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2:05:37

충신

1. 개요2. 개념의 정의
2.1. 명신2.2. 간신()
3. 동아시아사의 충신
3.1. 한국사의 충신
3.1.1. 고려 시대 이전
3.1.1.1. 역이지언3.1.1.2. 불사이군3.1.1.3. 이대도강3.1.1.4. 충의지사3.1.1.5. 구국영웅3.1.1.6. 고굉지신
3.1.2. 고려의 충신
3.1.2.1. 역이지언3.1.2.2. 불사이군3.1.2.3. 이대도강3.1.2.4. 충의지사3.1.2.5. 구국영웅3.1.2.6. 고굉지신
3.1.3. 조선& 대한제국
3.1.3.1. 역이지언3.1.3.2. 불사이군3.1.3.3. 이대도강3.1.3.4. 충의지사3.1.3.5. 구국영웅3.1.3.6. 고굉지신
3.2. 중국사의 충신3.3. 일본사의 충신3.4. 베트남사의 충신
4. 서양사의 충신5. 창작물 속의 충신6. 매직 더 개더링의 카드7. 마르크 함싱크의 소설8. 관련 문서

1. 개요

신하의 평가에 따른 호칭 분류
간신
(악)
신하
(선)
충신

충신()은 '육정신(六正臣)'의 하나로 ' 나라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를 이른다.

간신(奸臣)이나 역적과 반대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국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는 신하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충신연군지사라고 부른다.

육정신에는 충신만 있는 것은 아니나 충신 외의 다른 표현들은 많이 쓰이지가 않아서 묻혔다.

참고로 충신의 반대말은 간신이 아니라 '역신(逆臣)'이다.

2. 개념의 정의

그러나 위의 대략적인 정의와는 달리 실제로는 충신을 쉽게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충(忠)이란 개념이 유교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충은 다른 유교적 덕목(인, 의, 예, 신 등)들과 마찬가지로 고정적이거나 절대적인 성질이 아니라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때문에 "loyalty"라는 영어 단어로 1:1 직역이 되지 않는다. 아래에서 기술되었지만 정몽주가 충을 다한 대상은 고려의 어느 특정한 군주가 아니라 고려왕조의 종묘사직과 피폐해진 민중의 삶이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1] 또한 아래 항목에서 예시로 기술된 충신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충의 대상이 어느 때는 군주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민중이나 국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 맥락을 함께 고려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충은 대체로 정치적인 분야에서 발현될 때가 많기 때문에, 현실정치의 필요에 의해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기보다는 실제로는 군주 개인에 대한 충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정의에 맞지 않지만 군주 하나만을 위하여 충심을 바치고 목숨을 건 경우의 사람들도 충신이라고 불러주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 경우, 당장 군주에게만 충성을 바치기 때문에 군주라면 누구나 이런 종류의 충신을 대량으로 육성하고 유지하길 원하는게 보통이니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기록하곤 한다. 예를 들어 정몽주를 제거한 태종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정몽주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적이 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정몽주는 군주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우매한 경우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여말에 펼친 활약이나 시책은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종이 충효를 강조하느라 정몽주를 끌어다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그에게 실제로도 능력이나 인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종이 충효를 강조하기 위해 정몽주를 끌어다 쓴 것은 정몽주 입장에서는 어이없을 일인데 정몽주는 고려의 특정 군주에게 충성했다기 보다는 고려라는 왕조 자체에 충성했기 때문 물론 조선에서는 폐가입잔의 논리에 따라 우왕과 창왕을 폐했고 때문에 정몽주를 공양왕에게 충성한 인물로 규정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정몽주 입장에서 보면 황당할만한 논리다.

또한 숙종대에 있었던 여러 복권사례도 그와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정말 답이 없는 막장 국가나 군주한테도 자신이 태어난 나라 or 자신이 모시는 존재란 이유 하나만으로 계속 충성을 바쳐서 주변사람이나 후세를 답답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도 이렇게 볼 수 있겠다. 선조가 노답 암군인건 아니지만 자기보신에만 골몰한 인간이라 평이 나쁘고 이순신은 그런 선조에게 무슨 짓을 당해도 충성하니 후세인인 우리 입장으로선 답답하게 보일 수 있는 것. 다만 실질적으로 이순신은 당시 역성혁명을 일으키거나 쿠데타를 일으켜 (예를 들어 광해군으로) 군주를 바꿀만큼 정치적 기반을 닦아놓진 못한 상태였다. 이순신은 어디까지나 천재적 전략가이자 지휘관이지 정치인은 아니고, 당시 권세가들과 동료 장수들이 그를 능력,인간적으로 신뢰하는 것과 유교국가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역적의 멍에를 쓸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쿠데타에 동참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조선에서 군주를 바꾼다는 건 확실한 명분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선조가 아예 명으로 도망쳤다면 모를까, 어쨌거나 나라 안에서 (명목상이나마) 투쟁을 계속하는데 갈아치우려고 했다간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백성들이 계속 외적에게 짓밟히고 있는데 성공가능성이 높지도 않은 쿠데타를 시도해 내란으로 전력 소모와 민초들의 고통을 늘리느니, 차라리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걸 택했다는게 더 타당하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설마 원균이란 작자가 그렇게까지 잘 만들어지고 강력한 조선 수군을 단 한 방에 날려버릴 거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막장인 국가나 군주라면 충의를 지킨 충신이라도 보통 후대가 평가할 때 그와 관련해서 안좋은 평가가 어느 정도는 들어간다. 무엇보다 유교가 권장하는 충은 우매한 왕까지도 받들라는 개념이 아니라 왕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대하는 것을 신하의 도리라고 가르친다. 공자와 함께 유교 하면 빠질 수가 없는 사람인 맹자를 그 예로 들기로 하면, 제 선왕으로부터 '탕왕이 걸왕을 쫓아내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했다는데 신하가 자신의 임금을 시해해도 괜찮은 것이냐'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말이 '인(仁)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악하다고 하는데 흉포하고 잔악한 사람은 그냥 필부에 불과한 것이니 필부인 걸이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정치를 못 하는 왕에게는 반대를 해도 좋은 정도가 아니라 궁궐에서 내쫒아야 한다는 것. 결국 맹자의 논리에 따르면 인하지 못하고 의하지 못한 이는 왕이라 해도 죽이건 말건 상관 없다는 뜻이다.[2]

오히려 우매한 군주만을 모시는데 진력하여 나라와 백성에 어려움을 준 신하를 좋게 평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역사는 그런 인물을 우충(愚忠, 미련한 충신)[3]이라 칭한다.[4] 대신 일종의 홍보전략으로 무리가 있는 인물을 국가가 나서서 충신으로 추켜세워주는 경우는 존재했으나 이런 경우도 후대로 가면 비판적인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지만, 명말청초의 유학자인 황종희는 '(군주의 마음과 행동이)천하의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데도 충성하는 건 환관이나 궁녀 따위의 충성이지 올바른 신하의 충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서 백이, 숙제 형제의 경우에는 누가 봐도 폐위해 마땅할 주왕을 폐하려는 주무왕을 말렸지만 후세에 의로운 일을 한 것으로 남았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진정한 충신은 나라나 백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다. 이런 인물이 암군의 밑에 있을 경우 군주의 잘못은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역성혁명 같은 것에 대하여는 절대 반대입장이라 여러모로 갈굼을 당한다. 군주는 군주대로 귀찮게 여기고, 역성혁명을 하려는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제거해야 할 걸림돌이다. 결국 군주의 노여움을 사서 숙청당하거나 역성혁명에 의해 제거당하는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보통 충신 소리를 듣는 인물은 후대의 인식이나 평판이 좋은 것이 보통이다. 충신 소리를 들을 정도라면 상당한 고난이나 불이익을 감수하고 왕조나 군주, 아군이나 국가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충신은 극단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나 군주를 지키려고 한 사람이고 낮게 봐도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군주를 도운 사람이니 당연히 전자는 그 희생정신이 부각되고 후자는 그 능력이 부각되며 공통적으로는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했으니 그런 치안을 듣는게 이상할 게 없다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하며, 왕조에도 충성을 바치지만, 해당 국왕에게는 충성심이 없는 희귀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충신으로는 보지 않으며 보통 권신이지만 나름대로 충성심이 있었다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간다. 권신은 왕조국가에서 군주인 왕에 버금가는 실력(정치력, 인망, 군사력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을 가지고 있는 신하를 일컫는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라고 불리는 승상 같은 자리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 자리를 정하는 것도, 날리는 것도 왕조국가에서는 오직 왕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이자 능력인 것이다. 그런 왕이 능히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를 권신이라 칭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한 시대의 곽광이 대표적인 인물로 창읍왕을 황제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고, 선제를 옹립한 전적이 있다. 이 경우는 (표면적으로) 왕의 밑에 있으나 왕이 제어할 수 없는 신하이기에 해당되는 사례라 볼 수 있다. 조금 더 살펴보자면 권신 중에 나라나 백성에 충성심이 있는 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권신=나라와 백성에게 충성심을 가진 자'라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권신 중에 저런 이도 있다,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권신 중에서도 권신이면서도 충신인 사례도 존재한다.

현대에서 재평가 바람이 일고 흑백논리도 어느 정도 탈피하면서, 과거 충신 소리를 듣던 인물들에 대해서도 나쁜쪽으로 재평가가 시도되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적으로 간신, 역적들과 대립각들을 세웠던 인물들로, 이들의 행적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단순한 권력 투쟁으로 비하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간신들도 왕 앞에서는 자기네들이 충신이라고 주장한다(…). 심하면 주변 사람들을 시켜 자신을 충신이라고 추켜세우게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충신은 타인이 인정하는 것이지 자처하는게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조선 말기에 이르면 자기 당만 충신이고 남들은 역적으로 낙인찍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당연하지만 충신은 매우 좋은 정당성이며 역적은 매우 좋은 숙청명분이기 때문이다.덤으로 오늘날 정치도 별로 다를 게 없기는 하다.

2.1. 명신

이거보다 한 테크 위로 명신, 즉 '밝은 신하'가 있는데, 이건 충심을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능력도 있어야 하는, 신하로서는 최종테크쯤 되는 호칭이다. 능력이 없으면 충신 소린 들어도 명신 소린 못 들으며, 충심이 없으면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불리는 호칭은 간신이다. 게다가 명신의 능력을 갖추어도 너무 유능한 나머지 군주의 권력을 능가하거나 맞먹으면 권신이 되어버리니 정말로 명신되기가 힘들다.

단순히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뿐인 충신과 충성과 능력을 고루 갖추어 임금을 도와 선정을 펼치는 명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위징이 한 말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명신을 양신이라 칭한다.
"양신은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고, 군주가 거룩한 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우며, 자손만대까지 복록을 누립니다. 하지만 충신은 자신은 물론 일가족 모두가 몰살당하고, 군주는 폭군이 되며, 국가도 가문도 모두 멸망하여 오로지 자신만 충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깁니다."

위징의 말의 의미는 난세에 명장이 나오듯이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충신이 나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안정되어 있는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무너지는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건 가문과 국가를 모두 잃을 가능성이 높은 어려운 일이다. 그 무너지는 국가를 다시 일으키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므로 명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 간혹 저 위징의 논리를 가감없이 적용하면 대표적인 충신인 이순신 장군이나 연산군에게 끝까지 간하다 죽은 김처선도 군주를 폭군으로 만들고 국가와 가문을 멸망시킨 이들이 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김처선은 국가 위기시의 사람이 아니고(정치적으로 막장 테크를 타던 시절이기는 하나, 정말로 무너지는 시기와는 다소 다른 상황), 무너질 나라를 살린 이순신 장군은 토를 달 것 없는 양신이다.[5]

한편 저 문구 중에 충신은 일가족도 몰살당한다는 말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데 부당한 권력(찬탈자등)에 대항한 사람의 경우, 그 권력자에게 미움을 사서 본인은 물론 연좌제로 일족까지 학살당하게 된다. 실제로 역사에 이런 경우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다. 따라서 이 경우는 정말 제대로 된 충신 또한 자신은 물론 일가족까지 몰살당하는 말이 충분히 성립한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조선의 성삼문을 들 수 있는데 그가 태어날 때 점쟁이가 충신으로 이름을 남길 것이라 하자, 그 조부가 탄식하였고 그 이유가 바로 충신으로 이름을 남길 상황이면 이미 막장상황이고 가족까지 연루되기 때문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2.2. 간신()

군주에게 바른 말을 간언하는 신하를 뜻하며 간신(奸臣)과는 동음이의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사실 요즘은 간신하면 이 뜻으론 잘 안쓰인다. 간(諫)이라는 한자는 의외로 한국사를 공부할 때 쉽게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언론 등의 역할을 했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가는 간(諫) 자와 같다. 군주에게 간쟁(諫爭)[6]한다고 할 때 그 간(諫) 자이다. 이렇게 '바른 말(諫)을 하는' 신하가 바로 간신(諫臣).

한국어에서는 저 단어를 쓰지 않고 '간관(諫官)'이란 대체어를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일본어에서도 1과 2를 똑같이 かんしん이라고 읽는다. 표준중국어에서는 간관을 뜻하는 간신(諫臣)과 간신배를 뜻하는 간신(奸臣)이 jian으로 발음은 같지만 간(諫)은 4성, 간(奸)은 1성으로 성조가 다르다.

3. 동아시아사의 충신

※ 충신의 종류는 총 6가지로 구분하여 서술한다.
  • 역이지언 : 군주에게 충심으로 간하였던 신하. 한국사의 성충 등.
  • 불사이군 : 두 군주/나라를 섬기지 않았던 신하. 한국사의 정몽주, 중국사의 문천상 등.
  • 이대도강 : 군주의 위기를 죽음을 마다치 않고 막은 신하. 한국사의 신숭겸, 중국사의 기신, 전위 등.
  • 충의지사 : 외세 등의 침공에 죽음을 다해 맞선 신하. 한국사의 계백, 중국사의 악비 등.
  • 구국영웅 : 외세 등의 침공을 물리쳐 국가를 구한 영웅. 한국사의 이순신, 중국사의 악비 등.
  • 고굉지신 : 권력이 있음에도 군주권을 탐하지 않고 군주의 신임을 받은 신하, 재상. 한국사의 김유신, 중국사의 제갈량 등.

충이라는 개념이 한자문화권에서 강조되던 개념이다보니 동아시아권에서 충신을 기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에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라서 자신이 섬기는 주군에게 절의를 다하는 이들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일본이 본격적인 유교의 충 개념을 국가지도 사상으로 활용한 것은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라서 한중 양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낮고 일본의 충신에 대해서는 충신이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아무리 막장이고 "망해가는 나라라 하더라도 반드시 충신이 세 명은 있다"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로 북송이 멸망할 때, 금나라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온 송나라 황후를 기녀 취급하며 희롱하자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송나라 대신과 장수, 왕족들이 입을 다물었는데 오로지 한 신하만이 이를 항의하다가 금나라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이를 본 다른 금나라 사람들이 망해가는 나라에도 충신이 세 명은 있다는데 송나라에 충신은 저 한 사람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고사를 찾아보면 꽤 인용되는 편으로 덕분에 북송의 막장성이 두드러지는 효과를 낳는 모양으로 보인다.[7] 하지만 남송이 망할때는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3 충신이 나라와 함께 목숨을 바쳐 북송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금나라 또한 9대 황제 애종 재위기에 들면서 명장 완안진화상이 1232년 삼봉산 전투때 까지 열심히 싸우다 몽골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때 곽하마 라는 장군도 금나라가 멸망하기 11년전에도 용맹하게 싸웠고 금나라가 멸망한지 2년이 지나도 결사항전을 하였지만 결국 몽골군 남송군의 총공격으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고 자신이 쓰던 활의 화살이 다 떨어지자 불길속으로 뛰어들어 자살을 하였다.[8]

3.1. 한국사의 충신

3.1.1. 고려 시대 이전

3.1.1.1. 역이지언
3.1.1.2. 불사이군
3.1.1.3. 이대도강
  • 밀우 (고구려)
  • 박제상 (신라) - 군주 눌지 마립간의 아우 미사흔을 돌려보내기 위해 왜왕을 속였으며, 체포되어 끔찍한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3.1.1.4. 충의지사
  • 계백 (백제) - 최영과 정몽주가 고려시대 충신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이순신이 조선시대 충신의 이미지를 상징한다면 계백은 한국 고대 충신의 이미지를 상징할 정도.
  • 성기 (고조선) - 성이(成已)라고도 불린다. 왕검성 전투 때 우거왕이 내부분열로 암살당한 뒤에도 1년동안 왕검성의 문을 걸어잠그고 우주방어를 지휘하면서 결사항전하며 버텨내다가 주화파의 사주로 암살된다.
  • 소나(신라) (신라) - 장정들이 대부분 밭일을 하러 나간 사이 말갈족이 공격해오자 분전하다가 온몸에 화살이 꽂혀 전사했다. 이에 크게 감명받은 문무왕에 의해 진골만이 될 수 있는 잡찬으로 추증되었다.
  • 연남건 (고구려) - 형 연남생이 당에 투항하고 동생 연남산과 보장왕이 항복한 뒤에도 평양성에서 끝까지 당에 맞서 싸웠으며 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시도했다.
  • 죽죽 (신라) -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신라의 충신이다.
3.1.1.5. 구국영웅
  • 명림답부 (고구려) - 고구려의 권신으로 폭정을 일삼던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 아우인 백고를 신대왕으로 옹립하였다. 첫 시작은 반란이었으나 이후 한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좌원 전투에서 노구를 이끌고 이를 물리쳐 고구려의 위기를 구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전통적인 전술인 청야 전술을 수립하였다.
  • 시득 (신라) - 신라의 이순신. 고구려를 무너트린 설인귀를 기벌포에서 이긴 장수이자 나당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장수.
  • 유유 (고구려)
  • 을지문덕 (고구려) - 살수대첩의 주인공.
  • 안시성주[9] (고구려) - 여당전쟁에서 승리한 영웅.
3.1.1.6. 고굉지신
  • 김유신 (신라) - 신라 삼국통일의 주인공. 군권을 쥐고 있었지만 동시대의 연개소문과 달리 일정 이상의 권력을 넘보지 않았고, 무열왕은 안심하고 그에게 군을 맡긴 채 한중일을 넘나들 수 있었다. 이후 그 아들인 문무왕 시대까지 가장 강성한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한번도 왕권을 넘보지 않고 삼국통일에 죽는 날까지 진력하였다.
  • 을파소 (고구려) - 고구려 고국천왕 시기의 명재상. 고국천왕이 초빙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그보다 더 높은 벼슬이 필요하다고 에둘러 표현하였다. 이에 고국천왕이 최고위직인 국상으로 그를 기용하였으며, 전폭적인 지지와 신임을 주었다. 을파소의 선정을 통해 고구려 초기 내정이 평안해질 수 있었다.

3.1.2. 고려의 충신

3.1.2.1. 역이지언
  • 서필 - 광종의 숙청에 직언을 했던 강직한 충신으로, 과거제와 여러가지 개혁정책에서는 찬성을 했던 인물이다.
  • 이인복 - 이인임의 형으로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고 동생 이인임에게 권력욕을 버리라고 충고했던 인물. 이조년과 같은 충신으로 이후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앞장섰다. 신돈의 권력 남용에 반발하여 신돈에게 대항하다가 파직당하지만, 다시 복귀하였다가 공민왕이 시해당한 1374년 사망한다.
  • 이조년 - 이인임과 이인복의 조부로 청백리로 이름났으며, 시조 다정가로 유명하다. 폭군 충혜왕에게 직언을 한 유일한 인물이다.
3.1.2.2. 불사이군
  • 길재 -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고, 끝까지 조선에 협력하지 않았다. 이색, 정몽주, 이숭인까지 하여 여말사은이라 부른다. 길재와 이숭인 둘 중 하나가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여말삼은이라고 한다.
  • 김통정 - 삼별초의 지휘관으로 여몽 전쟁 종결 이후에도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여몽연합군에 맞섰다. 다만 삼별초의 난을 국난 극복 항쟁의 사례로 보는 시선과 무신 정권으로 권력을 잃은 군부 잔당 세력의 반란으로 보는 시선이 엇갈리고 있어 이 부분은 충신으로 볼지 역신으로 볼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문대 - 제1차 여몽전쟁 당시 전사한 첫 번째 사망자로, 패전 뒤 항복 권유를 거절하고 오히려 고려군의 항쟁을 주장해 변을 당하였다.
  • 배중손 - 김통정과 함께 삼별초의 지휘관으로서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다.
  • 이색 - 고려 신진 사대부층을 길러낸 고려 후기의 문인이자 일명 사대부의 아버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제자였던 정도전에 의해 실각했고, 유배 중 사망하였다. 이숭인, 정몽주, 길재까지 하여 여말사은이라 부른다. 길재와 이숭인 둘 중 하나가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여말삼은이라고 한다.
  • 이숭인 -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 등의 모함으로 등에 장 100대를 맞고 죽었다. 이색, 정몽주, 길재까지 하여 여말사은이라 부른다. 길재와 이숭인 둘 중 하나가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여말삼은이라고 한다.
  • 이원계 - 이성계의 이복형.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명장으로 고려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충신이기도 했다. 그런 탓인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이복동생 이성계에게 회유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독약을 먹고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자결 여부는 논란이 있으며, 개국공신 명단에 없는 것도 이성계의 형이라는 특수한 처지에 따른 명분 문제라는 말도 있다.
  • 정몽주 - 충신의 표상. 그리고 충신이란 개념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세 원수를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충신으로 올린 첫 인물이다.
  • 하공진 - 거란에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끝까지 충심을 버리지 않아 요성종에게 처형당한 인물.
3.1.2.3. 이대도강
  • 기자오 - 충렬왕 카다안의 침입에서 강화도로의 피난을 호종한 충신으로, 가장 위험한 중군 편장이 되어 깃발을 등에 지고 선두로 달렸다. 하지만 아들, 농사는 잘못한 비운의 아버지.
  • 신숭겸 - 태조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자 스스로 미끼가 되어 왕건을 탈출시키고 전사했다. 아래의 김락과 함께 팔관회에서 두 사람을 기리는 행사가 따로 있고 예종이 손수 도이장가를 지을 정도로 고려 왕실에 의해 최고의 충신으로 대우받았다. 또한 후대의 조선에서도 충신의 표상으로 우대했다. 한국사를 통틀어 많은 충신이 있으나 스스로 왕을 대신해 죽은 사례는 찾기 힘들다.
  • 지채문 - 거란의 침공 당시 모두가 배신하여 도망갔을 때, 정체를 모르는 적들의 습격을 받자 홀로 현종을 지켜냈다. 이후에도 현종이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 때마다 현종을 호위하였으며, 엄청난 인간흉기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고려 사직은 여요전쟁에서 끝났다.
  • 안도치 - 공민왕을 따르던 환관으로 흥왕사의 난때 공민왕으로 위장하여 공민왕을 구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고려 환관을 대표하는 충신이다.
  • 유숙 - 이색과 더불어 수많은 학자들을 키워낸 대학자로, 이숭인, 정도전 등이 그의 제자이다. 흥왕사의 난 때 공민왕을 구했으나, 3원수와 관련되어 추모하는 시를 쓰다가 신돈에게 숙청되었다. 목은 이색과는 인척 관계이다.
  • 하공진 -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의 촌락을 공격했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당하였으나, 거란의 공격으로 유배에 풀려나 복귀하였다. 현종을 뒤따라가 거란군과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고 요 성종을 속여 거란군이 철수하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볼모로 잡혀갔으나 고려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였다. 요 성종의 갖은 회유에도 끝까지 고려를 저버리지 않아 결국 처형당하였다.
3.1.2.4. 충의지사
  • 강조 - 이 사람은 반역 열전에 오르면서 충신이기도 한 희한한 사례이다. 비록 목종 쫓아내는 정변을 일으킨 점 때문에 반역자가 되었으나 본인이 친히 왕위에 오르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현종을 등극시켜 사직을 지켰다. 나중에 거란과 싸우다가 잡혔을 때에도 전향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10]
  • 최춘명 - 최충의 후손으로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자주성 부사로 몽골에 맞서 항전하였다.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면서 고려 조정이 항복하며 다른 무인들도 왕명에 따라 모두 항복했지만, 홀로 항전을 주장하며 끝까지 버텼다. 고려 조정은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에게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오히려 몽골 측에서 충심을 인정하여 명을 거둘 것을 말해 살아남았다.
3.1.2.5. 구국영웅
  • 강감찬 - 20만 대군을 모아 거란군을 격퇴한 문관 출신 지휘관. 귀주대첩의 주인공으로 추앙 받는다.
  • 김경손 - 무신정변 이후 최고의 명장이자 최고의 충신으로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방경과 더불어 양대 충신 중 하나였으나, 형 김약선이 당시 최씨 정권의 후계자였던 최항과의 권력 투쟁 끝에 살해당하면서 그 또한 숙청당하였다.
  • 김득배 - 이방실, 안우와 함께 홍건적을 격퇴한 고려조의 실질적 마지막 충신들로 홍건적을 격퇴하자 마자 정세운과 더불어 김용의 흉계와 공민왕의 무능함으로 죽었던 고려말 비운의 인물이다. 정세운과 더불어 통칭 4원수로 칭하나, 정세운의 경우는 전공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며 3원수로 지칭된다. 김득배는 정몽주의 스승이기도 하다.
  • 김방경 - 김경손과 더불어 무신정변 이후 무인들중 으뜸가는 충신으로, 무인권력자들과 부원배의 끊임없는 회유와 참소를 버티고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였다. 여몽연합군을 이끈 무인으로 여몽연합군 준비의 가혹함을 정면으로 비판하였으며, 일본 원정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고려군의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 김윤후 - 처인성과 충주성에 활약했던 승군장으로, 전쟁의 활약 속에 살리타이를 사살하였다.
  • 김취려 - 강동성 전투에 참여했던 무인으로 조충과 함께 강동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이다.
  • 박서 - 김경손과 더불어 귀주성 전투를 이끌었던 충신 중 하나로 적재적소의 전략으로 몽골군에 승리를 이끌었다.
  • 서희 - 위의 서필의 아들로, 강동 6주를 탁월한 언변으로 얻은 외교관이다.
  • 안우 - 김득배, 이방실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한 고려조의 실질적 마지막 충신들로 홍건적을 격퇴하자 마자 정세운과 더불어 김용의 흉계와 공민왕의 무능함으로 죽었던 고려말 비운의 인물이다. 정세운과 더불어 통칭 4원수로 칭하나, 정세운의 경우는 전공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며 3원수로 지칭된다.
  • 양규 - 거란군과 전쟁에서 결사항전을 벌인 끝에 거란군을 물리치고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하고 목숨을 바친, 제2차 여요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무인이다. 함께 세트로 다니던 김숙흥도 마찬가지.
  • 원충갑 - 원주에 있는 치악성의 별초로 카다안의 침입 당시 결사대를 이끌고 카다안 반군의 기병을 격파하고 적병 400명을 전사 시키고 말 25필을 노획했다. 그 후 벌어진 치악성 수성전까지 잘 지휘해 전황을 바꾸는데 큰 활약을 했다. 후대 왕조인 조선 때는 원주 충렬사에 배향 되었다.
  • 유금필 - 동북면 여진족들을 정리한 후삼국시대 최고의 명장이자 참소를 당하고 유배를 먹음에도 오히려 고려 태조를 도운 충신으로 나말여초 호족들 중 가장 유명한 충신이다.
  • 이방실 - 김득배, 안우와 함께 홍건적을 격퇴한 고려조의 실질적 마지막 충신들로 홍건적을 격퇴하자 마자 정세운과 더불어 김용의 흉계와 공민왕의 무능함으로 죽었던 고려말 비운의 인물이다. 정세운과 더불어 통칭 4원수로 칭하나, 정세운의 경우는 전공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며 3원수로 지칭된다.
  • 정세운 - 홍건적을 격퇴한 계획을 짠 인물 중 하나로 김용의 흉계로 살해당했다.
3.1.2.6. 고굉지신
  • 경대승 - 무신정변 주동자 중 하나인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을 죽이고 ' 의종 시해자가 살아있으니 축배를 들 수 없다'고 외친 충신이다. 이 때문에 아래의 두경승과 마찬가지로 무신정권의 집권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반역열전이 아니라 제신열전에 기록되었다. 다만 무신 집권자가 된 후 수 많은 옥사를 일으켜 비판 받기도 한다.
  • 두경승 - 고위 무관이자 중방의 일원으로 무신 정권의 일부이기는 하였으나, 당시 일어난 많은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의민을 견제하여 무신정권이 왕위를 침탈하는 사태까지 가지 않도록 막아내었다. 결국 절대 정권을 원했던 최충헌에 의해 기습당해 유배당했고, 명종 또한 폐위되었다.
  • 최영 -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충신의 표상으로, 숱한 외적을 물리치며 왜구의 두려움을 사 "고려에서 두려워 할 것은 머리가 허옇게 센 최만호뿐이다" 하는 말을 들었다. 이후 권신이 되어서도 군왕의 명에 절대 복종하는 칼같은 군인이었으며,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이성계와 함께 고려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요동 정벌 대립으로 갈라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벌일 때에도 끝까지 맞서 싸웠으나, 결국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처형된다. 무의 최영, 문의 정몽주로 고려의 충신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 중 하나. 다만 이 둘은 살아생전 서로 정적이었다.

3.1.3. 조선& 대한제국

3.1.3.1. 역이지언
  • 김처선 -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삼가지 않다가 연산군의 손에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환관. 사극 왕과 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박문수
  • 정탁 -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이 파직되었을 때, 사형 직전까지 간 이순신 장군을 구명하는 상소인 "신구차"를 올렸다. 당시 이순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류성룡조차 이순신 구명을 포기한 상황에서 이순신을 살리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명 하나의 상소로 나라를 구한 인물.
  • 채제공 - 정조 대의 영의정이다. 정조가 담배에 중독됨을 넘어 담배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기에 이르자 사표까지 던져가면서 정조를 말렸으며 정사도 뛰어났던 명신이었다.
  • 허조
3.1.3.2. 불사이군
  •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생육신(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권절 or 남효온)
  • 정분 -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세종의 고명대신으로 단종을 보필하였다. 계유정난 당시 하삼도의 도체찰사로 나가있어 화를 면하였으나, 부임지에 돌아오던 중 유배를 당하였다. 그리고 처남 정인지의 거듭되는 회유를 뿌리친 끝에 결국 교형에 처해졌다.
  • 민영환 - 대한제국의 고관대작. 을사조약에 분노하여 자결함으로써 충정을 지켰기에 사후 충정공(忠正公)에 봉해졌다. 경술국치 이전에 죽어서 망국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동료 대신들이 일본 천황의 신하가 되기를 택할 때 변절을 거부했다는 데에서 불사이군의 일례로 볼 수 있다.
3.1.3.3. 이대도강
3.1.3.4. 충의지사
  •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 이들 부자 모두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으로 여러가지 전공을 세웠고 고경명과 차남 고인후는 금산전투에서, 장남인 고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 부자의 나라에 대한 충심은 유명했다.
  • 김상헌 -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의 대표 주자. 비록 화친과 싸움을 두고 최명길과 대립하였으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두 사람 모두 같았다.
  • 김여물 - 조선 중기 무관으로 임진왜란 시기 신립의 부장으로 충주 사수의 임무를 띠고 파견돼 상관인 신립에게 충주지형의 불리함을 간파하고 의견을 냈으나 신립에 의해 묵살되자 전투의 패배함을 미리 예지하고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했다.[11]
  • 박승환 - 구한말 군인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소령 계급의 군인이었다. 부하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던 참군인이었으며 일제의 군대해산 당시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해 원통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이 영향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의 시작점이 된 인물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사충신 - 임진왜란 첫 의병장 송빈, 김득기, 이대형, 류식을 칭하는 말로 김해성 전투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김해성 전투 책임자인 김해부사 서예원과 초계군수 이유겸이 도망쳤음에도 끝까지 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 삼학사
  • 송상현 - 임진왜란의 두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전사 후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의 용기에 감탄하여 정중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며, 추모비를 세웠다. 정발, 윤흥신과 함께 부산을 지켜낸 3대 맹장으로 숭상받는다.
  • 원연 - 개막장인 형 원균, 아버지 원준량과 달리 진위현에서 일본군의 용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상대로 기병을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고 연기현감 시절에도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다 왜군을 막다 장렬히 전사했다.
  • 윤흥신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대포에서 부하들이 몸을 피하라고 권고한 것도 거부한 채 일본군과 싸워 전사했다. 당시 휘하 병력은 불과 800명 수준이었으나, 상대군은 1만 9천여명에 달하였다. 송상현, 정발과 함께 부산을 지켜낸 3대 맹장으로 숭상받는다.
  • 정발 -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성 전투의 지휘관.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맞서싸우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고, 부산진 주변 백성은 물론 일본군마저 그를 기리는 의미로 흑의장군이라고 불렀다. 송상현, 윤흥신과 함께 부산을 지켜낸 3대 맹장으로 숭상받는다.
  • 최경회 - 최충의 후손이자 의병장으로, 금산과 무주에 승리했으나 진주성에서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인물이었다.
  •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위종, 이준)
3.1.3.5. 구국영웅
  • 권율 - 이치 전투와 행주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충신으로, 원균의 행태를 수없이 질타했으며 당대 문관 가운데 으뜸가는 충신이다.
  • 김시민 - 당시 임진왜란 진주대첩 대승을 거둔 영웅으로,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음으로써 전란의 판도가 뒤집혔다. 이 과정에서 10배나 넘는 일본군과 힘겹게 맞서싸우다 전사했다.
  • 김충선 - 일본에서 귀화한 장수로,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혁혁한 공을 세웠다.
  • 양헌수
  • 어재연 - 조선 후기의 장군으로, 초급장교시절 변방에서 비적을 토벌하고 시장을 열어 지방의 경제를 활성화한 공을 세워 순무중군이 되어 강화도에 파견되었고, 광성보에서 무기가 훨씬 우세한 미군과 싸우다 휘하 군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충절을 기려 쌍충비를 세워주었고 병조판서에 추증했다.
  • 어재순 - 어재연의 동생으로, 본래 선비이나 무작정 형을 따라가 종군하는데 형이 불효를 저지를 작정이냐며 혼을 냈지만, 나라가 어지러운데 어찌 떠나냐며 형을 따라 종군하다 형과 함께 전사하였고 후에 이조참의에 추증된다.
  • 이순신 - 한국사 성웅이자 충신의 대명사. 임금 선조에게 온갖 견제를 받았음에도 존망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고자 왜군과 끝없이 싸워 승리하여 조선을 구해냈다.
  • 이정암 - 조선의 의병장으로 1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5000명의 왜군을 상대로 큰승리를 거두었고 그후 이몽학의 난까지 진압해 전후 2등선무공신에 제수가 되었다.
  • 정문부 -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전쟁 중 반역자 국경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북관대첩 때 전쟁 중에 큰 공을 세웠으나, 이후 임해군, 순화군같은 망나니 왕자들과 재수 없게 엮인 바람에 결국 찍히고 이괄의 난 때 숙청되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 정충신 - 천민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장계를 전하기 위해 충청도부터 평양에 이르는 일본군 점령지를 혼자 돌파해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전하여 평민이 되었고, 이후 무과 시험에 급제하여 양반이 되었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홍타이지를 견제하는 중립 외교의 중심에서 활약하였으며, 이괄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름 그대로 충신으로 살아갔으며, 시호 또한 이순신, 김시민과 같은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 최명길 - 일명 조선판 서희. 인조 시대 주화파의 대표로 정묘호란 당시 후금과 강화를 성사시켰으며, 병자호란이 벌어졌을 때에는 사신을 자청해 시간을 끌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시간을 벌었다. 동시에 병자호란 당시의 항복 협상도 주도하였고, 이후 국정을 주도하며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 과정에서도 청이 명을 치기 위한 병력을 요구하자 홍타이지 면전에 대고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고 나라가 피폐하다고 선언하는 등,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고려의 서희와 함께 최고의 외교관으로 꼽힌다.
3.1.3.6. 고굉지신
  • 김종서 - 세종 대 6진을 개척하였으며,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며 섭정하였다.[12] 권신이었으나 청렴하였고 사치를 부렸던 기록이 없이 단종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수양대군 일파가 일으킨 계유정난 과정에서 살해 0순위로 지목되었고, 결국 살해당했다.
  • 류성룡
  • 최윤덕 - 세종대왕 시절 세종이 극찬한 최고 충신으로[13] 4군 6진 중 4군을 개척하여 세종조차도 인정한 신하로 군공을 세우자 이후 견제와 참소를 받게되었으나 세종이 그걸 물리치며 문관들조차도 그를 인정했다. 무(武)에서 이룬 공적으로 무려 무신임에도 정승까지 올랐다.
  • 황보인 - 세종 대 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하였으며,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고명대신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였다. 계유정난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3.2. 중국사의 충신

역사가 긴 유교의 본산지답게 충신이 정말 많다. 중국사 패권 전쟁 역사고, 수많은 군벌이 난무한데다 어느 정도 이익에 따라 움직였던 일본 무사계급과 달리, 이쪽은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그냥 주인 따라 죽어버리는, 다른 나라에서는 특급 충신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3.2.1. 하상주 삼대

  • 비간 - 상나라 성인이자 신하. 폭군 주왕에게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계속 잘못을 간하다가 끝내 심장이 뽑히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죽었다. '충신'이라는 단어가 호칭처럼 불릴 정도이며 중국사의 충신 항목에서도 시기 상 가장 빠른 인물이다.
  • 백이와 숙제 - 주 무왕이 상을 공격하려는 것을 만류하려다 목숨을 위협받은 후,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은거해 고사리를 캐먹으며 여생을 보냈다. 야사에 따르면 그 고사리가 나는 수양산 또한 주의 땅이 아니냐는 지적에 오류를 인정하고 식음을 전폐한 후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절개를 지키며 불사이군을 중시하는 충신의 전형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유교적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같이 있다.

3.2.2. 춘추전국시대

  • 굴원 - 초나라의 명재상으로, 암군 초회왕이 간신의 말을 들어 자신을 파면하고, 나라를 기울게 하자 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 사람의 고사로 단오절이 생겼다.
  • 개자추 - 춘추오패 가운데 한 사람인 진문공의 신하. 진문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 망명생활을 하며 곤궁했을 때 허벅지 살을 베어먹인 고굉지신(股肱之臣)의 고사가 유명하다. 훗날 진문공이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을 따른 신하들을 포상했으나 개자추는 조용히 은거했다. 포상하려 해도 끝내 거부하자 산에 불을 질렀으나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덥힌 음식을 삼가는 명절이 한식(寒食)이다.
  • 오자서 - 춘추시대 인물로, 오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사람 중 하나다. 자신의 주군인 오왕 부차가 미녀 서시와 정단에 빠져 나랏일에 소홀하자 옆에서 충언하였고, 끝까지 적국 월나라를 경계할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분개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살을 명령하여 끝내 오자서를 죽게 하였다.[14]
  • 신포서 - 초나라 신하로 오자서가 누명으로 부친과 형을 주살한 초 평왕에 대한 원한을 가져 오나라에서 재상을 지내 오나라 국력을 강화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개박살 낼때[15] 진나라 애공에게 구원해달라고 애원한다. 진 애공은 아끼던 누이를 초 평왕이 측실로 삼아 공실을 모욕한 초나라에 원한이 있어 자업자득이라며 거절했지만[16]신포서가 일주일동안 먹지도 않고 통곡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애공이 이런 신하가 있는 나라라면 아직 망할때가 아니라며 구원군을 보낸다.
  • 왕촉 - 제나라 대신으로, 명장 악의가 이끄는 연나라군이 침입했을 때 연나라로 귀순하라 제의받았으나,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 즉 여인이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듯이 신하가 두 군주를 섬길 수 없는 법이라는 말을 남기며 자결했다.[17]중국 고대사에서 충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 전단 - 제나라 이순신으로, 연나라 명장 악의가 이끄는 연나라군이 침입하여 멸망할 위기에 놓인 제나라군의 사령관에 올라 3년간 결사 항전하였으며, 악의를 실각시키고 그 후 연나라군을 총공격해 빼앗긴 70여개의 성을 수복하여 제나라를 수렁에서 건져냈고, 전후에도 제양왕을 잘 보필했다.
  • 인상여 - 강대국인 진나라에 맞서 조나라를 구원한 충신. 대부분 신하들이 기는 진나라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변설로 피 흘리는 일 없이 조나라의 보물 화씨의 옥을 지키고 진나라 조나라의 회담에서 진 소양왕의 협박에 금을 타는 창피를 당한 혜문왕을 위해서 소양왕을 역으로 협박해 소양왕이 북을 치게 하여 되갚아주는 등 목숨을 걸고 왕을 보필했다. 이후 염파가 인상여가 자기보다 높은 벼슬을 가진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모독을 하지만 인상여는 자신이 속한 나라의 국익을 생각해 이를 참고 분쟁을 피한 인품까지 겸했다.[18] 장평대전에서 진나라 재상 범수의 반간계로 염파는 경질되고 조사의 아들 조괄이 대장으로 임명되자 병중이었던 인상여는 경험없는 조괄에게 대장을 맡기지 말 것을 요청했다. 결론적으로 낮은 신분임에도 국가의 위기에 목숨을 걸고 대담하게 적을 기만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공로로 출세하고 사사로운 다툼으로 국론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피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나라에 간언을 하여 국가의 위기를 피하고자 노력했던 조나라 만고의 충신.[19]

3.2.3. 진한시대

  • 기신 - 초한전쟁 때 스스로 유방을 대신해 미끼가 되었으며 초군에게 사로잡힌 후에도 유방의 행적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죽음을 택했다. 항우에 의해 그 자리에서 화형을 당했으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계책에게 속은 적에 대한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신숭겸이 그의 고사에서 착안해 왕건을 살리고 죽었다. 다만 논공행상에 기신의 일족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옥의 티. 공신열표의 해연이나 기통이 기신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 여강 - 후한 영제 시기의 환관. 당시 환관들은 대부분 부패했지만 얼마 안되는 청렴한 환관으로 당인들을 사면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도리어 환관들의 모함을 사서 자살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환관 중에서 충성스러운 이로 언급되기도 한다.
  • 하후영 - 한고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특히 한고제가 수레를 빨리 달리게 하려고 자녀들을 수레 밖으로 던졌을 때 목숨 걸고 한고제의 자녀들을 구해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충성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온 덕에 숙청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20]

3.2.4. 황건적의 난 ~ 서진 통일

흔히 ' 삼국지 시대'라고 불리는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 간옹, 손건, 미축 - 관우, 장비,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유비를 절대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따랐다. 사실 유비의 1세대 세력은 휘하 병사들까지 포함해 의리남들의 모임인데, 유비가 장판파에서 그랬듯이 수도 없이 다른 세력에게 깨지고 도망쳐도 주군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아내면 바로 찾아가는 강력한 충성심을 보였다.[21]
  • 고순 - 마지막 순간까지 여포에게 충성했던 몇 안 되는 인물로, 그 우직함과 충성심은 물론 전투 지휘 능력까지 뛰어나 여포군의 핵심이나 다름 없었다. 고순이 이끄는 부대가 워낙 뛰어나서 함진영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통솔력과 무력을 빼면 모든 게 빵점인 여포는 여포에게 과분한 충신도 못알아보고 항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고순을 홀대한다.[22] 하지만 그럼에도 고순은 여포를 향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 관우 - 그야말로 충의의 화신이자 대명사 격인 인물로, 관우 무덤의 호칭인 림(林)을 보면 알겠지만 중국에서 관우의 의로움은 공자에 대비된다.
  • 관정 - 공손찬의 신뢰와 총애를 받았던 신하로 본디 악독한 관리였으며, 행실이 사람 마음을 혹하게 하거나 아첨을 잘해 '간신에 가까운 인물'이다. 원소와의 전쟁중 장연과 연합해 출격하려던 공손찬을 말려 최악의 수인 역경루 우주방어를 진언해 공손찬의 몰락에 기여했다. 이후 공손찬이 역경루에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결하자 '예전에 공손찬님이 출진하는 것을 막지만 않았다면 꼭 실패한다고만 볼 수는 없었던 것을... 내가 듣기로 군자는 남을 위험에 빠뜨리면 필히 자신도 그 고난을 함께 한다 했으니 어찌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하며 단독으로 말을 타고 단기로 돌격해 죽었다. 이처럼 무능하였으나 충신은 충신이었다.
  • 노숙 - 적벽대전을 치르기 전 하북과 형주를 다 차지한 조조가 항복을 권유하자 손오의 중신들은 대부분 수긍했으나, 노숙만 유일하게 이에 반대하였다. 주유 사후에 오나라 대도독이 되었으며 익양대치때는 미래를 감안하여 항상 우호적으로 촉과 오의 분쟁을 가라앉혔다.[23]
  • 엄안 - 유비군에게 투항한 부분에서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장비가 오히려 감복하여 설득했을 정도의 충의 때문에 후세에는 충의의 한 사례로 회자되었다. 가끔 조선 시조에 '엄장군의 충의'라는 대목이 나오곤 하는데 여기서 엄장군이 엄안이다. 사실 투항한데다 투항 후에도 활약을 보이거나 진짜 충신의 면모를 보인 적이 없으므로 여기 있기엔 다소 모자란 인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충신의 대명사 중 하나로 굳었다.
  • 왕윤 - 정치술이 없어 난세를 막지 못하고[24] 그 때문에 후한의 멸망을 막는데 실패한 인물이었으나, 한나라를 위했던 충심만은 의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 육손, 육항 부자 - 오나라를 위해 온몸을 다 바쳐 충성했지만 둘 다 막장 황제 밑에서 고생만 하다 떠났다. 아버지인 육손 최고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 영웅에 항상 오나라를 떠받든 기둥이다. 아들인 육항 역시 오나라를 마지막으로 수비한 명장중 하나이며 오나라의 멸망을 10년 정도 늦춘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장비 - 의외로 관우와 비교하여 이상할만큼 충의가 부각되지 않는 장수인데,[25][26] 장비 역시 관우와 마찬가지로 처음 유비를 섬기기 시작한 후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을 배신하지 않으며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이다. 즉 촉한의 믿을 수 있는 명신이자 충신이었다.
  • 전위 - 자신의 주군을 목숨 걸고 지켜낸 인물이다. 전위가 죽은 뒤 조조가 직접 그를 위해 곡을 해주었다.[27]
  • 조운 - 주군인 유비 가족을 구하고자 조조의 대군이 혼란스럽게 날뛰는 장판 일대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던 충신. 그는 공과 사를 구분하여 몸가짐을 단정히 했고, 주군의 결정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간언도 주저하지 않았던, 평생 조국인 촉한을 위해 살다 간 충신이다.
  • 주유 - 적벽대전에서 오나라의 승리를 이끈 오의 군권 1인자이자 전략가, 그리고 구국영웅으로 손책 휘하때부터 그를 곁에서 보좌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후 손권 휘하에서도 여전히 오를 위해 적벽대전 같은 어려운 전투에서도 승리를 이끄는 모습을 보였다.
  • 진태 - 진군의 아들이며 하후현과 함께 조위에 충성을 다했던 인물. 가충 성제를 시켜 황제 조모를 시해한 뒤, 사마소는 진태에게 황제를 시해한 일을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사과할 수 있겠느냐 물었다. 이에 진태는 ' 가충을 죽여야만 한다'고 말했다. 사마소는 가충을 죽일 수 없다며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지만 진태는 "오직 그 이상이 있을 뿐입니다[28]"라고 대답하였다. 진태는 그 후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원인불명으로 죽었다. 하후현과 함께 위나라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유이했던 충신.
  • 제갈량 - 역사 속의 권신들은 많다. 하지만 창업 군주 무지막지한 권력을 대놓고 일부러 떠넘겨준 사례는 희소하다.[29] 게다가 그렇게 받은 권력을 권신이 사유화하지 않은 사례는 더더욱 희소하다. 유비 사후 그 아들인 유선을 잘 보필했고, 온몸을 바쳐 촉한을 부강하게 하려 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 충신의 표상. 오장원에서 사망하면서 유언을 남길때도 촉한을 걱정하였으며 유선에게 충무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제갈첨 - 제갈량의 아들로, 제갈량 사후 촉한의 내정을 맡았고 면죽에서 위군을 막다가 3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항복을 거부하고 위군과 끝까지 싸웠으며, 그 재주와 지혜는 아비보다 못했으나 충심은 아비 못지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충신임에는 틀림없다.
  • 하후현 - 그야말로 조위의 마지막 충신으로서 역심을 품은 본인의 매제를 막으려다 목숨을 잃는다.
  • 황개 - 손견- 손책- 손권을 다 모신 손가 3대의 공신으로서 적벽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서 손가 3대를 위해 용맹하게 싸운 인물이다.
  • 황숭 - 이릉대전 당시 패배하고 항복한 황권 차남으로, 아버지 황권이 항복해 위나라에서 벼슬을 한 것과 달리 촉한에 충성을 다했으며,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과 함께 촉한의 마지막 저항을 이끌다 끝내 전사했다.
  • 헌목황후 조씨 - 조조의 둘째 딸로 조조가 삼공을 없애고 승상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황실을 껍데기만 남겨놓자 황제 측에서 외척(동승,복황후)을 동원해 조조에게 저항했는데,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나자 아예 자신이 직접 외척이 되어 황제파 친위세력이 생겨날 여지를 없애기 위해 시집보낸 딸이다.[30] 정작 헌목황후는 조씨를 위해 시집간 조씨의 딸임에도, 오히려 한나라의 마지막 충신이 되어 끝까지 헌제와 몰락한 한실을 섬겼다. 헌목황후의 오빠인 조비가 선양받은 이후 산양공(헌제)에게 황제의 옥새를 달라고 신하를 보내자 유일하게 저항하였다. 이를 끝내 막을 수 없자 결국 옥새를 난간 아래에 집어던지고 나서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 하고 외치면서 통곡했다. 오늘날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하늘이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라던 조절의 말은 결과적으로 모두 적중했다. 조절의 남편을 끌어내리고 세워진 위나라는 건국 20년도 채 못 되어서 휘청거리기 시작하고 찬탈 당사자인 오빠 조비는 즉위 6년만에 40세의 나이로, 뒤를 이은 조카 조예도 30대 중반에 요절했다. 화룡점정으로 위나라 황후 황제 사마씨 권신에게 살해 및 폐위를 당하고, 그 뒤를 이은 황제는 아예 백주대낮에 권신 일파에게 끔찍하게 암살당하는 사마소 시군(사마소가 임금君을 시해하다弑)이 일어났다. 이처럼 조위 사직은 후한 말 헌제가 당한 것 이상으로 비참한 수모를 겪으며 망조가 단단히 들고 만다.[31] 이상의 사건들 모두 조절의 생전에 일어난 일들이다.

3.2.5. 남북조시대

  • 곡률광 - 북제 명장으로 늘 침입해 오던 북주의 침략을 막아낸 장수였으며, 그 공으로 딸이 황후로 책봉되는 등 권세의 정점에 올랐고 그 뒤로도 묵묵히 북제를 위해 일했으나 그 누구도 아닌 사위였던 고위 때문에 죽고 말았다.
  • 안견원(顔見遠) - 제나라의 정치가로 소보융(蕭寶融) 소연(蕭衍)에게 선양할 당시에 그를 따라 죽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손자는 문학가 안지추(顔之推)로 소보융이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진수하고 있을 때 녹사참군(錄事參軍)이 되었으며 황제로 즉위하자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겸(兼) 중승(中丞)이 되었다. 소연이 선양을 거치면서 이에 반대하다 며칠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소연은 안견원이 음식을 먹지 않다 죽은 것을 듣고 이에 한탄하며 이 일은 충성스러우나 교훈으로 삼을 수는 없다 말했다.
  • 장승(張嵊) - 극악의 상황에서 망해가는 양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 장온의 후손으로 어려서 궁술과 검술에 능했으며 싸울 때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웠다. 후경이 양나라를 배반하고 건강으로 남하할 때 방어해야 할 사령관이 기병 1기에 놀라 도망가고, 적군이 성문앞에 도달했는데도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등 이미 막장에 치달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후경은 적은 병력으로 수도 건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장승은 동생 장이(張伊)를 건강에 파견하여 돕게 했지만 장이가 도착할 때는 이미 건강이 함락된 후였다. 이에 어사중승(御史中丞) 심준(沈浚)이 장승에게 양나라의 부흥을 위해 거사를 일으키자고 조언했는데 이 말을 들은 장승은 군사를 모집하고 성을 보수하여 후경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이미 건강을 함락한 후경군의 기세는 막을 수 없었고,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장승은 군복을 벗고 북향에 사배를 올렸다. 후경의 군사가 장승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데도 침착하게 항복을 거부했다. 후경은 이런 장승의 충심을 알았기에 계속해서 항복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후경은 참모 임약의 조언을 받아들여 장승을 참수했다. 원제 소역은 후에 장승에게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렸으며, 《 양서》의 편찬자였던 요사렴도 그가 충정스럽다며 칭찬했다.
  • 최옹(崔顒) - 북위 동위의 충신으로 최선위의 조부이다. 왕사정(王思政)과의 전투에서 그의 능력을 알고 투항을 권유했음에도 무시하고 왕사정과 싸우다 전사했다.

3.2.6. 수당시대

  • 곽자의 - 엄청난 권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권신, 충심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신인 인물. 명신 항목이 작성된다면 그곳에도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단적으로 이 사람이 존재했기에 당시 개판 5분전으로 돌아 가던 당나라가 수명을 무려 150년이나 더 이어갈 수 있었다. 또한 인생의 승리자이기도 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노초(盧楚) - 수나라의 충신으로 원문도와 함께 무너져 가던 수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충신이다. 왕세충이 난을 일으켰을 때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황제 양동을 지키기 위해 혼자 도망치지 않았다.
  • 안사순 - 안녹산의 일족으로, 설눌의 휘하에서 토번을 공격한 이래 당나라의 국경 방어에 주력했고, 이후 이헌충(아포사)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천리와 협공해 이를 진압했으며 그 공으로 삭방절도사를 연임했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간하는 당나라의 충신이었으나 안사의 대란이 일어나자 조정으로 소환되어 호부상서로 임명되고 이후 가서한의 무고로 참살당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곽자의[32]가 안사순의 누명을 벗길 것을 청하자 안사순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 원문도(元文都) - 수나라의 대신으로 수양제에 의해 거의 무너져 가던 열악한 상황에서 양동에게 충성하며 이밀과 맞섰고 황제가 될 야심을 품었던 왕세충을 제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최후에는 단달의 계략에 걸려 참수될 때도 자신의 목숨보다 수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다.
  • 황보탄(皇甫誕) - 수나라의 충신으로 수양제 아버지을 살해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양량을 끝까지 저지하며 충절을 다했다. 양량이 문을 부수고 황보탄을 죽이려 했을 때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양량을 꾸짖었으며 이에 양량에게 살해당했다. 생전에 양용을 태자로 세워야 한다는 기록을 보면 단순히 수양제의 측근이 아닌 수나라의 충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2.7. 오대십국시대

3.2.8.

  • 문천상 - 그 절의는 몽골도 감탄하여 목숨은 살려주려고 했으나 그가 있어서 잔존 세력의 저항이 계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였다. 처형 당하기 전에 남긴 '오사필의'[33]라는 말은 나라에 대한 충절과 죽음에 대한 의연함으로 후세에 귀감으로 남았다.
  • 범중엄 - 북송 중말기 시절의 문무겸비한 명신이자 명장이다. 1033년 서하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송을 침략하러 오자 전운사로 파견되어 대순성에서 서하의 6만 대군을 막아내었다.
  • 악비 - 중국인들이 우국충정의 충신이라고 하면 첫 손가락에 꼽는 영웅. 금나라의 침공을 막고 분투하며 옛 도읍으로 돌아가려 노력했지만 권신 진회의 모함을 받고 죽고 만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세충이 진회에게 악비가 죽을 이유를 대라고 말하자 진회가 "莫須有"(막수유, 아마 있을지도 모르오)라고 말한 것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까이고 있다.
  • 육수부 - 나라와 같이 운명을 다했다. 남송이 멸망하는 최후의 해전인 애산 전투에서 어린 황제와 함께 병사들과 똑같이 소박한 식사를 하며 지휘했다.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소제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함선으로 원나라 군사들이 들이닥쳐 병사들이 쓰러지자 마침내 어린 황제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하고[34] 남송은 멸망하고 만다.
  • 장세걸 - 문천상, 육수부와 함께 송말삼걸로 꼽히는 남송의 충신.
  • 진의중 - 남송 말기 시절 양양 공방전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은 범문호를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고, 부패하고 간신배같은 재상 가사도를 탄핵시키고 임안이 함락하자 온주로 도망가 남송 망명 정부를 세운 재상.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 등 소수의 충신들과 무관들을 이끌고 남송의 국사를 끝까지 돌보았다. 하지만 문천상이 오파령 전투에서 패하고 참파로 도망가 남송의 부흥을 도모하려 하였지만 얼마 못가 섬국에서 영면한다.
  • 한세충 - 남송 때 방랍의 난을 진압하고, 금나라에 대항한 명장이다. 한세충 악비(岳飛)와 유기(劉錡) 등과 함께 금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아 송 황실의 명맥을 유지하고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힘쓴 무장이었다.

3.2.9. 명청시대

  • 방효유 - 영락제의 즉위를 끝까지 반대한 인물로, 결국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았다.[35] 쉽게 말하면 ' 명나라 성삼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물론 성삼문보다 전대 사람이긴 하지만.
  • 우겸 - 명나라의 신하로, 이 사람을 평하자면 최악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의 총대를 매 나라를 살렸으나 결국 자신을 망친 충신이다. 간신 왕진의 농간으로 명군이 토목보에서 참패하며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대사건이 일어나자, 천도론을 잠재우고 새 황제를 옹립해 항전태세를 굳혀 결국 위기를 극복했다. 그러나 국난을 이겨내기 위해 새 황제를 옹립한 부분이 문제가 되어 결국 죽임을 당했다.
  • 원숭환 - 명나라의 이순신이라 불릴만한 충신으로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위해 국경 지역의 방어 사령관으로 최선을 다해 적을 막아내었으나 모함을 받아 처참히 죽었다.
  • 정성공 - 반청복명을 같이한 이정국과 호흥 거부 등 기타 논란이 많은 인물이지만, 청나라가 제시한 부귀영화를 준엄히 거부하고 평생 명나라 황실을 복구하기 위해서 청나라와 계속 싸웠다. 또한 남명의 황제인 융무제가 그를 사위로 삼고싶었다는 일화, 청나라 황실에서 정성공의 충심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명나라의 마지막 충신으로 불린다.
  • 임칙서 - 몰락해가는 청말 최고의 충신. 포청천에 빗대어 '임청천'이라 불릴 정도로 청백리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아편전쟁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청의 관료 중 임칙서만이 영국의 침략에 그나마 제대로 맞선 경우였을만큼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강했으며, 아편전쟁의 배경과 현대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마약이 금지되는 이유를 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후대 중국인들은 '임칙서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를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3.3. 일본사의 충신

3.3.1. 센고쿠 시대 이전

3.3.2. 센고쿠 시대

3.3.3. 센고쿠 시대 이후

  • 노기 마레스케 - 메이지 시대의 군인으로, 자신의 실책[40]에 대한 사죄로써 자결하려 할 때 메이지 천황이 "짐이 죽을 때까지는 할복을 허할 수 없다"라고 만류했다. 물론 메이지 천황의 의중은 "죽지 말고 살아라"였지만 노기는 나중에 메이지 천황이 붕어하자 정말로 주군을 따라 자결했다.[41]
  • 도쿠가와 나리아키 - 에도 막부 말기 미토 번주. 국학을 후원하고 황실을 숭경했다.
  •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 에도 시대 말기, 막부의 충신이었으나 동시에 조정을 숭상하여 고메이 천황과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받았다. 사후 황실에게서 '충성령신(忠誠霊神)'이라는 신호(神号)를 받았다.
  • 아나미 코레치카 - 쇼와 시대의 군인으로 천황의 신임을 받아 시종무관을 지냈다.[42]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육군대신으로서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천황의 의향에 따라 뜻을 굽히고 스즈키 총리와 함께 종전을 위해 노력했다. 종전선언 당일 새벽 육군의 수장으로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43]
  • 오이시 요시오(大石良雄)와 46명의 낭인들 - 추신구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주군의 복수를 하고 할복했다.

3.4. 베트남사의 충신

  • 쩐흥다오 (진흥도) - 원나라를 무찌른 월남 진 왕조의 장군. 월남사 명장, 충신의 대명사.
  • 응우옌 찌 프엉 (완자방)
  • 또 히엔 타인 (소헌성)

4. 서양사의 충신

서양은 평생을 주군과 나라에게 충성하는 동양과 달리 주군이나 나라가 힘을 잃으면 배신하는 게 보통이었지만[44], 이 쪽에도 기사도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와 주군에게 평생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 있다.
  • 이타이 - 성경 개역개정판에서는 잇대, 공동번역에서는 이때라고 불린다. 히브리 출신이 아닌 필리스티아 출신임에도 그는 다윗을 따라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나중에는 다윗의 신임을 받아 장군까지 오르게 된다.
  • 발리앙 디블랭 - 예루살렘 왕국 기사이자 영주.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4세 밑에서 종군했는데, 보두앵 4세는 나병을 앓았기에 다른 영주들이나 기사들이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발리앙은 보두앵 4세를 진심으로 따르며 그를 보필하여 여러 군공을 세웠다. 보두앵 4세 역시 이에 감격하여 자신의 계모와 발리앙을 엮어주거나, 죽기 전에 조카 보두앵 5세의 안위를 부탁하는 등 이들은 지금까지 서양판 최고의 협과 사 관계로 꼽힌다.

5. 창작물 속의 충신

6. 매직 더 개더링의 카드

Loyal Retainers 항목 참고. 말 그대로 충신이라는 개념을 이용한 카드이기에 충신 일람이 아니고 단락에 따로 작성한다.

7. 마르크 함싱크의 소설

조선 영조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저자 마르크 함싱크는 한국계 벨기에인[118]인데, 한국어를 모른다고(!).

8. 관련 문서


[1] 군주 개인을 위한 충이었다면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폐가입진에 찬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그러나 이 때문에 맹자는 여러 군주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맹자의 논리에 따르면 군주는 인하고 의로운 정치를 펼쳐야 자신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언제라도 쫓겨나는걸 각오해야 하는데 세상 어느 군주가 이런 논리를 좋아하겠는가. [3] 이런 경우를 간신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한 면이 있다. 간신은 군주나 정권 자체에 충성했다기보다는 이들에게 빌붙어서 단물을 빨아먹는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봉신연의에서 등장하는 문중을 다른 진짜 간신배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4] 때문에 이런 충신들의 경우에는 진짜 나라 혹은 군주가 급한 위기에 처하면 간신과는 달리 어떻게든 나라나 군주를 지키려고 한다. 즉 충심만은 진짜라는 것이 간신과의 큰 차이점. 섬기는 군주가 어리석다는 점은 간신과 유사하지만. [5] 진순신은 이 위징의 말을 두고 그가 본래는 당태종과 적대 관계에 있던 형 이건성의 수하였던 특수성에서 나온 말이라는 해석을 남긴 바 있다. [6] 어른이나 군주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절히 말함. [7] 이에 대해 당대에는 북송 황실의 가계가 조광윤 계가 아닌 동생 조광의(송태종) 계로 계승되었다가 남송 때에 가서야 다시 조광윤 계로 계승되는 것을 인용해 일종의 ' 사필귀정'인 것으로 해석하지만, 관점이 다른 현대인들 눈에는 그저 북송의 비참한 최후에만 눈이 갈 뿐이다. [8] 논란 또한 존재하는데, 계백 처럼 마지막을 대비해 가족들을 죽였다는 점과 애꿏은 백성들을 데려다가 승산도 없는 전투에 참전시킨 점 이다. [9] 흔히 양만춘으로 알고 있으나,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때 부터 나온 것으로 본명과 다를 확률이 매우 높다. [10] 반면 그의 부관 이현운은 거란에 전향해버렸다. [11] 김여물 본인은 충신이지만 아들인 김류와 손자인 김경징이 온갖 추태를 보여주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성에 금을 냈다. [12] 문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기력이 쇠하여 말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명대신이 없다. [13] 세종은 최윤덕을 두고 개국 초에 최윤덕 처럼 무신으로서 정승에 오른 이는 있었지만 어찌 최윤덕 만하겠냐며 최윤덕을 칭찬했다. [14] 냉정히 보면 초나라 출신임에도 복수심에 고국 초나라를 개박살냈다. 진짜 진나라 구원군을 이끈 신포서와 평왕의 서자 공자 신, 공자 결과 평왕이 죽인 투성연의 아들들이 목숨을 바쳐 초 소왕을 보필하지 않았으면 초나라는 그날로 멸망했다(단 오자서는 왕손 승을 초나라 왕으로 등극시키고 자신이 재상이되어 초나라를 오나라 속국화하려고 했다. 초나라 국토맛을 본 합려가 질질 끌었다. 또 오자서는 복수심에 평왕의 묘를 파해쳐서라도 평왕의 시체를 매질하였으며 평왕은 말년엔 암군 이었어도 초나라 국왕이라 평왕 시체 매질은 초나라 민심이 이반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오자서가 초나라를 상대로 공격한 것에는 비판이 없는데 따지고 보면 오자서가 나라를 먼저 버린 것이 아니라 평왕이 오자서 일가(오자서의 부친과 형을 처형)를 버린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5] 수도 영까지 초토화 되었으며 평왕의 묘는 파해쳐 오자서가 초 평왕의 시체를 구리채찍으로 때렸다. [16] 신포서는 부끄러워 입이 백개라도 할말이 없지만 초소왕은 진 애공의 조카이며 어린 왕에게 부친의 죄를 묻는 것은 심하다고 항변했다. [17] 악의도 왕촉이 죽은 것을 알자 크게 낙담해서 고개를 숙였으며 다른 제나라 대부들은 평민에 불과한 왕촉의 의로운 죽음에 깨달음을 얻고 함락되지 않은 즉묵성과 거성으로 모여들었고, 결국 제나라는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갔으니 왕촉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악의 또한 연나라 소양왕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았으며 태자에게 악의는 배신할 겁니다 하는 모함을 받자 오히려 소양왕이 태자를 때려 악의가 제나라를 먹으면 그대로 주려고 했다며 큰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에 감명받은 악의가 제나라를 거세게 공략한건 덤... 다만 소양왕 사후 태자가 혜왕으로 연나라 왕으로 올랐고, 즉묵성을 지키고 있었던 전단은 혜왕이 악의를 미워하고 있음을 알고는 '악의가 일부러 제나라의 남은 성을 치지 않는 것은 반역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이간계를 걸었다. 매가 부족했던 건지 혜왕은 이를 듣고 '옳거니! 내 진작 악의가 역적임을 알았지'하며 악의를 실각 시킨다. 이대로 멀뚱히 있다가는 혜왕의 손에 죽겠다 싶었던 악의는 처자마저 내팽개친 채 조나라로 달아났다. 이후 전단의 계략에 연나라 군대는 박살나고 혜왕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일이었다. 조나라로 달아난 악의는 그곳에서 망제군(望諸君)에 봉해져 연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던 시절 못지 않은 높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혜왕은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면서도 나라를 버리고 달아난 잘못을 꾸짖는 내용의 친서를 악의에게 보내 다시 연나라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이때 악의가 혜왕의 요청을 거절하며 보낸 답서인 <보연혜왕서>(報燕惠王書)는 상당히 유명한데, 그 중 한 대목은 이렇다.'군자는 친구와 교제를 끊더라도 그 친구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직역하면 군자는 교제를 끊더라도 나쁜 소리를 내지 않으며, 충신은 나라를 떠나더라도 옛날 임금을 욕하지 않는다.로 선왕의 은혜는 잊지 않았으니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연나라에 위해를 끼칠 행위는 일절 하지 않겠다며 분명히 선을 그은것. 소국이었던 연나라를 부국강병시킨 악의는 천하가 인정하는 명신이지만 정황상 악의에게 충절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사정이 어땠건간에 조국과 처자를 버려 능력인는 명장임에도 충신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18] 이후 염파가 진솔하게 사과하고 반성하여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와 사죄하자 인상여는 손수 일으키고 문경지교로서 의형제까지 맺었다. [19] 염파의 경우 진나라의 동진을 막던 장군이었지만 장평대전 이후(대패한 이유는 조괄 탓이지만...) 늙었다는 이유로 해임당하고 교체할 악승의 부대를 공격하고 위나라로 망명을 해 오점을 남겼다. [20]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후손인 하후씨들인 하후돈이라던가 하후연 등은 조조를 도와서 결국 한나라 멸망에 이바지했다. [21] 사망이 확실치 않은 손건과 간옹과 다르게 미축의 말년은 암울했는데 동생 미방이 형주 공방전에서 형세가 불리하자 관우를 배신하고 동오에 항복해버리고 만다. 만약 항복하지 않았다면 관우의 번성 포위망 와해로 완과 허도까지 노리는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촉의 형주 방면 총사령관 관우와 그가 이끄는 군대는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 포위를 더 굳건히 유지해 양양은 연락이 끊겨서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적어도 후방 방어선이 무력화되지 않았다면 관우군은 성과를 올리고 귀환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만약 방어선이 뚫려서 설사 오군에게 형주를 내주더라도 유비가 있는 익주로 퇴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방의 무기력한 항복으로 인하여 위로는 위군이, 아래로는 오군에게 포위된 관우의 군사는 사기를 잃었고 관우와 관평은 목숨을 잃었으며, 형주는 오나라의 영토로 편입되고 만다. 관우의 사망에는 여러 사람(부사인,유봉,맹달)들의 배신이 있었지만 미방의 지분이 나름 컸던것. 이후 미축이 동생 미방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를 결박하고 유비에게 죽여달라고 죄를 청했으나, 유비는 미방의 죄는 결코 미축과 관계 없다며 그를 위로하고 존숭하여 대우하길 처음과 같이했다. 그러나 미축은 부끄러움에 병이 나고 말았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22] 여포는 결국 고순의 충성심은 알았으나 본인의 성격은 고치지 못했고 결국 나중에는 고순에 대한 믿음조차 흔들려서 고순의 군대를 빼앗아 위속한테 줬다가 싸울 때만 고순한테 다시 돌려주는 너무나 몰염치한 짓을 했다. 그리고 고순이 해준 피같은 조언을 무시했는데, 그 대가는 여포 본인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23] 다만 사후 손권은 노숙이 형주를 제대로 도모하지 못하고 형주를 다시 돌려받지 못했음은 아쉬운 점이라고 솔직하게 평가했다. [24] 정확히는 식견, 여포를 회유하고 동탁만 죽이면 한실이 부흥할줄 알았다...다만 동탁을 죽였을때 군사력을 확보해야 했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 [25] 중국 민중에게 관우는 선망과 숭배, 존경의 대상이지만 장비는 동일화의 대상이라 그렇다는 설이 유력하다. [26] 그러나 그런 대중적 이미지는 실제 행적에 따라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조조가 서주에서 유비를 크게 격파했을 때 둘의 행적 때문에 평가가 달라졌을 확률이 높다. 관우는 단순히 유비를 죽을때까지 따른 것 뿐만 아니라 천하를 거머쥔 조조 밑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포기하고 갔다. 비유하자면 중소기업이 망했을 당시 관우와 장비 둘 다 대기업 관리직에 스카우트될 능력이 충분히 있었고 사장이 사업을 다시 시작하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간 것은 같으나, 관우는 그동안 대기업에 헤드헌팅되어 회장의 신뢰와 포상도 두둑히 받은데다 출세 코스까지 탄 상태에서 돌아간 것이다. 장비의 충성심이 덜 하다는게 아니고, 관우가 택한 길이 더 어려웠기에 그만큼 관우가 더 충의지사로 부각되는 것이다. [27] 이 일화로 연의에서는 조조의 적자 조앙의 죽음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전위의 죽음에는 곡을 했다고 각색했다. 자식보다 충신을 더 대우해준다는 각색이지만(위나라의 미래를 보자면 사실 조앙의 죽음은 전위의 죽음보다 더 큰 손해였다). [28] 가충이 아니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즉 진짜 역적인 사마소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 [29] 사실 손오의 손책이 임종 시에는 장소에게 손권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손권의 능력이 못하다면 그가 직접 나라를 취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제갈량과 장소의 차이점은 장소는 유표가 죽어 무주공산이 된 형주를 조조가 함락하고 강동 땅을 노리자 주화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들어 항복을 주장하여 손권의 눈 밖에 난 반면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위나라에 항전했다. [30] 이 밖에 다른 딸인 조화와 조헌을 후궁으로 보냈다. [31] 이 조모 시해 사건 때 위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를 이은 황제 조환은 재위기간 내내 사마소가 올린 문서에 도장만 찍어주는 신세였고, 진정 그에게 충성하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으며 조환 자신도 두 명의 선대 황제들과 다르게 꼭두각시 황제 역할을 조용히 잘 수행(?)하다가 순순히 선양해주었다. 한 마디로 소제 유변, 헌제 유협보다 더 무력한 신세였다. [32] 안사순이 삭방절도사로 있던 시절 곽자의는 이광필과 함께 안사순의 수하였다. [33] 나의 할 일을 다 했다. [34] 태후와 황족들, 신하들도 수없이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35] 구족보다 더한 십족주멸의 형벌이었다. [36] 에도 시대 유학자들이 뽑은 충신 3명. [37] 도쿄 황궁 앞에 동상이 세워진 무신과 문신 2명. [38] 도쿄는 '도쿄를 황위에 앉히면 나라가 평안하다'라는 신탁이 우사 신궁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했으나, 키요마로가 도쿄의 협박을 무릅쓰고 직접 확인하러 간 결과 거짓이란 걸 밝혀냈다. 격노한 도쿄에 의해 다리 힘줄이 잘린 채 규슈로 유배당하지만 도쿄 실각 후 복직하여 훗날 간무 천황 헤이안쿄 조영에 가담한다. [39] 이 때 키요마로가 우사 신궁에서 새로 받은 신탁은 '우리나라는 개벽이래 군신(君臣)의 직분이 정해져, 신하로서 군주가 되려 함은 전례가 없다'라는 내용으로 도쿄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40] 서남전쟁에서 적군에게 군기를 빼앗긴 것, 러일전쟁에서 막심한 인명피해를 낸 것. [41] 이 때 노기는 아내가 살기를 바랐으나 아내 역시 남편을 따라 자결한다. [42] 천황에게서 군복을 하사받거나 출정 전날 단둘이 식사를 하는 등 각별한 사이였다. [43] 안타깝게도 일본 국외에서는 결사항전을 부르짖은 군국주의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44] 정확히 말하면 보통은 아니고 여기도 배신이 터부시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불효와 불충을 동일선상에 놓아 역적=쓰레기나 다름없는(즉, 쿠데타에 실패하면 역사에 남는 쓰레기가 되는) 동양보다는 저항심리가 덜했다. 또한 이건 절대왕정의 얘기고, 봉건국가의 경우 왕과 영주들이 군주와 신하라기보단 계약관계에 가까웠기 때문에 얘기가 좀 다르다. [45] 이 쪽은 그냥 이름만 충신(忠臣,타다오미라고 읽는다)이다(...). 오히려 지위는 총수라는 설정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이다. [46] 현재 폭군이 된 신룡이 뭘 하든 생각없이 사는 누구랑 관심을 두지 않고 방랑시인으로 사는 누구하고는 참 다르게 유일하게 사군자 중 그에게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충언과 직언 등 바른 말을 아끼지 않는다. 단, 춘매는 신룡이 타락하기 전에 죽었으니 제외다. [47] 6기 애니판 한정으로 자신의 상관을 불속에서 구해주는 등 목숨을 구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8] 이쪽은 친한 콘노카미를 충성스럽게 대할 뿐만 아니라 친구처럼도 대한다. [49] 만세극락교의 신이 무잔이니 만큼 무조건적으로 숭배하지만 정작 무잔은 도우마의 사이코끼가 있는 성격을 잘 알기에 그를 싫어한다. [50] 제 여왕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르다고 강조되었다. [51] 워낙 약을 빤 작품이라 그런지 이들은 충신을 넘어 황재호가 진리라고 믿는 광신도에 가깝다. [52] 사실 이 캐릭터는 비샤몬텐의 충신이기도 하지만 연인 관계로도 볼 수 있다. [53] 루케도니아를 지키기 위해 배신한 가주들과 웨어 울프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54] 말괄량이 소녀이지만 그래도 착한 성격이라서 노리마키 센베 박사님에 대한 충신이 있다. [55] 전에는 닥터 마시리토를 충신 했지만 아라레를 기절 시키는 악행 때문에 손절해서 결국 센베 박사님에 대한 충신을 하였다. [56] 펠 로스 제국의 마지막 충신이었다. [57] 아예 5면이 최종 면인 케이스, 5면과 6면 보스가 같은 케이스, 성격이 개판인 케이스 제외. 6면 보스에게 충성을 바치지는 않지만 텐구 사회에 충성하므로 해당된다. [58] 악역들이지만 나름 자신의 보스에 대해 충성스러웠다. 특히 데브라가 마인 부우를 처치하려는 모습은 암군에 대해 불손한 마음을 품은 역신을 저지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정작 주군이라는 자는 즐기며 방관하는 구도라서 더 눈물겹다. 도도리아의 경우 다른 친위대인 큐이 자봉이 막판에 프리저 욕을 하는 것과 달리(물론 기만전술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끝까지 프리저의 이름을 말하다 죽는다. 자신을 살려달라고 협상할 때도 사이어인의 비밀을 말해주며 그 와중에도 너를 특별히 예뻐해서 살려주신 프리저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59] 위에 란코처럼 자신을 챙겨주는 대장이자 동료인 야무치에 대한 충신이 강하다. [60] 공식 Q&A에 의하면 에덴에게 충성심을 제외하면 남는건 촉수(...)뿐이라고 한다. [61] 무려 1000년전부터 한번도 대장으로 진급하지않고 총대장인 야마모토의 오른팔이자 1번대 부대장으로서 그를 옆에서 보필했다. 야마모토 역시 처음부터 자신만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그가 죽게되자 매우 분노했을정도로 그를 아꼈다. 게다가 야마모토가 겐류사이의 이름을 지은것도 자신에게 진심을 다해 충성하기로한 사사키베를 위해서였다. [62] 메인 빌런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왕권 강화를 목표로 두기 때문이며, 삼총사의 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대립 관계라서 빚어지는 일이다. BBC 드라마에서는 한술 더 떠서 루이 13세를 상대로도 모략을 꾸미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국왕 본인이 벌이는 짓이 너무나도 참담해서 최대한 수습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63] 장로님에게 충성할 뿐만 아니라 은하의 숲에 있는 높으신 사람들에게도 충성한다. [64] 높은 대장인 제이하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 [65] 옆에 셰린다 하고 비슷하다. [66] 월광에 대한 충신이 강하다. [67] 이전에는 라클레스 하스티의 충신이었다가 19화에서 그의 행동에 충격받아 빠져나오고, 21화에서 왕이 된 기라 앞에서 지금까지의 행적을 사죄하고 기라가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기라의 충신이 된다. [68] 정확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아닌 진짜 보시마르 한정.(43화 참고) [69] 종족전쟁의 충격으로 술마시는 대장님을 끝까지 믿고 보좌했다. [70] 사실, 군체의식에 가까운 저그고 윤리관이 인간과 달라서 직접 적용은 힘들지만 니아드라는 대사 하나하나가 상당히 임팩트 있는 편이다. 반대로 효율을 중시하는 아바투르는 초창기에 군단이 아몬 휘하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71] "군단은 죽는 그 순간까지 여왕을 도우리라","여왕이시여 당신을 모실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72] 염려대왕 편에서 고길동 과장님이 없으면 안된다고 언급을 한적이 있다. [73] 아르슬란의 신하들이 충성심 하나가 끝내주게 높지만 다륜은 그중에서 가장 높다. [74] 기스 하워드에게 언제나 충의를 보여주는 부하다. [75] 김수호 빙의 전 원작에서도 자신의 주군은 오직 프론테라 남작 뿐이라며 고위 귀족, 심지어 한 나라 국왕들의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 [76] 백하의 생모인 비래에게 입었던 은혜를 갚고자 백하에게 충성한다. 백하가 황궁을 나가자 슬프게 울었고,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사 온 쌀을 나눠주자 콧대를 한껏 세우고 신백하 황녀님이라며 당당하게 말한다. [77] 이쪽은 으로 벌레의 신이라는 뜻이다. [78] 페루의 살신성인 정신이 없었다면 알라바스타 왕국은 통째로 날아갔을 것이다. 죽었으면 더 극적이었겠지만... [79] 한냐발은 스스로는 야심가라고 말하긴 하고 실질적으로 야심이 크긴 한데 하는 행동을 보면 해군 입장에서든 마젤란 개인 입장에서는 충신 맞다. [80] 불타는 군단의 음모로부터, 그리고 실바나스의 배신으로부터 아서스를 구했고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 근데 돌연 확장팩 어둠땅 지배의 성소에서는 그 동안 리치 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선언한다, 와우 세계관 충신의 상징과도 같은 켈투자드가 이런 대사를 한 것은 캐릭터 붕괴라는 평이 많다. [81] 악당에다 간신의 전형이지만 주군인 가로쉬를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을 바쳤다. [82] 일리단 스톰레이지를 열정적으로 따르고 일리다리를 규합한 충신 [83] 파라오 아템의 충신일 뿐만 아니라 선대 파라오인 아크나무카논에게도 충성을 바쳤다. [84] 동맹으로 망명하긴 했지만 시바 성역 회전에서 전사할 때까지도 에르빈 요제프 2세의 안위를 걱정하던 골덴바움 왕조의 마지막 충신. 그래서인지 메르카츠의 부관 베른하르트 폰 슈나이더는 그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 메르카츠가 전사하던 때에도 옆에 있었을 정도. 심지어는 동맹 망명 이후 동맹에서 메르카츠 제독의 계급을 두 계단 깎자(본디 한 계급 깎이는게 정상인데 메르카츠는 상급 대장이었고 동맹은 상급 대장이 없어서 대장에서 한 계단 깎인걸로 취급해 중장이 되었다.) 자기도 똑같이 깎아달라고 주장했다가 양 웬리의 중재로 한 계단 깎이는 걸로 대신했다(...). [85] 밑에 있는 안스바흐처럼 주인 잘못 만나 신세망칠 뻔했지만 라인하르트에게 등용된다. [86] 막장 주군 밑에서 자기만 고생한 충신의 대표적인 예. 사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왕도 무엇도 아니지만. [87] 골덴바움 왕조 최고의 성군인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시기의 사법상서. 사이가 안 좋았던 잉골슈타트가 억울하게 군사법정에 소환되자 그를 성심성의껏 변호할 정도로 강직한 성격이어서, "탄핵자 뮌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88]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에서 라인하르트의 행위를 비판했다가 특권을 박탈당했음에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암살 위기에 처한 라인하르트를 살리고 죽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충신의 표본이라 봐도 될 인물. 위의 나머지 충신들과 비교해보면 메르카츠는 행동력이 없었고 슈트라이트는 전향, 안스바흐는 주인을 좋은 길로 이끌지는 못했고(베스터란트 사건 직전 브라운슈바이크를 필사적으로 뜯어말리기는 했다. 그건 누가봐도 병신짓이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했기에 주인의 멍청한 짓거리를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던당연히 브라운슈바이크에게 아가리 함부로 놀리면 목이 날아간다. 안스바흐로서도 도저히 말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뮌처는 그럴 일이 없기는 했지만 어쩄건 희생 정신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상관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던 행위에 그걸 들어주지 않음은 물론 기존의 특권까지 박탈당하고도 그 상관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키르히아이스는 은영전 최고의 충신이 될 수 밖에 없다. [89] 이들 중 나비에를 따라간 사람은 영애라서 유학 핑계를 댈 수 있는 로라, 남편과 사이가 나쁜 주베르 백작부인 뿐이었고, 나머지는 남편과 사이가 좋거나 개인 사정으로 따라가지 못했다. [90] 주인공은 이들에게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91] 원작인 게임이든, 미디어믹스인 TVA든 자신의 상관이자 군주인 막시밀리안 가이우스 폰 레긴레이브에게 자신의 목숨까지 걸 정도로 충성스런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그저 그녀의 힘을 이용하기만 하였지만 그 상황에서도 셀베리아는 자폭이나 다름없는 최후의 불꽃마저 막시밀리안을 위해 발동시킬 정도로 충성스런 모습을 보였다. [92] 세뇌되어 수하가 된 부하도 있고, 고용된 부하도 있고, 딱히 배신하는 모습은 없던 부하도 있고, 최종 보스의 밑에서 자라 수하가 된 부하도 있는 등 여러가지 종류의 부하들이 묘사되지만, 최종 보스에게 자의로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이 강조된 경우를 주로 서술한다. [93] 디오 브란도의 시생인으로서 충성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전에 메리 여왕에게 충성했던 걸 의미한다. [94] 부하보다는 동료에 더 가깝기 때문에 부하라 치긴 애매하나 어쨌던 카즈보단 서열상 아래로 취급되기 때문에 서술한다. [95] 바닐라 아이스의 경우엔 그 정도가 지나쳐서 광신도 문서에도 올라와있다. [96] 디아볼로의 다른 인격이지만 영혼도 따로 존재하는 등 사실상 다른 사람 취급이므로 기재. [97] 5편 엔딩에서 하극상을 했지만...어디까지나 개그엔딩이다. 헤이하치가 죽은 시점(7편) 이후로도 헤이하치를 기리며 미시마류 가라테를 익혔다. [98] 배신이 판치는 세계관이지만 이와 모순적이게도 충신이 많다. [99] 를르슈 람페르지의 충신이며 코드 기아스내에서 대표적인 충신. 를르슈의 어머니인 마리안느의 충신이기도 하다. 몇몇은 제레미아가 를르슈에게 바치는 눈물겨운 충성은 마리안느에 대한 충성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픽쳐 드라마에서 단순히 마리안느의 아들이라서가 아닌 를르슈의 궁극적인 목적때문에 충성을 바치는 묘사가 있을 뿐더러 일본 침략때 를르슈가 일본에서 죽은 줄 알아 지위를 버리고 추모하러 간거를 보면 충성에 대한 연장이 아닌 진짜 를르슈에 대한 충의라고 말할 수 있다. [100] 비록 중간에 를르슈랑 적대 세력이 됐지만 애당초 카렌을 보낸 사람은 다름아닌 를르슈인데다 카렌은 를르슈에 대한 충성심은 계속 있었고 흑기사단이 를르슈를 배신할 때 유일하게 옹호해주는 사람도 카렌이라 를르슈의 충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01] 코넬리아의 충신이며 자기의 정의는 공주님과 함께라고 말했으며 를르슈는 코넬리아의 충성을 이용해 기아스를 써 브리타니아를 적대하게 했으며 프레이야가 폭발할 때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코넬리아로 보이는 를르슈를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진 걸 보면 진정으로 코넬리아의 충신이라 볼 수 있다. [102] 오렌지황실의 충성 만큼은 진짜라며 존경한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충성심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3] 배신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작중에서 자신의 조국을 포함한 주군들에게 배신을 한 캐릭이기는 하지만 그가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작중 내내 충의를 바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유페미아다. 작중 내의 주위 사람들과 스자쿠를 욕하는 시청자들도 유페미아의 충신인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104] 애니판 한정. [105] 처음 깨어났을 때 프로그램대로 자신을 충실한 하인이라고 말했지만 라쳇은 오메가 슈프림을 부하가 아닌 친구로 대한다. 오메가 슈프림 역시 라쳇을 주인이라기 보단 친구로 대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충신으로서 지키려 한다. [106] 엘 프레지덴테와 트로피코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서 온갖 트롤링, 전투, 공작, 외교를 다한다. [107] 스스로 피에로의 부활 제물이 되어 그와 융합해버리면서 사라졌을 정도로 피에로에게 충성한다. [108] 사실 원래 충신적인 집사로 9권에서 사망처리 하려했으나 작가인 히라노가 월터의 성우를 맡은 키요카와 모토무가 배신 때리는 역을 많이 맡아서 사실은 배신자였다 설정을 넣었다고 [109] 당장 코토게, 쿠가, 아비루 등을 비롯한 야쿠자들은 절대 조직간의 의리를 져버리지 않고 조직을 위해 충성한다. [110] 작중에서 힐리스는 백성에 대한 충성, 콱과 허턴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 충신의 대표적 유형이라 할 수 있다. [111] 01부터. [112] 둘은 친 겐사이를 충신하게 여긴다. [113] 이들은 공주인 안젤리아 카를로스랑 베프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부하이기도 하다. 메인 스토리에서 4명은 시어도어 카를로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공주한테 충성을 맹세한다. [114] 오직 사막왕국 여왕인 다이애나 후안 고메즈한테만 충성을 맹세한다. 그의 배경 소개를 보면 그녀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도 다이애나랑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이건 둘의 군신 관계가 매우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5] 9년 동안 연방에 인질로 잡혀있는 티토리마에게는 쟈냐마, 팅코와 더불어 충성을 맹세하는 부하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사람이 비정해진 데다가, 쟈나마와 팅코의 죽음, 그리고 타칠란다가 여왕으로 승임한 이후에는 군주의 자격이 없다며 티토리마와 의절한다. [116] 자신 역시 인류의 황제의 입장에서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눈물을 흘렸지만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 황제가 호루스와 싸우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을때 황제를 대신해서 황금옥좌에 잠시 앉아서 웹웨이 게이트를 봉인하다가 기력을 잃었고, 황제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자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의 에너지를 황제에게 전달하고 사망했다. [117] 대부분의 충성파들은 반역파와 맞서 최후를 맞이하거나 충성파에게 합류했지만 라일라너처럼 만년이 넘는 세월을 충성 만으로 견디는 경우도 있었다. [118] 7살 때 입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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