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2:10:54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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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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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孟子 | Mencius
파일:亞聖.jpg
우측 상단의 온전한 다섯 글자는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잘린 두 글자는 맹가(孟軻)이다.
<colbgcolor=#00001b> 희(姬)
맹(孟)
가(軻)
자여(子輿), 자거(子車)
출생 기원전 372년
추(鄒)[1]
사망 기원전 289년 (향년 83세)
노나라
직업 정치가, 사상가
부모 아버지: 격(激)
어머니: 급씨(伋氏)
종교 유교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왕도 정치
3.1.1. 항산
3.2. 성선설3.3. 호연지기3.4. 역성혁명론
4. 영향
4.1. 한국4.2. 중국4.3. 일본
5. 여담6. 관련 고사성어

[clearfix]

1. 개요

천하의 가장 넓은 자리에 머무르고
천하의 가장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가장 위대한 도(道)를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

뜻을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그 도[2]를 행한다.

그러므로
부귀도 그를 타락시킬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비굴하게 할 수 없으며
어떤 폭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것을 일컬어 대장부라 한다.
《맹자》 〈등문공 장구 하(下)〉 [3]
하늘은 큰 일을 맡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의 몸을 수고롭게 하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며
그의 처지를 궁핍하게 하니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만든다.

이는 인내하는 성품으로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잘할 수 없었던 일에
보태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맹자》 〈 고자 장구 하(下)〉 [4]
전국시대의 유학자, 정치사상가. 본명은 맹가(孟軻)이다. 주요 저서로는 《 맹자》가 있다.

주자는 그를 진(秦)나라 이전 유학의 마지막 적통으로 평가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흔히 공자와 묶여 공맹(孔孟)으로 언급되어 유교의 대표 인사로 꼽히고 있다. 때문에 그를 표현하는 호칭 역시 공자에 준하는 '아성(亞聖)'[5]으로 불린다. 원 문종 3년(지순至順 원년, 1330년)에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6]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 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라틴어로는 멘치우스(Mencius).[7][8]라고 쓴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만장과 공손추 등이 있다.

2. 생애

공자가 사망하고 백여년 후 쯤 산동성에서 맹가가 태어났다. 맹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서 편모가정에서 자랐다. 맹가의 어머니는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바로 그 맹모삼천지교 맹모단기지교로 유명한 현모였고 맹가는 이런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아 학교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 자사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편모가정임에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 노력하는 훌륭한 어머니와 좋은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이 썩지 않을 수 있었으니 축복받은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장성한 맹가는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에 묵자와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여 유가 사상을 확립했다. 불혹 이후에 '인정'과 '왕도정치(王道政治)' 주창하며 천하를 유력했다. 법가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은퇴했다.

맹가의 육순 이후의 삶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3. 사상

맹자는 의(義)[9]를 강조하여 인(仁)[10]의 위치에 같이 놓아둠으로써 공자[11]의 사상을 보충하고 발전시켰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만약 권력자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해서 백성들을 크게 괴롭한다면, 백성들은 그런 윗사람을 끌어 내려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권력자는 백성들을 위해 정치해야 되고, 백성들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에게 저항한다'는 의로움(義)의 개념은, 사람다움(仁)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가야할 길[12]로 여겨져서 맹자를 대표하는 핵심 사상이 된다.

맹자의 이러한 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매우 진보적인 주장이었으며, 사실상 근대 서양에서 사회계약론이 태어나기 수천 년 전에 선행해서 등장한 민(民) 본위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13] 실제로 계몽주의 시대 때, 맹자의 사상이 당시 예수회를 통해 서양에 알려지면서 사회계약론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14]

3.1. 왕도 정치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 왕이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역시 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 이로움(利)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말하신다면,
대부(대신)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에 이로울까'를 말하며,
선비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로울까'를 말합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의 이익만을 취하게 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만승[15]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안이며,
천승의 나라에서 그 왕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안입니다.
만승이 천승을 갈취하고, 천승이 백승을 갈취함이 많지 않은 게 아니건만은,
진실로 의리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을 다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무릇 어질면서 부모님을 버린 사람은 없으며, 의로우면서 임금을 뒷전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의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맹자》, <양혜왕 상(上)편> [16]
"왕은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만이 있을 뿐입니다."는 수많은 유학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 말이며, 후대의 모든 유학자들이 이 말을 달고 살았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만약 윗사람이 이로움만 좇게 된다면 아랫사람도 자신의 이로움을 좇게 될 텐데, 서로 이익을 얻고자 하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서 모두가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윗사람은 '친근함(仁)과 공정함(義)'[17]으로 아랫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야 되지, 이익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8]

이는 맹자가 평소에 주장한 왕도정치를 뜻하기도 한다. 왕도정치란, 백성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힘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에 의한 해결이어야 한다는 것.

3.1.1. 항산

맹자가 말하였다.
"꾸준한 생업(恒産)도 없이 꾸준한 마음(恒心)을 가지는 것은 오직 선비라야 가능합니다.
만약 백성들에게 꾸준한 생업이 없다면, 이로 인하여 꾸준한 마음도 없습니다.
진실로 꾸준한 마음이 없다면 방탕, 편벽, 사악, 사치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죄에 빠지고 나서야 벌을 주게 된다면 이는 백성들을 죄로 유도한 것[19]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죄로 유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명군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어서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충분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식을 양육하기에 충분하여, 풍년에는 늘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선(善)으로 몰고가니, 백성들이 따르는 것을 가벼이 여깁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기가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식을 양육하기에 부족해서, 풍년에도 늘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는 다만 죽음에서 구제하는데에도 넉넉치 못할까봐 두려운데, 어찌 예의로 다스릴 겨를이나 있겠습니까?


왕께서 그것을 행하고자 한다면, 왜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다섯 이랑[20]의 집에서 뽕나무를 심는다면, 오십살 된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을 것이고
닭이나 개, 돼지와 같은 가축이 그 (번식하는) 때를 잃지 않는다면, 칠십살 된 자가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며
백 이랑의 밭에서 그 (농사짓는) 시기를 뺏기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의 가족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고
학교의 가르침으로 삼가고 효제의 의로움을 펼친다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길에서 짐을 이거나 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젊은 백성들이 굶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했던 사람은 아직껏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맹자》, <양혜왕 상(上)> [21]
물론 이러한 왕도정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생활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먼저 펼쳐야 됨을 말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일단 해결되어야 도덕(仁義)으로 인한 왕도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도덕 정치 이전에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22]복지가 선행되어야 함을, 맹자는 강조했던 것이다.

3.2. 성선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 있다.
선왕(先王)께서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政治)도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을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이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사람들 모두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갑자기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순간적으로 본다면, 모두 두려워 놀라고 안타까워(惻隱)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마음은) 어린아이의 부모를 내밀하게 사귀려는 까닭이 아니며, 고을 붕당과 친구들에게 칭찬이 필요한 까닭도 아니고, 그 소리가 나는 것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 보면,

측은해 하는 마음(惻隱之心: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 하거나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물러나서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음과 그름을 변별할 줄 아는 마음(是非之心: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어짊(仁)의 실마리이고, 수오지심은 의로움(義)의 실마리이며,
사양지심은 예절(禮)의 실마리이며, 시비지심은 지혜(智)의 실마리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 실마리(四端)가 있음은 사지(四肢)가 있음과 같다. 이 네 가지 실마리가 있는데도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그 군주는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맹자》, <공손추 상(上)> [23]
모든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이 생기는데, 이러한 마음을 갈고 닦아야 된다는 것. 우리는 외부의 유혹에 의하여 악한 짓을 저지르는데, 이런 유혹이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차마 저렇게는 못하겠다'는 마음을 키워간다면, 그 어떤 커다란 유혹이 내 앞에서 아른거려도 그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한 행위는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며,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24]에서 출발해야 보다 더 자발적이게 되고 그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25] [26]

당시 제후들은 맹자에게 '왕도정치는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단호하다. 당신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착한 심성(사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입니다! 제후들의 어떤 변명도 맹자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맹자는 제후들의 핑계를 '성선설[27]과 사단'이라는 논리를 통해 분쇄시켰던 것이다.

3.3. 호연지기

"감히 묻건대 선생님께서는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나는 '말(言)'을 알며,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감히 묻건대 '호연지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말하기 어렵구나. 그 기운됨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곧게 길러서 해로움이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고,
그 기운됨은 '의로움(義)'과 '도(道)'에 짝이 되어, 이것이 없다면 위축된다.[28]

이는 의로움이 (안에서) 쌓여서 생기는 것이니, 의로움이 (밖에서) 스며들어와[29]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행동함이, (스스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곧 위축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자[30]가 일찍이 의로움을 그 바깥에 두었기에 아직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맹자》, <공손추 상(上)> [31]
자신의 마음에 떳떳해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의롭다고 생각되면 저절로 당당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의로움의 옳고 그름이,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는다면 어찌 당당해질 수 있겠는가. 의로움은 '외부 환경'[32]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33] 내가 행한 행동이 내 마음 '내부'에서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로운 행동과 마음을 쌓다보면(集義: 집의)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도 내자신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떳떳하고도 넓은 마음을 지니게 되는데, 이 사람의 당당한 기운을 일러 '호연지기'[34]라고 말한다.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4. 역성혁명론

맹자가 제나라의 선왕(宣王)에게 말하기를 이와같이 하였다.
"왕의 신하 가운데 그 처자식을 벗에게 맡기고 초(楚)나라로 유람을 간 자가 있었다 하지요. 그자가 돌아와 보니 처자식이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절교해야 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사사(士師)[35]가 사(士)[36]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파면시켜야 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사방 국경의 안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돌렸다. [37]

《맹자》〈양혜왕장구 하(下)〉 [38]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 탕(湯) 걸(桀)을 몰아내고, 무왕 주(紂)를 쳐내었다'고 하던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이 옳은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해롭다'라 말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인하다'라 말하니, 잔인하고 해로운 사람은 '일개 보통사람(一夫)'에 불과합니다. '일개 보통사람에 불과한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39]

《맹자》 <양혜왕장구 하(下)> [40]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 엎어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최대다수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백성의 복지에 있다는 말이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이 천명이 바뀌는(革)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다. 그리고 이 생각을 이론이나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 정책이 바로 정전제.[41]

그 시대에 맹자의 민본 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민(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다. 이후 이러한 맹자의 민본주의는 동아시아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42] 리콴유와의 그 유명한 민주주의 논쟁에서, 김대중이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아시아도 민주주의를 실현 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43]

4. 영향

4.1. 한국

한국에서는 특히 두드러지게 유교를 공맹의 가르침이라고 칭한다.

고려말 정치가 정도전이 《맹자》를 탐독하며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고, 신진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잇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한 사람이 절친이면서 고려 최후의 보루였던 정몽주였다는 점이 역사의 얄궂음이라 하겠다.

정도전 조선경국전을 지으면서 조선 체계 구성의 곳곳에 맹자의 사상을 배치하였다. 이는 실제적으로도 이후 강화된 언론기관과 함께 조선을 움직이는 이념으로 작동하였다. 특히 공부를 통해 맹자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은 개국 공신인 훈구파들을 몰아내며 이 사상을 더욱더 강화하였으며, 특히 언론을 개방해 임금과 신하간의 소통을 원만하게 하기위해 설치한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은 임금을 견제하는 기능을 발휘하여 신하들의 힘이 크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조선이 동시대의 명나라, 청나라와는 다르게 신하의 권력이 컸었던 것[44]에는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론[45]을 충실히 조선건국에 반영했기 때문이다.[46] 조선이 유독 의로움을 강조했었던 것도 정도전의 영향이자 맹자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와 근현대에 들어서도 계속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맹자가 강조했던 "의로움(義)"을 내세워 ' 의병(義兵)'과 ' 의사(義士)'[47]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동학농민운동 삼일운동 역시 이러한 유교적 의로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잘못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뒤엎어 버리는 혁명들이 많은데, 2.28 학생민주의거,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도 크게 보면 맹자의 뜻(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48]

다만 근대 이후, 특히 민주화에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김영삼, 김대중 등 몇몇 민주화 지도층은 한학 교양인이었던 만큼 민주주의와 유교 이론을 접목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으나, 전통적인 유교 사회의 권위주의 경향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민주화세대 민중층 중심으로는 유교에 반감을 품고 이론적 재평가조차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이들도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 사상, 개중에서도 무신론적 맑시즘에 크게 영향받은 학생층은 민주화를 차라리 헤겔 맑스적인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했을지언정, 천명 운운하는 맹자 등 동아시아 고전과 접목하려 들면 오히려 구시대적, 반동적인 시도로 보는 경향이 컸다. 학부생 시절 고려대 철학과에서 중국 고전을 파려고 마음 먹은 김용옥도 벌써 그때부로 동기들로부터 수구적 별종 취급을 받았음을 회고한 바 있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유교계 내부에서도 조선유도연합회 등을 필두로 일본 천황이 맹자가 말한 하늘이 내리신 임금님이라는 둥 하며 일제에 적극적 영합하는 세력, 불만은 없지 않으나 결국 사회 원로로서의 지위에 안주하며 침묵하는 세력 등이 생겨난 점,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에 표면상의 자유민주주의와 실제상의 전근대적 공동체주의를 교묘히 섞은 이론을 제공하며 협력한 열암 박종홍 등이 학계 원로로서 대접받은 점 등, 친유교 기성 지식인들의 실망스런 행보에 학생들이 학을 뗄대로 뗀 영향도 있었다.

좌우간 박종홍 등 친유교 학자들과 유교적 공동체주의의 유용성을 파악한 정부의 합작으로, 공맹의 말씀으로 대표되는 유교 윤리는 근현대기에도 내내 한국 교육과정에서 계속 중심적으로 다루어졌고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 국내 중등교육과정의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교과목으로 이어진다. 단일 교과목으로서의 철학이나 사상이 아닌, '윤리와 항상 짝지어 함께해야 하는' 사상 교과목의 성립 배경이다.[49]

2000년대 전후로 동아시아학 열풍이 분 바도 있고 하여, 오늘날 한국에서 유교는 특히 맹자를 중심으로 긍정적 재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물론 서구적 개인주의 등의 단점을 극복할 유교 공동체주의적 대안 모색, 맹자 민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친화성 등등이 주목받는 덕택이다.

그러나 애당초 서구 개인주의 등이 확산된 것은 과거 유교적 공동체주의의 단점 탓이 크고, 일정 조건하의 혁명은 용인하되 결국 전근대 신분 질서의 틀을 유지하는 민본주의의 한계, 민주주의와의 차이 등은 이미 중등교육과정 내에서조차 명확히 지적되는 바이다. 때문에 굳이 맹자를 위시한 유교 사상을 현대화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극기복례 차원의 슬로건을 되풀이해 외치거나 막연한 가능성 타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변증적 발전을 학계에서든 민간에서든 보여줘야 하는데, 이것이 현대 한국 유교계의 숙제로 남아있다.[50][51]

4.2. 중국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부터 《맹자》를 공부하는 박사 직위가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가치는 인정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전한 소제(8대) 때 벌어진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에 관한 논쟁을 묘사한 《 염철론》에서도 맹자가 공자, 순자 등과 나란히 언급된다. 또 《 한서》 <고금인표>에서 맹자는 자사, 순자, 양웅[52] 등과 함께 2등급인 상중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공자의 적통이자 유가 2인자로 확고하게 평가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자가 이사, 한비자[53], 부구백[54] 등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고 순유, 순욱 같은 빵빵한 자손을 남긴 데 비하여, 맹자는 뚜렷이 이름을 남긴 제자도 없었고 자손도 상대적으로 시원찮았으므로 영향력이 뒤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당시만 해도 맹자는 결코 성역이 아니어서, 한 무제 때 유교의 국시화를 확정지은 동중서도 맹자 성선설 등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바 있다. 또 모두까기 왕충은 《논형》에서 유가의 맹자를 법가의 한비자보다도 더한 강도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기가 맹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그를 아성(亞聖)으로 칭송하며 주석서를 내기도 했다.[55]

양한(兩漢)과 위진남북조를 거쳐 유교가 지나치게 위선화하여[56] 지식인들의 자포자기를 낳고, 도교가 흥하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동안 맹자의 중요성도 잊혀져 있었다가, 당송팔대가의 필두인 당나라 한유[57]가 일종의 유교 근본주의 운동을 전개하여 외래 사상 불교를 배격하고 미신적, 보신주의적, 현실도피적 도교를 질타하며, 정치참여적 전통 사상인 유교를 재평가하면서 맹자를 공자 이래 유교의 적통으로 치켜세운[58] 이후, 서서히 다시 맹자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북송 때에 이르러서는 구양수, 사마광, 왕안석, 소식 등 명사들이 정치개혁을 두고 갑론을박하던 와중 맹자의 취급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며 관심도와 파급력이 더 높아지게 된다. 개혁파(신법당)였던 왕안석의 집권기에 맹자가 공묘(공자 사당)에 공식 배향되고 <<맹자>> 역시 과거 교재로 채택이 되게 되었는데, 보수파(구법당)의 사마광 등은 맹자 특유의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발언들이 (구법당 기준으로) 앞뒤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막 지르고 보는 신법당 정책들의 명분이 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59] 또 당시는 형이상학적 색채가 강한 도교, 불교가 이미 깊이 침투하여 우주론과 인성론이 식자들의 주요 관심거리였기에 자연히 맹자 천명설, 성선설 등이 주목을 받게 된 경향도 있었다. 범구법당 인사들을 보자면 사마광(구법당 영수), 소식 등은 성선설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에서 맹자를 비판했는데, 주돈이의 제자였던 정호, 정이 형제 등은 비록 왕안석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의 태동을 이끌며 맹자를 전방위적으로 옹호했다.

이후 이 성리학을 완성 수준에 이르게 한 인물이 남송 주희이다. 주자(주희)는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라는 개념을 만들어[60], 여기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이 《주자집주》이다. 이후 성리학을 공부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주자의 관점으로 맹자를 바라보았기에, 책 《맹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자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61] 주자 생전에는 그 학문이 이단스럽다며 탄압받기도 했고, 상산 육구연 등 학문적 라이벌과의 마찰도 있었다. 그러나 육구연도 어쨌든 맹자의 추종자이고 해석을 달리하는 사람일 따름이었고, 성리학을 비롯한 맹자 계열의 의기 높고 정신수양적인 유교 성향은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에 허구한 날 핍박받던 송나라 사람들을 독려할 시대정신으로 적합했기에 크게 확산되었다. 남송 말 문천상[62] 등 충신들은 공맹의 말을 나란히 금과옥조로 부르짖으며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니 송나라 때야말로 중국의 맹자 숭배 절정기였으며, 맹자가 공자의 적통이요 유가의 2인자로 확정된 시기였다.

원나라 때에도 성리학이 권력 공고화에 유용하다는 판단하에 수용되었고 이에 따라 맹자도 계속 숭상되었으며, 추국아성공의 칭호가 이때 공식적으로 올려진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배워 온 유학자들이 한국에도 본격적인 맹자 숭배 전통을 들여오게 된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은 《맹자》이루장구 하편의 "군주가 신하를 자신의 수족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가슴과 배처럼 여기고,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쓰레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63]는 구절을 보고 격노하여, 맹자를 문묘에서 들어내고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려고 했었다. 이에 신하 전당(錢唐)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두 번씩이나 간하면서 말하기를, "신(臣)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도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64]라고 맹자를 두둔한다. 주원장이 그 말을 듣고는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자신의 주장에서 한 발 물러나, 맹자의 역성혁명에 관련된 구절만 삭제해서 책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를 '맹자절문'이라고 한다.[65] 주원장 사후, 정난의 변으로 즉위한 영락제가 맹자절문을 폐기함으로써 명나라에서 맹자 탄압은 약 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전당은 이때의 일로 사후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나. 아무튼 이렇게 맹자는 복권되었고, 약 100년 뒤 주희에 버금가는 재해석자 왕양명도 얻게 된다.

청나라 때는 문자의 옥으로 인해 맹자적인 의기는 위축되었다. 얌전히 고문헌 연구하는 고증학이나 파게 되어 한비자, 순자 등의 재평가 등의 성과는 있었으나 맹자 인기는 전에 비해서는 시들해진 면이 있었다. 청 말~개화기가 되면 공자와 도매금으로 묶여서 수구의 상징이 되거나 혹은 혁명론 등에서 착안하여 혁신 정신의 상징이 되는 등 평가가 또 매우 복잡해졌다.

현대 중국에서는 다시 맹자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맹자를 숭배했고, 자신의 혁명론에 맹자를 인용하기도 했다. # 물론 문화대혁명기에는 역시 공자와 묶여서 취급이 영 안 좋았었다. 최근 중국공산당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서구와 대결 의식을 불태우며 입을 싹 씻고 유교 등 전통 사상을 복권하려 하기에 맹자도 복권되고 있다.

4.3. 일본

일본에서도 맹자가 학술적, 정치적으로 다뤄진 역사가 있으나, 민간 차원에서는 현대까지도 묻히는 감이 크다.[66] 그 이유로는 우선 한국에서도 여말선초에나 맹자가 본격 수용된 만큼 그보다 더 더디게 수용되어 뿌리박히지 못한 탓이 있을 것이며, 다음으로는 일본이 전통적으로 맹자 혁명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천황제와 이에 따른 피라미드식 신분제 사회라는 데서 기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67]

후자 관련하여 일단 한중일 모두 해당되는 사항으로서, 군주 앞에서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고 말한 혁명 사상이 당대의 군주들에게 위험해보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에도 시대 18세기의 소설가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가 쓴 <우게쓰 이야기>에는 헤이안 시대의 승려 사이교(西行, 1118~1190)의 입을 빌어 이런 이야기를 썼다.

서적을 취급하는 일본 상인들이 중국에 방문했을 때 다른 경전은 사 가더라도 도통 《맹자》만은 사지 않았다. 중국 공급상이 그 이유를 물으니 "《맹자》를 싣고 돌아가려 했던 배는 모두 가라앉았다는 소문이 팽배합니다."라고 하더란다. 누가 퍼뜨렸는지는 알 만한데, 작중에서 사이교는 "후세에 무식한 아랫것들이 감히 맹자를 팔아 상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능멸하고 끌어내리기까지 하는 무엄한 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언급한다. 소설에서 사이교가 대화하던 상대가 스토쿠 천황의 원령이었으므로, 하필 내란으로 강제로 폐위되다시피 해서 쫓겨나고 죽어 원령이 된 천황 앞에서 맹자(=역성혁명론)를 대놓고 좋게 이야기하기란 사이교로서도 껄끄러웠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특수한 현실과 맹자적 혁명론 자체의 부조화에서 비롯된 난점도 있었다. 맹자적 혁명론에선 걸왕, 주왕 같은 잔악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는 임금이 나오고, 임금이 바뀌기를 민심이 바란다면 천명이 간접적으로 드러난 셈으로 간주하여 새 임금, 또는 새 왕조가 들어섬이 정당화된다.
  • 폭정을 일삼거나 백성을 돌보지 않는 임금
  • 백성들의 민심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하늘의 뜻

위 두 가지 조건이 없다면 맹자식 혁명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의 천황은 역사는 오래 됐어도 실권 없는 명분 시다바리 노릇 한 세월이 대부분이라 과도한 폭정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마땅히 없었고, 특히 <맹자>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들어온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천황 본인이 천손이랍시고 내려왔다고 하므로 하늘의 뜻은 백성을 통할 것도 없이 직접 표출된 셈이다. 즉 천황 상대로 누가 혁명을 하려 한다면 천황은 '나 폭정 안 했는데요?', '천명은 나한테 있는데요?'로 그냥 쉽게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몸 성치 않은 회장님 비위 맞추며 붙어먹고 사는 겐페이토키츠 재벌가 자제들이 서로 기회를 엿보며 호응해주고 있으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68]

맹자 혁명론의 특징인 민심=천심 동일시는 이론상 민심이 말 없는 천심을 대변함으로써 민권 신장을 기대할 수 있게 하지만, 일본적 환경에 실제 적용되어서는 아다리(...)가 잘 안 맞고, 오히려 역효과로 입 달린 천심이 민심을 먹어버리는 구조에 일조하게 되는 기능 장애까지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일본에서 천황까지 겨냥하는 혁명은, '천명'이라는 일본 민간 혁명운동가들 입장에서 매우 계륵 같은 쿠션을 달고 있는 맹자 혁명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구화 이후 무신론적 맑시즘 등의 영향하에서 탄생한 극좌파들에 의해서야 본격 대두된다.[69]

아무튼 근세에 이르러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 제자 하야시 라잔이 퇴계학파의 강항에게서 성리학의 대략을 전수받은 이래 토쿠가와 막부의 지원하,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하에서 맹자는 일본에서도 점점 영향력을 행사해 갔다. 맹자의 영향을 받으며 백가쟁명한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양명학파의 나카에 토쥬, 주자학파의 야마자키 안사이, 미토학파의 조상 토쿠가와 미츠쿠니, 고학파의 이토 진사이, 소라이학을 일으킨 오규 소라이, 일본 국학의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이 있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특히 주자와 퇴계의 학문에 감명하여 강직한 성리학 원리주의를 고수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원리주의를 너무 잘 지키다가 다음과 같은 기똥찬 생각을 했다. "만약 공자와 맹자가 일본으로 처들어온다면, 마땅히 공맹을 사로잡아 충군애국하는 것이 바로 공맹의 도리이다!" 그리고 충군애국의 대상을 천명을 받으신 천황님과 천명의 나라 일본으로 대입하여 신토를 일본적 유교가 지켜야 할 도리로 해석하였다. 동시대 << 대일본사>>를 지은 토쿠가와 미츠쿠니의 미토학파 전통이 안사이학파의 이런 경향 및 국학파의 국뽕 기질과 융합하여 훗날 우리가 아는 무시무시한 천황주의가 나왔다.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는 특히 선진시대 공자, 맹자, 순자 등에 집중한 인물들이다. 진사이는 주자학과 양명학 등의 형이상학적 해석을 배격하고 그 옛날 공맹의 간단명쾌소박진실한 도리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여 고학파(古學派)라고 불렸다. 그는 특히 주자의 이기론을 싫어하여, 사단지심(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성(性), 이(理)에 속하는 사덕(인의예지)의 표출이라는 주자학적 해석을 전복시키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다. 그딴 신비하고 기묘한 이론은 허황되니 믿을 바가 못 되고, 오히려 우리는 단지 사단을 타고날 뿐이며 사덕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얻게 되는, 아니 사실상 일개인이 얻을 수도 없고 일종의 이념적인 것으로서 노력해 추구하기나 해야 할 사회적 도덕의 이름이라고 주장하였다.

소라이[70]는 진사이의 과감한 주자 비판에서 힌트를 얻어 '그렇다면 맹자도 순자도 공자에 대한 상대적인 해석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여, 진사이보다도 더 나아가 주자는 물론이요 맹자도 그렇게 숭배할 것 없고, 후대에 덧붙여진 부분이 많은 수양론이나 도덕론 보다는 공자와 공자 학문의 근본인 시서예악춘추와 옛 성왕들의 정치적 가르침에 집중하자고 설파하기에 이르렀다.[71][72] 이렇게 되니 국학파의 모토오리 노리나가도 여기서 힌트를 얻은 바가 있는데, '그렇다면 굳이 공자가 절대적인 이유 또한 어딨겠나. 일본에도 일본만의 도리가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식자들은 대충 이러한 흐름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와중에서 자기 사상을 정립해 갔다고 보면 된다. 물론 막부는 관학으로서 가장 보수적인 주자학을 고수했기에 급진 양명학자 오시오 헤이하치로 등등과 삐걱대는 것은 당연했다.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저서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1859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쇼인은 '초망굴기(草莽崛起, 민초들이여 일어나라)라고 썼는데, 이는 맹자에서 영향을 받아 일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사상이다.

이를 실행에 옮긴 수제자가 타카스기 신사쿠로, 일반 민중으로 구성한 민병대인 기병대(奇兵隊)를 창설했다. 이외에도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비롯하여 다수의 지사들이 《맹자》의 혁명론에 영감을 받아 막부 타도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73] '천명은 천황님에게 있는데 나라가 왜 어지럽고 백성이 왜 도탄에 빠졌는가! 그건 보좌한답시고 꺼드럭대는 막부가 잘못해서야!' 라는 논리로 혁명의 대상이 막부가 된 것이다. 이같은 양상은 훗날 2.26 사건 때도 반복되는데, 패도(霸道)[74]적 권신들이 힘으로써 왕도(王道)의 덕을 가리고 있으니, 의사(義士)들이 분연히 일어나 천심에 힘을 보태고 백성을 편안히 해야 한다는 맹자적 정치관이 면면히 영향을 끼친 결과였다.

유신 이후 서구화와 근대화의 강풍이 불며 '봉건 잔재'인 유교를 카토 히로유키[75],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극렬 공격하며 맹자의 지위도 다시 주춤하지만, 한편으로는 니시 아마네 등이 유교 경전의 어휘를 빌려 서양어의 한자어 번역을 보급하고, 나츠메 소세키 등 한학에 일가견 있는 문인들도 지나친 서구 풍조에 대항하여 맹자 등 고전의 내용을 재생산하는 등등, 근대 일본에서 맹자의 지위는 왔다 갔다 했다.

현대기에 접어들어서는 마루야마 마사오 등이 일본 정치사상사를 회고하면서 유교에 관한 담론이 더욱 학술적이게 되었다.

5. 여담

  • 맹자는 묵적[76]의 겸애설과 양주[77]의 위아설을 극렬히 비판하였다. 《맹자》 등문공 하편에서 "성왕이 나오지 아니하여 제후들이 빙자하고, 초야에 있는 선비들이 멋대로 의논하여,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천하에 가득해서,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갔네, 양씨는 자신의 지조만 위하는 위아설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요, 묵씨는 똑같이 사랑하는 겸애설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일세, 아버지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금수이다."라고 하였다.
  • 맹자가 연나라를 쳤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데 맹자는 연나라를 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의 권력승계가 불합리하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 연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해서 전쟁을 해야 된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연나라를 쳤다. 이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제나라에 권해서 연나라를 쳤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아니요. 심동이 연나라를 쳐도 좋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좋겠지요’하고 대답하였는데, 그가 옳다고 생각하고서 친 것입니다. 그가 만일 말하기를, ‘누가 칠 수 있을까요?’하고 묻는다면, ‘하늘이 보낸 일꾼이라면 칠 수 있겠지요’라고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살인자가 여기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 놈을 죽여도 괜찮겠지요?’한다면, ‘좋겠지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일 말하기를, ‘누가 죽일 수 있을까요?’하고 묻는다면, ‘옥관(獄官)이라면 죽일 수 있겠지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연나라로써 연나라를 친 것이니[78], 무엇 때문에 치라고 권하겠습니까?"」 연나라의 문제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아니고 권력상 문제가 잘못되었던 것인데 (물론 백성들이 고통받긴 했다.), 이를 핑계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친 것이니, 맹자가 볼 때 이것은 민심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연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연나라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하여금 연나라를 엎으라고 하는 민심이 아니었던 것이며,[79] 권력 문제를 핑계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억지 공격한 것임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제나라의 통치에 만족했으면 연나라 사람들이 반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나라왕은 자신의 신하에게 '맹자한테 부끄럽구나.'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 다음 편에서 맹자는 제나라를 떠난다.
  • 그는 사상 전반에 걸쳐 '의로움'을 종지로 삼았고, 폭력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올곧은 마음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조선시대의 이름난 의학자인 동무 이제마 사상의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공자의 후손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쪽도 관직을 배출한 인물들이 있다. 맹자의 직계 후손 중에는 후한에서 태위를 지낸 14대손 맹욱, 삼국시대 촉나라에서 문관을 지낸 16대손 맹광 오나라 사람인 18대손 맹종이 있으며[80], 55대손 맹희문(孟希文)이 명나라 경태 3년(1452) 한림원 오경박사(翰林院五經博士)의 직위를 받은 이래 후손들이 직위를 세습했다. 청나라에서도 이어진 한림원 오경박사 직위는 73대손 맹경환(孟慶桓)까지 직계로 세습되었으며, 그가 광서 20년(1894)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맹경당(孟慶棠)이 뒤를 이었다.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직위명이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으로 개칭되어 세습이 이어졌고, 2009년 대만 정부가 아성봉사관 직위를 무급제로 바꾸었다. 2014년 3대 아성봉사관이었던 75대손 맹상협(孟祥協)이 세상을 떠난 후 맹상협의 조카인 76대손 맹영계(孟令繼)가 4대 아성봉사관으로 뒤를 잇고 있다. 청백리 맹사성이 맹자의 방계 후손이다.( 신창 맹씨가 맹자에 연원을 두는 성씨이다.)
  • 의외로 당대 한반도에 살고 있던 민족들에 대한 비판을 한 적이 있다. 맹자 고자장구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규 단이 맹자와 정책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맥족이 백성들에게 부여하던 1/20의 낮은 세율을 도입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는데 맹자는 이를 극히 비판하였다. 맹자는 '만명이 사는 국가에서 한 사람만 그릇을 만들면 어찌되겠는가?'라고 이를 비유하며, 무조건적인 정부의 재정축소와 지나친 검약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맥족의 지나치게 가벼운 세금도, 주왕의 지나치게 무거운 세금도 모두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요순의 1/10 정도 세금만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맹자는 맥족식의 가벼운 세금이나 검약의 강조가 경제를 파괴한다고 비판하였는데, 이런 맥족의 전통을 이었는지 조선이 주자의 영향으로 맹자를 추종하면서도, 지나치게 축소된 재정과 검약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부가 쌓이지 못하고 재정이 극히 부족해 정책 진행에 항상 제약을 받곤 했다는 점은 매우 아니러니한 부분이 아닐수 없다고 하겠다.

6. 관련 고사성어



[1] 현 산둥성 추현 [2] 의로움(義)을 말한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들을 볼 때, 나는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데... 이렇게 사람답지 못한 행동들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것이, 맹자가 주장하는 의로움이 된다. [3] 원문: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4] 원문: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5] 성인(聖人)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만큼 훌륭하다는 뜻으로 주자(朱子)가 칭하였다. 본래 이 칭호는 안회(顔回)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후한 말의 조기(趙岐)가 제자서(諸子書)의 하나로 취급되던 《맹자》의 가치를 재조명하면서 맹자를 "직이불거 곡이불굴 명세아성지대재자야(直而不倨, 曲而不屈, 命世亞聖之大才者也.): 곧으면서도 거만하지 아니했고, 굽으면서도 비굴하지 아니했던, 일세의 걸물로서 성인에 버금가는 큰 재목이었다."라 평하여 최초로 맹자를 아성의 느낌으로 표현하였고, 후대의 주자가 이를 수용한 것이다. 아성의 칭호는 조기와 주자에게서는 다만 '성인에 견줄 만한 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나, 성리학적 도통론(道統論)에 근거해 맹자를 성인의 반열로 공인한 원조(元朝)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제2의 성인', 즉 '공자(孔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는 의미가 정착되었다. [6] 추(鄒)라 함은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존재했던 맹자의 고향 나라의 이름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 추나라를 노(魯)나라의 종속국으로 비슷하게 여기고 있지만, 당장 《맹자》 본편만 참고하더라도 '추나라와 노나라의 교전이 있었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추나라는 다만 소국이었을 뿐 분명한 자주권을 확보하고 있던 노나라의 접경 국가였다고 여기는 것이 타당하다. 국(國)이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라'의 뜻. 아(亞)라고 함은 '버금가다'는 의미로, '공자께 버금가시는 분'이라는 극존숭(極尊崇)의 표현이다. 성(聖)이라 함은 앞의 '아'를 받아 '~ 성인(聖人)'의 의미로 연결되어 '공자 다음가시는, 제2의 성인', 즉 '아성(亞聖)'을 맹자의 고유 칭호로 만든 것이다. 공(公)이라 함은 쉽게 말해 공작(公爵). 앞에서 굳이 추나라(鄒國)를 언급한 것은 바로, 이 '공작'이 제후의 작위이므로 반드시 거할 나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맹자는 자기 고향 나라의 영주로 봉해진 셈. [7] 이 표현은 대략 16세기 예수회의 문서에서부터 비롯되므로 고전 라틴어 독법이 아니라 교회 라틴어 독법을 따라 'ci'를 '키'가 아닌 '치'로 읽는 게 옳을 듯하다. 영어 발음으로는 [ˈmɛnʃiəs(멘시어스)\]라 한다. [8] 공자(Confucius)와 함께 라틴어화된 이름으로 널리 불리는 둘 뿐인 중국 학자다. 묵자(墨子) 역시 'Micius'로 칭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진 않는다. [9] 의(義)는 원래 善과 我가 합쳐진 단어로 '좋은 우리 (사회)'를 뜻한다. 義는 羊과 我로 이루어져 있다. 羊은 갑골문에 '좋다'는 뜻이 있었는데, 이후 의미가 나뉘어지면서 "羊+口=좋은 말: 善(착하다), 羊+人=좋은 사람: 美(아름답다), 羊+我=좋은 우리: 義(의롭다)" 가 되었다. 따라서 공정함을 의로움이라 볼 수 있는데, 공자는 이러한 공정함은 그 윗사람이 잘 나눠주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기에, 어진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어진 사람은 주변을 잘 챙겨서(仁) 사람들에게 믿음(신뢰)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0] 仁=人+人으로 '사람 인' 두개가 모여서 만들어진 회의자 이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 君君臣臣父父子子를 해석할 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仁=人+人은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라고 해석한다. 사람다움을 뜻한다. [11] 공자는 주변과 친하게 지내서 서로를 아끼고 챙기자는 인(仁)을 중요시 여겼다. 이렇게 사람을 잘 챙기는 어진이를 높혀서 상하관계가 만들어지면, 높은이는 모범이 되고 낮은이는 그것을 본받게 되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또한 너무 가까이 지내면 함부로 대하는데 이를 삼가게 하고, 상하관계에서 높고 낮음의 순서를 매긴 것을 예(禮)라고 하였다. [12] 《맹자》 이루상(離婁上)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13] 단, 맹자의 주장은 민주주의와는 다르며, 민본주의(民本主義)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요지는 확실히 유사한 부분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도 민주주의를 성공할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있다 주장했으며 실제로 현대 한국에선 맹자와 민주주의를 연관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14] 홉스는 순자의 성악설과 비슷하고, 루소는 맹자의 성선설과 비슷하다. 물론 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단,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없고,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이미 여러 연구가 이루어진 부분. [15] 만 개의 수레. 여기서 '승'은 수레를 말한다. 만승의 나라는 천자국을 뜻한다. 천승은 제후국. 백승은 제후국의 신하인 경이나 대부가 다스리는 나라를 말한다. [16] 원문: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 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王曰, ‘何以利吾國?’ 大夫曰, ‘何以利吾家?’ 士庶人曰, ‘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而國危矣. 萬乘之國, 弑其君者, 必千乘之家, 千乘之國, 弑其君者, 必百乘之家. 萬取千焉, 千取百焉, 不爲不多矣. 苟爲後義而先利, 不奪不饜.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王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17] 여기서 어짐(仁)은 '가까운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 '화목한 공동체'를 뜻하며, 의로움(義)는 '利(이로움)의 사익과 반대'되는 공익의 공정함을 말한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공공선과 정의를 말한다. [18] 맹자는 이렇게 공자의 인(仁) 사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인 덕목의 위치에 있었던 의(義)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인(仁)과 나란히 두어 인의(仁義)라 명명하였다. [19] 원문에는 '罔'으로 되어 있다. 즉, '그물질하는 것'을 뜻한다. '죄를 짓게 함정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의역하여 '죄로 유도한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20] 畝: 백 평을 뜻하는 땅의 면적단위. 오묘는 오백평을 말한다. [21] 원문: 曰,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 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及陷於罪, 然後從而刑之, 是罔民也. 焉有仁人在位罔民而可爲也? 是故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俯足以畜妻子, 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 然後驅而之善, 故民之從之也輕. 今也制民之産, 仰不足以事父母, 俯不足以畜妻子, 樂歲終身苦, 凶年不免於死亡. 此惟救死而恐不贍, 奚暇治禮義哉? 王欲行之, 則盍反其本矣, 吾畝之宅, 樹之以桑, 吾十者可以衣帛矣. 雞豚狗彘之畜, 無失其時, 七十者可以食肉矣. 百畝之田, 勿奪其時, 八口之家可以無飢矣. 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義,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 老者衣帛食肉, 黎民不飢不寒, 然而不王者, 未之有也. [22]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 꾸준한 생업(재산)이 없이는 도덕정치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23] 원문: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於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仁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24] 사단(四端)을 말한다. 사단은 타고난 감정이다. 후대의 주자는 이성은 타고난 것(性)이고 감정은 그 이성이 흔들리는 것(氣)이라고 하였지만, 자사와 맹자 시대에 적혀진 《성자명출》에 따르면, 타고난 것(性)은 기(氣)인 것으로 바로 감정을 말한다. 즉, 주자는 성리(性理, 性=理)학인 데 비해, 자사와 맹자는 성기(性氣, 性=氣)학인 셈. 이점에 유의해서 맹자의 성선(性善)설을 파악해야한다. [25] 이에 비해, 후대의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성(性)이 추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하였고, 본성으로부터의 선(善)이 아닌, 후천적인 교육과 학문으로부터의 선(善)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시대에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던 맹자가, 수많은 배신과 전쟁이 벌어졌던 전국 시대에 세상에 나쁜 놈들이 많다는 걸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알면서도 맹자가 성선설 주장한 것은, '사람은 가만히 놔 두면 착해진다~' 이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의 본성은 선해야 된다'는 당위를 부여한 거라고 봐야된다. 맹자는 순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단순히 '선함'을 배운다고 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에서 출발해야 됨을 맹자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또한 전국 시대는 전쟁과 기아로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못 배운 무지랭이 백성들도 그 본성을 살피면 스스로 착해질 수 있다는 데서 맹자의 위대함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배운 놈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한다. 못 배운 백성도 자신의 본성만으로 선해질 수 있다는 성선과 그렇게 "못 배운" 백성을 살피지 않으면 아무리 배운 군주라도 뒤집어 엎을 수 있다는 것이 역성혁명인 셈. [26] 또한 맹자는 "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네 가지 실마리가 있는데도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그 군주는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변명을 원천 차단하는 데 비해서, 순자의 성악설은 환경이나 교육을 받지 못해서 나빠진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 시대 군주들이 얼마나 '그 왕도정치라는 것은 못하겠다'고 말했으면, 맹자가 저런 말까지 하는가 싶을 정도. [27] 맹자는 부모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것은 배우지 않고도 알고 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즉, 인의(仁義)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저절로 아는 것이라고 맹자는 주장한다. 이를 '양지', '양능'이라고 하며, 성선설의 기초가 된다. 《맹자》, <진심 상(上)>에 「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잘하는 것은 양능(良能)이고, 생각해보지 않고서도 아는 것은 양지(良知)이다. (손에) 이끌려가는 어린아이라도 그 가까운 이를 사랑할 줄 모르지 않고, 자라나서는 그 형 공경할 줄 모르지 않는다. 가까운 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어짊(仁)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의로움(義)이니, 다른 것 없이도 천하에 달성되는 것이다." 」 라고 하였다. [28] 원문에 '餒' 로 표현되어 있다. 餒는 굶주림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에 떳떳하지 못하면 후달리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쪼들린다. 후달린다.'는 표현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비슷한 정제된 말로 '위축된다.'를 사용했다. [29] 원문에 '襲' 이라고 하였다. 뜻은 '엄습할 (습)' 이다. 즉, 외부에서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말한다. [30] 告子: 성무선악설을 주장했던 전국시대 사상가. 맹자는 '고자'의 사상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성선설을 드러내었다. [31] 원문: “敢問夫子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於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我故曰, 告子未嘗知義, 以其外之也. [32] 고자는 환경(배움)에 따라 사람의 성품이 달라진다고 주장하였다. [33] 맹자는 환경보다 사람의 타고난 착한 본성을 우선시한다. ' 양지, 양능'에서도 이는 계속 강조된다. 따라서, 교육 환경을 중요시하는 일화인 맹모삼천지교는, 맹자를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진 후대의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34]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한자 뜻은, '넓고 광대한 모양(浩然)의 기(氣)'를 말한다. 즉, 사적(私的)인 좁은 마음이 아니라 공적(公的)인 넓은 마음을 가져라는 뜻. [35] 고대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재판관(裁判官). [36] 이 경우에는 하위 사법관(司法官). [37] 맹자는 "왕을 잘라야겠지요."라는 대답을 왕에게 강요한 셈이다. 제선왕이 쫄아서 대답을 회피한 것(...). [38] 원문: 孟子謂齊宣王曰, “王之臣有託其妻子於其友而之楚遊者, 比其反也, 則凍餒其妻子, 則如之何?” 王曰, “棄之.” 曰, “士師不能治士, 則如之何?” 王曰, “已之.” 曰, “四境之內不治, 則如之何?” 王顧左右而言他. [39] 아무리 왕의 자리에 있어도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는 왕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셈. 그러한 왕은 일개 보통사람일 따름이므로, 신하들이 '나쁜 짓을 하는 일개 필부'를 죽이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왕의 입장에서는 매우 무서운 말이다. [40] 원문: 齊宣王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孟子對曰, “於傳有之.” 曰, “臣弑其君, 可乎?” 曰, “賊仁者謂之‘賊’ , 賊義者謂之‘殘’ . 殘賊之人謂之‘一夫’ .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41] 애초에 맹자는 당대 패권자들에게 정책 파트너로서 초청을 받은 사람이다. 그냥 바른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초청한 군주들도 그 말을 실제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백성과 함께하기 위한(여민동락) 군주의 도덕적 근본을 요구하는 것이다. [42] 비록 맹자의 시대에 그의 학설이 제도적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했고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맹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한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실 조선 시대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전국시대는 까마득한 옛날이었고, 맹자의 주장을 당시의 조선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유학자들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의 근본적인 메세지는 조선 시대에 유효하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다. [43] 김대중 리콴유(이광요)의 그 유명한 민주주의 논쟁에서 언급된다. 서구가 동아시아의 권위주의를 민주주의 입장에서 배격하는 것은 문화적 몰이해라는 리콴유의 주장에 대해서, 김대중은 맹자를 인용하며 권위주의를 비판해온 지적 전통과 역사가 동아시아에서도 있었음을 지적한다. # [44] 청나라의 강희제는 조선을 두고 군약신강(君弱臣強)의 나라라고 말하였을 정도. [45] 제대로 정치하지 않으면 윗사람을 갈아엎어야 된다는 것. [46] 정도전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던 간에,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맹자의 사상을 조선건국에 오롯이 반영하려고 했었던 점은 틀림없는 것이다. 또한, 정도전이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는가와는 무관하게, 그의 저술과 영향으로 조선에서 맹자를 공자만큼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 [47]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을 가르키는 '의로운 선비'를 뜻한다. [48]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이든, 그것이 실제로 살기 위해서이든,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이든 간에 그 이론적 바탕의 뿌리는 맹자의 '의로움', 즉 '나쁜 것을 볼 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 민중은 자신의 이익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한 민중을 이해하며 의로움을 외치는 일부로 시작하여 서로 모여 커다란 전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에서, 그 맹자의 의로움이 주는 이론적 함의가 결코 적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49] 이 때문에 교과목 내용상 윤리의 적(...) 수준인 니체 등은 대중적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배제되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도 이론철학( 인식론 등)은 거의 생략되고 실천철학( 윤리학 등)만 유독 강조되는 경향이 생겼다. [50] 헤겔 전공자인 연세대 나종석 교수가 '대동민주유학'을 제창하여 이 분야에서 유명한 편인데, 그 역시 가능성 타진의 단계에 머물고 있으며, 구체적 방안에 대한 답은 회피하였다. 참조 [51] 의외로 국내 서양철학 전공자 중 유교를 비롯한 동아시아 사상에 전공자 이상으로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종종 있는데, 사실 국내 서양철학 전공자들이 학위를 받거나, 교수 실적 논문을 쓸 때 애용하는 주제 중 하나가 동서양 비교연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1, 2세대 서양철학 전공자들이 해외 대학원에 유학할 때만 해도 동아시아 사상은 거의 미지의 영역이어서, 동아시아 사상 소개 차원에서 동서양 비교연구물을 내면 해외 교수진들이 호기심과 신선함을 느끼며 비교적 높게 쳐주고 상대적으로 쉽게 학위를 주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연구 방향성은 물론 글로벌시대 동서양 사상의 융합, 한국적 철학의 모색 등의 이념하에서 긍정적 평가할 부분이 있으나, '전략적 회피'라는 의혹이 오래 전부터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52]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한테 지나가는 말로 까이는 등 후대 평가가 대체로 박하여, 그냥 왕망에게 아첨한 어용 지식인 정도로 알려지곤 하지만, 나름 유학자로서 《법언》이라는 논어의 형식을 모방한 책을 남겼다. 그래서 이 책이 양웅을 존경한 이들에 의해 '한나라의 논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 태현경》이라는 유가와 도가를 아우르는 우주론 서적, 고대 언어 연구의 단비와 같은 《 방언》이라는 각 지방 방언집도 남기는 등 확실히 대학자의 면모가 있었다. 또 그는 맹자와 순자를 나란히 존경했고 인성론에서는 이 둘을 절충한 선악혼재설을 제시하였다. [53] 한비자가 정말 순자의 제자였는가에는 논란이 있다. [54] 정치에는 나가지 않고 유가 경전의 보존, 정리 및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런 영향으로 《 예기》 등에 순자 학맥이 강하게 흐르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부구백의 제자로 훗날 한 고조를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야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설득한 육가가 있다. [55] 조기가 <<맹자>>를 다듬은 체계가 오늘날에도 큰 변화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56] 신나라 왕망, 위나라 조비, 서진 사마염 이상 이하 기타 등등이 유교 핑계 대면서 어떤 짓들을 자행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57] 의도치 않게 한비자를 격하시킨 원흉(?)이다. 한유가 맹자 재발견 등 유교에 공헌을 많이 하여 후대 유학자들에 의해 '한자'로 칭송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원래 '한자'로 불리던 '한비'의 우선순위가 밀려서 '한비자'가 되고 말았다. [58] 이때 한유는 순자와 양웅은 크게는 순수하되 작게는 하자가 있는 인물, 맹자는 순수하고도 순수한 인물로 평가했다. [59] 이 때문에 사마광이 짐짓 고증학적 비판 형식을 취하여 맹자를 까는 <<의맹>>을 지었다. [60] 사실 이 아이디어 자체는 정호, 정이 형제 때부터 나온 것이다. [61] 다만, 주자가 맹자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했다고는 볼 수 없는데, 역성혁명을 주장한 맹자와는 달리, 주자의 이기론은 기(氣)에 깨끗함과 혼탁함이 있어서 천하고 귀함의 신분질서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펼쳤기 때문. 주자가 맹자를 중히 여긴 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유학의 적통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맹자의 논리는 오히려 반체제적인 면을 보였다. 반면, 주자의 논리는 "학문이 높아 과거제에서 성공한 자는 인격에 있어서도 자신의 혼탁함을 극복한 것이다"고 하여, 귀함과 천함이 태생적으로 존재한다는 기존 체제에 매우 친화적인 주장이었다. 주자의 이기론이 다만 후대에 악용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주자는 이기론을 만들면서 처음부터 천하고 귀함의 차이를 설명하였음이 분명하기에, '귀천의 분류'가 상관없다는 유학자들은 주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한다. [62] '공자께서는 인(仁)을 이루라 하시고 맹자께서는 의(義)를 취하라 하시었네! 오직 그 의를 다하여 인에 이르는 것이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서 쿠빌라이 칸의 여러 년에 걸친 회유를 거부하고서 끝내 순절했다. [63] 君之視臣如手足 臣視君如腹心 君之視臣如土芥 臣視君如寇讐. [64] 臣爲孟子死 死有餘榮 [65] 당연히 주원장 본인이 원나라의 백성이면서 정치가 흔들리던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로 나라를 세워 황제가 된 판이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사상이 바로 맹자였는데 그 맹자를 부정하면 자신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당성 때문에라도 맹자를 복권해야 했던 건 영락제도 마찬가지. [66] 그렇다고 아예 안 배우는 건 아니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의무교육 과정에서 맹자 사상의 특징은 배우며, 특히 국어 교과서 한문 파트에서 아예 원문이 곧잘 등장한다. 현대 일본 정치인들도 다분히 레토릭적인 용도로긴 하나 맹자를 종종 인용한다. 일례로 작고한 아베 신조도 2014년 당시 맹자를 인용하여 '천하무도' 운운하며 중국을 까기도 했다. 여기에는 야마구치 현(구 쵸슈 번)이 근거지인 아베가 현의 위인인 요시다 쇼인(뒤에 나오겠지만 맹자의 영향을 크게 받음)의 빠돌이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67] 실권 없는 천황인데 따르긴 뭘 따르나 할 수 있겠으나 겐페이토키츠와 그 관련 문서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천황에게서 실권을 뺏고 고관대작이 되려면 일단 그 천황과의 친족성을 주요 명분으로 삼고, 이를 가지고서 다른 서열 고만고만한 친족호소인들과 피 말리게 경쟁하여 최종승리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천황제 명분만은 결사옹위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일본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다. [68] 대신에 천명 서열이 애매한(...) 황자 사이, 혹은 상황(공식적으로는 은퇴한 천황)과 현직 천황 사이 등등의 다툼은 잘만 일어나 임신의 난,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일본판 남북조시대 등등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내부 분열을 자초하며 천황가는 서서히 약해졌고, 각자가 낙점한 진짜 천명(...)에 베팅한 귀족, 무가들이 숙청당하거나 출세하거나 하였다. [69] 게다가 맹자 혁명론 자체가 의외로 애매하거나 예외적인 조항이 더러 있어서, 군주의 가까운 친척이면서 경(卿)의 신분인 사람은 군주가 '큰' 잘못이 있고 '여러 번' 간언해도 말을 들어먹지 않으면 바꿀 수 있지만, 성씨가 다른 사람은 경의 신분이라도 그냥 사직하고 나라를 떠날 뿐이라는 둥(맹자집주 만장 하, 9), 순 임금이 상습적 살인미수범인 동생을 오히려 군주 자리에 올려 달랜 것을 친족을 사랑하니까 당연한 것이라는 둥(만장 상, 3), 굳이 천손 핑계를 안 대도 빠져나갈 구실은 있었다. [70] 원래 진사이의 열렬한 추종자로, 흠모하는 마음에 에도에서 쿄토로 편지를 보내 이것저것 질문했는데, 진사이가 답장이 없자 거절당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강력한 비판자가 되었다. 사실 그때 진사이는 말년에 중병 상태로 사경을 헤매던 터라 답장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진사이의 아들 토가이는 돌아가신 아버지 문집을 만들면서 소라이의 사랑 편지를 별 생각 없이 아버지 문집에 넣어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렇게 소라이는 부자에게 쌍으로 개망신을 당해서 더욱 격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71] 소라이는 의도적 곡해라 여겨질 정도로 주자학과는 극단적으로 정반대 해석을 감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다음과 같다. <<논어>>의 <팔일>편 1장에서 공자는 대부(신하)의 잔치에서 천자(왕)의 춤을 추는 것을 두고 '이를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을 못 참겠는가!' 하였는데, 주자학을 비롯한 전통적 해석은 공자가 도저히 못 참겠다며 명분론적인 도덕적 분노를 드러낸 것으로 보지만, 소라이는 역으로 공자가 끝내 참아낼 것을 독려하며 정치적 인내력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72] 진사이와 소라이의 학문이 히트를 치니 조선에도 그들 학문이 전해져 정약용 같은 이들이 이를 접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73] 정작 시부사와 본인은 중간에 막부 인사와 친분이 생겨 혁명은 포기하고 막부 관료로 일하다가 나중에야 메이지 신정부에 영입됐다. [74] 패도의 패는 춘추오패의 패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제환공, 진문공 등 유력 제후(패)들은 천자(天子)의 지위를 직접 차지하지 않았고 그 보좌를 자처했으나,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주나라 천자의 지위를 사실상 찬탈하고 대행하였다. 맹자는 이러한 패도정치를 힘으로써 인덕(仁德)을 가장한 것이라 보아 평가절하하였다. [75] 토쿄대 (실질적) 초대 총장. 전기, 중기에는 유학과 서구의 절충을 주장하며 <<이웃나라 얘기(토나리구사)>>, <<입헌정체략>>, <<진정대의>> 등을 통해 천부인권설, 입헌주의 등을 옹호하였으나, 후기에는 과격한 사회진화론자로 흑화하였다. [76] 묵가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사람. 유교의 가르침은 친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라는 편애(별애;別愛)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멀리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웃을 차별없이 사랑하라는 겸애(兼愛)의 가르침을 퍼뜨렸다. [77] 권력자를 위한 대의명분에 반대하고 자연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신체를 소중히 여기자는 주장을 펼쳤다. [78] 연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말한 것이다. [79] 옛날 주나라 무왕과 문왕이 폭군 주왕을 정벌할 때, 은나라 백성들은 기꺼이 폭군 주(紂)를 처벌하기 원했으며, 은나라가 주나라에 의해서 빨리 정벌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 연나라는 제나라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아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니, 옛 성군들이 폭군을 정벌한 것이랑 다른 경우라고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쳐들어가 전쟁을 벌인 것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였지, 폭군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만약 그럴 셈이 었다면 연나라 백성의 마음을 먼저 얻으려고 노력했어야 됐을 것이다. [80] 참고로 이들은 활동년대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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