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21:56:39

열녀

1. 개요2. 기원3. 로마사에서4. 한국사에서
4.1. 조선시대 이전4.2. 조선시대4.3. 양란 이후4.4. 문제점

1. 개요



남편을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 살아가는 아내를 일컫는 말. 뜻은 한평생 남편과 가문을 위해 열(烈)의 정신을 지키며 산 여인이다.

다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그 뜻이 다른데, 열사에 가까운, 강직하고 군주나 사회 도리를 위한 의를 지키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2. 기원

열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중국 전국시대로 올라간다.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중국 전국시대 왕촉
여기서 열녀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3. 로마사에서

고전적으로 유명한 사례는 로마시대에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라는 귀족 여성이 있었는데, 그의 아름다움과 정조의 명성이 자자했다. 어느 날 타르퀴니우스라는 남자가 그녀에게 자신과 하룻밤을 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루크레티아는 절개를 지켜야한다며 거절한다. 타르퀴니우스는 점점 협박을 하게되는데 그래도 통하지 않자 타르퀴니우스는 결국 "널 겁탈한 뒤에 남자 노예를 데려와서 둘 다 죽여놓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이는 미천한 노예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위장시켜 노예와 붙어먹는 더러운 여자라고 극도로 명예를 실추시키겠다는 협박이다. 할 수 없이 루크레티아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타르퀴니우스에게 굴복하고 둘은 성관계를 한다. 루크레티아는 이에 극도의 수치심을 겪으며 살아갔다.

한편 전장에 나가 싸우고 있던 남편 콜라티누스가 얼마 후 돌아오자 루크레티아는 남편에게 울며, 당신이 없는 사이 다른 남자에게 더럽혀졌다고 고백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은 "벌을 받아야겠다"며 수절을 지키려고 단검로 자결한다.[1]
"미래에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들이 나 루크레티아를 예로 들며 변명하지 못할 것이오."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로마사 제1권
루크레티아의 열녀전은 서양에서 단골 주제여서, 여러 회화나 조각품으로 만들어졌다. 허나 자결하는 장면이나 남편에게 고백하는 장면보다는 타르퀴니우스가 나체의 루크레티아를 겁탈하려는 선정적인 장면 위주다.
파일:열녀 Hans-Von-Aachen-The-Rape-of-Lucretia.jpg
파일:열녀 Tarquin Lucretia, Jacopo Robusti.jpg
Hans von Aachen 1600년 作
"루크레티아의 강간"
Jacopo Robusti 1578년 作 "타르퀸과 루크레티아"

4. 한국사에서

4.1. 조선시대 이전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열녀에 대한 기록은 신라 진평왕 시기 설씨(薛氏)에 대한 이야기와 백제 개로왕 시기의 도미(都彌) 부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고려 말 전란 속에서 수절을 지킨 여성들의 이야기가 고려사에 수록되었다.

4.2. 조선시대

한국사에서 열녀를 가장 많이 강조했던 시대가 바로 조선시대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수절이 강조되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열녀를 장려하였고, 한 지역에서 열녀가 탄생하면 열녀를 기리기 위한 열녀문을 세웠다.

1413년(태종 13년), 태종이 전국의 이름난 효부, 열녀 등을 추천하라 명하자 백성들은 수많은 열녀 관련 사연들을 올렸다.[2] 그 중에는 경상도 도관찰사가 추천한 한 사례가 있었는데 안동의 김씨부인이 남편을 구하기 위해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는 유교적 가부장제를 강화하기 위해 삼강행실도를 발간하여 열녀 제도를 장려하였다. 성종 시기에는 과부 재혼하면 재혼한 여성의 자손들이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였다. 다만 이는 양반층에 한했고, 농업이 주된 일반 평민들 사이에선 부부 중 한 쪽이 없으면 농업을 이어가는 게 불가능해지니 재혼이 굉장히 일반적이었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일반 서민들의 사고관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4.3. 양란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양란 이후 조선 사회는 국가 질서 회복과 안정 추구를 중시하였다. 열녀의 개념도 이때 변화되어 정절과 순종이 점차 강조되었다.[3] 조선 초에 수절한 여성들이 열녀로 포상받았다가, 양란 이후 남편을 따라 죽었거나,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성들이 열녀로 포상받았다.

조선 후기 과부의 수절을 의무로 하는 풍속이 조선 사회에 생겨나며, 많은 여성들이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서 열녀에 대한 보고가 전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거기다 양반의 수 증가와 한정된 관직으로 인해 벼슬을 구하기 어렵기 되자, 열녀나 효자로 인정시 나라에서 주는 미관말직이라도 받기 위해서 과부들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때문에 열녀를 만들고자 자결을 강요한 주변인들을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4.4. 문제점

광명한 햇빛을 스스로 꺼버리는 일인데 어찌 장려하는가?
연암 박지원, <열녀 함양 박씨전>
남편이 죽었을 때 처가 따라 죽는 것을 열(烈)이라 말하며 정표하는 문을 세우고 기둥을 붉게 칠하며 그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그 아들과 손자의 요역(徭役)을 감면해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열이 아니라 소견이 좁은 것이다. 이것은 담당 관리가 살피지 못해서일 뿐이다.
다산 정약용, <열부론>
어떤 지역에 열녀가 나서 열녀문을 하사받으면, 지역에 요역이나 세금 면제 혹은 가문의 남성들에게 벼슬내리기 같은 큰 혜택이 돌아가는 점을 이용하여 억지로 손가락을 끊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단적으로는 여성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4] 심지어 순조 시기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재혼한 과부의 자식들의 벼슬길이 차단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인도의 악습으로 여겨지는 사티와 비슷해진 것.

이처럼 조선 후기부터 열녀에 대한 보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위와 같은 비판이 나온 것도 양란 이후 18세기~19세기 갑오개혁 이전까지였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었다.

[1] 그리고 이 때 자신의 복수를 해 달라고 하는데 그 말대로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분노한 로마 시민들에게 맞아죽었다. 심지어 로마 시민들이 아예 왕정까지 폐지시켜 버리는 바람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행위로 아버지의 왕위까지 잃게 만들었다. [2] 자기 가문(고을)에서 열녀가 나면 세금혜택 등 많은 이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없으면 억지로 소녀의 손가락을 끊어서라도 올렸다고. [3] 실제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던 조선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라며 비난받았다. 지들이 전쟁 져놓고 [4] 과부가 자결하게 뷴위기를 조성하거나 살해 후 자살로 꾸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