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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77호 | |
<colbgcolor=#315288>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粉靑沙器 印花菊花文 胎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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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토도자공예 / 분청 |
수량/면적 | 2개 |
지정연도 | 1974년 7월 9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15세기) |
1. 개요
粉靑沙器 印花菊花文 胎壺. 조선 세조 재위 시기에 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화(印花) 분청사기 2점.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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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국보 제177호는 항아리 어깨에서부터 만자문대(卍字文帶)와 중연판문양대(重蓮瓣文樣帶)를 상감으로 새겨넣고, 그 다음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국화문양대(菊花文樣帶)를 두르고 있다.
고려 말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한국의 분청사기는 세종연간인 1418~1450년경에 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세조 연간을 주축으로 한 1450~1470년경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15세기의 도자기, 분청사기와 백자 특히 세조 재위 시기에 세조의 명으로 완성된 인화(印花) 분청사기는 당시의 불교중흥과 맞물려 극한의 세련됨을 자랑하였고 이로 인해 분청사기계의 백미로 통하고 있다. 분청사기인화문귀대접, 15세기 조선의 얼굴 분청사기
이 인화국화문 태항아리는 조선 세조 연간(1455-1468)에 절정기를 맞이한 인화(印花) 기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자료로, 15세기 중엽 인화문(印花文) 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에 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177호
분청사기로 만든 태(胎) 항아리로, 1970년 고려대학교 구내에서 건축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태 항아리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내항아리와 외항아리로 되어 있다. 내·외 항아리 각각에 뚜껑이 있으며, 높이 26.5㎝, 입지름 9㎝, 바닥지름 9.5㎝인 내항아리와 높이 42.8㎝, 입지름 26.5㎝, 밑지름 27.6㎝인 외항아리로 되어 있다.
외항아리 안에는 흙이 3분의 2쯤 차 있고, 내항아리는 짚 망태기에 넣어져 외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내항아리 안에는 태(胎)와 태를 싸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 썩어 변질된 채로 남아 있으며 엽전 2닢이 들어 있었다. 외항아리는 풍만하고 내항아리는 홀쭉하다. 외항아리의 무늬에는 어깨에서부터 卍자무늬, 연꽃무늬, 국화무늬로 둘렀으며, 몸통 전체에 국화무늬를 찍어 놓았고, 몸통 아래부분에도 어깨 부위와 같은 연꽃 무늬로 띠를 둘렀다. 내항아리는 뚜껑에 육각형 무늬가 있으며, 몸통에는 국화 무늬가 가득 차 있다.
이 항아리들은 15세기 중엽 인화문(印花文) 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 중에 하나이다.
외항아리 안에는 흙이 3분의 2쯤 차 있고, 내항아리는 짚 망태기에 넣어져 외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내항아리 안에는 태(胎)와 태를 싸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 썩어 변질된 채로 남아 있으며 엽전 2닢이 들어 있었다. 외항아리는 풍만하고 내항아리는 홀쭉하다. 외항아리의 무늬에는 어깨에서부터 卍자무늬, 연꽃무늬, 국화무늬로 둘렀으며, 몸통 전체에 국화무늬를 찍어 놓았고, 몸통 아래부분에도 어깨 부위와 같은 연꽃 무늬로 띠를 둘렀다. 내항아리는 뚜껑에 육각형 무늬가 있으며, 몸통에는 국화 무늬가 가득 차 있다.
이 항아리들은 15세기 중엽 인화문(印花文) 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