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0:11:19

이존오

고려 우정언 증 성균관대사성
이존오
李存吾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출생 1341년
사망 1371년 (향년 29~30세)
본관 경주 이씨
순경(順卿)
석탄(石灘), 고산(孤山)
형제 형: 이양오(李養吾)[1] - 직장공파(直長公派) 파조
제: 이존중(李存中) -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
제: 이존사(李存斯) - 교감공파(校勘公派) 파조
부인 처: 여흥 민씨, 민선(閔璿)[2]의 딸
자녀 자: 이래(李來) - 판경승부사, 계성군
녀: 숙경택주 경주 이씨[3], 권근(權近)[4]에게 출가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기타

[clearfix]

1. 개요

고려말의 문신. 경주 이씨 석탄공파(石灘公派)의 파조. 인종 때 공부상서 상장군(工部尙書 上將軍)을 지낸 이녹천(李錄千)[5]의 8대손이다.

2. 생애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일찍 부모를 잃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하고 뜻과 절개가 있었다. 10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는데, 식자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ruby(大野皆爲沒, ruby=대 야 개 위 몰)]
넓은 들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ruby(孤山獨不降, ruby=고 산 독 불 항)]
고산[6]만이 홀로 항복하지 않았도다
강창시(江漲詩)[7], 이존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김구용(金九容)[8], 김제안(金齊顔)[9]과 함께 서로 벗하며 친하게 지냈고 강론을 쉬는 날이 없었으니 크게 될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1366년(공민왕 15) 우정언(右正言)으로서 불과 25세의 나이로 당시 권력을 농단하던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무례함과 공민왕의 지나친 총애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왕의 분노를 샀으며 이색 등의 만류로 간신히 사형은 면했으나 좌천되었다.

이후 고향인 공주목 석탄(石灘)[10]으로 낙향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봄에 정몽주가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는데 동년 5월에 졸하였으니 향년 31세였다.
[ruby(春風苦憶李長沙, ruby=춘 풍 고 억 이 장 사)]
봄바람에 이 장사[11]가 몹시 생각나
[ruby(徙倚南樓日欲斜, ruby=사 이 남 루 일 욕 사)]
남루를 배회하니 해가 기울려고 하네
[ruby(宣室承恩應未遠, ruby=선 실 승 은 응 미 원)]
선실[12]의 은혜 입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ruby(石灘明月不須誇, ruby=석 탄 명 월 불 수 과)]
석탄[13]의 밝은 달이야 자랑할 게 없겠네
기이정언(寄李正言)[14], 정몽주
사후 3개월 뒤 신돈이 처형되었다. 공민왕은 이존오를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추증하고, 당시 9살이었던 아들 이래(李來)에게는 손수 [ruby(諫臣存吾之子安國, ruby=간 신 존 오 지 자 안 국)][15]이라고 써서 정방(政房)에 내리고 장거직장(掌車直長)[16]에 임명하였다.

3. 가족관계

아들 이래(李來)는 조선조에서 좌명공신 2등에 책록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공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판경승부사[17] 등을 지냈고, 사후 태종 묘정 배향공신이 되었다.

4. 기타

  • 1514년(중종 9) 중종이 좌우에게 명하여 정몽주, 이존오, 김굉필, 정여창에게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워 제사함이 합당한지 여부를 의논하게 하였다.
  • 1519년(중종 14) 중종은 전조(前朝;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를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 1661년(현종 2)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 중에 이존오의 사적을 언급하기를, "아, 이존오(李存吾)가 요승(妖僧)을 공척한 것이나 정온(鄭蘊)이 의륜(義倫)을 높여 부지한 것은 실로 이 천지간의 정기(正氣)인지라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툴 만한 것이거늘..."이라고 하였다. #
  • 1708년(숙종 34) 여주(驪州)의 유학(幼學) 신각(申慤) 등이 상소하기를, "전조(前朝)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는 10세 때에 강창시(江漲詩)를 지어 읊기를, ‘넓은 들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고산만이 홀로 항복하지 않았도다(大野皆爲沒 孤山獨不降)’라고 한 고산(孤山)은 곧 본주(本州)의 땅입니다. 많은 선비들이 이존오의 사당(祠堂)을 이곳에 지어서 숭봉(崇奉)하니, 청컨대 은액(恩額; 임금이 지은 액호)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이들의 장소(章疏)는 으레 해조(該曹; 예조)에 내리고, 숙종이 특별히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이 사람의 사적(事蹟)은 동사(東史)에 병연(炳然; 환한 모양)하므로 소청(疏請)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어찌 복주(覆奏)를 기다리겠는가? 특별히 소청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후 고산서원(孤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렸다.
  • 1745(영조 21) 영조가 하교하기를, "옛날에 어제(御製)로 인하여 사현사(四賢祠)를 태학(太學)의 곁에 건립하였는데, 하물며 전조(前朝; 고려)의 충신이겠는가? 일찍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보다가 이존오(李存吾)와 정추(鄭樞)의 충성에 깊이 감탄하였다. 지금 이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있으니, 그의 자손을 해조(該曹; 예조)로 하여금 특별히 녹용(錄用)하게 하라." 하였다. #
  •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신돈을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하여 시조 3수가 전하고, 동문선(東文選)에 시조 6수와 논신돈소(論辛旽疏)가 실려 있다. 문집 석탄집(石灘集) 2권이 전한다.
구롬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단이면셔
구타야 광명(光明)한 날빗찰 따라가며 덥나니
우국시(憂國詩)[18], 이존오

[1] 사위가 무진피화의 단초를 제공하여 이인임, 염흥방 일파의 몰락을 야기한 조반(趙胖)이다. [2] 판도판서(版圖判書). 사후 찬성사(贊成事)로 추증됨. 찬성사 민상정(閔祥正)의 아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지(閔漬, 1248~1326)의 손자.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 崔氏) 첨의참리(僉議參理) 양경공(良敬公) 최문도(崔文度, 1292~1345)의 딸. [3] 淑敬宅主 慶州李氏. [4] 안동 권씨. 길창군(吉昌君),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5] 고려사에는 이녹천(李祿千)으로 기록되어 있다. [6] 경기도 여주(驪州) 지역의 산. 고려사에는 고산(山)으로 적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산(孤山)으로 적고 있으며 사액(賜額)도 고산서원(孤山書院)으로 내렸다고 한다. [7] 강물이 불어서 넘친다는 시(詩). [8]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본관은 안동. 고조부는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 증조부는 부지밀직사사 김선(金愃), 조부는 중서평장사 김승택(金承澤), 부친은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이다. 김제안(金齊顔)의 형이다. [9] 군부좌랑(軍簿佐郞), 원나라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中書兵部郞中 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 본관은 안동. 고조부는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 증조부는 부지밀직사사 김선(金愃), 조부는 중서평장사 김승택(金承澤), 부친은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이다. 김구용(金九容)의 동생이다. [10]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11] 장사감무(長沙監務) 이존오의 호칭. 장사(長沙)는 현재의 전북 고창군 공음면/상하면. 중의적으로 전한(前漢) 문제(文帝)에게 진언하다가 장사(長沙)로 좌천된 가의(賈誼)의 고사에 빗대기도 한 듯하다. 왜냐하면 시에서 미앙궁(未央宮)의 선실(宣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지명이 서로 같다. [12] 전한(前漢) 문제(文帝)가 가의(賈誼)를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시킨 뒤, 다시 미앙궁(未央宮) 앞의 정실(正室)인 선실(宣室)에서 가의를 만나보고 그 자질에 탄복한 나머지 막내 아들인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로 임명했던 고사에서 인용. 여기서는 대궐을 의미한다. [13] 이존오가 낙향해 있던 공주 석탄(石灘). [14] 이 정언(우정언 이존오)에게 부치다. [15] '간신(諫臣) 존오의 아들 안국'이라는 뜻이다. 간신(諫臣)은 간관(諫官)의 별칭이다. 안국(安國)은 이래(李來)의 어렸을 때의 자(字)이다. [16] 고려사의 기록.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전객녹사(典客錄事; 전객시의 종8품 녹사)라고 하였다. [17] 경승부의 종1품 판사. 경승부는 1402년(태종 2) 원자(元子) 제(褆, 양녕대군)를 위하여 성균관의 동북 모퉁이에 별도로 설치한 교육기관이다. [18] 【시조】구롬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 중천(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단이면셔 / 구타야 광명(光明)한 날빗찰 따라가며 덥나니 아래아는 'ㅏ'로 대체 표기함. 본문 중 '떠'의 ㄸ은 본래 ㅅ과 ㄷ의 합용병서임.【어휘풀이】*구롬 : 구름. 여기서는 간신(奸臣)이나 소인(小人)을 빗대어 이른 말. 신돈(辛旽)을 가리킴. *무심(無心)탄 : 아무런 마음의 움직임도 없다는. 여기서는 ‘사심(邪心)이나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의 뜻. *허랑(虛浪)하다 : 허황하고 믿기 어렵다. 언행이 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하다. *중천(中天) : 하늘의 한복판. 여기서는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닌 높은 권세(權勢)’를 이른 말. *떠 이셔 : 떠 있어. (권세 등을) 누리고 있어. *임의(任意)로 : 마음대로. ‘신돈’의 횡포를 말함. *날빗찰 : 햇빛을. 여기서는 ‘임금의 총명’을 비유한 말. *덥나니 : 덮느냐. 가리느냐. ‘나니’는 의문형 종결어미.【해설】고려 공민왕 때 임금의 총애를 믿고 국정을 어지럽히던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횡포와 그를 방치하는 공민왕을 안타깝게 여기던 작가가 풍자적 기법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우국시(憂國詩)이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