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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16호 | |
정선 필 인왕제색도 鄭敾 筆 仁王霽色圖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산수화 / 산수화 |
수량/면적 | 1축 |
지정연도 | 1984년 8월 6일 |
제작시기 | 조선 영조 27년(1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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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仁王霽色圖.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이 1751년( 영조 27년)에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을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었다가 2020년 이건희 회장이 사망한 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었다.제목의 제색(霽色)이란 단어는 비 갤 제( 霽) 자를 사용해서 비가 갠 뒤 하늘의 빛깔이나 풍경을 가리킨다.
2. 내용
138.2 × 79.2cm. 1751년(영조 27년) 작. 당시 75세였던 겸재 정선이 비가 내린 뒤의 인왕산을 그린 것이다. 60년지기 친구인 시인 이병연이 병을 떨쳐내고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그렸지만, 이병연은 이 그림이 완성된 지 4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부분은 2019년 2월 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국보 제217호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 정선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여러 진경산수화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복 직후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이 매입한 뒤로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2021년 기증되었다. 1984년 8월 6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이에 관련하여 서예가 손재형의 장손이 삼성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각하되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2가합523534) [판결] 삼성家 상대 '인왕제색도 소유권' 확인 소송, 1심서 각하
3. 관련 영상
4. 외부 링크
5. 국보 제216호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년 ∼ 1759년)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138.2cm, 세로 79.2cm이다.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였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비에 젖은 뒷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일 뿐만 아니라 그 화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산수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의 400여 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였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비에 젖은 뒷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일 뿐만 아니라 그 화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산수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의 400여 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