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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길 48 | ||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필사본 / 일기류 | ||
저자 | 이순신 | ||
수량/면적 | 합 9책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제작시기 | 조선 선조 25∼31년 | }}} | |
{{{#!wiki style="margin:-15px -10px;"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
이름 | 한국어 | 난중일기(亂中日記) | |
영어 |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 ||
프랑스어 | Le journal intime de guerre de l'Amiral Yi Sun-sin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 ||
소장·관리 | 현충사 | ||
등재 유형 | 기록유산 | ||
등재 연도 | 2013년 | ||
제작 시기 | 1592년 ~ 1598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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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亂 中 日 記
조선 선조 시기의 무신(武臣)이었던 충무공 이순신이 1592년 ~ 1598년(임란 7년)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를 말한다. 정확히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정월(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선조 31년) 11월 17일(양력 1598년 12월 14일)까지 2,539일간 기록한 일기이다. 현재까지도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 초고본 8권 중 7권이 남아서 충남 현충사에 비치되어 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1] 2013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란 '전란 중에 쓴 일기'라는 뜻으로 원래 이순신이 쓴 초고본에는 난중일기가 아니라 해당 년도의 이름을 붙인 임진일기, 을미일기 등의 제목이 붙어 있었다.[2] 난중일기란 제목은 이순신 사후 200년이 지나고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 때[3] 왕명으로 윤행임 등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할 때 5~8권에 초고본을 실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2. 내용
난중일기에는 그 날의 기상 변화, 군무 내용, 진중의 군정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본가에 대한 걱정, 자식과 아내, 모친에 대한 그리움, 평생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류성룡에 대한 걱정, 원균에 대한 비판 등 이순신 본인의 개인적인 정서도 기록되어 있다. 각각의 일지는 일기답게 대체로 요점만 간략하게 적혀 있으며, 별 일 없었던 날에는 그냥 날씨만 기재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 번역본을 읽다 보면 한두 문장으로 끝나는 날도 있고 정유년(1597) 일기처럼 이순신의 절절하고 애틋한 감정을 숨김없이 적어놓은 부분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4] 가장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은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는 것, 활 몇 순(1순은 5발)을 쏘았다는 것, 어머니의 안부, 자신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 등이다.2.1. 보기
- 원문 출처는 한국 고전 종합 DB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보기로서 극소수 일부만을 발췌한 것이며 번역은 오역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번역문을 참고하며, 원문 전체를 읽어보고 싶은 사람은 난중일기를 자체 번역하여 올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검색해서 봐도 좋다.
1592년 1월 1일. '난중일기의 첫 일기'
初一日壬戌。 晴。 曉。 舍弟汝弼及姪子菶, 豚薈來話。 但離天只。 再過南中。 不勝懷恨之至。 兵使軍官李敬信。 來納兵使簡及歲物, 長片箭雜物。
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菶), 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5]를 떠나서 다시 남쪽에서 설을 보내니 지극한 회한을 이길 수가 없다. 병마절도사의 군관 이경신이 와서 병마 절도사의 편지와 설날 선물, 장전(長箭)[6]과 편전(片箭)[7]과 그외 여러가지 잡물을 바쳤다.
初一日壬戌。 晴。 曉。 舍弟汝弼及姪子菶, 豚薈來話。 但離天只。 再過南中。 不勝懷恨之至。 兵使軍官李敬信。 來納兵使簡及歲物, 長片箭雜物。
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菶), 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5]를 떠나서 다시 남쪽에서 설을 보내니 지극한 회한을 이길 수가 없다. 병마절도사의 군관 이경신이 와서 병마 절도사의 편지와 설날 선물, 장전(長箭)[6]과 편전(片箭)[7]과 그외 여러가지 잡물을 바쳤다.
1592년 1월 16일 일기
十六日丁丑。晴。出東軒公事。各官品官色吏現謁。防踏兵船軍官,色吏。以其兵船不爲修繕决杖。虞候假守。亦不檢飭。至於此極。不勝駭恠。徒事肥己。如是不顧。他日之事。亦可知矣。城底土兵朴夢世。以石手往先生院鎖石浮出處。害及四隣狗子。故决杖八十。
16일 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관아의 관리들과 색리들이 알현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장형에 처했다. 우후(虞候)와 가수(假守)들 또한 점검하고 경계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헛되이 제 한 몸 살찌우기만 일삼고 이리 돌보지 않으니, 다른 날의 일도 알 만한 것이리라. 성 밑의 토박이 병사인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先生院) 쇄석에 쓸 돌 뜨는 곳에 가서 이웃 강아지에 해를 끼친 고로 장형 80대에 처했다.
十六日丁丑。晴。出東軒公事。各官品官色吏現謁。防踏兵船軍官,色吏。以其兵船不爲修繕决杖。虞候假守。亦不檢飭。至於此極。不勝駭恠。徒事肥己。如是不顧。他日之事。亦可知矣。城底土兵朴夢世。以石手往先生院鎖石浮出處。害及四隣狗子。故决杖八十。
16일 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관아의 관리들과 색리들이 알현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장형에 처했다. 우후(虞候)와 가수(假守)들 또한 점검하고 경계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헛되이 제 한 몸 살찌우기만 일삼고 이리 돌보지 않으니, 다른 날의 일도 알 만한 것이리라. 성 밑의 토박이 병사인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先生院) 쇄석에 쓸 돌 뜨는 곳에 가서 이웃 강아지에 해를 끼친 고로 장형 80대에 처했다.
1592년 2월 4일 일기
初四日乙未。 晴。 出東軒公事後。 上北峯築煙臺處。 築處甚善。 萬無頹落之理。 李鳳壽之勤事。 可知矣。 終日觀望。 當夕下來。 廵視垓坑。
초4일 을미.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본 후에 북봉의 연대(煙臺) 지은 곳으로 올라갔다. 지은 곳이 너무 훌륭해서 무너질 리가 만무했다. 이봉수가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初四日乙未。 晴。 出東軒公事後。 上北峯築煙臺處。 築處甚善。 萬無頹落之理。 李鳳壽之勤事。 可知矣。 終日觀望。 當夕下來。 廵視垓坑。
초4일 을미.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본 후에 북봉의 연대(煙臺) 지은 곳으로 올라갔다. 지은 곳이 너무 훌륭해서 무너질 리가 만무했다. 이봉수가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1592년 2월 19일 일기
十九日庚戌。 晴。 發廵到白也串監牧官處。 則昇平府伯率其弟來待。 妓生亦來。 雨後山花爛開。 景物之勝。 難可形言。 暮到梨木龜尾。 乘船到呂島。 則瀛洲倅與呂島權管出迎。 防備點閱。 興陽以其明日行祭先行。
19일 경술. 맑음. 순시를 떠나 백야곶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승평 부사가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妓生)도 데려왔다. 비 온후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훌륭한 경치를 가히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날이 저물어 이목구미에 이른 뒤 배를 타고 여도에 가니 영주 현관과 여도 권관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흥양 현감은 명일 제사지내는 것 때문에 먼저 갔다.
十九日庚戌。 晴。 發廵到白也串監牧官處。 則昇平府伯率其弟來待。 妓生亦來。 雨後山花爛開。 景物之勝。 難可形言。 暮到梨木龜尾。 乘船到呂島。 則瀛洲倅與呂島權管出迎。 防備點閱。 興陽以其明日行祭先行。
19일 경술. 맑음. 순시를 떠나 백야곶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승평 부사가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妓生)도 데려왔다. 비 온후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훌륭한 경치를 가히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날이 저물어 이목구미에 이른 뒤 배를 타고 여도에 가니 영주 현관과 여도 권관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흥양 현감은 명일 제사지내는 것 때문에 먼저 갔다.
1592년 4월 15일 일기. (임란 발발 및 전황이 이순신에게 최초로 고지됨.)
十五日甲辰。晴。以國忌不坐。修廵使答簡及別錄。卽令驛子馳送。日沒時嶺南右水使傳通內。倭船九十餘出來。釜山前絶影島駐泊。一時又到水使關。倭賊三百五十餘隻。已到釜山浦越邊云。故卽刻馳啓。兼移廵使,兵使,右水使處。嶺南方伯關。亦到如是。
15일 갑진. 맑음. 국기일(國忌日)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사(巡使)[10]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고친 뒤 즉시 역자(驛子)[11]로 하여금 가게 하였다. 일몰 때 영남 우수사가 보낸 통문을 보니 왜선 구십 여척이 나와 부산 앞 절영도 앞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온 수사(水使)의 관문(關文)[12]을 보니 왜선 삼백 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로 즉각 장계를 써서 보냈고 순사, 병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돌렸다. 영남 방백의 관문 역시 왔는데 같은 내용이었다.
十五日甲辰。晴。以國忌不坐。修廵使答簡及別錄。卽令驛子馳送。日沒時嶺南右水使傳通內。倭船九十餘出來。釜山前絶影島駐泊。一時又到水使關。倭賊三百五十餘隻。已到釜山浦越邊云。故卽刻馳啓。兼移廵使,兵使,右水使處。嶺南方伯關。亦到如是。
15일 갑진. 맑음. 국기일(國忌日)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사(巡使)[10]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고친 뒤 즉시 역자(驛子)[11]로 하여금 가게 하였다. 일몰 때 영남 우수사가 보낸 통문을 보니 왜선 구십 여척이 나와 부산 앞 절영도 앞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온 수사(水使)의 관문(關文)[12]을 보니 왜선 삼백 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로 즉각 장계를 써서 보냈고 순사, 병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돌렸다. 영남 방백의 관문 역시 왔는데 같은 내용이었다.
1592년 4월 16일 일기.
十六日乙巳。二更。嶺南右水使移關。釜山巨鎭。已爲陷城云。不勝憤惋。卽馳啓。又移文三道。
16일 을사. 이경(二更)[13]에 영남 우수사가 관문을 보내왔는데 부산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한스러움을 이길 수 없다. 즉시 장계를 올렸고 삼도에 공문을 돌렸다.
十六日乙巳。二更。嶺南右水使移關。釜山巨鎭。已爲陷城云。不勝憤惋。卽馳啓。又移文三道。
16일 을사. 이경(二更)[13]에 영남 우수사가 관문을 보내왔는데 부산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한스러움을 이길 수 없다. 즉시 장계를 올렸고 삼도에 공문을 돌렸다.
1592년 5월 29일
사천 해전 일기[14]
二十九日戊戌。晴。右水使不來。獨率諸將。曉發直到露梁。則慶尙右水使來會。問賊所泊處。則賊在泗川船滄云。故直至其處。倭人已爲下陸。結陣峯上。列泊其船于峯下。拒戰甚固。余督令諸將。一時馳突。射矢如雨。放各㨾銃筒。亂如風雷。賊徒畏退。逢箭者不知幾百數。多斬倭頭。焚滅十三隻。軍官羅大用中丸。余亦左肩上中丸。貫于背。不至重傷。
29일 무술. 맑음. 우수사가 오지 않아 홀로 제장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발진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가 와서 합류하였다. 적이 정박한 곳을 물었더니 사천(泗川) 선창에 있다 하여 곧바로 그곳에 이르렀는데 왜인들은 이미 상륙하여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산 아래에 전선을 줄지어 대놓았다. 거전(拒戰)이 매우 완강했는데, 나는 제장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돌진하게 하였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고 각양의 총통을 쏘아대니 그 대란이 폭풍 우레와 같았다. 적의 무리는 두려워하며 달아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인지 부지기수였다. 왜인의 수급을 많이 베었고 적선 십삼 척을 불살랐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을 맞았다. 나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했으나 중상에 이르진 않았다.
二十九日戊戌。晴。右水使不來。獨率諸將。曉發直到露梁。則慶尙右水使來會。問賊所泊處。則賊在泗川船滄云。故直至其處。倭人已爲下陸。結陣峯上。列泊其船于峯下。拒戰甚固。余督令諸將。一時馳突。射矢如雨。放各㨾銃筒。亂如風雷。賊徒畏退。逢箭者不知幾百數。多斬倭頭。焚滅十三隻。軍官羅大用中丸。余亦左肩上中丸。貫于背。不至重傷。
29일 무술. 맑음. 우수사가 오지 않아 홀로 제장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발진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가 와서 합류하였다. 적이 정박한 곳을 물었더니 사천(泗川) 선창에 있다 하여 곧바로 그곳에 이르렀는데 왜인들은 이미 상륙하여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산 아래에 전선을 줄지어 대놓았다. 거전(拒戰)이 매우 완강했는데, 나는 제장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돌진하게 하였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고 각양의 총통을 쏘아대니 그 대란이 폭풍 우레와 같았다. 적의 무리는 두려워하며 달아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인지 부지기수였다. 왜인의 수급을 많이 베었고 적선 십삼 척을 불살랐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을 맞았다. 나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했으나 중상에 이르진 않았다.
1592년 6월 2일
당포 해전 일기
初二日庚子。晴。朝發直到唐浦前船滄。則賊船二十餘隻列泊。回擁相戰。大船一隻。大如我國板屋船。船上粧樓。高可二丈。閣上。倭將巍坐不動。以片箭及大中勝字銃筒。如雨亂射。倭將中箭墜落。諸倭一時驚散。諸將卒一時攢射。逢箭顚仆者不知其數。盡殲無餘。俄而。倭大船二十餘隻。自釜山列海入來。望見我師。奔入介島
초2일 경자. 맑음. 아침에 발진하여 곧장 당포(唐浦) 앞 선창에 이르렀다.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있었다. 둘러싸고 교전하였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 나라 판옥선과 같았다. 배 위의 장루(粧樓)는 높이가 이 장(丈)쯤 되었고 누각 위에 왜인 장수가 위엄있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편전과 대(大), 중(中) 승자 총통을 비처럼 난사했다. 왜인 장수가 화살을 맞고 추락하니 모든 왜군이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모든 장졸들이 일시에 집중하여 쏘았다. 화살을 맞고 고꾸라지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잠시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줄지어 바다로 나오다가 우리 군을 보고는 다투어 개도(介島)로 들어갔다.
初二日庚子。晴。朝發直到唐浦前船滄。則賊船二十餘隻列泊。回擁相戰。大船一隻。大如我國板屋船。船上粧樓。高可二丈。閣上。倭將巍坐不動。以片箭及大中勝字銃筒。如雨亂射。倭將中箭墜落。諸倭一時驚散。諸將卒一時攢射。逢箭顚仆者不知其數。盡殲無餘。俄而。倭大船二十餘隻。自釜山列海入來。望見我師。奔入介島
초2일 경자. 맑음. 아침에 발진하여 곧장 당포(唐浦) 앞 선창에 이르렀다.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있었다. 둘러싸고 교전하였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 나라 판옥선과 같았다. 배 위의 장루(粧樓)는 높이가 이 장(丈)쯤 되었고 누각 위에 왜인 장수가 위엄있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편전과 대(大), 중(中) 승자 총통을 비처럼 난사했다. 왜인 장수가 화살을 맞고 추락하니 모든 왜군이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모든 장졸들이 일시에 집중하여 쏘았다. 화살을 맞고 고꾸라지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잠시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줄지어 바다로 나오다가 우리 군을 보고는 다투어 개도(介島)로 들어갔다.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 전야 일기
十五日癸卯。晴。數小舟師。不可背鳴梁爲陣。故移陣于右水營前洋。招集諸將約束曰。兵法云。 必死則生。必生則死。又曰。一夫當逕。足懼千夫。今我之謂矣。爾各諸將。勿以生爲心。小有違令。卽當軍律。再三嚴約。是夜。神人夢告曰。如此則大捷。如此則取敗云。
15일 계묘. 맑음. 소수의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제장들을 불러모아 약속하며 말하였다.
" 병법에 이르길 '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 하면 죽는다.' 하였다. 또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이르는 것이다. 너희 각 제장들은 살 마음을 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두세 번을 엄히 약속하였다.
이 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리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리하면 패할 것이니라." 하셨다.
十五日癸卯。晴。數小舟師。不可背鳴梁爲陣。故移陣于右水營前洋。招集諸將約束曰。兵法云。 必死則生。必生則死。又曰。一夫當逕。足懼千夫。今我之謂矣。爾各諸將。勿以生爲心。小有違令。卽當軍律。再三嚴約。是夜。神人夢告曰。如此則大捷。如此則取敗云。
15일 계묘. 맑음. 소수의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제장들을 불러모아 약속하며 말하였다.
" 병법에 이르길 '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 하면 죽는다.' 하였다. 또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이르는 것이다. 너희 각 제장들은 살 마음을 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두세 번을 엄히 약속하였다.
이 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리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리하면 패할 것이니라." 하셨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 일기
十六日甲辰。晴。
早朝、別望進告:「賊船不知其數、直向我船云。」卽令諸船、擧碇出海。賊船百三十餘隻回擁我諸船。諸將自度衆寡不敵、便生回避之計。右水使金億秋、退在渺然之地。余促櫓突前、亂放地玄各㨾銃筒、發如風雷。軍官等簇立船上、如雨亂射。賊徒不能抵當、乍近乍退。然圍之數重、勢將不測。一船之人、相顧失色。余從容諭之曰:「賊雖千隻、莫敵我船!切勿動心!盡力射賊!」
顧見諸將船、則退在遠海、觀望不進欲回船。直泊中軍金應諴船先斬梟示、而我船回頭、則恐諸船次次遠退、賊船漸迫、事勢狼狽。卽令角立中軍令下旗、又立招搖旗。則中軍將彌助項僉使金應諴船漸近我船、巨濟縣令安衛船先至。
余立于船上、親呼安衛曰:「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安衛慌忙突入賊船中。又呼金應諴曰:「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兩船直入交鋒之際、賊將指揮其麾下船三隻。一時蟻附安衛船、攀緣爭登。安衛及船上之人、殊死亂擊、幾至力盡。余回船直入、如雨亂射、賊船三隻無遺盡勦。鹿島萬戶宋汝悰、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合力射賊。
降倭俊沙者、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在於我船上俯視曰:「着畫文紅錦衣者、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吾使金石孫鉤上船頭、則俊沙踴躍曰:「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賊氣大挫。
諸船一時皷噪齊進、各放地玄字射矢如雨、聲震河岳。賊船三十隻撞破。賊船退走、更不敢近我師。
此實天幸。
水勢極險、勢亦孤危、移陣唐笥島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 별망군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이 부지기수이며 곧바로 우리 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전 함대에 명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 서른이 넘는 배가 우리 전 함대를 감쌌다. 제장들은 스스로 중과부적이라고 헤아려 거듭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櫓)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입한 뒤 지자, 현자, 각양의 총통을 폭풍 우레처럼 난사했고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비 오듯 난사했다. 적의 무리는 당해내지 못하고 잠깐 다가오다 잠깐 물러나곤 하였는데 우리를 수 겹으로 에워싼 탓에 전세를 예측할 수가 없었고 나와 같은 배의 병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며 말하였다.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대적할 순 없으니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적을 쏘라"
제장들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나서 관망(觀望)만 할 뿐 나오지 않았으며 배를 돌리고자 하는 눈치였다. 곧장 중군 김응함(金應諴)의 배에 댄 뒤 참수,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선두를 돌리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 배들이 차차 멀리 물러날 터이고, 적선이 점차 압박해와서 사세는 낭패가 될 터였다. 즉시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15]를 세우라고 명하고 또 초요기(招搖旗)[16]를 세우니 중군장 겸 미조항(彌助項)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였다.
"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네가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
안위가 황망해 하며 적선 안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중군(中軍)이 되어 멀리 피하기만 할 뿐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가 또한 급하니 일단은 공을 세우라"
두 배가 교전의 틈으로 곧장 돌입하니 적장이 그 휘하 전선 세 척을 지휘하여 일시에 개미떼처럼 안위로 배로 달라붙었고 매달려서는 다투어 안위의 배로 올랐다. 안위와 안위 배 위의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여 거의 힘이 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배를 돌려 곧바로 돌입해 비 오듯 난사했고 적선 세 척을 남김없이 멸하였다. 여도 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속속 이르러 힘을 합쳐 적을 쏘았다. 항왜(降倭)[17] 준사(俊沙)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그림 무늬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안골 진영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石孫)[18]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그 자를 선두 위로 끌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준사(俊沙)가 보곤 뛰면서 말하기를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로 즉시 참수하게 하였고 이에 적의 사기가 대폭 꺾였다. 전 함대가 일시에 쩌렁쩌렁 북을 치면서 일제히 전진했고 각 지자, 현자 총통을 쏘아대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니 그 소리가 강산을 진동하게 하였다. 적선 삼십 척을 쳐부수자 적 함대가 물러나 달아났으며 다시는 감히 우리 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天幸)[19]이었다. 수세(水勢)가 극히 험하고 아군의 세력도 지쳐 위태로웠으므로 당사도(唐笥島)[20]로 진을 옮겼다.
十六日甲辰。晴。
早朝、別望進告:「賊船不知其數、直向我船云。」卽令諸船、擧碇出海。賊船百三十餘隻回擁我諸船。諸將自度衆寡不敵、便生回避之計。右水使金億秋、退在渺然之地。余促櫓突前、亂放地玄各㨾銃筒、發如風雷。軍官等簇立船上、如雨亂射。賊徒不能抵當、乍近乍退。然圍之數重、勢將不測。一船之人、相顧失色。余從容諭之曰:「賊雖千隻、莫敵我船!切勿動心!盡力射賊!」
顧見諸將船、則退在遠海、觀望不進欲回船。直泊中軍金應諴船先斬梟示、而我船回頭、則恐諸船次次遠退、賊船漸迫、事勢狼狽。卽令角立中軍令下旗、又立招搖旗。則中軍將彌助項僉使金應諴船漸近我船、巨濟縣令安衛船先至。
余立于船上、親呼安衛曰:「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安衛慌忙突入賊船中。又呼金應諴曰:「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兩船直入交鋒之際、賊將指揮其麾下船三隻。一時蟻附安衛船、攀緣爭登。安衛及船上之人、殊死亂擊、幾至力盡。余回船直入、如雨亂射、賊船三隻無遺盡勦。鹿島萬戶宋汝悰、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合力射賊。
降倭俊沙者、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在於我船上俯視曰:「着畫文紅錦衣者、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吾使金石孫鉤上船頭、則俊沙踴躍曰:「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賊氣大挫。
諸船一時皷噪齊進、各放地玄字射矢如雨、聲震河岳。賊船三十隻撞破。賊船退走、更不敢近我師。
此實天幸。
水勢極險、勢亦孤危、移陣唐笥島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 별망군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이 부지기수이며 곧바로 우리 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전 함대에 명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 서른이 넘는 배가 우리 전 함대를 감쌌다. 제장들은 스스로 중과부적이라고 헤아려 거듭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櫓)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입한 뒤 지자, 현자, 각양의 총통을 폭풍 우레처럼 난사했고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비 오듯 난사했다. 적의 무리는 당해내지 못하고 잠깐 다가오다 잠깐 물러나곤 하였는데 우리를 수 겹으로 에워싼 탓에 전세를 예측할 수가 없었고 나와 같은 배의 병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며 말하였다.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대적할 순 없으니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적을 쏘라"
제장들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나서 관망(觀望)만 할 뿐 나오지 않았으며 배를 돌리고자 하는 눈치였다. 곧장 중군 김응함(金應諴)의 배에 댄 뒤 참수,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선두를 돌리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 배들이 차차 멀리 물러날 터이고, 적선이 점차 압박해와서 사세는 낭패가 될 터였다. 즉시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15]를 세우라고 명하고 또 초요기(招搖旗)[16]를 세우니 중군장 겸 미조항(彌助項)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였다.
"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네가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
안위가 황망해 하며 적선 안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중군(中軍)이 되어 멀리 피하기만 할 뿐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가 또한 급하니 일단은 공을 세우라"
두 배가 교전의 틈으로 곧장 돌입하니 적장이 그 휘하 전선 세 척을 지휘하여 일시에 개미떼처럼 안위로 배로 달라붙었고 매달려서는 다투어 안위의 배로 올랐다. 안위와 안위 배 위의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여 거의 힘이 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배를 돌려 곧바로 돌입해 비 오듯 난사했고 적선 세 척을 남김없이 멸하였다. 여도 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속속 이르러 힘을 합쳐 적을 쏘았다. 항왜(降倭)[17] 준사(俊沙)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그림 무늬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안골 진영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石孫)[18]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그 자를 선두 위로 끌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준사(俊沙)가 보곤 뛰면서 말하기를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로 즉시 참수하게 하였고 이에 적의 사기가 대폭 꺾였다. 전 함대가 일시에 쩌렁쩌렁 북을 치면서 일제히 전진했고 각 지자, 현자 총통을 쏘아대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니 그 소리가 강산을 진동하게 하였다. 적선 삼십 척을 쳐부수자 적 함대가 물러나 달아났으며 다시는 감히 우리 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天幸)[19]이었다. 수세(水勢)가 극히 험하고 아군의 세력도 지쳐 위태로웠으므로 당사도(唐笥島)[20]로 진을 옮겼다.
1598년 11월 17일 마지막 일기
十七日。昨日。伏兵將鉢浦萬戶蘇季男,唐津浦萬戶趙孝悅等。倭中船一隻。滿載軍粮。自南海渡海之際。追逐於閑山前洋。則倭賊依岸登陸而走。所捕倭船及軍粮。被奪於唐人。空手來告。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十七日。昨日。伏兵將鉢浦萬戶蘇季男,唐津浦萬戶趙孝悅等。倭中船一隻。滿載軍粮。自南海渡海之際。追逐於閑山前洋。則倭賊依岸登陸而走。所捕倭船及軍粮。被奪於唐人。空手來告。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이 일기를 쓴 이틀 후 노량 해전이 발발하고 이순신은 전사한다.
2.2. 이순신의 체질
이순신이 체력이 약하다는 설은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서 기인하였다. 작가가 허구로 지어낸 것은 아니라 난중일기에 근거하여 만든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 매우 많은데 설사병이 심해서 하루종일 뒷간을 다녀오느라 일을 못한 사례도 있고 배탈이 나거나 감기를 앓은 내용도 많다. 그래서 이순신을 허약한 체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물론 그러한 사실들이 정확하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의 명장으로서의 재능과 공적들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노환과 정치권의 박대와 신체로 체감하는 물리적인 전쟁을 비롯한 극단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체력 관리 부족이라는 설은 지나친 격하로 곡해될 '수도' 있다. 왜냐면 군인에게 체력은 곧 본질적인 군인의 능력이자 당연한 능력 관리인 것이 사실이기에 만약 체력 관리 부족이라면 군인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초인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며, 만일 정말로 허약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렇기에 지휘관으로서 거둔 성과를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48세로 당시에는 노령기에 진입한 셈이었다. 풍파를 겪으며 신체가 약화되는데도 수군 통제사로서의 격무가 눈 앞에 가득하니 몸이 망가지는 건 당연하다. 특히 정유년 1597년에는 선조에 의하여 국문과 백의종군, 모친상까지 당하면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병에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인해 무너진 조선 수군을 재건하느라 더더욱 격무에 시달려서 전쟁으로 얻은 피로와 노환을 더욱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천 해전 중에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치료가 완벽하지 못해서 후유증도 달고 살았다. 사천 해전이 끝나고 1년이 지나 류성룡에게 보낸 서신에 "어깨 뼈가 많이 상했고 상처에서 항상 진물이 흘러 하루종일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소독한다."라고 서술한다. 이 사천 해전에서 입은 총상도 이순신의 건강을 악화시킨 요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난중일기에도 나오듯이 이순신은 이 스트레스를 주로 부하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풀었는데, 과음 역시 건강을 해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백의종군을 하기 전에도 며칠에 걸쳐 병을 앓은 기록이 흔하니 청년기에는 강건했다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종합하면 이순신의 평상시 건강이 어떤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노장인데 총상과 국문의 후유증과 산적한 격무에 시달리면서 더욱 건강이 악화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왜란 당시의 이순신은 하급 군인이 아니라 전장을 지켜보며 책략을 펼치는 지휘관이어서 칼을 들고 다니며 적을 무찌를 정도로 강건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순신의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시라는 상황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이 망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장성급 장교들을 봐도 전쟁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전쟁이 종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한 사례가 많았다.
2.3. 개인적인 면모와 인물에 대한 평가
전쟁 중에 일어난 기상의 변화와 전황 외에도 이순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감정이 많이 서술되었다. 밤에 혼자서 촛불을 켜고 국사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린 내용이나 백의종군 이후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원균이 엉망으로 만들고 손을 놓아버린 수군의 처참한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아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등의 번민도 그대로 서술되었다.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대한 분노도 고스란히 서술하였다. 왜군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왜군들이 누가 봐도 거짓인 정보를 말하거나 조선을 우습게 보는 투로 말하면 그 자리에서 처형하였고 아예 능지처참에 처한 적도 2번이다. 1597년에 삼남인 이면이 왜군에게 전사하면서 이순신에게 왜군은 조선과 백성의 원수임은 물론 아들의 원수이다. 물론 이순신은 아군이라도 군율을 어기거나 직무에 태만한 모습을 보이면 가차없이 처벌하여 철저하게 기강을 바로잡았다.
수면 중에 꿈을 꾼 이야기나 그 꿈에 대한 자신의 해석은 물론 일어난 사건을 두고 점을 치는 장면도 나온다. 원균이나 권율처럼 주변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물론 진중에서 작성한 소감도 살펴볼 수 있다. 원균은 난중일기에서 지독하게 혹평받는데 난중일기에 서술된 원균을 향한 험담만 30여개이다. 흉악하고 음험하고 거짓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거리를 두고 나중엔 원흉으로 부르며 싫어하였다.
고령으로 은퇴하는 병사를 위해 만든 축하식에 참석하며 돼지고기를 구워먹는데 자신도 조금 집어먹는 등 소소한 이야기도 많다. 덕분에 이순신의 인간적이며 은근히 소탈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의 취미와 여가도 상세한데 부관들과 활쏘기를 하거나 승경도를 즐기고 음주 이야기도 많다. 부관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수면을 취한 기록이 많으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고 건강이 악화된 와중에도 몸이 차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술을 마시다가 오히려 병이 커져서 3일을 앓아누운 일도 있을 정도. 이를 토대로 주로 (본인이 좋아하는)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3.1. 어머니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한 구절이 많은데 특히 '어머니께서 무탈하시니 다행이다'라는 서술은 난중일기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표현. 이순신이 일기 속에서 가장 걱정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1594년 1월 12일에는 이순신이 잠깐 본가에 왔다가 떠나는데 일기에 자당에 대한 기사가 쓰여 있다.일기 곳곳에서 어머니를 칭할 때, 어머니(母)라는 말 대신 천지(天只 : 하늘 천 / 다만 지)라는 표현으로 칭하는 부분이 많다. '천지(天只)를 떠나서~', '천지(天只)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이런 식인데 이것은, 시경(詩經)의 '모야천지(母也天只)', 즉 '어머니는 하늘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朝食後 告辭天只前 則敎以好赴 大雪國辱 再三論諭 少無以別意爲歎也。
아침밥을 먹은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하교하시길,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거라" 라고 두세 번 타이르시는데 조금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1593년 6월 12일 일기를 보면 충무공이 흰 머리를 뽑았다고 기록한 일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적었을 정도였다.[21] 아침밥을 먹은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하교하시길,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거라" 라고 두세 번 타이르시는데 조금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이후 자당께서 돌아가신 날에는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서 죽느니만 못하구나'(1597년 4월 19일)라고 지극히 슬퍼하고 있다.[22]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 없었다. (...)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1597년 4월 19일
심지어 다음 일기에는 꿈에 죽은 두 형(희신, 요신)이 나타나 함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장례도 함께하지 못했다며 애통함에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고 한다.<<난중일기>> 1597년 4월 19일
2.3.2. 자제
자식들을 걱정하거나 자식들이 와병중인 것을 걱정하는 내용 역시 적혀 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이자 막내 아들인 이면(李葂)은 1597년에 전사하였는데(이순신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 이순신을 협박하기 위해 왜군이 이면을 잡아가려 하였으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다 죽었다) 그의 죽음을 전하는 편지를 읽은 이순신의 비애 역시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十四日辛未。晴。四更。夢余騎馬行邱上。馬失足落川中而不蹶。末豚葂似有扶抱之形而覺。不知是何兆耶。夕。有人自天安來傳家書。未開封。骨肉先動。心氣慌亂。粗展初封。見䓲書則外面書痛哭二字。知葂戰死。不覺墮膽失聲。痛哭痛哭。天何不仁之如是耶。我死汝生。理之常也。汝死我生。何理之乖也。天地昏黑。白日變色。哀我小子。棄我何歸。英氣脫凡。天不留世耶。余之造罪。禍及汝身耶。今我在世。竟將何依。號慟而已。度夜如年。
14일[23] 신미. 맑음.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던 중 말이 발을 헛디뎌 냇속으로 떨어졌으나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막내 아들 면(葂)이 나를 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는 듯 하더니 잠에서 깼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24]의 편지를 전하였는데 열어보지도 않았건만 살과 뼈가 먼저 떨리고 마음이 황란(慌亂)하였다. 겉 봉투를 대강 열어보니 그 겉에 예(䓲)[25]가 쓴 '통곡'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이내 면(葂)이 전사했다는 걸 알고 나도 모르게 낙담하여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구나.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구나. 나는 세상에 살아 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그후 16일의 일기에는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1597년 10월 16일) 라는 기록 등 지휘관으로서 휘하 장졸들 앞에서 드러내지 못한 비감을 쓴 바가 많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비통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지라 읽는 사람마저 마음이 미어질 정도.14일[23] 신미. 맑음.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던 중 말이 발을 헛디뎌 냇속으로 떨어졌으나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막내 아들 면(葂)이 나를 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는 듯 하더니 잠에서 깼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24]의 편지를 전하였는데 열어보지도 않았건만 살과 뼈가 먼저 떨리고 마음이 황란(慌亂)하였다. 겉 봉투를 대강 열어보니 그 겉에 예(䓲)[25]가 쓴 '통곡'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이내 면(葂)이 전사했다는 걸 알고 나도 모르게 낙담하여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구나.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구나. 나는 세상에 살아 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3. 위상
3.1. 사료적 가치
이순신의 면밀한 성품 탓에 사소한 사정까지도 자세히 적혀 있어 그 당시의 전황과 시대상,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이 시기를 다룬 역사 사료로서는 조선 조정 움직임이 높은 평가이나 개인 입장이 강조되어 징비록보다 높으면서 실록 바로 다음가는 위치.[26]이순신에 관한 기록물 중에서 난중일기만큼 신뢰성이 있으면서도 정작 기록한 본인인 이순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료가 없다. 즉 징비록, 실록, 일본 측 기록, 중국 측 기록 등 당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전쟁상을 보고 남긴 기록들이 오히려 이순신을 더 찬양하고 숭상했다는 것이다.
3.2. 문학적 가치
여러 대학, 기관에서 권장 도서로 선정되어 읽기를 권하고 있다. 이순신을 다룬 소설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문학으로서의 난중일기를 '수식을 배제한 무인다운 글의 전범' 이라고 하며 문체와 내용을 극찬하였다."삶과 죽음 오가며 칼을 휘두르는 마음으로 글 쓴다"
3.3. 인기
본디 출판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이순신 개인의 사적인 일기지만[27], 국내에서 이순신이 가지는 위상이 엄청난 만큼, 위대한 성웅의 개인사를 알 수 있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높다. 또한 사료로서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4. 초서 해독[脫草]
수많은 고문서들이 그렇듯이 난중일기 역시 한자 초서로 썼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이 개인 필체로 쓴 만큼 일반인이 난중일기 원본을 보면 이게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또한 연구자들 입장에서도 그 귀한 원본을 접해볼 기회가 매우 드물다. 이러한 이유에서 난중일기 원본의 초서를 알아보기 쉬운 정자로 바꾸는 작업(탈초[脫草])이 몇차례 있었다.가장 먼저 정자 편집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 정조의 어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28] 1795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이 전서에 난중일기 정자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는 편집 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하여 오자나 잘못 정자화한 부분이 상당히 많고 의도적인 내용 누락도 꽤 많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 다음은 1935년 조선총독부의 산하 기관인 조선사편수회가 간행한 '난중일기초(草)'이다. 정확한 명칭은 조선사료총간 제6집 - 난중일기초.임진장초. 조사와 편찬에 총 8년이란 긴 시간을 투자했고 당대의 한학자들이 대거 투입되어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 상당히 많은 부수가 인쇄 간행되었기에 지금도 꽤 많이 남아 있고 심지어 고서점에도 매물이 등장한다. 링크
다만 당시 일본 총독부 입장에서는 조선을 식민지로 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자신들의 선조들이 과거부터 조선을 정복하고자 했지만 이런 엄청난 장수가 있어서 실패한 반면 지금의 우리는 당당히 성공했다.' 같은 프로파간다로 써먹기 좋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도 굳이 이순신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29] 더구나 일본과의 전쟁 중에 '일지'로써 작성된 리얼타임의 기록인데다[30] 조선 주둔 일본군의 동향이나 조선군과 일본군 간의 교전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등 일본 입장에서도 자국의 조선 침략 전쟁을 연구할 역사적인 사료로 간주되었으니 오히려 유용하게 써먹었다. 한국사 연구에서도 중국이나 일본측의 사료를 교차검증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인이 적장인 이순신의 기록을 참고자료로 쓴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너무 고평가할 필요는 없다.
2005년에는 당시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노승석(탈초팀)이 난중일기 정자로 입력한 데이터베이스화를 단기에 완료했다. 임진장초를 포함하여 총 약 13만자 가량을 판독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난중일기 이본인 정조때 해독된 이충무공전서본의 난중일기와 조선사편수회의 난중일기초 내용이 일부 반영되었다.
2017년 9월 12일 '개정판 교감원문[校勘原文] 난중일기(노승석 교감, 도서출판 여해)'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과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 1935년의 난중일기초 등 후대의 이본, 국가기록유산의 난중일기 DB본 등을 모두 망라했는데, 중국의 교감학자 진원[陳垣]의 이론으로[31] 원문을 교감하고 종합 정리한 난중일기 원문 책자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난중일기의 초서글씨를 탈초한 원문 책자로서는 가장 완벽한 책이다. 초고본과 함께 10여 년 동안 노승석 교수가 발굴하여 찾아낸 난중일기 이본(일치초, 태촌집, 동포실기 등)의 글자를 모두 포함하면 난중일기 글자는 모두 93,011자이다.
2021년 기존판본의 오류를 모두 수정하고 종합정리한 교감본 난중일기 원문이 수록된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노승석 역주)이 간행되었다. #
5. 번역
5.1. 노승석 번역
현재 국내 번역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노승석 교수가 번역한 난중일기가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가 있다. 문팔초이(文八草二)의 방법으로 해독 및 원문을 교감(校勘)하고 기존에 없는 새로운 일기를 발굴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승석 교수의 번역본은 2005년에 최초로 동아 일보사에서 한국어 완역본으로 출판했다. 그 뒤에 교감을 거쳐서 2010년에 민음사에서 다시 출판했다. 이 번역본에는 새로운 32일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2013년 6월 19일 난중일기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이때 민음사본이 심의자료로 제출되었다. 또한 그 뒤에도 교감을 거쳐서 2014년에 여해에서 또 다시 출판했다. 이 번역본에는 이순신이 삼국지연의에서 교훈이 되는 내용을 옮겨 적은 내용과 홍기문이 1955년에 최초 한국어로 번역한 난중일기 번역본을 반영했다.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2015년에 동일한 출판사에서 또 다시 번역했다. 이번 번역본에서는 갑오년에 쓴 9일치 일기를 추가했다. 거기에다 2016년에는 새로운 일기 35일치와 금토패문 및 문헌고증 내용을 추가하고 새로 해독한 2일치 일기를 포함해 총 200여 곳을 교감하여 개정판을 펴냈다.2017년 9월 12일 도서출판 여해에서 ≪개정판 교감원문 난중일기(노승석 교감)≫가 간행되었는데, 이는 기존 활자로 된 한문판 난중일기 판본으로, 친필 초고본과 전서본, 이본이 모두 망라되었고, 2005년 국가기록유산 난중일기 DB에 있는 전산 오류와 일부 오타의 수정내용을 모두 반영하였다. 결국 이 책자는 초고본을 비롯한 난중일기 활자본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이후에 나온 다른 난중일기에는 이 책의 간행 상황과 수정 사실이 누락되었다.
2019년 10월 15일 난중일기 유적편(노승석 역, 도서출판 여해)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난중일기에 나오는 주요 유적지 4백 여 곳을 일일이 고증하여 해당 위치를 찾아 그곳의 사진을 해당 본문에 수록했다. 지금까지 나온 난중일기들이 많지만 이처럼 현장의 사진을 수록한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이다. 경기와 충청, 전라, 경상 지역의 수많은 유적지를 수년동안 저자가 고지도를 참고하고 현지의 세거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었다. 특히 이순신의 가족묘, 아산의 자당기거지, 여수의 채석장, 통영의 통영별로와 통제사길 등을 처음 소개했다. 현재의 지번에서 난중일기의 유적지를 모두 찾아낸 전대미문의 역작이라고 평가되었다. 링크.
2019년 11월 18일 도서출판 여해에서 ≪교감완역 난중일기≫ 개정2판(노승석 역)이 출간되었다. 기존 또는 최근에 나온 다른 번역서들은 서로가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만 문맥에 맞지 않는 번역과 초서 글자를 오독하는 등 해독상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이번 개정2판은 그간 논란이 많았던 지명의 오류 3백여 곳을 바로잡아 새로운 위치를 비정하고 최근까지 논란이 되었던 내용들과 오역 등을 모두 바로잡았다. 예컨대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러 갔던 합천지역에 대해 새로운 고증을 더했는데, 정유년 6월 4일과 5일 사이에 적힌 모여곡(毛汝谷)을 5일자에 처음 삽입하여 해석을 했다. 이는 전후 상황에 잘 맞는 해석이라는 평가가 있다. 특히 1935년 조선사편수회가 오독한 여진입/삽(女眞卄/卅)과 일맥금전(一脈金錢)을 각각 여진공(女眞共), 일맥금전(一陌金錢)으로 교감하고 이에 대한 고증내용을 상세히 밝혔다.
민음사본을 시작으로 개정 2판까지 10년 간의 전통을 이어온 ≪교감완역 난중일기≫는 홍기문의 번역과 삼국지 인용문, 새로운 일기 35일치를 최초로 수록하고, 지명 3백여 곳을 새롭게 고증하는 등 하나의 발굴 역사를 이룬 것이다. 이 책은 중고교 교과서 27종에 수록되었으며[32], 지금까지 고전 관련한 학계를 비롯하여 국내 및 해외에까지 최고의 학술번역서로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은 2015년 문화관광부 산하의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베트남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2021년 3월 22일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이 출간되었다. <독송사>의 출전과 이순신의 둘째 아들 열의 이름 풀이 8자의 출전, 여진(女眞) 인명(교육부 한국고전번역원 인정), 그외 미상 인물 등을 새롭게 밝혔다. 이 책은 정본화된 원문을 수록하고 방대한 문헌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친 정본으로서 고전학계에서 가장 정확한 학술번역서로 평가하였다. 2022년 9월 교감본과 교주본을 바탕으로 읽기 쉽게 편집한 한글판 <쉽게 보는 난중일기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5.2. 이외
지금까지는 1968년 시인 이은상이 난중일기 초고본과 충무공전서본을 합본해 처음 번역한 것이 첫 한국어 번역본이라고 알려졌지만, 그 이전 1955년 북한 평양에서 간행된 난중일기 한국어 번역본이 최근 입수되었다. 벽초 홍명희의 아들, 국어학자 홍기문이 1955년 11월 30일 평양에서 펴낸 '리순신 장군 전집'에 실은 난중일기 번역본을 찾아낸 것이다. 이 책을 입수한 노승석 교수가 2013년 5월 31일 kbs 9시 뉴스에 처음 공개하면서 알려졌다.2018년 3월 30일, 글항아리에서 펴낸 '난중일기(박종평 역)'는 주석이 본문보다 더 많아 무려 1230페이지에 달한다. 난중일기 외로, 이순신 장군의 친필 편지를 모은 ≪서간첩≫과 장계를 모은 ≪임진장초≫ 등까지 합본된 것이다. 기존 번역의 오류를 많이 수정하여 가장 완벽한 번역판이라고 한다. 문화재청 사이트에 있는 난중일기가 가장 공신력 있는 것이라 할 것인데. 본서에는 문화재청 게재 내용의 글자 누락, 오기 등도 수정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애매한 글자 옆에 붙은 일본어의 카(カ, 일까? 인듯?라는 의문 표시)가 힘力자로 입력되어 있는 등(p.582 주석 참조. 조선사 편수회 일본인 번역을 그대로?) 번역 저본 자체가 의심스러웠는데 문화재청은 2017년 12월 29일, '발견된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서'라는 공지와 함께 원문 텍스트를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이 글항아리 책에서 적시한 일본어는 기존 번역서에서는 전혀 없었고, 이 책에서 적시한 오기는 일부의 오타가 있었지만 실제는 대부분이 다른 판본 활자본(전서본)의 이본(異本) 글자로 확인되었고, 기존의 노승석 교감완역 난중일기(2016년 증쇄본 기준)책에서는 친필 초고본 위주의 내용으로 이미 모두 바르게 수정된 것이 추후 확인되었다.
이 이외에도 난중일기 번역서가 계속 간행되고 있지만, 한국연구재단에 등재된 학술지를 기준으로 최근의 연구상황을 종합해보면 노승석 이외에 교감을 더한 번역서는 보이지 않고 다만 이순신의 정신적 측면, 점법(占法), 리더십 위주의 연구서들이 확인된다. 한편 대중적인 책으로는 쉽게 보는 난중일기가 있는데 2016년 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대학신입생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그외 1960년 초기 홍기문 등의 번역서가 종종 간행되고 있다.
외국에선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완료되었으며, 2015년에는 주한러시아대사관 올레그 피로젠코 2등 서기관이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 2015년 당시 기사
그외 난중일기 원문 및 번역사이트들[33] # # 임진장초 원문
6. 도난 사건
1967년 12월 31일 난중일기가 도난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난중일기는 당시 현충사의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범인들은 저녁 8시 ~ 10시경에 철문을 부수고 다이얼을 맞추고 침입하여 서간첩, 임진장초, 충무공유사 등 10책을 훔쳤다.
수사를 벌였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지지부진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월 8일 문화재 도난에 따른 전례 없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1월 17일까지 난중일기를 찾지 못하면 모든 수사 기관을 총동원하여 범인을 체포하여 엄벌하겠으며, 범인 스스로 뉘우쳐 자수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붙이고, 난중일기의 행방을 알려주는 시민에게는 상금을 주겠다."는 강경과 회유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본인부터가 군인 출신인 만큼,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했고, 한민족 성웅 기념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움직였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1968년 1월 9일, 한 어린 시민의 제보로 끝내 범인들이 부산에서 체포되었고, 난중일기는 도난 10일 만에 '일본으로 유출되기 직전' 회수되었다. 검거 당시 난중일기는 비닐에 싸여 고추장 항아리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신고자는 공범의 조카였다고 한다.
주범은 유근필이라는 자로 당시에 37세, 무직자였으며, 이미 1966년에 통도사에서 동은사마법병을 훔쳐내 재벌 이 모씨에게 팔아넘긴 혐의로 9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적이 있는 전과자였다. 당시 그 외 6명을 검거하고 한 명은 수배하였다고 발표했다. 기사를 보면 절도범은 다 잡히고 공범 양씨만이 도주하다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정황상 수배가 내려진 사람이 자살한 양씨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범행 이틀 전에 현충사 전시관을 미리 답사하였고, 난중일기를 일본에 가져가 1천 만 원에 팔아 서로 나누기로 했다고 한다. 소비자 물가 지수를 기준으로 화폐 가치를 환산해 보면 1967년에 1천 만 원은 현재 가치로는 약 3억 정도이다. # 즉, 이들은 감히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국보급 중요 사료를 고작 1인당 5천 만 원도 안 되는 돈에 팔아버리려 한 것이다.
여기에 사건 이전인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나, 그것을 반대한 6.3 항쟁이 1964년에 벌어지는 등 대일 감정이 매우 좋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만일 진짜로 난중일기가 일본에 유출이라도 되었었다면, 범인들은 일본에 맞서 싸운 성웅의 유산을 다른 곳도 아닌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노로 여겨져 성난 시민들에게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사에 따르면 주범인 유근필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정부에서는 50부의 영인본을 만들어 전국에 보냈고, 원본은 열람이 금지되었다. 실제로 난중일기의 원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개하기가 힘들다. 가장 최근에 대중에게 선보인 사례로는 2015년 3월 29일, 1박 2일 시즌 3 당일치기 국보 전국일주편이 있다. 한 멤버의 대형 사건 때문에 VOD가 삭제되어 한동안 다시보기가 불가능했으나, 이후 KBS 깔깔티비 채널을 통해 해당 부분 분량이 재업로드되었다.
이 사건을 다룬 영상 - 대한뉴스 658호
7.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난중일기는 2013년 6월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7.1. 의의
난중일기는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다. 난중일기는 전시에 지휘관이 직접 작성한 독특한 기록물로, 당시 국제전쟁으로서의 동아시아 전투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 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후, 지형, 서민들의 삶을 상세히 기록한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이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면밀한 성품 탓에 사소한 사정까지도 자세히 적혀 있고, 이 시기를 다룬 다른 역사 사료들보다 한 개인의 입장이 더욱 강조되어 있어 그 당시의 전황과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상 등 자세한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8. 여담
- 난중일기에서 가장 내용이 긴 일기는 정유년(1597년) 9월 16일의 일기다. 다름 아닌 명량 해전을 치르던 날의 일기이다. 명량 해전은 이 충무공 역시 일생에서 가장 길었고, 긴박한 시간으로 느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이날 일기 마지막에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라고 덧붙였을 정도이니. 난중일기 곳곳에 장군의 감정이나 생각이 잘 드러나는 편이지만, 무엇보다 이순신의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일기는 정유년 일기다. 이 해에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34]
- 문화재청에서는 난중일기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기로 하고 2012년에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였다. 이후 2013년 6월 18일 세계 기록 유산 국제 자문 위원회(IAC)의 최종 심사를 거쳐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써 2015년 10월 9일 기준 ' 특별 생방송 이산 가족을 찾습니다'와 한국의 유교책판이 추가로 등재되면서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한국 기록물은 13개가 되었다. 아시아에서도 독보적인 1위이며 세계구급으로도 상당히 많은 편.(3위)
- 난중일기에는 짤막하게 여진(女眞)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제까지 이순신과 관계한 여인의 이름으로 해석되어 난중일기가 유명해지는데 한 몫 했다. 번역될 때에도 그렇게 번역했지만[35] 최근에 이것이 오독이라는 주장이 있다.
- 위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듯이 노승석 교수는 1935년에 난중일기를 해독하던 일본인이 女眞共(여진공)을 오독해 女眞卄(여진입), 女眞卅(여진삽)이 되어버렸다는 주장을 했는데, 고전 및 초서 전문가들 다수가 이 의견에 공감했다. 상기한 '공(共)'자는 난중일기 내에서 단순히 함께했다는 뜻으로 사용된 용례가 명확히 있으며, 따라서 女眞共(여진공)을 해석하면 그냥 노비들을 불러 심부름을 시키거나 노가리를 깠다는 뜻이 된다.
- 노승석 교수는 오죽 오독한 것을 바로잡고 싶었는지 여진공(女眞共)으로 읽고 그냥 함께했다고 해석하는게 맞다는 논문까지 내었다.[36] 논문 내용을 요약하자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共을 필기체로 쓴 부분을 비교 및 대조해보면 女眞共(여진공)으로 해독하는 것이 옳고, 共은 함께하다라는 뜻으로 난중일기 여기저기서 나왔기에[37] 여진공(女眞共) 역시 여진이라는 노비가 있었고 이순신과 그냥 함께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내용이다.
- 이용호 박사는 여진(余陣, 직역하면 내 진영)을 잘못 오독해 여진(女眞)이 되었다는 의견을 냈다. # 원문에는 여진 뿐 아니라 여진입(卄. 스물), 여진삽(卅. 서른)이라는 문구도 있는데, 이 역시 이순신 진영의 병사 20, 30명이라고 주장했다.
- 그리고 난중일기를 좀 더 뒤져보면 관비 4명과 잤다는 언급도 있는데, 기존의 통설에 따르면 저 문구는 관비 4명과 집단 성교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좀 황당하기도 하거니와 구체적으로 동침(與)이란 글자가 들어가지도 않아서 그냥 같이 어울리다 돌려보내고 혼자 자러 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여하튼 난중일기에서 여진이라는 여자랑 같이 잤다는 해석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인데, 2020년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클리앙에서 한 유저가 해당 내용을 언급하면서 박원순 전 시장을 옹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기사 #정리글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실제 난중일기는 총 8권이 있어야 한다. 정유년을 다룬 정유년의 일기가 정유일기, 속정유일기 두권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락된 부분은 1595년 을미년을 다룬 을미일기로 이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한국사에서 난중일기의 역사적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을미일기'가 발견된다면 임진왜란 중 을미년의 내용이 상당히 바뀔 것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다만 기사에 따르면 이미 이충무공전서에 을미일기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 중요한 부분은 알려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기사에선 충무공의 다른 유물들의 허술한 관리 실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으니 관심있으면 읽어보자.
- 난중일기 중 임진일기의 한 페이지에는 이순신이 사인[38]을 연습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단 사인 연습이 아니라는 설도 있으며 이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스펀지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 유튜브 채널 Extra Credits[39]에서 이순신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하였는데. #[40][41] 시리즈 마지막까지 보면 고증 담당자가 나와서 관련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있다. 그런데 그 고증 담당자 왈, 자기가 찾아본 자료 중 난중일기가 제일 이순신에게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타인들은 이순신을 찬양하거나 부풀리기 바빴던 반면 난중일기는 이순신 본인이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적어넣은 것이니 그럴만도. #
- 가끔 나중에 썼다고 "나중일기"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42] 실제로 "난중"은 전라도, 경상도 등 남부 지방에서 "나중"이라는 뜻의 사투리로 쓰기는 한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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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정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이다. 부록으로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 합 9책이다.
[2]
1권 「임진일기(壬辰日記)」는 1592년 5월 1일~4일, 5월 29일~6월 10일, 8월 24일~28일, 1593년 2월 1일~3월 22일의 기록이고, 2권 「계사일기(癸巳日記)」는 1593년 5월 1일~9월 15일의 기록이고, 3권 「갑오일기(甲午日記)」는 1594년 1월 28일~11월 18일의 기록이고, 4권 「병신일기(丙申日記)」는 1596년 1월 1일~10월 11일의 기록이고, 5권 「정유일기(丁酉日記)」는 1597년 4월 1일~10월 28일의 기록이고, 6권 「속정유일기(續丁酉日記)」는 1597년 8월 4일~1598년 1월 4일의 기록이고, 7권 「무술일기(戊戌日記)」는 1598년 9월 15일~10월 7일의 기록이다.
[3]
정조는 스스로 무예에 매우 뛰어난 왕이었고, 소문난 이순신 덕후였다.
[4]
난중일기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일기이기에 보이는 특징이다. 현대인들이 쓰는 일기도 별 일이 없으면 내용이 짧아지고 일이 많으면 길어지지 않는가. 정유년에는 이순신 자신이 모함 때문에 파직되고 모친은
객사, 막내아들은 전사했으며, 명량 해전이 일어났다.
[5]
이순신은 일기에서 시종일관 어머니를 天只(천지)라고 칭하고 있다.
[6]
긴 화살
[7]
일명 애기살. 덧살로 쏨
[8]
아직 임란 발발이 고지되지 않은 상태였다.
[9]
순(巡)이란 화살 다섯 발 쏘는 것을 말한다. 즉 십오순(十五廵)은 75발을 쐈다는 뜻.
[10]
순찰사(巡察使)를 말함.
[11]
역에서 일을 보던 구실아치
[12]
공문서
[13]
밤 9시부터 11시 사이
[14]
이충무공이 임진란 개전 후 첫 해전을 치른 5월 초순에서 중순까지의 일기는 결여(缺如)되었다고 되어 있음.
[15]
글자 그대로, 중군에게 명령을 내림을 뜻하는
깃발.
[16]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깃발로, 대장이 휘하 장수들을 자신 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깃발. 대장의 직품에 따라 크기나 색깔이 달랐다.
[17]
항복한 왜군
[18]
한문으로 쓸 때는 金石孫이지만 읽을 때는 '김돌손'으로 읽는다.
[19]
하늘이 준 행운
[20]
지금의 신안군 암태도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인 초란도를 말한다.
[21]
아들이 늙은 것을 보고 어머니 마음이 상할까봐 그랬다는 의미. 참고로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부모님에게 본인의 흰 머리카락을 내보이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것이 중장년층 대상으로 검은색이나 짙은 갈색
염색 약이 꾸준한 수요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22]
이때 나이 90에 가까운 어머니가 여수에서 충청도 아산까지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배 위에서 돌아가셨다. 많은 연세에도 이렇게 무리하신 것은 아들인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고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랐기 때문으로, 이때 급히 상경하시다 돌아가신 것. 이순신 장군은 이미 함경도에서 근무하던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때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거기에 두번째 백의종군하여 머문
초계는 모친의 본관이다.
[23]
1597년 10월 14일
[24]
이순신의 집.
[25]
이순신의 둘째 아들. 면의 형.
[26]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 가보면
대항해시대 때 말단 영국 해군 수병이 고향에 주고받은 편지라든지 식료품 가게의 음식 목록 따위의 굉장히 사소한 기록물들까지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당시의 생활상을 자세히 파악하게 해주는 기록들로서 가치가 큰 탓이다. 한국의 경우는 이런 종류의 기록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한자로 쓰인 바람에 번역이 안 되어 있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생활상에 대한 기록들도 번역되는 일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27]
다만 조선 시대의 일기는 지금과 달리 출판이 되어 널리 읽히는 경우가 잦았다. 난중일기와 함께 이름이 높은
열하일기 같은 경우도 박지원이 스스로 출판하기 전에 지인들과 친구들이 주욱 돌려 보아
필사본이 나돌 정도였으며, 중국이나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쓴 일기 같은 경우 개인적인 감상을 담는 동시에 다른 사람이 이 일기를 읽을 것을 염두에 둔 표현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는 동안 쓴 일기에는 "훗날 통신사로 오는 사람은 이런 걸 조심해야 한다" 라거나 "내가 이걸 알아보려다가 못 했는데 미안하고, 나중에 누군가가 보충해 달라" 라는 식의 내용이 있으며,
1인칭이 아예
我나
余가 아니라
臣인 경우도 있다. 즉 이순신이 자신이 쓴 일기를 수백년 뒤의 후손들이 널리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혹해 하기보다는 고마워 할 가능성이 높다.
[28]
우리가 아는 '난중일기'라는 제목이 바로 충무공전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29]
물론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총독부에게 거슬린 것은 사실이어서,
신채호가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편찬한 이순신전을 검열하거나 선교사
셔우드 홀이
1932년 조선에서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에
거북선 그림을 넣으려는 시도 역시 막았다.
#
[30]
어떤 사건에 대한 사료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서 시점이 멀지 않을수록, 그리고 사료를 작성한 당사자가 그 사건과 관련이 깊을 수록 1급으로 취급된다.
[31]
대교법, 본교법, 타교법, 이교법
[32]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 2010 ~ 2019년 통계자료 인용
[33]
정조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원문이 많고 초고본은 원문은 매우 드물다. 대신 초고본 한국어 번역문은 꽤 많은 편
[34]
파직, 고문, 백의종군, 모친상, 명량해전, 아들의 전사까지 모두 정유년 한 해에 일어났다.
[35]
칼의 노래에서도 이 설을 따랐는데, 여기선 아예 덮쳤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36]
"『亂中日記』의 “女眞共”句 解讀에 관한 一考察 -초고본의 “共”字 考證을 위주로-"라는 논문이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117615
[37]
난중일기 1594년 8월 23일에 이순신이 활쏘기를 했고 장흥 부사 배홍립과 녹도 만호 송여종이 함께했다(共)고 언급되었는데, 이를 덮쳤다고 해석하면 상식적으로 말도 안된다. 앞뒤 문맥을 보았을 때 이순신과 배홍립, 송여종이 같이 활을 쏘는 등의 활동을 함께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 외에도 병신년 7월 5일자 등의 경우에서 비슷하게 共(함께하다) 글자가 쓰인 경우가 많다고 논문에서 언급된다.
[38]
조선시대에는 수결(手決)이라 불렀다. 사인과의 차이점은 일심(一心)이 항상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해당 페이지에도 일심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존재한다.
[39]
게임 개발자가 진행하는 채널로, 주로 게임과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한다. 그러나 별도로 'Extra History'라는 코너에서 역사 관련 영상도 올리고 있다.
[40]
평가도 좋고(좋아요가 평균 8천에 조회수도 100만을 넘으며 댓글도 다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반응.), 아쉬운 점은 외국에서 만들어서 자료 조사에 한계가 있어 이순신에 관한 부분 이외의 점에서는 오류가 보이는데 현재는 반박당한 과거의 학설들을 사실마냥 언급한다.
[41]
예를 들어 당시 조선 조정이 부패하고 당파싸움으로 어지러웠다(
선조(조선)시기 조선은 목릉성세라고 불릴정도로 인재가 많았던 시기이다.),조선은 개인화기 도입을 무시했다(
임진왜란전까지는
조총을 과소평가하긴했으나
승자총통처럼 조선에도 개인화기는 분명히 존재했다.),류성룡의 추천으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었다(류성룡이 이순신을 추천하긴했으나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건 엄연히
선조(조선)의 업적이다.),이순신을 제외한 관군은 무능했고 의병과 승병이 활약했다(애초에 의병도 관군이나 다를바 없었다.)등
[42]
와탕카
1편에서 소재로 써먹은 적 있다.
[43]
이와 비슷하게
호남을 까내리려는 목적으로
왕건의
훈요 10조가 많이 언급되지만
왕건이 언급한 지역은
청주 일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애초에
왕건이 왕위를 물려준
왕무부터가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