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5:24:18

참군인


1. 개요2. 참군인의 속성3. 참군인 사례
3.1. 대한민국3.2. 그 외 국가

1. 개요

' 진짜, 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군인이 합쳐진 단어. 어떤 군인이 실로 군인다울 때 쓰는 용어. 장교 병사를 가리지 않고 참군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명장, 덕장, 용장, 맹장 등 뛰어난 지휘관, 장군들에게만 붙이는 명칭들과 차이점이 있다.[1] 반대로 어느 장군이 참군인이긴 하지만 명장이나 용장까지는 아닐 수도 있다.

'군인답다'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본래 참군인이란 능력과 업적보다는[2] 마음가짐이나 용기, 자세 등에 좀 더 방점이 찍힌 단어다. 즉 소신과 원칙에 대한 중시, 정치적 중립,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대한 용기 있는 항거, 군사적 업적보다는 인명을 우선시, 사리사욕보다는 군인의 명예 중시 등이 본래 참군인의 조건으로 평가된다. 가령 개인적으로는 친일행적 등의 오점이 있고 6.25 전쟁에서도 그보다 전공이 큰 장군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이익을 무릅쓰고 이승만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끝끝내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참군인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은 이종찬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령 어떤 지휘관이 뛰어난 작전으로 연전연승한다면 명장이라 불리겠지만 참군인이라기엔 애매하다. 반면 불의한 명령( 민간인 학살 등)을 거부하고 좌천된다든가, 큰 보상을 미끼로 쿠데타 동참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한다든가, 자신을 희생해 전우들을 구한다든가 하면 참군인이라 불릴 만하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런 의미로만 한정적으로 쓰이지는 않고 군인으로서의 포스나 위엄, 능력이 넘쳐흐른다면 반쯤 경탄을 담아 참군인이라 부르기도 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혼쭐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의미의 참교육과도 비슷한 단어 쓰임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참군인이란 단어는 일반 민간과 언론뿐만 아니라 아래 사례에 나와 있듯 대한민국 육군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단어다.

물론 이런 단어가 늘 그렇듯, 반어법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주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융통성이 전혀 없이 매사에 꽉 막혀있는 꼴통 FM을 비꼬는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2. 참군인의 속성

참군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충실히 다하는 군인이 참군인일 뿐 유별나게 다른 점은 없다. 단지 그 군인 본분이 어려워서 참군인 소리 듣는 군인이 적을 뿐이다.
  • 올바른 충성, 정치적 중립, 불이익을 무릅쓰고 부당한 명령을 거부함
    전술했다시피 원래는 이 의미가 가장 컸다.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인의 충성의 대상은 국가와 국민이며, 권력자에게 충성해선 안 된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는 대통령이거나 총리이며 이들은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임명된 국가행정의 최고책임자이자, 국군 통수권자이므로 이들의 명령에는 당연히 충성해야 한다. 단지 위법한 권력자 내지 위법한 명령[3]에 충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법한 권력에 충성을 바치는 군인은 국민의 군대인 국군이 아니라, 일개 권력자들의 사병일 따름이다.[4] 그게 어느 쪽이든 어느 정파와 연결되어 정치적인 행보를 보인 정치군인에게 참군인이란 단어를 쓰기는 어렵다. 국방의 본분보다 정치에 더 신경 쓰는 시점에서 그 사람은 군복을 입은 정치인이다. 간과하기 쉽지만 군인도 공무원이고 공무원의 정치 중립은 국가공무원법 제65조로 명시되어 정치 운동이 금지된다. 당연히 역사 속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들, 반란군은 참군인의 반대편에 서 있다. 반란군이 내세운 대의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군인이 할 일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당대와 후대에 쿠데타 또는 반란이 미화되거나 평가가 변한다고 해도 그 세력 지도부가 참군인이라 불릴 순 없다. 나라를 변화시키는건 국민들과 정부가 할 일이지, 군대나 군지휘관이 할 일이 아니라는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 애국심
      국가에 대한 충성은 애국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북한의 몇몇 도발 때 말년병장들이 전역을 연기했다는 사례들은 애국심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5]
  • 청렴
    군인은 공무원이고 공무원 6대 의무의 적용을 받는다. 그 중 청렴은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다는 의미다. 청렴의 의무가 군인에게 강조되는 까닭은 군인이 청렴을 지키지 않는 경우, 평시에 근무를 소홀히 하고 국가와 군용 재산을 사적 용도로 이용하거나 사건사고를 은폐하고 방산비리에 연루되어 국가의 부를 좀먹거나 부패를 조장하며, 전시에는 군공을 조작하거나 적지에서 군형법을 어기고 전쟁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쉽게 볼 수 있는 직업군인들의 추가근무 기록 조작과 근무수당 부정 수령, 일명 ' 가라' 치기로 대표되는 비리들도 군인들이 청렴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청렴함을 지켜 군대와 국가 전체의 해악을 근절하고 군의 기능을 정상으로 유지하는 군인은 능히 참군인이라 할 수 있다.
  • 군기 유지
    군대의 기율을 잘 지켜 사기를 유지하고 군인 신분으로 언제 있을지 모를 전투에 대비하는 것. 가장 기본이 되는 군인의 정신과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도 참군인의 자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경계근무에서 잡담이나 취식 등 요령을 안 부리고[6]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근무시간 내내 사주경계에 힘쓰는 초병이 있다면 그 초병은 참군인이라 할 만한 것이다. 참고로 군기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상급자에게 아부 잘 하는 게 군기가 잘 잡혀있는 게 아니다.
  • 전투 기량 유지
    근무뿐만 아니라 전투와 유사시 등을 대비한 각종 훈련, 교육도 마찬가지다. 어느 병사가 각종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고 전투 기량을 갈고 닦는다면 그것은 참군인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다. 군인으로 있으면서 흔하게 참군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사격훈련에서 고득점을 얻는 것으로, 화기를 잘 다루는 능력은 현대 군인의 가장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장교가 일을 대충 설렁설렁 하지 않고 정해진 일과와 연간~월간 계획에 따라 충실히 업무를 수행해서 군인들의 기량 유지를 한다면 참군인이라고 칭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FM, 정석대로 군인의 일을 하면 된다.
  • 전공, 업적
    평시 근무와 훈련교육 등을 통해 작전, 전투, 전쟁에서 공로를 쌓은 것. 이 전공들을 장성급이 쌓아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면 위에서 말한 명장이 된다. 굳이 지휘자가 아닌 병사여도 공로를 쌓으면 상급자에게 어깨 토닥임을 받으며 참군인이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다. 꼭 눈에 띄는 공적이 없어보여도 국방이 튼튼한 것은 참군인들이 평시에 공로를 쌓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부대에서 볼 수 있는 공로는 바로 무사고다.
  • 대민지원
    국민을 위한 비전투 서비스. 부대 외에서 참군인이라고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제설이나 수해로 인한 지원이 일반적이지만 그 외에도 시민을 구했다는 여러 훈훈한 미담에서 군인이 나오는 사례가 많다. 굳이 참군인이라기 보다 의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군인이었기에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심폐소생술을 더 익히거나 힘으로 범인을 제압한 병사, 또는 수영으로 시민을 구한 장교 사례도 있다. 군대에서 제일 하기 간단한 사례인 헌혈도 국민들의 건강과 국가 보건을 위한 대민지원의 일환이다.
  • 전우애
    얼마나 전우를 아끼고 사랑하는가이다. 간과하기 쉽지만 이조차도 지키지 않거나 무시해서 선임이나 상급자, 후임이나 하급자에게 욕을 먹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즉, 이 부분은 생활 속 인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평시에 상급자에게 인정받고 후임들에게 존경 받는 군인도 충분히 참군인이라 할 만하며, 불시에 일어난 사고나 전시가 되어 전우를 구하는 것도 참군인이라 할 만하다. 이런 모범적인 상관들은 전역한 부하들 사이에서도 형처럼 대접받는다.
  • 자기희생
    전우 대신 자신이 죽음, 전우들에게 위험을 알리다가 부상당함, 시민들과 공익을 위해 자신이 희생함 등 여러 사례가 있다. 전공을 세운 상이군인이라면 더욱 참군인으로 불린다.

3. 참군인 사례

물론 이 목록에 없다고 해서 참군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며, 알려지지 않았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훌륭한 군인들이 각자의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 기준: 특별히 해당되는 부분과 기호를 함께 게시.
* 올바른 충성, 정치 중립, 부당한 명령 거부 - △
* 자기희생 - ◈
* 애국심 - ♡
* 청렴 - ♧
* 군기 유지 - ◇
* 기량 유지 - ◆
* 전공 업적 - ★
* 대민지원 - ◉
* 전우애 - ♥

3.1.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에서 대한민국 국군(진압군)측에 섰던 군인들 중 끝까지 맞섰던 사람들. △◈♡
  • 강재구, 김칠섭, 차성도: 위급한 상황에서 부하 장병을 구하고 대신 순직함으로써 희생정신을 발휘한 참군인. ♥◈
  • 권 해병: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의 총격에 부상을 당한 피해자이자, 사상자를 줄인 공을 세운 해병.[8] 사건 장소에 있었던 다른 해병대원들이 전혀 군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 혼자서 총격 사건의 범인을 막고 총격에 맞아 희생을 감수한 참군인이다. ◇◈
  • 김용우: 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관급 간부인 시절 때부터 휘하 병사들을 먼저 챙겼다는 일화가 많다. 이후 사단장, 군단장 등을 역임하였고, 장군으로서 만든 공로와 더불어 귀순하는 북한군 병사에 대한 모범적인 대처 등에 대한 공로를 함께 쌓았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하면서 미래무기, 웹 미디어 육성, 병사들의 처우개선 등에 많은 관심을 쏟은 덕장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
  • 김영수: 계룡대 근무지원단 9억원대 보급비리를 수차례 고발 하고 국군체육부대로 좌천되었다.그 후 해당비리를 PD수첩에 고발하였다.결국 나중에 내부고발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게된다.[9]♧◈△
  • 김은기: 전 공군참모총장으로,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제2 롯데월드 건설을 반대하다가 경질되었다. △♧◈
  • 김종오: 6.25 전쟁 초기 흩어진 병력을 규합해 UN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쳤다. 그 뒤 백마 고지전투 등에서 화려한 전공을 새웠다. ♡★
  • 김홍일: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중일전쟁 등에 참전하였다. 6.25 전쟁 당시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쳤으며, 말년에는 군부독재에도 반대해 민주화 운동을 한 참군인이다. ♡★△
  • 나상웅: 초임소위들을 이병으로 잠입시켜 부조리와 병 생활개선에 힘 썼고, 솔선수범하여 수하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본인도 FM대로 했다. 또한 병들이 전역하면 우리가 지켜야 할 시민이라는 말까지 남긴 진정한 참군인이다. ◆◇♥
  • 대한민국 육군은 매년 충성·용기·책임·존중·창의 등 5대 가치관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장병 및 군무원을 대상으로 참군인 대상 수상을 하고 있다. △◆
  • 민간인을 위기에서 구한 군인들 ♡◉
  •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순직 조종사들 ♡◈
  • 백군기: 평소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으며 장군이 되고 난 뒤 초심을 잃지 않고 병사들의 고충을 직접 파악하고자 노력했고 병사들 복지에 온 힘을 쏟았던 명장이다. ◇◆♥
  • 안중근: 대한과 일본 양국 그리고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함과 대한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그 또한 의병장으로 군인이었으며,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참군인의 자세도 안중근에게 감화된 일본군 간수와 나눈 대화에서 나왔다고 한다. ◇♡◈
  • 윤영하: 제2연평해전의 영웅이며, 서해 NLL을 목숨바쳐 사수한 대한민국 해군의 진정한 군인으로 비록 전투 초반에 전사했지만, 끝까지 자기 임무를 다하고 귀감이 된 참군인이다. 당시 참수리 357호정의 승조원들이 등산곶 684호정의 선제 기습 포격에 맞설 수 있도록 대응사격 명령을 내렸다. ◇◈
  • 오종혁: 클릭비의 멤버, 군에서 상당한 모범을 보인 케이스.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특등사수로 훈련을 마쳤고 연예인 경력을 살려 군악대로 편하게 전역할 수 있었지만 해병대사령관에게 자신이 청원하여 해병수색대로 성실하게 복무하였다. 연예인은 물론이고 일반인이라면 전역하고 싶어서 안달일 텐데 오종혁은 수색대 동계 훈련을 받고 싶어서 스스로 전역을 35일이나 미루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
  • 이구호 - 5.18 민주화운동 당시 기계화학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황영시 육군참모총장의 시위 진압 전차지원을 반대하고 신군부에 의해 강제예편을 당하였던 장성이다. △◈♡
  • 이순신: 자신부터 모범을 보인 엄정한 군기, 상관은 물론이요 국가 원수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한 용기, 전란에 대비했던 철저한 훈련, 이길 자리만 골라서 찾아가는 뛰어난 통찰력, 빛나는 백전백승, 국가를 향한 충성과 애국심, 부하들을 위한 사랑, 통제영으로 피난온 백성들까지 살피고 먹여살린 대민지원, 마지막 노량 해전에서 자신의 죽음까지. 참군인의 교과서를 넘어 명장, 성웅으로 불리니 두말할 나위 없다. 대한민국 군인, 특히 해군에서는 이순신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참군인의 표본이다. 당장 참군인의 기준 9가지 모두를 충족하는 군인은 이순신이 유일하다.△♡♧◇◆★◉♥◈
  • 이순진: 육군3사관학교 출신 최초의 합동참모의장. 2사단장 재임 시절 양구 고등학생 군인 집단 폭행 사건이 일어나자 병사들의 권리향상을 이끌어내고 양구군의 갑질을 없애기 위해 21사단장이었던 장준규 사단장과 함께 양구군에 대결을 벌여 끝내 가해학생들을 심판 받게 만들었다. 그외에도 항상 병사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3사관학교 최초로 합참의장이 된 후에도 선진병영 문화를 전국의 군부대에 널리 보급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추가로 일본군의 많고 많은 악습들 중 하나인 전담 조리병을 두지 않았고, 1명만 둔 공관병도 전화응대 등 잡무만 시키면서 식사시간에는 다른 병사들처럼 병사식당을 이용하도록 했다. ♥◆
  • 이세규: 대령 시절 월급의 절반을 불우이웃 돕기에 쏟아부은 나머지 자기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서 손님이 오면 대접하는 것이 콩나물 국밥 한 그릇 밖에 없어서 '콩나물 대령'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이후 3선개헌을 반대했다가 박정희에게 밉보여서 준장을 끝으로 자진예편했다. 그후 신민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으며 실미도 사건이 터졌을 당시 진상을 밝혀내서 무장 공비라는 정부의 발표를 뒤짚는것에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박정희에게 단단히 찍혀서 10월 유신 이후 수사기관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수사기관에서 풀려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
  • 이종찬: 친일 행적, 유신정우회 참가[10] 등 여러 오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의 부산 정치파동 당시 명령을 거부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참군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개별적 평가와 별개로 참군인은 이미 이종찬을 수식하는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
  • 이구호 :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철조망을 휘감은 전차를 동원해서 광주를 공격하라는 육군참모차장 황영시의 지시를 철조망은 전쟁터에서도 감지 않으며 애당초 철조망을 두르면 전진도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11] 이에 황영시가 포를 쏘고 밀고 들어가면 될거 아니냐고 따지자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는 걸로 응수했고 결국 이 대가를 1982년에 강제전역당하는 것으로 받게 되었다. 이후 청문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때 황영시는 녹음이 되어있지 않으니 인정할 수 없다고 버텼으나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그런 일이 있다면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중위 시절인 1983년 10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대통령을 수행한 합동참모의장 이기백 대장 전속부관으로, 당시 폭탄 테러로 아수라장이 된 묘소에서 추가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들어 중상을 입은 이기백 대장을 구출하였다. 이 공으로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했다. ♥★
  • 정두근: 32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상호존중과 배려 운동을 시작했는데, 많은 부조리를 없애려는 와중에[12] 상부로부터 대장진급을 조건으로 개혁을 그만두라는 거래를 거부하고 자신의 진급과 소신을 맞바꿔 많은 부조리를 없앴다. △◈◆
  • 최영: 잘 알려져 있듯이 고려를 국란에서 몇번이고 구해낸 명장이요, 영웅이다. 장군이라고 해서 후방에서 안전하게 있지 않고 선두에 서서 왜구들을 토벌하였고 왜구의 화살을 입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홍산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렴하여 사리사욕이 없었다. 끝까지 조선을 세우려는 이성계와 그 일파들에게 가담하지 않고 고려에 충성을 다해 싸우다 잡혀 후에 처형되었다. △★♧♡◈
  • 최원일 - 천안함 함장으로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한직을 전전하면서도 부하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썼다. ♥
  • 한주호 - 해군 준위, 대한민국 해군 발전에 크나큰 공로를 세웠으며 "군인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임무"라는 명언을 남긴 인물이고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에는 출동 명령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부하들을 구하려다 순직한 참군인이다. ◇♥◈
  • 황규만 - 예비역 준장으로 장성이지만 그는 현충원의 장군 묘역이 아니라 장병 묘역에 전우와 함께 묻혔다. 소위였던 한국전쟁 때, 안강지구 전투에서 전멸 직전에 있던 자신의 부대를 지원하다가 죽은 '김 소위'와 죽어서도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 소위는 황규만 소위에게 성만 알려준 채로 함께 싸우다가 북한군의 총에 전사했다. 황규만 소위는 임시로 김 소위를 묻었다가 전쟁 후 1964년 김 소위의 무덤을 다시 찾아 국립묘지에 이장하고 명절마다 김 소위의 묘를 찾았다. 황규만 장군은 26년 동안 김 소위의 이름과 가족을 찾아다닌 끝에 먼저 보낸 전우의 이름이 김수영이며 그 유족도 찾을 수 있었다. "김 소위를 놔두고 내가 혼자 어떻게 가요. 같이 있어야지… 내세에 가서 김 소위를 만나면 김 소위가 나한테 아마 술 한번 잘 살 거야." 한번의 전투에서 만난 사이였지만 70년 전우애를 지킨 참군인으로 기록되었다. MBC

3.2. 그 외 국가

  • 조지 워싱턴
  • 조지 듀이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도고 헤이하치로
  • 조지 마셜
  • 체스터 니미츠
  • 어니스트 킹
  • 윌리엄 리히
  • 윌리엄 홀시
  • 쉬친셴: 천안문 6.4 항쟁 당시 베이징 시민들을 죽이라는 무력 진압을 거부하다 해임되고 고초를 겪은 중국의 장군.
  • 프란츠 슈티글러: 피격되어 내부 사상자들로 사경을 헤매는 미군 폭격기를 발견, 마무리 지어 격추시킬 수 있었으나 공격하지 않고 다른 독일군에게 공격받지 않도록 국경까지 호위 해준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 아무리 적이어도 전쟁에서 지켜야 할 인도주의가 무엇인지 원칙과 신념을 실천으로 옮긴 군인이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 중 하나로 총통지휘소에 폭탄을 설치해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려고 독재자이자 전쟁을 일으킨 주범을 죽이려 했으니 이 사례는 독일 국민 입장에서 보나, 세계사적 시각으로 보나 반역이라고 보기 힘들다.
  • 요제프 강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무려 17년간 복무하며 철십자 훈장을 받고 프랑스 침공부터 독소전쟁까지 모두 겪은 독일 국방군의 소령.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평범한 독일 국방군의 소령 같지만 참군인 대우를 받는 이유는 바로 전쟁범죄를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으며, 최후에는 프랑스 포로들을 처형하려는 친위대에 맞서 이터 성 전투를 치르고 전사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터 성 전투 문서 참조.
  • 요나이 미쓰마사: 일본군 해군과 그 수장인 해군대신을 거쳐 일본 총리를 지냈던 인물로, 성격이 온화하고 부하들을 잘 챙겼으며 미쳐 돌아가는 군부에 지속적으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리고 끝까지 전쟁을 반대했지만 이런 또라이가 총리대신을 맡는 바람에 결국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비극의 최후를 맞았다.
  • 기무라 마사토미
  • 비슈누 쉬레스타
  •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 당시 순직한 러시아군 특공대원. 아이들을 테러범으로부터 지키기위해 모든 지휘관부터 많은 대원들이 몸을 희생해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냈다.
  • 세드리크 드 피에르퐁, 알랭 베르통셀로: 두 사람 모두 프랑스 해군 내 해병 최정예 특수부대 중 하나인 위베르 특공대(Commando Hubert)[13] 소속의 상사이며 2019년 5월 9일에서 10일 사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인질 구출 작전 중 순직했다. 프랑스 합참의 브리핑 내용에 따르면 두 군인은 무장세력의 숙영지에 은밀히 침투하다가 인질이 있는 곳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서 발각됐다. 두 사람은 인질의 안전을 우려해 발포하지 않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달려들었다가 근접사격을 받고 숨졌다. 대신 프랑스인 2명과 한국인 여성 1명, 미국인 여성 1명의 총 4명의 인질을 무사히 구출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무공을 기려 영결식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14] 관련기사
  •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냉전 시기 소련의 군인으로 긴박한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으로 핵 미사일 감지가 오류인 것을 밝혀내 자칫하면 상호확증파괴로 전 인류가 위기에 놓일수 있는 상황을 막았다.
  • 이마무라 히토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제16군 사령관으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전선을 지휘하였다. 그는 포로학대를 하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인들을 우대해서 인도네시아인들의 호감을 얻었다. 태평양 전쟁당시 현지 주민들에게 호감을 얻은 일본장성은 이마무라 히토시가 유일할것이다.특히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가 이마무라를 존경한것으로 유명하다.전쟁후 전범재판을 받을때도 부하들 안위를 걱정한것으로 유명하다.
  • 데이비드 무투아(소령), 존 무그완자, 존 바라자(각각 대위) - 1982년 케냐 쿠데타 당시 쿠데타에 가담한 상등병[15]에게 대통령 관저와 하원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16] 이들은 겉으로는 쿠데타군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 폭탄을 산의 숲 속에 투척하며 쿠데타군의 하극상과 명령에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 빌헬름 호젠펠트 -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오는 그 사람 맞다.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외에도 홀로코스트에서 구한 유대인이 많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많은 사람들을 홀로코스트에서 구한 의인이었으나, 독소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소련으로서 아무 상관 없는[17] 장교이나 소련의 포로가 되어 사형[18]에서 2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된 관리와 치료 없이소련은 오히려 사형에 못처해서 안달인데 좋아했을수도 있다 뇌졸중을 겪으며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고, 고문 후유증으로 1952년 사망했다.

[1] 물론 명장, 덕장, 용장, 맹장들도 참군인에 포함될 수 있다. 그 장수의 인격 평가가 바닥이 아니라면 말이다. [2] 이 요소들이 안 중요하다는 건 물론 아니다. [3] 둘 중에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안 된다. 적법한 권력자가 내린 명령이어도 그 명령이 위법하다면 따라선 안되고, 적법한 절차를 거친 정당한 명령이어도 권력자의 자리가 위법한 자리라면 따라선 안된다. [4] 굳이 그 나라 법에 위법하지 않아도 군주국가의 군대, 중국처럼 국가차원에서 당의 군대를 유지하거나, 나치당 같이 일개 정당의 군대도 역사상 있긴 하다. [5] 다만 전역 연기로 인해 받게 되는 소정의 비용을 노리거나,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장래 사회적으로 이득을 보기 위한 타산에 의해 전역을 연기한 사례도 존재할 수는 있다. [6] 물론, 현실적으로 봤을 때 경계근무 도중 잡담만 하는 정도라면 그 초병은 참군인까지는 아니라 치더라도 꽤 성실한 자세로 근무했다고 볼 수 있다. [7] 그 유명한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서울의 봄(영화)의 주인공. [8] 사망자 권 모 일병이 아님. 사건 당시 이등병. [9] 좌천 되었으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고한다.그리고 고발의 목적이 진급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도 돌았다고한다. [10] 사실 이건 하기 싫은데 그래도 사적으로 친했던 김재규의 권유와 정치권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다. 본인 자신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중요시했다. 거기다가 유신정우회 활동도 첫번째 때에는 참고 했다가 두번째 때에는 자신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이름이 올라오자 뚜껑이 열려서 김재규에게 항의를 했다. 물론 이 때의 '정치권'이 뭘 의미하는지 감안하면 뭘 해도 거절할 수 없어서 결국 해야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조를 지키기 위해서 국회에서 딱 한번만 발언한게 있고 뱃지도 주요 공식 석상에서만 찼다. [11] 정식 지휘계통을 통해 지시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당시는 하나회 일당들이 법과 절차들이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게 현실이었다. [12] 이후 인분 사건으로 매우 어수선했던 육군훈련소를 환골탈태시킨다. [13] 프랑스군 최고의 엘리트 부대로 꼽히는 5개의 특공대 중 하나로, 주 임무는 대테러·인질구출·수중폭파 작전이다. [14] 구출된 인질 중에 한국인이 있어서 영결식에는 주 프랑스 한국 대사도 참석했다. [15] 참고로 이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무려 일등병이었다고 한다.(...) [16] 사실 이는 명령을 내린 상등병이 제트 전투기를 조종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17] 동부전선과 아무 상관 없는 체육관 관리 장교(...)였으나 나치독일의 정신나간짓을 독소전에서 열심히 경험한 소련은 일개 후방 체육관 장교라도 살려두지 않으려 했다. [18] 변호사가 없었다고 한다. 교수대에 매달리게 된 나치 전범들도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에서 변호인은 있었다. 북한이나 그에 준하는 급의 국가가 아닌 이상 흉악범도 형식적으로나마 정상적인 재판을 위해선 국선변호사라도 주는것을 생각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