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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 호남리 사신총 |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 | ||
연호 | 연가 |
대한민국 국보 제119호 | |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1964년 3월 30일 |
제작시기 | 삼국시대(고구려 6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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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고구려의 안원왕 시대에 만들어진, 구리로 주조하여 금으로 도금한 금속제 입불상이다. 광배의 뒤에는 '연가7년세재기미고려국락량(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으로 시작하는 47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63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출토되었고[1] 이듬해인 1964년 국보 제11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연가(延嘉)"는 연가는 삼국시대의 연호로 533년에서 539년에 이르는 고구려 안원왕의 연호이다.
2. 상세
延嘉七年歲在己未高(句)麗國樂良
東寺主敬苐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苐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東寺主敬苐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苐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광배 뒷면에 '연가 7년 기미년(539년)에 고려국(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의 주지승과 그 제자승 연을 비롯한 사도 40명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으니 그 29번째의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비구니) 법영(法穎)이 공양하는 바이다'라고 적혀 있고 불상의 표현방식도 고구려와 중국 북방의 양식으로 추정되면서 고구려에서 제작된 불상일 가능성이 커졌다.
2023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모습 |
3. 사건사고
1967년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도난사건이 발생하였으나 다행히 입상은 되찾았다. 다만 범인은 현재까지도 잡히지 않았다. 미스터리한 금동 연가7년명 여래입상 도난사건(영상)4. 여담
해당 불상이 고구려에서 제작된 설이 유력하고 미소를 띠고 있어서인지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얼굴무늬 수막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더불어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을 고구려의 미소라 표현하기도 한다.광배 부분의 흠결은 위에서 언급된 1967년에 일어난 도난 사건으로 생긴 것으로서 복원이 원천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5.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 한국고중세사사전: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 KBS 천상의 컬렉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 두산백과: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6. 국보 제119호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光背)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