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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천 조씨 2대 배향공신 | ||||||||||||||||||||||||||||||||||||||||||||||||||||||||||||||||||||||||||||||||||||||||||||||||||||||||||||||||||||||||||||||||||||||||||||||||||||||||||||||||||||||||||||||||||||||||||||||||||||||||||||||||||||||||||||||||||||||||||||||||||||||||||||||||||||||||||||||||||||||||||||||||||||||||||||||||||||||||||||||||||||||||||||||||||||||||||||||||||||||||||||||||||||||||||||||||||||||||||||||||||||||||||||||||||||||||||||||||||||||||||||||||||
문경공 조영인 | 문정공 조충 |
1. 개요
趙冲1171 ~ 1220
고려왕조 고종 안효대왕의 배향공신. 성씨는 조(趙), 이름은 충(冲), 자는 담약(湛若),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을 막아내며 활약한 인물로 문과 무에 모두 능했다.
2. 가족관계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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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정효대왕의 배향공신 조영인과 윤관의 증손녀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1]의 아들이다. 창원군부인(昌原郡夫人) 최씨와 결혼해 아들 2명[2] 딸 5명을 두었다.
3. 생애
명문가에서 태어나 음서로 관직에 나갔으며 이후 태학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190년(명종 20) 20세에 과거 급제하여 내시에 소속 되었고 1196년(명종 26)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종(章宗)의 천수절(天壽절節)에 하례하였는데 이때 ‘왕의 이름을 직접 말하는 것은 신하의 예가 아니다’ 라며 뜻을 굽히지 않아 귀국하여 명종에게 상을 받았다.1208년 봄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폐단을 고치고 이익을 일으키며, 물 흐르듯 막힘없이 판결하여 장수와 서리들의 신임을 깊이 얻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1209년(희종 5) 국자제주(國子祭酒)로 국자시를 주관하고, 1211년 국자대사성 한림학사 겸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한 이후 동북면병마사, 예부상서가 되었다.
이후 1216년(고종 3)에 문·무를 겸한 인재라 하여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 겸 상장군에 임명되는 등 최충헌 무인정권 시기에 관직생활을 하였다. 당시는 무신이 집권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로 문신이 상장군을 겸직하는 일은 오래전에 폐지된 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1216년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으로 고려 북방 각지에서 약탈과 피해가 속출했으며 고려군과 거란군의 전투가 이어지자 정숙첨(鄭叔瞻) 휘하의 부원수로 임명되어 12월에 출정했다. 하지만 당시의 무신집권자였던 최충헌은 자신을 지킬 병력을 보강하는 데에 더 열중하였고, '당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門客)으로 삼았고, 관군은 모두 노약자인 데다가 여윈 군졸이었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병사들의 처지는 매우 열악했다. 이듬해 교체된 원수 정방보(鄭邦輔)와 함께 염주에서 적병을 물리치고 태조탄(太祖灘)까지 추격했지만 술을 마시고 놀다가 기습당하여 대패하였다. 기세가 오른 거란군은 개경 코앞까지 진격하면서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까지 휩쓸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조충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 일로 백면서생이라며 조롱당했지만, 조충은 치욕을 씻기 위해 병서를 읽으며 만반의 준비를 다졌다. 이 시기 조충은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萬里霜蹄容一蹶 만리 달리던 준마, 발 한번 헛디디고는
悲鳴不覺換時節 슬피 소리내어 우느라 시절이 바뀐 줄 몰랐네
儻敎造父更加鞭 만일 조보[3]로 하여금 다시 채찍을 가하게 하면
踏躪沙場摧古月 백사장 짓이겨 밟으며 오랑캐를 꺾으리라.
悲鳴不覺換時節 슬피 소리내어 우느라 시절이 바뀐 줄 몰랐네
儻敎造父更加鞭 만일 조보[3]로 하여금 다시 채찍을 가하게 하면
踏躪沙場摧古月 백사장 짓이겨 밟으며 오랑캐를 꺾으리라.
그해 10월 새로 남하한 여진족 황기자군(黃旗子軍)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그는 서북면병마사로 임명되어 적군을 대파하였다. 1218년 옛 지위로 복직되어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거란족의 침입이 계속되고 유약한 관군이 적군을 복속시키지 못하자, 7월 중군원수 겸 서북면원수가 되어 김취려, 정통보 등을 부하로 삼아 출정하여 4군을 이끌고 황해도 서흥군에서 510여 명의 적병을 죽이고 9월에 안찰사 이적의 경상도 병력과 합세했다.
이에 거란군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고자 조충을 공격하자, 조충은 좌우군을 길게 늘어서게 한 후 북을 치며 적과 격렬히 싸웠다. 이때 이적의 부하가 적군이 조충의 군대를 포위하여 맹공격을 가하는 모습에 두려워하며 이적에게 퇴각하자고 건의하자 이적은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아갔을 때 오직 적을 만나지 못할까 걱정했다. 이제 적을 만났는데 피한다면 용맹한 자라고 할 수 없다." 라고 대답하며 돌격을 감행했고, 거란군은 조충과 이적에 의해 대패를 당했다. 그후 거란군은 별동대를 보내 고려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했지만 독산에서 박의린에 의해 패배했고 조충이 뒤이어 적의 주력을 섬멸해버렸다.
거란군을 격파하고 성주(成州)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강동성에 들어가 농성하였고 12월에는 거란군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으로 들어온 몽고와 동진(東眞) 병력 3만이 군량미 보급과 형제의 맹약을 요구하고 적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듬해 1월 고려와 몽고·동진(東眞) 연합군은 강동성을 공격하여 거란군을 토벌하였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 몽고 황제의 요구대로 몽고군 원수 합진(哈眞)과 형제맹약을 체결하였다. 고려가 매년 일정한 시기와 장소에서 몽고에 세공을 납부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형제맹약은 집권자 최충헌의 의사와는 상반되는 것이었지만 조충이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이를 지지했던 최우와 대몽화의론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으로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전투에 동진군을 지휘한 완안자연은 조충의 인품에 감탄하여 고려인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 원수는 유달리 위대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런 원수가 있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다.” 라고 하여 존경의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승전하고 돌아온 조충은 정당문학판예부사(政堂文學判禮部事)에 임명되었고, 이어 수태위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修國史)가 더해졌다.
하지만 개선하여 돌아온 이후 '독락원(獨樂園)’이라는 별장을 지어 조용히 지내면서 선비와 관리들과 더불어 음악과 술을 즐기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조충의 독락원 조성은 최충헌의 정치적 견제에 대한 안전처로 조성한 것으로 연회에서는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최충헌이 사망하고 1년만인 1220년 조충은 50세의 나이에 병사하였다.
최종 관직은 고려사 기준으로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4] -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묘지명 기준으로는 수태위(守太尉)[5] -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6] - 수문전 대학사(修文殿 大學士) - 수국사(修國史)[7]이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1261년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조선조에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함께 고려 충신 16인 열위[8] 중 한 분으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 위치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개성 태조왕비제능 서쪽 언덕에 위치하였는데 1948년 횡성군 정안리로 옮겨왔다.
조충에 대한 기록으로는 고려사 조충 열전과 조충 묘지명이 있다.
4. 평가
대요수국의 난에서 방심하여 대패하고 조롱받았으나 절치부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뛰어난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가이자 관료기도 했으며 문과 무를 겸비한 인재로서 높이 평가받았다.5. 대중매체
2003년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배우 최상훈[9]이 조충 역을 맡아 연기했다. 거란유족의 난 때 정숙첨과 함께 출전하나[10], 병사들이 대부분 노약자에 어린이들이었다. 난 진압 이후에도 최충헌이 반란의 장기화라는 핑계를 대고 이에 상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기마대를 막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등 나라의 앞일을 생각한다. 또한, 김취려에게는 국정이 혼란스러워도 국방에 힘써줄 것을 당부한다.
[1]
족보는 윤관 →
윤언이 →
윤인첨 → 윤자고 → 영평군부인 순이다.
[2]
조계순과
조숙창. 여기서 조숙창은 제1차 여몽전쟁 때 몽골군에 투항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상장군까지 승진한다. 이후 필현보의 난에 연루되어 효수. 조숙창은 그로 인해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렸다.
[3]
주나라 때 말 잘 부리던 사람. 중국 조(趙)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4]
종1품 문산계 품계. 최고위 품계이다.
[5]
수직으로 태위는
삼공 직 중 최고위 직이다.
[6]
중서문하성의 차관.
[7]
사관의 차관.
[8]
16인의 명단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이다.
[9]
이후 드라마 대조영에서
흑치상지 역할을 맡았다.
[10]
본래는 최충헌 본인이 출전하려고 했으나 자운선이 계책을 올려 조충과 정숙첨이 출전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