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2:33:46

김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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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증 병조판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金德齡
파일:external/cfs13.blog.daum.net/48a6bd8ce2490&filename=IMG.jpg
전쟁기념관의 초상
<colbgcolor=#fff><colcolor=#000>경수(景樹)
본관 광산 김씨(光山)[1]
출생 1567년[2] 12월 29일
전라도 광주목 석저면 석저성촌
(現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
사망 1596년 8월 21일 (향년 28세)
한성부
신장 168cm[3]
시호 충장(忠壯)
별칭 신장, 초승장, 익호장군, 충용장, 석저장군[4]

1. 개요2. 생애
2.1. 전공 논란2.2. 죽음2.3. 사후
3. 일화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의병장. 다만 전공에 관해선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이 실체보다 과대포장하거나, 남의 전공에 묻혀가는 등의 전공 부풀리기 논란은 그의 생전에도 끝없이 평생 그의 생애 내내 따라다녔고, 결국 이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전공 논란

1567년 12월 29일 전라도 광주목 석저면 석저성촌(現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김붕변(金鵬變, ? ~ 1581. 6. 24)[5]과 어머니 남평 반씨(南平 潘氏, ? ~ 1593. 8. 14)[6]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는 광주목 향교의 교생(校生)으로 있었다.

대중들에게는 임진왜란 시기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곽재우와 함께 거론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만 그가 기록 전공 부분은 야사다른 의병장의 전투를 김덕령의 지휘로 바꾼 형태로 민간에 전해지며 제대로 된 주요한 의병장이라면 어떤 전투에 참여했다고 거론되는데 김덕령은 < 조선왕조실록>부터 <호남창의록>까지 살펴도 이런 부분이 사실상 없다. 김덕령의 전과 또는 전공은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7] 통틀어 선조실록에 선조 27년 9월 2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가 전부다. # 실제로 김덕령의 전투 기록을 보면 권율의 휘하에서 치른 전투를 제외하면 기록이 제각각이라 신빙성이 높지 않으며 이렇다 할 대형 전투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과 협력해서 전개한 장문포 해전도 있으나 처음부터 무리한 작전이었기에 전과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전공 대신 '병력은 많은데 군량이 부족하므로 500여 호남 지역 병사 외에 모두 해산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에 관해선 최대한 우호적으로 기술하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마저도 이 전공 부분은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라며 모호하게만 기술하고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 김덕령 문서에선 김덕령의 전공뿐 아니라 김덕령 인물 됨됨이마저도 상당히 냉소적으로 서술한다.

광주, 담양, 화순 일대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으며[8] 형 김덕홍과 함께 고경명의 의병에 참여했다 모친상을 당하자 형은 의병대에 남고 김덕령은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9]

그 뒤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가 전라감사 이정암에게 김덕령을 추천했고 이정암이 재차 조정에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병기와 군량을 지원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김덕령은 지역 내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기에 그의 휘하로 많은 병력이 모였다. 1593년 11월 담양에서 거병할 당시 거느린 병사가 5천에 달했고 이에 조정에서는 1593년 12월 충용군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실전 기록이 적기 때문에 부대 운영이나 지휘력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것이 없는데 함양 의병장 정경운 영남으로 이동한 김덕령을 보고 그의 지시가 군사들이 알아듣기 쉽다는 호의적인 평을 <고대일록>에 남기기는 했지만 그 한마디뿐 보다 상세한 언급이 없어 그의 지휘력을 평가할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

1594년 2월 1일자 기사를 보면 선조는 왜군의 전라도 침입에 대비해 김덕령에게 경상도로 넘어가 진해, 고성 방면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전라도와 경상도 접경 지역인 함양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정경운의 <고대일록> 2월 2일자에서 함양에 입성한 김덕령을 보았다고 적었다. 전란을 피해 전라도 남부에서 피난 생활을 했던 오희문의 < 쇄미록>에는 1594년 3월 22일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崔堈)이 고성에서 40여 명을 이끌고 소규모 왜군과 교전을 벌여 90여 명을 사살하고[10] 다시 창원에서 20여 명을 참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희문이 전해들은 이 기록이 현재로서 김덕령 군이 왜군을 공격해 전과를 올린 유일한 내용이나 군을 지휘해 왜군을 사살한 공적은 어디까지나 최강의 것이다. 최강은 김덕령과 달리 실제 공적도 있고 <난중잡록>, <고대일록> 등 왜란기 개인 기록에서 그 능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어 유능한 장수임이 확인된다. 1594년 9월 2일 왜군 200여 명이 고성 지방을 노략질하자 권율이 김덕령에게 군사 200여 명을 이끌고 요격하게 했는데 사로잡혔던 남녀 50여 명은 모두 구출했지만 왜군을 베었다는 대목은 없다. 권율의 보고에 의하면 미리 험지에 매복까지 하고 싸웠는데 적을 사살한 기록이나 아군의 피해 정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치열한 교전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김덕령을 "왜적을 위엄으로 굴복시킨 비장군(飛將軍)"으로 호의적으로 서술한 신경의 <재조번방지>나 야사류를 폭넓게 수집해 정리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김덕령의 구체적인 전공은 나오지 않는다. 1694년 행장과 남은 시문을 엮어 편찬한 <김충장공유사>와 1799년 호남 출신 의사들의 행적을 모아 기록한 <호남절의록>에 비로소 김덕령의 전공이 나오는데 의령에서 곽재우와 함께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는 적을 기습하여 적의 절반을 익사시켰다는 기록이다. 편찬 연대로 보아 <호남절의록>은 <김충장공유사>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게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에다 김덕령을 억지로 집어넣은 왜곡이다.

<김충장공유사>에서 해당 부분을 살펴보면 『時公引兵到宜寧 郭公同陣鼎巖 巖下有大湫 深不可測』라는 대목으로 시작하는데 정암(鼎巖)이라는 두 글자가 보인다. 전투 내용도 왜군이 표목을 세워둔 걸 보고 바꿔 꽂은 다음 야밤에 강을 지나는 기습했다고 적고 있어 <망우당집>을 통해 알려진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 묘사와 똑같다.[11] 이 전투는 1592년 5월 말 내지는 6월 초에 경상도 의령에서 일어났는데 1593년 호남에서 거병한 김덕령은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김덕령이 정암진 전투에 참전했다는 내용이 나왔을까? 서인계 학자 신경이 쓴 <재조번방지>가 그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정담 변응정 웅치 전투 다음 대목에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내용을 적고 있다. 계사년 말에 거병한 김덕령과 임진년 7월 초에 발생한 웅치 전투는 시기상 차이가 크다. 이 대목에서 신경은 비장군(飛將軍) 김덕령이 위엄으로 왜군을 굴복시켰으며 군사를 모아 영남에 들어가자 왜군이 부대를 모아 대군을 형성해 항거했다고 적었는데 김덕령이 영남으로 군사를 끌고 들어갔다는 대목 뒤에 곽재우가 김덕령이 온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켰다고 적었다. 곽재우는 임진년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으니 시기적으로 김덕령보다 훨씬 앞인데 <재조번방지>에는 이 부분 역시 앞뒤 순서가 바뀌었다.

김덕령이 특별히 당색을 드러낸 기록은 없지만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형 김덕홍이 서인계 의병장 고경명 휘하에서 종군했다. 김덕령이 이귀의 권유를 받고 거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인계에 속하고 이귀가 김덕령에 대해 지나친 과장을 일삼아 선조에게 핀잔을 듣는 <조선왕조실록> 기사도 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선조실록>보다 김덕령에 대한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인조반정 이후 집권당이 된 서인 내부에 김덕령에 대한 지속적인 동정 여론과 숭상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재조번방지>나 <김충장공유사>의 기록은 이러한 서인의 김덕령 숭상이 빚어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서인계의 김덕령 숭상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는데 서인 중에서도 노론의 중추였던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자대전>에도 김덕령이 국문을 받던 중 용력을 과시하며 결백을 주장하는 일화가 실려 있다. 굳이 변호를 해주자면 김덕령이 활동할 당시는 명나라 심유경이 강화 협정을 맺고자 했던 휴전 국면이었기 때문에 전투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명성은 높은데 이렇다할 실적이 없으니 조정 논의에서 김덕령의 높은 명성에 대해 "구체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수 밖에 없었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부담스러워하는 듯한[12] 언급이 장문포 해전을 다룬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등장한다. 왜군 수장의 목을 치겠다고 호언장담하다 선조에게 "말이 너무 앞서는거 아니냐"는 지적을 듣는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스스로 이런 명성을 경계하고 삼가는 자세가 부족했다.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1596년 2월 19일 선조를 만난 권율은 김덕령에 대해 "김덕령이 용력은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군율을 엄격히 적용해서 곤장을 치거나 귀를 잘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망쳤다"고 언급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며 비판한다. 1596년 1월에는 2건의 옥사를 일으켜 3명을 함부로 죽인 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1명을 매를 쳐서 죽였고 도망병을 잡아들이기 위해 도망병의 아버지를 잡아들였다. 이 사람은 제찰사 윤근수의 노복이었기에 마침 남방에 내려와있던 윤근수는 김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을 요청했다. 김덕령은 이를 승낙했으나 윤근수가 돌아가자마자 즉시 매를 쳐서 김덕령은 그 노복을 죽였다.

김덕령이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다고 알려진 일은 첩보를 전달하는 전령이 제 역할을 못하여 적의 정보파악이 늦어지고 군량 조달에 차질이 빚어져서, 또 그 전령을 잡아서 볼기 몇 대를 쳤는데, 그게 와전되어 돌에 매달아 물속에 넣었다고 김덕령은 모함을 받았다. 김덕령이 약속을 어기고 윤근수의 노속을 죽였다고 알려진 일은 장문포 전투에 참가하기로 했던 병사 최인상·최덕웅 형제가 도망을 가서 그의 아버지 최춘용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의 아버지를 매질하였는데, 윤근수의 부탁에 따라 풀어 주었으나, 그 뒤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이렇듯 군율에 따라 장졸을 다스린 김덕령에게 살인죄를 적용함은 지나치다고 진주 출신 부사 성여신과 진주 유생 박흥주 등은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낸다.

사헌부는 김덕령을 탄핵했으나 선조는 왜적이 물러가지 않은 상황에서 장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방면하고 전마까지 내려주었으며 처벌을 하지 않았다.

2.2. 죽음

1596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남원에 이르렀을 때 반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회군했다.

김덕령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반군 수뇌 신경행(辛景行)과 한현(韓絢)의 진술로 심문 끝에 옥사한다. 선조 의병에 대한 의심과 견제, 명나라가 광해군을 끼고 도는 등 선조의 위기감 때문에 커진 사건이다. 흔히 이몽학의 난에 이름이 거론된 것만 알려져 있지만 <선조실록> 1596년 8월 8일 기사를 보면 이몽학의 난 2년 전에 발생한 송유진의 난 때도 반란 수괴 사이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몽학은 난을 일으킬 때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고언백 등 의병장들이 합류하고, 병조판서 이덕형이 중앙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거짓 선전해 1만에 달하는 군사를 모았다. 당시 영의정 류성룡의 이름도 반군들이 거론했다고 한다.

1596년 8월 4일 김덕령의 첫 국문이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김덕령이 죄가 없다는 게 아니라 류성룡은 "죄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반란 수괴들이 모두 한양에 압송된 다음 본격적으로 처리하자"고 말한 반면 윤두수는 "즉각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는 김덕령의 참모들인 최담령, 최강 등을 빨리 압송하도록 지시한다. 1596년 8월 8일 최담령의 국문이 열렸는데 박승립(朴承立)의 증언에서만 언급될 뿐 이었던 최담령은 선조와 대신들 모두 처음부터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내 방면된다. 체포된 반군 수뇌 한현, 유규, 이업 등은 공초에서 이런저런 진술의 차이들은 있었으나 공통적으로 김덕령이 모의했다는 진술을 했다. 김덕령의 죽음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내에서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술이 다른 대표적인 사항이다.
상(선조)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아뢰기를,“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ㅡ 선조수정실록 30권, 29년(1596년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8월 1일 "김덕령이 옥에서 고문 받다가 죽으니 남도의 군민들이 원통하게 여기다"

왕권이 크게 실추된 정황과 전근대 왕조 국가 특성을 고려하면 선조의 의심이 아무 근거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2번의 반란에 모두 이름이 거론되고 그 사이에 조정에서 탄핵까지 받았으니(조정에 불만을 품었다고 생각할만한 건수도 있었으니) 오히려 의심할 여지가 너무 많았다. 선조가 의병장들을 시기해 죽였다는 설이 인터넷에 떠돌지만 역시 반란군이 이름을 팔아먹은 고언백, 곽재우, 홍계남은 아예 불문에 부치고 김덕령, 휘하에 있다 함께 압송된 최담령 최강은 심문 후 무죄 방면 되었다는 점에서[13] 이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선조가 죽인 두 의병장 이산겸과 김덕령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제대로 된 전공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의병 통제를 위해 전쟁 기간 내내 고심했던 선조는 곽재우, 홍계남처럼 공이 있고 유능한 의병장은 역모에 이름이 거론되어도 불문에 부쳤지만 공도 없으면서 이름만 높은 이산겸과 김덕령은 용서하지 않았다. 특히 이산겸은 선조 본인 스스로 무고라고 생각했지만 살려줄 수는 없다며 죽여버렸다. 선조와 달리 신료들의 태도는 <선조실록>에도 <선조수정실록>에도 한결같아서 김덕령을 구명해주려 한 신료는 거의 없다. 뒷날 신구차를 올려 이순신을 보호한 정탁만이 김덕령 옥사 이후 상소를 올려 의문을 표하고 김덕령은 단지 명성이 높아 오르내림이 심했을 뿐이라고 말했다.[14] 당색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학맥상으로는 서인 계열 의병장인데 윤두수 형제 같은 서인 인사들도 극형을 주장하고 남인 정탁이 억울한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당쟁과 관련있는 사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선조 입장에선 전공 구라치는 김덕령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카드에 불과했던 것이다.

2.3. 사후

김덕령의 옥사 소식을 듣자 부인 흥양 이씨(興陽 李氏)[15]는 벼랑에서 투신했으며 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전라도 용안현(現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에 숨어 본관을 용안(龍安)으로 고치고 신분을 감추며 생활하였다. 그 뒤 김광옥은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도 안주목 운곡방 어룡리(現 평안북도 안주시 운곡지구 구룡리)[16]로 이주해 혈통을 이어 갔다고 한다. #[17]

현종 대인 1661년 복권되었고 숙종 시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조 대에는 그의 사적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는데 1785년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88년 고향에 김덕홍(金德弘, 1558.~1592. 7. 10), 김덕령 형제의 행적을 새긴 비가 세워졌다. 동생인 김덕보(金德普, 1571. 7. 6.~1624. 12. 28.)[18]도 의병 활동을 했으나 형이 옥사하자 고향으로 낙향해 풍암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이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나 나이가 많아 실제 지휘는 하지 않았다.

김덕령의 는 역적 죄가 있었기에 문중의 무덤이 있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1965년이 되어서야 광산 김씨 문중에서 이장을 하게 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때 마땅히 썩었어야 할 시신과 의복이 썩지 않고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1596년에 사망했으니 무려 369년 동안 시체가 썩지 않고 보존된 사례인데 아마도 매장 당시 관 안이 멸균 및 진공 상태가 되어 미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19]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사진으로 남기려고 했으나 사진기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왔을 때는 이미 시간이 지나 시신이 산소와 접촉한지 오래되어 검게 변하는 등 부패가 진행되어 버렸다고 한다. 결국 광산 김씨 문중에서 화장 처리해 이장하고 김덕령이 입고 있던 의복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 중이다.[20]

3. 일화

관련 민담은 주로 전라도에 전해오지만 일부는 강원도 횡성군, 경기도 남양주시, 강화도, 경상도 달성과 월성 같은 타 지역에서 전해진다.
  • 김덕령은 날 때부터 눈을 뜨고 울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엄청 세어서 다리가 묶인 채 무릎만으로 담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 화가 나면 눈에서 불이 날 것 같은 안광을 내뿜었는데 이 눈을 보면 아무리 기운이 센 사람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화가 나면 눈에서 불이 나와 10리까지 비추었다고 한다.
  • 어느 날 김덕령을 임신 중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동료 아낙들과 빨래를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몸종을 물려고 하자 김덕령의 어머니가 호랑이를 막았는데 호랑이가 김덕령의 어머니에게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 고승에게 물어보니 "뱃속에 있는 아이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 호랑이가 덤벼들지 못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 14살 때 마을에 나타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잡았는데 이후 총 3마리의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고 한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는데 피난 중이던 세자를 구해 '익호 장군'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워낙 무력이 출중하여 왜군은 김덕령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사명당에게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본에서 요괴를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단신으로 침투하여 철추로 왜적을 쓰러뜨리고 별량고에 불을 붙여 적진을 혼란스럽게 한 다음 조선인 하녀의 도움으로 야만바(山婆)라는 요괴를 잡았다고 한다.
  • 이성계 견훤이 가지고 있는 화살보다 빠른 말 일화도 가지고 있다.
  • 간신배의 모함으로 죽게 되자 포박을 끊고 달아났다가 돌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반복했으나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4. 기타

  • 간혹 김덕령을 미화하는 지역 신문 기사들을 유심히 읽어보면 그의 전공 관련 기록들보단 김덕령 관련 구전 설화들에 관해서만 교묘하게 쓰여있음을 바로 알 수 있다. #1 #2 #3 #4

5. 대중매체에서

  • 고전소설 < 임진록>에서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나오며 키가 9척[21]이라고 하는데 소설이 아니라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덩치는 작지만 용력이 뛰어나서 운운이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묘지를 지키고 있는 차에 가등청정이 쳐들어오자 "너는 상을 당한 몸이니 기간이 다할 때까지 묘소를 지키라"는 어머니의 명령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현재 자신의 처지로 인해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없는 자신의 상황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나라를 선택하고 집을 나서 왜군 진영으로 가 종이와 관련된 도술을 부려 가토 기요마사의 직속 부대장 1명을 살해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놀라게 하여 군대를 철수시킨다. 그러나 후에 "능력이 있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는 조정 신료들의 규탄이 발생해 결국 압송당해 참수당하게 되는데 칼로 목을 내리치자 목은 멀쩡하고 칼이 부러지니 김덕령이 "소인의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을 걷어내고 치소서."라고 하여 겨드랑이를 살피니 정말 의 비늘이 있었고 비늘을 떼어내고 목을 치자 김덕령은 죽고 말았다. 직후 "김덕령이 가토 기요마사를 놀라게 하여 전하의 뒤를 쫓지 못하게 하였다 하옵니다."라는 소식이 뒤늦게 도착하였고 임금은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고 시호를 내려 사죄했다고 한다. 애초에 '김덕령전'이라는 별도의 전기 소설을 가지고 있으며 김덕령에 대한 민담과 설화들은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동네에서 가장 세다고 우쭐대다가 누나한테 당하는 이야기도 있다. 출처[22]
  • 전,란에 등장하는 김자령의 모티브가 김덕령으로 추측되고 있다.

6. 같이보기



[1] 낭장동정공파 30세 덕(德) 항렬. [2] 광산김씨평장대보 권4 283쪽에는 1568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출처 관의 크기를 통해 추정한 키이다. [4] 일본군에게 불리던 별칭이었다. [5] 김붕섭(金鵬燮)이라고도 한다. [6] 직장(直長, 종7품)을 지낸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7] 1643년 인조 21년에 쓰인 실록으로 인조가 자신의 할아버지 선조의 『선조실록』이 당파(黨派) 관계로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하여 사초(家藏史草)와 비문 · 행장 및 야사(野史) · 잡기류(雜記類) 등을 수집, 보강한 실록이다. # [8] 훗날 가사 문학으로 알려지는 송강 정철도 이 무렵 외가가 있는 담양에 내려와 김윤제(김덕령의 작은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혼인으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9] 김덕홍은 이후 조헌의 의병에 합류해 제2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다. 김덕홍에 관한 임진왜란기 기록은 <고대일록> 인명록에 짤막하게 언급되는 것 정도다. 김덕홍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일화는 정조 대에 가서 발굴된다. [10] 정탁의 임진기록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으로 여기서는 3월 5일로 기록되어 있다. [11] 『賊忽立標木 於上流淺灘 公問于郭公曰 賊欲何爲 郭公曰 賊必乘夜 越川而却我 故立標而避其深也 公曰 然則兩陣不可合處 遂引兵涉川而伏 又拔其標目 移挿深湫 賊果夜來及渡 公攝後訥喊 鼓操追之 賊望標而渡盡沒 大獲全勝』 [12] 다만 한참 치켜세워 올려질 때는 "나가서 적장의 목을 그냥 따오겠다"는 등 허세끼를 부리기도 했다. [13] 최담령은 선조의 명으로 김덕령이 이끌던 병사들을 이어받는다. [14] 그래도 이산겸과 김덕령의 죽음으로 선조의 신임은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15] 첨정(僉正, 종4품)을 지낸 이대록(李大祿)의 딸이다. [16] 용안 김씨 집성촌이다. [17] 용안 김씨는 이후 1816년( 순조 16) 식년 진사시에 1등 1위, 즉 장원으로 입격한 한성부 거주민 김익수(金益秀, 1788 ~ ?)와 1861년( 철종 12) 식년 진사시에 3등 41위로 입격한 평안도 안주목 거주 김응간(金應簡, 1792 ~ ?) 등 2명의 진사시 입격자를 배출했으며,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당시 159가구 500명으로 나타났다. [18]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은 김덕보의 호인 '풍암'에서 명칭이 유래했다. [19] 조선시대 무덤에서 미라가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대량의 석회로 관 주변을 봉인하는 풍습이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 석회가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면서 굳어질 때 열을 방출해 관 내부를 섭씨 200도 가량으로 고온 살균해버린 뒤 진공 상태로 밀봉하게 되어 자연적으로 미라가 만들어지는 원리이다. [20] 현재 의복은 광주광역시 북구 역사민속박물관에서, 관곽은 충장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충장사에 전시된 의복은 복제품이다. [21] 조선시대에는 척이 여러가지 있었는데 특히 주척과 영조척이 자주 쓰였으며 주척은 약 20cm, 영조척은 약 30cm 정도이다. 어느 척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값이 많이 다르다. 실제로 1965년 광산 김씨 문중이 이장하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 김덕령의 신장은 168cm 정도 였다고 한다. 출처 [22] 이 설화에도 김덕령의 이와 같은 경솔함이 뒷날 그의 비극적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