있지만 20세기까지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는 별다른 산업도, 자원도 없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나마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이 먹고 살 만한 유일한 산업은 어업뿐이었다.

1893년 덴마크 정부는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에서 50해리까지 외국의 어업을 금지하는 제한을 내렸으나 영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서 영국 어선과 덴마크 경비정과 몇 번의 마찰이 있었다. 1901년 영국-덴마크 간 체결된 협정에서는 아이슬란드의 어업전용수역이 해안선에서 3 해리밖에 인정받지 못했으며 이 3해리 내에서도 영국 어선이 자주 출몰해 어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2]

20세기에 들어와서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영국의 어선단이 군에 징발된 탓에 아이슬란드 근해에 영국 어선이 사라져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좋아했지만 전쟁의 종결과 함께 영국의 어선단이 다시 출현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처음으로 경비대를 조직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어선은 다시 모습을 감췄지만 영국의 식량난으로 인해 영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대구 기름을 배급하기 시작하자 대구에 크게 의존하던 아이슬란드의 경제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으며 1944년 아이슬란드는 덴마크로부터 완전 독립하면서 어업 보호를 국가의 절대적 지표로 삼았다.

2.2. 제1차 대구 전쟁

파일:external/www.lhg.is/12milur-sm.jpg
아이슬란드 어업전관수역 - 12해리

1945년 미국은 자국의 해양 유전을 보전할 목적으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대륙붕의 자원은 연안국이 관리한다는 내용으로 이전까지 대륙붕은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었다. 이에 아이슬란드는 살짝 끼어들어 자국의 어업전관수역을 3해리에서 4해리로 늘린다고 했으며 1958년 9월 마침내 마음을 크게 먹은 아이슬란드 정부는 어업전관수역을 12해리로 늘리겠다고 나섰고 이 수역 내에서는 외국 어선을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아이슬란드에 대해 '통상의 영해 밖의 어업에 관해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은 해양법에 어긋나는 부당 행위로 인정할 수 없다'[3]고 항의 성명을 보냈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 정부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영국 정부는 어업 선단에 구축함 호위함을 호위로 붙여 보냈고 아이슬란드는 이에 맞서 경비정을 파견했지만 원래 저인망 어업은 넓은 수역에서 조업을 해야 효율적인데 군함의 호위가 붙은 이상 좁은 곳에 모아놓고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영국 어선들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58년 10월 아이슬란드의 경비정이 영국의 트롤 어선에 3발의 위협사격을 가해 영국 어선이 도망가는 사태가 있었다. 11월에는 아이슬란드 경비정인 토르가 영국 어선인 핵네스에 정선 명령을 내렸으나 영국 어선은 이를 무시해 결국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2발을 발포했다. 이에 영국의 구축함 HMS 러셀이 다가와 경비정 토르에 대해 물러나라고 했지만 토르의 함장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HMS 러셀에서 영국 어선 쪽에 한 발이라도 더 쏘면 격침시켜버리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체급 면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던 아이슬란드 경비정은 후퇴하고 만다.

몇 번의 마찰이 계속 일어났지만 최종적으로 1961년 2월 영국이 아이슬란드 정부가 발표한 12해리 어업전관수역을 인정하는 형태로 1차 대구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또다시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받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12해리까지는 인정하겠지만 이후 아이슬란드의 주장을 원천 봉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 아이슬란드의 야당에서는 이 조약에 반대하였으나 결국 체결되고 말았다.

1차 대구 전쟁에서 아이슬란드의 전력은 경비정 6척과 승조원 100명이 전부였지만 영국이 파견한 함정은 모두 합쳐 군함 37척에 승조원만 7000명이나 되었다.

2.3. 제2차 대구 전쟁

파일:external/www.lhg.is/50milur-sm.jpg
아이슬란드 어업전관수역 - 50해리

한편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2년 정권을 잡은 아이슬란드 야당[4]은 어업전관수역을 50해리까지 확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50해리인 이유는 거기까지가 아이슬란드의 대륙붕이 이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영국은 자국 어선의 어획량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타협책을 내놓았지만 아이슬란드는 이를 거부한다. 결국 영국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했으나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것은 자국의 대륙붕에 기한 행위로 국제문제가 아니다'고 응답했으며 '1961년 체결된 조약은 영국의 협박에 의한 것이었는데다 이 문제는 아이슬란드 국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므로 어떤 외국의 관할권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제2차 대구 전쟁이다.

한편 영국과 서독은 이런 아이슬란드의 발표에도 불문하고 계속 어업선단을 보냈으나 이번에는 군함의 호위를 붙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군함의 호위가 오히려 어선들의 조업을 방해한 데다 냉전 시대였던 만큼 불필요하게 아이슬란드 정부를 자극해 소련 측에 붙게 만들면 곤란하다는 미국의 주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5]

이에 아이슬란드 해안경비대는 그물 커터를 사용해 트롤 어선들의 어망을 자르기 시작했고 이 조치에 1년간 영국 선박 68척과 서독 어선 15척이 당했다. 영국측이 예인선 4척을 보내 아이슬란드 경비대에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려고 하자 잃을 게 없는 아이슬란드 경비정은 실탄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에 빡친 영국 정부는 드디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서독은 영국을 후방지원하기로 했다. 그러자 어업에 말 그대로 국가의 명운을 건 아이슬란드 정부는 NATO 탈퇴와 영국과의 국교단절을 시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아이슬란드 경비대의 전력은 순시정 6척과 정찰기 1대였다.

1973년 1월 아이슬란드에서 엘드펠 화산이 폭발하자 아이슬란드 경비대는 인명 구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단 물러났지만 어느 정도 구조 작업이 끝나자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동년 5월 아이슬란드 연해 30해리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영국의 트롤 어선 에버튼이 아이슬란드 경비정 에기르(Ægir)의 정선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도주했다. 에기르는 처음에는 위협 사격을 가했으나 이를 무시한 에버튼에 대해 결국 57mm 포탄 6발을 발사해 4발이 명중했다. 다만 포탄에 폭약을 넣지 않은 탓에 영국 어선에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영국의 일간지에서는 이를 두고 공해에서의 해적행위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다만 영국 언론에서 일부러 영국 어선에 기자를 태워서 계획적으로 아이슬란드를 도발했다는 설도 있다.

이 사태에 위기감을 느낀 NATO에서는 양국간의 조정 협상에 들어갔지만 8월 영국 선박과 충돌한 아이슬란드 경비정 승조원 1명이 사망[6]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더욱 강경해진 아이슬란드 정부는 10월 3일까지 영국 배가 50해리 밖으로 물러나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결국 10월 2일 NATO의 중재로 인해 국교단절만은 면하게 되었고 영국 정부는 50해리 바깥으로 어선들을 물리기로 했다. 1973년 11월 8일에 유효기간 2년 한정으로 아이슬란드와 영국간의 협정이 맺어졌다. 영국 어선들은 50해리 수역중 일부지역에 한해서만 조업이 인정되고 연간 어획량도 13만톤으로 제한받게 되었다.

2.4. 제3차 대구 전쟁

파일:external/www.lhg.is/200milur-sm.jpg
아이슬란드 어업전관수역 - 200해리

3차례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이다.

1973년 개최된 제3차 UN해상법 회의에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34개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로 늘리자는 제소를 했는데 아이슬란드도 여기에 동참하기로 했다.

1974년에 들어 아이슬란드 수역에서 대형 대구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973년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과 이에 따른 석유 파동으로 인해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아이슬란드 경제도 파탄났다. 당시 아이슬란드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50퍼센트를 넘었고 무역적자는 1억 5천만 달러를 돌파했다. 이로 인해 결국 아이슬란드 정부는 1975년 10월 15일 어업전관수역을 200해리로 확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당연하게도 영국이 반발해 3차 대구 전쟁이 발생하했다. 서독은 아이슬란드 수역에 있어서 연간 조획량을 6만 톤 이하로 제한한다는 방식으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7]

12월 11일 아이슬란드 경비정인 토르가 영국 배인 스타 아쿠아리우스, 로이드먼, 스타 폴라리스를 발견한다. 토르는 영국 배에게 떠나라고 했지만 오히려 스타 아쿠아리우스와 로이드먼은 토르에 몸통 박치기를 걸어와 손상을 입혔다. 이에 토르는 57mm 포를 스타 아쿠아리우스에 응사해 명중시켜 버렸다. 결국 영국 배들이 물러났고 토르는 거의 침몰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무사히 항구로 돌아갔다. 1976년 1월 이번에는 영국 호위함인 HMS 안드로메다가 토르에 대해 몸통 박치기를 시도해 토르의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안드로메다의 선체는 살짝 패인 정도였다.

결국 1976년 1월 13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 군함이 아이슬란드 해협에서 나가지 않으면 15일 국교를 단절한다고 발표하고 이번에도 NATO 탈퇴를 시사했다.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애쉬빌급 고속정을 몇 척 빌리거나 구입하려고 제안했는데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이를 거절하자 이번에는 소련 미르카급 호위함을 구입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를 본 NATO는 깜짝 놀라 서둘러 또다시 중재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냉전 시기라 이대로 두면 NATO 동맹국의 구역 사이 북대서양 부분에 있는 아이슬란드가 소련제 무기를 구입하려고 하면 소련과의 동맹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심지어 여기에 소련이 폭격기와 잠수함 기지를 설치할 가능성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슬란드에 소련의 군사기지가 설치된다면? 소련군이 육지와 해상에서 서유럽을 동시에 압박할 수도 있는 여건도 갖추어지므로 사실상 북대서양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시즌2를 시전할 가능성이 있다.

먼저 폭격기는 아이슬란드에 공군기지가 생기면 이지스함도 없던 1970년대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모함 전단조차 소련 폭격기 편대가 수십 발씩 날려대는 대함미사일 세례를 버텨낼 수 없었다. Tu-95나 당시 새로 배치된 Tu-22M 같은 폭격기 수십대가 KH-22 부랴 같은 사거리 600km가 넘는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발사하면 이지스함도 없던 시절 개함방공이 고작이었던 당시 호위함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8][9]

잠수함도 문제였는데 냉전 당시 미국과 NATO 세력은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영국을 연결하는 G-I-UK 선을 따라 대잠수함 작전선을 설정하고 소련군 잠수함들이 대서양으로 나오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소련의 대양 잠수함인 641급(나토명 폭스트롯급)이나 641Б급(나토명 탱고급)은 항속거리가 잠항 상태로도 20,000km에 달했기 때문에[10] 아이슬란드에 기지를 두지 않아도 발트 해에서 출항하든 백해에서 출항하든 북대서양이 충분히 작전반경 안에 들어왔지만,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에 붙으면 북대서양 전체를 영향권에 넣을 수 있는 중요한 중간 거점이 생기고, 이는 더 이상 소련군 잠수함이 북해나 백해 등의 소련 본토에서 출격해서 미국 및 NATO의 추적망에 전전긍긍하면서 G-I-UK 라인의 대잠 작전선을 돌파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미국 및 NATO의 대잠 작전은 엄청나게 어려워진다. 2차 세계대전기의 U보트야 수상 항해가 필수였지만 핵잠수함은 잠항으로도 충분히 공격이 가능하다.

요컨대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에 붙으면 북미-유럽간의 북대서양 항로가 완전히 절단나서 소련이 유럽을 침공하는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도 미국에서 유럽으로 통조림 하나도 못 보낸다는 소리고[11] 그건 3차 대전의 승자가 소련이란 뜻이 된다. 결국 NATO의 중재에 따라 아이슬란드 정부는 기한을 1월 24일까지로 기한을 늘려 그 때까지 영국배가 퇴거하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한다고 최후통첩을 날렸으며 이번에도 영국은 아이슬란드 측의 주장과 NATO의 압박을 받아들여 군함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24일부터 열린 런던에서의 회담에서 아이슬란드 측은 자국 내 영국 어선의 연간어획량을 4만 톤 이하로 제한할 것을 주장했고 영국 측은 8만 톤을 주장했다. 어업은 당시 영국 정부의 집권 여당이었던 노동당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 측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이렇게 교섭이 진행되던 와중에도 영국 어선들은 아이슬란드 수역에서 계속 조업을 하고 있었다.

1976년 2월 5일 영국의 군함 2척이 다시 아이슬란드 수역에 진입했으며 2월 18일 영국의 호위함 로스트후트가 아이슬란드 경비정 토르와 충돌사고를 일으켰고 결국 다음날인 2월 19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과의 모든 외교관계를 단절해 버렸다. 한편 이 때 EC에서 유럽 200해리수역 법안을 통과했으며 미국 의회도 이 법안에 가결했다.

아이슬란드 수역에서는 계속 충돌사고가 일어나 5월 6일에는 HMS 폴모스가 티르를 들이받아 거의 침몰하는 수준의 손상을 입혔고 5월 12일에는 경비정 에기르가 영국 어선 프라이메라에 대해 포탄 3발을 발사했다. 이런 사태에 발끈한 영국 정부는 마침내 1만 톤급 미사일 순양함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국제 여론은 배타적 경제수역 200해리가 대세가 되었고 영국에 대해서는 NATO를 분열시킨다는 비난이 쏟아져나왔으며 영국 내부에서도 그깟 대구 따위로 너무 나가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6년 6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영국은 200해리 내에서 자국 어선은 최대 24척, 연간어획량 5만 톤 이하라는 조건을 내건 아이슬란드 정부의 주장을 승인했다. 그러나 영국 어선 최대 24척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실제로 잡을 수 있는 어획량은 3만 톤이 채 되지도 않았다. 결국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완승으로 끝났다.

2.5. 이후

영국은 북대서양 어업에 대타격을 받아 1500명의 어부와 7500명의 어업 관계자가 실직했다.

아이슬란드는 사실상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자원의 감소는 끝내 막지 못했다. 대구의 어획량 감소는 21세기까지 이어져 제한된 수의 대구만 잡힐 뿐이다.[12] 어부들에게 어획 쿼터를 두고 그들의 어획을 치밀하게 관리한 덕분에 어획량은 확실히 적지만 수익은 나름 괜찮다고 한다. 대구가 거의 유일한 자원이다 보니 대구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전쟁 이후 영국 아이슬란드의 국교는 정상화되었고 지금은 그럭저럭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국민 감정은 그대로 남아서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삼게 되었다.[13]

대구 전쟁은 세계 각국이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도 분쟁도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련된 분쟁이니 한국도 이 전쟁과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역사상 전쟁이란 걸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수백 년간 무적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의 콧대를 꺾었다고 내심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아직도 아이슬란드 국경일(6월 17일 - 1944년 아이슬란드가 독립한 날)에는 대구 전쟁을 기념하는 행사가 벌어진다.

3. 아이슬란드의 주요 전력

바이킹의 후손답게 배의 이름은 주로 북유럽 신화에서 가져왔다.

3.1. 경비정

  • Ægir급 - V/s Ægir, V/s Tyr 2척.
두 척 모두 1214톤, 무장 57mm 호치키스포 1문(1989년 40mm 보포스포 1문으로 개장), 최대속도 20노트.

파일:attachment/vsaegir.jpg
  • V/s Ægir( 에기르) - 바다의 거인. 1969년 취역해 아직 현역.
  • V/s Týr( 티르) - 전쟁과 법의 신. 1975년 취역해 아직 현역.
  • V/s Óðinn( 오딘) - 북구 신화의 주신. 2006년 퇴역
925톤, 무장 57mm 호치키스포 1문(1989년 40mm 보포스포 1문으로 개장), 최대속도 19노트. 1960년 취역해 2006년 퇴역.

파일:attachment/vsOdinn.jpg
  • V/s Þór( 토르) - 천둥의 신.
693톤, 무장 57mm 호치키스포 1문, 최대속도 18노트, 1951년 취역해 대구전쟁 당시 주요 경비정으로는 가장 오래된 배로 1982년 엔진 트러블로 사실상 경비정에서 퇴역하여 정박해 있다가 1985년 Sæbjørg라는 이름으로 1998년까지 훈련함이 되었다. 이후 다시 팔려서 해상박물관겸 레스토랑으로 잠시 쓰이다가 2005년에 해체했다. 오딘이 퇴역한 후 이 함의 이름을 이어받은 4000톤급의 새로운 경비정이 취역했다.

선박 앞에 소속을 나타내는 접두사(Ship prefix)인 V/s는 아이슬란드어로 경비정을 뜻하는 Varðskip의 약자이며 대구 전쟁 당시에는 이쪽을 더 많이 썼다. 물론 아직도 아이슬란드에서는 V/s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영어식 표기인 ICGV(Icelandic Coast Guard Vessel)를 더 많이 쓴다.

3.2. 무장어선

테크니컬의 일종으로, 어선에 경화기 등을 장착하여 간단한 무장을 한 배. V/s Baldur, V/s Ver, V/s María Júlía 등.

파일:attachment/baldur.jpg

왼쪽의 하얀 배가 Baldur, 오른쪽은 에기르.

4. 기타

  • 자매품으로 브라질과 프랑스 사이에서 발생한 랍스타 전쟁이 있다. 1960년대 초 모리타니 해역에서 조업하던 프랑스 선박들이 브라질 인근 해역까지 진출해 랍스타 조업을 하면서 야기된 분쟁인데 브라질은 기초적 수준의 군사력을 가진 아이슬란드와 달리 나름의 해군을 보유한 국가였고 영국에서 수입하여 개명한 경항공모함인 미나스 제라이스를 포함해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을 동원해 압도적 무력시위를 보였으며 프랑스는 이에 굴복하여 100마일 외에 제한적인 조업을 용인하는 정도의 협정을 맺었다. 당시 프랑스는 랍스타가 '수영(swim)을 하는 물고기(fish)'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어획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브라질은 랍스터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crawl) 굴(oyster)'과 같기 때문에 대륙붕에 대한 권리를 가진 연안국만 잡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협정 당시 한 브라질 제독은 "랍스터가 바다 밑바닥에서 뛰어다닌다고(hop) 물고기라고 부른다면, 점프하는(jump) 캥거루도 새(bird)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랍스터 전쟁도 이후 해양법 협약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 중국의 게임 전함소녀의 2016년 이벤트 발키리 작전의 E6은 이 대구 전쟁을 모티브로 했다. 보상은 보급함 오딘.
  • 민주평화론의 예외로 꼽히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에도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전쟁'이란 레토릭으로 인해 착각한 것으로 무력 충돌의 성격을 보면 결코 전쟁이라고 불릴 만한 수준이 아니다. 군함끼리는 서로 확전을 피하기 위해 몸통박치기를 했고 어선에 대한 포격은 일부러 폭약을 빼서 사상자가 없었다. 작정하고 전쟁할 생각이었으면 폭약을 넣은 포탄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물론 냉전 분위기 때문에 전쟁 크게 못 한 것도 있지만

5. 관련 문서


[1] 긴 대구 전쟁을 통해 아이슬란드 정부는 대구 산업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산업 분야를 다각화했다. [2] 3 해리는 당시 평균적인 해안포 사정거리였다. [3] 지금이야 영해가 기준선에서 12해리(22.2km)까지라는게 상식이지만 이는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이고 이전까지는 국제법상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 다만 18세기부터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주요 서방국가들에서는 관습적으로 3해리까지를 영해로 인정했는데 이는 18세기 대포의 사정거리였다. 따라서 국가마다 3해리나 여기서 조금 더한 정도를 영해로 선포했는데 20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12해리를 영해로 선포하는 국가가 늘어났다. [4] 사회민주당, 진보당 등 연립정권. [5] 아이슬란드는 소련 해군의 북대서양 진출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미국은 특히 소련 잠수함이 북대서양으로 진출하여 미국과 유럽간의 해상운송로를 봉쇄하는 상황을 우려해 냉전 시기 내내 아이슬란드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6] 오딘을 수리하다 용접기에 감전사당했다. [7]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대구에 목숨을 걸었지만 독일인들은 볼락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연간 조획량 6만 톤 중 대구는 5천 톤만 잡고 나머지는 주로 볼락을 잡는다고 해서 아이슬란드와 쉽게 타결할 수 있었다. 이 때 서독은 영국에게 '우리처럼 볼락을 잡는 게 어때?' 하고 제안했지만 영국은 거절했다. [8] 미 해군이 기를 쓰고 이지스함을 만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지스함은 동시에 수십 기의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 전단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핵 공격 등 특이상황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도 오직 냉전 시절 소련군 폭격기들의 미사일뿐이었다. 소련군 시절에 비해 규모가 크게 감소된 러시아 공군/해군항공대의 대함 전력이 아직도 미국 항모전단에게 매우 큰 위협으로 꼽힐 정도다. 호위함이 없어지면 폭격기와 잠수함 앞에 놓인 보급함, 상륙함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아이슬란드에 소련 공군기지가 생기면 미국 입장에서는 불침항모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핵을 쏘지 않는 이상 공략이 지옥도가 된다. [9] 2차 대전 당시를 예로 들자면 태평양 전쟁은 일본군이 전체적으로 매우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이오지마에서 대혈전이 벌어졌는데, 소련이 상대면 태평양 전쟁은 귀여울 정도일 것이고 상륙병력 태반이 상륙하기도 전에 물고기 밥이 될 건 당연지사다. 더욱이 아이슬란드 지형은 산과 절벽이 주를 이루어서 상륙하기도 까다롭다. [10] 이는 미국 본토까지 왕복하고도 남는 거리다. [11]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뒤 군함을 모조리 해체하고 20년 만에 재건한 나치 독일과 다르게 60년간 육성한 세계 2위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성기 소련 해군은 적수가 미국밖에 없었고 영국과 프랑스 해군이 힘을 합쳐 싸워도 못 이기는, 그런 존재였다. [12] 그나마 위안이라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면했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보다도 더 압도적인 규모의 대구어장을 지녔던 캐나다는 어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황까지 갔고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13] 이 사건 당시에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극심한 반영 감정으로 인해 친서방 국가 치고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그리 큰 편이 아니다. 대침체 때도 대놓고 러시아에게 거액의 외화를 대출받았을 정도다. [14] 레이캬비크는 인구가 13만밖에 안 되는 도시인데 무려 1만 5천 명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