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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디국의 국기 | 이슬람 기도문이 적힌 마흐디 군기 |
1. 개요
마흐디 운동의 지도자 무함마드 아흐마드 |
2. 배경
수단의 무슬림들은 수니파였으나 동시에 수피 신도이기도 했다. 수니파들은 시아파와 달리 마흐디가 구세주로 강림한다는 교리[2]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수단 무슬림들 사이에서 번성하던 수피 교단은 시아파의 마흐디 교리를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19세기 초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이집트가 수단을 정복하고 수에즈 운하 공사비 문제로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이집트와 영국의 이중 착취에 시달리던 수단인들은 이집트의 아랍인들과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인들을 불신자로 규정하는 무함마드 아흐마드를 영도자 마흐디로 받아들였다.[3]압둘라를 비롯한 수단의 수피 승려들은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튀르키예인과 영국인 불신자들과 그들의 하수인 이집트인[4]으로부터 수단인들을 구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신이 보낸 영도자라고 추켜세웠다. 마흐디 운동 지도자들은 특히 오스만 제국을 적대시하였는데 오스만 제국은 불신자 집단이며 오스만 제국이 건재한 동안에 이루어지는 성지순례는 성지순례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수단 아랍인 상당수가 맘루크 왕조의 아랍인 탄압[5]을 피해 수단으로 탈주한 이집트 베두인들을 조상으로 두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반 튀르크 정서가 강했는데 한술 더 떠서 19세기 수단에 들어온 오스만 제국 내 알바니아인[6]들은 수단에서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하디스에는 아랍인과 튀르크인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예언[7]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심판의 날이 도래하기 직전 튀르크인과 아랍인의 성전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8]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든 영국에서는 이 지역의 노예무역을 금지시켰는데 상아 무역과 노예무역이 같이 이루어지던 당시 상황[9]에서 이는 상당수의 수단인들에게 있어서 “사업은 하지 말고 세금만 많이 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바까라족 유목민의 신비주의 신앙 광신과는 거리가 멀었던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마저 마흐디 운동을 적극 지원할 환경이 조성된 셈이었다.
3. 진행
이집트 정부의 노예 무역 금지 조치로 홍해 인근의 베쟈족들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노예 상인 오스만 디그나는 노예 밀무역 과정에서 영국 측에 체포되어 투옥당하고 이후 그리스 상인이 소유한 진 공장에 물을 대주는 사업을 했지만 이마저도 시원찮게 돌아갔다. 투옥 경험과 사업 불황 때문에 불만이 극에 달했던 오스만 디그나는 알 우바이드가 바까라족에게 정복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마흐디 운동에 합류했다. 과거 바까라족 중심의 마흐디 세력은 전술이랄 것 없이 그냥 무조건 닥돌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오스만 디그나가 이끌던 베쟈족이 합류한 후에는 우수한 전략 전술 및 든든한 보병 전력을 갖춘 만만찮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베쟈족들은 발이 빠른 데다 단검과 방패만으로 표범이나 사자를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함으로 유명했고 오스만 디그나는 영국에서 후일 "대영제국이 상대한 10명의 명장" 중 한 명으로 뽑힐 만큼 전략 전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1883년 마흐디 운동에 호응한 바까라족과 베쟈족들이 수단에 주둔한 이집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집트 식민지 군을 지휘하던 영국인 장교 중 적지 않은 수가 마흐디 군에게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당시 파견되었던 이집트인 군인들은 거친 변방지대로 강제로 끌려갈 것을 두려워해 사기가 바닥을 쳤던 반면 마흐디군은 평소 이집트의 가렴주구에 대한 분노에 신앙심이 있는 사람 앞에서는 총알이 물로 변한다는 세뇌까지 더해져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한 상황이었다. 1883년 11월 5일 샤이칸 전투에서 윌리엄 힉스 영국 육군 대령(William Hicks, 1830~1883)이 지휘하던 수천여 명 규모의 이집트군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10] 대승에 고무되어 많은 부족들이 마흐디 운동에 가담하자 무함마드 아흐마드와 압둘라는 마흐디 국가 수립을 선언하였다. 1885년에는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상승군을 지휘했던 상승 장군 찰스 조지 고든이 마흐디 군에게 포로가 되어 참수당하면서 영국 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다만 고든의 참수는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지시한 일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무함마드는 어떻게든 고든을 살리려고 했고 심지어 '지금 우리 쪽에선 고든 당신이 기독교 신자란 이유만으로 반감이 너무 심하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대충 둘러대면 내가 어떻게든 목숨을 지켜 드리고 영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끝내 설득에 실패하고[11]고든은 죽임을 당했다.
영국군은 무함마드 아흐마드를 체포하거나 사살함으로써 고든의 복수를 노렸으나 무함마드 아흐마드 역시 고든의 사망 직후 발진티푸스로 인해 1885년에 41세로 사망하였다.[12]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을 간파한 영국은 맥심 기관총을 비롯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이집트로 급파하고 당시 보호국이었던 헤디브 왕조 치하의 이집트군의 훈련과 지휘 체계를 보강하였으며 수단 남부의 누에르족과 딩카족 현지 군인들을 고용, 징집하여 훈련시켰고 종래에 수단의 기득권을 누리던 수단 북부의 아랍 부족 자알리인족을 지원하여 다르푸르의 바까라족과 싸우게 만들었는데 바까라족은 아랍어 방언의 일종을 사용하였으나 아랍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또 북부의 아랍인 수니파 무슬림들은 상술한 종교적 이유로 마흐디 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3.1. 마흐디국의 멸망
영국-이집트 군 사령관 허버트 키치너 경 | 마흐디 국의 칼리파 압둘라히 빈 무함마드 |
1898년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이 이끌던 군대가 옴두르만에서 4만명의 마흐디 군을 궤멸시키고 항복을 받아내면서 마흐디 국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마흐디 국의 칼리파 압둘라히는 옴두르만에서의 대패 이후 중남부 코르도판으로 피신했다가 1899년 옴 디와이카라트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자 영국군에게 말을 타고 돌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옴두르만에 있던 아흐마드의 묘지는 보복으로 파괴되었고 그의 시신은 부관참시되는 수모를 당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후자는 나일 강에 버려지고 전자는 영국 측이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가 본국 여론의 뭇매를 맞고 다시 매장하였다.
4. 여담
옴두르만에 남아있는 마흐디의 무덤.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안장되어 있었다. 뒤쪽이 1947년 재건된 영묘, 앞쪽이 파괴 이전 영묘의 상단부 유구다. 1896년 옴두르만 점령 영국군은 대포로 무덤을 파괴하고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시신을 부관참시하여 몸은 나일 강에 던져 버리고 머리는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었다가 본국에서도 여론이 악화된 후에야 머리라도 다시 매장하였다.
이집트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수단을 식민지배하고 억압한 데다 마흐디 운동 무렵 영국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군과 함께 이집트군이 수단으로 출정하여 수단인들과 싸우는 일이 잦았다. 이에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이집트인들은 하디스에 기록된 "피부가 붉은 색인 튀르크인"들로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이며 제대로 된 무슬림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자비를 베풀지 말고 학살해야 한다고 선동하였는데 이는 현대적인 의미의 타크피르주의[13]로 계승되었다. 마흐디 운동 진압 이후 당시 이집트 정부는 마흐디스트들을 완전히 씨를 말려 버리는 대신 유화 정책을 펼쳤고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후 수단 총독부 요직에 앉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흐디스트들은 수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였고 이들의 사상은 후일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의 타크피르주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마흐디국의 멸망 후에도 마흐디의 후손들은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마흐디의 아들 압둘라흐만은 독립 준비 단계인 앵글로-이집트 수단의 초대 정부 수반을 맡았고 손자 알 하디는 수단 정부에 맞서다 아바 섬 폭격으로 3천의 지지자들이 사망하는 참사 후 망명하였다. 증손자 사디크는 움마 당의 당수로서 선거에서 승리하여 7대 총리에 올랐고 비록 오마르 알바시르에 의해 추방되었으나 지하 조직을 통해 결국 오마르 알바시르의 실각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수단에 돌아온 사디크가 곧 병사하자 딸 마리암이 움마 당을 이끌면서 반군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수피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민주화 운동 집안으로 변모한 것이다.
1966년작 영국 영화 하르툼(Khartoum)이 1885년 하르툼 공방전 당시의 찰스 고든과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고든 역은 찰턴 헤스턴, 아흐마드 역은 로런스 올리비에가 맡았다.
영국의 마흐디 운동 토벌 원정에는 당시 23세의 종군기자 윈스턴 처칠과 기병대대장 더글러스 헤이그 등이 참전하였다. 영국군 사이에서도 마흐디 군대, 특히 베쟈족 기병대의 용맹함은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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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까라 아랍인은 흑인과 동화된
베두인의 후손으로
차드와
수단에 걸쳐 거주하며 기린과 코끼리를 사냥하던 유목 민족이었다.
[2]
시아파의 구세주 교리는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미륵 신앙의 요소를 상당 부분 흡수하였다.
[3]
여담으로 이때 시아파의 마흐디 교리를 받아들이면서 일정 부분은 이란 문화도 조금씩 수입되었던 모양인지
수단 공화국은 현대에도 수니파 무슬림들이
구트라보다
터번을 더 많이 쓰는 몇 안 되는 지역들 중 하나다. (터번은 이슬람권에서는 보통 시아파들이 쓰는 모자라고 인식된다.)
[4]
당시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인 군인 출신이었다.
[5]
아랍인들에게 말을 타는 것과 갑옷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
[6]
이들 중 상당수가 오스만 제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같은 알바니아 출신인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를 장악한 후 이들을 대거 불러들여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이들의 직책은 공식적으로는 바시으보죽(봉급을 받지 않는 대신 민간인을 약탈하는 비정규군 보병 전사)였으나 실상은 19세기 버전
시파히에 가까웠다.
[7]
오늘날 이슬람 학자들은 이를
몽골 제국의 바그다드 침공과 칼리프 시해로 해석한다.
#
[8]
재밌게도(...) 마흐디 군은 당시 이집트와 수단에 들어온 영국군들을 “기독교를 믿는 튀르크인”이라고 불렀다. 모든 백인 = 튀르크인설
[9]
수단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아 운반을 흑인 노예에게 시켰으며 상아를 수출할 때 상아를 나르는 노예도 같이 부록으로 수출하는 관습이 있었다. 상아의 가격은 상아를 나르는 노예보다 비싼 편이었다.
[10]
영화
하르툼 공방전 초반부에 마흐디군에게 공격받아 영국-이집트 혼성군이 전멸당하는 전투가 바로 샤이칸 전투다. 영화에서 힉스 대령은 마흐디군이 던진 창을 등에 맞고 전사한다.
[11]
저 설득에 대해 고든이 당신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내가 당신에게 형식적으로라도 좋으니 기독교로 개종하라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반문했었다.
[12]
발진티푸스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걸리는 병인데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평생 전쟁터에 있었기 때문에 위생적으로 살 수 없어 발진티푸스에 걸릴 만했다.
[13]
신앙심이 부족해 보이는 다른 무슬림들을 공식적으로 불신자로 취급하여 지하드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