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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00호 | |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開城 南溪院址 七層石塔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건축시기 | 고려 시대 |
1. 개요
開城 南溪院址 七層石塔.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본래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덕암리에 위치한 절터인 남계원지(南溪院址)에 있던 화강암제 7층 석탑으로,[1] 형식상 고려 시대 중기 이전에 만들어진 탑일 것으로 추정한다.원래대로라면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북한의 영역인 개성에 있어야 하나, 현재 남한에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옮겨졌기 때문으로, 1915년에 경복궁 경내로 옮겨온 뒤 계속 경복궁 내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2005년 용산구로 새로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탑을 다시 옮겼으며, 2023년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1962년에 국보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2.1. 역사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본 석탑을 경복궁 경내로 옮겨왔는데, 일제라고 대뜸 가져온 것은 아니고 목적한 바는 있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시정오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행사장 주변의 장식물로 두기 위해 가져온 것이다.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들을 다 허물어버리고 행사장과 전시장 등을 세웠으며, 밀어버린 공터에 정원을 만들고 이를 꾸미기 위해, 비단 본 석탑만 가져온게 아니라, 경성부 주변의 개성, 원주, 이천 등에서 석탑이나 불상 같은 유물들을 가져와서 장식해뒀다. 문제는 제대로 된 학술 조사 같은 것 없이 가져왔다는 점이다. 본 석탑 역시, 본래 있던 곳이 막연하게 개국사(開國寺)터로 알려져 있었기에 개국사탑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후 조사 결과 개국사가 아니라 개국사의 말사인 남계원으로 밝혀졌고,[2] 1938년에는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소위 개국사탑에 대하여>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지금과 같이 이름을 바로 잡았다.[3]경복궁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을 때.[4] |
2.2. 상세
국립중앙박물관 남계원지 칠층석탑 설명판 |
탑의 높이는 7.54m로 아주 높으며, 탑의 구조는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7층의 몸돌과 지붕돌[8]로 구성되어 있다. 아쉽게도 현존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처럼 남계원지 칠층석탑의 7층 지붕돌 위의 상륜부(相輪部)[9] 역시 약간의 밑받침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사라지고 없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을 밑에서부터 살펴보면, 우선 기단부는 2층으로 되어 있고 돌들로 짜맞춰져 있다. 다만 깨지거나 결구되어 소실된 부분들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몸돌 부분에 비하면 다소 훼손됐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땅 속에 파묻히며 훼손된 것인지, 아니면 일제강점기의 발굴 조사 후 경복궁으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 훼손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을 이루는 몸돌과 지붕돌들은 크게 특징적인 부분은 그다지 없다. 몸돌들에는 각 층의 매 면마다 양 모서리에 기둥형 장식을 새겨놨지만,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새기거나 하는 등의 장식적인 면은 없어서 신라시대의 석탑들과 비교하면 미적인 측면에서 퇴화됐다고 여겨진다.[10]
1층 몸돌의 문비형 장식과 2층 몸돌 |
본 석탑을 서술하면서 묵직하다, 무겁다, 중후하다 등의 표현이 자주 나왔는데, 이는 비단 남계원지 칠층석탑만의 특징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고려의 탑이 신라의 탑보다 저러한 느낌을 준다고 평가되는데, 이는 신라와 차별되는 고려만의 비례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2] 신라의 탑에서 몸돌은 탑의 층수가 올라갈수록 체감률(遞減率)을 높이고[13] 지붕돌의 높이를 올려서 비례적 안정감과 경쾌한 느낌을 주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고려의 탑 특히 개성 지방의 탑은 지붕돌의 높이를 낮추고 몸돌의 크기를 키워서 체감률을 낮추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인해 탑의 형상에서 완만하고 무거운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를 두고 고려의 탑이 신라의 것보다 미적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이고, 고려의 탑에서 보이는 모습은 고려시대의 미의식과 지역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날렵하고 화려한 통일신라 탑에 비하여, 탑의 재료인 화강암이 가진 고유의 양감과 무게감을 살려서 단순하지만 묵직한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고려 탑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14]
이상과 같이 신라의 석탑과 본 석탑을 비교해보면, 신라의 것은 화려하고 날렵한 반면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단순하고 중후하다고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다만 전 영토에 걸쳐서 대략적으로나마 탑의 양식이 통일되어 있던 신라와는 달리, 고려는 각 지방마다 상이한 형태의 탑이 들어섰는데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15]
감지은니묘법연화경 | 두루마리 상태 |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신라시대 석탑의 영향을 받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임과 함께 고려만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기단부와 상륜부는 소실된 부분이 있으나 원형도 대체로 잘 보존된 고려시대 초-중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높으며, 그 크기도 웅장하여 중후한 미를 보이는 고려의 대표적인 석탑 중 하나라는 점에서는 미적 가치도 높다.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일찍이 이러한 가치들을 인정 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남계원칠층석탑
- 한국 미의 재발견 - 탑: 개성 남계원지칠층석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남계원 칠층석탑
- 두산백과: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 서울타임스 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남계원(南溪院) 칠층석탑 - 2011년 4월 1일자 기사
- 월간금강 이야기가 잇는 불교유물2: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과 <묘법연화경> - 2023년 3월 2일자 기사
4. 국보 제100호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워져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얕게 새겨져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복발만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남아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전체에 흐르는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은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 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얕게 새겨져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복발만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남아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전체에 흐르는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은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 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1]
개풍군은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 상으로는
개성시에 속하며, 덕암리도 개성시 덕암동으로 변경됐다. 개풍군은 남북분단 이후 경기도-
개성시-
황해북도-개성시의 순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본 문서에서는
이북 5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라 경기도로 표기한다.
[2]
출처:
월간금강 이야기가 잇는 불교유물2 -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과 <묘법연화경> - 2023년 3월 2일자 기사
[3]
출처:
서울타임스 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 남계원(南溪院) 칠층석탑 - 2011년 4월 1일자 기사
[4]
우측에 따로 놓인 기단부가 보인다.
[5]
이를 탑신(塔身)이라고도 한다.
[6]
출처:
월간금강 이야기가 잇는 불교유물2 -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과 <묘법연화경> - 2023년 3월 2일자 기사
[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한국어 위키백과 -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8]
이를 옥개석(屋蓋石)이라고도 한다.
[9]
이를 머리장식이라고도 한다.
[1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11]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12]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탑 - 개성 남계원지칠층석탑
[13]
=몸돌의 너비와 높이를 줄여서
[14]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탑 - 개성 남계원지칠층석탑
[15]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탑 - 개성 남계원지칠층석탑
[16]
출처: 이은희(1987): 고려(高麗) 충렬왕대(忠烈王代)의 사경연구(寫經硏究). In: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문화재) vol.20., pp.219-238. 중 p.225.
논문 다운로드 링크 / 권희경(2003): 사경원과 염승익 발원의 사경 묘법연화경 7권본 1부 A Study on the set seven roalls of the Saddarma Pundarika Sutra Prayed by Yeom Seong-Ik and Script Center. In: 한국기록관리학회지 2003, vol.3., no.1., pp.1-22.
논문 다운로드 링크
[17]
참조:
국립중앙박물관 - 감지은니사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