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 공방전[1]
Siege of Malta Die Belagerung von Mal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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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3월 23일, 독일 공군의 Ju 87이 투하한 폭탄에 피격된 영국 해군의 카메론급 증기선 퍼스셔 | |
날짜 | |
1940년 6월 11일 ~ 1942년 11월 20일 | |
장소 | |
북아프리카 | |
교전국 |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호주| ]][[틀:국기| ]][[틀:국기| ]] [[뉴질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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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전력 지원국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미국| ]] [[자유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망명정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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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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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
전력 | |
전투기 716기 | 항공기 2,000기 이상 |
피해규모 | |
전투기 433기[2] 전함 1척 대파 항공모함 2척 대파[3] 순양함 4척 구축함 19척 잠수함 38척 항공승무원 2,301명 사상 건물 30,000채 파괴/손상 |
항공기 532기[4] 이탈리아 왕국 해군 수송함대 72% 손실 추축군 상선대 23% 손실 수송선 2,304척 침몰 잠수함 최대 66척[5] |
결과 | |
연합국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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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역을 구성하는 전투 중 하나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추축국과 영국과 영연방의 연합국이 몰타 섬을 놓고 벌인 전투이다. 영국이 지중해 전역 중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곳 중 하나이다.2. 배경
나치 독일이 프랑스 침공으로 압도적인 기세로 몰아붙이던 시기에 이탈리아 왕국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의 편에 가담하는 것이 이득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때 이탈리아군이 잠시 남부 프랑스 지역에 어슬렁거리기도 했으나 오히려 국경수비대에 털려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여 사실상 정리가 완료된 서유럽에는 더 이상 떨어질 콩고물이 없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면서 지중해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무솔리니가 관심을 드러낸 지역은 당시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던 이집트 왕국이였다. 무엇보다 당시 독일은 영국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고,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영국이 독일에게 패배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이것은 이탈리아에게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이집트를 공격하더라도 영국은 본토 사정으로 인해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러한 판단에 의거하여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국령 몰타섬이었다.
몰타섬은 영국령 지브롤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영국 해군이 지중해를 욕조로 부르면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주요 거점 중 하나로 한 때는 영국 지중해 함대가 주둔하던 해군기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선단이 이집트로 이동할 때 반드시 찍고 가는 중간기착지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위치가 바로 시칠리아 바로 아래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비록 영국이 이탈리아의 위협을 경계하여 지중해 함대를 알렉산드리아로 재배치했기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세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탈리아가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뒷통수가 근질근질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차후 북아프리카에 전선을 펼칠 때 이탈리아 입장에서도 보급을 위한 중간통로이자 영국의 보급선을 끊어버릴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있는 섬이기도 했다. 또한 몰타섬은 이탈리아의 강성 민족주의자들이 미수복 이탈리아로 간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이 맞물려 몰타섬은 개전 초기부터 연합국이 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압하고 이탈리아로 진공하기 전까지 추축국에게 먼지나도록 두드려맞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몰타섬에서의 전투 자체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대규모 공격이 펼쳐진 상황에 따라 크게 3차로 나눠서 구분할 수 있다.
3. 1차 공방전: 1940년 6월 ~ 11월
1939년부터 이탈리아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영국은 몰타에 대공포와 전투기 편대를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갖춰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서류화된 계획상으로만 그랬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고 본토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모든 군수물자와 병력의 우선권이 영국 본토로 돌려졌고, 그 까닭에 이탈리아가 선전포고를 했던 시기에는 대공포는 계획에 비해 고작 25%도 설치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방공임무를 수행할 전투기는 단 1대도 배치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나마 조기경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레이더가 설치되었다는 것과 섬 곳곳에 천연 방공호가 많다는 점이 위안 아닌 위안이었지만 전투병력이 경비대 정도로 턱없이 부족해서 본토에서는 몰타에 적병력이 상륙하면 포기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다행히 영국 항공모함 글로리어스가 몰타섬에 잠시 정박했을 때 서류상 착오로 함재기 시 글래디에이터 4기를 몰타섬에 내려놓았다가 선적하지 않고 떠나버렸고, 이 사실을 확인한 몰타섬 방어사령관이 영국 해군에 애걸복걸하여 이 4기의 복엽기를 인수하여 간신히 방공전투기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한 기는 폭격으로 파손되어 예비부품용으로 해체되었고, 나머지 3기의 복엽기는 방공전에서 맹활약하며 Faith(신념), Hope(희망), Charity(자애)란 별명과 함께 사랑받게 됐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왕국군이 신속하게 상륙부대 또는 공수부대[6]를 파견하여 점령했을 때 영국이 몰타섬을 영구적으로 상실했을 가능성을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으나 1990년대 이후의 연구 결과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해군력의 차이. 먼저, 개전 직전 취역했던 리토리오급 전함에서 전기 회로 계통 관련 문제가 생기면서 리토리오/비토리오 베네토 2척 모두 작전 투입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7] 이 상황에서 이탈리아 측의 가용 전함은 구형 전함을 마개조한 4척 뿐으로 영국 측의 15인치 주포를 장비한 전함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캐터펄트 작전을 위해 영국 해군 쪽에서 H 기동함대(Force H)가 막 만들어진 시점으로 H 기동함대에만 당 시기 최대 크기의 전함인 HMS 후드를 포함해 15인치 주포를 장비한 전함 3척이 존재했다. H 기동함대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영국 지중해 함대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3척 등도 건재하였으므로 몰타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영국 측에서 압도적인 해군력 차이를 통해 단기간 내에 수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여기에 이탈리아 해군 내에서도 설마 무솔리니가 참전을 결의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던 관계로 1940년 5월 29일까지 공세적 작전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선전 포고가 임박한 시점에서야 작전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8]
하여튼 여러가지로 꼬인 상황에서 이탈리아 측은 확실한 점령 계획도 정하지 못한 채 일단 공군을 투입하여 몰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 공군은 그럭저럭 다른 유럽의 추세에 맞춰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매우 열악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주력 전투기는 허리케인보다 약간 떨어지는 수준으로 평가를 받던 마키사의 C. 200 사에타가 채택된 상황이었으나 관료주의의 고질적 무능함이 폭발한 끝에 2차대전 최고의 복엽기로 손꼽히는 CR. 42가 실질적인 주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폭격기 역시 3발 폭격기로 설계된 SM. 79 기종을 주력으로 투입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의 엔진기술로는 도저히 쌍발 폭격기를 만들 수 없어서 차선책으로 동체에 엔진을 하나 더 달았던 것. 이로 인해 폭장량이 크게 감소됐으며, 조준기조차 가장 이상적인 동체 중앙선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치게 장착되어 폭격의 정확도마저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요소는 영국 공군에게 호재로 작용하여 이탈리아 공군과 그럭저럭 붙어볼만한 상황을 연출해냈다. 게다가 폭격기 편대와 전투기 편대끼리의 호흡도 맞지 않아서 고작 3기의 글래디에이터에게 폭격기가 격추당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방공기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므로 영국군 역시 꽤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으며, 주요장소인 발레타항과 비행장 상공에서 이탈리아 공군을 간신히 쫓아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다행히 몰타섬에서 미친듯이 외쳐대는 헬프콜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기에 영국 본토에서는 호커 허리케인 4기를 자출하여 6월 21일 몰타에 배치했다. 고작 4기에 불과한 증원이었지만 당시 허리케인은 이탈리아의 모든 기종을 상대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약간 상황이 호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방공기의 규모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몰타섬에는 연일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계속되는 이탈리아군의 공격으로 발레타항과 그 주변이 위험해지자 영국의 보급선단이 몰타섬에 입항하지 않고 건너뛰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물자 부족으로도 상당히 고생을 하게 됐다.
이후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병력을 파견할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 본토에서는 8월 2일자로 12기의 허리케인을 추가로 증원했다. 이 역시 몰타의 상황을 뒤엎을 정도의 수준은 못됐지만 상대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몰타에 폭탄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발레타항은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고, 틈틈히 보급선단이 몰타에 기항하여 부족하게나마 물자를 공급해주고 있었다.
1940년 9월, 여전히 몰타섬 상공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이탈리아군이 이집트 공격을 시작하는 바람에 모두의 관심이 이집트로 쏠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사실상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말았지만 이로 인해 몰타는 한 차례 큰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됐다. 결국 이탈리아는 몰타섬 공략에 실패했으며 이로 인해 11월부터는 몰타에 대규모로 배치된 폭격기와 뇌격기들이 이탈리아 수송선단을 사냥다닐 정도로 상황이 호전됐다.
4. 2차 공방전: 1941년 1월 ~ 6월
이탈리아의 이집트 공략은 대실패로 끝나고 영국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리비아까지 쫓겨가는 추태를 벌이고 있었으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군의 패배에 "니 똥은 니가 치워라"라는 식으로 선을 그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타란토 공습으로 이탈리아의 해군력이 약화되고 이로 인해 지중해 방면에서 추축국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마음을 바꿔먹고 독일군을 직접 아프리카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육군중장 에르빈 롬멜 장군이 독일 아프리카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물자와 병력이 속속 아프리카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몰타는 또 한 차례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사실 처음부터 몰타섬이 공격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전까지 독일군은 영국의 보급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지브롤터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타란토 공습에서 맹활약하여 추축국의 살생부 맨 위에 이름이 올라간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가 지중해에서 포착됐다. 일러스트리어스의 등장은 독일군 사령부와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을 자극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격침시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로 인해 일러스트리어스는 독일공군이 보기에 격침했다고 믿었을 정도로 신나게 얻어터졌다[9]. 하지만 일러스트리어스는 큰 피해를 입긴 했어도 자력으로 항해를 할 수 있었고, 간신히 몰타항에 기항하여 수리를 받고 있었다. 당연히 축배를 들었던 10항공군단 사령관 공군항공대장 게이슬러 장군은 격노하여 몰타섬에 가용전력을 투입, 일러스트리어스를 끝장낼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몰타섬을 목표로 시작된 독일군의 항공작전은 일러스트리어스가 야음을 틈타 알렉산드리아로 떠났음에도 계속됐다. 그도 그럴 것이 몰타섬만 확실히 조져놓으면 굳이 수송선단을 쫓아다닐 필요없이 지브롤터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영국의 보급선을 말려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몰타섬의 위치는 절묘하게도 시칠리아 - 트리폴리로 이어지는 추축국의 보급선 한가운데이기도 했기에 여기만 잘 조져놓으면 추축국의 보급선 안전 확보도 가능하므로 더더욱 매력적인 목표물이었다.
이 무렵 몰타섬에는 호커 허리케인 6기, 함재전투기였던 페어리 풀머 3기, 1차 전투에서 활약했던 시 글래디에이터 Faith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더 배치할 수 없는 사정도 있었고, 굳이 더 배치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원인이었는데 일러스트리어스가 끌어놓은 어그로가 엉뚱하게 몰타섬으로 불똥이 튀었다.
이탈리아 공군과는 질적 차원이 다른 독일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연일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당시 2선급 전선이라 Bf110이 주력기여서 간신히 주요 거점은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1월 23일 일러스트리어스가 탈출하자 게이슬러 중장이 상부에 징징거려 Bf109를 소환해내었고 특히 서부전선에서 영국 본토 공군을 상대로 광렙한 요아힘 뮌헤베르크의 Bf109 중대는 영국 전투기들을 일방적으로 관광보내면서 궁지로 몰아넣었다.
당시 뮌헤베르크의 중대는 한 기의 전투기가 공격을 시작하여 적기가 반대방향을 기수를 돌리게끔 유도한다음 그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전투기로 때려잡는 박스-인 전술을 구사했는데, 여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2월 한 달 만에 몰타섬의 방공전투기를 몰살시켰다. 방공전투기 세력의 상실은 곧 폭격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로 인해 수송선단 마저 도저히 몰타섬에 접근할 수 없어서 건너뛰는 상황이 계속됐는데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몰타섬 상황에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당시 몰타섬 방어사령관은 "현재 몰타섬은 함락직전이다"라고 보고할 정도로 코너에 몰려있었다.
그럼에도 몰타섬은 끈질기게 버텨낼 수 있었는데 독일군 역시 몰타섬에 들어갈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륙작전은 1차 때와 마찬가지 이유로 보류, 물론 독일군은 그래도 제대로 된 공수부대 팔시름예거가 있었는데 하필 크레타 섬 전투에서 호되게 데이는 바람에 몰타에 투입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빈사상태로 코너에 몰아넣고도 마지막 결정타를 못날리고 있는 상황이 전개됐다.
결국 몰타섬의 위기는 명장의 활약에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 장본인은 독일군의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다.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영국군이 그야말로 개털리면서 이집트까지 쫓겨가는 바람에 이번에도 독일군이 이집트 방면에 관심을 더 쏟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당연히 몰타섬을 두드리던 10항공군단도 롬멜을 지원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쪽에 상당수 병력을 투입했고, 이어서 히틀러가 계획하던 독소전쟁까지 시작되면서 몰타에만 올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몰타섬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게다가 워낙 심하게 데인 영국군에서 작정하고 4월에 40기, 5월에 48기, 6월에는 무려 142기의 허리케인을 배치했고, 이로 인해 오히려 몰타 상공에서 영국군이 물량으로 압도해버리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상공에 진입한 추축국 공군이 발리고 오히려 역으로 시칠리아 상공에 영국군 전투기가 출현하는 상황으로까지 역전되고 말았다. 또한 몰타의 부활은 곧 추축국 수송선단의 재앙으로 이어져 다시 북아프리카 지역의 보급선이 경색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군마저도 몰타섬을 점령하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말았다.
5. 3차 공방전: 1941년 11월 ~ 1942년 5월
1942년, 몰타로 향하는 영국 보급선단을 공습하는 독일 공군 |
소련을 집어삼킬 것과 같은 기세로 밀고 들어가던 독일은 소련군의 반격에 좌절되고, 무시무시한 동장군이 찾아오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에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잉여화된 전력을 썩히지 말고 이참에 지중해 및 북아프리카 지역을 싹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 겪었던 문제점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만악의 근원(…)으로 몰타 섬이 지목됐다. 이에 따라 1942년 봄이 지나가기 전, 그러니깐 동부전선의 대치상태가 풀리고 다시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몰타 섬을 점령한다는 헤르쿨레즈 작전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독일 공군의 정예부대인 제 2 항공군단 전력을 몰타 섬 방면으로 급파하고, 여기에 이탈리아 공군까지 가세하여 대략 600여기에 달하는 대전력을 형성했다.
이 무렵 몰타 섬은 160여기의 허리케인을 운용하고 있었으나 Bf 109까지 동원된 정예부대가 투입된다면 명백하게 역세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194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된 독일 공군의 공격으로 2월에는 고작 27기의 허리케인만이 남았을 정도로 탈탈 털렸다. 결국 영국본토에서도 이에 대항하여 영국이 자랑하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오로지 본토 작전에서만 투입됐던 스핏파이어의 첫 나들이였다.
3월 7일, 영국은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스핏파이어 15기를 몰타 섬에 배치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군의 어그로만 잔뜩 끌어놓은 격이 되고 말았다. 독일군은 가용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고, 수송선단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강격을 가하여 몰타 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다. 4월까지 지속된 이 공격에서 몰타 섬은 영국 본토보다 더 많은 폭탄을 얻어맞아 그야말로 폐허로 돌변하고 말았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다시 한 번 진주만 공습으로 참전한 미국의 항공모함 CV-7 와스프까지 빌려 총 45기의 스핏파이어를 몰타에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증원은 독일군도 한 차례 경험했고,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독일군이 급습하여 증원한 스핏파이어가 모두 몰살당하는 최악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연일 계속된 폭격으로 대공포 대부분이 파손됐고, 보급선단이 몰타를 건너뛰고 있었기에 물자마저 부족한 상황까지 겹쳐 영국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말았다.
영국 본토에서는 몰타에서의 패배와 그에 대한 상실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중해의 불침항모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몰타 섬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몰타 섬 지하 동굴에는 영국군의 비밀 잠수함 기지가 있었는데다가,[10] 몰타까지 잃으면 수에즈 운하는 사실상 장식이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이미 그런 이유로 말레이 해전을 겪었던 윈스턴 처칠 총리도 "닥치고 사수!"를 외치고 있었기에, 영국군은 다시 한 번 64기의 스핏파이어를 증원할 계획을 세웠다. 게다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도 있었기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모든 스핏파이어는 언제라도 독일 공군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무장한 상태로 항공모함에서 이함하기로 했으며, 저공 비행을 통해 독일이 설치한 레이더의 탐지를 피하도록 했다.
이 계획은 5월 9일에 시행됐으며 독일 공군도 뒤늦게 스핏파이어가 투입됐음을 알아채고 공격에 나섰지만, 예전과는 달리 전투준비를 치른 스핏파이어가 상공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증원저지에 실패했으며 밤에는 몰타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송선단이 야음을 틈타 입항하여 물자와 항공유를 내려놓았다. 허를 찔린 독일 공군은 즉시 공습에 나서 보급을 저지하려 했으나 스핏파이어의 요격에 걸려 영국군의 완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다가 허를 찔린 독일 공군은 크게 실망했고 동시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5월이 지나면 다시 동부전선으로 돌아가 소련과의 교전을 준비해야 됐으므로 그 전까지 몰타를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했던 것. 하지만 영국이 단단히 준비를 한 이상 그들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덕분에 몰타는 또다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942년 8월 3일, 영국은 페데탈 작전을 감행했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를 포함한 50척의 배(이 중 수송선은 14척, 유조선은 2척)가 돌격했고, 피비린내 나는 혈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항모(HMS 이글) 1척을 포함한 4척의 군함과 9척의 수송선을 잃는 대가로 몰타에 대량의 화물과 연료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독일은 더 이상 연합군을 막을 수 없었고,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무너져 내렸다.[11]
6. 남은 이야기
이후로도 추축국은 몰타섬과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나 과거와 같은 대규모 전력을 동원한 체계적인 공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느정도 성가시게 만들 정도의 수준은 계속됐고, 물자보급도 원활하지 않는 등 이래저래 몰타의 고생은 계속됐다. 그래도 페데탈 작전이 성공한 후 지중해, 북아프리카 영역에서 추축국의 세력이 위축되면서 상황은 많이 호전될 수 있었다.결국 추축국은 몇 번이고 몰타섬을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지만 내부 사정으로 이 기회를 놓치면서 사실상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선을 말아먹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몰타 섬이 얼마나 요충지였는지는 짤막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으로 가는 보급품의 9할에 가까운 물자가 몰타에 주둔한 영국 해군을 주축으로 한 포위망에 의해 격침당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국왕 조지 6세는 몰타 섬 주민 전체에게 성 조지 십자훈장을 내렸고, 1943년 6월에는 국왕이 직접 섬을 방문하여 그들의 영웅적인 헌신에 감사를 표한다.
캐나다 출신으로 캐나다 공군에 입대가 거부되자 영국으로 건너와 전투기 파일럿이 된 조지 F. 벌링 대위는 이 전투에서만 26기를 격추시켰다.
[1]
직역한 경우에는 몰타섬 공성전으로 쓰는게 맞지만 보통 공방전으로 번역하는 관례가 있다. 문제는 역사적으로도 Siege of Malta란 이름이 붙은 전투는 2개이다. 보통 국내에서 몰타섬 공방전이라 부르면 1565년에 성 요한
구호기사단, 통칭 몰타 기사단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투를 의미한다. 또한 이 전투는
공군끼리 치고받은 전투이고 지상전은 전무했으므로 몰타 방공전 또는 몰타섬 항공전으로 불리는 경향이 있다.
[2]
지상 파괴 64기 포함
[3]
I49 아거스,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
[4]
독일 공군의 357기,
이탈리아 왕국 공군의 175기
[5]
유보트 50척 이하, 이탈리아 왕국 해군 잠수함 16척 이하
[6]
본 문서에 '이탈리아의 공수부대는 어디까지나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공수부대였다'라는 언급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출처 표기 요망.
[7]
실제로 리토리오급 전함 2척은 해당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8월 말부터 작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8]
O'Hara, Vincent P.; Celnuchi, Enrico(2010). On Seas Contested: The Seven Great Navies of the Second World War. Naval Institute Press.
[9]
무려 직격 7발, 지근탄 5발.
[10]
여기서 출격한 잠수함들이 롬멜에게 가는 지원선단을 요격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몰타를 잃을 경우 롬멜의 진격을 멈추기 힘들어진다.
[11]
특히 유조선 SS 오하이오(Ohio)의 눈물겨운 활약이 눈여겨볼만 하다. 당시 오하이오는 몰타에 보낼 11,500톤의 연료를 싣고 있는 매우 중요한 유조선이었는데, 동급 함정인 SS 켄터키의 침몰을 참고해 증기관을 강철 스프링으로 지탱하고 엔진을 고무 베어링에 장치하는 등 온갖 보강를 받았다. 페데탈 작전 중 이탈리아 잠수함 Axum의 어뢰 한 발을 맞은 걸 시작으로 슈투카 60대, Ju88 다섯 대의 폭격을 받고도 전부 지근탄이라 물이 많이 차고 3인치 대공포가 고장나는 정도로 그쳤다. 하지만 자위용 대공포로 격추시킨 Ju87 한 대(다행히 폭탄이 터지지는 않았다)와 항공폭탄 7발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항행 불능에 빠져 퇴함 명령까지 내려졌는데, 승조원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어 구축함들의 견인을 받아 몰타에 도착하고(이 와중에도 지근탄 몇 발 더 맞았다) 연료 1만 톤을 하역한 뒤에야 가라앉으며 임우를 완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