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1:42:43

수부타이

수부타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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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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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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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태조기(太祖紀)」 2권 「태종·정종기(太宗定宗紀)」 3권 「헌종기(憲宗紀)」
패아지근 철목진 패아지근 와활태 · 패아지근 귀유 패아지근 몽가
4·5·6·7·8·9·10·11·12·13·14·15·16·17권 「세조기(世祖紀)」 18·19·20·21권 「성종기(成宗紀)」 22·23권 「무종기(武宗紀)」
패아지근 홀필렬 패아지근 철목이 패아지근 해산
24·25·26권 「인종기(仁宗紀)」 27·28권 「영종기(英宗紀)」 29·30권 「태정제기(泰定帝紀)」
패아지근 애육려발육팔달 패아지근 석덕팔랄 패아지근 야손철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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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아지근 화세랄 패아지근 도첩목이
37권 「영종기(寧宗紀)」 38·39·40·41·42·43·44·45·46·47권 「순제기(順帝紀)」
패아지근 의린질반 패아지근 타환첩목이
※ 48권 ~ 105권은 志에 해당. 106권 ~ 113권은 表에 해당. 원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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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4db1> 114·116권 「후비전(后妃傳)」 ||
광헌익성황후 · 소자황후 · 흠숙황후 · 정절황후 · 소예순성황후 · 남부이 · 정자정의황후 · 불루칸 · 선자혜성황후 · 수케시리 · 장의자성황후 · 장정의성황후 · 바부칸 · 정유휘성황후 · 바부샤 · 부다시리 · 다리예테미쉬 · 다나시리 · 바얀후투그 · 보현숙성황후 · 현의장성황후 · 휘인유성황후 · 선의숙성황후 · 소헌원성황후
115권 「예종등전(睿宗等傳)」 117권 「별리고태등전(別里古台等傳)」
타뢰 · 진금 · 감마랄 · 답랄마팔랄 별리고태 · 출적 · 독랄 · 아홀도 · 관철보화 · 첩목아불화
118권 「특설선등전(特薛禪等傳)」 119권 「목화려등전(木華黎等傳)」
특설선 · 패독 · 아랄올사척길홀리 목화려 · 박로출 · 박이홀
120권 「찰한등전(察罕等傳)」 121권 「속불태등전(速不台等傳)」
찰한 · 찰팔아화자 · 출적태 · 진해 · 초내태 · 오야이 · 갈사맥리 속불태(1) · 안축이 · 외답아 · 박라환 · 초사
122권 「파이출아이특적근등전(巴而朮阿而忒的斤等傳)」
파이출아이특적근 · 철매적 · 안찰아 · 암목해 · 풍숙안 · 석리검부 · 삭직돌로화 · 석아길사 · 합산납
123권 「포지아등전(布智兒等傳)」
포지아 · 소열태초올아 · 활활불화 · 배연팔도로 · 아술로 · 소고아 · 아랄와이사 · 초아 · 야포감복 · 조아가반 · 순지해 · 점철발도아 · 겁겁리 · 탑불이아 · 직탈아 · 월리마사 · 날고랄 · 아아사란 · 합팔아독 · 애모
124권 「탑본등전(塔本等傳)」
탑본 · 합랄역합적북로 · 탑탑통아 · 악린첩목이 · 이정(李楨) · 겁렬속가 · 망가산아 · 맹사속
125권 「새전적섬사정등전(賽典赤贍思丁等傳)」 126권 「안동등전(安童等傳)」
새전적섬사정 · 포로해아 · 고지요 · 철가 안동 · 염희헌
127권 「백안전(伯顏等傳)」 128권 「아추등전(阿朮等傳)」
팔린백안 아출 · 아리해아 · 상위 · 토토흡
129권 「내아팔적등전(來阿八赤等傳)」 130권 「철리등전(徹里等傳)」
내아팔적 · 뉴린 · 아랄한 · 아탑해 · 사도 · 이항 연지길태철리 · 불홀목 · 토별연완택 · 아로휘살리
131권 「속가등전(速哥等傳)」
속가 · 낭가알 · 망올태 · 오로적 · 완자도(2) · 백첩목아 · 회도 · 역흑미실 · 배항
132권 「항홀사등전(杭忽思等傳)」
아속항홀사 · 보로합답 · 옥와실 · 맥리 · 탐마적 · 발도아 · 앙길아 · 합랄태 · 사전 · 첩목아불화
133권 「탑출등전(塔出等傳)」
탑출 · 배연 · 야한적근 · 엽선내 · 탈력세관 · 홀날출 · 중희 · 단지아 · 찰랄아태탈환 · 실리백 · 패란해 · 겁렬 · 암백 · 야속태아 · 석도아
134권 「철길사등전(撒吉思等傳)」
철길사 · 월합내 · 석반 · 철련 · 애설 · 활활 · 독홀로 · 당인조 · 타아적 · 화상 · 유용 · 가로납답사 · 활리길사 · 소운석탈홀련 · 알라사 · 타라태 · 야선불화
135권 「철가술등전(鐵哥朮等傳)」
철가술 · 탑출 · 탑리적 · 탑해첩목아 · 구아길 · 홀도 · 패아속 · 월거련적해아 · 아답적 · 명안 · 홀림실 · 실랄발도아 · 아속철리 · 갈랄 · 걸태 · 탈인납 · 내만태화상
136권 「합랄합손등전(哈剌哈孫等傳)」 137권 「백찰한등전(伯察罕等傳)」
합랄합손 · 아사불화 · 배주 백찰한 · 곡추 · 아례해아 · 혁혁저아이정 · 탈열해아
138권 「강리탈탈등전(康里脫脫等傳)」 139권 「내만태등전(乃蠻台等傳)」
강리탈탈 · 연철목아 · 멸아길태백안 · 마찰아태 · 탈탈 내만태 · 타아지 · 타이직반 · 아로도 · 뉴적해
140권 「별아겁불화등전(別兒怯不花等傳)」 141권 「태불화등전(太不花等傳)」
별아겁불화 · 하유일 · 철목아탑식 · 달식첩목이 태불화(太不花) · 찰한첩목아
142권 「답실팔도로등전(答失八都魯等傳)」 143권 「마조상등전(馬祖常等傳)」
답실팔도로 · 경동 · 야속 · 철리첩목아 · 납린 마조상 · 노노 · 자당 · 아영 · 소운석해애 · 태불화(泰不華) · 여궐
144권 「답리마등전(答里麻等傳)」 145권 「역련진반등전(亦憐真班等傳)」
답리마 · 월로첩목아 · 복안철목아 · 성길 · 복수 · 도동 역련진반 · 염혜산해아 · 월로불화 · 달례마식리
146권 「야율초재등전(耶律楚材等傳)」 147권 「장유등전(張柔等傳)」
야율초재 · 점합중산 · 양회중 장유 · 사천예 · 사천상
148권 「동준등전(董俊等傳)」 149권 「야율유가등전(耶律留哥等傳)」
동준 · 엄실 야율유가 · 유백림 · 곽보옥 · 석천응 · 야율독화 · 왕순(王珣)
150권 「석말야선등전(石抹也先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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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권 「설탑랄해등전(薛塔剌海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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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권 「장진형등전(張晉亨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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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권 「유민등전(劉敏等傳)」
유민 · 왕즙 · 왕수도 · 고선 · 왕옥여 · 초덕유 · 석천린 · 이방서 · 양환 · 가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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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충 · 장문겸 · 학경 요추 · 허형 · 두묵 송자정 · 상정 · 조자량 · 조벽
160권 「왕반등전(王磐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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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권 「양대연등전(楊大淵等傳)」 162권 「이홀란길등전(李忽蘭吉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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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권 「이덕휘등전(李德輝等傳)」
이덕휘 · 장웅비 · 장덕휘 · 마형 · 정사렴 · 오고손택 · 조병
164권 「양공의등전(楊恭懿等傳)」
양공의 · 왕순(王恂) · 곽수경 · 양환 · 양과 · 왕구 · 위초 · 초양직 · 맹반린 · 상야 · 이지소
165권 「장희등전(張禧等傳)」
장희 · 가문비 · 해성 · 관여덕 · 조갑랄 · 주전 · 공원 · 주국보 · 장립 · 제병절 · 장만가노 · 곽앙 · 기공직 · 양새인불화 · 선비중길 · 완안석주
166권 「왕준등전(王綧等傳)」
왕준 · 수세창 · 나벽 · 유은 · 석고산 · 공언휘 · 채진 · 장태형 · 하지 · 제병절 · 맹덕 · 장영실 · 석말구구 · 초정 · 번즙 · 장균 · 단신저일 · 왕석랄 · 조굉일
167권 「장입도등전(張立道等傳)」
장입도 · 장정진 · 장혜 · 유호례 · 왕국창 · 강욱 · 장초 · 여질 · 담자영 · 왕운
168권 「진우등전(陳祐等傳)」
진우 · 유선 · 하영조 · 진사제 · 진장경 · 조여표 · 요천복 · 허국정
169권 「하인걸등전(賀仁傑等傳)」
하인걸 · 가석랄 · 유합라팔도로 · 석말명리 · 사중온 · 고휴 · 장구사 · 왕백승
170권 「상문등전(尙文等傳)」
상문 · 신도치원 · 뇌응 · 호지휼 · 왕이용 · 창사문 · 장소 · 원유 · 장방 · 학빈 · 고원 · 양식 · 오정 · 양덕규
171권 「유인등전(劉因等傳)」 172권 「정거부등전(程鉅夫等傳)」
유인 · 오징 정거부 · 조맹부 · 등문원 · 조원용 · 제이겸
173권 「최빈등전(崔斌等傳)」 174권 「요수등전(姚燧等傳)」
최빈 · 최욱 · 엽이 · 연공남 · 마소 요수 · 곽관 · 협곡지기 · 유갱 · 야율유상 · 학천정 · 장공손
175권 「장규등전(張珪等傳)」
장규 · 이맹 · 장양호 · 경엄
176권 「조백계등전(曹伯啟等傳)」
조백계 · 이원례 · 왕수 · 왕의(王倚) · 유정(劉正) · 사양 · 하약우 · 조사로 · 유덕온 · 울지덕성 · 진기종
177권 「장사명등전(張思明等傳)」 178권 「양증등전(梁曾等傳)」 179권 「하승등전(賀勝等傳)」
장사명 · 양원규 · 장승 · 장몽해 · 진호 양증 · 유민중 · 왕약 · 왕결 · 송도 · 장백순 하승 · 양타아지 · 소배주
180권 「야율희량등전(耶律希亮等傳)」 181권 「원명선등전(元明善等傳)」 182권 「장기암등전(張起巖等傳)」
야율희량 · 조세연 · 공사회 원명선 · 우집 · 게혜사 · 황진 장기암 · 구양현 · 허유임 · 송본 · 사단
183권 「왕수성등전(王守誠等傳)」 184권 「왕도중등전(王都中等傳)」
왕수성 · 왕사성 · 이호문 · 패출로충 · 이형 · 소천작 왕도중 · 왕극경 · 임속가 · 진사겸 · 한원선 · 최경
185권 「여사성등전(呂思誠等傳)」 186권 「장정등전(張楨等傳)」
여사성 · 왕택민 · 간문전 · 한용 · 이직 · 개묘 장정 · 귀양 · 진조인 · 성준 · 조감 · 장저
187권 「오고손양정등전(烏古孫良楨等傳)」 188권 「동단소등전(董摶霄等傳)」
오고손양정 · 가로 · 녹로증 · 공사태 · 주백기 · 오당 동단소 · 유합랄불화 · 왕영 · 석말의손
189·190권 「유학전(儒學傳)」
조복 · 장수 · 김이상 · 허겸 · 진력 · 호일계 · 황택 · 한택 · 동서 · 안희 · 호장유 · 웅붕래 · 대표원 · 모응룡 · 정저손 · 진부 · 동박 · 양재 · 유선 · 한성 · 오사도 · 주문규 · 주인영 · 진려 · 이효광 · 우문공량 · 합랄로백안 · 섬사
191·192권 「양리전(良吏傳)」
담징 · 허유정 · 허즙 · 전자 · 복천장 · 야율백견 · 단직 · 암도랄 · 양경행 · 임흥조 · 관음노 · 주자강 · 백경량 · 왕간 · 노기 · 추백안 · 유병직 · 허의부
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이백온 · 석규 · 유합랄발도 · 임지 · 야율특말 · 보바르 · 합랄보화 · 유천부 · 소경무 · 장환 · 이보 · 이제 · 곽가 · 저불화 · 주희동 · 변침 · 교이 · 안유 · 왕사원 · 양박 · 조련 · 손총 · 석보 · 성소 · 양승 · 납속랄정 · 백안불화적근 · 번집경 · 전보암철리 · 주당 · 섭병 · 유경손 · 유술조 · 계완택 · 추려 · 패라첩목아 · 팽정견 · 왕백안 · 유준 · 타리불화 · 조야준대 · 진군용 · 복리아돈 · 조해 · 위중립 · 보안불화 · 민본 · 배주 · 조홍의 · 정옥 · 황후 · 백첩목이 · 질리미실 · 박새인불화 · 정호례
197·198권 「효우전(孝友傳)」
왕윤 · 곽도경 · 소도수 · 곽구구 · 장윤 · 전개주 · 영저구 · 필야속답립 · 번연 · 유덕천 · 곽회 · 공전 · 장자기 · 진걸아 · 양일 · 장본 · 장경 · 원선 · 조육 · 호광원 · 진소손 · 조일덕 · 왕사총 · 철철 · 왕응초 · 정문사 · 왕천 · 곽전 · 양호 · 정문충 · 소경조 · 호탁 · 손수실 · 이자경 · 종기 · 조영 · 오호직 · 여병 · 서옥 · 윤신 · 유정양 · 유통 · 장왕구 · 장사효 · 두우 · 장수 · 손근 · 장공 · 자여도 · 왕용 · 황윤 · 석명삼 · 유기 · 유원 · 축공영 · 진사효 · 강겸 · 호반려 · 왕사홍 · 하종의 · 합도적 · 고필달 · 증덕 · 근병 · 황도현 · 사언빈 · 장소조 · 이명덕 · 장집 · 위경익 · 탕림 · 손억 · 석영 · 왕극기 · 유사경 · 여우 · 주락
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 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설불태를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4db1><tablebgcolor=#004db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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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준(四駿)
무칼리 보로클 보오르추 티라운
사구(四狗)
젤메 수부타이 제베 쿠빌라이

<colbgcolor=#004db1> 몽골 제국군 총사령관
[ruby(ᠰᠥᠪᠡᠭᠡᠳᠡᠢ, ruby=Sübegedei)] [ruby(ᠪᠠᠭᠠᠲᠥᠷ, ruby=Baɣatur)]
수베게데이 바가토르
파일:Subegedei(1989).jpg
⟪몽골비사⟫에 수록된 삽화, 1989[1]
씨족 오량카이([ruby(ᠤᠷᠢᠶᠠᠩᠬᠠᠢ, ruby=uriyangqai)])[2]
부족 자르치고드([ruby(ᠵᠠᠷᠴᠢᠭᠣᠳ, ruby=J̌arčiɣud)])
작위 1206년 → 천호장([ruby(ᠮᠢᠩᠭᠠᠲᠣ, ruby=mingɣato)] [ruby(ᠵᠢᠨ, ruby=in)] [ruby(ᠨᠣᠶᠠᠨ, ruby=noyan)])[3]
1229년[4] → 몽골 제국군 총사령관 ([ruby(ᠶᠡᠬᠡ, ruby=yeke)] [ruby(ᠵᠠᠩᠴᠦᠨ, ruby=J̌angJ̌un)])
이름 <colbgcolor=#004db1> 중세 몽골어 수베게데이([ruby(ᠰᠥᠪᠡᠭᠡᠳᠡᠢ, ruby=sübegedei)])
현대 몽골어 수베에데이(Сүбээдэй)
한자표기 速不台(속불태), 速不臺(속불대), 雪不台(설불태)[5]
하남왕(河南王), 충정(忠定) 등
출생 1175년
파일:몽골 국기.svg 부르칸 칼둔 산, 헹티 아이막, 몽골
사망 1248년 (향년 73세)
파일:몽골 국기.svg 톨 강, 울란바토르, 몽골
가족 아버지: 자르치고다이([ruby(ᠵᠠᠷᠴᠢᠭᠣᠳᠠᠢ, ruby=J̌arčiɣudai)])[6]
형: 젤메([ruby(ᠵᠡᠯᠮ᠎ᠡ, ruby=J̌elm-e)])
아들: 오량카다이([ruby(ᠤᠷᠢᠶᠠᠩᠬᠠᠳᠠᠢ, ruby=uriyangqadai)])[7]
손자: 아조([ruby(ᠠᠵᠣ, ruby=aJ̌u)])[8]

1. 개요
1.1. 칭호
2. 생애
2.1. 종군 이전2.2. 호라즘 침공2.3. 금나라 정벌2.4. 유럽 원정에서의 맹활약과 죽음
3. 평가4. 건강 및 철수레에 대한 이견5. 매체에서
5.1. 드라마
5.1.1. 칭기즈 칸
5.2. 소설
5.2.1. 크로니클 레기온
5.3. 게임

[clearfix]

1. 개요

"펠트천이 바람으로부터 칸을 보호하듯 제가 칸의 모든 적을 막겠나이다."
수부타이([ruby(ᠰᠥᠪᠡᠭᠡᠳᠡᠢ, ruby=Sübegedei)])는 몽골 제국 개국공신이자 3명의 카간을 섬긴[9] 몽골 제국의 장군이다. 우량카다이의 아버지이다.

그는 칭기즈 칸이 가장 신임하던 장수들인 사준사구 중에서 맹장형인 4구 중의 한 명으로, 《 몽골비사》에는 용감한 수부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유럽 침공 과정에서 사실상 주치 울루스 몽골-타타르의 멍에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수부타이는 금나라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넓은 전선에서 역사에 기록된 것만 해도 32개의 나라를 정복하거나 멸망시키고 61번의 회전에서 승리했는데, 활동 반경과 군사적 업적 측면에서는 세계사 전체를 찾아봐도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장수이다.

1.1. 칭호

수부타이의 이름은 해외에서도 유독 어러 가지 변형[10]이 많은 편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수부타이'이다. 그러나 사실 '수부타이'라는 이름은 중국 한자 발음인 速不台 (Sù bù tái)를 그대로 읽은 중국식 발음으로, 실제 이름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몽골어 'Сүвээ'(수베에)와 'дэй'(데이)[11]가 합쳐진 이름으로, 이 중 'Сүвээ'(수베에)의 중세 발음과 몽골 문자 표기법[12]이 '수베게'이기 때문에 당대 그의 이름은 '수베게데이'가 된다. 현대 들어서는 중간의 '게' 발음이 장음으로 대체되어 '수베에데이'라고 표기된다. 여담으로, 만주족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 만주 문자[13]로 편찬된 《몽고원류》에서도 수부타이의 이름을 수베게데이(Subegedei)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확실히 몽골비사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이다.

'Сүвээ'(수베에)[14]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의 옆구리[15]" 또는 "산, 성벽, 건물 등의 옆면"을 의미하는데, 공통적으로는 무언가의 옆면을 의미한다. 흔히 "수베에를 찌르다(сүвээ рүү хатгах)"와 같은 용법으로 쓰이는데, 이는 직역하면 "옆구리를 찌르다"라는 의미이지만 실제 뉘앙스는 "약점을 찌르다"에 더 가깝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дэй'(데이)의 경우 '~하는 남자(혹은 ~가 있는 남자, ~의 남자)'라는 의미로 남성의 이름에만 붙는 접미사로, 단어와 인물을 붙이는 역할을 하는데, 차가타이, 오고타이, 살리타이 등의 인명에 들어가는 그것과 완벽히 같다.

또한, 수부타이에게는 당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가토르'라는 칭호가 반드시 따라붙는데, 바가토르는 '용감함'과 '영웅'을 합친 의미이다. 때문에 수부타이의 실제 이름과 칭호는 '수부타이'가 아닌 '수베게데이 바가토르'이며, 현대 몽골어 발음으로는 '수베에데이 바아타르'이다.

2. 생애


2.1. 종군 이전

우량카이족 출신으로, 사준사구의 일원이자 칭기즈 칸 초기 파티의 2인자였던 우량카이 젤메의 아우였다. 숲속 부족 출신이라 하여 기마술을 장성하여 배웠다는 설이 있는데, 이 또한 비만설과 같은 낭설로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 따르면[16], 우량카이족은 삼림 우량카이, 우량카이 두 부족으로 나뉘며, 수부타이와 젤메는 명확히 후자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삼림 부족 출신이 아니었으며, '우량카이'족은 삼림 우량카이와 다르게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의 한 부족이라고 구분하여 기록했다. 또한 삼림 우량카이족 또한 사는 영역이 삼림 지역일 뿐 명확히 유목 생활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7] 즉 삼림 우량카이이든 우량카이든 모두 어린 시절부터 유목 생활, 즉 말타기를 했으며, 수부타이가 장성한 후에야 말타는 법을 배웠다는 것 또한 근거 없는 낭설이다.[18]

어머니는 수부타이를 낳다가 사망했으며, 아버지 자르치고다이는 대장장이였다.[19] 젤메에 이은 막내로 가업인 대장장이를 이어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략 14세 때 형인 젤메와 또 다른 형제 차오르칸과 함께 테무진 칸의 카마그 몽골 군대에 입대했다. 그때부터 테무진 칸의 막사에서 각종 시중을 드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스럽게 테무진 칸 막하 장군들의 전략 및 전술회의에 배석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20] 이로 인해 어릴 때부터 전략/작전 수준의 관점으로 전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각 및 이해력이 길러졌을 것이라는 것. 이는 향후 베수트 제베라는 명장의 부관으로 복무하며, 정교한 전술적 능력을 흡수해 압도적인 전공을 세운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러 전공을 올린 형이나, 제베 같은 명장들에 비하면 당시 경험은 조금 부족했던지 수부타이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지휘할 때 칭기즈칸이 수부타이를 아끼면서도 걱정하는 뉘앙스의 조언들을 했던 기록도 존재한다.[21] 위에서도 언급되었던 '숲속 부족 출신이라 말을 타는 법을 장성하고 나서야 배웠다.'라는 설은 이 기록을 오해한 것으로 추측된다. 칭기즈칸 입장에서는 수부타이가 다른 지휘관들에 비하면 경험이 적으니, 본격적으로 지휘에 나설 때 여러 조언을 했던 것이 와전된 것으로 추측된다.[22]

1204년, 테무진 칸이 동 나이만족의 타양 칸과 싸운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철륜차로 산맥을 돌파하여, 적진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메르키트족의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1206년 몽골 초원이 통일되자 천호장에 임명되었다. 형 젤메는 통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2.2. 호라즘 침공

칭기즈 칸의 서정군에 제베[23]와 함께 참전하여 호라즘 제국을 공격, 당시 제7대 술탄이었던 알라 웃 딘 무함마드[24] 2세를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몰아넣어 죽게 했으며, 몽골로 귀환하는 김에 전리품을 좀 더 챙겨 가자고 해서 이란, 캅카스의 여러 도시와 루시 남부의 공국들을 쓸어버리면서 공략했다. 크림 반도에서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군을 격파하기도 했으며,[25] 루시 공국들의 연합군 8만명을 격파하기도 했다( 칼가강 전투. 이 무렵 스승인 제베가 귀환 도중 사망.). 이때 루시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무너져, 나중에 있었던 본격적인 바투의 동유럽 원정 때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되었다. 수부타이가 러시아에서 돌아오자 그의 나이를 걱정해서 칭기즈 칸은 그로 하여금 후방에서 쉬게 하려고 했지만 수부타이는 칸이 전선에 나서는데 어떻게 자신이 뒤에서 쉬고 있겠냐며 거부했다.

2.3. 금나라 정벌

그러나 금나라를 정벌하던 도중에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게 되는데, 1231년 당시의 금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던 완안진화상이 이끌던 금나라 군대와 맞붙은 도회곡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한 것이다. 완안진화상은 그의 뒤를 쫒아 추격전을 벌였다.[26] 그러나 실패도 잠시, 끝내 1233년 금나라의 도읍인 변경을 함락하여 금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2.4. 유럽 원정에서의 맹활약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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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 유럽 원정에도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는데 총사령관인 바투의 실책과 무능력까지 메꿔가며[27] 큰 공을 세운 뒤에 귀환했다. 당시 러시아 제공국을 거의 초토화시켰고, 레그니차 전투 사요 강 전투에서 각각 3~50,000명 가량의 폴란드/ 튜튼, 헝가리 군세를 전멸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사요 강 전투는 패퇴하는 헝가리군 수 만명을 수일 간 포위 기동으로 추적, 학살했다. 유럽 지역에 남아있는 몽골에 대한 공포는 이 전역들에 기반한 것이다.[28] 명목상의 총사령관은 바투였으나, 실제로 해당 전역들을 주관한 것은 수부타이였으며, 이로 인해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던 도중, 몽골 본토에서 오고타이 칸의 병사 소식이 알려지자 본토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 참가하기 위해 회군하게 되었다. 이후 대칸의 자리에 오른 구유크 칸은 그를 중국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귀환 중 병사했다. 서방 원정 당시 이미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쇠약해져 말을 못 타게 되긴 했었다고. 몽골의 대칸 3대[29]를 섬긴 백전노장으로서 수명도 72세로 중세 몽골인 치고는 꽤나 장수한 편이었다.

사후 그의 우량카이 일족은 몽골 제국 및 원나라의 4대 명문 중의 하나로 권세를 떨치게 된다. 나머지 세 가문은 무칼리의 잘라이르, 보오르추의 아를라트, 티라운의 술두스였다. 특히 그의 아들인 우랑카다이와 손자인 아쥬도 몽골 제국의 명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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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잡는 수부타이의 초상화.

그의 군사능력은 위대하며 일반적인 인간이 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생애 동안 32개의 나라를 정복하거나 멸망시켰으며, 역사에 정확히 기록된 것만 61번의 회전에서 승리했다.[30] 수부타이는 평생 그가 만난 여진족의 금나라, 한족의 남송, 탕구트족의 서하, 몽골계와 튀르크계의 각 유목 부족, 중앙아시아 중동의 아랍, 이란, 튀르크 계열 십수 개 국가, 동슬라브족의 러시아, 남슬라브족의 불가리아, 서슬라브족의 폴란드, 마자르족의 헝가리, 조지아족의 조지아, 아르메니아족의 아르메니아의 군대들을 현지에서[31] 모조리 격파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티베트(토번)의 가르친링처럼 1개 제국과 격전을 벌이거나, 또는 조선의 이순신, 금나라의 완안진화상, 남송의 악비처럼 본국에서 완벽한 방어전만 펼쳤으면서도 최고의 명장으로 대우받는 인물이 세계 역사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수부타이의 전적이 얼마나 넘사벽인지 알 수 있다.

전술적 역량과 신기술에 대한 활용능력도 정점급이라고 평가받는다. 당시 유목민이던 몽골군은 변변한 성을 쌓아본 적 조차 없고 견고한 성채를 공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공성 작전의 기초는 물론이고 투석기와 같은 기본적인 공성병기조차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그러나 수부타이는 수 년간 전투를 거치며 노획한 공성병기를 분석해 적재적소에 활용하였고 천재적인 응용력을 보여 공성전에서도 탁월한 성적을 냈다. 역사 속의 많은 명장들이 신무기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다 실책을 냈던 것을 보면 수부타이는 당시 시대는 물론 현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창의적이었던 장군인 셈이다. 심지어 금나라 기술자들을 과감히 군대로 편입하는 정치력까지 갖고 있었다.

몽골군의 세계 정복전 중에서도 수부타이는 고려 전선보다는 중국과 서방 정벌에서 많이 활약했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다른 장군보다 낮은 편이다. 한국 한정으로는 차라리 여몽전쟁에 참여한 살리타가 더 유명하다. 한국어로 구글에 검색했을 때 살리타가 훨씬 결과가 많고, 뉴스에 언급되는 빈도 수도 훨씬 높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부타이의 활약상이 인터넷 등 많은 매체에서 알려지면서 한국에서의 수부타이의 유명세가 옛날보다는 높아졌다.

하지만 직접 침략을 당한 서양 및 중동에서는 칭기즈 칸과 거의 동급으로 악명이 높다. 공식적으로 미국 《타임즈》에서 선정한 세계 전쟁사상 정복전쟁에서 가장 뛰어나고 강력했던 장군 및 군인 순위 1위로 등극해있으며, 세계사 최강의 정복자 2위[32]에도 등극했다. 세계사 관련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책 《 What if》에서는 역사상 가장 무시당한 장군, 군인, 용장, 명장으로 꼽히기도 했다.

4. 건강 및 철수레에 대한 이견[33]

《몽골비사》에 철수레에 관한 언급이 2회 등장하는데, 모두 수부타이에 관한 내용이다. 그로 인해 일각에서는 수부타이만 철수레를 탔다는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비만 당뇨설을 제기하는데, 이는 논란이 있는 주장이다.

수부타이의 체격이 비대했다는 내용은 《몽골비사》에도 없고, 별도로 당시에 기록된 사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철수레 사용에 대한 해석으로 비만설이 최초로 제기된 저서는 리처드 퍼시벌 리스터(Richard Percival Lister)가 집필한 《The Secret History of Genghis Khan》 : London: Peter Davies, 1969.이다. 하지만 해당 저서에는 비만에 대한 인용 출처가 없고, 별다른 근거 내용 또한 찾을 수 없다. 작가가 원래 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쓰던 사람으로,[34] 수부타이의 비만설은 작가적 상상 혹은 해석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이 책을 근거로 후대에 수부타이의 비만 및 당뇨설과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낭설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의학계의 보편적 이론은 비만과 상당수 성인병의 주요 원인을 과도한 육식보다, 필요 이상의 정제 탄수화물과 지속적인 고당류 및 악성 콜레스테롤 섭취로 본다. 따라서 육식 위주의 식습관으로 인해 비만과 당뇨에 걸렸을 것이라는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본문의 글처럼 수부타이는 당시의 몽골인치고 장수한 편인데, 이것이 13세기 몽골의 의료 환경에서 당뇨환자였다면 과연 가능했을 것인지도 살펴볼 부분이다.[35][36]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된 《몽골비사》의 원문을 보면 수부타이만 철수레 혹은 철윤차를 타고 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몽골비사》의 메르키트족 추적에 관한 부분을 보면 "소의 해에 테무진은 수부타이의 군대를 '테무르 테르겐'으로 무장시켜 톡토아베키의 아들들과 그 추종자들을 쫒게 했다."[37]라는 구절로, 수부타이만 철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내용이 아니다. 또한 이 '테무르 테르겐'의 해석이 애매하여, 철수레 혹은 철골 전차 등으로 내용이 다른 형태로 해석한 책들이 존재한다. 철골 전차로 해석한 르네 그루세는 험한 지역과 협곡에서 사용된 특수 전차의 의미로 번역했다. 이 경우 수부타이만 탄 것이다 하더라도, 숲속 부족 출신설을 차용하여 비교적 기마술이 부족했을 수도 있는 수부타이를 위한 배려였다고 가정하여도, 비만과 당뇨로 철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38]

또 철수레로 해석한 쪽에서는, 물자 수송용 수레를 험지에서의 내구성 때문에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의 나무 수레는 나무를 구하기 힘든 초원에서 유지 보수에 난점이 많았으나, 대장장이의 아들인 수부타이가 철테를 두른 수레바퀴 등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냐는 것. 그렇기 때문에 철수레와 수부타이가 같이 언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수부타이는 대장장이 아들 출신답게, 새로운 기술 도입 및 운용에 적극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 예로 중국 및 중앙아시아, 러시아 지역의 대장장이와 기술자들을 휩쓸다시피 동원하여 모든 전역에 데리고 다녔다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또, 위에 언급된 사요 강 전투에서 헝가리군 석궁병들의 거센 반격을 제압하기 위해 투석기를 활용하여 공격했다.[39] 이런 내용들을 살펴보면 수부타이와 철수레에 대한 언급은 수부타이의 기술 수용에 대한 적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40]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는 철수레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소해, 즉 612[/1217]년에 쿠두 및 그의 형제들을 치기 위해 수베테이 바하두르를 군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병사들을 위해 많은 수레를 준비하고 [그것을] 쇠못으로 단단하게 하여, 돌 위에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했다."[41][42] 위 철수레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 수레를 내구성을 위해 철제 부품으로 보강했다는 것과, 병사들을 위한 것으로 수부타이만 타고 다닌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비만인 수부타이를 위해 철수레를 제작해 홀로 타고 다녔다는 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수부타이가 중앙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지휘한 전역들의 기동 거리가 1~2,000 km에 육박하고, 1,600 km에 달하는 거리를 칭기즈 칸의 소환으로 홀로 여행했다는 기록들을 봤을 때, 당시 기술로는 평소 승차감이 극도로 열악했을 철수레를 타고 이동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즉 철수레는 부대 차원에서 특수 목적 혹은 수송용으로 운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수부타이의 비만 및 당뇨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5. 매체에서

5.1. 드라마

5.1.1. 칭기즈 칸

중국 드라마 <칭기즈 칸>에선 칭기즈 칸이 호라즘을 발라버리고 돌아갈 때 부하들이 "수부타이는 어쩌고요?"라고 묻자 별 걱정도 안 하고 그냥 돌아가 버린다. 물론 수부타이의 행적을 보면 걱정 안 해도 되긴 했지만 말이다.

5.2. 소설

5.2.1. 크로니클 레기온

라이트 노벨 '크로니클 레기온'에서 주인공의 정체가 수부타이인 것으로 추측된다.

5.3. 게임

5.3.1. 크루세이더 킹즈 2

몽골 제국의 가신으로 등장하며, 1241년 시나리오에서는 킵차크 칸국의 카안인 바투 휘하의 칸이다. 형인 젤메도 몽골제국 가신으로 등장한다.

5.3.2. 징기스칸 시리즈

  • 코에이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대활약하는데, 칭기즈 칸 본인 다음으로 전투력이 강하게 묘사된다.
    • 징기스칸 3 원조비사에서는 전투력이 A인 반면 지휘력이 C인 애매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몽골기병 지휘시에 지휘력이 A나 B이면 기동력 15를 모두 쓸 수 있는 반면 C는 기동력이 14가 되기에 이동거리도 짧아지고 한 턴에 쓸 수 있는 명령 수도 줄어든다. 통상 공격과 궁시 공격은 기동력 3 소모에 돌격은 5 소모이기에 모두 15의 약수로 떨어지기에 기동력 14는 공격 4번하면 기동력이 2가 남아 뭘 해볼 명령이 없어 굉장히 애매해진다. 때문에 전투력은 낮아도 지휘력은 높은 젤메보다도 활용하기 애매한 면모가 있다. 한국판에서는 이름을 스부타이라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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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과 3에 출연, 정17/전93/지44에 등용/기,돌,복 BBSE의 능력치로 전투력과 근접전 특기와 적성이 우수하지만 다른 능력치가 암울하다. 정치 지모 저평가도 그렇지만 전투력도 그의 행적에 비하면 너무나 아쉬운 수치이다. 그래도 능력치 배분이 짠 이 게임에서 전투력 93이면 같은 세대 세계구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능력치라 일반적인 상황이면 전투 원툴에 낮은 지모로 수많은 변수 발발조차 감안할 만한 강점이어야 하지만. 문제는 이 게임의 적폐병종이자 수부타이가 소속된 몽골의 주력인 궁기병을 쓰려면 연사 특기가 필수에 그 외에 중요한 능력치가 지휘 병력>궁병 적성>전투력>기동특기 순이라 연사도 없는데다 일반 장수에 궁병 적성까지 낮은 수부타이는 쉽게 말해 시스템빨을 더럽게 못 받는다.
      전술한 이유로 수부타이를 제대로 운용하려면 전투 경험을 쌓아[43] 최소한 연사 특기를 얻게 해 주고 가능하면 궁병도 A이상으로 올려주는 것이 좋다.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전투력 60대인 쥴치타이가 '훨씬' 강캐인 촌극이 벌어지고 같은 조건으로 경험을 쌓아준다면 친족 장수인 차가타이와 비교하여 일장일단을 따지는 수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해줄 필요가 없는 사기캐이 몽골 고원에는 존재하고 심지어 얘들은 지모도 높아 단점이 사실상 없거나 자잘한 수준이다. 실제 역사에서 수부타이의 업적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물이 날 지경.
      정치력이 바닥을 기지만 등용 특기가 있어서 재수 좋으면 국가를 멸망시킨 후에 FA로 풀린 수많은 재야의 우수한 장수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또 다른 메리트로는 수명이 길어서 장기간 사용 가능하다. 열전에서 출몰년도가 ???? 년 ~ ???? 년으로 되어있고, 출생년도는 에디터로 뜯어보면 1173라고 나온다. 명백한 고증 오류. 웃긴 점은 유저들이 만든 시나리오에서도 수부타이의 생몰년도가 전혀 수정되지 않는다.[44]
      참고로 수부타이의 아들 우량카다이와 손자 아술도 수부타이처럼 전투 원툴로 나온다.

5.3.3. 도미네이션즈

몽골족 울록(도미네이션즈)의 추가 정보에서 언급된다.
[1] 삽화 왼쪽에 작성된 문구는 "수베게데이 바가토르는 오량카이 성을 가진 칭기스의 4명의 장수 중 한 명"이라는 의미이다. [2] 오랑캐의 어원이 되는 부족으로, 부족명의 의미는 <선두를 이끄는>이라는 의미이다. 7세기부터 역사에 기록된 유서 깊은 부족인데, 기록에 따르면 전장의 선두에서 업적을 남긴 바가토르가 많아 오량카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현재도 후손들이 몽골의 바얀 오르기, 울란바토르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3] 몽골제국 건국 후 88명의 천호장 중 52번째 천호장에 해당한다. [4] 오고타이 칸 즉위 후 하사 받은 작위. [5] 원사(元史)》 <열전> 9권에서 사용한 표기. 《원사》는 그 특성상 몽골계 인물을 대거 다루었는데 워낙 서둘러 편찬된 탓에 몽골 인명의 한자 표기를 통일하지 않는가 하면, 같은 이름을 다르게 표기한 것을 별개의 인물로 착각하여 한 사람에 대한 열전을 두 편이나 쓴 경우도 있다. 수부타이도 그런 경우로, '速不台'라는 표기와 '雪不台'라는 표기를 서로 다른 인물로 착각하여 <열전> 8권에서 '速不台'라는 이름으로 다룬 것을 9권에서 또다시 '雪不台'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다. [6] 대장장이로, 칭기즈 칸의 부족인 키야트 보르지긴과 본래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젤메를 테무진의 부하로 바치기 위해 예수게이 바가토르를 찾아간 바가 있다. [7] 대리국을 멸망시켰으며, 1차 베트남 원정의 총사령관이었다. 1차 원정에서 당시의 수도인 탕롱을 점령하고 초토화시켰으나, 쩐 태종이 도망간 이후 베트남 지역의 습도와 더위, 풍토병, 여기에 더해 특유의 숨바꼭질 게릴라 전술로 시간이 지연되자 수도를 통제할 현지 조달 자원이 없다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8] 양양 공방전의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으로, 남송의 대몽항쟁 전선을 무너트려 사실상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또한, 쿠빌라이의 쿠데타를 바얀과 함께 적극 지지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9] 칭기즈 칸, 오고타이 칸, 귀위크 칸. 임시 대칸으로 2년간 재위하였던 칭기즈 칸의 4남 톨루이까지 합치면 4명의 대칸을 섬긴 것이다. [10] Subetei, Subetai, Subotai, Tsubotai, Tsubodai, Tsubetei, Tsubatai [11] 모음조화로 인해 남성 모음이 앞에 올 경우 'дай'(다이)가 된다. [12] 몽골 문자는 시대의 흐름으로 구어가 바뀌어도 단어와 문법을 옛 형태 그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중세 고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3] 만주 문자는 몽골 문자에 몇 가지 문자 기호를 추가한 문자이기 때문에 읽는 방법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14] ᠰᠦᠪᠡᠭᠡ(수베게) [15] 뼈가 없이 내장이 노출된 부위 [16] 라시드 앗딘의 집사 1권, '부족지' 258페이지 '우량카트' [17] 최근까지의 우량카이족 후손들은 반유목 반정착 생활을 했는데, 봄부터 늦가을까지 유목과 식량을 비축해 두는 생활 양식을 보이며, 겨울철에만 정주지에 거주하며 지낸다. [18] 당대에 이미 우량카이, 삼림 우량카이는 모두 칭기스칸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젤메와 수부타이의 부족으로 나름 중용되었다. 만일 수부타이가 삼림 우량카이였더라도 숲속 부족이라 기마술이 약했다면 같은 논거로 젤메와 다른 삼림 우량카이족 남자들 모두 기마술이 떨어졌겠는가? 그랬다면 기병 위주의 몽골군에서 작전 수행에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며, 부족 대부분이 칭기스칸 휘하에서 복무하지 못했거나 중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19] 자르치고다이가 테무진이 고생하던 시절 식량을 제공해주고 여러 도움을 줬다는 설도 존재한다. [20] 원래 젤메는 테무진과 같은 달에 태어나, 아버지 자르치고다이가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에게 테무진의 노예로 바쳤다. 그러나 갓 태어난 테무진 키우기에도 벅찬 예수게이가 장성하면 보내라고 돌려보냈고, 예수게이 독살 이후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테무진이 장성하자, 예수게이의 죽음으로 약속 이행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젤메를 테무진에게 보낸다. 그로 인해 젤메는 테무진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그와 유사한 행적을 보인 동생 수부타이도 어릴 때부터 각별한 신임 속에 각종 군사 기술을 배웠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21] 이 조언은 원조비사에 있던 내용으로 칭기즈칸이 수부타이에게 이러한 조언을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22] 칭기즈칸이 시시콜콜하다 싶을 정도로 수부타이에게 조언을 자세히 했는데, 그만큼 칭기즈칸과 젤메, 수부타이 형제는 정말 친밀한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위의 수부타이의 과거사를 보면 단순한 부하와 주군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대부터 인연이 있던 사이였고 형인 젤메는 칭기즈칸의 목숨을 구해주기까지 했으니, 칭기즈칸이 여러모로 수부타이를 아꼈다고 봐도 될 듯하다. [23] 수부타이가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은 제베의 부관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타이치우드족에서 항복하여 카마그 몽골 측에 새로 합류한 제베의 뛰어난 실력을 파악한 칭기즈 칸은 그로 하여금 사실상 그보다 고참인 수부타이를 지도하게 하여 그의 포텐을 만개시키도록 이끌었다. 인재를 파악하고 그들의 사회상 지위에 상관없이 기용하는 칭기즈 칸의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24] 그의 아들이 파르완 전투에서 몽골군을 처음으로 패배시켰던 명장 잘랄 웃 딘이었다. [25] 이후 제노바 공화국에서 군대가 오자 수부타이는 이미 전리품은 다 챙겼으므로 퇴각한다. 이때 한 설에 의하면 시체를 성 안에 던져놓고 갔다고 한다. 다만 이는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해당 설은 출처가 매우 불분명한 허위사실이라는 평가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특히 이 내용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 실제로는 당시엔 크림 반도에 없었고 그저 당시의 카더라 통신에 의존해서 썼기에 해당사실의 신뢰성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 게다가 상식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그런식의 공격은 효과가 있기도 힘들다고도 과학자들은 이야기한다.(그나마 심리적인 공포 면에서는 효율이 있을수도 있지만 말이다.) [26] 이 기록은 《금사》 <이랄포아(移刺蒲阿) 열전>에 나와 있다. 1231년 1월, 수부타이가 동관을 공격했으나, 완안진화상의 충효군 1,000여명이 (이랄포아에게) 지원을 오자 몽골군이 퇴각했고, 금나라 군이 골짜기 입구(谷口)까지 추격하였다. 다만, 기록상 전투 과정과 피해 수치가 전혀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전략적 후퇴가 패배로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군사가 전멸할 정도의 대패를 당한 것인진 알 수 없다. 일단 지휘관인 수부타이는 잘 살아서 복귀하는데 성공했으나 공성군이 수성군의 역습에 상당히 먼 거리를 내쫒겼다는 점과 오고타이에게 크게 질책 당하고 옆에서 보던 툴루이가 그만 갈구라며 말렸다는 기록, 그리고 이후 몽골군의 작전이 툴루이가 설계한 새 작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들을 조합해보면 상당히 아픈 패배였던건 확실하다. [27] 바투가 모히 전투에서 엄청난 실책을 저질러 패배할 위기에 처하자 수부타이가 원군을 이끌고 구해줬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 바투가 능력이 딸렸음에도 현재까지 몽골인들에게 좋은 왕, 좋은 칸이었다고 인정받는 이유는 자신의 군사 지휘능력이 딸리는 걸 인정하고, 처음부터 수부타이에게 실질적 총사령관 역할을 넘겼다는 과감하고 왕다운 태도 때문이다. 사실 수부타이는 이 시점에서 몽골군의 레전드가 되어버려서 바투가 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예를 갖춰야 하는 레벨이긴 했지만. [28] 사요 강 전투 역시 바투의 실책으로 전세가 몽골군에게 불리해졌을 때 수부타이의 기가 막힌 전술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혹자는 바투가 병크를 저지를 것을 미리 알고 수부타이가 페이크 전술을 쓴 거라고까지 보기도 한다. [29] 칭기즈 칸, 오고타이 칸, 구유크 칸. [30] 회전(會戰, pitched battle)이란 두 군대가 적당한 장소에 결집해 ' 모 아니면 도'식으로 벌이는 전투를 말한다. 회전에서 승리한 횟수를 65라고도 한다. [31] 즉 홈그라운드 측이 가지는 이점마저도 극복했다는 의미이다. [32] 1위는 당연히 그의 주군. [33] 리처드 A. 가브리엘의 저서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Genghis Khan's Greatest General Subotai the valiant)의 일부 본문 인용 및 내용 참조. [34] 링크 참조. [35] 중세 몽골의 의술은 13세기 이전에는 샤머니즘과 유목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은 뜸요법, 정골요법, 외상에 대한 치료법, 사혈요법, 말젖을 이용한 마유주 요법 수준이었으나, 칭기즈칸 시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인도, 티베트, 중국 등과의 문화적 교류 및 풍부해진 임상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요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발전시켰고, 약물학이나 방제학 지식이 보다 심화, 발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행정으로는 1204년 의사에 대한 세금 면제, 1260년 국가적 보건행정기구 설립, 1272년 약품 유통에 관한 법률 정비, 1292년 중동지역의 약물 전문 연구 기관 회회약물원의 설치 등을 통해 의료 발전을 도모했다. -《몽골 전통의료의 현황 및 역사적 발달과정》:유왕근 참조 및 요약 인용. [36] 몽골의 의료 수준이 국가적 차원에서 정립되고, 체계적으로 발전된 것은 위 주석에서 나타나듯 인도와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또 중국, 티베트, 중동 등이 정복되며,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뒤에서야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략 1240~60년 사이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됐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1248년에 사망한 수부타이가 당뇨 환자였다면, 해당 제도와 약물학 등의 혜택을 그리 많이 받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37] 국내 번역된 사계절 출판사/유역수 역주의 《몽골비사》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그 소해(1205)에 칭기스 카한이 철제 전차를 가진 수베에테이를 톡토아의 아들들인 코도, 칼, 칠라온을 추격하도록 보내면서 수베에테이에게 명령을 받들게 하기를...", "...하고 명령을 내리고 추격하여 끝장을 낼 수 있도록 철제 전차를 만들어 소해(1205)에 출정하게 했다." [38] 고대에 사용된 전차( 채리엇)는 열악한 주행 성능과 승차감으로 주로 평지에서 운용되었고, 기병의 발전과 더불어 전장에서 도태된 물건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차량 완충 장치들의 초기 모델은 17세기에서나 조금씩 발명되었고,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자동차의 발전과 더불어 19세기부터 이루어졌다. 즉 수부타이와 그 부대가 사용한 '테무르 테르겐'에는 승차감과 주행성능을 개선시킬 완충 장치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따라서 당시 최고 수준의 기병을 보유한 몽골군에서 이미 도태된 전차를, 더욱이 사용하기 힘든 험지에서 운용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지 깊이 살펴볼 부분이다. [39] 이는 유럽 사서의 기록상 최초 혹은 초기에 기록된 야전에서의 공성병기 운용술에 해당한다고 한다. [40] 칭기스칸의 패배와 비극적 일화들조차도 사실 그대로 서술한 《몽골비사》의 성격상, 수부타이에게 비만 등의 문제가 있었다면 있는 그대로 명시했을 것이다. 즉, 철수레를 굳이 비만에 대한 은유나 암시로써 언급한 것인지 의문이다. [41] <칭기스칸기>(라시드 앗 딘의 《집사》2) 김호동 역주 / 293페이지 [42] 《집사》는 당대보다 조금 후대에 중동에서 쓰여진 특성상, 몽골 혹은 중국쪽 사서와 일부 차이가 있지만, 일 칸국의 가잔 칸의 요청으로 현재에는 구할 수 없는 자료와 학자들을 중국 및 몽골 등에서 지원받아 편찬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하여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난 역사서이다. [43] 정확하게는, 해당 전투 특기를 가진 장수를 포로로 잡으면 일정 확률로 특기를 배운다. 여기서 포로를 잡는다는 것은 해당 장수와 전투를 벌어서 잡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지만, 일하고 있는 장수를 잡아도 일정 확률로 배운다. 단, 도시에 있는 장수는 수성전을 치른 장수를 제외하면 해당사항 없음. [44] 솔직히 몽골제국이 주인공인 게임에서 수부타이 생몰연도도 날림으로 고증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싶다.