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09:29:03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진흥왕 순수비
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창녕 진흥왕 척경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파주 감악산비는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음.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Bukhansan Monument
파일:진흥왕 순수비.png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시설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555년 ~ 568년 사이
파일:진흥왕 순수비 비봉 당시.png
비봉 당시의 순수비.

1. 개요2. 역사3. 건립 시기4. 내용5. 외부 링크6. 국보 제3호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 제24대 임금 진흥왕이 6세기 중반, 고구려 한강 유역에서, 백제 관산성 전투에서 물리치고 새로 정복한 한반도 중부지방의 한강 유역을 직접 순시하고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설치한 비석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 4기 중 하나이다.

또한 세워진 지 천 년 가량의 오랜 세월이 흘러 어떤 비석인지도 잊혀 있었던 것을,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추사 김정희가 직접 비봉 정상에 올라가서 비문을 해독하고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역사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 한강 유역을 고구려 백제에게서 빼앗은 후 그 영토를 선포하기 위하여 세운 순수비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한산 비봉(560m) 정상에 위치해 있었다가 1972년 8월 17일 경복궁으로 옮겨진 후 1986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다.

험준한 산봉우리 암반 정상에 있다 보니 신라 멸망 이후 잊혀졌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근에 승가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막연히 무학대사의 비라고 잘못 알려졌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서유구가 처음 10여 자를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고, 1817년 7월 21일에는 금석학자 김정희가 비문 해독에 성공해, 마침내 이 비석의 가치가 드러났다. 이때 김정희는 기쁜 나머지 비석 옆면에 해설을 새겼는데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문화재 훼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저 어디에나 있는 지형지물일 뿐이었다. 고구려의 비석인지도 잊히고 마을 주민들에게는 선돌 정도로 인식되어 오던 충주 고구려비나 빨래판 신세로 전락했던 지안고구려비보단 나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누군가 낙서를 하면 반달리즘이겠지만 이건 과거 유명인물이 쓴 글씨라 이 글씨 또한 역사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1] 다른 사람의 글씨라면 낙서에 불과하나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면 그 역시 또 다른 문화재이다. 왜냐하면 이 순수비를 해독한 과정 자체도 역사적인 일이기 때문.[2]
파일:진흥왕 순수비 측면.png
순수비 측면.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판독사실을 새겼다.

조선시대에 김정희가 비석 옆면에 새긴 글은 다음과 같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진흥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 7월 김정희와 김경연[3]이 와서 읽고 감.
그는 고고학적 흥미가 생겼는지, 이듬해 다시 비봉을 방문해 그 옆에 또 글을 썼다[4].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정축년(1817)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식별가능한 68자를 해독함.

김정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재치를 발휘해, 비석의 탁본을 떠서 자신의 책에 실었다. 돌로 만든 비문이 이 상태로 더 있다가는 언젠가 풍화되어 소실될 것임을 감안하면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이제 와서는 19세기 김정희 이후로 2백여 년간 추가로 풍화되어 비문을 거의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김정희의 연구는 금석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김정희가 펴낸 논문에 대해서는 금석과안록 참조. 이후 용인 사람 이제현이 비봉을 올라 글을 남겼는데, 위 사진에서 김정희가 쓴 양 문장 중간 희미한 줄이 그것이다.
파일:gukjungbak_06.jpg
파일:gukjungbak_07.jpg
순수비의 후면. 후면의 총탄 자국.

비석 하단에 깨져 나간 부분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연유를 알 수 없다. 비석 상단에 크게 난 금은 일제강점기 1939년, 두동강 난 채 비봉 서쪽 30 km 밖에 굴러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해 다시 붙여놓은 것이나 #, 금 자체는 1916년에 찍힌 사진에도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이전에도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원래 비석 위에 지붕돌을 꽂았던 흔적이 있어 지붕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5] 아직 찾지 못했다. 또한 비석의 뒷면을 보면 유난히 파인 자국이 많이 있는데, 이는 6.25 전쟁 당시 서울 피/탈환 과정에서 도비탄에 맞은 흔적으로, 여러모로 한국의 수난사를 잘 간직한 보물이다.
파일:external/www.newsprime.co.kr/175043_85231_1543.jpg
1972년 순수비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려는 작업을 찍은 사진.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 접근이 어려운 실외에 계속 방치하다가는 풍화 및 붕괴 위험이 있다는 당시 문화공보부의 판단 아래 1972년 8월 16일부터 8월 25일까지 산 위의 비석을 분리해 운반하는 프로젝트를 단행, 경복궁 종합박물관 수장고로 옮기는 데 성공했고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신라관에 전시해 현재에 이른다. 원래 비석이 있던 비봉 위에는 원본보다 약간 작은 레플리카를 설치했는데, 잔금 하나까지 굉장히 잘 복제했으므로 등산할 일이 있다면 보고 오는 것도 좋다. 순수비 실물이 국보로 지정된 것과 별개로 순수비가 있던 비봉도 사적 제228호 진흥왕 순수비 유지로 지정되었다.
파일: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복제비 전경.jpg

참고로 비봉(碑峯)이라는 봉우리 이름은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데서 유래했다. 비석이 있던 비봉 정상은 그냥 하이킹한다는 생각으로 올라가면 피본다. 해발 560 m 지점이지만 여기 올라가려면 거의 암벽등반을 해야 한다. 특히 불광동쪽에서 올라가려면 족두리봉과 향로봉의 압박이 뒤따르므로 구기동에서 오르자 다만 저곳에 올라가면 서울 도심과 한강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다. 북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는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감제고지격인 비봉 쪽이 정복군주의 순수비를 세우기엔 적합했기에 이곳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건립 시기

흔히 진흥왕이 555년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비문에서는 건립년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른 순수비처럼 이것도 세운 시기를 기록하기는 했을 테지만 현재는 해당 부분이 풍화되어 판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555년설이 제기되는 이유는 ' 삼국사기 진흥왕 16년(555)' 기사에 '(왕이) 북한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에 555년으로 추측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북한산과 직접 관련된 기록이 하나밖에 없으니 진흥왕이 딱 이 때 북한산에 왔으며, 와서 비석도 세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파일:순수비_01.jpg
삼국사기(옥산서원본) 진흥왕 16년 기사의 해당 부분.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혀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6년(555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復一年租調, 曲赦除二罪皆原之.
11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서 돌아왔는데, 거쳐 지나온 주(州)와 군(郡)의 1년 동안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고, (그 지역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의 사형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6년(555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진흥왕이 555년에 북한산에 행차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으나, '555년 10~11월 사이에 순수비가 건립되었다.'에 대한 참・거짓은 판별할 수 없다. 순수비는 왕이 순수(행차)했다는 일을 나타내므로, 진흥왕이 재위기간 수십 년 동안 북한산을 더 방문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만을 근거로 555년이라고 추정하기에는 삼국사기에 나머지 순수비를 세운 창녕, 황초령, 마운령을 방문한 기록이 없다는 점도 문제시된다.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沙湌)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신주(新州)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8년(557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겨울 10월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한 비열홀주(比列忽州)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29년(568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에서 북한산이라는 어휘는 2년 후에 행정구역을 북한산주로 명명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이 북한산주는 약 10년 뒤인 568년에 폐지되어 남천주로 재개편되는데, 일부 학계에서는 이것이 순수비의 건립년도를 짐작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기도 한다. 순수비 비문에도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관직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순수비가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같이 568년 또는 그 이후에 건립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 이 쪽의 설이 555년보다 먼저인데, 대표적인 학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비석을 처음으로 조사했던 추사 김정희로 그의 논문인 금석과안록에서 이렇게 추정했다.

이렇게 건립년도가 정확하지 않음에도 어쩐 일인지 각종 교과서와 시험에 등장하는데, 공식적인 기관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다. 후속 연구나 발굴로 순수비가 다른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밝혀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역사 왜곡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상세내용 불명'으로 남겨두는 것이 상식이고, 교과서에 연도를 명기하거나 시험 문제로 출제해서는 안 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이 순수비의 건립년도를 묻는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555년을 정답으로 인정해 버렸다. 시험의 평가가 한국사 본래의 목적을 압도해 버린 셈이다.

4. 내용

파일:gukjungbak_05.jpg
파일:진흥왕 순수비 탁본.jpg
오늘날의 비문은 너무 오랜 세월 풍화되었기 때문에, 맨눈으로는 읽기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순수비 비문의 탁본.
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之時記
▨言▨令甲兵之仿▨▨▨▨▨▨覇主設▨賞▨▨
之所用高祀西▨▨▨▨▨相戰之時新羅▨王▨
德不兵故▨▨▨▨▨▨建文大淂人民▨▨▨
▨是巡狩▨▨▨▨民心▨欲勞賚如有忠信精誠▨
▨可加▨▨▨以▨▨▨▨▨▨路過漢城陟▨
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
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另力智迊干南川軍主沙喙
夫智及干夫智大奈▨▨沙喙屈丁次奈
▨▨谷▨指▨空幽則水▨▨▨劫初立造非▨
狩見▨▨▨▨▨▨▨▨歲記井▨▨▨
진흥태왕(眞興太王) 및 중신(衆臣)들이 … 을 순수할 때의 기록이다.
… 언(言) … 령갑병지방(令甲兵之仿) … 패주설(覇主設) … 상(賞) …
지소용고사서(之所用高祀西) … 서로 싸울 때 신라(新羅)의 태왕이 …
… 덕불병고(德不兵故) … 건문(建文) 크게 인민을 얻어 …
이리하여 관경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 하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
만일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고 …
상을 더하고 … 한성(漢城)을 지나는 길에 올라 …
도인(道人)이 석굴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 돌에 새겨 사(辭)를 기록한다.
척간(尺干), 내부지 일척간(內夫智一尺干), 사훼 모력지 잡간(沙喙另力智迊干)이다.
남천군주(南川軍主)는 사훼(沙喙) … 부지 급간(夫智及干), 부지 대나(夫智大奈) … 사훼 굴정차 나(沙喙屈丁次奈)이다.
… 곡(谷) … 지(指) … 비고 그윽한 즉수(則水) … 겁(劫) 처음에 세워 만든 바는 비(非) …
순수하여 견 … 세기정(歲記井) …
진흥왕의 행차 사실과, 진흥왕을 보좌한 대신들의 이름과 직책을 열거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으로는 새로 신라로 편입한 지역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도인'에 대한 기록으로, 단순히 진흥왕이 영토를 확보하는 데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정복지의 백성(피정복민)에 대한 교화에도 신경 썼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워져서 잘 알 수는 없지만 마운령비 같은 다른 순수비에 남아있는 수행인 명단을 참고하면 여기에도 승려, 약사, 점쟁이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동행시켜 현지인의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 외부 링크

6. 국보 제3호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국보)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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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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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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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10.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12. 천마총 금관
  13. 천마총 관모
  14. 천마총 금제 허리띠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1979)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01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1.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7
  2.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
  3.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4. 충주 고구려비
  5.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6.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7.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8. 보협인석탑
  9.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10.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11.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12. 금동탑
  13.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1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 31
  15. 정선필 인왕제색도
  16. 정선필 금강전도
  17. 아미타삼존도
  18.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19. 청자 상감용봉모란문 합 및 탁
  20.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21. 백자 청화매죽문 유개항아리
  22. 경복궁 근정전
  23. 경복궁 경회루
  24. 창덕궁 인정전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1991)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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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번호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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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미있는 사실은 추사도 신라의 국성인 경주 김씨라는 것. 직계 조상이 남긴 유적이니 그 감격이 남달랐을 듯하다. [2] 비슷한 예시로 울주 천전리 암각화 역시 선사시대 유적에 신라 화랑들이 방명록을 남기고 갔는데, 이 방명록이 당대 인명 등을 검증하는 좋은 사료가 된다. [3] 김정희의 술친구. [4] 오른쪽과 서체가 다른 걸 보아 조인영이 쓴 듯. [5] 남아있진 않지만 아마도 가까운 시대 비석인 마운령 순수비 감악산비 같은 지붕돌이 올려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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