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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2호 |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
|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황전리) / (지번)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석등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
|
<colbgcolor=#315288>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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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경내에 위치한 남북국시대의 고복형 석등이다. 현전하는 한반도의 고대 석등 중에 가장 큰 석등으로 지금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신라의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1962년 국보 제12호로 지정됐다.
2. 내용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9세기경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석등으로 화엄사의 각황전 앞에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석등의 높이는 6.36m, 직경은 직경 2.8m로 현전하는 한반도의 석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워낙 오래된 유물인지라 부분적으로 훼손되거나 결실되긴 했으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아주 좋다. 다만 조성시기는 확실하지 않은데, 장육전을 건립할 때[1] 본 석등도 함께 조성했을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장육전이 언제 건립됐을지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석등에 적용된 양식으로 봐서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2]
석등이란 돌로 만든 등기(燈器)를 말하는데, 불교에서 등기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 가운데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도구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석등을 중대석[3]의 형태에 따라 크게 3가지 종류로 구분하는데, 일반형 석등과 쌍사자(雙獅子) 석등, 그리고 고복형(鼓腹形) 석등으로 구분한다. 일반형은 석등의 기둥을 바닥과 평행하게 자른다고 쳤을때 그 단면이 팔각형을 이루는 형태를 가리키고, 쌍사자 석등은 중간에 기둥 대신 두 마리의 사자를 배치해놓은 형태를, 고복형 석등은 기둥의 단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굵은 마디를 둬서 마치 장구 2대를 위아래로 잇대어 놓은 듯한 형태를 가리키는데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다. 각황전 앞 석등은 이 중에서 고복형 석등으로 분류된다.
각황전 앞 석등 정면 | 각황전 앞 석등 측면 |
석등의 구조적 형태를 분석하면 일반적으로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으로 구분 가능하다. 상대석은 석등의 머리 부분을 일컫는데, 지붕 역할을 하는 부분인 옥개석과 불을 피우는 창이 뚫린 화사석(火舍石)으로 구성된다. 그 단면은 대체로 팔각형을 이룬다.[4] 중대석은 간주석이라고도 부르며 석등의 기둥을 이루는 부분을 지칭한다. 기둥의 위로 연꽃잎 무늬를 새긴 연화석을 둔다.[5] 하대석은 지면과 맞닿아 바닥에서 석등을 받치는 부분을 일컫는데, 탑의 형식으로 비유하자면 기단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6] 하대석은 지대석 부분과 이 위에 올리는 하대석으로 구분가능한데, 지대석 위에 올라가는 하대석은 2단으로 하부하대석과 상부하대석으로 나뉜다. 지대석(地臺石)은 말 그대로 땅과 닿는 받침돌이며, 지대석 위에 올라가는 하대석 중 상부하대석에는 중대석을 꽂는 구멍을 파놓고 구멍 둘레에 연꽃무늬를 새겨놓는다.[7] 지대석은 주로 네모나고, 상부하대석과 하부하대석의 단면은 대체로 둥근 원형이거나 팔각형을 이룬다.[8]
각황전 앞 석등 중대석 및 하대석 |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모범적인 구조를 한 석등이나 기둥을 고복형으로 만들어서 변형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구조를 아래부터 위로 개략적으로 살펴보자면, 우선 땅에 묻혀 있는 지대석의 위에 8각형으로 된 하대석이 올라가 있는데 상부와 하부로 구분된다. 상부 및 하부하대석 모두 팔각형으로 조형됐고, 상부하대석에는 바깥 쪽을 향해 벌어진 큰 연꽃무늬들을 새겨놨다. 상부하대석 위에는 2단으로 된 받침돌을 두었는데, 아래에 있는 받침돌은 구름무늬로 장식됐고 위에 있는 받침돌은 8각으로 조형했다. 받침돌 위에는 중대석이 올라가 있는데, 중대석은 본 석등의 특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장구 2대를 붙여놓은 모습이다. 중대석 가운데에 볼록 돌출된 굵은 마디에는 4개의 잎이 있는 꽃을 8개 장식했고 꽃들은 2줄로 된 띠로 연결되어 있다. 중대석 위에는 상대연화석이 올라가 있는데 여기에도 상부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꽃이 새겨져 있고 연꽃 안에는 보상화무늬가 장식되었다.
각황전 앞 석등 상대석 및 상륜부 |
상대석은 석등의 주요 기능이라 할 수 있는 불을 밝혀두는 부분으로, 옥개석과 화사석으로 이뤄져있다. 불을 피우는 화사석은 팔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8면 중에 4면에 네모나게 길쭉한 창을 뚫어서 불을 밝혔을 때 사방으로 빛이 퍼져나가게 했다. 창이 뚫리지 않은 나머지 4면에는 특별한 장식은 없다. 석등의 지붕인 옥개석도 팔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큼직하게 조성돼서 안정감과 함께 장중한 느낌을 준다.[9] 지붕의 처마 끝 8개의 모서리마다 귀를 만들어놨는데 소실된 부분 없이 모두 잘 남아 있다. 옥개석 위에는 상륜부(相輪部)[10]가 올라가 있는데 노반-앙화-보개-보주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이 역시 본래의 화려한 원상태를 거의 잘 보존하고 있다. 다만 석등의 전체적인 크기는 장중함을 넘어서 육중하다 싶을 정도로 거대하여 보는 이를 압도하는데, 막상 상대석 부분에 비하여 중대석부터 아랫 부분은 상대적으로 다소 빈약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1]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대단히 좋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현전하는 한반도의 고대 석등 중에서 가장 거대한 작품이면서도 역시나 장중한 각황전에 압도되지 않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12] 석등에 새겨진 자체의 장식들도 정교하며 화려한 조각미를 보여줌과 함께[13] 웅건하면서도 위풍당당한 위용을 보인다는 점에서[14] 통일신라를 대표할 만한 걸작 석조예술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그 가치를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석등의 상륜부 ~ 상대석 쪽은 오랫동안 부식과 균열이 심한 상태로 알려져 2023년부터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 옮겨져 보존 처리에 나섰으며, 현재 각황전 앞에 남아있는 하단부도 2024년부터 현지에서 보존처리에 들어갈 전망이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화엄사각황전 앞 석등
-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 두산백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 한국의 석등: 통일신라시대 고복형 석등
4. 국보 제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1]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기 전에는 장육전이라는 이름이었다가, 이후 재건하면서 각황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출처:
한국의 석등 - 통일신라시대 고복형 석등
[3]
중대석은 석등의 기둥돌을 뜻한다. 간주석(竿柱石)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4]
참조:
한국의 석등 - 상대석,
한국의 석등 - 화사석
[5]
이를 상대연화석이라고도 한다.
[6]
참조:
한국의 석등 - 간주석
[7]
이런 이유에서 상부하대석을 하대연화석이라고도 한다.
[8]
참조:
한국의 석등 - 하대석
[9]
출처:
한국의 석등 - 통일신라시대 고복형 석등
[10]
이를 머리장식이라고도 한다.
[11]
출처:
두산백과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2]
출처:
한국의 석등 - 통일신라시대 고복형 석등
[13]
출처:
두산백과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