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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23호 |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 |
|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로 362 (금마면, 국립익산박물관)[1] |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 사리장치 |
수량/면적 | 일괄 |
지정연도 | 1966년 7월 26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2] |
1. 개요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시기의 유물들. 일반적으로 8–9세기 사이에 만들었다고 추정하지만 정확한 제작시기는 논란이 있다.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되어있고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금제 방형 사리함 |
금제 금강경
금동여래입상 |
1965년에 왕궁리 유적의 오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정확한 제작연대를 두고는 논란이 많다. 두산백과와 해당 유물을 소장하고 있던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통일신라 시대, 문화재청에서는 백제– 통일신라 시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 시대, 한국어 위키백과는 백제– 고려 시대의 유물로 소개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오층석탑의 탑신부의 결구(結構) 수법이나 받침 표현 방식이 신라 석탑을 그대로 따랐거니와, 사리장엄구 출토 유물들 또한 백제나 고려가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양식이기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에서 만들었다고 여긴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의 불교 문화 및 사리신앙(舍利信仰)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66년 7월 26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두산백과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미술백과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한국 미의 재발견 - 금속공예 : 익산 왕궁리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한국어 위키백과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4. 국보 제123호
마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알려진 터에 있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을 보수하기 위해, 1965년 해체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것들로 판단된다.
기단부 윗면에 品자형으로 뚫린 3개의 구멍 중 동쪽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 금동여래입상 1구와 불교 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요령 1개가 나왔고, 북쪽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또 다른 구멍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1층 지붕돌 윗면 중앙에 뚫려있는 2개의 구멍에서는 각각 연꽃 봉오리모양의 마개가 덮혀있는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겨 책처럼 2개의 금줄로 묶은 은제도금금강경판이 있었다.
이 유물들은 모두 2중으로 된 금동제 합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바깥쪽의 외합은 단순히 내합과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으로 장식도 없고 칠도 벗겨져 있었다. 녹색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반쯤 핀 연꽃 봉오리와 주변에는 구슬무늬를 새겨 넣었고, 금강경판이 들어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손잡이로 금고리를 달고 국화 문양을 새긴 것으로 모두 도금 상태가 완전하였다.
기단부 윗면에 品자형으로 뚫린 3개의 구멍 중 동쪽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 금동여래입상 1구와 불교 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요령 1개가 나왔고, 북쪽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또 다른 구멍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1층 지붕돌 윗면 중앙에 뚫려있는 2개의 구멍에서는 각각 연꽃 봉오리모양의 마개가 덮혀있는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겨 책처럼 2개의 금줄로 묶은 은제도금금강경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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