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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40호 | |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慶州 淨惠寺址 十三層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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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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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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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9세기 통일신라대의 화강암 석탑.본래 정혜사(淨惠寺)라는 사찰 경내에 있던 탑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정혜사는 사라졌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근처 옥산서원의 소유가 되어 조선말 경까지도 절이 유지되었고, 근처 독락당에 살던[1] 이언적이 젊었을 때 정혜사에서 공부하고 정혜사 여기저기에 이언적이 직접 쓴 동유록 등 글씨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34년에 발생한 화재로 결국 폐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정혜사지에는 단지 본 석탑만 남아있다.
2. 형태
흙으로 쌓은 기단 한 단 위에 이름과 같이 무려 13층 구조로 쌓은 석탑으로 높이는 약 6 m. 한국의 어떤 다른 석탑들과 비슷한 데가 전혀 없는 독특한 탑이다. 흥미롭게도 탑의 층수는 아주 많지만 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다른 석탑들과 비슷한 편이다.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의 모양은 마치 1층 집 위에 탑을 덜렁 올려 놓은 듯한 모양새로, 탑의 1층은 거대한 데 반해 2층부터는 흡사 지붕돌만 급격하게 쌓아 올라가는 모습이다. 1층 탑신이 나머지 층들에 비해 둔중해 보일 정도로 거대하여, 2층부터 급격히 상승하는 데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전체적인 비례감은 상당히 어색하다. 1층 탑신은 4면에 감실형의 방을 만들어 놓았는데, 본래 여기에 따로 불상 등을 봉안했는지, 원래부터 비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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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삼국시대에는 각 나라별, 시기별로 다양한 형태의 불탑이 만들어졌지만 통일신라에 들어서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 석탑 구조가 경주 각지와 주변지역, 옛 백제였던 충청전라 지역, 멀리는 옛 고구려였던 황해도 지역과 금강산 일대까지 널리 퍼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경주 정혜사지 석탑은 경주 권역 안쪽에 있으면서도 다보탑과 함께 드물게도 기존 신라 표준식 석탑과는 완전히 형태가 다르고, 이와 비슷한 다른 사례도 없어 대표적인 이형석탑(異形石塔)으로 손꼽힌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망덕사에 존재했던 13층 목탑이 이 석탑과 비율이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경주 정혜사지 석탑은 그 독특한 미적인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0호로 지정되었다.
3. 관람
관광도시로 유명한 경주시에 있지만 대부분의 경주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동 지역에서는 거리가 꽤 있는 북부 안강읍에서도 외곽지역에 있다. 사실 탑 하나만 덜렁 남아있는 유적지이므로 여기만 찾기보다는 옥산권으로 묶어서 바로 인근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독락당( 보물 제413호)[2],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옥산서원과 하나의 코스로 같이 관람하도록 안내되고 있다. 세 장소는 서로 도보이동이 가능할 만큼 가까이 있다. 가장 능역이 잘 보존된 신라왕릉인 흥덕왕릉도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지지만 거기는 대중교통 접근은 거의 힘들고 자가용이 있다면 같이 방문할 만하다.대중교통은 경주 버스 203이 있다. 자주 다니는 버스가 아니므로 시간표를 참고해야 한다. 203번은 양동마을을 먼저 거치고 옥산서원으로 향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양동마을과 같이 일정에 넣는 게 낫다.
203번 버스 정류장(독락당 입구) 바로 인근 400m 거리에 있지만 방향 안내표지가 부실한 편이다. 온라인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는 게 낫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대한민국 구석구석: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미술백과: 정혜사지십삼층석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 두산백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5. 국보 제40호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적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적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