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8:10:40

부산진 전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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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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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전투
釜山鎮 戰鬪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f0ad73> 시기 1592년 (선조 25년) 5월 23일 ~ 5월 24일
(음력 1592년 4월 13일 ~ 1592년 4월 14일)
장소

조선 경상도 동래부 부산진성 (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1]
원인 일본의 조선 침공
교전국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조선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고니시 유키나가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정발
참가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소 요시토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마쓰라 시게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아리마 하루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오무라 요시아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고토 스미하루
참가자

파일:조선 어기.svg 이정녕 †
파일:조선 어기.svg 장희식 †
파일:조선 어기.svg 이정헌 †
병력 일본군: 18,700명 조선군: 600~800명[2]
피해 전사자: 140명~200명 ↑ 군 궤멸
결과 일본의 승리
- 일본군의 부산진성 정복 및 조선 상륙
영향 임진왜란의 시작

1. 개요2. 전개
2.1. 4월 13일2.2. 4월 14일2.3. 4월 15일
3. 전쟁 초기 정보부족으로 낮은 평가4. 항쟁에 놀란 일본군5. 부산진 전투에 대한 재평가6. 경상도 수군의 자침에 대한 평가7.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첫 전투.

2. 전개

2.1. 4월 13일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오전 8시 일본군이 쓰시마 섬 이즈하라에서 출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장으로 하고, 대마도주이자 자신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가 함께 하며, 700여척의 전선에[3] 18,700명의 병력이 실렸다.[4][5][6]

일과 시간, 부산진[7] 첨절제사 정발은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을 실시했다.[8] 오전부터 대규모 선단이 오는 것은 보였으나[9] 처음엔 세견선으로 여겼다. 하지만 점차 그것이 수백척에 달하자 침공군으로 확신하고 조선군은 오후중 사냥훈련을 중지하고 급히 부산진으로 복귀한다. 부산진 소속 다대포의 전선 3척[10]을 자침시키고, 왜관에 있던 일본인 4명을 구금하고, 백성들을 성 안에 소개시켜 농성 준비를 갖추고, 남문의 성루에서 날을 지새웠다.

오후 5시경 일본군이 절영도(絶影島)에 조총을 쏘며 상륙했다.[11]

저녁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산진에 전령을 보내 목숨은 살려줄테니 항복하라고 권했지만 정발을 비롯해 조선군은 전부 격노하며 전령의 목을 베어 한양에 보내고 코와 귀는 전서구(훈련된 비둘기)로 일본군 막사 앞에 떨어뜨렸다. 전령이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격노한다.

2.2. 4월 14일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오전 5시~7시경, 일본군이 새벽부터 부산진을 에워싸고, 서문(西門)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벽 아래엔 뾰족한 마름쇠가 뿌려져 있었고, 성벽 위에선 궁수들이 활을 쏴 많은 일본군이 죽었다. 이에 일본군은 서문 밖 높은 고지로 올라가 아래방향으로 조총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군 역시 포를 쏘며 맞섰다.[12] 이에 일본군은 공세를 잠시 중단했다.

오전 10~12시경, 일본군이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워낙 전력이 열세라 더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비장이 정발에게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했지만 정발은 "성을 버리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며 결사 항전했다. 결국 12시쯤, 일본군은 부산진의 취약 지점인 북문을 돌파해 밀려들었고 정발은 일본군에 맞서다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오후 12~2시경, 일본군이 성내에 진입하자 2차례에 걸쳐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단병접전에 익숙한 일본군은 큰 피해 없이 소수의 조선군을 무너뜨렸다. 정발과 함께 싸우던 이정녕과 중위장 장희식, 부사맹 이정헌 등은 전사했으며 정발의 첩 애향은 자살하였고 그녀의 몸종인 용월, 기장 사람 신옥 등도 참전하였다가 전사했다. 병사인 가은산(加隱山) 등 세 사람은 시체더미에 숨어있다가 고니시가 민간인들과 항복하는 포로들에 대한 살육을 중지하자 항복하여 포로로 있다가 4월 17일에 풀려나고 일본군 점령지에서 탈출한 뒤 부산진 전투에 대한 것을 증언했다.

2.3. 4월 15일

상륙 셋째날(5월 24일, 음력 4월 15일), 두 곳이 무너진다. 각 문서 참고. 모두 부산진으로부터 도보 2시간 남짓 거리다.

다대포진성 전투 - 일본군은 상륙 첫째날/둘째날 서평포(현 부산송도해수욕장)와 다대포(현 다대포항역)도 타격했지만, 조선 경상좌수군이 이를 막아냈다. 하지만 숫자가 역부족이어서 결국 상륙 셋째날 다대포의 800명이 궤멸되었다.

동래성 전투 - 일본군은 상륙 셋째날 동래성을 3방향에서 포위공격해 무너뜨렸다. 동래성의 3500명이 궤멸되었다.

3. 전쟁 초기 정보부족으로 낮은 평가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13][14]

선조실록에서는 사냥나간 정발이 경계에 실패해 적의 입성을 허용한 후 난전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선조의 의심도 큰데 어떻게 자기네 나라보다 한참이나 후진국이라고 생각한 일본군이 쳐들어왔는데 몇 시간도 못 버티고 그냥 성을 내주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기사인데, 원양에서 오는 대규모의 일본군 함대를 부산에서 툭 튀어나온 절영도에서 관측을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1군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끌고 온 병력은 1만 8,700명으로, 세키부네 한 척에 100명이 탔다고 해도 인력 수송용으로만 187척이 필요한데, 일본군 선단은 계속해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날라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세키부네에 탄 모든 병력이 고니시의 병력은 아니었을 것이며, 때문에 실제 투입된 선박은 187척보다 훨씬 많았다. 졸장 중의 졸장인 원균이라도 최소 200척(실제 700척)에 가까운 대선단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즉, 수평선에 왜선 선단이 보이는 순간, 침공군임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당시 조일외교관계를 보면 당연한 상식이었다. 임진왜란 이전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 을묘왜변 등의 사건이 이어지며 조선은 꾸준히 일본의 세견선 규모를 줄였기 때문이다. 애당초 세견선은 정미약조 기준으로도 25척 밖에 올 수가 없는데, 백 단위 함선이 왔다? 당연히 이전에 벌어졌던 을묘왜변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절영도에서 부산진으로 향하는 것이 원양에서 일본군이 오는 것(+ 일본군의 이함 및 전투준비시간)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일본군이 타고 온 배는 현대의 쾌속선이 아니라 세키부네, 아타케부네와 같은 중세시대 일본의 함선이다. 일본군은 규슈 히젠 나고야성(현 사가현)에 집결해서 쓰시마섬 혹은 이키 섬을 경유해서 부산진으로 왔는데, 쓰시마섬 기준으로 부산진까지 약 100km이고, 이키 섬은 더 멀다.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좌승함으로 쓰인 '天地丸(てんちまる, 텐치마루)'가 순항속도 3.1노트, 최대속도 6.8노트로 추정된다고 하니[15], 대강 추측이 가능하다. 설령 세키부네의 속도가 7노트라고 쳐도 약 13km/h의 속도인데, 쓰시마 섬에서 부산진까지 약 8시간 걸린다. 기껏해야 배수량 100t 정도인 목선 위에서 8시간 이상 시달렸으니 심각한 배멀미를 앓았을 것이다.

일본이 섬나라이고, 왜구가 있어 일본군이 수상전에 익숙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당장 당대 천하인으로 꼽혔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적만 봐도 구키 요시타카가 이끄는 수군이 종종 언급될 뿐이다. 모리와 같이 규모가 큰 다이묘들은 독자적으로 수군을 운용하기도 했지만, 대개 다이묘들은 수군이 필요하다 싶으면 카이조쿠슈(海賊衆(かいぞくしゅう, 해적중))를 고용하거나 복속시켜 해전을 맡기는 수준이었다. 이건 일본의 지형 때문이기도 한데, 규슈, 시코쿠가 아무리 잘나봐야 혼슈 고쿠다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기 때문에 교토를 점거하고 쇼군을 갈아치우며 혼슈를 지배하는 거대 다이묘[16] 앞에서는 감히 까불수 없기 때문이었다. 수군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일본의 패권은 혼슈 내의 전쟁으로 결판이 나니 수군이 주력이 될 이유는 더더욱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수군이 아주 중요한 임진왜란에서도 구키 요시타카,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같이 좋게 말해도 세력이 작은 무장들이 나서서 이순신과 싸우다 박살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요시아키는 아이즈 번으로 전봉되며 43만 5500석의 다이묘가 되고, 도도 다카토라도 20만석의 다이묘가 되지만[17],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준, 이 중 가장 고쿠다카가 높았던 사람은 10만석의 가토 요시아키였으며, 능력이 출중한 도도 다카토라만 해도 이 시점에서는 8만석이었다. 반면 일본군 육군 전력의 경우, 선봉과 차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는 고쿠다카 20만 석 이상이어서 수군을 맡은 일본 장수들보다 급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이들도 세력이나 경력 면에서 시마즈, 모리, 고바야카와, 우키타, 쵸소카베[18] 등의 대다이묘에게는 상대가 안 됐다.

사실, 구키나 구루지마 이상으로 일본군 수군을 지휘할 인재가 있었는데, 제6군 소속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모리의 분가로, 모리 휘하의 수군을 맡고 있었으며, 타카카게는 특히나 수군 전문가였다. 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벌인 규슈정벌에서 공을 세워 37만 1,300석의 고쿠다카를 가진 다이묘로 성장하였기에, 수군 총대장이 될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타카카게를 육전에 투입했다. 왜란에 투입된 수군 전력 자체가 육군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는 점을 보면[19], 이순신에게 개털리고 수륙병진전략 자체가 박살나기 전까지는 히데요시가 수군의 중요성을 크게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튼 이순신이 상대한 일본군 장수 중 가장 급이 높았던 사람은 노량 해전에서 붙은 시마즈 요시히로로, 고쿠다카 60만 9천 석에 달하는 거대 영주였다. 하지만 이것도 노량 해전 자체가 일본군의 퇴각전이었기에 시마즈가 수군의 지휘를 맡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결국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조선 수군 최고 상급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현대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명국 수군 도독인 진린의 큰 존경을 받아 명국 수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진린이 이순신을 존대함에도 그것을 문제시하는 명나라 인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조공책봉관계'로 이루어진 상태였고, 아무리 이순신이 조선 수군 1인자였다 해도 명나라 도독 씩이나 되는 이가 그리 행세했으면 문제가 되거나, 최소한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사안이었음에도, 진린의 행동은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진린은 뇌물을 받고 왜군의 연락선 한 척을 못 본 척 해주긴 했지만 결국 이순신의 요청을 받아 노량 해전에서 열심히 싸워준다.

이를 두고 보면, 조명 연합 수군을 이끌던 이순신의 현실적인 위치는 제2차 세계대전 기준 연합국 해군을 이끌던 체스터 니미츠 어니스트 킹 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에 대려면 카를 되니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정도는 나와야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고작 10만석 내외에서 놀던 와키자카, 요시아키, 도도 따위는 이순신 앞에서는 택도 없다. 시마즈 역시 마찬가지고, 당시 일본에서 이순신과 급에 맞는 상대는 '오대로'라 불리던 우키타, 마에다, 우에스키, 도쿠가와, 모리 밖에 없었다. 결국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해군 총사령관인 이순신의 급에 맞는 상대는 일본군 수군 내에서 사실상 없었고, 육군을 합쳐봐야 오대로였던 우키타 히데이에 정도였던 셈이다.

수군과 육군 간 지휘관의 수준 차이가 극명한 만큼, 일본군은 수군에 취약한 정황이 보인다. 전체 일본군에서 5% 정도만 차지하는 수군이라면 몰라도, 일본군 전체는 해전에 익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도착하자마자 냉큼 상륙해서 단기간 내에 화려한 기동전으로 부산진을 쓸어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쉬지도 않고 급습하여 성을 깨뜨린 것처럼 묘사한 선조실록 26권에는 모순이 있는 것이다.

정발은 잠시 적전 도주 의혹을 사기도 했으나 이내 누명을 벗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전쟁 초기에는 보고도 제대로 되지도 않고 루머만 돌아서 정발과 송상현이 일본 장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실록에는 왜란 초기 경상도지역 책임자였던 경상감사 김수가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어 행재소로 복귀했을때 선조가 김수에게 정발과 송상현에 대한 루머(두 사람이 살아있다던가 왜에 투항해서 왜장이 되었다던가)에 대해 물어보는 기록도 있다. 김수는 단호하게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답했다. 부산진 전투에서 생존해서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가은산의 증언과 정발의 처 이씨의 탄원으로 전란후 현지에서 조사를 거친 후에 누명을 벗었고, 송상현, 윤홍신과 함께 부산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부산 시내에는 정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20]

4. 항쟁에 놀란 일본군

비록 비극적인 패전이긴 했지만, 후에 경상도 위무사[21] 황신에게 일본군 장수 마쓰라 시게노부[22]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적고 있다. 정발과 부산진의 조선군 병사들, 그리고 조선 백성[23]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측했던 일본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사실 이는 당시 한국과 일본의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본은 정치체계의 특성상 막후정치가 횡행했다. 천황의 권력이 강했던 시기에도 천황 위에 상황이, 그 위에 태상황이 있는 식의 인세이 정치가 시행되었고,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이후의) 도쿠가와 막부 정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황을 명목상 군주, 공가를 명목상의 벼슬아치로 삼아둔 채, 실권은 막부의 지도자인 세이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이 장악하여 통치, 외교 행위를 하였다.

명목상의 권력자와 실권자가 각자 달랐기 때문에, 권력의 승계나 확보에 정당성보다 힘, 특히 무력이 중시되었고, 이러한 상황의 종착지가 '막부 정치' 였다. 일본에서는 이런 형태로 이어진 천황을 두고 만세일계라고 칭송한 적이 있었으나, 세계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 역성혁명이 있어나 왕조가 교체되었다. 따라서 한반도, 중국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태였고, 영토의 통치권이 세습되는 봉건주의적 정치제도가 지속되었는데, 이런 일본 정치의 기형적 형태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고, 뒷방 제사장 신세였던 천황에게 상당한 권력이 집중되고 나서야 일정부분 간신히 해결되게 된다.

매번 중앙조정이 지방에 강력한 통치를 행사하려 시도했고, 그것이 먹혔던 한반도, 중국과 달리, 일본은 유럽에 가까운 봉건주의가 지속되고 있었고, 그렇기에 중앙조정에서 임명되고 세습이 허용되지 않던 중국과 한반도의 지방관과 달리, 일본의 다이묘들은 실질적인 영토의 소유자이자 통치자로 기능했다. 물론 쇼군은 다이묘의 영지를 변경하거나, 주거나 빼앗을 명목적 권리가 있었으나,[24] 여러 이유로 쉽게 행사하지는 못하는 권리였다. 대규모 다이묘가 고꾸라지면 그 밑에 일하던 사람들이 죄다 낭인(로닌)이 되고 그 일부는 범죄자로 활동하였기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였을 뿐더러,[25]무엇보다 징계 대상인 다이묘가 명령을 들어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전국시대는 군웅이 할거하는 봉건주의적 지방분권 상태였고, 전투의 성격도 각자 권력을 가진 다이묘나 유력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에 가까웠다. 따라서 한쪽이 전투에서 패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패전 측의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지며 마무리가 되었다. 게다가 처벌도 패배한 당사자들 및 측근, 가신, 일가 위주로 진행될 뿐,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의 것이 되기 때문에 완전히 씨를 말려죽일 의도가 아닌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 따라서 말단급 병사나 백성들은 끝까지 항전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전쟁 한 번 난 후에 윗대가리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26]

하지만 조선은 멀리 고려 시절부터 500년 이상 단일 정부의 국가였고, 모든 백성은 국왕에게 예속되어있는 존재였으므로 백성과 병사 하나도 열외없이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하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다. 당장 여몽전쟁 당시 민중항쟁과 의병 운동만 봐도 고려 시절부터 이어진 조선 백성의 기질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조선인에게 있어 이제까지 외적의 침입=약탈이었고, 특히 고려 말부터 이어진 왜적의 침입은 더더욱 그러했다. 만약 성이 떨어지면 성내의 군민들은 대개 몰살 당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대대적인 외적의 침공이 들어올 때마다 살육과 약탈을 모두 감내해야 했던 역사 탓에, 부산진성에서 끝까지 저항을 시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고니시는 정발의 투지에 감복하여 그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일본군과 부산진 주변 백성들은 분전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을 기리는 의미로 정발을 흑의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만 워낙 병력이 열세였던데다가 일본군의 연락병 차단 및 공성 수준도 훌륭했기 때문에, 정발의 대응은 흠잡을 수 없었음에도 전황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일본군의 심리에 불안정한 균열을 일으켰기는 했겠지만 어차피 일본군은 조선군이 동원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이후 상주 전투와 탄금대 전투의 연전연승으로 그 불안감 역시 손쉽게 봉합되었을 것이다.

훗날 외교관계가 복원되어 통신사가 갔을 때 일본측에서 인상깊게 본 장수로 꼽은 정발을 정작 조선 측에서 누군지 몰라서 이야기가 엇나간 해프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부산진 전투에 대한 재평가

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絶影島)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戰船)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咆)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27]

이후 인조, 효종 때에 편집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당시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모순이 해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튿날 아침 일본군 함대가 육지에 접근하며 조총을 쏘자 일본군의 침략임을 파악한 정발은 부산진 소속 전선 3척(전선(戰船), 방패선(防牌船), 중선(中船) 각 1척)을 자침시키는 한편 왜관에 남아있던 일본인 4명을 구금하고 백성들을 성안으로 소개시켜 농성 준비를 갖춘 다음 남문의 성루에서 날을 지새웠다. 그러나 부산진의 병력은 600여명에 불과했고[28] 삼포왜란 등이 일어났기에 병력이 증강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당시 조선의 국토방위체제를 고려하면 부산진에 유의미하게 많은 병력이 증원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병력이 적은 이유는 제승방략상 부산진은 요즘으로 치면 휴전선 GOP개념의 전방 기지고 본격적인 경상도 남부 지역 방어는 동래성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남부지방의 방어 전술은 큰 전투는 거의 없고 해적의 소규모 약탈이 많은 남부지방의 특징을 고려해서 소규모 진지를 많이 깔아놓고 대규모 전쟁이 나면 상급부대에서 주변의 진지들을 규합해 한타를 벌이는 식이었다. 일본군의 진격이 규합 속도보다 더 빨랐고, 정발의 경고장을 받은 장군이 하필 원균이라는 게 문제였다. 서신을 받은 이후 원균은 판옥선 100여 척을 싸워보지도 않고 태워버리고 도주했는데, 경상우수영은 조선 수군 최강전력으로, 원균이 불사른 판옥선을 이순신이 가졌다면 일본군이 초전에 박살났을 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의 대단위 전력이다. [29] 피난민들을 합쳐서 겨우 천여명에 불과했다.

반나절도 안되어 급박하게 이루어진 전투로 정확한 전개조차 파악이 안되었다. 광해군 때에야 생존자 조사를 통해 비로소 그 전개가 난중잡록에 전하고 있다.

6. 경상도 수군의 자침에 대한 평가

판옥선의 위력이 알려진 전쟁 말과 대비하면, 전쟁 초 경상좌수영 ( 박홍, 판옥선 75척, 협선 25척), 경상우수영( 원균, 판옥선 44척, 협선 17척)[30]이 제대로 싸움도 없이 함선들을 대부분 자침시킨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31]
  • 이순신 난중일기시간적 부족에 의한 와해 및 자침이 일부는 어쩔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경상우수영의 1/3 규모인 전라좌수영조차 전군소집에 15일은 걸렸으며, 전라우수영은 전쟁 발발 한달차가 되도록 전군소집을 못 해 이순신의 1차 출정에 함께 하지 못 했기 때문. 이순신은 하지만 경상좌수영/경상우수영이 전방 관포에서 농성하면서 후방 관포에서 병력을 모아와 배치하는 등을 하지 않고 전부 포기해버린 점은 비판했다.
  • 류성룡 징비록으로 " 원균이 왜군에 겁에 질려 3척을 남기고 80척을 자침시키고 군대를 해산하고, 부하 이영남이 말리며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하자 망설였다"고 서술했다.
  • 선조실록 6월 28일은 " 원균이 군영을 불태우고 다만 배 한 척만 보전,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들이 도망"이라고 서술했다.

7. 대중매체

7.1. 부산진순절도

파일:부산진순절도.jpg
1709년,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기록화다. 부산진순절도 문서 참고.

7.2. 조선왕조 오백년

1985년,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 중 9회에 다루었다. 병사들과 함께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일본군의 압도적인 군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 성 전체가 전몰되는 모습을 묘사하며 정발과 병사들의 장렬한 최후를 다루기는 했지만, 정작 전투 후의 내레이션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을 빼앗겼다고 설명하며 한심한 패배였다고 디스한다. 이 드라마가 제작할 때까지만 해도 고증이 엉망이었는지라 조선활보다 몇 배나 사거리가 긴 조총 때문에 패했다고 설명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아니며 당시 조총은 활보다 사거리가 훨씬 짧았다.

7.3. 임진록

1997년, 게임 임진록 임진록 2 일본 시나리오의 시작을 담당하며, 당시 상황을 묘사한 부산진순절도가 임진록 1의 일본 시나리오 브리핑 배경으로 나온다. 그런데 좌우 반전이다.

7.4. 불멸의 이순신

2004년, 불멸의 이순신 57화 초반 6~7분에 걸쳐 다루었다. 절영도에 상륙한 일본군 선발대에 의해 생선들을 말리던 백성들과 달려오던 일부 수군들이 거의 몰살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사냥 후 장수들과 병사들이랑 같이 회식을 하던 정발에게 보고할 수 있었고, 정발은 전선들을 자침시킨 후 밤새 백성들을 부산진성으로 소개시킨다. 이후 와키자카 야스하루[32]의 명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정발의 명에 따라 조선 수군은 활로 저항하지만 이내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무너지게 되고, 정발도 다수의 일본군과 싸우다가 조총의 일제사격에 주변에 있던 다른 일본군과 함께 사살당한다.

7.5. 징비록


2015년, 징비록 13화 초반 30여 분에 걸쳐 다루었다. 정발은 병사들을 데리고 사냥 후 회식을 하였는데, 그동안 일본군은 척후병들을 보내어 조선군의 상태를 확인한 후 봉수대를 무력화 시킨 뒤 상륙을 한다. 정발은 부산진으로 복귀하던 중 다가오는 일본군 전선들을 보고 처음엔 대마도 무역선으로 파악했으나, 사전에 연락이 없었던데다 무역선 치고는 너무 많이 오는 것을 보고는 곧 노략질을 하러 온 왜구들로 파악하고 급히 백성들을 소개시키며 전투 태세를 갖추며 박홍과 원균 그리고 동래부사 송상현에게도 이 소식을 알린다. 이후 정발의 연락을 받고 합류한 박홍과 함께 일본군을 맞이하고, 못해도 3,400척에 달해보이는 왜선을 봤던 정발도 이때쯤에는 그들이 단순한 해적 수준이 아닌, 본토에서 온 정규군임을 알게 된다. 소 요시토시의 명령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 수군은 정발의 명령에 따라 총통과 화살 등을 쏘아 일본군을 잠시 저지하지만, 곧 일본군이 방어 태세를 갖춰 조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자 곧 전열이 무너지게 된다. 결국 일본군이 성내에 돌입해 병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보이는 즉시 마구잡이로 도륙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박홍은 한참 싸우다가 불리하다고 여겨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퇴각하며, 나머지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학살당한다. 정발도 조총에 치명상을 입은 후 일본군의 칼을 맞고 전사한다.

징비록의 부산진 전투는 조선군의 복장 고증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기록을 반영해서 재현했기에 대단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1] 2016년경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록화가 인터넷에 돌았다. 2016년부터의 부산진성 발굴 고증이 전혀 반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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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간인을 포함하면 약 2,000~3,000명으로 추정. [3] 세키부네 1척당 100명씩 타면 최소 187척, 나머지는 군수보급품. [4] 모리 가문의 기록은 18,700명으로 주장하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16,700명으로 주장한다. [5] 고니시 유키나가 7,000명, 소 요시토시 5,000명, 마츠우라 시게노부 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 1,000명, 고토 스미하루 700명. [6] 경남도청 충무공 이순신 > 7년간의전쟁 > 임진왜란 경과 > 임진왜란의 발발 > 일본의침입과 관군의 붕괴 출처. [7]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일대. 현재 부산에는 부산진구가 따로 있지만 부산진성은 동구에 있다. [8] 앞서 3월 소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고 서신을 보내자 이를 심상치 않은 조짐으로 여겼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4일 갑오 2번째 기사 여기서의 '평의지(平義智)'가 소 요시토시이다. [9] 날이 맑으면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보인다. [10] 전선(戰船), 방패선(防牌船), 중선(中船) 각 1척 [11]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후에 러시아 제국이 조차를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 [12]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선군은 구리로 된 포를 사용하고 가죽으로 만든 흉갑과 철투구를 착용했다고 한다. [13]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3일 임인 1번째 기사 [14]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7일 갑오 2번째기사에도 이 내용을 재인용한다. [15] 일본어 위키백과 '天地丸' 출처. [16] 이게 가능한 사람을 '천하인'이라고 했다. [17] 둘 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귀순하여 전공을 크게 세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8]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일시적으로나마 시코쿠를 통일한 인물이었고, 아무리 시코쿠가 깡촌이라도 크기가 크기인 만큼 어지간한 다이묘들의 석고보다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천하인으로 도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구로다 간베에(임진왜란에 참전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 도요토미 히데나가로 구성된 올스타 팀을 동원해 쳐버리는 바람에 몰락했다. [19] 적어도 17만, 크게 잡으면 20만의 일본군이 투입되었는데, 그 중 수군은 약 1만명이었다. [20] 위치가 오묘하게도 재부산 일본국총영사관 옆인 초량교차로이다. [21] 조선통신사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 목록에 황신의 이름은 없다. 마쓰라 시게노부와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간기에 경상도 위무사로 있던 시기의 황신이 유력한 후보이다. 황신이 이 시기 한 대표적인 행동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 낚으려고 했던 책략에 이용당한 것이지만, 역으로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들과 연락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임진왜란 이전 일본에 정사로 파견된 경력도 있다. [22] 이것도 이상하게 마쓰우라로 알려져 있다. [23] 물론 직접적으로 싸우기 위해 달려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죽기 전에 저항이라도 해보자는 의미였겠지만, 낫들고 달려들고 지붕 기왓장 들어내서 성벽에서 던져대는 식으로 끝까지 전투에 참여했다. [24] 전봉(영지를 옮김), 개역( 영지 몰수 내지 일부 압수) 등이 그것이다. [25] 실제로 에도 시대가 열린 후 100년이나 지난 후에 추신구라(아코 사건)이 벌어졌을 정도로 일본 무사계급의 보수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26] 다만 당시 일본 백성 중에 의리가 있던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라, 잘 통치하는 다이묘 휘하의 백성들은 주인이 바뀌었을 때 잇키를 일으키며 저항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간토로 전봉당한 도쿠가와가 이 피해자였는데, 이전 간토의 지배자인 후호조씨의 인망이 높았던 탓이다. 물론 너구리로 유명했던 도쿠가와답게 간토를 잘 안정시켜 이전의 영지였던 미카와 백성들의 그것 이상으로 간토 백성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덕에 간토에서 에도 시대를 열 수 있었다. [27]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 [28]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 10월 24일 무인 1번째 기사에서는 527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29] 조선 수군은 기본적으로 2교대제였고 전투진행 과정을 보면 비번인 군사들을 소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전투에 투입된 군사의 실제 수는 이보다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30] 선조실록 2월 가배포에서의 지휘 숫자 기준. [31] 경상좌수군이 일부 포구에서 농성 전투한 기록은 있다. [32] 실제로 와키자카는 부산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